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8 21:46:31

나카무라 카츠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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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신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jpg
나카무라 카츠히로
中村勝広 | Katsuhiro Nakamura
출생 1949년 6월 6일
사망 2015년 9월 23일 (향년 66세)
출신지 치바현 산부군 쿠주쿠리마치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치바현립 나루토 고등학교-와세다대학
신체 177cm, 65kg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2루수, 1루수
프로입단 1971년 드래프트 2순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72~1982)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1983~1987)
한신 타이거스 작전, 수비·주루 코치 (1988)
한신 타이거스 1군 감독(1990~1995.7)[1]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2006)
프런트 오릭스 블루웨이브-버팔로즈 GM (2003~2005)
한신 타이거스 GM (2012~2015)[2]


1. 개요2. 프로입단 전3. 한신 선수 시절4. 지도자 시절5. 프런트 시절
5.1. 사망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선수 및 지도자, 프런트. 선수로는 한신 타이거스에서만 뛰면서 나름대로 족적을 남겼으나, 감독으로서는 영 아니었다.[3]

2. 프로입단 전

치바현 출신으로 나루토 고교에서는 3번 타자 유격수로 팀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본선까지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으나, 프로 지명을 못 받고 와세다대학 진학을 택했고 대학에서도 2루수 베스트나인을 한 차례 수상하는 등 나름대로 활약을 이어갔다. 대학 졸업시즌인 1971년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2순위 지명을 받고 프로로 진출했다.

3. 한신 선수 시절

데뷔 시즌인 1972년 개막전부터 1번 타자-2루수로 선발 출장하는 등 한신 구단에서도 의욕적으로 나카무라를 신예 스타로 밀어주었으며, 팬투표 선출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첫 시즌부터 81경기를 출전하며 타율은 .175로 낮았으나 3홈런 4도루 9타점을 기록하며 나름대로 가능성을 보였다.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기량이 만개, 이 해 100경기 이상을 출전하면서 11홈런을 기록하며 타석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1975년엔 전경기 출장에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넘기면서 타율 .280/OPS .828, 16홈런[4] 43타점으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타선에서의 중심을 잘 잡아줬다. 이후 첫 풀타임 시즌만큼의 성적을 찍진 못했지만 1978년 시즌까지 매 100경기 이상씩 출전하며 10홈런 이상을 기록하는 장타력을 겸비한 2루수[5]였다. 수비에서도 골든글러브 수상 경력은 없었지만 견실한 수비력을 보여주며 1975년 일본 기록인 단일 시합 11보살을 수립했으며, 1978년에는 당시 일본 기록이었던 2루수 수비율 .995를 기록하기도 했다.[6]

1979년 시즌부터 1루수로 전향했으나 이때부터 출전 기회가 서서히 줄어들었고, 결국 198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자신의 후임 감독이 되는 후지타 타이라보다 늦게 데뷔해 빨리 은퇴한 셈이다.

4. 지도자 시절

은퇴 후 곧바로 한신에서 2군 감독을 맡아 1987년까지 유망주 육성에 힘쓰다가 1988년 1군으로 승격하여 작전 코치 겸 수비, 주루 코치를 역임했다. 1989년엔 잠시 팀을 떠나 평론가 생활을 했다. 1990년부터 한신 타이거스 감독이 됐다. 취임 첫 2년간은 구단 사상 첫 2년 연속 최하위라는 굴욕을 겪었으나[7] 1992년엔 모처럼 시즌 막판까지 선두싸움을 했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장시간 경기 당시에도 감독으로서 팀을 지휘했으며, 한신아재들의 난장판에 몰수패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선수단을 모은 후 이 말을 남겼다.
みんな、何とか受け入れてほしい。ただ、この試合は絶対に落とせない。力を合わせて戦ってくれ
얘들아, 어떻게든 받아들였으면 한다. 하지만 이 시합을 놓칠 수는 없다. 힘을 합쳐 싸워다오.

상술했듯, 1992 시즌만 한신이 잘 나갔고, 그 외의 시즌은 계속 하위권을 전전하는 게 일상이었다. 4466566664의 제일 앞 3자리를 만든 사람이 나카무라 카츠히로였다. 그럼에도 저 1992시즌 하나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카무라 감독의 임기는 길어졌고, 암흑기도 같이 따라오게 되었다. 결국 계속되는 팀의 침체를 버티지 못한 채 나카무라는 1995년 7월, 최하위 전락에 책임을 지고 명목상의 휴양 선언과 함께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감독 대행후지타 타이라가 맡았다.

단일 임기 기준으로는 5년 7개월로 역대 한신 타이거스 최장기간 감독이었으나[8], 상술했듯 감독으로서는 영 좋지 못했다. 리빌딩 시도는 좋았으나, 지나치게 젊은 선수들 위주로 기용했었다. 1992 시즌 도중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메이지진구 구장 대결에선 동점 상황 9회 역전 찬스에서 베테랑 오카다 아키노부를 빼 버리고 신인 카메야마 츠토무[9]를 기용한다든지 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이는 팀 내 불화로 연결되기도 했다. 비록 1992 시즌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공동 2위로 마감하면서 비밀번호 작성은 일단 면했으나, 팀 만들기의 방향성이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아야 했다. 그리고 1993년부터 팀은 446...을 찍으며 망했다.

이후 잠시 오릭스 버팔로즈의 GM을 하다가, 2005시즌 종료 후 고령의 오기 아키라 감독이 심각한 건강문제로 감독직 수행이 불가능해지자[10] 2006년 1시즌에 한해 감독을 했다. 그러나 오릭스는 승률 4할에도 못 미치는 5위를 찍으며 처절하게 망했다. 결국 한 시즌 만에 감독직에서 내려왔다.

5. 프런트 시절

이후 또 당분간 평론가 생활을 하다, 오릭스 블루웨이브 GM으로 2003~2005 3시즌을 활동했다. 이후 상술한 대로 오릭스 감독을 했다가 사임하고, 2012년 다시 한신 타이거스의 GM으로 들어왔다. 오릭스 GM 시절에는 가네코 치히로를 지명하여 팀의 주축 투수로 만들었으며, 한신 시절엔 후쿠도메 고스케, 니시오카 츠요시, 오승환 등의 영입에 성공했다. 나카무라가 영입했던 선수들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으나, 정작 201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영 좋지 못했다.

5.1. 사망

2015년 9월 22일, 나카무라 카츠히로는 도쿄돔에서 열리는 전통의 일전을 참관하기 위해 선수단과 같이 도쿄로 이동했다. 첫 경기를 관람한 후 다음 날, 호텔 방에서 급성 심부전이 발생해, 그대로 향년 66세의 생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1] 1995년 시즌 도중인 7월 23일 사임. 잔여 경기는 후지타 타이라가 감독 대행을 맡았으며 시즌 종료 후 곧바로 후지타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다.[2] 재임 도중 사망.[3] 그래서 2ch에서는 '그 분' 아니면 마케히로(広)로 통했다. 이름인 카츠히로(広)와 달리 십중팔구 진다고 했다.[4] 이 중 선두타자 홈런이 6개로 이는 한신 구단 기록이다.[5] 당시만 해도 2루수유격수의 덕목은 수비였고, 덕분에 우노 마사루처럼 거포+막장 수비라는 정반대 사례가 있긴 했어도 수비만 잘하면 타석에선 똑딱이 이하여도 납득이 가능했다. 21세기 이후로는 2루수에서도 야마다 테츠토 같은 거포들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됐다.[6] 이후 2020년 키쿠치 료스케2루수 수비율 1.000로 절대 깨질 수 없는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7] 그래도 자신이 한신 2군 감독을 할 때 육성했던 야기 히로시와다 유타카 등이 이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8] 임기가 2번 이상인 감독까지 합치면 요시다 요시오의 8년(1975~77, 1985~87, 1997~98)이 최장 기록이다.[9] 나카무라 본인이 감독하던 때부터 가능성을 보이던 유망주. 도톤보리 강 구이다오레 인형이 이 선수를 닮은 것으로도 유명했다.[10] 이미 폐암 투병 상태에서 감독직을 수행했고 시즌 중에도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등 힘에 부쳐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결국 오기 감독은 오프시즌 중 타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