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3:38:04

성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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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재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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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17번}}}
이현택
(1992.5.7.~1992)
성영재
(1993~1999)
팀 해체
SK 와이번스 등번호 17번
팀 창단 성영재
(2000~2000.6.1.)
이호준
(2000.6.2.~2001)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3번
장석희
(1997~1998)
성영재
(2000.6.2.~2000)
이강철
(2001.7.30.~2001)
해태/KIA 타이거즈 등번호 29번
권명철
(1999)
성영재
(2001~2002)
고우석
(2003~2004)
두산 베어스 등번호 57번
레스
(2002)
성영재
(2003~2003.6.2.)
레스
(2004)
LG 트윈스 등번호 65번
곽병모
(2002)
성영재
(2003.6.12.~2005)
김영롱
(2006~2007)
LG 트윈스 등번호 91번
김용수
(2003~2004)
성영재
(2006)
배우열
(2009~2010)
LG 트윈스 등번호 85번
조충렬
(2006)
성영재
(2007~2010)
최인영
(2011)
}}} ||
파일:external/thumb.zumst.com/27d20bb261d6422295cb97de8ce1597c.jpg
성영재
成英在 | Young-jae Sung
출생 1971년 3월 9일 ([age(1971-03-09)]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제일고 - 인하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 입단 1993년 2차 1라운드 (전체 1번[2], 쌍방울)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 (1993~1999)
SK 와이번스 (2000)
해태-KIA 타이거즈 (2000~2002)
두산 베어스 (2003)
LG 트윈스 (2003~2005)
지도자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2006)[3]
LG 트윈스 1군 불펜코치 (2006)[4]
LG 트윈스 잔류군 투수코치 (2007~2008)
LG 트윈스 1군 불펜코치 (2009~2010)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6~2021)
프런트 LG 트윈스 스카우트 과장 (2011~2016)
LG 트윈스 스카우트 (2022~)
가족 조카 성지훈

1. 개요2. 선수 경력
2.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2.2. 해태 타이거즈 및 그 이후 시절
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주요 성적5. 기타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 해태-KIA 타이거즈, 두산 베어스, LG 트윈스 소속의 언더핸드 투수. 전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각이 그리 크지 않아 '나노 포크'라고 불리긴 했어도, 포크볼을 던지는 잠수함 투수로 유명하다. 얼굴도 나름 곱상하게 잘 생긴 편이라, 쌍방울 시절에는 김원형만큼이나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많은 선수였다.

2. 선수 경력

2.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광주일고인하대(1989학번)를 졸업하고 1993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계약금 1억 원을 받고 입단했다. 당시에는 삼성이 뽑은 박충식보다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5], 쌍방울 역사상 최초로 억대 계약금을 받은 신인이자 당시 해태의 1차지명을 받은 고교동기인 이종범보다 더 비싼 계약금을 받았다.[6]

참고로, 해태는 1991년 신인 1차 지명에서 광주일고-인하대 출신 좌타 내야수 김기태 대신 진흥고-한양대 출신 우완 투수 오희주를 뽑았지만 기대에 훨씬 미달했고, 김기태는 신생 쌍방울에서의 프로 첫해부터 홈런 2위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이듬해인 1992년 해태는 광주일고를 막 졸업하는 박재홍을 1차 지명했지만 해태의 지명을 거부하고 연세대에 입학했다. 결국 해태는 1993년 건국대를 졸업한 이종범을 영입하고서야 김기태, 박재홍을 놓친 아쉬움을 풀었다.

지금 와서 보면 성영재가 팀을 잘못 만났을 뿐, 성영재가 삼성으로 갔거나 아님 박충식(광주상고-경희대)이 쌍방울로 갔다면 충분히 운명이 달라졌을 수 있다.

데뷔 첫 해 성적은 타선의 지원을 못 받거나 상황이 여러 모로 꼬이는 등으로 인해 평균자책점은 4.03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지독히도 승운이 없어 1승 13패를 기록하였다.

동기생이자 동일한 옆구리 투수인 박충식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보여 준 강인한 이미지에 밀렸을 뿐더러, 더군다나 하필이면 데뷔했던 1993년에는 양준혁, 이종범, 김경원, 박충식, 이대진, 이상훈, 구대성, 마해영 과 같은 향후 프로야구 10년을 좌지우지할 선수들이 대거 입단하여 비교적 관심도가 떨어지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성영재는 입단 첫 해부터 쌍방울의 붙박이 선발로서, 매년 120~150이닝을 먹어 주는 언더핸드 에이스 노릇을 했다.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1996년에는 10승 5패 ERA 2.37을 기록하여 쌍방울 팀 내 유일 10승 투수이자 최다승 투수이기도 했다. 특히 현대 유니콘스,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강해서 김성근현대 유니콘스와의 1996년 플레이오프를 회상하면서 "1차전 선발이었던 영재가 손가락 부상만 당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겼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쌍방울은 2차전까지 연달아 승기를 잡았지만, 성영재의 공백을 실감한 채 남은 세 경기를 내줘 한국시리즈 진출 문턱에서 탈락해야 했다. 김성근 체제에서 유일하게 붙박이 선발이었던 투수가 성영재였던 만큼 그의 위상은 확고했으나, 붙박이 선발인 만큼 김성근 체제 특유의 벌떼 야구의 특징상 선발승을 손해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팀의 에이스로 점차 자리잡고 있었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병역 문제. 과거 현역 판정을 받았던 그는 허리디스크 수술, 속도위반[7] 등 합법적인 선에서의 병역 면제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현역 입대하게 되었고, 의병 제대를 위해 국군병원 군의관에게 3,500만 원의 언더머니를 제공한 뒤 목표를 이룬다. 그러나 훈련량 부족과 누적된 어깨 피로로 인해 성적이 해마다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이호준을 상대로 트레이드된 후 2000년 겨울에 위의 병역비리 혐의가 적발되어 검찰에 구속 기소되었다가 이듬해 봄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기까지 동계훈련을 완전히 공치게 된다.프로야구 성영재씨 병역비리 집유선고

2.2. 해태 타이거즈 및 그 이후 시절

SK 와이번스에서 뛰다가 2000년 6월 1일 이호준을 상대로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트레이드되었다.

당시 해태의 투수 사정은 이강철이 삼성으로 FA계약을 하면서 나가고, 이대진도 부상 여파로 선발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2000 시즌 해태에서 선발로써 풀타임 위력을 보인 투수는 최상덕이었을 뿐, 그 상황에서 선발로 4연승을 올리며 해태에서는 천군만마격, 무너져 가던 명가의 자존심을 지켜 주었다. 2001년에도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준수하게 활약했는데, 2000년만큼의 성적은 올리지 못하며 점점 노쇠화되었다. 친구가 돌아오자마자 급격히 성적이 떨어진 것도 아이러니.. 사이가 안좋았나
2002년에는 단 한경기만 나온 후 방출당했다. 이후 두산 베어스에 이적했으나 1패만 기록한 뒤 웨이버 공시됐고, LG 트윈스에 이적하여 2005년 시즌 후 은퇴했다.

성영재-이호준 트레이드의 손익을 계산하면 2001 시즌까지는 성영재의 우세였는데, 2002 시즌부터 이호준이 각성하면서 역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2011년 7월 31일 LG 트윈스KBO 역사상 최고의 오른손 거포가 되는 유망주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하기 전까지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로 남았었다.

3. 지도자 경력

2006년부터 2010년까지 LG 트윈스의 투수, 불펜, 재활코치를 맡았다.

2010 시즌 후 코치 계약을 해지하고 스카우트로 보직을 바꿔 2016년까지 LG 트윈스 육성 팀에서 프런트로 재직했다.

2016년 10월에 모교인 광주일고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7년 봉황대기에서 4강에 오르며 명문팀 부활을 암시했고, 2018년 시즌 전에는 학교 후배인 김병현의 개인 훈련 및 학생 지도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2018년 황금사자기에서는 북일고, 덕수고, 경남고 등 강팀들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라 대구고에 10:2로 승리하며 통산 6번째 우승을 달성했고 전국체육대회 금메달까지 차지했다. 2021년 10월 봉황대기 직전 조윤채 감독에게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

이후 다시 LG 트윈스의 스카우터로 들어간 사실이 빙부상 부고소식을 통해 알려졌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3 쌍방울 24 116 5 0 1 13
(1위)
0 - 4.03 111 73 75
1994 28 147⅓ 3 1 7 10
(5위)
0 - 4.95 155 71 85
1995 27 154 5 1 9 14
(1위)
0 - 5.04 168 78 92
1996 24 148 5
(4위)
3
(2위)
10 5 0 - 2.37
(4위)
122 49 92
1997 23 107⅓ 1 1
(4위)
5 6 0 - 2.43 93 47 80
1998 36 138 3 1 7 9 1 - 3.51 145 48 76
1999 31 131⅓ 1 0 5 16
(1위)
2 - 6.10 155 57 74
년도 소속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0 SK / 해태 31 111⅔ 1 1
(1위)
7 7 0 2 4.84 133 56 74
년도 소속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1 KIA 39 61⅓ 0 0 5 4 3 6 5.72 67 26 36
2002 1 1 0 0 0 0 0 0 9.00 3 0 0
년도 소속 경기 이닝 완투 완봉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3 두산 / LG 24 33⅓ 0 0 1 1 2 2 3.24 37 16 17
2004 LG 16 13 0 0 1 0 0 4 3.46 14 4 6
KBO 통산
(12시즌)
304 1165⅓ 24 8 58 85 8 14 4.24 1203 532 707

5. 기타

  • 한때 마구마구에서 최고의 선발로 꼽힌 적도 있다. 언더패치 이전에는 뛰어난 제구력과 특유의 1mm 포크볼을 중심으로 하는 삼지선다로(직구,슬라이더,포크) 악명을 떨쳤으나 패치 이후에는 추억속의 카드로 사라졌다. 물론 그 이후로도 쌍올을 중심으로 간간히 쓰는 사람은 있었다. 그리고 96년 재평가 이후 레어카드가 추가되면서 다시 쓰는 유저들이 늘었고 한때는 거래창 1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기도 했다. 철완을 필두로 잠재력도 괜찮게 붙었고 특이폼이 없는 점과 언더 포크라는 특징을 이용해 X계열 강화 및 팔각도 특이폼을 부여하면 꽤나 쓸만하다. 이후로는 특이폼이 추가되었으며 새로 추가된 특이폼도 나쁘지 않아 가성비 선발로 가끔 쓰이곤 한다.
  • 친자식은 아니지만 조카 성지훈[8]도 야구선수로, 광주일고를 졸업했으며 2023년 동아대학교 를 졸업하고 좌완 투수로 뛰고 있다가 2023년을 앞두고 한화 이글스에 육성선수로 입단했다.
  • 그 유명한 마산아재 성영재 새총 저격 사건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본인은 새총에 맞은 기억이 없다고 발언하였으며 이후 마산아재 성영재 새총 저격 사건은 거짓으로 판명났다.
  • 위의 통산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승운이 지독히도 없던 편으로 패전투수 1위를 세 시즌 기록하였다.
  • 부모님이 건어물 장사를 했다고 밝혔다. 이종범이 스톡킹에서 술회하길 광주일고 선배들의 몽둥이 찜질이 있으면 말린 오징어를 천과 솜을 이용해 감싼 후 허벅지에 덧대 아픔을 덜었다고 한다. 오징어는 성영재가 공급했으며, 단체기합 때 유용했던 오징어가 오래되면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 양회열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1년 선배들인 성영재와 이종범이 마운드에 오르면 본인이 그들의 백업을 했다고 한다. 이종범이 투수일 때는 양회열이 유격수, 성영재가 투수일 때는 양회열이 3루수를 맡았다.

6. 관련 문서


[1] 1989학번. 서재응의 고등학교-대학교 선배이다.[2] 쌍방울이 전년도 꼴지팀이 2차 1라운드에서 지명권 3개를 가진다는 규정으로 인해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서 3명을 지명하였다.[3] ~6월 6일[4] 6월 7일~[5] 당시 김응룡 감독은 동대문야구장에 4번이나 찾아와서 고민하다가 동기생 이종범을 1차 지명으로 낙점했으며 지역 라이벌 고교의 잠수함 투수였던 박충식, 그리고 일고 동기생 성영재도 1차 지명 후보였다. 이종범은 청룡기 결승전 연장 11회말에서 군산상고에게 끝내기 2루타를 작렬하며 5대4 역전승에 기여했다. 이종범 외 광주일고 동기로 정영규가 있다.[6] 이종범은 7천만원밖에 받지 못했는데 이유가 해태 프런트에서 '광주는 서울보다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원을 받는 것보다 광주에서 7천만원을 받는게 낫다'는 황당한 말을 해서였다.[7] 그 당시만 해도 결혼한 뒤 아이가 2명 이상 있는 입영 대상자는 면제 판정을 받았다.[8] 성준민에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