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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식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7번 | ||||
김성길 (1989~1992) | → | 박충식 (1993~1999) | → | 전병호 (2000~2008) | |
해태/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 |||||
이강철 (1989~1999) | → | 박충식 (2000~2001) | → | 이강철 (2002~2005) |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5번 | |||||
강영식 (2000) | → | 박충식 (2002~2003) | → | 허준 (2004) |
박충식 朴衷湜 | Park Chung-Sik | |
출생 | 1970년 9월 3일 ([age(1970-09-03)]세) |
광주광역시 동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광주중앙초등학교 (졸업) 무등중학교 (졸업) 광주상업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체육과학대학 (체육학 / 학사)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언우타 |
프로 입단 | 1993년 2차 1라운드 (전체 7번, 삼성)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1993~1999) 해태-KIA 타이거즈 (2000~2003) |
지도자 |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9~)[1] |
프런트 | 질롱 코리아 단장 (2018~2019) |
경력 |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총장 (2012~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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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시 연장 15회 제한이 없었으면 난 20회, 30회까지도 던졌을 거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던지겠느냐고? 물론이다. 그게 내가 아는 야구다.
-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회상하며
-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회상하며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출신 감독. 이승엽이 만개하기 전, 원조 라이언 킹으로도 불린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광주 출신으로 광주상업고등학교 야구부에서 뛰었다. 광주상고는 1988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2]하기도 했으나, 개인적인 활약은 없었다.[3]고등학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에 진학했으나 대학 리그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고, 해태 타이거즈는 1993년 1차 지명에서 이종범과 성영재를 놓고 고민하다 이종범을 지명한다.[4] 연고 구단인 해태에서조차 전혀 주목하지 않은 박충식을 지명한 것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박충식 본인도 삼성이 2차 1라운드라는 빠른 순번에 자신을 지명한 것에 놀랐다고 인터뷰한 기사가 있다. 다만, 경희대 재학 시절부터 삼성 스카우터가 직접 학교로 몇 번 찾아온 적 있다고 하며, 삼성에서도 제구력 좋은 것 하나 믿고 뽑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 당시 경희대 선배들의 구타와 기합을 무서워해서 야구부 기숙사를 탈출하다가 고려대 기숙사를 탈출한 이상훈(LG 트윈스)과 종종 마주쳤다고 한다. 박충식에게 대학야구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잊고 싶은 기억이라고 하며 대학 중퇴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이 훗날 프로야구선수, 프로야구 선수협 사무총장, 대학야구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선수들의 권리 보호 및 복지 증진, 구타 등의 악습을 폐지시키는 데 밑바탕이 되고 있다. 대학 시절, 이후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과도한 기합과 구타를 경험하며 야구계의 악습 폐지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3년, 데뷔 첫 해부터 14승(팀 내 최다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를 거두면서 언더스로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등판, 문희수-선동열-송유석 3명의 해태 에이스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피칭을 하며 15이닝 181구 2실점 무승부 이라는 엄청난 경기를 하였다.(당시 그의 활약상)[5][6]
1994년, 2년차 징크스 우려에도 불구하고 14승을 올리면서 성준과 함께 팀 내 최다승을 기록했다. 당시 소화한 이닝 역시 무려 203⅓이닝으로 이닝 소화 능력도 뛰어났다.
1995년에는 방위병 복무로 홈 경기에만 등판했음에도 불구하고 128이닝 9승을 기록했고, 방위병의 경기 출장이 전면 금지된 1996년 시즌 초에는 출장하지 못하다가 소집해제 후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면서 8승 12세이브를 거뒀다.
1997년과 1998년에는 각각 13승과 11승을 거두는 등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매해 150이닝 이상을 던지는 꾸준한 활약을 펼쳐 김태한, 김상엽과 함께 1990년대 중반 삼성의 암흑기 동안 마운드를 지탱했다. 1997년 5월 4일 삼성이 한 경기 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운 경기의 승리투수이기도 하다.
사이드암 투수임에도 불구하고[7] 최고 구속이 140㎞/h가 넘는 희소성 있는 투수[8]였으며, 거기에 엄청난 각도의 슬라이더와 강력한 싱커로 한 시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무리한 여파인지 1999년 팔꿈치 부상을 입어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갔는데, 시즌 후 이강철의 FA 보상 선수로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삼성 구단에서는 '설마 부상 중인 선수를 데려가겠어?'라는 생각에 보호선수 명단에 묶지 않았는데, 그 설마가 사실이 되고 말았다.[9][10]
2.3. 해태-KIA 타이거즈 시절
2000년부터는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에서 뛰었다. 다만 해태 입단 첫 해인 2000년에는 삼성 시절 당했던 부상 여파 및 선수협 파동까지 겹쳐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이후 열악한 해태의 재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중간계투로 나서서 2001년 3승 2패 3세이브 2홀드, 2002년에는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를 기록하는 등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타이거즈 불펜에서 그럭저럭 나름 한 몫했다. 그러나 부상이 재발하는 바람에 2003년은 한 해 내내 재활로 보냈고 결국 시즌 종료 후 33세라는 다소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은퇴 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이 있던 호주로 건너갔다.
훗날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고향 팀으로 이적한 후 없다시피한 재활 시스템과 열악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개판 5분 전이었던 해태의 시설, 그리고 쌍팔년도 수준의 구타, 폭력에 황당했다고 밝히며 해태 구단을 디스하기도 했다.[11]
3. 은퇴 이후
은퇴 후 한국 생활을 아예 정리하고 가족들이 있는 호주로 건너갔다. 호주에서 한인 슈퍼마켓 및 식당을 운영하며 개인 사업을 했고, 동시에 유소년 야구선수들을 지도하는 등 야구와 연을 아예 놓지는 않았다.그러다가 2011년 10월에 귀국했고, 11월에 양준혁이 이사장으로 있는 양준혁 야구재단에서 창단한 '멘토리 야구단[12]'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18년 호주 프로야구 리그에 창단하는 한국 선수팀 질롱 코리아에 초대 단장으로 취임했으나 1년 만에 사임했다.
2019년에 새롭게 창단되는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의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하였다.인터뷰 그러나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자격증이 없어서 정식 등록이 되지 않다가[13] 2021년 8월이 돼서야 비로소 등록되었다.
2021년 11월 9일에 열린 두산과 삼성의 KBO 리그 플레이오프 1차전에 앞서 시구자로 낙점되었는데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투혼의 피칭을 펼쳤을 당시의 유니폼을 입고 시구에 나섰다.[14]
3.1. 선수협 사무총장
2012년 1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신임 회장인 박재홍의 말에 따르면 이 당시에 아무런 연줄이 없던 그였기에 오히려 사무총장으로 적당하다는 판단 하에 그를 밀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비리 의혹을 받고 있던 권시형 전 사무총장이 측근을 통해 '박충식이 거액의 도박빚이 있다'는 루머를 퍼트리기 시작했다.[15] 또한 권시형 파에 속했던 현재윤, 이혜천, 박명환, 김상현 등이 이사회에 참여도 하지 않고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사회가 진행되었다는 주장과 긴급이사회에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적힌 반대성명을 내 음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재홍이 인터뷰를 통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언론에 퍼졌던 박충식과 관련된 안 좋은 소문들은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그러나 2016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진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6년 8월 11일에 사임했다.현역 선수 시절. 가운데가 박충식이다.
2015년 10월 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 이만수와 양준혁과 함께 초청되어 시구를 맡았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3 | 삼성 | 32 | 155⅔ | 14 (3위) | 7 | 2 | - | 0.667 | 2.54 | 122 | 10 | 51 | 97 | 51 | 44 | 1.04 |
1994 | 32 | 203⅓ (3위) | 14 | 8 | 3 | - | 0.636 | 2.35 (2위) | 174 | 16 | 38 | 130 | 64 | 53 | 0.99 | |
1995 | 19 | 128 | 9 | 6 | 0 | - | 0.600 | 3.16 | 106 | 10 | 39 | 72 | 55 | 45 | 1.04 | |
1996 | 29 | 89⅔ | 8 | 2 | 12 (5위) | - | 0.800 | 2.01 | 67 | 4 | 14 | 56 | 23 | 20 | 0.83 | |
1997 | 31 | 170⅔ (5위) | 13 | 6 | 2 | - | 0.684 | 4.32 | 174 | 18 | 45 | 92 | 91 | 82 | 1.19 | |
1998 | 24 | 159⅓ | 11 | 10 | 0 | - | 0.524 | 3.25 | 163 | 14 | 40 | 100 | 68 | 61 | 1.18 | |
1999 | 3 | 4 | 0 | 0 | 0 | - | 0.000 | 0.00 | 2 | 0 | 1 | 3 | 0 | 0 | 0.7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0 | KIA | 1군 기록 없음 | ||||||||||||||
2001 | 23 | 31 | 3 | 2 | 3 | 1 | 0.600 | 3.19 | 23 | 5 | 7 | 18 | 11 | 11 | 0.87 | |
2002 | 48 | 47⅔ | 5 | 3 | 8 | 12 (3위) | 0.625 | 3.97 | 46 | 5 | 8 | 33 | 21 | 21 | 1.07 | |
2003 | 1군 기록 없음 | |||||||||||||||
KBO 통산 (11시즌) | 241 | 989⅓ | 77 | 44 | 30 | 13 | 0.636 | 3.07 | 877 | 82 | 243 | 601 | 384 | 337 | 1.05 |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1993년 | 7완투 | 2완봉 |
1994년 | 13완투 (2위) | 3완봉 |
1995년 | 4완투 | 2완봉 |
1996년 | 2완투 | 0완봉 |
1997년 | 3완투 | 0완봉 |
1998년 | 4완투 | 0완봉 |
KBO 통산 | 33완투 | 7완봉 |
5. 관련 문서
[1]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자격증 취득은 2021년.[2] 여담으로 광주일고가 청룡기 출전 前, 광주상고가 대통령배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광주일고는 선수들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기 위해 얼차려를 실시했고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관련기사[3] 그 때 광주상고의 에이스는 우수 투수상을 받았던 고천주였으나, 원광대학교 진학 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004년에 새로 창단한 송원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계속 팀을 이끌고 있다.[4] 성영재는 1993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다. 박충식과 성영재 모두 말년을 고향팀에서 보냈지만 박충식이 부상을 자주 당한 관계로 비율스텟은 박충식이, 공헌도는 성영재가 더 크다 할 수 있다.[5]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이건열이 술회하기를 도저히 박충식의 공을 때릴 자신이 없어 거울을 보면서 박충식의 투구를 맞는 연습을 미리했다고 한다. 룸메이트였던 홍현우는 '선배님 뭐 하세요'하고 웃으면서 물어봤던 건 덤.[6]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양준혁이 술회하길 이 당시 진루타를 치는 데 집중했어야 하나 송유석의 공을 만만히 보고 욕심을 부리다가 파울 플라이를 치면서 결국 3차전을 승리로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욕심이 어떻게 보면 박충식의 선수생명을 갉아 먹게 한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감정이 있다고 밝혔다.[7] 초창기엔 투구각도가 딱 사이드암이었다. 언더핸드 투구폼으로 바뀐 건 프로 2년째이자 최고 성적을 기록한 1994년부터.[8] 최근에는 임창용, 심창민 등 사이드암이라도 150㎞/h를 넘나드는 속구를 가진 투수가 꽤 있지만, 1980-1990년대만 해도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는 직구의 구속은 120-130㎞/h대에 불과 하였고, 슬라이더나 싱커 등 변화구 위주의 투수가 대부분이었다.[9] 비슷한 시기에 김동수의 보상 선수로 LG로 이적하게 된 김상엽도 같은 케이스다.[10] 다만 이 당시 삼성은 수술 후 재활 중이던 박충식이 해태의 지명을 받아 팀을 옮기게 되자, 곧바로 박충식에게 구단으로부터 지원받았던 수술비 및 재활비를 반납하라고 하는 바람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는 90년대 중후반 삼성 구단의 어두움을 볼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11] 삼성에서는 부상 선수가 재활할 때 트레이너가 1:1로 붙어 직접 재활 프로그램을 짜 주고 관리해 줬는데 이에 반해 해태는 선수 스스로 정보를 얻어 직접 재활을 해야 했다고 한다. 무등구장 내 웨이트 트레이닝장이 있었는데 역기에 무게추 대신 돌멩이가 올려져 있었다고...거기에 200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던 상명하복식 문화와 집합, 코칭스태프의 구타가 잦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해태로 트레이드된 손혁도 해태 합류를 거부하고 돌연 은퇴한 뒤 잠적해버렸을 정도였고 3년 후인 2003년에도 두산에서 기아로 트레이드된 최용호 역시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기아의 구타와 악폐습은 박충식이 은퇴한 이후 김성한 구타 사건의 영향과 이종범이 주장을 맡을 당시 구타를 금지하면서 거의 사라졌고 미흡했던 트레이닝 시설 역시 2012년 기아 챌린저스 필드의 개장 이후로 해결되었다.[12] 저소득층 자녀나 다문화 가정 자녀로 이뤄진 유소년 야구단[13] 협회 사이트에는 2020년에는 전 삼성, KIA 선수였던 유용목(現 신성대 감독)이, 2021년에는 박상민 前 천안북중학교 야구부 코치가 각각 감독으로 나와 있었다.[14] 이 경기는 라팍에서 열린 첫번째 포스트시즌 경기이기도 했다.[15] 박충식은 도박은 일절 인한 사람이다. 완전히 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