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0:01

구대성/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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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프로 경력
3.1. KBO3.2. NPB
3.2.1.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3.2.1.1. 구대성의 일본 리그 시절은 절반의 성공인가, 뚜렷한 성공인가
3.3. MLB3.4. KBO 리턴
3.4.1.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3.5. 호주 프로야구 리그
3.5.1. 시드니 블루삭스 시절3.5.2. 질롱 코리아 시절
3.5.2.1. 2018/19시즌3.5.2.2. 2022/23시즌
4. 국가대표 경력
4.1.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4.2. 2000 시드니 올림픽4.3. 2006 WBC
5. 연도별 주요 성적6. 보유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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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대성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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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측부터 정민태, 아래 쪽은 구대성, 정민태의 옆에 있는 사람이 양준혁[1]

대전고등학교 시절,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수투수로 뽑혔고, 결승전에서 완투하는 등 총 5게임에서 5승을 챙겼으며 그의 활약으로 대전고는 경남고를 꺾고 청룡기에서 우승을 일군다.[2]

한양대 관광학과(1989학번) 에 진학해서는 학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김동수(포수), 임형석, 오희주, 정민태 등 걸출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통 실적이 없던 한양대는 구대성이 입학하자마자 대학야구 3관왕(백호기, 춘계/추계 대학리그)을 석권하며 전성시대의 신호탄을 쏘게 된다. 1학년 구대성은 3개 대회 모두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하고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2학년 때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이 해 한양대는 무관에 그친다. 3학년 때는 89년에 이은 모교의 대학야구연맹전 석권에 일조하는 한편 대륙간컵 우수투수상을 수상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며 아마야구 MVP를 수상했다. 이 당시 한 학년 위였던 정민태와 함께 좌대성 우민태로 불렸으며,[3] 4학년이 된 1992년에는 신입생 박찬호(1973), 차명주 등과 함께 대통령기 우승에 힘을 보탰고 우수투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일본 킬러 타이틀이 붙은 것도 이 때 일로 1학년 때 대륙간컵에서 일본 대표팀의 노모 히데오와 맞붙어 10이닝 3실점 완투패를 한 경기가 시초였다. 이후 국제야구연맹(IBA) 대회에서 일본에 10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일본 킬러의 역사가 시작됐다. 비단 일본뿐이 아니라 IBA 대회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고 91년 대륙간컵에서는 니카라과와 멕시코를 바르며 우수투수상을 타는 등 국제대회에서 고루고루 활약했으며, 그래서 이때는 일본 킬러라기보다는 국제용 투수[4]라는 별명이 더 유명했다.

구대성의 야구인생은 그야말로 혹사 그 자체이며 오죽하면 혹사를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다. 대전고 시절 청룡기에서 6경기 49이닝을 던졌고, 한양대 재학시절 때에는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로 조기복귀해서 춘계/추계리그 우승을 일궈내는 한편, 국가대표팀도 꼬박꼬박 불려나갔다. 국대에서도 미국전 완봉승 다다음 날 선발등판해 일본전 완투승을 남기는(89년 IBA 대회) 등 상상을 초월하는 혹사를 당했다. 여담으로 이 때 당한 부상 관리가 제대로 안 되며 프로 입단 첫 해 부상이 재발, 루키 시즌을 날려먹게 된다.


3. 프로 경력

3.1. KBO

3.1.1. 빙그레-한화 이글스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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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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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서도 그 혹사의 후유증으로 루키 시즌을 거의 반쯤 날려먹다시피했다. 훈련부족으로 5월이 되어서야 데뷔전을 치렀고, 그나마도 두 경기 등판 후 개점휴업 간판을 내걸었다. 시즌 막바지인 9월에나 다시 등판을 시작해 2승을 따낸 게 전부.

하지만 이듬해인 1994년엔 선발투수로 시작해 마무리 송진우와 보직을 바꾸며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 7승 8패 12세 ERA 2.60의 성적을 내었다.

1995년에는 선발과 마무리를 병행하며 4승 14패 18세이브 3.5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해 그 해 다패왕[5]을 뒤집어쓰는 등 승운은 따르지 않았으나 161탈삼진으로 탈삼진 2위를 기록하며 위력적인 구위를 뽐냈다. 특히 시즌 후 일본에서 펼쳐진 제2회 한일 슈퍼게임에 한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해서 6게임 모두 등판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18승 3패 24세이브 1.88의 평균자책점으로 다승왕과 구원왕, 평균자책점 1위를 동시에 차지하며 시즌 MVP에 등극하였다. 이 시즌 기록한 9이닝당 탈삼진율 11.85개는 2024년 현재까지도 역대 한 시즌 최고 탈삼진율로 남아 있다. 1996년 시즌 도중 팔꿈치 또는 다리 부상을 당하여 다리 부위에 을 붙이기도 했다.
구대성 전성기 시절 한화는 선발이 5~6이닝을 막으면 구대성을 올리고, 선발이 일찍 무너지면 구대성을 올리고, 선발로 뛸 사람이 없으면 구대성을 선발로 올렸다.[6] 그리고 구대성이 안 나오는 날은 정민철, 송진우가 완투를 하던가, 아니면 그냥 버리는 식으로 경기를 해결. 이 패턴이 가장 빛났던 게 1999년으로, 1, 2, 3선발인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이 최대한 이닝을 막고 내려가면, 나머지 이닝은 구대성이 틀어막아 3경기를 확실히 챙기고 나머지 경기는 이기면 좋고 지면 말고 식의 3승 2패 전략(...)을 펼쳤다.[7] 이런 식의 운용을 하려면 정말 구대성급의 확실한 불펜투수, 그것도 중무리 투수를 가지고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방식. 심지어 한국시리즈에서도 이러한 전략으로 일관한 끝에 5경기 전체 등판, 1승 1패 3세이브를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MVP까지 가져왔다.

당시에는 이광환 감독의 LG가 현대적인 분업화된 야구로 성공을 이루면서 점차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했지만, 필승조로 일컬어지는 강력한 중간계투라는 개념은 그제껏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8] 그래서 당시엔 선발이 7회 언저리까지 막아주면 바로 마무리투수가 올라와서 몇 이닝이건 경기를 매조지하는 방식이 대세였고,[9] 스타 시스템을 구축해서 한국 야구 최초로 투수 분업화를 이룩했다는 그 LG의 마무리 김용수 역시 막 3이닝씩 던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94년 이후에도 멀티이닝 소화 경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정도로 아직 현대 야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절이고, 그래서 구대성 역시 3~4이닝씩 공을 뿌려대고 다음날 또 나와서 3이닝씩 뿌려대고 이런 식이었다.

거기에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전통적으로 암울하던 한화의 불펜 상황도 한 몫했다. 90년대만 해도 중간계투라는 보직은 한물 간 베테랑이나 주력으로는 이래저래 써먹기 애매한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패전처리라는 명칭에서 보듯 이들에 대한 인식도 지금보다 매우 좋지 않았다. 그나마도 당대 투수분업화의 발전 과정에서 LG의 차동철, 해태의 송유석, 쌍방울의 김현욱 등 마무리에 앞서 전천후로 기용되는, 통칭 ’마당쇠‘로 불리는 원시적 형태의 필승조-셋업 투수 개념[10]이 등장하긴 했는데, 한화는 그러한 중계 전천후 롤을 맡았던, 그리고 맡을 수 있던 선수가 1998년의 한용덕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없었던 게 문제였다.[11] 이는 자연스레 구대성의 등판부담 가중으로 돌아와, 얄짤없이 3이닝 4이닝을 던지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12]

이런 식의 운용은 구대성의 커리어에 있어 손해를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는데, 보직이 고정되어있지 않다보니 특히 세이브 수에서 어느정도는 손해를 본 것이 사실이다.[13] 흔히 구대성을 성구회 멤버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은데, 워낙 장기간 선수생활을 한데다 임팩트가 강해 그런 오해가 있지만 실제로는 가입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성구회 멤버가 아니다. 2009년 성구회 창립 당시 투수는 200승을 달성했던 송진우 한 명이었고, 두 번째 투수 가입자인 임창용은 5년이 지난 2014년에야 이름을 올렸다.[14] 투수는 200승 혹은 300세이브가 가입 조건이기 때문에 사실상 입성이 엄청나게 힘들다. 사실, 세이브에서 손해를 본 건 2003년까지 구원 타이틀이 세이브+구원승 합산 집계 체제였던 것도 있다.[15]

95년 신인 구대성의 투구폼과 공의 무브먼트.

커리어 중 인상적인 것은 리그 MVP를 차지했던 1996년의 기록인데, 단 2경기에 선발출장 했음에도 불구하고 먹어준 이닝이 139이닝이며, 1996 시즌의 성적은 18승 3패 24세이브 방어율 1.88 WHIP 0.76로 현재까지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던 투수중 단 세 명만이 이룩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16] 55경기 등판 중 선발 등판은 단 2경기로 중무리 투수라고 불릴 정도로 계속 중간에서 굴려 댔다는 이야기. 마무리 투수가 다승왕까지 등극한 것은 현재로서도 유일한 수상기록이며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처음에는 좌완임에도 140km 중반을 찍어대던 강속구 투수였지만 거듭되는 혹사로 인해 프로 선수가 되었을 때 이미 구속이 조금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거듭되는 프로에서의 혹사,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 빼놓지 않고 뽑히는 바람에 시속은 계속 떨어져 결국 평균 140km을 겨우 웃도는 구속이 되었다.[17]

일본 진출 전 마지막 등판은 2000년 10월 12일 삼성전이었는데, 특기할 사항은 선발등판(...) 사실 시드니 올림픽 직전인 9월부터 송진우와 보직을 교체해 선발 기용되고 있던 상태였다. 올림픽 직전엔 구대성의 선발 기용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올림픽 당시 구대성의 완투승이 마냥 쌩 기적만은 아니었던 셈.[18] 올림픽 복귀 후 첫 경기였던 10월 3일 현대전에서는(역시 선발등판) 통산 1000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해는 투수진이 망한 관계로[19] 7번이나 선발에 등판해 1996년 이후 규정이닝을 채웠는데, 다만 이는 구대성의 평균자책점 타이틀 수상을 위해 이희수 감독이 밀어준 것도 있었다.

3.2. NPB

3.2.1.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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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대회에서 일본 킬러라 불릴 정도로 일본전에 강했다는 명성 덕분이었는지, 2001년에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해 4년간 선수로 뛰었다.

첫 해에는 불펜으로 뛰다 시즌 도중 선발로 전향하여 7승 9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4.06의 성적을 기록했고 NPB 올스타전에도 출장했다. 2년차부터는 아예 선발로 다시 뛰며 정착해 규정이닝을 채우고 퍼시픽리그 2위에 해당하는 2.5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20] 물방망이 타선으로 인해 5승에 거두는데 그쳤다. 2002년 시즌 오릭스는 3할을 찍은 타니 요시토모를 제외하면 주축 타자들의 타율이 2할대 초중반을 전전할 만큼 빈약한 타선을 보유했고, 그 결과 팀 타율이 고작 .235에 경기당 평균득점이 3.13점에 불과할 정도로 점수를 내지 못한 탓에 구대성을 비롯한 투수진이 그 여파를 고스란히 받게 된 것.[21][22]

어쨌든 2003년과 2004년에도 선발로 뛰면서 각각 6승을 거뒀는데 잔부상 때문에 2년 연속으로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했고 피홈런 갯수가 폭등[23]하면서 평균자책점도 4점대로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오릭스의 나머지 투수진이 타고투저의 여파로 망가져버린 탓에[24] 구대성은 여전히 오릭스의 에이스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구대성의 일본프로야구 시절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명성이나 기대치에 비해서는 아쉬운,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게 된다. 물론 전성기 시절의 구위를 제법 잃은 상태에서 일본에 진출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겠지만. 국내리그에서 구원 투수가 외국 리그로 진출한 상태로 선발 투수로 뛰면서 살아남기 힘든 시기에도 불구하고 후배 정민철이나 선배 정민태 보다는 그나마 잘했었다.

그리고 2004 시즌이 끝난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처음에는 구대성의 영입에 관심을 보였던 뉴욕 양키스 입단이 유력하다는 분위기였고, 언론에서도 구대성의 양키스 입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보도를 연일 내놓았다. 하지만! 금방 진행될 것 같았던 양키스와의 계약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2005년 1월, 뉴욕 메츠와 1년 스플릿 계약을 맺는다.[25]

여담으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마지막 경기가 된 경기인 2004년 9월 27일 경기의 상대 선발 투수였다. 이 경기는 긴테쓰와 오릭스의 합병 전 치러지는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이름으로 치른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구대성은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선발 투수가 되었다.[26] 이 날 구대성은 승리투수가 되어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승리투수도 되었다. 참고로, 상대팀이었던 킨테츠의 선발 투수는 당해 퍼시픽리그 다승왕이자 훗날 2009 WBC 한국전에서의 활약과 MLB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BWAR 1위를 기록한 시즌을 보내며 한국 야구팬들에게 유명해진 이와쿠마 히사시였다. 다만, 이와쿠마는 당일 경기에서 1.2이닝 만에 어깨에 무리를 느껴 관리 차원에서 조기강판되었다.
3.2.1.1. 구대성의 일본 리그 시절은 절반의 성공인가, 뚜렷한 성공인가
다만, 당시 구대성의 성적을 클래식 스텟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당시 리그 환경은 80여년간의 NPB 역사를 모조리 통틀어봐도 전례없는 수준의 타고투저 시즌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 정도의 타고투저를 보기 힘들 것이기에 전무후무하다고 봐도 될 정도. 얼마나 (투수 입장에서)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면, 당시 2003-2004년 퍼시픽리그의 전체 리그 평균자책점이 4.65, 4.69로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정도 거슬러 1936년부터 집계된 NPB 각 시즌의 평균자책점을 모조리 통틀어도 전체 4위, 2위에 해당할 정도의 타신투병의 시대였다. 2004년의 퍼시픽리그의 경우에는 이에 한 술 더떠 4.69의 리그 평균자책점으로 NPB 역사 상 전체 2위라는 기염을 토했다![27]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덧붙이자면, NPB 투고타저로 유명한 시즌인 2011년 퍼시픽리그 평균 자책점은 2.96, 2012년 센트럴리그 평균 자책점이 2.87이었다. 최근 10년간 NPB의 평균자책점은 대부분 3점대 중후반을 유지하는 중이며 그나마 딱 한 번 리그 평균자책점이 4점대를 넘본 그나마 투고타저에 가까웠던 2018 시즌 센트럴리그 기록조차도 ERA 4.10으로 2003년과 2004년의 퍼시픽리그 기록에는 비할바가 못된다. 2003 ~ 2004년에 비하면 2018년은 4점대 초반에 불과한데도 당시 타고투저 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왔을 정도니 4점대 후반을 기록한 2003 ~ 2004년의 타고투저타신투병...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 이뿐 아니라, 2003년 퍼시픽리그의 경기당 평균 득점은 5.01, 2004년 퍼시픽리그의 경우에는 한 술 더떠 5.20으로 대표적인 타고투저 시즌으로 유명한 2014 ~ 2018년 다섯 시즌 동안 한경기 평균 득점 5.4점대의 KBO 리그[28]와 견주어도 될 수준이었다.

그리고 당시 퍼시픽리그의 타격 지표까지 살펴보면 더 가관인 타신투병 시즌이다. 2004년 퍼시픽리그의 리그 평균 타율은 0.278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1위인 시즌[29]이었으며 OPS도 0.791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2위를 기록하기도 한 시즌[30]이다. 장타율도 0.440으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5위를 기록 하였다. 타점도 리그 전체 3913개의 타점이 터지며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4위를 기록한 시즌이기도 했다. 자세한 이해를 돕기위해, 투신타병으로 유명한 시즌인 2011년 시즌과 비교를 해보자면 2011년은 퍼시픽리그 평균 타율 0.251, 센트럴 리그는 0.242였다. OPS도 2011년 퍼시픽리그는 0.652 센트럴 리그는 0.642로 왜 당시 리그가 투신타병 리그였는지 타격 지표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한 수준. 참고로, 최근 10년간 NPB의 타격지표를 봐도 타율은 평균적으로 2할 5푼대에서 놀고 있으며, OPS도 7할 0푼대가 평균 수준이다.[31]

또한, 2003년 퍼시픽리그의 리그 평균 타율은 0.276으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2위인 시즌이었으며 OPS도 0.790으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3위를 기록하기도 한 시즌이다. 그리고 이 해 퍼시픽리그에서 터진 리그 전체 홈런 갯수가 정확히 1000개로 홈런 갯수만으로도 전체 7위에 랭크된 시즌이다. 애초에 NPB의 80여년간의 긴 역사 동안 양대리그를 통틀어 한 시즌 홈런 갯수가 1000개를 넘긴 시즌이 7시즌 밖에 안될 정도로 1000개의 홈런은 희귀한 기록이다. 참고로 2003년 타점 갯수는 리그 전체 4040 타점으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3위를 기록한 시즌이기도 했다. 이렇게 다른 시즌과 비교해 기록적인 타격 지표들이 쏟아진 해였으므로 당시 리그환경이 (투수 입장에서)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리그환경에서 기록한 구대성의 ERA 4.99와 ERA 4.32는 지금 관점으로는 평균이하의 투수지만, 당시에는 평균 혹은 평균 이상의 선발 투수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구대성이 겪은 NPB임창용이나 선동열 혹은 지금 야구팬에게 비교적 친숙한 오승환이 겪었던 2010년대 중반 NPB와도 리그 환경이 사뭇 다르다. 임창용센트럴리그에 몸담던 시기인 리그 ERA는 3.74, 3.55, 4.13, 3.06로 전반적으로 투고의 시대에 가까웠다. 오승환이 뛰던 시기도 평균 자책점이 3점대 중후반이기에 구대성이 뛰던 시기의 4점대 중후반과는 큰 괴리가 있다. 선동열이 뛰던 시기의 센트럴리그 평균 자책점도 ERA 4.07, 3.86, 3.67, 4.13으로 지금의 평자책과 비슷했던 시기이기에 구대성이 뛰던 리그환경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구장 파크팩터기준으로 오승환과 선동열은 NPB의 대표적인 투수 친화 구장인 각각 고시엔과 나고야돔에서 주로 뛰었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 다만 구대성이 활약할 당시 오릭스의 구장인 홋토못토 필드 고베의 경우에는 파크팩터 기준 타자 친화에 가까운 중립구장이었다. 그리고 임창용이 몸담던 야쿠르트의 홈구장 메이지 진구의 경우에는 도쿄 돔과 더불어 대놓고 타자친화 구장[32]이었으므로 임창용이 투고라는 리그 환경 덕에 요행으로 좋은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한다.

이는 당시 퍼시픽리그 최고 투수로 군림하던 마츠자카 다이스케와의 비교를 통해 보면 더 명확해지는데, 마츠자카는 01~04 시즌 4년간 653이닝 동안 평균자책점은 3.23을 기록했으며, 당시 제일가는 선발 투수가 이 정도 수준을 기록한 리그였는데 당시 구대성이 남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가 있다. 심지어 마쓰자카는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인 2003년과 2004년에 2년 연속으로 퍼시픽리그 최우수 방어율(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내기도 했는데, 당시 기록이 각각 2.83과 2.90으로 1위 기록이 3점대에 가까운 정도에[33] 같은 해 선발 16연승 등으로 좋은 피칭을 선보이면서 사와무라상 및 다승왕, 마츠자카와 공동으로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한 사이토 카즈미조차도 저렇게 현재 기준으로는 아주 좋다고 평가하긴 힘든 평균자책점(2.83)을 기록한 것만 보아도 당시 퍼시픽리그가 얼마나 타고투저가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34] 참고로 같은 시기의 일본 시절 4년을 통틀어 구대성은 ERA 3.88을 기록했기에 꼴찌팀에서 활약한 것까지 감안하면 더욱 가치가 올라가는 기록이라 볼 수 있다.[35] 구대성은 2003~2004년의 경우 잔부상에 시달려 규정 이닝을 채우지도 못했고, 팀 사정상 승수나 승률면에서 크나큰 손해를 본 시즌이기에 클래식 스탯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리그 최고 투수인 마츠자카[36]와 비교할 때 클래식 스탯 차이는 크지만, 의외로(?) 평균자책점은 큰 차이가 안난다는 점과, 구대성이 그것도 압도적 꼴찌팀에서 기록한 성적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절반 이상은 확실히 넘긴 성공이라 봐도 큰 무리는 없다.

특히, 2002년의 구대성이 기록한 WAR 4.2만 봐도 선동열이 1997년에 기록한 WAR 4.0을 제외하고 단일 시즌 기준 KBO 리그 출신 투수 중 어느 누구도 구대성과 비슷한 WAR을 기록한 시즌의 투수가 없다.[37] 물론, 선발과 구원의 WAR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적어도 구대성이 밥값을 못했거나 클래식 스텟만으로 평가절하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 그리고 이 2002년의 오릭스는 팀이 11경기차 꼴찌를 할 정도로 팀 전력이 부실한 상황이었다. 1위와의 승차는 무려 39경기였을 정도니 당해년도 퍼시픽 리그 선발 투수 가운데 평자책 2위를 할 정도의 시즌이었으나 팀 사정상 10승은 어림도 없었다는 소리. 그렇기에 구대성의 2002년 기록은 투승타타의 허상을 보여주는 시즌이기도 하며 2012 KBO의 그 팀그 분이 떠오를 정도인데 클래식 스텟만으로 당시 구대성의 성적의 가치가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심하다.

또한 NPB에서의 구대성은 역대 KBO 리그 출신 선수 중 유일하게 선발로 풀시즌을 소화하고 규정이닝을 충족한 선수이라는 점도 간과되었다. KBO 리그 출신으로 NPB에서 활약한 투수 중 2022년 현재까지도 규정 이닝 이상을 충족해본 투수는 구대성이 유일하다. 사실, 굳이 KBO 리그 출신으로 한정 짓지 않아도 매우 드문 기록.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선동열임창용, 오승환은 구원으로 한 시즌 풀로 활약한 적이 있으니 예외라 치고 차치하더라도, 선발로 뛴 정민태, 정민철, 조성민, 이대은 등도 모두 규정 이닝을 충족해 본적이 없다. 이 밖에도, 이상훈[38], 이혜천, 김무영[39] 모두 구원으로 뛰며 규정 이닝을 충족해 본 시즌이 없다. 또한, 전성기 구위를 잃은 채 NPB로 건너간 박찬호김병현[40]까지 NPB에 건너간 한국 선수들은 많지만, 한 시즌 이상 본인 보직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한건 역대로 따져도 구대성과 선동열, 임창용, 오승환 네 명 뿐이고 그 중에서도 선발로 제대로 된 활약을 한 건 구대성뿐. 기준을 느슨하게 잡아 규정 이닝을 달성하지 못했음을 감안하고, 선발로 뛴 선수 중 한 시즌 반짝이라도 보여줬던 선수를 뽑더라도 거론될만한 선수는 1998년도 조성민과 2015년도 이대은 뿐. 구원으로 범위를 넓히면 그나마 이혜천은 2009년 45경기 37이닝 1승 1패 1세이브 12홀드 평균자책점 3.65로 한 시즌[41] 동안 꽤나 쏠쏠한 활약을 보여줬으나, 받은 돈에 비해 쏠쏠했다는 정도지 성적 자체를 놓고보면 준수한 성적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NPB에서 폭망한 정민태정민철과의 비교를 통해 그들보다 그나마 잘했었다는 식으로 단순 우위의 간단한 결론을 내리는 것도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는 구대성의 일본 시절 활약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난 부분이며, 풀타임으로 뛰어보고 평자책 리그 2위까지 해본 투수를 풀타임은 커녕 전력외에 가까웠던 투수 둘과 비교해 단순 우위를 점했다고 내린 결론도 비약이 심하다는 것이다. 구대성은 적어도 풀 로테이션을 돌아봤으며 역대급 타고투저인 2003 ~ 2004년 시즌의 퍼시픽리그에서도 무려 팀내 꼴찌 팀이기는 했지만 에이스로 살아남은 선수다. 그런 선수를 KBO리그라면 모를까 똑같은 상위리그에서 뛰어놓고도 실패한 선수들과의 비교만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비교대상을 정민태정민철이 아닌,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임창용, 선동열, 오승환과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

한 가지 더, 구대성이 정말 NPB에서의 성적이 안 좋았다면 절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 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역대급 타고투저의 당시 리그환경을 고려하면 당시 구대성을 클래식 스텟만으로 평가절하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며 오히려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절반의 성공이라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로 오릭스의 에이스 투수이자 KBO 리그 출신 선발 투수 중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던 시기였으며 그것도 꼴찌팀에서 이룩한 성과이니 오히려 본인의 명성을 재확인 시켜준 시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3.3. MLB

3.3.1. 뉴욕 메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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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는 뉴욕 메츠에서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동했다. 36세의 나이로 콜업되었는데, 이는 2009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출신의 좌완투수 다카하시 켄이 40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콜업되기 전까지 메츠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령 루키 기록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생애 첫 타석에 들어섰을때 타석 제일 먼 곳에서 방망이를 들고 가만히 서있기만 해서 4구 삼진을 당했다. 며칠 뒤 두 번째로 들어선 타석에서는 레전드급 에이스 랜디 존슨과 상대하게 되었는데, 랜디 존슨의 공을 쳐서 깨끗한 2루타로 연결한 뒤 이후 호세 레예스의 보내기 번트 때 무리한 주루 플레이로 점수를 뽑아낸 적도 있다.[42][43] 당시 홈에서의 판정은 오심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는데, 훗날 구대성 본인도 주심이 봐준 것 같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메이저리그 심판들은 약간 애매한 상황에선 홈어드벤티지를 주는 경향이 있고, 허슬 플레이를 하는 선수에게 유리한 판정을 준다는 불문율도 있다보니 좋게 볼 수도 있긴 하다. [44]



이 두 번째 타석은 첫 번째 타석과 극히 비교되어 덕아웃의 메츠 선수들은 모두 폭소했고[45] [46] 한국 뿐 아니라 현지의 해설자들조차도[47] 패닉에 빠졌으며 그날 경기에서는 이닝 중간에 교체될 때 메츠 팬들의 'KOO~'하는 야유같은 함성과 함께 기립박수를 받은 뒤 "오늘의 선수"로 뽑혔다. 이 타석에서 덕아웃의 마이크 피아자데이비드 라이트에게 "구대성이 안타를 치면 자선단체에 100만달러를 기부하겠다"는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그래서 영상을 보면 구대성이 안타를 치는 순간 뒤돌아 보며서 피아자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웃는 라이트와 심하게 당황하는 피아자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덕아웃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에게 엄청난 환영을 받으며 서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장면은 한 번 볼만하다. 참고로 피아자는 약속을 지켜, 실제로 기부를 했다.

다만 이 주루플레이로 인해 옆구리와 어깨에 타박상을 입었는데,[48]

훗날 구대성은 인터뷰에서 '내가 미친놈이었지'라는 말로 이 주루플레이를 후회하기도 했다. [49] 이 사건과 별개로 사건전후로 성적은 꾸준히 좋지 않았고 실력적으로 메이저리그 생활을 하기 힘들어 결국 시즌 후 메츠를 떠나게 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성적은 33경기 0승 0패 6홀드 평균자책점 3.91.
타자로서는 2타수 1안타 타율 0.500 장타율 1.000 출루율 0.500 OPS 1.500.

3.4. KBO 리턴

3.4.1.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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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에 합류하기 전, 구대성은 현대 유니콘스 플로리다 전지훈련에 합류해 좌대성 우민태가 재회하게 된다. 이때 당시 현대의 투수코치이자 구대성의 한양대 선배이기도 한 김시진은 당시 캠프에 온 구대성에게 체인지업 그립을 전수했다. 김시진이 구대성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준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구대성의 한화 복귀가 명확해지기 전이었고, 메이저리그 로스터 진입을 목표로 한 시즌 더 해보거나 일본으로 유턴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직접적으로 맞대결할 경쟁자가 아니기도 하고 곧 제1회 WBC라는 큰 국가대항전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 전력 강화 차원에서 체인지업 그립을 전수했다.

그러나 구대성은 김시진으로부터 체인지업을 배운 직후 해외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한국으로 귀국해 한화 이글스마무리 투수로 복귀하기로 결정하면서 KBO에서 뛰게 되었고 한화 복귀 후 팀 동료이자 막내 투수로 만난 류현진에게 체인지업 스킬을 전수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2006년 한화는 현대와 플레이오프에서 만나 승리했는데, 류현진은 승리투수는 못 되었으나 한화가 승리한 3차전의 선발투수였고[50], 구대성은 그야말로 날아다녔는데 구대성과 류현진의 역투에 키포인트가 됐던 구종이 하필이면 김시진이 가르쳐 준 체인지업이었다. 김시진 코치가 베푼 선의가 본의 아니게 나비효과를 일으켜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 그래서 플레이오프가 끝난 뒤 현대 회식 자리에서 김시진 코치에게 장난섞인 볼멘소리를 하는 코치들이 있었다고 한다.

복귀 초창기 처음에는 완벽한 투구로 대성불패라 불렸으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 특유의 무신경한 피칭으로 두들겨 맞으며 적에게는 희망을, 아군에겐 똥줄타는 상황부여한다. 하지만 언제나 역전 상황에서 (본인만) 여유있게 막으며 모든 이들을 낚는다 해서 쿠낚시 혹은 쿠태공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7 시즌 내내 특수한 폼으로 인해 더더욱 괴롭혀 왔던 무릎수술로 인해 2008시즌에는 6월에서야 등판이 가능하였다. 저멀리 떠나가버린 강속구는 다시 찾지 못하였지만, 관록으로 한화 불펜[51]에서 힘이 되주었다.

2009년에서는 전반기에 46이닝에 연투 10번에 3연투 4번에 4연투 3번(…)으로 한화 불펜진에서 연투에 연투를 이으며 김인식 사단의 노예목록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송진우은퇴하면서 한국 프로야구에서 최고령 투수가 되었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운드 위에서 공을 뿌리고 있으며, 2009 시즌 종료후 한대화 신임 감독이 젊은 선수들을 위한 지옥훈련이라고 하면서 가게되는 나가사키 마무리 훈련에 고집을 부려서 같이 참가했을 정도의 투혼[52]을 보여줬다.

2010년 8월 14일 은퇴를 선언했다. 무릎 부상이 은퇴의 결정적인 영향. 은퇴시기의 인터뷰.

9월 3일에 은퇴경기를 치렀는데 조동찬을 상대로 중견수 플라이 아웃을 잡아 내고, 그렇게 마운드를 떠났다. 이날 선수단과 프런트 모두 대성불패라고 마킹된 유니폼을 입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프런트와의 마찰이 있었던걸로 보이는데 일단 영구결번 자체를 구대성 본인이 고사한걸로 유명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상 참고. 결국 영구결번이 되지않으면서 이후 구대성의 등번호인 15번은 2011년 전체 1지명으로 뽑은 유창식이 물려받게 되었다. 한화 구단 역대 최고 계약금(7억원)을 받고 입단했고 좌완이라는 공통점으로 물려받은 듯하다.[53][54]

은퇴 후 당분간 호주에서 야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로써 한, 미, 일, 호주 4개국 야구를 경험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55]

3.5. 호주 프로야구 리그

3.5.1. 시드니 블루삭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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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0년 11월, 재창설된 호주 프로야구 리그[56]에서 호주 프로리그 첫 세이브를 기록한다. 영상 포탈[57] 그런데 상대 팀에... 호주 리그로 파견 나온 롯데 1.5군급 선수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적은 말 그대로 시망

아무튼 2011년 1월 14일까지 14경기 등판 1승 1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1.37을 기록. 호주에서도 대성불패의 신화를 이어갔다. 좀 더 자세한 스탯을 볼려면 이 곳 참조. 결국 원년 시즌 최고 구원투수 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참고로 처음 호주리그에 들어왔을때 6개 구단에서 모두 영입을 시도했지만 시드니 소재 학교에 다니는 자녀 때문에 시드니 블루삭스로 가게 되었다고.

그러나 2011년 11월 24일까지 4경기에 등판해서 2번의 패전을 기록하였고, 특히 11월 24일 경기에는 9회 말 3점차 리드를 2아웃까지 멀쩡하게 잡아놓고 2타자에게 연속으로 안타를 허용(중견수 앞 단타-좌익수 뒤 투런)하고 다시 주자를 볼넷으로 출루시킨 뒤 내야안타를 맞고 끝끝내 쓰리런을 맞으면서 팀의 승리를 지키지 못하여 결국 이 경기의 패배로 시드니 블루삭스는 리그 최하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3.38로 2년 연속 구원왕을 차지하게 되었다. 팀 시드니도 우여곡절 끝에 4위에 랭크,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왼손 타자로는 평균자책점 0.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호주 프로야구 리그 홈페이지 메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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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시아 시리즈의 흥행을 위해 아시아 시리즈 기간 동안만 퍼스 히트로 트레이드되어 아시아 시리즈에서 등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과연 퍼스 히트에서 마무리 등판이 가능한 상황이 나올지...

제 3회 WBC를 앞두고 속보가 나왔는데, 호주 야구협회 측에서 쿠옹에게 호주 대표팀으로 참가해서 마무리로 뛰어달라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쿠옹은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만약 기사대로 일정이 추진되었다면, 한국 야구계는 최초로 타국에서 뛰는 자국출신 선수를 상대하게 될 수 있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12~13 시즌엔 마무리 자리를 팀 동료 매튜 윌리엄스에게 물려주고 중간 계투 요원으로 뛰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58] 그래도 시즌 중반인 12월 중순까지는 여전히 건재한 모습.

13-14 시즌에는 매튜 윌리엄스가 애들레이드 바이트 팀으로 옮겨, 다시 시드니의 마무리를 맡게 되었다. 시즌 초지만 11월까지 4세이브로 압도적인 단독 선두. 나머지 경쟁자들은 1세이브(...). 게다가 현지시간으로 12월 8일 캔버라 캐벌리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을 하게 되었다. 1아웃만을 잡고 내려갔던 한화 이글스에서의 은퇴경기를 제외하면 오릭스 시절 이후 근 10년여만의 선발등판. 4.2이닝 2실점으로 승패는 기록하지 못했다. 정규시즌이 끝난 시점에서 1승 1패 11세이브로 캔버라 캐벌리의 숀 W. 톨러와 공동으로 세이브 1위를 달성하였다. 호주리그에서의 세 번째 세이브 1위이다. 팀도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캔버라 캐벌리에게 패배하며 4년 연속 3위(...)를 달성.[59] 플레이오프에는 등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즌 두 번째로 최고 구원 투수상을 수상했다. 그야말로 노익장.

2014년 기준 한국나이로 46세이고 만으로 따져도 44세인데, 한국에서 뛰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송진우의 최고령 등판 기록은 넘어섰다. 송진우의 최고령 등판 기록은 43세 2개월 10일. 2014년 3월 20일 벌어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호주 리그 올스타 팀 간의 친선경기에서 7회에 등판해 다저스 타자 안드레 이디어, 후안 유리베, 스캇 반 슬라이크[60]를 상대로 깔끔하게 3자범퇴시키고 내려갔다.

위 경기 즈음의 인터뷰에 의하면 선수생활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안돼요 ㅜ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는 불러주는데가 없으니 못가죠라고 답변. 한화 프런트는 뭐하는거냐 얼른 모셔와라 그런데 진짜 지금 한화와도 평균 이상은 할거 같은데

구단측으로부터 호주 개막전 관람 티켓을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22일 경기 티켓을 받은 거라 23일 류현진의 경기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표를 구해보려고 했지만 모두 매진. 류현진과 사적인 친분을 이용하면 쉽게 표를 구할 수 있었겠지만 자기 편리를 얻자고 선발 등판을 하루 앞둔 후배에게 안 좋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서 22일 경기 티켓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아 다저스 더그아웃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류현진에게 호주 원주민이 쓰는 전통 부메랑과 쿠키를 선물하고, 류현진의 팬인 아들이 산 류현진 모자에 싸인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이 꼭 류현진의 싸인을 받고 싶었다고. 이런 구대성의 사정을 알게 된 MLBAM의 알렉스 피전 해외사업이사이자 MLB 아시아 소셜 미디어 운영자인 SVMG의 밀튼 추가 류현진의 등판 경기를 볼 수 있게 티켓을 마련해줬고, 구대성은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우여곡절 끝에 류현진의 경기를 볼 수 있게 됐다.

2014년 11월 9일 캔버라 캐벌리와의 원정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드러내다가 퇴장을 당했다. 영상. 꽤 거세게 항의를 했는데, 더 큰 문제는 퇴장을 당하고 화를 참지 못하고 경기장 밖으로 공을 던져버린 것.[61][62] 아무래도 징계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기가 끝난 후 구대성은 구심을 찾아가 사과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 공은 야구장을 넘겼다.

2014-15 시즌 구대성은 방어율 2.12, 4세이브로 세이브 4위가 되었고 팀은 또다시 3위를 달성했다. 5년 연속 3위다 겉으로 보이는 성적은 세이브가 적어 못한것 처럼 보일 수 있으나 세부 내용을 보면 회춘하신 모습.[63] 마무리 특성상 이닝수가 적어 정확한 평가를 할 순 없지만 방어율이나 K/BB도 출중.[64] 14~15시즌에는 또한 ABL통산 100탈삼진을 달성 한다. 사실 팀이 시즌 중반까지 하위권에서 빌빌거리고 있었던 원인도 불펜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에 따른 연쇄효과로 구대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 것일 수도 있다.[65] 팀 입장에서는 불안한것 처럼 보이는 구대성을 대체할 불펜투수조차 없었던 것이 뼈아팠던 한 해였다.

2015-16 시즌에는 시드니를 비롯한 어떤 팀의 로스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 과연 이대로 은퇴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사실상 은퇴로 점쳐지고 있다. 그렇긴 해도 일간스포츠 인터뷰(2016년 2월 15일)에서 50살까지 현역으로 더 뛸 생각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호주 야구 리그가 열악하여 리그 선수 상당수가 직장인으로 퇴근하여 야구선수로 뛰는 준실업리그이고 자신도 4달동안 1경기도 빠지지 않고 나와야 2500달러(300만원) 받는 수준이라 돈이 문제가 아닌 그냥 야구가 좋아 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015년 시즌부터 시드니 블루삭스에서 뛰고 있는 임경완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른쪽 어깨가 안좋아서 1년 쉬고 내년에 다시 복귀할 예정이라고 한다. 2016년부터 다시 복귀해서 50살까지 선수생활을 하겠다고...#

2016년에는 15세 이하 호주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참석했다.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은 있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는 발언을 해 은퇴로 기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17 시즌 시드니 블루삭스에 투수코치로서 로스터에 올라가있는 것이 확인되며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를 한 것으로 보인다. # 그와중에 감독하고 코치가 거의 조카 내지는 아들뻘이다(...)

3.5.2. 질롱 코리아 시절

이렇게 야구선수 생활을 완전히 그만두나 싶었지만 2018-2019 시즌에 다시 도전한다고 한다. 그간 공을 던지지 못했던건 허리 통증이 심해서였다고. 그러나 질롱 코리아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선수로써의 모습은 이번 시즌엔 보기 어려울 것 같았으나...
3.5.2.1. 2018/19시즌
최종 라운드에 선수로 등록되어 2019년 1월 19일 투수로 출전했다. 이 날 성적은 1이닝 1피안타 1사사구 무실점.#. 경기 후 인터뷰에서 팬서비스 차원에서 던진 것이고 앞으로 선수로 뛸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혀 사실상 은퇴를 선언하였는데...
3.5.2.2. 2022/23시즌
2023년 1월 16일 이병규 감독과 구단 측에서 선수 등록 요청을 흔쾌히 허락 해줘서 다시 선수등록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66] 출전 시 크리스 옥스프링의 ABL 최고령 투수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

파일:구대성 22-23시즌 첫 탈삼진.gif
복귀전 첫타자 상대 탈삼진
1월 19일 애들레이드와의 경기에서 첫 등판 하였다. 8회말 구원등판 하였고, 1이닝 무실점 삼진 2개 땅볼 1개로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었다! 팬들과 해설위원 모두 매우 놀랐다. 이 등판으로 ABL 최고령 투수 기록을 세웠다.[67][68]

다음날인 1월 20일 경기에도 등판하여 볼넷 - 뜬공 - 뜬공 - 안타 후 2사 2,3루 상황에서 땅볼을 유도하였으나 2루수 김규성의 수비 실책으로 실점을 허용하였다. 이후 볼넷을 하나 더 내줬으나 다음 타자에게 땅볼을 유도하여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이닝을 종료하였다. 이날 기록은 1이닝 2볼넷 1피안타 2실점 무자책

1월 22일 시즌 최종전 8회초 2사에 등판하여 1구만에 땅볼을 유도해내고 이닝을 마감했다. 시즌 최종 기록은 3게임 2.1이닝 무자책점

4. 국가대표 경력

구대성은 아마 시절부터 국제대회에 굉장히 강하기로 유명했다. 아마수준의 온갖 국제대회에 출전해 출전하는 대회마다 상대를 압도했으며, 특히 일본을 상대로는 아마시절부터 굉장히 강한 모습을 연달아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1989년 제9회 대륙간컵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12이닝 3실점 완투패, 같은 해 제2회 국제야구협회 회장배 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10이닝 14탈삼진 1실점 완투승[69], 제3회 국제야구연맹 회장배 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9이닝 4실점 완투패 등등. 또한 프로 3년차에 출전한 1995년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셋업맨으로 6경기 모두 출장해 4이닝동안 실점하나 없이 막아내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구대성은 대학시절부터부터 이미 엄청난 혹사에 시달렸던 데다 빙그레에 입단해서도 여전히 꾸준한 혹사를 당했었다. 그럼에도 그가 아마 시절 국제대회에서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는 프로무대에서도 여전했으며, 특히 그가 출전한 두 번의 메이저 대회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6년 제 1회 WBC 대회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대표팀의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과 WBC 4강신화의 1등공신으로 활약했으며, 두 대회에서 모두 후배들에게 병역특례까지 선물해 준 대한민국 국대의 대표적인 합법적 병역 브로커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메이저 대회였던 시드니 올림픽과 WBC로 한정할 때 그의 경이로운 국제전 통산성적은 8경기 27.1이닝 2승 무패 3홀드 탈삼진 26개에 평균자책점 1.66. 심지어 이 중 절반인 4경기를 풀전력으로 중무장한 일본을 상대로 등판했으며, 1경기는 WBC 미국전에 등판해 MLB 올스타 수준의 긁어모은 미국의 강타자들을 상대로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성적이다.

4.1.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 일본전, 4대3 한국의 리드 상황에서 구대성은 7회 마무리투수로 등판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 최고의 포수 후루타 아츠야 등을 포함하여 6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경기를 마무리한 바가 있다.[70] 이때부터 구대성은 일본 프로팀들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이 대회 1년여 후 결국 NPB에 진출을 하게 되었다.

4.2. 2000 시드니 올림픽

올림픽 직전, 대표팀 확정 당시에는 선발로 쓴다는 계획이 있었다. 완투승 떡밥 이 때문인지 9월부터는 송진우와 보직을 바꿔 선발로 뛰기도. 하지만 당시 대표팀에 좌완투수가 송진우, 구대성 둘 뿐이었고(...) 결국은 계투행. 이후 이승호가 송지만 대타로 투입되면서 좌완 요원은 세 명으로 늘었다. 올림픽 도중에는 믿었던 정민태가 부진하여 결국 마지막 경기 선발로 기용된다.

당시 임선동은 약체 이탈리아에 털릴 정도로 부진하여 쓰이지 않았고, 정민태도 부진했던데다 예선 일본전에서 발목부상을 당했다. 선발 경험이 있던 정대현-송진우-박석진은 전날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사용, 이승호-손민한은 그 전전날 나온 상태였다. 진필중-임창용은 마무리로 시즌 중 선발 등판이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 구대성은 23일 일본전에서 5이닝을 던지고 27일까지 4일을 쉰 상태였다. 19일 쿠바전 이후로 휴식을 취한 김수경도 있었지만 아마시절 일본 킬러의 이미지, 그리고 23일 일본전에서의 역투 때문에 구대성 선발이 매우 유력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18일 호주전에서 진 직후 대표팀 선수들의 카지노 출입 파문이 보도됐다. 여론을 고려할 때 동메달이라도 무조건 확보하여 입국해야 할 상황.

한편 경기 전날 구대성은 심한 담에 걸려 팔을 제대로 뻗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침을 맞고 있는 구대성을 향해 김인식 감독(당시 대표팀 투수코치)이 '괜찮냐'고 묻자 구대성은 '그냥 견딜만 해요'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대성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그럼 내일 선발은 너다'라고 통보한 뒤 돌아섰다고 한다..... 그리고 구대성은 알겠심더 마 함 해보입시더 '하라니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등판했다고.[71][72] 그리고 랜덤 도핑테스트를 끝내고 경기 시작 8시간 전부터 김용일 트레이너가 마사지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한 끝에 팔이 올라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설의 155구 완투승을 이뤄내 후배들의 병역을 책임졌다.[73][74]

참고로 이 경기의 상대투수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구대성이 155구 완투승을 거둔 와중에 마쓰자카 또한 160구 완투패를 기록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 기록이다.[75]

어쨌든 이후 구대성의 몸값은 상한가를 치면서 올림픽 직후 MLB로부터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구대성의 대활약을 직접 겪은 NPB 팀들의 추파가 이어진 끝에 구대성은 2001년 NPB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MLB까지 진출하면서 해피엔딩.

4.3. 2006 W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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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야구를 모두 경험하고 한국무대로 복귀한 베테랑인 구대성은 당연히 wbc 대표에 선발되어, 셋업맨으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후배들의 병역혜택을 이뤄냈다.

예선 첫 경기인 대만전에 등판해 2/3이닝 무실점, 예선 마지막 경기인 일본전에도 배영수의 뒤를 이어 등판해 2이닝동안 탈삼진 2개 무안타로 완벽하게 일본타선을 잠재우며 조 1위로 2라운드행을 이끌었다. 특히 이 경기에서 스즈키 이치로에게 몸 맞는 볼을 던진 배영수와의 일화가 유명한데, 배영수[76]에 의하면, 2006년 1차 WBC 대회에서 배영수가 스즈키 이치로를 맞힌 건 구대성이 경기 중 불펜에서 이따 올라가서 이치로 맞히는 놈 만 엔 준다. 라고 농담삼아 얘기하자 당시 마운드에 있던 봉중근 다음으로 등판할 투수이면서 이치로를 상대하게 될 투수였던 배영수가 진짜 주는 거냐고 물어보고 실제로 맞히게 된 것.[77][78] 배영수가 승부를 걱정하자(당시 1점차였다), 구대성은 뒷처리는 내가 한다라고 말했고, 진짜 배영수가 이치로를 맞힌 후, 다음 세 타자를 삼진-파울플라이-1루땅볼로 처리했다. 일본킬러 겸 그의 배짱과 자존심을 보여주는 사례.#

본선무대에서도 구대성의 역투는 계속되었다. 2라운드 1차전인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1과 1/3이닝 무실점, 2차전인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무려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며, 3차전인 일본전에서는 니시오카 츠요시에게 9회 솔로홈런을 맞았지만 8회를 1이닝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아내고 4강행을 결정지었다. 특히 2차전인 미국전은 마이너리그 올스타 따위가 아니라, 당시 메이저리그의 주전을 박박 긁어모아 만든 초호화 라인업이었는데도 혼자서 3이닝을 막아내며 계투진의 과부하를 크게 줄여주는 역할을 해냈다.

다만 4강전인 일본전에서는 약간의 담 증세로 인해 등판하지 못했고, 그가 없는 계투진은 서재응이 5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낸 일본타선에게 탈탈 털리며 아쉽게 결승은 가지 못했다. 구대성의 이 대회 성적은 5경기 출장 8이닝 1실점 1승 3홀드에 평균자책점 1.13.

5. 연도별 주요 성적

5.1. KBO

  • 통산 성적에서 순위(KBO)는 1,000이닝 이상 기록한 선수 중에서의 순위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빙그레 6 21⅓ 2 1 0 - .667 2.53 18 0 12 11 6 6 1.41
1994 한화 34 121 7 8 12
(5위)
- .467 2.60 89 8 62 128 42 35 1.22
1995 47
(4위)
155 4 14
(1위)
18
(5위)
- .222 3.54 127 18 83 161
(2위)
77 61 1.28
1996 55
(2위)
139 18
(1위)
3 24
(2위)
- .857
(1위)
1.88
(1위)
79 7 33 183
(3위)
32 29 0.76
(1위)
1997 47 102⅔ 8 8 25
(5위)
- .500 3.16 65 7 49 134
(5위)
38 36 1.03
1998 59 123⅔ 8 7 24
(3위)
- .533 2.55 87 5 57 129 45 35 1.12
1999 55 119⅓ 8 9 26
(3위)
- .471 3.09 95 13 53 138 44 41 1.20
2000 48 133⅓ 6 7 21
(5위)
0 .462 2.77
(1위)
98 13 55 136
(5위)
47 41 1.09
(1위)
2006 59 69⅓ 3 4 37
(4위)
1 .429 1.82 56 4 23 76 17 14 1.07
2007 43 42⅓ 1 6 26
(4위)
0 .143 3.19 41 3 12 37 17 15 1.25
2008 38 41⅓ 2 3 0 9 .400 3.48 39 2 16 29 17 16 1.28
2009 71
(2위)
55⅔ 0 0 1 8 - 3.72 54 5 14 56 24 23 1.17
2010 7 4⅔ 0 1 0 0 .000 9.64 7 2 3 3 6 5 2.14
<colbgcolor=#FFFF99> KBO 통산
(13시즌)
569 1128⅔ 67 71 214
(5위)
18 .486 2.85
(5위)
855 87 472 1221 412 357 1.13
완투, 완봉 기록
년도 완투 완봉
1994년 2완투 0완봉
1995년 6완투 0완봉
1996년 1완투 0완봉
KBO 통산 9완투 0완봉

5.2. NP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오릭스 51 126⅓ 7 9 10 0 .438 4.06 96 14 78 143 58 57 1.32
2002 22 146⅓ 5 7 0 0 .417 2.52 122 13 51 144 45 41 1.16
2003 19 113⅔ 6 8 0 0 .429 4.99 131 23 58 118 72 63 1.60
2004 18 116⅔ 6 10 0 0 .375 4.32 105 24 52 99 65 56 1.28
<colbgcolor=#FFFF99> NPB 통산
(4시즌)
110 503 24 34 10 0 .414 3.88 454 74 239 504 240 217 1.33
완투, 완봉 기록
년도 완투 완봉
2001년 1완투 0완봉
2002년 1완투 0완봉
2004년 3완투 0완봉
NPB 통산 5완투 0완봉

5.3. MiLB

역대 기록(투수)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5 노폭 타이즈(AAA) 2 4 0 0 0 0 - 0.00 4 0 0 0 0 1 1.00
MiLB 통산
(1시즌)
2 4 0 0 0 0 - 0.00 4 0 0 0 0 0 1.00

역대 기록(타자)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05 노폭 타이즈(AAA) 2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MiLB 통산
(1시즌)
2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5.4. MLB

역대 기록(투수)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2005 NYM 33 23 0 0 0 6 - 3.91 22 2 16 23 12 10 1.52 0.0 0.2
MLB 통산
(1시즌)
33 23 0 0 0 6 - 3.91 22 2 16 23 12 10 1.52 0.0 0.2

역대 기록(타자)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5 NYM 33 2 .500 1 1 0 0 0 1 0 0 .500 1.000 1.500 0.1 0.1
MLB 통산
(1시즌)
33 2 .500 1 1 0 0 0 1 0 0 .500 1.000 1.500 0.1 0.1

5.5. ABL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0
-11
시드니
블루삭스
18 27 2 1 12
(1위)
0 .667 1.00 14 0 11 30 4 3 0.82
2011
-12
14 16 0 3 8
(1위)
0 .000 3.38 19 2 7 19 10 6 1.56
2012
-13
18 18⅔ 0 2 0 7 .000 2.89 19 0 8 14 7 6 1.34
2013
-14
21 26 1 1 11
(1위)
0 .500 2.08 20 1 13 23 6 6 1.19
2014
-15
15 17 0 1 4
(4위)
2 .000 2.12 19 1 7 21 4 4 1.5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8
-19
질롱
코리아
1 1 0 0 0 0 - 0.00 1 0 1 0 0 0 2.00
2022
-23
3 2⅓ 0 0 0 0 - 0.00 1 0 2 2 2 0 1.29
ABL 통산
(6시즌)
90 108 3 8 35
(2위)
9 .272 2.13 93 5 48 109 33 25 1.24

6. 보유 기록들

  • 7년 연속 20세이브.[79]
  • KBO 리그 최초 9년 연속 두 자릿수 세이브.[80]
  • 역대 마무리 투수 중 유일한 골든 글러브, MVP 수상자.[81]
  • 역대 이닝당 삼진 비율 1위.[82]
  • 평균 자책점 1위를 두 번 이상 달성한 선수 다섯 명 중 한 명.[83]
  • 투수 4관왕: 구원 투수라는 이유 + 몰지각한 기자들 때문에 나중에는 묻혔지만, 어쨌든 투수 4관왕을 달성한 투수 세 명[84] 중 한 명이다.
  • 다승왕-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투수 세 명 중 한 명.[85][86]
  • 7년 연속 세 자릿수 탈삼진.[87]
  • 호주 프로야구 리그 초대 세이브 왕
  • 9회 2사에서 3점차를 뒤집는 만루홈런의 피해자.(1995년 대 삼성전, 상대타자 이동수)[88]

[1] 이 사진속의 각각의 인물들은 KBO에 길이길이 큰 성적을 찍고 은퇴한 레전드 들이다. 심지어 세 사람 모두 우승 반지도 있다.[2] 이 당시 대전고를 이끌었던 선수가 투수는 구대성이었고, 타자는 1987년 청룡기 최우수선수였던 우투좌타내야수 조규철이었다. 조규철은 이후 성균관대에 진학한 후 1993년에 신고선수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고, 1999년에 방출되었다. 1년 선배로 가득염이 있었지만 가득염은 고교 시절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3] 정민태는 바로 전년도(1990) 아마야구 MVP 수상자였다.[4] 이 별명은 원래는 최동원, 이선희(좌완투수), 임호균 등 국제대회 에이스들을 칭하는 찬사 비스무리한 별명이었다. 지금은 사용이 많이 없어졌지만 꽤나 유서깊은 별명이다.[5] 대학선배인 정민태와 같이 공동 14패. 정민태는 8승 14패[6] 이게 제일 심했던 해는 1995년으로 12선발 6완투를 기록했다. 커리어하이인 1996년에는 2선발 1완투를 기록. 두 시즌 모두 선발등판 시 완투율이 50%나 된다.[7] 송진우가 완투 1위, 정민철과 이상목이 나란히 완투 6위를 기록한 것에서 보듯 구대성이 안 나오는 날 이들이 완투로 경기를 해결하는 것, 거기에 구대성은 5경기를 선발등판하면서 선발로 뛸 선수가 없으면 구대성이 선발등판하는 것까지 공식에 매우 충실하게 시즌을 보냈다(…) 여담으로 99년 당시 한화의 완투 경기는 13경기로, 당시 한화보다 완투 경기가 많았던 팀은 15경기를 완투로 해결한 롯데밖에 없었다.[8] 이는 당대의 구원왕 제도가 영향을 끼쳤다. 2003년까지는 구원승이 타이틀 집계에 포함되었었다. 때문에 당시의 마무리 투수는 세이브 상황은 물론, 오늘날 필승/추격조를 쓸 법한 '근소하게 지고 있거나 동점인 상황'에서도 투입되었다. 때문에 당연히 필승조/추격조 등의 분업화된 계투 체계가 등장할 수 없었다.[9] 마무리 투수이면서도 126이닝이라는 규정이닝을 돌파한 93년의 선동열 김경원이나, 마찬가지로 100이닝을 넘게 소화한 94년의 정명원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 구대성과 동시대의 계투-마무리 투수였던 쌍방울의 김현욱(97년 무선발 157.2이닝), 두산의 진필중(98년 5선발 158이닝), 해태-삼성의 임창용(97년 135이닝, 98년 133.2이닝, 99년 138.2이닝-모두 무선발)도 상황은 비슷했다.[10] 오늘날 중간계투가 필승조/추격조/셋업/스윙맨 등으로 롤이 나누어져 있고 각 롤을 맡은 선수가 한두 명씩 존재한다면, 당대에는 한두 명의 선수가 이 롤을 다 수행했다. 그래서 전천후, 마당쇠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다분히 원시적이지만, 어쨌건 이러한 롤의 등장으로 중계투수가 선발과 마무리 사이를 연결하거나 마무리를 대신해 선발로 임시등판하는 등 기존 마무리의 역할을 많이 분담하게 되었으며, 이는 마무리 보직이 전문화되고, 마무리 투수들의 세이브 및 구원승 개수가 증가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11] 나머지 계투진은 이상군, 홍우태, 김경원 등 한물 간 투수들이나 터지기 전의 김해님, 이상열 등 영 못 미더운 신인들로 이러한 역할을 맡길 선수가 없던 것이다.[12] 구대성 말고도 암울한 중간계투진에 피해를 입은 또 다른 선수가 있으니, 바로 송진우. 명색이 1994년 이후 전업 선발투수로 활동했다곤 하지만, 하도 시즌 중 중간계투 전향이 다반사였던 탓에 순수 선발로만 경기에 등판한 시즌이 21시즌 중 단 2시즌(95, 06)뿐이다.[13] 다만 보직을 오락가락하는 것이 당시엔 흔한 일이었으며, 당대 투수 중 이로 인해 기록에 손해를 안 본 선수가 거의 없을 정도다. 조커 카드마냥 기용된 선동열송진우도 같은 평가가 있고, 김용수, 정명원 등의 전문 마무리 투수들 또한 선발 전업 등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통산기록에 손해를 보았다.[14] 그 5년 사이에 타자는 네 명이 이름을 올렸다.[15] 때문에 현재라면 마무리 투수가 등판할 상황이 아닌 동점 박빙이나 1점차로 끌려가는 상황이 당시엔 등판 타이밍이었다. 이렇게 된지라 2000년대 이전 활동한 마무리 투수들은 50승-100세이브 이런 식으로 기록이 굉장히 어정쩡하게 쌓인 경우가 많았으며, 당시 가장 젊은 축으로 구원승 합산집계 제외 이후에도 롱런했던 임창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성구회에 가입하지 못했다.[16] 다른 두 명은 영원한 회장님 송진우와 2001시즌 LG트윈스에서 활동했던 투수 신윤호. 단, 이 기록은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쳐서 세이브포인트(SP)로 구원왕 타이틀을 결정했던 2003년도까지만 적용된다. 세이브만으로 최다세이브 수상자를 결정하는 2004년부터는 다승-구원 동시 석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17] 더 놀라운 부분은, 그 떨어진 구속도 당시 한국 좌완 투수들의 평균 구속보다는 훨씬 빨랐고 우완 투수들의 평균 구속도 상회했다는 부분이다. 구대성이 얼마나 강력한 투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떨어진 구속으로 일본을 거쳐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해 1년이지만 쏠쏠히 활약했다.[18] 물론 당시 아팠음에도 투혼을 발휘한 건 기적이 맞지만, 최소한 선발 투수로서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는 얘기다.[19] 정민철이 일본으로 진출을 해서 1선발을 믿고 맏길 만한 투수가 이상목송진우(야구) 였는데 이상목은 시즌 초 어깨부상으로 시즌아웃, 결국 송진우가 선발과 계투를 오가면서 거짓말 안하고 개고생을 했다. 심지어 구대성 일본 진출 후 선발/계투로도 번번히 출전하였고 이는 정민철이 국내로 복귀 했을 때도 이러했다.[20] 1위는 팀 동료 카네다 마사히코. 이쪽은 평균자책점 2.50로 타이틀을 수성했음에도 빈약한 팀 타선 때문에 4승 9패에 그치고 말았다.[21] 2002년 퍼시픽리그 자체는 평균 득점은 3.98/평균자책점 3.70로, 전년도의 타고투저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어 투타 밸런스가 어느 정도 돌아오면서 투고타저에 가까웠던 중립 시즌이었다. 리그 평균득점으로만 따지면 한국프로야구의 2006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다만 2006년 KBO는 21세기 최고의 투고타저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하므로 단순히 비교하긴 힘들다.[22] 2002년 시즌을 역대급 투고타저 시즌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투고에 가까운 시즌이긴 했어도 역대급 투고타저로 볼 수 있는 시즌은 절대 아니었다. 당시 2002년 시즌의 퍼시픽리그의 리그 평균자책점은 3.70으로 2022년 기준 최근 10년간 일본프로야구의 시즌 평균자책점(3.5~3.8)과 얼마 차이가 안난다. 또한 저반발력 공인구의 여파로 인해 역대급 투고타저 시즌으로 손꼽히는 2011~2012년의 일본프로야구 평균자책점이 2.9-3.0 사이를 오간 것도 참고하면 2002년 퍼시픽리그의 3.70 ERA가 역대급 투고 시즌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오릭스가 평균을 워낙 깎아먹었기 때문이지(...) 경기당 평균득점은 3.98로 의의로 나쁘지 않았다.[23] 이 시기는 일본프로야구 전체의 타고투저 현상이 발생하면서 홈런 갯수 등 타자들의 성적이 월등히 반등하고 반면 투수들의 성적이 현저하게 저하된 시기였다. 일명 '래빗 볼'이라 불리는 반발력이 좋은 공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24] 2003년 오릭스는 팀 실점(927), 자책점(819), 평균자책점(5.95), 피안타(1534) 4개 부문에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 기록을 수립할 만큼 답이 없는 약체의 모습을 보여준 팀이었다.[25] 당시 구대성의 에이전트였던 더글라스 조(조동윤)의 일처리에 대해서 구설수가 많았다. 이후 구대성 측에서 더글라스 조가 구대성에게 계약 내용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고 구대성의 돈을 몰래 착복한 적도 있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26] 덤으로 이 해 구대성은 개막전 선발 투수였으므로, 구대성은 말 그대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시즌의 시작과 끝을 책임진 투수이기도 하다.[27] 참고로 역사상 1위 시즌은 ERA 4.71의 1985 퍼시픽리그.[28] 참고로 2014년 KBO 리그의 경기 당 평균 득점은 5.62, 2016년 KBO의 경기 당 평균 득점이 5.61이었으니 2003, 2004 퍼시픽 리그보다도 더 심한 타신투병의 리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술한 2014년과 2016년은 평균자책점이 5점대를 기록한 해로, NPB 역사를 모조리 통틀어도 이보다 더한 타고투저 시즌이 없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두 리그의 수준차를 고려하긴 해야하지만 액면 그대로는 KBO 리그의 타신투병은 NPB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29] 전체 2위 시즌은 2003년 퍼시픽리그의 타율 0.276[30] 전체 1위 시즌은 1980년 퍼시픽리그의 OPS 0.797.[31] 그나마도 제일 높은 OPS가 2018년 센트럴리그의 0.730으로 2004년의 OPS 0.791과 꽤나 차이난다(...)[32] 쉽게 말해, NPB쿠어스 필드라고 보면 된다(...) 다만, 파크팩터로 가면 쿠어스가 훨씬 심했다.[33] 이보다 더 평균자책점 1위 수치 폭등이 심했던 시즌이 당시 막 타고투저가 시작되던 2000, 2001년이 퍼시픽리그로, 2점대 이하로 규정이닝을 넘긴 선수들이 1명도 없었던 탓에 기어코 3점대 평균자책점 1위 선수가 나오고야 말았다. 주인공은 각각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에비스 노부유키(2000년, 3.27)와 치바 롯데 마린즈의 네이선 민치(2001년, 3.26).[34] 사이토는 다음 해인 2004년에는 철저히 실패를 겪었다가 2005년 다시 반등에 성공했으나, 2007년 이후로 데뷔 초창기부터 선수생활을 좀먹었던 여러 부상들이 재발하면서 수술과 재활을 거듭하다 결국 다시 마운드에 오르지 못한 채 2013년을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35] 여담으로 2004년 시즌 이후에 요미우리, 야쿠르트, 히로시마, 치바 롯데 4개 구단이 레빗볼 사용중단을 선언했고, 2005년 시즌 초반에도 4개구단이 합세해 총 8개 구단이 합의하여 레빗볼 사용을 중단하였다. 즉, 총 12개 구단 중 4개 구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레빗볼 사용을 중단한 시기가 2005년 시즌. 이 덕분에 2005년부터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2점대 초반의 평자책을 기록하는 퍼시픽리그 투수들이 다시 등장했다.(추가로, 2005년부터는 교류전이 생겼고 당시 교류전은 36경기(상대 6팀과 홈/원정 3연전 각 1회씩)씩이나 되었기 때문에 교류전 일정이 상당히 길었다. 이 덕에 전 구단이 레빗볼을 사용하지 않던 센트럴리그와 길게 만나게 되며 퍼시픽리그 투수들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는데 일조했다.) 참고로, 그 주인공들은 전년도의 부상 및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온 스기우치 토시야(2.11)와 전성기를 맞이한 와타나베 슌스케(2.17), 그리고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 마쓰자카 다이스케(2.30). 이후 2006년 시즌부터는 12개 구단 모두 레빗볼 사용을 전면 금지하였고 몇년 만에 다시 1점대의 평자책을 기록한 퍼시픽리그 선발투수(사이토 카즈미, 1.75)가 나왔고 2007년부터는 나루세 요시히사, 2008년에는 이와쿠마 히사시, 그리고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 1점대 평자책을 기록한 다르빗슈 유를 필두로 2011년부터는 다나카 마사히로가 그 바톤을 이어받아 지금의 야마모토 요시노부까지 이어지며 1점대 평자책의 퍼시픽리그 선발투수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36] 그것도 마츠자카는 타격 및 전반적인 성적에서 강세를 자랑했던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이었으므로 전력상 구대성보다도 좋은 환경의 팀 소속이었기에 승수나 승률면에서는 우위를 점하기 쉬웠다.[37] 물론, 타자로 범위를 넓히면 이승엽이나 이대호 등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둘은 구대성의 WAR 기록을 상회하는 기록을 남겼다.[38] 정확히는 1998년에는 선발로 출전은 했으나 1승을 거두는데 그칠 정도로 얼마 출장도 못했고, 1999년도에도 선발로 뛰다가 시즌 도중에 계투로 전향해 규정 이닝을 달성하지는 못했다.[39] 주로, 패전조에 머물러야했다.[40] 일본 시절 1군 등판이 없다![41] 사실 2009년 이혜천도 시즌 내내 좋은 피칭을 보여준 선동열, 임창용, 오승환과는 달리 시즌 초 부상에 시달리다 중반쯤 복귀하여 호투한 케이스.[42] 이 경기에서 조 벅의 "안녕하십니까?" 한국어 드립이 나왔다. 해설자였던 팀 맥카버가 웃으며 어디서 들었느냐며 묻자 고등학교 동기였던 한국학생이며 좋은 친구였다고 대답한다.[43] 영상을 보면 포수가 번트 커버하려 홈 플레이트에서 좀 떨어져있었고, 구대성이 달려올 때 포수도 홈 베이스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홈 플레이트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파고 들었다 볼 수 있다.[44] 실제 방송 영상의 슬로우모션을 보면 태그가 먼저되어 아웃 타이밍이다.[45] 생각해보시라 랜디 존슨의 키가 2미터 10센티였고, 구대성의 키가 180센티 조금 넘는다. 동영상에서도 보면 키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런데 친 타구는 거의 홈런성 타구였다. 이걸 지금으로 치면 김선빈장외홈런을 날린 것이나 같은 급의 충격이었던 셈이다. 여기에서 나온 폭소도 조롱조가 아니라 놀라움이 겨워 나왔던 리액션이었다.[46] 정확히 얘기하면 랜디 존슨은 좌타자 상대 통산 피안타율이 2할도 안 되는 좌타자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투수로 특유의 딜리버리로 인해 좌타자 입장에서는 공이 몸으로 날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투수다. 아무리 투수 타석이라서 랜디가 힘을 빼고 던졌다고 쳐도 프로에서 타자 경력이 일천한 선수가 쳐내기 힘들다는 얘기. 그런 선수의 공을 단순 안타도 아니고 장타로 연결했으니 선수들이 놀랄 만도 한 일이었다.[47] 팀 맥카버는 랜디 존슨이 와인드업을 할 때 '아직 시즌이 많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이게 올해 가장 가망 없는 타석이라는 데 걸겠습니다."("I'm just going to go out on a limb and say that, thus far in this young season, this is the biggest give up at bat." 이란 멘트를 날리는 도중이었는데 이 멘트가 채 끝나기도 전에 구대성의 2루타가 작렬하자 크게 당황한다. 조 벅 아나운서에게 "당신이 나 보고 이런 말 하라고 유도했잖아!" 라고 따지지만 조 벅은 "난 아무 말 안 했습니다ㅋㅋㅋ"라고 받아친다.[48] 흔히 저 슬라이딩할 때 입었던 점퍼에 야구공이 들어 있어 그로인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대성은 본인의 에세이 책에서 이를 부인했다. 참고로 투수는 어깨가 식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각자의 재량에 따라 베이스 러닝 때 점퍼를 입는 것이 허용된다.[49] 다행히 당시 메츠 불펜투수인 하일먼이 구대성이 남긴 주자를 잘틀어 막아 구대성의 방어율은 높지 않았다.[50] 3차전에서 1점차로 패배한 것이 시리즈 전체의 향방을 갈랐다. 4차전은 일방적인 게임이었던 것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51] 당시, 한화 투수진은 고참이라 할 만한 불펜이 없다시피한 상황이었다. 몇 명만 예를 들자면 안영명, 마정길, 권준헌, 윤규진, 정민혁 정도...[52] 사실 이런 영웅담따윈 다 필요없고 이 말 한마디면 된다. 위에 언급한대로 구대성은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사고로 인해 좌완으로 바꿨다.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에피소드.[53] 사실 원래 구대성의 배번을 물려받을 투수는 류현진이었는데 류현진이 신인시절이던 2006년 구대성이 국내로 돌아오자 99번을 썼다. 이후 구대성이 은퇴하자 당시 좌완 루키였던 유창식에게 주게 된건데 유창식은 2014년 시즌 후 이 번호를 이용규와 교환하여 욕을 배불리 먹었다. 심지어 유창식이 이용규에게 먼저 교환하자고 제안한 모양....이후 유창식은 구단에서 승부조작다른 구단으로 트레이드 되어 얼마 못가 전 여친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고 법정구속되었다.[54] 이 과정 아니면 그 전부터 한화 프런트와 단단히 척을 졌는지는 몰라도 이후 KBO 40주년 기념으로 열린 KBO 40인 레전드 시상식에서 한화 이글스가 구대성을 초청하지만 구대성측에서 거절하고 이후 구대성과 커리어면에서 연관이 없는 SSG 랜더스와 키움 히어로즈가 붙은 202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상을 받는다.[55] 두번째 투수는 함께 1회 WBC에 나간 후배 김병현.[56] 1990년대 열렸다가 인기 부진과 크리켓계의 견제로 문을 닫았었다.[57] 등장 브금이 오지 오스본의 Crazy Train.[58] 구대성은 이 시점에서 팀 내에서 1959년생인 코치 한 명을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많다. 감독이나 투수코치보다도.[59] 호주리그가 13-14시즌까지 창설된지 4시즌이기 때문에, 창설 이후부터 내리 3위만 한 것.[60] 2018년 두산 베어스에서 파레기의 대체 선수로 영입되어 두 달도 안 되어 쫓겨난 반레기가 맞다.[61] 이게 방향이 관중석 쪽이라 국내 기사에선 "관중석에 공 투척" 이라고 기사가 나왔다가 수정되기도 하였다.[62] 물론 관중을 노리고 던진 것은 아니지만, 만약 공이 관중석에 떨어졌다면 더 큰 논란이 생겼을 것이다. 다행히 공은 관중석을 넘어 구장 뒤편의 개울에 떨어졌다고.[63] 피안타율이 높아졌지만 K/BB를 보면 호주리그 진출 후 최초로 딱 3.00을 찍었다.[64] 2010~11시즌에는 2.73을 찍었던 비율이 11~12시즌에는 2.72, 12-13시즌과 13-14시즌에 각각 1.75, 1.77을 찍으며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지만 14-15시즌에 딱 3.00을 기록해내면서 반등에 성공한다.[65] 그 나이에 황충마냥 노익장을 시전 하는거도 무리... 만약 했다면 쿠옹은 호주에서 황충놀이를 했을지도.[66] 참고로 현재 질롱 감독인 이병규보다 무려 5살이나 더 많다. 선수 시절 같은 팀에서 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시드니 올림픽, 1회 WBC 등 국가대표팀에서 같이 뛰면서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구대성의 선수 등록에 대해 일각에서는 질롱 코리아의 취지에 맞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67] 하지만 경기는 7대 0으로 전멸했다.[68] 구대성의 유니폼이 없어 금지어의 유니폼을 입고 등판했다.[69] 심지어, 구대성은 이틀전에 미국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뒀다. 고작 하루 건너 또 10이닝 완투를 하는 무시무시한 혹사를 당한 셈[70] 당시 일본타선은 후루타 외에도 노무라 겐지로, 하츠시바 키요시 등 몇몇 프로선수들이 포함된 프로-아마 혼성 타선이었다.[71] 근데 이 에피소드는 말들이 조금씩 다른데, 처음에는 구대성이 너무 아파 '좀 힘들것 같은데요.'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우리의 킬인식님께서는 그의 숨은 명언 왜 못던지느냐. 라고 말했다고. 그 말 듣고 구대성이 황당한 표정으로 웃으며 속으로 '아, 내가 나가야겠구나.' 라고 생각했고 선발등판 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는 말도 있다. 어느쪽인지는 각자 판단.[72] 참고로, 구대성이 아프다고 말한다는 건 진짜로 아픈 거다. 그럴 때를 빼곤 던지라고 해서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73] 사실 0:0으로 진행되다가 8회에 3점 선취득점한 후, 9회 1사 이후 1점을 내줬는데, 투구수도 이미 150구 가까이 된 상황이어서 김인식 당시 대표팀 투수코치가 투수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갔으니, 구대성이 '여기까지 던졌는데 이제와서 강판시키느냐'라고 항의(?)해 계속 던졌다고.[74] 당시 배터리를 이뤘던 홍성흔도 '공이 점점 좋아집니다.' 라고 구대성이 끝까지 던지는 것을 주장했다. 의견조율이 안되자 구대성은 "그럼 제가 안타 하나만 더 맞으면 바꿔주십쇼."라며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김인식 코치는 "그땐 이미 늦는다"며 반대했더니 구대성은 "그럼 안 맞겠습니다. 안타 맞지 않고 제가 다 잡겠습니다." 라며 밀어붙였다. 구대성의 뚝심에 김인식 코치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냥 내려갔다고 한다. 후에 뒤풀이에서 김인식 감독이 구대성에게 만약 안타를 맞았다면 너와 나는 그 때 죽었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75] 훗날, 메이저리그 노조들은 이러한 동양 야구를 보고 정신나간 선수 관리라고 폄하하였다. 아시는대로 두 선수 MLB로 진출 했지만, 구대성은 1년차에 부상, 마쓰자카는 3년차 부터 부상과 부진으로 꼬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구대성 부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리한 주루플레이였지만, 문제는 마쓰자카는 선수 본인조차도 어깨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는 구시대적인 이론을 갖고 있었던 탓에 메이저리그에 가서조차도 일본식 훈련을 고집한 것이 화를 부른 것. 참고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이 때보다 8년 전인 1992년에 마지막 160구 경기가 있었고 이후 이런 투수는 없어지게 된다.참고로 이 마지막 160구 경기를 치른 선수는 랜디 존슨.[76] 배영수도 당시, 미필이라 병역이 걸린 대회였다.[77] 봉중근이 맞히면 안 아프니까 배영수에게 지시했다는 이야기는 근거없는 뜬소문이라고 에세이에서 밝혔다. 하지만 스톡킹에 출연한 봉중근의 말에 따르면 어느 정도 사실인 듯 하다. 정확히는 불펜에서 이치로를 맞히면 10만 엔을 준다고 하였고, 이에 봉중근이 자기가 맞히겠다고 먼저 나섰지만 125km/h 가지곤 안 아프다면서 까였다고(...)[78] 언론에 의해 왜곡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이치로는 30년 발언으로 한국에서 안티가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79] 2018시즌 7년 연속 20세이브를 달성한 손승락과 타이.[80] 두 번째는 손승락.[81] 부인 권현정 씨가 대신 수상했으나, 당시 MVP 경쟁자가 한국 최초로 30-30을 달성한 신인 박재홍이었다. 참고로 선동열은 MVP를 받았을 때 선발 투수였다.[82] 2위가 선동열이다.[83] 다른 네 명은 선동열, 류현진, 윤석민, 양현종.[84] 다른 두 명은 선동열, 윤석민. 이 둘은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 4관왕이다.[85] 당시 구원왕의 기준은 세이브수가 아닌 구원승+세이브수인 세이브 포인트로 구원왕을 가리는 제도였다. 당대 18승 중 절대 다수가 구원승이었기 때문에 중무리를 하면서 구원왕이 가능했던 것.[86] 구대성 이전에 송진우가 달성한 것이 최초였고, 이후 신윤호가 2001년에 달성한 것이 마지막. 21세기부터는 마무리 개념이 제대로 잡혔고, 2004년부터는 세이브 포인트가 아닌 세이브 숫자로 구원왕을 가리게 되어 사실상 거의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 되었다.[87] 마무리 투수 중에서는 유일하다.[88] 또 다른 피해자는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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