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에 대한 내용은 세실 쿠퍼(야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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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성공회 한국교구장''' | |||||||||
CBE | |||||||||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비레타를 쓰고 있다. | |||||||||
출생 | 1882년 | ||||||||
영국 | |||||||||
사망 | 1964년 12월 17일 (항년 82세) | ||||||||
영국 | |||||||||
재임기간[1] | 제4대 조선교구장 (1기) | ||||||||
1931년 10월 17일 ~ 1941년 1월 1일[2] | |||||||||
제4대 한국교구장 (2기) | |||||||||
1946년 4월 19일 ~ 1950년 7월 18일[3] | |||||||||
제4대 한국교구장 (3기) | |||||||||
1953년 11월 13일 ~ 1954년 12월 31일[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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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 (1956)[5] | ||||||||
종교 | 성공회 | ||||||||
<colbgcolor=#871B4D><colcolor=#ffffff> 부제서품 | 1905년 | ||||||||
사제서품 | 1907년 | ||||||||
주교서품[6] | 1931년 9월 29일 | ||||||||
런던 성 바울로 대성당 코즈모 고든 랭 대주교 주례 | |||||||||
교구장 승좌[7] | 1931년 10월 17일 | ||||||||
서울대성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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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러분과 나는 우리 주의 능력 안에서 온전한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사람이나 어떠한 곤란이든지 두려워하지 말고 주의 나라가 흥왕되기 위하여 모든 의무와 노력을 다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나아가기를 힘씁시다.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그의 승좌식 설교 중에서.
알프레드 세실 쿠퍼(The Rt. Reverend Alfred Cecil Cooper, 구세실)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그의 승좌식 설교 중에서.
제4대 한국교구장이자 한국 성공회사(史)에서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긴 인물.
2. 생애
2.1. 출생
1882년 영국에서 치안법원장이었던 찰스 필립 쿠퍼(Charles Philip Cooper)와 비어트리스 모드 파트리지(Beatrice Maud Partridge) 부부의 아들로 출생했다.[8]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05년 부제품을 받고, 1907년 사제서품을 받았다.2.2. 선교 입국
1908년부터 약 20년간 한국선교에 이바지하였다.2.3. 주교 서품 및 승좌
이후 1931년 당시 한국교구장이였던 마크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조마가) 주교가 람베스 회의에 갔다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에 배가 충돌하여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새로운 주교로 한국에서 20여년간 사목한 세실 쿠퍼 신부를 주교로 선정했고 신자들도 모두 이를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회신하였다."구세실 신부를 주교로 선정함을 환희 찬성하나이다."
당시 한국교구 총감사제 헨리 존 드레이크(Henry John Drake, 민재은) 신부
1931년 9월 29일 런던 성 바울로 대성당에서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코즈모 고든 랭(Cosmo Gordon Lang) 대주교에게 주교서품을 받고, 그해 10월 17일에 승좌하였다.당시 한국교구 총감사제 헨리 존 드레이크(Henry John Drake, 민재은) 신부
2.4. 주교로서의 업적
쿠퍼 주교는 취임한지 석달만에 30개 본당을 순방하며 516명에게, 그 다음해인 1932년에는 42개 본당을 순방하며 452명에게 견진을 베풀었다. 1932년에는 한 해에만 820명이 영세를, 540명이 망세를 받았다.1931년부터 1933년까지 2년간 2,500여명이 성공회에 입교하고, 그중 1,500여명이 영세를 받을 정도로 큰 결과를 보였으며, 신자는 7,170명에 이르렀다.
쿠퍼는 한국에 성공회가 전래된지 약 50년 만에 115개의 본당과 회당을 가진 큰 교단으로 성장시켰다. 그가 부임하고 나서 축성한 성당은 무려 51곳으로 전직 주교들이 약 50년간 축성한 성당 수와 거의 비슷하다.
2.5. 추방 및 귀환
선교 50주년을 앞둔 1939년 여름,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에 일제는 서울 상공에 반영시위를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하였다.1940년,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1940년 7월 24일 후에 보좌주교가 되는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Arthur Ernest Chadwell, 차애덕) 신부가 평양감옥에 투옥되는가 하면 8월 6일에는 에드워드 이언 캐롤(Edward lan Carroll, 성하영) 신부가 3일간 구류를 당했으며, 8월 10일에는 쿠퍼 본인도 외환관리법 위반과 단파 라디오 소지의 체포 사유로 연행되어 5일간의 구류를 당했다.
결국 1940년 9월 19일 선교사 일부가 철수한다. 쿠퍼는 1941년 1월 21일에 한국에서 추방되는데, 그에 앞서 1940년 9월 27일 《조선성공회보》의 주교통신에 다음의 글을 실었다.
우리가 매일 기도로써
천주의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며
우리를 친히 바칠 생각이 없다 하면,
우리가 유혹을 당할 때나 어려움에 당면할 때
공포와 연약함을 느끼고 낙망하게 될 것이니이다.
그런고로 조선성공회 교우된 우리는
각기 더욱 진실됨으로 감사의 마음을 나타낼 것이니이다.
···(중략)···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라.
그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리라."
바라건대 여러분 가운데 천주의 선하신 사업이
완전한 결과를 가져오기를 바라나이다.
원컨대 천주의 축복이 여러 교우에게
이제와 항상 무궁세에 있어지이다.
1940년 9월 27일 《조선성공회보》 주교통신에서
쿠퍼가 추방당하고, 한국교구는 일본인 사제인 구도 요시오 요한 신부가 교구장 서리 보좌주교로 서품받게 된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성모안식축일에 광복을 맞자마자 쿠퍼는 1946년 3월 말에 출발하여, 4월 19일 김포공항에 비행기편으로 귀환하였다.천주의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며
우리를 친히 바칠 생각이 없다 하면,
우리가 유혹을 당할 때나 어려움에 당면할 때
공포와 연약함을 느끼고 낙망하게 될 것이니이다.
그런고로 조선성공회 교우된 우리는
각기 더욱 진실됨으로 감사의 마음을 나타낼 것이니이다.
···(중략)···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라.
그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리라."
바라건대 여러분 가운데 천주의 선하신 사업이
완전한 결과를 가져오기를 바라나이다.
원컨대 천주의 축복이 여러 교우에게
이제와 항상 무궁세에 있어지이다.
1940년 9월 27일 《조선성공회보》 주교통신에서
그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퇴한 교구를 한인 사제 15명, 차부제 5명과 시종, 전도사 등 16명과 함께 재건해야만 했다. 1만신자는 4,961명으로 줄었고, 영성체자 2,462명, 입교 예비자는 214명에 불과할 정도로 퇴보할 대로 퇴보한 상황이였다.
또한 쿠퍼는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인해 재정문제를 맞닥뜨리게 되고, 성직자 고령화 문제와 양성문제[9] 또한 직면하게 되었다.
2.6. 한국교구 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구는 점점 회생되어 가고 있었다. 그 결실로 1948년 4월 20일 부제성직을 준비하는 강준희(姜準熙) 애단과 심흥섭(沈興燮) 바우로, 전도사였던 이천환 바우로 등 3명과 함께 신학교가 강제폐쇄된 지 8년만에 재개원하였다. 강준희와 심흥섭은 1948년 12월 19일 서울대성당에서 부제성직을, 1949년 12월 16일에는 서울대성당에서 사제성직을 받았다.또한 대전에 교회개척을 시도하고, 정읍과 대구, 부산에도 일본인의 교회에서 한국인 교회로의 전환에 주력했다. 또한 수원의 성 피득 보육원(성 베드로 고아원)을 통해 사회선교를 확장하려 노력하였으며, 상주에 소유하고 있던 20만평의 땅 중 8만평을 매각해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2.7. 죽음의 행진 및 귀환
그러던 와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쿠퍼는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여주성당, 천리성당(현 서울교구 용인성당), 수원성당을 순방하고 26일 밤, 피난길을 역행하여 서울로 출발해서 27일 도착하였다.[10] 7월 3일 찰스 헌트(Charles Hunt, 홍갈로) 총감사제의 체포를 필두로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가 납북됐다. 결국 쿠퍼 역시 7월 18일 윤달용(尹達鏞) 모이서 사제, 이부비(李富非) 비비 수녀원장과 함께 조선인민군에게 끌려갔다.[11] 이들 중 찰스 헌트 총감사제와 클레어 에마 휘티(Clare Emma Whitty) 마리아클라라 수녀는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다가 중강진에서 순교했다. 쿠퍼는 끝까지 살아남아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 1953년 4월 8일 포로송환결정에 따라 4월 9일 만주를 출발해서 4월 22일 런던에 도착하여 자유를 찾았다.1953년 11월 14일 쿠퍼는 부산을 통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죽음의 행진과 그간 쌓인 피로, 무엇보다도 연로한 나이 때문에 결국 1954년 11월 9일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사임을 청원했다. 그해 12월 31일 사임이 수리됨으로써 46년간의 그의 한국선교는 막을 내렸고 교구장직 사임으로 인한 그의 공백은 아서 차드웰 보좌주교가 대리하게 됐다.
2.8. 말년
1964년 12월 17일 영국에서 별세했다.3. 여담
- 김종희(디도) 전 한화 회장에게 직접 세례를 줬다고 한다.
4. 참고자료
- 《대한성공회 백년사》이재정 저, 대한성공회 출판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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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한국교구장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각하 | 4th Bishop of Korea His Excellency Alfred Cecil Coo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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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 14년 7개월 4일[2] 일제에 의한 추방, 9년 2개월 15일.[3] 한국전쟁 중 납북, 4년 3개월.[4] 교구장 사임 수리, 1년 1개월 19일.[5] 관련 자료.[6] 한국교구장 주교로서 서품.[7]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교구장 승좌식[8] 관련 자료.[9] 신학교가 6년간 폐쇄되어 있었기에 당연한 현상이였다.[10] 당시 선교소식지였던 《모닝캄(Morning Calm)》지에 따르면, 선교사들이 서울을 지킨다는 결정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지킨다는, 사목적으로 당연하고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11] 이후 윤달용 사제는 생사여부를 알 수 없게 됐고 이부비 수녀원장은 극적으로 생존해 1990년에 별세했다. 관련 자료 1, 관련 자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