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무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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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3번 | ||||||||||||||||||||||||||||||||||||||||||||||||
팀 창단 | → | 서영무 (1982~1983) | → | 우용득 (1984) |
서영무 徐永武 | |
출생 | 1934년 5월 18일 |
대구광역시 | |
사망 | 1987년 5월 26일 (향년 53세)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대구상고 - 경북대 |
포지션 | 내야수 |
소속팀 | 공군 야구단 |
지도자 |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 서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82~1983) |
프런트 | OB 베어스 관리이사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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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떻게 보면 서영무 감독님이야말로 아버지같은, 선수들의 아버지고, 또 경북 야구의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ㅡ 배대웅, 김은식 작가가 서영무 감독에 대해 질문하자.[1]
ㅡ 배대웅, 김은식 작가가 서영무 감독에 대해 질문하자.[1]
대한민국의 야구인.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이자 대구야구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내야수로 대구상고와 경북대를 졸업한 후 공군 등에서 실업 선수 생활을 했지만, 현역 시절은 지극히 평범했다고 한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모교인 대구상고의 라이벌 학교인 경북고등학교의 감독으로 명성을 쌓았다.[2] 경북고 야구부는 총 20회 전국대회 우승을 기록했는데, 그 중 11번이 서영무 감독 아래서 이룬 것이다. 임신근, 남우식, 황규봉, 이선희 같은 좋은 선수들을 이끌고 1970년대 경북고등학교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그 때 얻은 별명이 그라운드의 제갈공명.
잠시 모교인 대구상고로 갔다가 경북고로 복귀했던[3] 1971년에 한국 고교야구사 불멸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서영무의 복귀 이후 청룡기 우승, 문교부장관기 대회 우승, 화랑대기 우승[4], 봉황대기[5] 우승, 그리고 황금사자기 우승까지 이루어내며 서영무 감독 복귀 직전 우승에 성공한 대통령배를 포함해 이 해 경북고는 국내 고교야구의 전국 규모 5대 대회(화랑대기는 제외)를 독식하는 천하무적의 성적을 남긴 것이다. 이 해에만 서영무 감독은 무려 6개의 감독상을 휩쓸었을 정도.[6]
2. 지도자 경력
서영무의 제자였던 선수들은 그는 대단히 엄격했고,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학생으로서의 기본 소양도 소홀하지 않도록 독려했던 스승으로 기억하고 있다. 배대웅의 회고에 따르면, 선수들에게 수업시간에 잠이라도 잘 지언정 절대 빠지지 말고, 공책을 사주고는 그 날 배운 내용은 뭐라도 좋으니 꼭 몇 장씩 적어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야구 성적만을 중시하는 요즘의 고교 감독들이나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도 않고 밍기적거리다 마지못해 고교야구 주말리그제를 시행한 높으신 분들이 배워야 할 부분.그 뒤 한양대학교[7]와 서울고 감독을 거쳐 프로 출범 직전에는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었다. 대구/경북 연고 구단으로서 삼성의 출범 당시 선수진은 경북고와 대구상고 출신 선수들의 올스타 팀이었고, 그 결과 대구상고 출신에 경북고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서영무가 자연스럽게 팀의 창단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취임 후 나름 코치 영입을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서영무는 당초 원했던 코치들 영입에 실패하였다. 김성근, 조창수, 유백만 등과 접촉했지만, 모두 한 발 먼저 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MBC 청룡에서 먼저 스카우트 했고 결국 프런트에서 정한 인물들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경북고 야구부 시절 애제자인 임신근과 대구상고 후배이자 선수 겸 배터리코치로 영입한 우용득이었는데, 이 때부터 갈등의 조짐은 내재되어 있었다.
1982년 프로 원년에 압도적인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에이스 이선희를 혹사시키면서도 OB 베어스에게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주면서 구단의 신뢰가 흔들렸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 임신근 코치를 해임하고 재일교포인 이충남을 조감독으로 영입했는데, 서영무는 이를 자신을 해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 생각하고 이충남을 견제하기 위해 같은 재일교포 출신이자 이충남의 한큐 브레이브스 선배인 김호중(당시 서울고 감독)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8]
그런데 김호중 코치는 구단 고위층이 이충남 조감독에게 지휘권을 주려는 것에 "시즌 초반에 감독 지휘권을 박탈하는 것은 무슨 경우냐?" 라며 크게 반발하면서 갈등을 일으켰고,[9] 결국 1983년 시즌 초반에 해임당하고 말았다.[10] 이후 서 감독은 기어이 선수단 지휘 권한을 이충남에게 내주었지만 구단의 생각과 달리 팀은 연전연패가 이어지며[11] 삼성 라이온즈 사장 이수빈과 부단장 김삼용이 사퇴하였고, 중앙일보 사장 이종기가 구단 사장을 겸임하고 중앙일보 편집국 부국장 겸 체육부장 노진호가 구단 이사로 부임한 후 서 감독은 지휘권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한번 망가진 팀 분위기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이충남과의 관계도 더욱 불편해지며 서 감독은 1983년 5월 25일 전격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시진이라는 최고의 에이스와 걸출한 타자 장효조를 영입했음에도 지난해 15승 트리오인 이선희, 권영호, 황규봉이 나란히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마운드가 붕괴되는 바람에 팀 성적도 하위권을 기록하고 말았다.
3. 현장 은퇴 이후
감독에서 물러난 후, 이건희 구단주에게 받은 위로금 3천만원을 처남이 운영하던 대구 소재 1급 차량 정비공장에 투자하여 동업하다 곧 야구계에 복귀했다. 1984년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갈등을 빚을 때[12] 삼성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박용민 단장의 요청으로 서영무는 OB 베어스 구단 관리이사로 영입된 것이다. 임무는 친정팀이던 삼성에 대한 전력 분석이었다.그러나 양 구단 간의 치열한 전쟁 아닌 전쟁 와중에 정신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는 1984년 5월 11일 OB와 삼성의 대구 경기를 앞두고 OB의 원정 숙소인 수성관광호텔에서 선수들의 방을 배정해주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졸도하여 경북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식물인간으로 3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1987년 5월 26일 오전 7시 5분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53세.
4. 여담
- KBO 리그 사상 첫번째 트레이드이자 현금 트레이드 방식의 팀 이적 사례가 된 서정환의 1983년 해태 이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서정환이 밝히기를, 오대석에게 밀려 백업 내야수 신세였던 서정환이 서영무 감독에게 강하게 자신을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서 감독은 "알았다. 그렇다면 네가 가고싶은 팀을 알아서 찾아보거라" 라며 허락했고 삼미 슈퍼스타즈와 해태 타이거즈를 놓고 서정환은 고민하다가 해태를 택했다.
- 프로야구 초창기 야구 기자들은 지방 경기 취재를 가거나 서울로 복귀할 때 이동 수단이 마땅치 않아 종종 구단 버스 신세를 지는 일이 많았는데, 서영무 감독은 버스 안에서 기자들과 심심풀이로 고스톱을 치곤 했다. 서 감독은 고스톱을 치면서 입버릇처럼 "난 애들이 아직 어려서 돈을 많이 따야 한다" 라고 했지만, 대부분 기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아마도 기자에 대한 나름의 예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 1983년 시즌이 끝나고 OB 베어스로부터 구단 관리이사 직을 제의받은 서영무는 평소 막역하게 지내던 야구 전문기자 홍순일에게 어떻게 할지 조언을 구했는데 홍 기자는 딱 잘라서 "나 같으면 안간다. 대구 야구의 대부라는 분이 어떻게 OB의 녹을 먹을 수 있는가. 이것은 대구 야구의 수치이다" 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OB의 간청을 못이겼는지 서영무는 결국 OB 관리이사 직을 받아들였고, 이후 서영무가 쓰러지자 누구보다도 애석해한 사람은 바로 홍순일 기자였다고 한다.출처
5. 관련 문서
[1]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산다 25페이지.[2] 대구상고와 경북고는 정기전을 치르기도 한다.그런데 2000년 넘어서부터는 대구고 야구부가 더 잘 나가는데.[3] 경북고 시절 훈련의 강도가 너무 높아서 일부 선수 및 학부모와 마찰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학생들과 화해하고 다시 경북고로 복귀했다.[4] 이 때는 다른 경기와 달리 준결승에서 1차례 패배했으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재기,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5] 1971년이 초대 대회였다.[6] 이 중 5개가 경북고 감독을 하면서 받은 것이고 1개는 대구상고 감독 시절에 받았다고 한다.[7] 이 때 본의 아니게(?) 김재박을 두 번이나 퇴짜를 놓은 적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김재박 항목 참조.[8] 표면적으로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이충남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라고 했으나 사실 파고들면 이충남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9] 이 때 다혈질이던 김호중은 격분한 상태로 구단 고위인사 앞에서 이충남에게 "당신 그러면 못써! 일본에서 야구를 했으면 오야붕을 잘 모시는게 기본인걸 알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오야붕(서영무)을 제대로 받들기나 하고 감독 자리를 넘보는 것인가?! 이건 반란이야!" 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리고 서영무 감독의 복귀를 위하여 경기 때 선수들의 태업을 유도하였고, 이는 김호중의 삼성 코치 명줄을 단축시킨 큰 원인이 되었다(...).[10] 김호중은 해임 통보를 받은 후 주변 사람들에게 덤덤한 태도로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떨어져 있더라"며 반 농담조로 말했다고 한다.[11] 이충남은 한국어를 전혀 못 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선수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팀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특히 서영무와의 갈등으로 어수선해진 팀 내 분위기를 다잡는 데에는 치명적이었다.[12] 김영덕 감독의 이적 문제를 두고 김성근과 김영덕의 대립(원래 삼성에서 감독 제안을 처음 받은 것이 김성근이라고 한다. 김영덕이 결과적으로 가로챈 모양새가 되면서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부터 시작된 양 팀의 감정 싸움은 김일융의 영입 문제, 선수들간의 난투극까지 겹치면서 급기야 1984년 후기 리그에서 롯데 자이언츠와 상대하기 위해 져주기 파동에까지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