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5:18:43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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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이후5. 증언
5.1. 최해식5.2. 김종모5.3. 장채근5.4. 송유석5.5. 정회열5.6. 김일권5.7. 이건열5.8. 박재벌5.9. 구한성5.10. 이순철
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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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6년 시즌 전 하와이 전지훈련장에서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김응용 감독과 유남호로 대표되는 코치진에게 집단으로 항명한 사건.

2. 배경

1996년 초반의 해태는 전년인 1995년 시즌을 끝으로 김성한이 은퇴하고 코치 연수를 받으러 주니치 드래곤즈로 떠나고 에이스 투수 선동열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선수로 이적하는 등 여러모로 전력유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1]

이런 상황에서 박건배 구단주는 선동열의 이적 협상을 문제삼아 노주관 사장과 이상국[2] 단장을 해임시키고 마의웅 사장을 임명한다.[3]

이렇게 프런트가 대대적으로 물갈이 되는 상황 속에서 구단 내부라고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응용 감독 역시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런 팀으로 우승을 해, 올해 기대는 접어둬."라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을 정도. 그러나 당시 해태는 방위병이었던 이종범이대진의 복무가 끝날 예정이었고 조계현, 이강철, 김정수, 최해식, 이순철, 홍현우, 이건열, 이호성, 박재용 등 핵심 선수들이 여전히 건재했기에 전력상에서는 타 팀에 밀리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프런트가 물갈이 되는 상황 속에서도 나름 평화로운 분위기가 유지 되고 있었고 그 분위기가 이어진 채 2월부터 하와이 호놀룰루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코치진이 선수들에게 잦은 폭언과 폭행은 물론 빨래까지 맡기는 등 시대착오적인 팀 분위기를 주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군기가 강한 해태라고 해도 분노가 쌓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고 이렇게 쌓인 분노가 터지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4] 심지어 원래는 코치가 선수들을 압박주는 그런 분위기가 없던 팀이 해태였기에 더 선수들이 실망을 하게 되었다.[5]

3. 전개

당시 코치였던 김종모의 증언에 따르면 아래 내용과 다른 부분[6]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 새벽 1시 30분
    1996년 2월 25일 새벽 1시 30분, 최고참인 이순철의 방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순철은 늦은 밤에 걸려온 전화에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코치진 중의 막내이자 이순철에게는 고교 후배가 되는 장채근 배터리코치였다. 당시 장채근 코치는 1995 시즌을 끝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해태 코치로 합류한 상태였는데 김응용 감독이 "선수들 밖에 못 나가게 잘 감시해라"라는 명령을 코치진들에게 내렸고 코치 중 막내인 장채근이 선수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부재를 확인했던 것이다. 이순철은 가뜩이나 밤 늦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 것도 짜증이 나는데 하필 전화를 건 사람은 본인의 후배인 장채근이었다는 점에서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봐. 장 코치? 아니, 지금이 몇 시인데 굳이 전화까지 해서 감시를 하냐" 라면서 짜증스러운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이쯤에서 끝났다면 그냥 잠깐 짜증나고 만 에피소드로 남았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안 끝났다는 거지만...
  • 아침 6시
    이순철은 지난 새벽에 있었던 감독과 코치진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화를 참으며 아침 산책[7][8]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유남호 수석코치가 이순철의 짜증을 감지하고 "이 자식... 뭘 그런 걸 갖고 성질내냐?"며 이순철의 뺨을 갈겨버렸다. 여기서 유남호는 자신이 이순철의 짜증을 감지하고 그를 풀어주기 위해 옆구리를 찔렀으며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름 풀어주려고 장난을 친 것인데 이순철이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자신이 이순철의 뺨을 갈긴 것이라며 이순철이 자신의 뺨을 때렸다며 이순철이 자신을 먼저 폭행해서 자신이 이순철을 때린 것이라고 발단은 이순철이라고 주장하지만 선수들은 아침에 갑작스럽게 유남호 수석코치가 이순철의 뺨을 때리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며 이순철은 유남호를 때린 적도 없다고 증언했다. 즉 코치와 선수간의 쌍방폭행이 아니라 코치의 일방폭행이라는 것이다.[9] 격분한 이순철은 산책길의 정반대 방향으로 씩씩거리면서 나갔고 선수들도 당시 주장이었던 김정수를 필두로 유남호에게 항의하기 위해 이순철을 뒤따라갔다. 해태 선수들이 이순철을 뒤따라 나선 것은 코치의 지시보다 선수단 내 위계질서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남호가 이순철의 뺨을 때린 이유를 밝힌 것도 항명의 이유가 되었는데 전날에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도 2~3분 정도 늦게 나왔기 때문에 때렸다는 꼰대 논리로 자신의 폭행을 정당화했기 때문이었다.
  • 아침 8시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간 선수들은 잔뜩 열 받은 상황이었다. 아예 "코치진의 버릇을 고치겠다"라는 생각으로 "훈련 거부하고 귀국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윤기두[10] 매니저에게 "코치들이랑 같이 못 있겠으니 여권을 내놓으십시오"라고 따진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응용 감독은 직접 식당에 나와서 "이렇게 썩어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비행기 표가 없으니 참아달라. 나 1년 만 더 하자.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라면서 선수들에게 눈물로 읍소한다. 감독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선수들도 조금은 마음이 약해졌고 당시 최윤범 운영팀장과 윤기두 매니저까지 나서서 설득하자 선수들은 "그래도 훈련은 하자." 라며 온건하게 대응한다.
  • 오후 1시
    선수단의 분위기는 개판이었지만 당시 하와이 훈련장에 출장 취재를 온 해태 출입기자들의 눈치도 보여서 억지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코치들이 정신 못차리고 "이 따위 놈들과는 훈련 할 생각 없다."라는 말을 하면서 훈련을 거부하며 결국 김응용 감독이 직접 펑고를 쳐주었다고 한다. 청백전의 선발은 강태원으로 정해졌으나, 강태원은 팔꿈치가 아프다고 하여 청백전은 이뤄지지 않았고 선수들은 식사를 위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 때부터 기자들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챘으나 당시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는데, 당시 기사 송고 시스템은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통해 전송되지 않던 시절인데다 당시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한 해태 구단 홍보팀은 하와이 출장을 온 기자들을 한데 모아서 하루종일 하와이 관광을 시켰다고 한다. 거기에 선동열이 2월 24일 모친상을 당했고 광주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던 터라 이쪽으로 취재진의 관심이 쏠린 것도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지 않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 오후 3시
    강압적인 팀 분위기 속에서 특히 많이 시달렸던 젊은 선수들은 호텔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순철은 자신의 저지른 사태가 확대되는 일이 생기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겉으로 보면 책임 회피처럼 보이나 이는 사실 이 사태를 대충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특히 강경파인 김정수, 이건열, 조계현, 송유석, 이강철, 홍현우는 귀국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분위기는 점덤 험악해지게 된다. 그러자 윤기두 과장이 나서 "팀이 이 사태로 분열되면 너희만 피해를 보게 되고 이 사건이 퍼지면 이순철은 야구계에서 영원히 매장될지도 모른다." 라면서 선수단을 설득했고 결국 이 설득이 먹혀 고참 선수들은 이를 수용해서 모두 저녁에 숙소로 돌아갔다.

상술한 사건 흐름으로만 보면 하루 만에 사건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데, 당시 코치였던 김종모가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로 이 사건은 일주일 넘게 갔었다고 한다.

4. 이후

선수와 코칭 스탭은 더 이상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훈련을 끝냈다. 김응용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하게 원성을 사던 김일권[11]을 2군으로 내렸다.

어느 고참 선수는 "저도 처자가 있는 몸이니, 잘 좀 부탁 드린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6년 해태는 3년만의 우승으로 체면을 살렸지만, 1996년 시즌 이후 김응용 감독과 타이거즈의 프런트는 가담한 선수들 모두에게 처절한 보복을 가했다.[12]
  • 이순철 : 1996년 당시 해태의 최고참이자 이 사건의 주동자였다.[13] 1996년 시즌은 그래도 어찌어찌 주전 외야수 자리를 지켰고 6차전에서 결승득점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7년에 2차 1라운드로 김창희가 입단하면서 급격히 자리를 잃었고,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일로 김응용 감독과 사이가 틀어졌고 삼성에 자유계약선수로 입단했으나 1년만에 다시 삼성에서 방출되면서 은퇴했다. 그 뒤 삼성코치로 2년간 있었다가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부임하자 해임[14]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1년에 연대 선배인 이광은의 부름[15]을 받고 LG 트윈스로 이적했으며, 코치를 거쳐 2004년에 이광환의 후임으로 LG 감독이 되지만 알다시피 6668587667을 이끌어냈다....라고 지금도 억까를 당하지만 실제 성적은 저중에 66이고 나머지는 후임자들 몫. 재임시 성적이 실망 스러운건 맞지만 앨팬들의 뒤끝에 20년이 지나도 억까중. 그 뒤 엠스플에서 1년간 해설을 했으며, 우리 히어로즈 수석코치로 1년간 재임했다. 다시 엠스플에서 2011년까지 해설을 하다가 2012년에 선동열을 따라서 15년만에 타이거즈에 수석코치로 돌아왔다. 실망스런 성적을 냈고, 결국 2년 만에 물러났다. 2014년부터 SBS 스포츠에서 해설을 하고있다. 물론 이후에는 이런 일들에 대해 모두 화해를 했고 자주 식사도 하며 다시 깍듯이 모시고 있다.
  • 송유석 : 송유석은 1995년 42경기 120이닝을 던지며 10승을 기록했으나 1996년에는 31경기 71이닝만 던지고 2승에 그쳤다.[16] 송유석의 증언에 따르면 포스트시즌를 앞두고 자신을 패전처리로 내보낸 다음 빈볼 사인을 냈고 위협구를 던지자 심판이 경고[17]했음에도 결국 백스톱에 공을 던지며 퇴장당했다고 한다. 송유석은 '아 이것이 하와이 항명의 보복이구나' '해태에서는 이제 끝이구나'를 직감하고 LG의 정삼흠 코치와 협의하여 결국 1996년 11월에 LG로 트레이드됐다. LG 구단에서도 불펜투수로 뛰면서 팀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적당히 잡아주는 좋은 모습을 보였고, 1999년에는 선수단 투표로 주장이 되었으나 시즌 후 구단과의 FA 협상에서의 이견·선수협 문제 등으로 LG 구단의 눈 밖에 나 버렸다. 결국 2001년 시즌 도중 한화에서 조용하게 은퇴했으며, 이후로는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18]
  • 이건열 : 1996년은 한국시리즈에 1루수로 출전하여 우승반지를 얻었지만, 1997년은 김응용 감독이 떠오르는 2년차 신인인 장성호를 주전 1루수로 밀어주면서 은퇴를 종용했다. 1997년에 방출되어서 은퇴했으며 김성한의 주선으로 군산상고-해태 선배인 김준환 감독대행이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에 SK에서 2군 코치를 했으나 SK 구단의 쌍방울 색채 지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물러났으며, 2001년 김성한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감독으로 취임하자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이후 2004년에 팀 선배였던 이순철을 따라서 LG 트윈스로 갔으며, 2006년까지 외야 수비코치를 맡았다. 다시 2007년에 KIA로 돌아오나, 서정환의 라인을 쳐 낼때 잘린다. 2008~2009년 시즌은 화순고 감독을 맡았으며 2010~2012년 시즌은 다시 기아에서 공무원 타격코치를 맡으면서 팬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2013년부터 동국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나름 괜찮은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타이거즈에 해준건 김호령을 추천 해준 것밖에 없다.[19]
  • 조계현 : 1996년 시즌은 16승 + 2점대 초반의 방어율로 호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1997 시즌은 3점대 후반의 방어율 + 8승으로 전년대비 부진했다. 본인이 언론에 직접 삼성으로의 이적을 요청하며 결국 4억원에 삼성으로 이적했다. 정작 거기서 불만 지르다가 방출되었고, 김인식 두산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으로 이적했다. 2000~2001시즌은 두산에서 팀의 베테랑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으며, 2002년은 KBS 해설, 2003년 ~ 2005년 시즌은 기아로 돌아와 투수코치를 했지만 투수진 발굴에 실패했으며 해임되었고 2006년 ~ 2009년 시즌에 선동열의 부름을 받아 삼성 투수코치로 갔으나 알다시피 조원수박차를 만들고 역시나 해임. 두산 베어스에서도 무능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2012년 ~ 2014년에 LG 수석코치로서는 나름 괜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5년부터 수석코치가 되어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20] 그 이후 KIA 타이거즈의 단장에 올랐다가 2021시즌 이후 경질되었다.
  • 정회열 : 1996년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되며 당시 주전이었던 최해식의 백업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순철 송유석 이건열 조계현 등과 함께 1996년 당시 항명 사건의 주범으로 찍혀서[21] 다음 해인 1997년에는 고작 11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결국 그 해 시즌 후 해태에서 방출된 뒤 삼성으로 이적했지만 1999년 시즌 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KIA에서 배터리 코치, 스카우트 팀장, 2군 감독, 1군 코치 등 다양한 보직을 맡았다. 그리고 아들이 KIA에 1차 지명을 받으며 입단했고 마무리 투수로 활약중이다.
  • 김정수 : 1996년은 선동열의 후임 마무리로 뛰면서 잘했지만, 1997년 ~ 1999년 시즌은 4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김정수를 빼면 좌완투수가 강태원 밖에 없었기에 계속해서 기용되었고 성적 자체가 기복이 심했어도 나이를 감안하면 성적이 괜찮았기에 계속 필승조로 등판했다. 한편, 1996년 항명 사건의 주동자 중 송유석,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이건열이 1996년~1997년 사이 타 팀으로 이적하거나 쓸쓸히 은퇴했지만 김정수는 어느 정도 사건 수습을 했었던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22]. 그 뒤 1999년에 FA를 신청했으나 구단에서 FA를 거부해, 울며 겨자먹기로 재계약했다가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SK에서 방출되어 한화 이글스로 갔으며, 좌완 불펜으로서 잘해 주었다. 2003년에 다시 SK로 와서 은퇴했으며, 그 뒤 2004년 ~ 2005년은 한화의 2군 투수코치, 그리고 2006년 이래로 계속 KIA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다만 키운 투수도 없고, 1군 코치시절의 삽질도 있는지라 철밥통 취급이다. 그리고 2020년에 드디어 타이거즈를 떠났다. 2022년 선운지구에 본인의 레슨장을 오픈했다.[23]
  • 유남호 : 코치진과 선수들과의 갈등의 중심이었던 유남호는 이후에도 해태에서 코치를 맡다가 김응용이 삼성으로 옮기면서 삼성의 수석코치를 맡게 되지만 김응용과의 마찰로 다시 KIA로 바뀐 타이거즈에 돌아오면서 2군 감독과 수석코치를 역임하게 된다. 2004년 김성한이 중도 퇴진하면서 감독대행으로 팀을 겨우 포스트시즌에 보내며 KIA의 정식 감독에 선임되었지만 2005년 꼴찌로 시즌 도중 경질되고 말았다.

5. 증언

이 하와이 항명 사건에 대해서 25년이 지난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최해식, 김정수, 송유석, 정회열(이상 당시 선수), 장채근, 김종모, 김일권(이상 당시 코치)가 각자의 관점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 말을 남겼다. 2023년 박재벌구한성도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짧게 이야기했다.

5.1. 최해식

원래 캠프때 당시 아침 6시에 기상을 하여 의무적으로 산책을 해야 했었다.[24]
사건 전 날은 캠프의 휴식일이었고, 최해식의 생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선수들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서[25] 놀고 있었는데, 코치들이 방마다 전화를 하고 그러다 보니 선수들은 화가 난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아침에 갑작스럽게 유남호 수석코치가 선수단 최고참이었던 이순철의 뺨을 때린 일이 이 사건의 발단이었다고 증언했다. 이 당시 김정수가 주장[26]이었는데, 유남호 수석코치가 이순철의 뺨을 때리자마자 바로 뛰어나갔다고 한다. 뺨을 맞은 이유도 전날에 술을 마신 건 아니었고, 2~3분 정도 늦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선수들은 훈련을 보이콧했다고 밝혔다.[27]

5.2. 김종모

당시 3년차 타격코치였던 김종모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중립인 입장이었으며, 포수 최해식, 코치 김일권도 연결되어 있다고 밝혔다.[28]
아침에 항상 산보를 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고, 7시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산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몰려오고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김종모가 걸어가고 있던 도중, 엘리베이터 앞쪽에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고 한다. 이후 유남호 코치가 서 있고, 이순철이 서 있는데, 갑자기 유 코치가 이순철에게 어퍼컷을 날렸고, 쌍시옷(ㅆ) 소리[29]가 들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김종모는 순간 아 이거 큰일날 상황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상황이 더 진행 되면 안 되니 뛰어 들어가서 빨리 수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빨리 쫓아가니 그 곳에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왜 선수들에게 잠 못 자게 늦게까지 전화를 하느냐라는 이야기를 하니 이후 욕이 나오고 이후 주먹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 상황을 본 선수들이 쭉 나오다가 그 장면을 보고 산보를 자기들이 뭉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 걸 산보를 할 때 원래는 오른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왼쪽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당시 코치들은 따로 갔는데, 선수들이 안 오니 기다리다가 화장실을 가면서 보니까 뒷쪽 문으로 선수들이 사복을 입고 나가고 있었다. 니들 훈련 안 해? 물어보니 선배님들이 이쪽으로 나오라는데요?라는 말이 나와 방에 갔다가 감독에게 상황 보고를 하니 뭐 이 XX들?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캠프 숙소인 호텔에서 15 ~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해변가가 있었는데, 그 쪽에 선수단이 다 모여 있었고, 코치들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트레이닝[30] 코치가 직접 본인이 해 보겠다라고 하여 선수단에게 가고 2시간 뒤 복귀를 하였는데 선수단의 입장을 물어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야구 못 하겠다라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후 다음 날 코치진들은 유니폼을 입고 나가 있는데, 선수단은 사복을 입고 뒷문으로 나가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김종모 코치는 이 때 해태 프런트 홍보팀의 능력을 알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당시 전지 훈련에 기자들까지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새벽부터 깨워서 차를 태워 못 보게 하려고 한 바퀴를 돌렸다고 한다.[31] 이후 4일이 지나고, 김응용 감독이 일어서서 직접 선수단에게 갔는데 선수단은 감독도 도저히 못 믿겠다. 사장을 불러달라. 아니면 우리 한국 가게 티켓을 빨리 달라라는 제안을 하고 매니저가 감독에게 이야기 하니 김응용 감독은 이를 악물더니 됐어, 가자 라는 말을 남기고 코치들이 있는 호텔로 복귀를 하였다.[32] 이후 코치들을 달랬다. 내가 감독으로써 해 볼테니 일단 한국 가자. 저 선수들을 패널티를 주던지 어쩌던지 한국 가서 하자[33]라는 말을 남기고 귀국을 하게 되었다.
사실 김종모 당시 수비코치도 사건 당시 이순철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고 한다.[34]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이순철이 김종모의 방으로 찾아왔는데 형님, 내가 선수들을 달려볼테니 형님이 좀 코칭스태프 안에서 이야기를 해 주소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화해의 모드를 잡을려고 했던 것.
이 다음 날, 산책하던 길에 다른 코치들에게 이 이야기를 그대로 말했고, 감독에게 보고 해보는게 어떻겠냐? 라는 입장을 말하니 당시 주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인 유남호 수석코치가 너도 똑같은 놈이네?라는 말 이후로 더 이상 말을 못했다고 한다. 이후 이순철을 불러 이러이러하게 됐다라고 이야기를 전해줬고, 기다려달라고 이야기를 했다.[35] 이 사건 동안에는 단체 훈련은 못 했고 개인 훈련식으로 했는데, 이순철이 선수단에게 이야기를 하여 "일단 훈련을 해야 한다."라고 하여 선수단을 끌고 나왔고, 이번에는 오히려 코치들이 열을 받아 전부 들고 일어섰다고 한다. 반대로 우리는 이제 쟤네들하고 도저히 훈련 못하겠다라고 들고 일어서니 감독이 코치들을 달래서 들어갔고,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타격코치 너만 타이머 들고 타격 연습 끝나면 시간만 불러줘라.", "다른 코치들은 전부 뒤에 서 있고!" 이러고 끝. 이런 식으로 2 ~ 4일간 줄창 진행을 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에 귀국하여 당시 해태 타이거즈 사장이 코치들을 모았고, 우리들이 수습을 할 테니, 야구는 하자라는 말을 하면서 코치들을 달랬고, 이후 사건이 잊혀졌다고 한다.[36]

5.3. 장채근

당시 배터리코치였던 장채근은 96년도 하와이 전지훈련 당시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안 좋은 생각만 났다고 이를 회고한다. 선수들보다 코치인 본인이 나이가 어렸으니까[37], 선수들이 바라는 것도 많았고, 김응용 감독은 센 분이었고 중간에서 막으려다 보니까 여러가지로 맞지 않아서 불화도 있었다고 밝혔다.

5.4. 송유석

우선적으로 송유석 본인이 억울한 사람 1호라고 주장했다. 그때 당시 타이거즈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었으며 선수단 의견을 본인이 직접 전달을 해야 하는 역할이었다고 한다. 회장[38]인 이순철의 경우 당시 사건을 일으켰던 장본인 중 한 명이었고 기분도 안 좋은 상태에서 나설 수 없으니 총무인 본인이 대부분을 담당했다. 선수들 의견을 듣고 거기서부터 이제 반대적으로 가게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고 당시 김응용 감독으로선 시각으론 당연히 앞에 나서서 하는 사람이 눈에 가시로 보일거고 본인이 그 입장이 되었다고 밝혔다.
전지훈련을 가면 가끔 저녁에 한 번씩 점검을 한다.[39] 점검을 사건이 터진 전 날 한 번 했고, 점검을 이른 시간에 하면 되는데, 늦은 시간에 해버린 것이다. 선수단은 자고 있었는데 잠을 깨버리게 된 것. 자고 있는데 잠을 깨버리면 잠 이루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당시 12시 넘어서 점검이 들어와 잠이 깨버렸고 이에 대하여 이의제기를 하였으나 그 다음 날에도 점검을 또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에 나가 선수 주장으로써 강력하게 항의를 하다가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데 그러고 선수들이 거기에서 마침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는 찰나에 그걸 목격하게 되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어 훈련이 일시 중지가 되었다. 거기서 산책을 안 나가고 선수들이 모여서 의논도 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가야될까 근데 의논을 하게 되면 포괄적으로 전달하고 모든 것을 본인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종모의 증언과 같은 부분도 나왔는데, 당시 해태 타이거즈가 사건 관련 매스컴을 다 차단 시킨게 대단하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김종모의 증언때는 살짝만 언급되었고, 송유석의 입장에서는 자세하게 나왔는데 당시 선동열이 모친상을 당하였고, 국내에선 매스컴이 다 선동열에게 가다 보니 이 사건이 조금 묻히면서 해태의 매니저가 기자들하고 어울리면서 차단시켰다고 한다. 이 이후 선수들은 서로 모아서 따로 연습을 했고 감독 코치는 멀리서 바라보면서 진행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5.5. 정회열

내가 당시 이순철의 룸메이트였고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돈 안다.(포괄적으론 아니어도) 지금은 핸드폰으로 기사가 바로 나가지만 그 당시에는 기자분들이 출장을 오면 보름 단위로 나눠서 온다고 한다. 처음에 와서 2~3일 취재를 싸악 하고 팩스로 한 번 보내고 일주일 정도 취재를 하며 휴식을 가지고 마지막 출국 들어가기 3일 전에 한 바퀴 싹 돌며 취재를 하고 보내는 방식이었다. 지금 같으면 기사로 바로 나갔다. 당시에는 기사를 막을 수 있는 여유가 어느정도 많았기 때문에 막을 수 있었던것 같았다.

5.6. 김일권

해태를 떠난지 8년만에 코치로 복귀했는데 하와이에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선수들은 아침 산보 대신 서라벌식당에 집결[40]하여 매니저를 불러오라고 했다. 사건을 유발시킨 유남호 코치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계속 침묵하고 있고 매니저를 통해 전말을 알게 된 김응용 감독은 화가 나 있었다. 김일권 코치는 김응용 감독에게 "제가 8년만에 돌아왔으니 제가 총대를 매겠습니다. 제가 2군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말하였더니 김응용 감독은 "너가 하지도 않았는데 가만 있어!"하고 일축시켰다. 선수들의 훈련은 계속 진행되어야 하니 선수들과 나이 차이가 가장 적은 장채근 코치가 훈련을 지휘하고 김응용 감독은 멀리서 지켜보았다.[41]
귀국 후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훈련을 지도하는 데 마무리 스트레칭을 최고참 이순철에게 지시하고 돌아오는데 돌아오자마자 유남호 코치는 김일권 코치에게 욕설을 하면서 코치실로 따라 들어오라고 했고 김일권 코치는 "제가 비록 4년 후배지만 그라운드에서는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그렇게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하와이 사건도 누구 때문에 발생한건데요?"하고 반문했다. 김응용 감독이 김일권 코치를 급하게 찾는다고 해서 갔더니 "너 유남호한테 항명 했다며?"하면서 김일권을 몰아붙이자 김일권은 "감독님은 어째서 선수때나 코치때나 나한테만 강합니까?"하며 처음으로 들이받았다. 김응용 감독이 "너 2군 가!"했고 김일권 코치는 "갈께요. 하와이에서 제가 2군 간다고 했잖아요"하면서 마무리지었다.

5.7. 이건열

하와이 항명 사건 이후 3경기를 하고 2군을 가라는 지시가 왔다. 마산[42]까지 가려고 했더니 운영팀 직원 조찬관이[43] 광주에 있으라고 한다. 그 말을 들었는데 마산에 가지 않았다고 이걸 괘씸죄에 넣더니 벌금을 맞고 이건열이 기분이 상하자, 야구를 그만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운동을 안 나갔더니 절반도 안 되게 떼였다. 차영화 코치가 바람 쐬러 부산이나 갔다 오자고 해서 갔다가[44] 연습하고 도와주고 그랬지만 너무 억울했다. 너무 힘들어서 김응용 감독 집을 찾아갔는데, 이건열은 "마지막인데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저 하라고 해도 야구 안 합니다" 라고 밝혔더니 김응용 감독은 야구장으로 오라고 했다. 거기서 하와이 항명 사건을 얘기하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운동도 안나오고 얘기를 했고, 이건열 본인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만 둘건데 이런 식은 아니다" 라고 했더니 옆에 기자들도 있었다고 했으며, 나중에 해태가 5위에서 1위까지 하자 이건열의 말로는 김응용 감독이 "노장들 승부욕을 자극하기 위해 2군으로 보냈다" 고 돌렸는데, 진실이 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5.8. 박재벌

하와이 항명 사건은 맨 처음 일어난 원인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밝혔으며, 김일권 코치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밝혔다. 김일권 코치가 헬멧으로 자신을 내려쳤고 그 모습을 본 이순철이 항의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5.9. 구한성

하와이 전지훈련은 선수생명이 걸려있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본인은 항명이고 자시고 관심이 없었고 항명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냐면서 훈련에만 매진했다. 본인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5.10. 이순철

그 당시 종범이는 공익복무[45]를 하고 있었다. 선동열 선수는 일본 가고, 김성한 선수는 은퇴하고 일본으로 코치연수를 가서 다 빠졌다. 기존 해태 타이거즈는 선수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강한 면이 있었지 코치들이 훈련을 강하게 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선수단의 전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당시 전지훈련에서 코칭스태프들이 훈련량을 늘리고 혹독하게 밀어붙이고 있었고, 선수들은 드러내서 불만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불만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저녁에 놀러 나간 선수와 코치가 서로 유흥주점에서 만나는 일이 발생했고, 그걸 계기로 (학교 후배이자 신입 코치가 된) 장채근 코치를 통해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1시 반에 전화를 받고 일어나서는 '나가는 걸 잡아야지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느냐'고 불만을 얘기를 했고, 한번 잠이 깬 이 후 잠이 들지 않아 꼬박 샜다고 한다. 아침에 7시에 해변으로 산보를 나가기 위해 선수들이 다 모여 있던 자리에서, 유남호 코치에게 '우리를 점검하는 것은 좋은데 훈련도 힘들고 하니 나가는 사람을 잡으십시오. 자고 있는 사람까지 깨우면 다음 날 훈련에 지장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유남호 코치가 '니들이 나가니까 그렇지'라고 하며 자신을 툭 밀었다. 그걸 폭행으로 여긴 후배들이 '이제는 급기야 최고참에게도 손찌검을 하네?'라고 생각했고 김정수 선수가 훈련을 보이콧하며 선수들을 데리고 나가버렸고, 본인은 해변가로 나갔다. 그러니까 나 혼자 훈련 참가를 안했으면 됐는데, 그 불만들 쌓인 부분에 최고참을 대하는 것을 보고 훈련을 보이콧해버린 것이다. 저녁에 김응용 감독 만나서 잘 해결은 했다. 야구를 잘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안되지만 어중간하게 하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설득을 많이 했다.[46]

6. 여담

  • 이종범이 엠스플 텔레비전에서 술회하기를, 방위복무 중이던 이종범과 이대진은 하와이 전훈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신인으로 하와이 전훈에 참가한 김종국과 안부전화를 하면서 '하와이 전훈은 할 만하냐?' 물었더니 '형님, 여기 지금 난리났어요'라는 말을 듣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1] 사실 94-95시즌도 2연속 4위로 성적이 부진했고 95시즌은 일정 승차 이상시 준플레이오프 미실시라는 이상한 룰이 있던 탓에 포스트시즌 진출도 못했다.[2] 광주 사레지오고등학교 육상선수 출신으로,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하여 곧바로 판매왕에 오를 만큼 영업 수완이 뛰어났다고 한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과 함께 야구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여러 요직을 거쳐 단장까지 올랐다. 2000년부터 6년간 KBO에서 사무총장을 지냈다. 선동열은 아직도 자신을 일본에 보내준 이상국 단장을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다니며 해태가 KIA로 인수된 이후에도 해태 출신 선수들과 각별한 정을 쌓는다고 한다.[3] 2013년 당시 SBS 스포츠의 프로그램이었던 야구본색의 타이거즈 왕조편에 의하면, 이상국 단장은 선수단 연봉 협상과 조율에 도가 튼 사람이였다. 전직 운동선수이자 영업맨 출신답게 주무기는 음주(?)였으며 선수들과 연봉 협상을 하면서 꼭 을 먹였고 선수들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 구단 측에 유리한 계약서를 내밀어 도장을 찍게 했다. 물론 선수들 대부분은 술을 깨고 난 뒤 자신에게 불리하게 책정된 연봉 조건에 후회했지만 워낙 친화력이 좋은 사람인데다가 대다수의 선수들은 같은 호남 출신이었고 오랫동안 선수들하고 같이 한솥밥을 먹으면서 정을 붙인 터라 아무도 불평 하나 못 할 정도였다. 이런 사람을 잘랐으니 구단의 분노가 제법 컸다는 뜻이고, 역으로 선수단의 동요 또한 컸을 것이다.[4] 당시 코치진은 김응용 감독을 비롯해 수석코치 유남호, 김일권, 조충열, 정현발, 장채근, 이상윤, 신용균, 김종윤, 김종모, 차영화였다. 장채근, 김종윤, 차영화를 제외하고는 전부 삼성에서도 코치를 맡았다.[5] 해태는 70년대부터 아마야구 최고의 감독으로 군림하던 김응용이 80년대부터 10여년간 이끌면서 자신의 카리스마로 모든 걸 이끌었고, 코치는 전달자 역할 이상으로 선수들을 자의적으로 건드리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팀이었다. 그전까지 선수에게 줬던 모든 기합은 김응용의 허락 없이 이뤄진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팀 전력 유출이 심각해지자, 처음으로 태도를 바꿔서 코치들의 건의를 받아 코치들이 압박을 주는 분위기를 허락한 것이었다.[6] 하루만에 수습된 것처럼 되어있지만 김종모는 3일~4일이나 지나서야 수습 움직임이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당일날 김응용 감독이 바로 펑고를 쳐줬다는 부분은 김응용 감독의 성격에 당일날 아침 일정을 선수들이 거부한 상황에서 쉽지 않은 부분이고, 오히려 나중에 어설프게라도 수습이 되는 과정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7] 김응용 감독은 아침 일찍 선수들을 불러내서 강제로 산책을 시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정신도 차리고 밥맛도 돌게 할 겸해서 몸을 풀자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전날 밤에 음주 유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난데없이 음주 유무를 확인한 이유는 당시 해태 선수들 중에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이제 갓 20대가 된 새파란 신인 삼총사도 술을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걸로 소문이 났다. 이들을 잡은 게 당시 2군 감독이던 김성근. 한대화와의 트레이드로 입단한 이병훈 역시 술을 워낙 좋아해 아침 산책에 자주 빠졌으며, 결국 이때문에 밉보인 이병훈은 1996년 시즌 중 동봉철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트레이드 이후에도 술을 끊지 못하다가 이듬해 음주운전 사고로 은퇴했다.[8] 하지만, 최해식이 본인이 노래방에 갔다가 걸렸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어린 이호준, 임창용, 장성호가 뭘 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9] 후술하는 항명 사건 이후 다른 코치들의 증언을 봐도 이순철이 유남호 수석코치를 때렸다는 증언은 없으며, 반대로 유남호 수석코치가 갑자기 이순철을 때렸다거나 어퍼컷을 날렸다는 증언 일색이다. 이순철이 유남호 수석코치를 먼저 때려서 이순철을 때렸다는 주장은 유남호 본인만 하였는데 코치들도 유남호가 일방적으로 때렸다고 증언을 할 정도이므로 유남호 수석코치가 이순철을 뜬금없이 때린 행동이 항명 사건의 발단인 것이다.[10] 현재 KIA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 운영실장을 맡았으며, 전 외야수 윤민섭의 아버지이다.[11]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김일권이 2군으로 내려간 코치는 본인이었음을 밝혔다.[12] OB 베어스 항명파동과도 유사한 사건 구조다. 1994년 시즌 막판 항명 파동이 터졌고 이를 잘 수습한 뒤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지만 베어스 프런트는 항명파동에 가담한 선수들에게 철저히 보복했다.[13] 다만 이순철 본인은 2020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동자는 아니지만 당시 선수단 내 최고참이라서 앞장을 섰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사건은 선수단과 코치진 사이의 갈등이지 김응용 감독과 직접 관련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응용 감독이 선수단에게 분노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14] 이에 대해 이순철 본인은 김응용감독이 온다고 했을때 바로 짐싸서 광주로 돌아갔다고 했기 때문에 자진 사임일 가능성도 있다.[15] 그전에 기아 김성한 감독에게 직접 코치섭외 전화를 받았고 기아로 가려고 했지만, LG 감독의 제안을 받고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16] 사실 성적만 놓고 보면 혹사도가 줄어든 것 정도만 주목할만 하지 이상한 부분은 없다. 대충 보면 혹사당하는 불펜에서 정상적인 롱릴리프 정도로 나온 것이니. 특히 홀드 기록을 하지 않던 시대라 더 기록이 안좋아 보일 수도 있다.[17] 한 번만 더 던지면 10경기 출장 정지 및 한국시리즈 출전 불가[18] 전설의 타이거즈 유튜브 채널에 감독이나 코치 생각은 없는지 댓글로 팬들이 문의하자 구단의 사장이나 단장이라면 검토해 볼만 하나 본인이 감독이나 코치 등을 맡게되면 그 팀은 지옥훈련을 시켜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만들거라서 현장 지도자는 어려울 거라는 말을 했다.(사실상 본인은 현장직과 안 맞다고 돌려 말한 것이다.) 현장 지도자를 안 맡을 뿐이지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회(한은회) 부회장, 해태 타이거즈 OB모임 총무 등의 역할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19] 고교/대학야구 감독들은 소속팀 선수들의 취업을 위해 프로팀 지도자나 스카우트팀에게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홍보한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이건열이 밝히길 동국대 선수들이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은데 왜 KIA에선 안 뽑는 건지 의문이라고 말했다.[20] 이 기간 모두 김기태 감독의 수석 코치였다.[21] 사실 직접적인 주범은 아니었으나, 선수단이 알라모아나 해변가로 갔을때 이순철의 룸메이트이자 보조 역할(전령)을 수행해서 주범으로 본 게 아니냐라는 말을 남겼다.[22] 그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 유니폼을 입었다.[23] 김진우, 박지훈, 신종길도 광주광역시에서 각각 레슨장을 차리면서 경쟁에 뛰어들었다.[24] 밑에서도 서술 되지만 저녁에 딴 길로 새지 마라라는 아침점호 같은 의미였다. 김응용 감독이나 코치들은 아침 산책 때에 선수의 음주여부를 구분할 수 있었다.[25] 당시 부른 노래는 육각수의 데뷔곡이자 인기곡이었던 흥보가 기가 막혀였다.[26] 당시 타이거즈는 주장 대신 상조회장 직이 있었는데 타 야구팀의 주장과 같다.[27] 전설의 타이거즈 김정수x최해식 편[28] 전설의 타이거즈 김봉연x김종모 편[29] 이건 이순철쪽에서 했다는 뉘앙스였다. 대놓고 쌍욕이었으면 코치에게 한게 보통일이 아니니 그렇게 얘기했겠지만, 그게 아닌 걸로 봐서는 말하던 중 자신을 건드린 분노로 "씨..." 정도의 소리를 냈을 가능성이 높다.[30] 체력훈련 담당, 조선대학교 김흥식 교수.[31] 그때 김종모 코치가 직접 보고 프런트의 능력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32] 감독이 선수들에게 거부를 당한 거라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정도다.[33] 이때 당시 캠프 10일 정도 남았을 시점이라고 한다.[34] 실제 이순철과 김종모는 입단 3년 선후배 차이이자, 광주상고 선후배 사이였다.[35] 이 시점이 귀국 3일인가 2일 정도 남았을 시점이다.[36] 사실상 사건이 덮어진 것.[37] 이순철은 고등학교 - 팀 선배였고, 김정수와 이건열은 입단 동기다. 게다가 김정수는 고교 때 가정사 때문에 1년을 유급한지라 사실상 1년 선배.[38] 김정수가 당시 상조회장이었다고 본인이 직접 밝혔는데 김정수, 송유석 둘 중 한 명이 기억에 오류가 있는 듯 하다.[39] "외출하면 몇 시까지 숙소로 복귀해라"라는 식. 코치들은 선수들이 자고 있는 객실에 전화를 걸어 재실여부를 확인했다.[40] 당시 동료 코치였던 김종모가 언급한 곳으로 보인다.[41] 전설의 타이거즈 김준환x김일권 편[42] 롯데 자이언츠와의 원정경기가 있었다.[43] 1982년 목포영흥고 야구부 창단멤버로 1984년 인천전문대(2년제)를 거쳐 1986년 해태에 입단해 영흥고 최초의 프로야구선수가 됐다. 그러나 1992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해태 타이거즈 운영팀, 용병 담당 스카우터, 전력분석팀 차장, 육성지원팀장을 역임했고 2013년에 KT 위즈 스카우트 팀장으로 옮겼다.[44] 차영화 코치는 인품이 상당히 훌륭한 인격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폭력과 욕설을 하지 않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래서 팀 후배는 물론 코치 시절에 지도했던 선수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45] 그 당시는 방위병였다.[46] 빵카페 이순철 편 - 아무도 몰랐던 하와이 항명의 진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