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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02020> 23회 | 24회 | 25회 | 26회 | 27회 | |
1984 로스엔젤레스 | 1988 서울 | 1992 바르셀로나 | 1996 애틀랜타 | 2000 시드니 | |
일본 | 미국 | 쿠바 (전승) | 쿠바 (전승) | 미국 | |
<rowcolor=#202020> 28회 | 29회 | 32회 | 34회 | 35회 | |
2004 아테네 | 2008 베이징 | 2020 도쿄 | 2028 로스앤젤레스 | 2032 브리즈번 | |
쿠바 | 대한민국 (전승) | 일본 (전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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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75 대륙간컵 | 1976 하를럼 베이스볼 위크 | 1976 세계 야구 선수권 | 1977 대륙간컵 | 1978 하를럼 베이스볼 위크 | |
김계현호 1975 | 1976 | 1976 | 김응룡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77년| 1977 ]] | 1978 | ||||
<rowcolor=#ffffff> 1978 세계 야구 선수권 | 1980 서울컵 | 1980 세계 야구 선수권 | 1981 월드 게임 | 1981 대륙간컵 | |
김응룡호 1978 | 1980 | 1980 | 어우홍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1년| 1981 ]]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1년/대륙간컵|1981 ]] | ||||
<rowcolor=#ffffff> 1982 세계 야구 선수권 | 1983 대륙간컵 | 1984 세계 야구 선수권 | 1984 LA 올림픽 | 1985 대륙간컵 | |
어우홍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 1982 ]] | 1983 | 한을룡호 1984 | 김청옥호 1984 | 성기영호 1985 | ||
<rowcolor=#ffffff> 1986 세계 야구 선수권 | 1987 대륙간컵 | 1988 IBAF 야구 월드컵 | 1988 서울 올림픽 | 1989 IBAF 대륙간컵 | |
성기영호 1986 | 김영빈호 1987 | 김병우호 1988 | 김충남호 1989 | ||
<rowcolor=#ffffff> 1990 IBAF 야구 월드컵 |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 1991 IBAF 대륙간컵 | 1993 IBAF 대륙간컵 | 1994 IBAF 야구 월드컵 | |
강문길호 1990 | 장순조호 1990 | 강문길호 1991 | 장순조호 1993 | 김충남호 1994 | |
<rowcolor=#ffffff>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 1995 IBAF 대륙간컵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 1998 IBAF 야구 월드컵 | 1999 IBAF 대륙간컵 | |
김충남호 1994 | 김병우호 1995 | 김충남호 1996 | 주성노호 1998 | 1999 | ||
<rowcolor=#ffffff> 2002 IBAF 대륙간컵 | 2003 IBAF 야구 월드컵 | 2005 IBAF 야구 월드컵 | 2006 IBAF 대륙간컵 | 2007 IBAF 야구 월드컵 | |
주성노호 2002 | 강문길호 2003 | 김정택호 2005 | 권영호호 2006 | 강문길호 2007 | |
<rowcolor=#ffffff> 2009 IBAF 야구 월드컵 | 2010 IBAF 대륙간컵 | 2011 IBAF 야구 월드컵 | 2015 아시아 야구 선수권 | 2017 아시아 야구 선수권 | |
김학용호 2009 | 김정택호 2010 | 천보성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11년| 2011 ]] | 윤영환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15년| 2015 ]] | 허세환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17년| 2019 ]] | |
<rowcolor=#ffffff> 2019 아시아 야구 선수권 | 2023 아시아 야구 선수권 | ||||
윤영환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19년| 2019 ]] | 정보명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23년| 2023 ]] | ||||
† 1998년이 분기점이 되는 이유는 KBO 리그 소속 선수 선발을 책임지는 KBO가 참여하기 시작한 대표팀이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이기 때문이다. | |||||
1998년 이후 A급 야구 대표팀 목록→ |
올림픽 야구 | |
<colbgcolor=#4d756b><colcolor=#ffffff> 종목 | <colbgcolor=#FCFCFC,#444444>야구 |
참가 인원 | 160명 |
참가국 | 8개국 |
기간 | 1996년 7월 20일 ~ 8월 2일 |
경기장 | 애틀랜타-풀턴 카운티 스타디움 |
1. 개요2. 경기장3. 참가국4. 예선 풀리그
4.1. 7월 20일4.2. 7월 21일4.3. 7월 22일4.4. 7월 23일4.5. 7월 24일4.6. 7월 25일4.7. 7월 27일4.8. 7월 28일4.9. 7월 29일4.10. 7월 30일
5. 결선토너먼트4.10.1. 1경기 : 미국 17 : 1 네덜란드 (7회 콜드게임)4.10.2. 2경기 : 이탈리아 1 : 12 일본 (8회 콜드게임)4.10.3. 3경기 : 호주 11 : 8 대한민국
4.11. 예선라운드 순위5.1. 준결승 1경기 : 니카라과 1 : 8 쿠바5.2. 준결승 2경기 : 일본 11 : 2 미국5.3. 동메달 결정전 : 미국 10 : 3 니카라과5.4. 결승전 : 일본 9 : 13 쿠바
6. 최종 성적7. 한국팀 관련8. 외국팀 관련9. 여담1. 개요
1996년 올림픽 종목으로 애틀랜타에서 7월 20부터 8월 2일까지 애틀랜타-풀턴 카운티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이전과 같이 대륙별 예선을 거치고 올라온 8개국이 경기를 치렀다.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 참가했던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으로, 아마추어 선수들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마지막 대표팀이기도 하다.[1] 당시 대표팀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문동환(현대 피닉스), 손민한, 진갑용(이상 고려대)을 포함한 이병규(단국대), 강혁(한양대), 김선우(이상 고려대), 조인성(연세대), 임선동[2] 등 대학 선수와 현대 피닉스의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대표팀 사령탑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김충남(연세대 감독)이 맡았고 코치로 장순조(경성대 감독), 조두복(고려대 감독), 최한익(현대 피닉스 감독)이 선임되었다.
2. 경기장
Atlanta–Fulton County Stadium |
애틀랜타-풀턴 카운티 스타디움 (52,000석) |
3. 참가국
팀 | 출전자격 | 출전확정일자 | 진출횟수 | 최근 출전 | 최고성적 | WBSC 랭킹 |
미국 | 개최국 자동진출 | 1990년 9월 18일 | 2회 | 1992 | 4위 | - |
쿠바 | 1995 팬아메리칸 게임 우승 | 1995년 3월 26일 | 2회 | 1992 | - | |
니카라과 | 1995 팬아메리칸 게임 준우승 | 1995년 3월 26일 | 1회 | 첫 출전 | 첫 출전 | - |
네덜란드 | 1995 유럽야구선수권대회 우승 | 1995년 7월 16일 | 1회 | 첫 출전 | 첫 출전 | - |
이탈리아 | 1995 유럽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 1995년 7월 16일 | 2회 | 1992 | 7위 | - |
일본 | 1995 BFA 아시아선수권 우승 | 1995년 9월 23일 | 2회 | 1992 | - | |
대한민국 | 1995 BFA 아시아선수권 준우승 | 1995년 9월 23일 | 1회 | 첫 출전 | 첫 출전 | - |
호주 | 1995 오세아니아-아프리카 PO 1위 | 1995년 12월 31일 | 1회 | 첫 출전 | 첫 출전 | - |
4. 예선 풀리그
당시 대표팀은 (쿠바는 어렵지만) 미국과 일본 중 한팀만 잡으면 메달획득은 가능할거라고 판단했지만,[3] 최종 성적은 1승 6패로 최하위였다. 대표팀은 이해 대회에서 네덜란드에게 11:3으로 승리한 것이 이 대회 유일한 승리였을 정도로 부진했는데, 당시 제대로 된 야구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이탈리아와 호주에게도 패하며 "아무리 아마추어라지만 너무한거 아니냐!"라는 반응을 얻었다. 이해 대회에도 일본 대표팀과의 맞대결이 있었는데 4대14로 7회 콜드게임을 당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였다.4.1. 7월 20일
4.1.1. 1경기 : 미국 4 : 1 니카라과
4.1.2. 2경기 : 쿠바 19 : 8 호주 (8회 콜드게임)
4.1.3. 3경기 : 일본 12 : 2 네덜란드 (7회 콜드게임)
4.2. 7월 21일
4.2.1. 1경기 : 대한민국 1 : 2 이탈리아
한국대표팀 라인업
선발투수 : 문동환
타선
1번 : 이병규(우익수)
2번 : 최만호(중견수)
3번 : 강혁(1루수)
4번 : 강필선[4](3루수)
5번 : 진갑용(포수)
6번 : 안희봉(지명타자)
7번 : 이동욱(2루수)
8번 : 조경환(좌익수)
9번 : 채종국(유격수)
본 경기에서 한국대표팀은 타선이 5안타 1득점으로 힘을 쓰지 못하며 1:2로 패배했다. 문동환은 8이닝 2실점 삼진 11개를 잡으며 호투했지만 완투패를 당했고 상대 이탈리아 투수인 로베르토 카발리스티[5]는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9이닝 1실점 완투승 거두었다.
4.2.2. 2경기 : 일본 7 : 8 쿠바 (10회 연장전)
4.3. 7월 22일
4.3.1. 1경기 : 네덜란드 16 : 6 호주 (8회 콜드게임)
4.3.2. 2경기 : 이탈리아 2 : 7 니카라과
4.3.3. 3경기 : 대한민국 2 : 7 미국
미국과의 경기에서 대표팀은 2:7로 패배했다. 당시 미국 대표팀에는 트로이 글로스, 브랜든 루퍼, 자크 존스, 크리스 벤슨,[6][7] 트래비스 리,[8] 제프 위버, R.A. 디키등이 포진되어 있었고 이중 한국전 선발투수로 등판했던 세스 그레이싱어[9]는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6번재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지명된 유망주였고 6이닝 7피안타 2실점으로 한국 타선을 막아내며 승리를 거두었다. 제프 위버가 나머지 3이닝을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았고 한국 대표팀은 손민한이 수비진들의 실책에 흔들리며 7이닝 6실점(4자책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타선에서는 4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한 강혁과 3타수 2안타 1볼넷을 기록한 진갑용이 유이한 멀티 안타를 치며 활약했다.
4.4. 7월 23일
4.4.1. 1경기 : 네덜란드 2 : 18 쿠바 (7회 콜드게임)
4.4.2. 2경기 : 니카라과 8 : 3 대한민국
니카라과와의 경기에서 선발 김선우가 3이닝 4실점, 문동환이 2이닝 4실점으로 각각 무너지며 3:8로 완패했다. 남은 경기에서 다 승리해야 4강이 가능하지만 쿠바, 일본 등과의 경기가 남아있어서 사실상 4강은 힘들어 졌다.
4.4.3. 3경기 : 호주 9 : 6 일본
4.5. 7월 24일
4.5.1. 1경기 : 미국 15 : 3 이탈리아 (7회 콜드게임)
4.5.2. 2경기 : 쿠바 14 : 11 대한민국
페드로 라조와 에두아르도 파레트, 호세 콘트레라스가 소속되어 있던 아마 야구 최강팀 쿠바와 맞붙은 대표팀은 의외의 난타전을 펼쳤고 최종 11:14로 패배했다. 한국 대표팀은 선발 사이드암 전승남을 비롯해 김선우, 오철민, 임선동, 김영수 등 5명의 투수를 투입했으나 김영수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난타를 당하며 실점을 했다. 누구하나 3이닝 이상 투구를 하지 못했다. 반면 타선은 강혁이 4타수 3안타 2타점 1볼넷, 안희봉이 3타수 2안타 3타점 1볼넷 등 진갑용과 백재호를 제외한 선발 공격진이 안타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4.6. 7월 25일
4.6.1. 1경기 : 니카라과 5 : 0 네덜란드
4.6.2. 2경기 : 이탈리아 12 : 8 호주
4.6.3. 3경기 : 미국 15 : 5 일본 (7회 콜드게임)
4.7. 7월 27일
4.7.1. 1경기 : 일본 13 : 6 니카라과
4.7.2. 2경기 : 이탈리아 6 : 20 쿠바 (7회 콜드게임)
4.7.3. 3경기 : 호주 5 : 15 미국 (7회 콜드게임)
4.8. 7월 28일
4.8.1. 1경기 : 네덜란드 3 : 11 대한민국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대표팀은 11:3으로 대회 첫승을 거둔다. 선발로 나온 조진호가 3회를 넘기지 못하고 2실점으로 강판 당했으나 이후에 나온 김영수와 4이닝 1실점으로 막은 전승남이 타선의 지원을 받고 잘 마무리 해서 쉽게 승리했다. 공격에서 5타수 3안타 3타점의 최만호와 5타수 4안타 3타점의 이병규가 이끄는 테이블 세터진이 공격을 이끌며 활약 했다.4.8.2. 2경기 : 쿠바 10 : 8 미국
4.8.3. 3경기 : 호주 0 : 10 니카라과 (8회 콜드게임)
4.9. 7월 29일
4.9.1. 1경기 : 네덜란드 8 : 7 이탈리아
4.9.2. 2경기 : 니카라과 7 : 8 쿠바
4.9.3. 3경기 : 대한민국 4 : 14 일본 (7회 콜드게임)
올림픽에서 열린 한일전.영상 3분 27초부터.당시 일본 대표팀은 후쿠도메 고스케, 마쓰나카 노부히코, 이구치 타다히토, 이마오카 마코토, 다니 요시토모[10]가 버티고 있었기에 올림픽 당시 대표팀이 가장 주목해야 할 경기로 꼽았다.
한국대표팀은 선발투수로 오철민이 등판했다. 그렇지만 1대0으로 앞선 3회, 오철민이 다니 요시토모에게 역전 2점홈런을 허용하면서 끌려가기 시작한다. 이후 후속투수 손민한이 1⅓이닝동안 4실점하며 무너졌고, 뒤이어 올라온 김선우가 6회 마쓰나카 노부히코에게 1점홈런 허용 및 1이닝 6실점(4자책)을 기록하는 등,[11] 투수진이 난타당하며 졸전 끝에 7회 4:14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다.
4.10. 7월 30일
4.10.1. 1경기 : 미국 17 : 1 네덜란드 (7회 콜드게임)
4.10.2. 2경기 : 이탈리아 1 : 12 일본 (8회 콜드게임)
경기 주요영상.4.10.3. 3경기 : 호주 11 : 8 대한민국
호주와의 경기에서 대표팀은 8:11로 패배했다. 초반 7:0 으로 앞서 있어 쉽게 이길 것 같았으나 4회초 선발 임선동이 흔들리며 대량실점의 빌미를 마련했고 뒤이어 나온 전승남도 불을 끄지 못하며 4회에만 대거 8실점으로 역전을 당해 경기에 흐름을 내주었다. 한국 대표팀은 이날 패배로 대회 최하위를 기록하며 쓸쓸하게 귀국해야 했다.4.11. 예선라운드 순위
팀 | 경기 | 승 | 패 | 득점 | 실점 | 승률 | 승차 | 승자승 | 비고 |
쿠바 | 7 | 7 | 0 | 97 | 49 | 1.000 | ― | ― | 4강 진출 |
미국 | 7 | 6 | 1 | 81 | 27 | .857 | ― | ― | |
일본 | 7 | 4 | 3 | 69 | 45 | .571 | 3 | 1승 0패 | |
니카라과 | 7 | 4 | 3 | 44 | 30 | .571 | 3 | 0승 1패 | |
네덜란드 | 7 | 2 | 5 | 32 | 76 | .286 | 5 | 2승 0패 | 조별예선 |
이탈리아 | 7 | 2 | 5 | 33 | 71 | .286 | 5 | 1승 1패 | |
호주 | 7 | 2 | 5 | 37 | 78 | .286 | 5 | 0승 2패 | |
대한민국 | 7 | 1 | 6 | 40 | 59 | .143 | 6 | ― |
5. 결선토너먼트
5.1. 준결승 1경기 : 니카라과 1 : 8 쿠바
5.2. 준결승 2경기 : 일본 11 : 2 미국
경기 주요영상.일본은 (미국선발 크리스 벤슨을 상대로) 오쿠보 히데아키, 이마오카 마코토, 다카바야시 다카유키[12] 등이 각각 홈런을 기록하면서 경기초반부터 앞서나갔고, 이후 미국의 후속투수들을 상대로도 마쓰나카 노부히코, 이구치 다다히토가 각각 홈런을 기록하는 등, 총 5개의 홈런으로 미국 마운드를 초토화시키면서 결승에 진출한다.
5.3. 동메달 결정전 : 미국 10 : 3 니카라과
5.4. 결승전 : 일본 9 : 13 쿠바
경기 풀영상.일본은 5회 마쓰나카 노부히코의 동점 만루홈런,링크. 경기후반인 7회와 9회 다니 요시토모의 연타석 홈런영상 6분 58초부터. 등으로 선전했지만, 경기는 쿠바의 승리로 끝난다.
쿠바는 결승전 승리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이어 올림픽야구 2연패 달성에 성공했다.
본 대회 결승전 헹가래 투수는 페드로 루이스 라조[13]이다.
6. 최종 성적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패 | 비고 | 최종 성적 |
쿠바 | 9 | 9 | 0 | 금메달 | ||
일본 | 9 | 5 | 4 | 은메달 | ||
미국 | 9 | 7 | 2 | 동메달 | ||
4 | 니카라과 | 9 | 4 | 5 | 4위 | |
5 | 네덜란드 | 7 | 2 | 5 | 2-0 | 조별리그 |
6 | 이탈리아 | 7 | 2 | 5 | 1-1 | 조별리그 |
7 | 호주 | 7 | 2 | 5 | 0-2 | 조별리그 |
8 | 대한민국 | 7 | 1 | 6 | 조별리그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우승 | |
두번째 우승 | 쿠바 |
7. 한국팀 관련
7.1. 대회 전 분위기
- 야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후,[14] 한국 야구대표팀이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이다. 당시 국내에서도 나름 메달획득 기대를 모았고, KBS와 MBC도 각각 하일성, 허구연 등 해설위원들을 미국으로 파견해 현지 생중계를 하기도 했다.
- 올림픽 직전해였던 1995년 기준
- 1996년 7월에 들어서서, 한국 야구대표팀은 올림픽을 대비해(한국시간 기준)
각종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은 거의 대등한 승부를 펼쳤었다.[17]
일정으로 움직였다.기사1.기사2
7.2. 대회 개막, 그리고 부진
- 4번~5번을 친 진갑용은 26타수 9안타 .346 1홈런 3타점, 6번 타자로 나선 조인성은 19타수 5안타 .263 2홈런 5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강혁은 미국의 선발투수였던 세스 그레이싱어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며 자신의 파워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 이병규 정도가 타자들 중 기대에 부응한 경우이다.
- 당시 진갑용이 경기 중에 포수-1루수-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등[19] 이해못할 장면들이 계속 나오자, 중계방송 중이던 방송사에 야구중계를 중단하라는 시청자들의 항의전화가 엄청나게 들어왔다고 한다.[20]
7.3. 부진 원인
- 황금세대라고 불렸던 92학번 스타들 중 조성민, 전병호, 차명주, 박재홍, 김종국, 이영우, 홍원기, 최기문 등등이 1996년에 프로로 진출함과 동시에 대표팀에서 빠져나가고, 그나마 남아있던 92학번 임선동마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지라 대회 전부터 불안한 예상도 많았다. 사실 올림픽 직전해인 1995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22] 당시도 이들 92학번들의 활약이 절대적이었으니,대만전.일본전.[23] 무리한 예상도 아니었다. 결국 92학번들을 대신해 주목을 모았던 손민한(93학번), 김선우(96학번) 등이 부진하면서 다시 한번 92학번들의 부재를 실감하게 되었다.
- 92학번들의 위력은 그들이 재학 중에 있었던 국제대회에서의 한국대표팀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다.[24]
- 92학번들이 빠져나간다면 그 빈자리는 94학번-95학번 등이 메워줘야 하는데, 하필이면 당시 (대학재학 중이던) 94학번-95학번 등은 역대급 골짜기세대였다.
이는 동나이대 선수들이 대학진학 대신 대거 프로행을 선택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 1975년생[41] : 김재현(프로행), 심정수(프로행), 이호준(프로행), 주형광(프로행).
- 1976년생[42] : 이승엽(프로행),[43] 임창용(프로행),[44] 정수근(프로행), 조현(프로행).
그나마 대학에 진학했던 초고교급 선수들은 부상에 시달리거나 성장이 더디었던 경우이다. 사실 95학번(1976년생) 세대는 고3 시절이던 1994년 캐나다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던 경력이었기에,1994년 대회 엔트리. 더욱 안타까움을 더했다.[45]
- 당시 엔트리에서도 골짜기세대를 체감할 수 있는데,링크. 20명 엔트리기준에 94학번(3학년)은 단 4명,[46] 95학번(2학년)은 아예 한명도 없었다.[47] 궁여지책으로 올림픽 당시 대학 1학년이던 96학번 김선우가 중요경기에 투입되었지만,[48] 최악의 투구를 보이면서 대체자원 역시 실패로 끝났다.
- 93학번은 타자 쪽에 강혁, 이병규, 진갑용, 최만호 등의 존재로 형편이 나았지만, 투수 쪽에는 노장진(프로행), 이대진(프로행) 등 우수투수들의 부재가 아쉽게 다가왔다. 그나마 투수 쪽에 남아있던 우수자원 손민한이 올림픽 본선에서 최악의 투구를 보였기에...
- 당시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임선동의 대표팀 발탁과,기사. 당시 대학 최고타자 중 1명이었던 김동주(고려대)의 대표팀 탈락이 나란히 논란이 되기도 했다.[50] 후술하겠지만, 김동주는 그 이듬해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투수진을 완전히 초토화시킴과 동시에 아시아를 제패했기에 더욱 아쉬움이 컸다. 상대적으로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김동주를 대신해 발탁된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부진했고, 특정학교 인맥/나눠먹기 논란도 있었다.
- 위에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당시 대표팀은 올림픽 직전 약 20일간 미국 현지에서 전지훈련를 가졌는데, 이 과정에서 무리가 왔다는 시각도 있다. 후일 이병규도 인터뷰에서, 길었던 전지훈련 일정 때문에, 막상 올림픽에 들어가서는 선수단의 체력이 떨어졌다는 언급을 했었다.
7.4. 대회 이후
- 대신 1997년 6월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에하라 고지 등이 포함된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이 때 김동주가 대회 내내 일본과 대만의 투수진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더더욱 김동주의 전년도 올림픽 엔트리 제외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 1998년 8월, 국제야구연맹은 긴급총회를 가지고 프로선수의 올림픽 출전 허가를 놓고 논의를 가졌는데 압도적인 표차이로 가결되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프로선수가 참여한 농구에 이어 올림픽에서 프로선수를 보게 된 종목이 되었다.
그 결과 199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국제대회에서 프로선수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단,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우 방콕 대회 때까지는 프로와 아마추어가 섞인 형태로 구성되었고,[52] 1999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53]ㅡ2000년 시드니 올림픽[54]부터 로스터에 프로선수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 애틀랜타 올림픽 멤버들 중, 10년 후인 2006년 WBC에도 참가하게 선수로는 손민한, 김선우,[56] 조인성, 진갑용, 이병규 등이 있다.
- 애틀랜타 올림픽 멤버들 중, 12년 후인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도 참가하게 되는 선수로는 진갑용이 있다.[57]
8. 외국팀 관련
- 본 대회에서 쿠바의 금메달에 공헌했던 쿠바의 투수 페드로 루이스 라조[58]는,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메달), 2004년 아테네 올림픽(금메달)에 연달아 출전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했고, 특히 한국과의 결승전에 구원투수로 등판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59] 그 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쿠바대표팀 주장이었던 에두아르도 파레트(유격수)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쿠바대표팀 멤버이다.
- 본 대회에서 일본의 은메달에 공헌했던 일본선수 몇몇은, 이후 프로(NPB)에 입단함과 동시에 프로선수 신분으로 한국과 국제대회에서 몇차례 대결하게 된다.
- 마쓰나카 노부히코 : 1999년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6년 WBC.
- 다니 요시토모 : 2003년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 후쿠도메 고스케 : 2003년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006년 WBC.
- 위에 언급된 마쓰나카 노부히코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다니 요시토모와 후쿠도메 고스케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하지만,
- 시드니 올림픽 : 일본 노메달.
- 아테네 올림픽 : 일본 동메달.
에 그치게 된다.[60]
- 또한 호주는 본 대회 은메달팀인 일본을 맞아서도 예선에서 승리했다. 비록 이런 선전에도 메달획득에는 실패했지만, 8년 후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일본과의 2차례 대결에서 모두 승리하는 등[63] 돌풍을 일으켰고, 최종적으로 (쿠바에 이어) 은메달까지 획득하게 된다.
9. 여담
- 애틀랜타 올림픽 기간과 겹쳐 KBO 올스타전이 잠실야구장에서 열렸는데,[64] 당시 올림픽에 쏠린 국민적 관심의 여파로 잠실야구장에는 불과 7000여명의 관중들만이 입장하면서 흥행참패를 겪는다. 그 이듬해부터 KBO 올스타전은 기존의 서울-부산 격년 개최 방식에서 벗어나 전국의 야구장들을 순회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고 이는 2020년대 현재까지도[65] 이어지고 있다.
- 본 대회에 참가했던 한국선수들 중, 훗날 KBO 1군감독에까지 오른 선수로는 이동욱 등이 있다.
[1] 아마추어 선수들만으로 구성된 마지막 대표팀은, 1998년 7월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대표팀이다. 그해 12월 방콕 아시안게임부터는 프로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가 허용하면서 실제로 프로선수들이 대표팀의 주축을 이룬다.[2] 임선동은 원래 1996년 2월에 졸업해야 했으나 졸업 이수 학점 미달로 졸업을 하지 못했다. 이와는 별개로 다이에 호크스와의 계약 건으로 올림픽 출전 자격이 되는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3] 1996년 9월 월간스포츠매거진 <루키>에 게재된 허구연 칼럼에 의하면, 올림픽 출국 직전 대한야구협회 관계자가 허구연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만만해했다고 한다.[4] 연세대 91학번 출신. 올림픽 당시는 실업팀 현대 피닉스 소속이었다. 올림픽 이후에는 상무를 거쳐 KBO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지만, 큰 활약은 펼치지 못하고 은퇴한다.[5] 이탈리아 야구리그 소속의 리미니 베이스볼팀에서 뛰는 선수였다.[6] 1999~2010년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며 70승 75패를 기록한 우완투수다. 올림픽 출전 당시는 클렘슨 대학교 소속이었다.[7] 일본과의 준결승에 선발등판했지만 패전투수가 된다.[8] 1998~2006년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했던 좌완투수다. 올림픽 출전 당시는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 소속이었다. 데뷔 당시 김병현과 애리조나에서 한솥밥을 먹었다.[9] 올림픽 3경기에 나서 3승으로 공동 다승왕.[10] 일본 유도의 여왕 다무라 료코(결혼후 다니 료코)의 남편으로 유명한 야구선수. 올림픽 당시 .421 4홈런 11타점으로 맹활약 했으며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에도 일본 대표팀에 차출되며 활약했다. 참고로 부인과 자신의 메달(은1개, 동1개)을 모두 합치면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로 총 6개의 올림픽 메달을 가지고 있었다.[11] 마지막투수로 등판한 선수는 문동환이다.[12] 다카바야시는 직전해인 1995년 9월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선리그 한국전에서, 임선동을 상대로 끝내기 희생플라이를 기록하면서, 일본의 우승에 공헌한 적이 있다[13] 약칭은 라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결승 한국전에도 구원투수로 등판했었다. 라조에 관한 더 자세한 사항은, 하단의 외국팀 항목 참조.[14] 야구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부터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렇지만 한국 야구대표팀은 1991년 9월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관계로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다.[15]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예선도 겸한 대회였다.[16] 9회말 시작 때까지는 2대1로 한국이 리드했으나, 9회말에 역전당한다. 이 경기에서 한국의 선발투수는 문동환이었으나, 경기 초반 2실점 후 조기강판당했고, 후속투수 임선동이 호투했으나 9회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패배했다.[17] 언급된 한일전 2경기 모두 임선동의 호투가 있었다.[18] 정확하게는 한미 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것이다.[19] 그 과정에서 수비실책도 다수 발생.[20] 1996년 9월 월간스포츠매거진 <루키>에 게재된 허구연 칼럼 중.[21] 경기에서도 지고 매너에서도 지다. 1996년 9월 월간스포츠매거진 <루키>에 게재된 허구연 칼럼 중.[22] 올림픽 지역예선도 겸한 대회였다.[23] 1995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당시는 (그 전까지 에이스였던 91학번 문동환보다) 92학번 임선동의 활약이 더욱 돋보였다. 하나 덧붙이자면, 92학번들 외에 93학번 이병규도 대만전에서 맹활약을 펼쳤다.[24] 1994년까지는 91학번인 문동환과 심재학의 맹활약도 함께 있었다.[25] 퍼스.[26] 우승 일본. 대신 전년도 바르셀로나올림픽 은메달팀인 대만을 2번이나 격파했고, 그 중 한번은 임선동의 1실점 완투승도 있었다.[27] 버팔로.[28] 우승 쿠바. 참고로 박찬호가 미국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다저스에 입단하는 계기가 되었던 대회이기도 하다.[29] 마나과.[30] 우승 쿠바. 결승 쿠바전은 조성민과 임선동이 이어던졌다. 참고로 준결승 일본전에서는 문동환의 완봉승으로 8대0 승리했다.[31] 히로시마 히로시마 시민구장.[32] 우승 일본. 결승 일본전은 91학번 문동환과 92학번 조성민이 이어던졌다. 아깝게 1점차 패배.[33] 후쿠오카 후쿠오카 돔.[34] 우승 쿠바. 참고로 쿠바전 당시 조성민의 호투가 있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계기가 되기도 한다.[35] 후쿠오카 후쿠오카 돔.[36] 우승 쿠바. 결승 쿠바전은 93학번 손민한과 92학번 조성민이 이어던졌다.[37] 쿠라시키.[38] 우승 일본. 참고로 결선리그 일본전에서 비록 1점차로 역전패하기는 했지만 투수 임선동의 호투가 인상적이었고, 이는 임선동이 다이에 호크스와 계약을 맺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39] 아바나.[40] 우승 쿠바.[41] 대학에 진학했다면 94학번.[42] 대학에 진학했다면 95학번.[43] 고교시절 이승엽은 탑클래스 투수였다. 물론 타자로서의 재능도 있었지만, 고교시절에는 투수로 더 유명했다.[44] 고교시절 임창용은 무명선수였지만, 나름 잠재성이 있었다고 한다.[45] 청소년대표+비청소년대표 포함 대학을 졸업한 95학번 전체로 범위를 넓혔을 때, 훗날 프로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는 타자 쪽의 홍성흔(고교시절 비청소년대표)이다. 상대적으로 투수 쪽은 박정진, 송신영 정도가 프로에서 불펜투수로 성공했고, 선발투수로 성공한 선수는 (대학 중퇴생) 황두성이 유일하다. 그리고 언급된 선수들 가운데, (박정진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청소년대표 경력이 없다. 결국 1994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들 중, 프로에서도 살아남은 95학번 혹은 1976년생 선수는 이승엽과 박정진 정도라고 할 수 있다(또다른 우승멤버인 김선우는 이들보다 한학년 아래인 96학번이다).[46] 투수 쪽은 조진호 단 1명이었다.[47] 반면, 92학번-93학번들 중 재능있는 선수들은 대학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각종 국제대회에서 활약을 펼쳤었다.[48] 김선우는 1994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한국 우승 당시, 고등학교 2학년 신분으로 대표팀에 발탁되었던 적이 있다.[49] 공교롭게도 부진의 시작이 실업팀 현대 피닉스 입단과 맞물린다.[50] 특히 허구연 해설위원이 이러한 점들을 많이 비판했다.[51] 이 대회에서 일본은 우에하라 고지와 다카하시 요시노부 등의 활약으로 쿠바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52] 프로 12명, 아마 10명.[53] 프로 17명, 아마 5명.[54] 프로 23명, 아마 1명. 참고로 아마추어 1명의 주인공이 바로 정대현이다.[55] 손민한은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획득으로 비로소 병역혜택을 받게 된다.[56] 김선우는 WBC 4강 진출로 비로소 병역혜택을 받게 된다.[57] 이병규는 2007년 12월에 펼쳐진 올림픽 아시아예선에 참가했고, 손민한과 김선우는 2008년 3월에 펼쳐진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에는 참가했지만, 이 3명 모두 8월 올림픽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했다.[58] 약칭은 라조. 쿠바리그 개인통산 200승 투수이기도 하며, 1996년 올림픽 당시는 쿠바대표팀의 최연소 선수였다고 한다.[59] 구원등판해 호투했지만, 6회 수비에서 한국의 이용규에게 쇄기 2루타를 허용하기도 했다.[60] 이후 일본 야구대표팀의 올림픽 첫 금메달은 2021년 도쿄 올림픽에 가서야 나온다.[61] 심지어 시드니 올림픽 당시 한국 야구대표팀은 프로올스타로 구성된 최정예멤버였음에도, 그 팀을 맞아 승리(5대3)한 것이었다.[62] 물론 2013년 WBC에서는 한국이 호주에 승리(6대0)한 적이 있다.[63] 특히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크리스 옥스프링의 호투 등에 힘입어 1대0으로 승리한 점이 인상적이었다.[64] 1996년 7월 23일.[65] 단, 2020~2021 시즌은 코로나19 여파로 올스타전이 열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