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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7130><colcolor=#fff> 한화 초대 회장 김종희 金鍾喜|Kim Chong-Hee | |
출생 | 1922년 11월 12일 |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부대동) | |
사망 | 1981년 7월 23일 (향년 58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 |
본관 | 순천 김씨[1] |
종교 | 성공회(신명: 디도)[2] |
호 | 현암(玄巖) |
학력 | 원산상업학교 졸업 |
부모 | 아버지 김재민, 어머니 오명철 |
형제자매 | 형 김종철 여동생 김종숙 남동생 김종환, 김종식 |
배우자 | 강태영 |
자녀 | 장녀 김영혜 장남 김승연 차남 김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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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약인은 정직해야 한다. 또 정확해야 한다. 약속된 시간과 약속된 장소에서 반드시 폭발하는 화약처럼.
대한민국의 기업인. 한화 창업주.2. 일생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에서 김재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천안 북일학교,[3] 직산공립보통학교[4]를 거쳐 1937년에 경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경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을 구타하자 김종희가 나서서 그 일본인 학생을 구타했고, 김종희는 이 일로 인해 경기공립상업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뒤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여 1941년 12월에 졸업하였다.원래는 일본에 유학하려고 했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진데다, 당숙이 유학을 말렸고, 오히려 알려준 사람을 만나라는 제안을 받고 그 사람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1942년에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그 당시 조선인 근로자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일본인 근로자들이 텃세를 부렸지만 그 중 유일하게 그를 챙겨준 사람이 조선유지 인천화약 공장장을 역임한 마쓰무로 취체역[5]이었다. 그 덕에 그는 조선화약공판에 정을 붙이게 되었고, 화약에 대해 관심이 깊어져 갔다.
8.15 광복으로 일본인 근로자들이 조선화약공판에서 모두 철수하자, 그는 조선화약공판 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화약공판에는 직원들이 많이 줄어든데다, 급여까지 밀려서 어려움에 처했는데, 그는 아버지에게 햅쌀 열 가마니를 받아서 밀린 급여를 해결했다고 한다.[6] 그리고 창고에 쌓인 화약을 미8군을 드나들며 거래하여 미군으로부터 업무 능력과 진정성을 인정받게 된다.
6.25 전쟁이 터지자, 그는 화약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군이 그의 집에 들어왔는데, 그 화약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자세하게는 북한군이 화약이 쓸모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화약을 보관하라고 명령했고, 이후 9.28 수복 때 북한군이 물러가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1.4 후퇴로 다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에는 모든 화약을 영등포로 보낸 뒤 파난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52년 10월 28일에는 부산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52년 적산기업이었던 조선화약공판을 인수하여 운영권을 획득했으며 1956년 4월에는 인천 화약공장을 복구하여[7] 아시아에선 일본에 이은 두번째이자 우리나라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자체 생산하였다. 이 때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한국의 노벨'이다.[8]
196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또한 주한 그리스 명예 총영사로 위촉되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현재도 서울 청계천 한화그룹 사옥에 주한 그리스 대사관이 있고, 김동선이 한때 주한 그리스 대사의 양자로 입적되기도 했다. 비슷한 예로 주한 말라가시 명예총영사로 위촉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와 주한 케냐 명예총영사로 위촉된 전락원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주가 있다.
회사가 성장한 이후에도 한동안 군수산업 이외의 사업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으나 1968년 제일화재를 삼호그룹으로부터 인수하고 경인에너지를 설립한 후, 1973년에는 태평개발을 설립하고 대일유업을 인수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9]
1975년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1976년 3월 6일 천안북일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해에 서울프라자호텔을 개업하였다. 그 외에 1972년.1978년 제1,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각각 지냈다.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 2선거구) 선거벽보 |
1977년에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나자 빠른 대국민 사과 이후 당시 약 90억 원(현재 물가가치상 약 5,000억원) 가량을 내놓고, 모든 직원들을 총동원하여 재해복구에 동원하였다. 당시 그룹계열사 전 직원을 모두 현지에 출장보내서 헌혈하게 하였고, 동시에 보너스 전액과 11월 월급의 2%씩을 각출해서 재해 기금으로 썼다.[10]
말년에 당뇨와 악성 신부전증, 신경통 등으로 고생하다가 1981년 7월 23일 오후 9시, 서울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58세로 사망하였다. 세는 나이로는 딱 60세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유언장이 없었고, 후계 체제에 대한 준비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장남 김승연과 차남 김호연간에 다툼이 벌어진다. 당시 차남 김호연이 공군장교로 군복무 중이었던지라 일단 장남 김승연이 고작 29세[11]의 나이로 그룹을 독차지한다. 김호연이 제대 후에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자, 김승연은 이 요구를 묵살했고 결국 형제의 난이 터져서 10여년에 걸친 지리한 법적 소송이 오고가게 된다. 양자 사이에 분쟁은 1996년에야 김호연이 빙그레를 갖고 나가게 되면서 끝나게 된다.
3.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한화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여담
- 어린 시절 세실 쿠퍼 주교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다.
- 그가 창단한 천안북일고등학교 야구부는 이후 1985년에 창단된 충청도 연고의 프로야구 제7구단 빙그레 - 한화 이글스의 기틀이 되었다. 특히 청주중학교 선수였던 이상군을 북일고로 직접 데려오고 이상군의 형들을 한화그룹에 취직까지 시켜주며 스카웃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한 인연으로 김종희의 장례 때 그의 관을 운구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당시 미성년이었던 이상군이 선발되었다. 이상군은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김종희의 아들인 김승연 회장의 부름으로[12] 한화그룹이 창설한 프로야구단 빙그레 이글스에 합류하여 팀 초창기 에이스로 맹활약했고 1999년에 우승 반지를 끼기도 했으며 한화 이글스에서 코칭스태프 생활을 하다가 현재는 북일고 감독을 하면서 한화그룹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 학창시절 한국인 학생을 괴롭혔던 일본인 학생을 구타한 역사가 있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의리를 중요시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괄괄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본인의 사업과 엮여서 '다이너마이트 김'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한화의 경영 철학에도 신용과 의리가 강조되며 한화 사가의 첫 소절이다. 김승연을 비롯한 자식들에게는 항상 호연지기를 강조하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으로 김승연도 아버지와 성격이 비슷하다.
- 어린 시절부터 화약공장에서 일을 했고 화약을 기반으로 회사를 일군 영향 때문인지 스스로를 항상 화약쟁이로 칭했다고 한다.
-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보다 12살이 어림에도 불구하고 친밀한 사이였다. 김종희의 깍듯한 예우와 성격 덕분에 이병철은 김종희를 각별히 아꼈고 김종희가 갑작스레 사망하여 안타까워 했다.[13]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2 |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서울 종로구 제1선거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2,838 (36.7%) | 당선 (1위) | |
1978 |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서울 종로구 제2선거구 | 무투표 당선 | 당선 |
6. 수상경력
- 대통령 표창(1970)
- 동탑산업훈장(1971)
- 은탑산업훈장(1973)
- 철탑산업훈장(1974)
- 금탑산업훈장(1981)
[1] 익찬공파(翊贊公派) 39세손 종(鍾) 항렬. 파에 따라서는 대동항렬 상(商)이 아닌 종(鍾)을 쓰는 경우도 있다.[2] # 세실 쿠퍼 당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후에 세운 북일고등학교도 원래는 성공회 조선교구에서 천안지역에 세웠던 '북일학교'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이다.[3] 1908년 성공회 부대동성당 교우들이 성당을 건축하고 당시 교구장이었던 아서 터너 주교가 성당을 축성한 직후 곧바로 세운 곳으로, 1946년부터 공립학교인 천안부대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김종희 회장은 천안북일학교의 이름을 이어 천안북일고등학교를 설립했다.[4] 現 직산초등학교.[5] 이사의 일본식 명칭[6] 훗날 이리역 폭발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도 그는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사재를 털어서 복구 비용으로 썼다.[7] 인천 남동구 고잔동에 있는 한화기념관이 옛 화약공장의 흔적이다. 옛 공장 터는 한화건설이 꿈에그린 에코메트로를 지었다. 남동구의 대형 택지개발지구 중 하나인 이곳이 '한화지구'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8] 김종희 회장 본인도 이 별명이 크게 마음에 들어했는지 아예 스스로를 화약쟁이, 다이너마이트 김이라고 칭했다고 한다.[9] 김종희 창업주가 군수산업 이외의 다른 분야를 잘 모르기도 했고 스스로를 화약쟁이로 칭할 장도로 화약과 군수산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다른 업종에 진출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당장 대일유업의 경우에도 인수하지 않으려다가 농림부 장관이 찾아와서 대일유업이 망하면 농민들이 굶어죽는다며 하소연하자 마음을 바꿔 인수한 것이라고.[10] 지금에 와서는 사원들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강제적인 행위로 보이겠지만, 그때까지는 상명하복 의식도 강했고 그룹 총수인 김종희가 먼저 나서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고 재해 복구에 힘쓴 것을 보면 직원 측에서도 회사의 생존과 사고의 책임을 위해 기꺼이 해야 할 일로 생각했던 듯 하다.[11] 당시에는 기업 회장의 말이 절대적이었던 IMF 이전이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지금보다도 유교적인 마인드가 더 강하기도 했고. 지금은 같은 나이에 회장직을 물려받은 쌍용의 김석원, 삼미의 김현철의 사례 때문에 아무리 오너 일가라도 최소 40세는 되어야 회장 자리에 오른다. 40살 이전에 선친이 죽는다면 허수아비 전문경영인을 잠시나마 앉혀놓고 나서 회장직에 오른다.[12] 이 덕분에 이상군은 김승연과도 친분이 두텁다고 한다.[13] 이는 아들과 손자 대에까지 이어져서 이건희와 김승연 역시 서로 호형호제하는 관계를 이어갔고 이재용과 김동관도 각별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특히 김승연 회장이 대한생명 인수 당시 이건희의 자택을 찾아가 형님께 누가 안되도록 보험업을 잘 해보겠다고 하자 이건희 회장이 허심탄회하게 노하우를 전수해준 일화는 상당히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