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미노루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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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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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66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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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모리 시게오 (1936) | 2대 이시모토 슈이치 (1936~1939) ★★ | 3대 마츠키 켄지로 (1940~1941) | 4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2~1944) ★ | 5대 후지무라 후미오 (1946) | |
6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7~1949) ★ | 7대 마츠키 켄지로 (1950~1954) | 8대 키시 이치로 (1955) | 9대 후지무라 후미오 (1956~1957) | 10대 타나카 요시오 (1958~1959) | |
11대 카네다 마사야스 (1960~1961) | 12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2~1965) ★★ | 13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6) | 14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7~1968) | 15대 고토 츠구오 (1969) | |
16대 무라야마 미노루 (1970~1972) | 17대 카네다 마사야스 (1973~1974) | 18대 요시다 요시오 (1975~1977) | 19대 고토 츠구오 (1978) | 20대 돈 블레이싱게임 (1979~1980) | |
21대 나카니시 후토시 (1981) | 22대 안도 모토오 (1982~1984) | 23대 요시다 요시오 (1985~1987) ★ | 24대 무라야마 미노루 (1988~1989) | 25대 나카무라 카츠히로 (1990~1995) | |
26대 후지타 타이라 (1996) | 27대 요시다 요시오 (1997~1998) | 28대 노무라 카츠야 (1999~2001) | 29대 호시노 센이치 (2002~2003) ★ | 30대 오카다 아키노부 (2004~2008) ★ | |
31대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 32대 와다 유타카 (2011~2015) ☆ | 33대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 34대 야노 아키히로 (2019~2022) | 35대 오카다 아키노부 (2023~2024) ★ | |
36대 후지카와 큐지 (2025~) | |||||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 ★: 단일리그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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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 No. 11 | |
무라야마 미노루 村山 実 | Murayama Minoru | |
<colbgcolor=#000><colcolor=#fefe01> 출생 | 1936년 12월 10일 |
효고현 코베시[2] | |
사망 | 1998년 8월 22일 (향년 61세) |
효고현 코베시 코베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신체 | 175cm, 83kg |
학력 | 스미토모가쿠인중학교 (졸업) 스미토모공업고등학교[3] (졸업) 칸사이대학 상학부 (상학 / 학사) |
프로입단 | 1959년 |
소속팀 | 오사카-한신 타이거스 (1959~1972)[4] |
지도자 경력 | 한신 타이거스 투수코치 (1969, 선수 겸임) 한신 타이거스 선수 겸 감독 (1970~1972[5]) 한신 타이거스 감독 (1988~1989) |
등번호 | 11(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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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감독, 해설가.1950년대 후반~1970년대 초 한신 타이거스를 대표한 레전드 투수였으며, 현역 시절 등번호인 11번은 한신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 학창 시절
키가 작다는 이유로 중학교 때까지 내야수만 맡다가 고등학교에 진학 후에야 감독의 눈에 들어가 투수를 맡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고등학교 시절 무라야마의 손이 크다는 특성을 간파한 감독의 지시로 훗날 자신의 주무기가 될 포크볼을 연마했고,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킨키대회 예선에서 학교를 준수한 성적으로 이끌었지만 끝내 코시엔 대회 본선 진출엔 실패했다.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지망해 도쿄 6대학 리그의 릿쿄대학의 셀렉션을 받길 원했으나 키가 작다는 이유로 탈락당하고 결국 가까운 대학으로 진학하라는 어머니와 칸사이대학 응원단장이었던 형의 권고로 칸사이대학에 진학했다. 칸사이대학에선 통산 42경기에 등판해 20승 10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겼고, 2학년 때인 1956년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장하여 전경기 완투로 칸사이대학을 우승시켰다.[6] 그러나 다음 해인 1957년에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투병한 데 이어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에서 무라야마의 영입을 거절한 릿쿄대학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겪었고, 이때의 릿쿄대학에 대한 원한과 투지는 당시 릿쿄대학의 주포이자 1년 먼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나가시마 시게오를 상대로 프로에서 여지없이 불사르게 된다.
여담으로 대학 시절 배터리를 이루던 포수 우에다 토시하루는 부상으로 일찍 선수생활을 접으며 그저 그런 선수에 그쳤지만, 훗날 지도자로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일본시리즈 3연패를 이끄는 명장이 되었다.
3.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이 되다
대학 졸업 후 무라야마를 영입하려는 프로 구단들의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으나, 무라야마는 이전부터 어깨 부상으로 입원할 당시 프로 구단들이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준[7]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할 것을 결심한 상태였고 그 결심대로 계약금 500만엔에 타이거스 입단을 선택했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한신 전기철도가 제시한 계약금의 4배인 2000만엔을 제시했으나, 무라야마는 고질적인 어깨 부상 때문에 프로에서 성공할 자신이 없던 데다 어깨 부상 당시 자신을 배려해 준 타나카 키이치 구단 사장에 대한 은혜를 저버릴 수 없어 제의를 뿌리쳤다고 저서에서 밝히기도 했다.[8]1959년 데뷔전부터 당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던 카네다 마사이치와 맞대결해 6회까지 노히트, 9회까지 2안타 완봉을 기록했고, 같은 해에 요미우리를 상대로 9이닝 14탈삼진 무자책을 기록했으나 3루수 미야케 히데시와 투수인 본인의 수비 실책으로 2점을 헌납하면서 노히트 노런이 아닌 노히터 게임만 기록하는 등 1년차부터 맹활약을 보여주며 무려 18승 10패 평균자책 1.19(1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아쉽게도 신인왕은 그해 홈런 1위인 타이요 훼일즈의 쿠와타 타케시[9]에게 돌아갔고, 대신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신인으로서 사와무라상을 타고도 신인왕을 놓친 선수는 지금까지도 무라야마가 유일하다.[10]
1962년 친선경기차 일본을 방문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것도 8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이었다. 이날의 완봉승은 일본인 투수가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완봉승이었다.
현역 시절 그는 온몸을 내던지는 듯한 폭발적인 투구폼 때문에 자토펙 투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세계 육상계의 영웅 에밀 자토펙의 후덜덜한 스태미너와 커리어를 본떠서 만든 별명인데, 실제로도 다이나믹한 투구폼에 강타자 앞에서는 정면승부를 두려워 하지 않았던 그의 터프한 모습에 걸맞는 별명이라고 할 수 있다.[11]
특히나 앞서 언급한 대로 요미우리와 나가시마에 대한 라이벌 의식은 누구보다도 강렬하여 요미우리전에 등판할 때면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것 마냥 엄숙하고 비장한 얼굴로 경기에 임했는데, 데뷔 시즌인 1959년에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천황이 경기를 관람하러 온 일명 "천람시합"으로 유명한 1959년 6월 25일 코라쿠엔 구장 원정경기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했다가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좌측 파울 폴을 맞히는 끝내기 홈런을 맞은 것도 이 라이벌 의식을 더욱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오죽 억울했으면 무라야마는 죽기 전까지 이 얘기만 나왔다 하면 "그건 파울이었다"라고 거품을 물었을 정도.[12][13]
당시의 끝내기 홈런 장면. 등번호 3번이 나가시마, 마운드에서 고개를 숙인 투수가 무라야마.
그래서 유독 요미우리 경기 때엔 판정에 민감한 모습을 보이며 이건 아니다 싶은 판정이 나오면 다짜고짜 심판의 멱살을 붙잡거나 포수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 번은 요미우리전에서 나가시마에게 던진 회심의 공이 볼로 판정되자 그대로 심판에게 뛰어가 들이받아서 KO시킨 후 포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가시마와의 라이벌 관계는 무라야마가 1972년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무라야마의 통산 1500탈삼진(1966년 6월 8일)[14], 2000탈삼진(1969년 8월 1일) 기록은 전부 나가시마를 상대로 기록한 것이었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는 선수 겸 감독으로 뛰었지만 이 때가 하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인 일명 V9 시기와 겹친 탓에 일본시리즈와는 인연이 없었고, 1972년 시즌 초반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1972년 시즌 초반에 지휘권을 팀 선배이자 수석코치인 가네다 마사야스에게 넘기고 선수로만 뛰었다.
1972년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고, 1973년 3월 21일 은퇴경기를 마지막으로[15]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14년 동안 프로 통산 509시합 등판(348선발), 3050.1이닝 192완투 55완봉 222승 147패 2271탈삼진, 평균자책점 2.09[16]의 성적을 남겼다.
4. 은퇴 이후
그의 등번호 11번은 은퇴 선언 직후 한신 타이거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고, 후술할 감독 복귀 때 이 등번호를 다시 사용했다. 이후 칸사이대학 후배인 이와타 미노루가 한신에 입단했을 때 "대선배인 무라야마 씨보다 10배 더 잘하겠다"는 의미로 11에 10을 더한 등번호 21을 달기도 했다.은퇴 후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니혼 테레비의 야구해설가를 역임했고,[17] 1978년엔 명구회 초대 멤버로 가입했다. 1988년에 요시다 요시오의 후임으로 한신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6위[18], 5위에 그치면서 와다 유타카를 주전으로 발탁한 것 이외엔 좋은 성적을 남기지 못한 채 1989년 시즌 종료 후 퇴임했다.
1990년 이후 사망 전까지 아사히 방송, 선 텔레비전의 해설가를 맡았고, 1993년엔 일본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 당시 아시야시에 있던 자신의 아파트가 무너져[19] 자동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모습이 TV에서 방송되거나 생방송 인터뷰도 하는 등 불운한 모습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1998년 8월 22일에 지병인 직장암으로 향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 땐 한신 팬들이 그의 관을 실은 영구차를 뒤따라가면서 롯코오로시를 열창하며 무라야마의 명복을 빌었다.
5.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관계
현역 시절 나가시마가 무라야마를 상대로 거둔 통산 성적은 타율 .281(302타수 85안타) 21홈런 39삼진.둘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사실 인간적으로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다. 무라야마는 평소 나가시마에 대해 얘기할 때 꼭 이름에 상(さん)을 붙여 예우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가시마 또한 "그는 현역 때 나에게 빈볼을 던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조건 정면 승부였다."라는 등 무라야마의 인간성을 대놓고 칭찬하고 다니기도 했다.
무라야마가 나가시마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듯이, 팀 후배 에나츠 유타카는 나가시마와 ON포를 결성한 오 사다하루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다.
6. 진기록
- 1970년 시즌에 25경기 14승 3패 승률 .824 평균자책점 0.98을 기록했다. 선수 겸 코치로 달성한 기록이고, 양대 리그 체제 이후 유일한 평균자책점 0점대다. 시즌 자책점 0점대는 11번 기록되었으나 나머지 10번은 모두 양대 리그 체제 이전에 기록된 것이다.
- WHIP은 역대 통산 1위인 0.954다. 현대 야구에서 1.00 미만이면 야구계를 대표하는 에이스라고 말하는 경이적인 수치이다. 동 시대를 대표하는 에이스 가네다 마사이치는 통산 1.072로 통산 12위이다.
- 포크볼을 주무기로 한 투수였음에도 폭투가 적었다. 3,000이닝 이상 투구해도 단 16개에 불과하다. 시즌 최고는 1961년의 4개, 나머지 시즌은 모두 2개 이하였다. 1959년에는 295 1/3이닝, 1965년에는 307 2/3이닝을 던져 폭투를 1개도 기록하지 않았다.
- 손가락이 짧았던 무라야마는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스스로 검지와 중지를 째기 위한 시도까지 했다.
- 사와무라상 3회 수상은 역대 최다 타이기록이다.
- 통산 평균자책점 2.09는 센트럴리그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이다.
[1]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되었다.[2] 태어난 직후 아버지의 전근으로 곧바로 아마가사키시에 이사를 가 그곳에서 자랐다.[3] 現 아마가사키시립 아마가사키산업고등학교.[4] 입단 당시 팀 이름은 오사카 타이거스였으며 1961년에 지금의 구단명인 한신 타이거스로 개칭했다.[5] 1972년 시즌 초반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카네다 마사야스 코치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명목상 감독으로만 남은 채 선수에만 전념했다.[6] 이 우승은 당시 대회 역사상 최초로 일본 서부 지역의 대학이 우승한 것이었다.[7] 당시 어깨 부상으로 곤란해하던 무라야마에게 대학 선배이자 당시 타이거스 구단 사장을 맡던 타나카 키이치가 직접 무라야마가 치료를 받을 병원을 주선해 준 것은 물론, 직접 병문안까지 와서 무라야마에게 "자네가 타이거스에 오길 바래서 굳이 이러는 것이 절대 아니니 안심해라. 난 그저 후배를 걱정하는 한 명의 선배일 뿐이다."라고 격려하는 등 따뜻하게 대해줬고 타나카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에 감격한 무라야마는 훗날 프로에 가게 되면 무조건 타이거스에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8] 여담으로 앞서 언급한 사유 외에도 계약 내용에 "한신 전기철도에서 타이거스로 출향한 사원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넣어 사실상 은퇴 후에도 본사 사원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준 것도 타이거스 입단에 호감을 느낀 사유였다고 한다.[9]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신인 시즌 최다 홈런 기록(31개)의 주인공. 다만 현역 말년에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3개월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흑역사가 있다.[10] 이 해 오 사다하루도 데뷔했으나 프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라 신인왕을 수상하지 못했다. 센트럴리그와 달리 경쟁자가 많이 없었던 퍼시픽리그에서는 장훈이 신인왕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11] 반면에 팀 동료였던 코야마 마사아키는 무라야마와 달리 힘들이지 않고 편안히 던지는 투구임에도 면도날같은 제구력과 상당한 구속으로 타자들을 농락했다.[12] 사실 당시 조명 상태가 좋지 않아 좌측 폴대를 맞혔는지 파울이었는지 알 수 없었고, 당시 폴대 쪽 타구가 뻗은 시각이 저녁 9시 무렵인데 히로히토의 귀가시간이 9시 15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협회에서 홈런 판정을 내리게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다만 훗날 2011년 니혼 테레비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당시의 타구를 분석한 결과 홈런이 맞다는 것이 밝혀졌다.[13] 물론 거품만 문 건 절대 아니고, 1980년대에 한 방송사가 해당 경기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땐 당시 홈런을 때린 나가시마 시게오와 농담을 주고 받는 등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의 썰을 풀었다.[14] 당시 무라야마는 1500탈삼진을 나가시마에게서 빼앗은 후 "이제 천람경기의 빚을 갚았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15] 경기전 한 소년과 캐치볼을 했는데 이 소년이 후에 한신에 입단해서 선수(1985년 일본시리즈)와 감독(2023년 일본시리즈)으로 각각 한신의 우승을 이끈 오카다 아키노부다.[16] 대졸 투수 200승은 구단 선배 와카바야시 타다시와 함께 유이한 기록이고 평균자책점은 센트럴리그 1위이다.[17] 같은 니혼TV 계열의 요미우리 TV와 히로시마 TV에서도 해설가를 맡았다.[18] 시즌 도중 랜디 바스가 아들의 치료비 지원 문제로 구단과 갈등하다 퇴단하고, 구단 사장이 자살하는 등 암울한 사건들만 계속 터졌다.[19] 그냥 자택이 아니라 사업수완이 좋던 무라야마가 돈을 모아 직접 산 아파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