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회열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64번 | ||||
결번 | → | 양회열 (1991~1995) | → | 이정훈 (1997~1998) |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4번 | |||||
전성철 (1994~1995) | → | 양회열 (1996~1997) | → | 박정현 (2000~2002) |
양회열 梁會烈 | Yang Hoi-Yeol | |
출생 | 1971년 9월 9일 ([age(1971-09-09)]세) |
광주광역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광주수창초 - 충장중 - 한서고[1]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0년 신고선수 (태평양) |
소속팀 | 태평양 돌핀스 (1990) 해태 타이거즈 (1991~1997) |
지도자 |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5~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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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선수. 해태 시절 등번호는 64번이었다.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충장중학교 시절 선배가 이종범과 성영재였다. 양회열이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 시절부터 이종범과 성영재에게 밀려서 이종범이 투수로 등판하면 유격수를 뛰고, 성영재가 투수로 등판하면 3루수로 뛰는 신세였다고. 심지어 고등학교 동기가 그 홍현우였기 때문에 광주상고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서 한서고로 전학을 갔다. 한서고를 졸업한 후에도 프로에 지명을 받지 못했고, 불러주는 대학도 없었다.3. 선수 경력
결국 1990년에 태평양 돌핀스에서 500만원을 받고 연습생으로 입단을 했으나 그 해 말에 방출된 뒤 고향 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간신히 입단했다. 포지션은 내야 전 포지션을 뛰는 유틸리티 플레이어. 김병조, 구한성, 이경복 등과 함께 1군 백업 요원으로 있었다.매년 저조한 성적을 거뒀고 기대치도 높지 않아서 매년 마무리 캠프나 스프링 캠프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에게도 큰 기회가 찾아왔으니... 이종범이 1995년부터 방위병으로 소집되면서 원정경기를 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95년에 인생 시즌을 맞이했다. 수비에서는 원정경기에서는 유격수, 홈경기에서는 내야 유틸리티맨으로 활약했고, 공격에서도 해태 주전 선수 중 유이하게 규정타석을 채우며 356타수 94안타, 타율 0.264라는 당대 내야수치고는 좋은 성적을 내 이종범의 빈 자리를 제대로 채웠다. 이 해 해태는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홍현우[2]와 원정경기를 뛸 수 없는 이종범을 빼면 믿을 만한 타자가 전무했던 시기라 양회열의 활약은 그만큼 반가웠다.[3] 활약을 인정받아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에서도 비록 낙선하긴 했지만 김민호에 이은 2위 득표율을 기록했고, 연봉도 무려 3배가 오른 2,300만 원을 받게 되었다.[4]
그러나 이듬해 1차 지명으로 2루수 김종국과 상위 라운드로 좌타자 장성호가 입단했다. 결정적으로 이종범까지 1996년 초에 전역하면서 그의 입지는 극도로 좁아졌고, BABIP의 신이 그를 외면했는지 공격력까지 다시 떨어지면서 1997 시즌이 끝난 뒤 해태에서 방출되었다.
4. 여담
- 이름이 당시 같은 팀에서 뛰는 포수 정회열과 똑같다. 흔한 이름이 아닌데도 말이다.
- 2023년 4월 전설의 타이거즈에 최해식과 함께 출연했다.
- 한국 남자 프로골프의 레전드인 최경주와 한서고등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했다고 한다. 나이는 최경주가 1살 위다.
- 광주방송 아나운서 출신의 김학실 전 광주광역시의원과 함께 야구사이다라는 유튜브를 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KIA 타이거즈 편파 입중계 방송을 진행한다.
5. 관련 문서
[1] 광주상고 출신이었으나 주전자리를 잡지 못해서 한서고로 전학을 갔다.[2] 신인왕에 .288 22홈런 81타점을 기록한 이동수를 제치고 수상한 것이었다.[3] 1995시즌의 해태를 보면 ERA 1위, 타율 7위(8개구단 중)로 투타의 불균형이 극과 극을 달리던 시기였다. 이종범이 원정경기를 출전할수 없었고, 1994년에 규정타석에는 못미쳤으나 3할2푼을 쳐주던 이순철이 이 해부턴 갑작스런 노쇠화로 인해 겨우 2할을 치는 타자가 되었으며, 이호성, 이건열, 정회열 등도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했다. 이종범과 홍현우 그리고 그나마 1인분은 하는 양회열 외에는 OME급의 타선이었던 것. 야만없이지만 해태의 타력이 평균수준만 되었어도 1995년도의 챔피언은 누가 될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4] 1995년 골든글러브는 김민호가 수상했는데, 김민호의 성적이 준수했던 점, 우승을 했다는 점이 모두 감안되었다. 게다가 김민호는 한국시리즈 MVP까지 수상했으니. 이종범과 유지현이 모두 방위병 복무 중이어서 자연스럽게 3인자 격인 김민호가 부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