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993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창설~2000년) 2001년 이후 수상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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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타격상 제정 | 김동주 경남고 | 백인천 경동고 | 최관수 동산고 |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
조정일 성동고 | 정인성 살레시오고 | 이철화 부산고 | 김영생 대구상고 | 이광환 중앙고 |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
박용해 대구상고 | 오영복 대전고 | 김영신 대구상고 | 전장헌 선린상고 | 신중국 부산고 | |
1971 | 1972 | 1973 | 1974 | 1975 | |
정현발 경북고 | 정순명 충암고 | 김일권 군산상고 | 박명선 인천고 | 이효헌 마산상고 | |
1976 | 1977 | 1978 | 1979 | 1980 | |
임정면 마산상고 | 이만수 대구상고 | 김남수 신일고 | 김이수 부산상고 | 김건우 선린상고 | |
1981 | 1982 | 1983 | 1984 | 1985 | |
구윤 경북고 | 김성범 포철공고 | 한경수 군산상고 | 주은현 광주일고 | 김경기 인천고 | |
1986 | 1987 | 1988 | 1989 | 1990 | |
김현철 경북고 | 김훈 경남상고 | 곽상선 군산상고 | 정진식 경남고 | 강준기 공주고 | |
1991 | 1992 | 1993 | 1994 | 1995 | |
강혁 신일고 | 노상진 배명고 | 조현 신일고 | 김건덕 경남상고 | 박현철 광주일고 | |
1996 | 1997 | 1998 | 1999 | 2000 | |
박진형 경동고 | 신민기 경남고 | 백정훈 광주상고 | 수상자 없음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1997 |
LG 트윈스 등번호 3번 | ||||
김선진 (1990~1994) | → | 조현 (1995~1996) | → | 손지환 (1997~2003) |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번}}} | ||||
김상훈 (1994~1995) | → | 조현 (1997) | → | 김태룡 (1998~2002) |
해태/ KIA 타이거즈 등번호 33번 | ||||
김태룡 (1996~1997) | → | 조현 (1998~2001) | → | 장정석 (2002.6.16.~2002) |
한화 이글스 등번호 29번 | ||||
윈스턴 (2001.7.15.~2001) | → | 조현 (2002) | → | 조윤채 (2003) |
조현 曺炫 | |
출생 | 1976년 10월 4일[1] ([age(1976-10-04)]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신일고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5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LG) |
소속팀 | LG 트윈스 (1995~1996) 해태-KIA 타이거즈 (1997~2001) 한화 이글스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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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한국프로야구 선수다.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신일고 시절에는 1년 위의 선배들인 김재현, 조인성과 함께 팀 타선을 이끌었으며, 1993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만 3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 0.667, 6홈런 17타점이라는 맹활약으로 대회 MVP를 차지했고 그 해 이영민 타격상까지 수상했다.[2]1994년 황금사자기에서는 부산고와의 8강전에서 주형광을 상대로 홈런포를 가동하기 시작했고 광주일고와 준결승전에서는 만루홈런과 3점홈런으로 7타점을 쓸어담았다. 덕수상고와의 결승에서 4타수 4안타 3홈런 1 2루타를 기록하는 등 타격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조현은 계약금 1억 800만 원, 연봉 1,200만 원 등 총액 1억 2,000만 원을 받고 LG 트윈스에 입단하게 된다.[3]
2.2. 프로 경력
이미 앞서 고졸 신인 김재현의 맹활약을 지켜본 바 있는 구단과 팬들은 조현 역시 무리 없이 프로에 연착륙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조현은 데뷔 시즌인 1995년, 전반기에만 팀 내에서 가장 많은 9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기대를 충족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어퍼스윙이 높은 공에 대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노출되면서 슬럼프에 빠졌고, 결국 후반기에는 홈런을 한 개도 때려내지 못했다.[4] 이듬해인 1996년에는 레벨스윙으로 변화를 시도했지만 스윙폼이 흔들려 혼란만 가중시키며 0.212의 타율에 4홈런 21타점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고, 1996년 시즌이 끝난 후 동봉철과 송유석을 상대로 최훈재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었지만 해태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1998년 시즌 후 군에 입대했다가 전역 후 방출당했다.[5] 그리고 2002년, LG 시절 감독이었던 이광환 한화 이글스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에 입단해 기회를 노렸지만, 1군 6경기에 교체로 나와 1안타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고 결국 은퇴했다.3. 여담
-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 당시 전직 야구선수 브로커가 조모 씨인 걸로 밝혀져 네티즌들은 용의자 중 조현이 승부조작에 가담하지 않았을까하고 의심했지만,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공교롭게도 동명이인인 74년생 타자 조현도 LG에서 뛴 바 있다.
- 마구마구에서는 본명이 아닌 '조필현'이라는 이름으로 선수 카드가 등록되어 있다.
- 진짜로 조필현이라는 선수가 있는데 이 선수도 LG 트윈스 소속이긴 했다. 다만 조필현은 94년을 마지막으로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방출되어 두 선수가 동시에 뛰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이 선수도 마구마구에서 가명처리가 되어 '조영현'이라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 신일중 시절, 양승호 감독 지도하에 팀의 46연승 당시 멤버였다.
4. 관련 문서
[1] 실제로는 1975년생이라고 하는데 1974년생이라는 말도 있다. 중학교 시절 유급 때문에 나이가 바뀌게 된 것.[2] 사실 그 해 이영민 타격상 수상 예정자는 고교 최고 타율을 기록한 김재현이었으나, 신일고 졸업 예정인 연세대학교와의 가계약을 파기하고 LG와 계약해 버린 것에 화가 난 대한야구협회에서 수상 자격을 박탈한 것이다.[3] 조현이 받은 1억 2,000만 원은 당시 역대 타자 최고 계약금액이었다. 불과 몇 달 후 심재학, 김재걸 등이 이를 경신하긴 했지만.[4] 1995년 후반기에 조금만 힘을 더 냈다면 LG의 역사는 달라졌을것이다.[5]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이 술회하기를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의 보복으로 10승 투수였던 자신을 패전처리조로 내보낸 것도 모자라 타자에게 빈볼을 던지라고 지시했고 송유석은 백네트에 공을 던져 퇴장당했다고 한다. 더이상 해태에서 야구를 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LG 정삼흠 코치에게 부탁해 팀을 옮겼다고 밝혔다.[6] 김재현도 실제로는 1974년생이다. 조현이 1974년생이 맞다면 나이로는 동갑인셈[7] 당시 멤버들로는 이호준, 김경태, 조인성, 신경현, 채종국, 김재현, 손인호가 있었다. 투수가 이호준, 포수가 조인성이었는데 한국어로 대놓고 말로 사인을 교환했다고 이호준이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