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16:07:08

후지타 타이라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efe01><tablebgcolor=#fefe01>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한신 타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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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바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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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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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후지타 타이라 선수시절.jpg
후지타 타이라
藤田平 | Taira Fujita
출생 1947년 10월 19일 ([age(1947-10-19)]세)
출신지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와카야마 시립 와카야마 고등학교
신체 177cm, 81kg
투타 우투좌타
포지션 유격수, 3루수, 2루수
프로입단 1965년 드래프트 2순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66~1984)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선수 겸 코치 (1981~1984)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1995)
한신 타이거스 1군 감독(1995.7~1996.9)[1]
사가와 큐빈[2] 감독 (2005)
후쿠이 미라클 엘리펀츠[3] 감독 (2008)
키슈 레인저스[4] 감독 (2009)

[clearfix]
1. 개요2. 프로 입단 전3. 한신 선수 시절4. 해설가 및 평론가 시절5. 한신 지도자 시절6. 한신 감독 사퇴 이후7. 여담

1. 개요

한신 타이거스의 명선수로 1970년대 한신의 내야를 책임졌다. 또한 한신 타이거스 역사상 최초로 명구회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는 영 아니었던 인물.

2. 프로 입단 전

와카야마 고교 시절부터 고시엔 대회 지역예선에서 맹활약했고, 고시엔 본선에도 두 번 올라갔다. 고졸 이후 메이지대학 진학이 예정돼 있었으나, 마음을 바꿔 한신 타이거스에 가기로 했다. 다만 이 일로 한신 타이거스메이지대학 간의 관계가 험악해지면서 한신 팬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한신 지명을 포기했을 정도로 절교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3. 한신 선수 시절

말이 필요없는 영광의 선수 시절을 보냈다. 1966년 데뷔 첫 해부터 1군 시합에 출전하면서 39경기를 뛰었고, 가능성을 보여주자 1967년엔 1번 타자 유격수 자리에 고정되었다. 당시 요시다 요시오와 함께 테이블 세터키스톤 콤비를 구성해 한신의 내야를 지키고 공격에서는 기회를 창출하는 역할을 했다. 1967년에는 154안타로 최다안타를 기록했다.

1970년엔 잠시 3루수를 맡기도 했으나, 1971년 다시 유격수로 복귀, 개인 최다인 28홈런을 기록했다. 1974년엔 개인 첫 3할을, 1981년에는 .358의 타율로 타격왕도 차지했다.

1983년 2000안타를 치면서 명구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1984년 은퇴를 선언하며 영광의 선수 시절을 마감했다. 통산 2010경기 출전, 2064안타, 207홈런, 타율 .286, 출루율 .336, 장타율 .435, OPS .771을 기록했다. 소속팀 한신이 후지타가 현역이던 시절 동안 일본시리즈 진출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해서, 도이 마사히로와 같이 2천 안타 달성자 중 일본시리즈 진출 경력이 없는 유이한 선수가 되었다.[5] 덧붙여서 후지타의 명구회 가입은 순수 한신에서만 뛴 선수로서 최초로 이뤄낸 기록이며 현재까지 명구회 유일의 한신 원클럽맨이기도 하다.[6]

4. 해설가 및 평론가 시절

백스크린 3연발 당시 TV중계 해설이었으며, 한신의 리그 우승이 결정된 경기에서는 라디오 해설을 하고 있었다. 이후 1995년까지 간사이 지역 언론에서 평론가 및 해설자 생활을 하다가, 나카무라 카츠히로의 요청에 따라 1995 시즌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5. 한신 지도자 시절

1995년 2군 감독이 되었다. 당시 한신 2군은 식단이 부실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를 프런트에 이야기해 개선했다고 한다. 다만 이 때에도 자신의 야구관 및 지도 방식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2군 연습에 지각한 신조 츠요시를 한여름 땡볕에 정좌를 시킨 사건으로 인해 구설수에 올랐다.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을 데려왔던 나카무라 카츠히로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자, 감독 대행으로 임명되어 1995 시즌 나머지 53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17승 36패에 그치면서 팀의 최하위를 막지 못했다.

1996년 정식 감독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팀은 전년보다 더 심각하게 침체에 빠졌고, 급기야 원정경기 이동을 위해 신칸센을 탔더니 한신아재들이 열차에 난입해 차 안에서 청문회를 벌이는 등[7] 총체적 난국 상태였다. 차내 청문회 기사

1996년 9월 12일, 결국 후지타 감독 해임이 한신 구단 이사회에서 결의되었으나, 후지타 타이라 본인이 이에 불복해, 한신 고시엔 구장 내 회의실에서 9시간짜리 마라톤 회담을 벌인 끝에 결국 해임을 수락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96년 잔여시즌은 시바타 타케시가 맡아서 이끌었으나 4466566664를 막을 수는 없었다.

6. 한신 감독 사퇴 이후

한신 감독에서 물러난 후엔 선 텔레비전 야구해설가로 복귀했고 이후 무라타 쵸지가 창설한 "쓰시마 마사카리 드림즈"에 참여하여 어린이 야구 지도를 위해 각지를 순회하거나 사회인야구팀 사가와 큐빈 감독, 독립 리그 후쿠이 미라클 엘리펀츠 및 키슈 레인저스의 감독을 역임했다.[8] 2019년 토리타니 타카시명구회 가입을 이뤄내자 축하하러 한신 고시엔 구장에 방문하기도 했다.

7. 여담

자신의 야구관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던 인물이었고, 이는 팀 내 불화와 충돌의 도화선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특이하게도 현역 선수 시절에는 팀내 불화나 파벌 싸움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1996 시즌 스프링캠프 때는 한신 OB들의 연습장 출입을 막아버린 일화도 있었다.

현역 시절에 달았던 등번호 6은 이후로도 한신의 유명 타자들에게 승계되었는데, 와다 유타카카네모토 토모아키가 달았다. 둘 다 이후 한신 감독까지 했으며, 카네모토는 감독 시절에도 6번을 달았다.[9] 카네모토가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현재까지 6번을 아무도 달지 않고 있어, 사실상의 영구결번 취급이다. 2023 시즌 한신 타이거스의 1자리 등번호로 현재까지 주인이 있는 번호는 0, 1[10] 2[11], 3[12], 4, 5, 7[13], 8[14], 9[15].


[1] 1995년 시즌 도중 사임한 나카무라 카츠히로의 감독대행으로 잔여시즌 동안 팀을 지휘했으며 1996년 시즌부터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했으나 본인도 첫 시즌 도중인 1996년 9월 13일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잔여시즌은 시바타 타케시가 감독대행으로 지휘했다.[2] 일본의 운송회사 사가와 큐빈 산하 사회인야구팀. 참고로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유명한 회사다.[3] 일본해 오션 리그(원래는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서부지구 소속이었으나 2022년부터 서부지구 팀들이 신설리그를 형성해 독립했다.)에 소속된 독립리그 야구팀이다. 임태훈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된 후 이 팀에서 뛰었다.[4] 칸사이 독립 리그에서 소속되어 있던 독립리그 야구팀. 2013년 리그 와해와 함께 휴부했고 2017년 정식 해산되었다.[5] 애석하게도 그가 은퇴한 이듬해인 1985년 한신은 구단 첫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6] 원래는 토리타니 타카시도 추가되어야 할 터였지만 토리타니가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원클럽맨 타이틀을 스스로 내려놓았다.[7] 당시 신칸센 100계 전동차그린샤 개인실이 존재했고, 후지타 감독은 아재들을 그린샤 개인실로 초빙해 회담을 했다고 한다.[8] 단 이때도 성적 부진으로 2구단 모두 한 해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추가로 후쿠이 감독 퇴임 후 연봉 미지급 문제로 구단을 기소하기도 했다.[9] 와다 유타카는 감독 시절엔 86을 달았다.[10] 기존 1번 주인 토리타니 다카시가 치바로 이적한 2020 시즌부터 모리시타가 입단한 2023 시즌 전까지 결번이었다.[11] 입단 초기엔 44번을 사용했다.[12] 예전엔 대타의 신 야기 히로시가 달았고, 이후 세키모토 켄타로가 달았다.[13] 니시오카 츠요시가 한신 시절에 이 번호를 달았다.[14] 사토의 입단 전 시즌까지 후쿠도메 코스케가 달았다.[15] 2023년 10월 3일 전력외 통고와 함께 방출되었다. 타카야마 이전에는 후지타 본인과 같이 현역시절을 보냈던 사노 노리요시, 2010년 최다안타 주인공 맷 머튼 등이 달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