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6 17:35:53

무라야마 미노루

무라야마 미노루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efe01>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한신 타이거스
영구 결번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ccac00> No.10 No.11 No.23
후지무라 후미오 무라야마 미노루 요시다 요시오
한신 타이거스, 틀:한신 타이거스로 돌아가기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0F8F2D>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센트럴 리그
역대 최우수선수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코즈루 마코토
쇼치쿠 / 외야수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투수
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투수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 투수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투수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외야수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 투수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 투수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투수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투수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외야수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 외야수
에나츠 유타카
히로시마 / 투수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외야수
에나츠 유타카
요미우리 / 투수
나카오 타카요시
주니치 / 포수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 내야수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 내야수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랜디 바스
한신 / 내야수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투수
야마쿠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 포수
카쿠 켄지
주니치 / 투수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 외야수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투수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 투수
잭 하월
야쿠르트 / 내야수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 포수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 투수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토마스 오말리
야쿠르트 / 내야수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외야수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 포수
사사키 카즈히로
요코하마 / 투수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 투수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외야수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외야수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외야수
이가와 케이
한신 / 투수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 투수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 외야수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외야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요미우리 / 내야수
알렉스 라미레즈
요미우리 / 외야수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와다 카즈히로
주니치 / 외야수
아사오 타쿠야
주니치 / 투수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 포수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외야수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투수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내야수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 내야수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 외야수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 내야수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투수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내야수
무라카미 쇼키
한신 / 투수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투수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947 1948 1949 1950 1951
벳쇼 아키라
난카이
나카오 히로시
요미우리
후지모토 히데오
요미우리
사나다 쥬죠
쇼치쿠
스기시타 시게루
나고야
1952 1953 1954 1955 1956
스기시타 시게루
나고야
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카네다 마사이치
고쿠테츠
1957 1958 1959 1960 1961
카네다 마사이치
고쿠테츠
카네다 마사이치
고쿠테츠
무라야마 미노루
오사카
호리모토 미츠오
요미우리
곤도 히로시
주니치
1962 1963 1964 1965 1966
코야마 마사아키
한신
이토 요시아키
요미우리
진 바키
한신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1967 1968 1969 1970 1971
오가와 켄타로
주니치
에나츠 유타카
한신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수상자 없음
1972 1973 1974 1975 1976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이케가야 코지로
히로시마
1977 1978 1979 1980 1981
코바야시 시게루
요미우리
마츠오카 히로무
야쿠르트
코바야시 시게루
한신
수상자 없음 니시모토 타카시
요미우리
1982 1983 1984 1985 1986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엔도 카즈히코
타이요
수상자 없음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1987 1988 1989 1990 1991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노모 히데오
킨테츠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1992 1993 1994 1995 1996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이마나카 신지
주니치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1997 1998 1999 2000 2001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카와사키 켄지로
야쿠르트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수상자 없음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2002 2003 2004 2005 2006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이가와 케이
한신
사이토 카즈미
다이에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사이토 카즈미
소프트뱅크
2007 2008 2009 2010 2011
다르빗슈 유
닛폰햄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와쿠이 히데아키
세이부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다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2012 2013 2014 2015 2016
셋츠 타다시
소프트뱅크
다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크리스 존슨
히로시마
2017 2018 2019 2020 2021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수상자 없음 오노 유다이
주니치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2022 2023 2024 2025 2026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수상자 없음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efe01>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35년 ~ 현재
초대
모리 시게오
(1936)
2대
이시모토 슈이치
(1936~1939)
3대
마츠키 켄지로
(1940~1941)
4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2~1944)
5대
후지무라 후미오
(1946)
6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7~1949)
7대
마츠키 켄지로
(1950~1954)
8대
키시 이치로
(1955)
9대
후지무라 후미오
(1956~1957)
10대
타나카 요시오
(1958~1959)
11대
카네다 마사야스
(1960~1961)
12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2~1965)
13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6)
14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7~1968)
15대
고토 츠구오
(1969)
16대
무라야마 미노루
(1970~1972)
17대
카네다 마사야스
(1973~1974)
18대
요시다 요시오
(1975~1977)
19대
고토 츠구오
(1978)
20대
돈 블레이싱게임
(1979~1980)
21대
나카니시 후토시
(1981)
22대
안도 모토오
(1982~1984)
23대
요시다 요시오
(1985~1987)
24대
무라야마 미노루
(1988~1989)
25대
나카무라 카츠히로
(1990~1995)
26대
후지타 타이라
(1996)
27대
요시다 요시오
(1997~1998)
28대
노무라 카츠야
(1999~2001)
29대
호시노 센이치
(2002~2003)
30대
오카다 아키노부
(2004~2008)
31대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32대
와다 유타카
(2011~2015)
33대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34대
야노 아키히로
(2019~2022)
35대
오카다 아키노부
(2023~2024)
36대
후지카와 큐지
(2025~)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 : 단일리그 우승
}}}}}}}}} ||

파일:무라야마 미노루.jpg
한신 타이거스 No. 11
무라야마 미노루
村山 実 | Murayama Minoru
<colbgcolor=#000><colcolor=#fefe01> 출생 1936년 12월 10일
효고현 코베시[1]
사망 1998년 8월 22일 (향년 61세)
효고현 코베시 코베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국적
#!if 행정구 == null && 속령 == null
[[일본|{{{#!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일본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일본}}}{{{#!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속령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특별행정구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행정구}}}{{{#!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행정구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속령}}}{{{#!if 출력 != null
}}}}}}]]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75cm, 83kg
학력 스미토모가쿠인중학교 (졸업)
스미토모공업고등학교[2] (졸업)
칸사이대학 상학부 (상학 / 학사)
프로입단 1959년
소속팀 오사카-한신 타이거스 (1959~1972)[3]
지도자 경력 한신 타이거스 투수코치 (1969, 선수 겸임)
한신 타이거스 선수 겸 감독 (1970~1972[4])
한신 타이거스 감독 (1988~1989)
등번호 11(영구결번)

1. 개요2. 학창 시절3.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이 되다4. 은퇴 이후5.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관계6. 진기록7. 기타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감독, 해설가.

1950년대 후반~1970년대 초 한신 타이거스를 대표한 투수였으며, 현역 시절 등번호인 11번은 한신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 학창 시절

키가 작다는 이유로 중학교 때까지 내야수만 맡다가 고등학교에 진학 후에야 감독의 눈에 들어가 투수를 맡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고등학교 시절 무라야마의 손이 크다는 특성을 간파한 감독의 지시로 훗날 자신의 주무기가 될 포크볼을 연마했고,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킨키대회 예선에서 학교를 준수한 성적으로 이끌었지만 끝내 코시엔 대회 본선 진출엔 실패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지망해 도쿄 6대학 리그의 릿쿄대학의 셀렉션을 받길 원했으나 키가 작다는 이유로 탈락당하고 결국 집에서 가까운 대학으로 진학하길 원한 어머니와 칸사이대학 응원단장이었던 형의 권유로 칸사이대학에 진학했다. 칸사이대학에선 통산 42경기에 등판해 20승 10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겼고, 2학년 때인 1956년엔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장해 무려 전 경기 완투로 야구부를 우승시키는 맹활약을 펼쳤다.[5] 그러나 다음 해인 1957년에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투병한 데 이어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에서 무라야마의 영입을 거절한 릿쿄대학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겪었고, 이때의 릿쿄대학에 대한 원한과 투지는 당시 릿쿄대학의 주포이자 1년 먼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나가시마 시게오를 상대로 프로에서 여지없이 불사르게 된다.

3.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이 되다

대학 졸업 후 무라야마를 영입하려는 프로 구단들의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으나, 무라야마는 이전부터 어깨 부상으로 입원할 당시 프로 구단들이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준[6]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할 것을 결심한 상태였고 그 결심대로 계약금 500만엔에 타이거스 입단을 선택했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한신 전기철도가 제시한 계약금의 4배인 2000만엔을 제시했으나, 무라야마는 고질적인 어깨 부상 때문에 프로에서 성공할 자신이 없던 데다 어깨 부상 당시 자신을 배려해 준 타나카 키이치 구단 사장에 대한 은혜를 저버릴 수 없어 제의를 뿌리쳤다고 저서에서 밝히기도 했다.[7]

1959년 데뷔전부터 당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던 카네다 마사이치와 맞대결해 6회까지 노히트, 9회까지 2안타 완봉을 기록했고, 같은 해에 요미우리를 상대로 9이닝 14탈삼진 무자책을 기록했으나 3루수 미야케 히데시와 투수인 본인의 수비 실책으로 2점을 헌납하면서 노히트 노런이 아닌 노히터 게임만 기록하는 등 1년차부터 맹활약을 보여주며 무려 18승 10패 평균자책 1.19(1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아쉽게도 신인왕은 그해 홈런왕을 수상한 타이요 훼일즈의 쿠와타 타케시[8]에게 돌아갔고, 대신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신인으로서 사와무라상을 타고도 신인왕을 놓친 선수는 지금까지도 무라야마가 유일하다.[9]

1962년 친선경기차 일본을 방문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상대로 8회 2아웃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호투로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이날의 완봉승은 일본인 투수가 미국 팀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완봉승이었다.

파일:external/www.kcc.zaq.ne.jp/murayama.jpg
현역 시절 그는 온몸을 내던지는 듯한 폭발적인 투구폼 때문에 자토펙 투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세계 육상계의 영웅 에밀 자토펙의 뛰어난 스태미너와 커리어를 본떠서 만든 별명인데, 실제로도 다이나믹한 투구폼에 강타자 앞에서도 정면승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터프한 모습에 걸맞는 별명이라고 할 수 있다.[10]

특히나 앞서 언급한 대로 요미우리와 나가시마에 대한 라이벌 의식은 누구보다도 강렬하여 요미우리전에 등판할 때면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것마냥 엄숙하고 비장한 얼굴로 경기에 임했는데, 데뷔 시즌인 1959년에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천황이 경기를 관람하러 온 일명 "천람시합"으로 유명한 1959년 6월 25일 코라쿠엔 구장 원정경기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했다가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좌측 파울 폴을 맞히는 끝내기 홈런을 맞은 것도 이 라이벌 의식을 더욱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오죽 억울했으면 무라야마는 죽기 전까지 이 얘기만 나왔다 하면 "그건 파울이었다"라고 거품을 물었을 정도.[11][12]

파일:external/userdisk.webry.biglobe.ne.jp/CA390292.jpg
당시의 끝내기 홈런 장면. 등번호 3번이 나가시마, 마운드에서 고개를 숙인 투수가 무라야마.

그래서 유독 요미우리 경기 때엔 판정에 민감한 모습을 보이며 이건 아니다 싶은 판정이 나오면 다짜고짜 심판의 멱살을 붙잡거나 포수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 번은 요미우리전에서 나가시마에게 던진 회심의 공이 볼로 판정되자 그대로 심판에게 뛰어가 들이받아서 KO시킨 후 포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

나가시마와의 라이벌 관계는 무라야마가 1972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무라야마의 통산 1500탈삼진(1966년 6월 8일)[13], 2000탈삼진(1969년 8월 1일) 기록은 전부 나가시마를 상대로 기록한 것이었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는 선수 겸 감독으로 뛰었지만 이 때가 하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인 일명 V9 시기와 겹친 탓에 일본시리즈와는 인연이 없었고,[14] 1972년 시즌 초반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지휘권을 팀 선배이자 수석코치인 카네다 마사야스에게 넘기고 선수로만 뛰었다. 그리고 이 해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며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14년 동안 프로 통산 509시합 등판(348선발), 3050.1이닝 192완투 55완봉 222승 147패 2271탈삼진, 평균자책점 2.09의 성적을 남겼으며, 이 중 대졸 투수 200승은 구단 선배 와카바야시 타다시와 함께 유이한 기록이고 평균자책점은 센트럴리그 역대 1위이다.

무라야마의 은퇴 경기는 다음 해인 1973년 3월 21일 한신 코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로 진행됐는데, 등판 당시 에나츠 유타카를 필두로 한 후배 투수진들이 불펜에서 기마를 만들어 무라야마를 업고 마운드까지 옮기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업혀 등판한 무라야마는 "전부 포크볼만 던지겠다"는 선언과 함께 상대 타자들[15]이었던 타카다 시게루, 스에츠구 타미오, 오 사다하루를 전부 삼진을 잡아내며 마지막까지 명장면을 만들어냈다.[16]

4. 은퇴 이후

그의 등번호 11번은 은퇴 선언 직후 한신 타이거스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고, 후술할 감독 복귀 때 이 등번호를 다시 사용했다. 이후 칸사이대학 후배인 이와타 미노루가 한신에 입단했을 때 "대선배인 무라야마 씨보다 10배 더 잘하겠다"는 의미로 11에 10을 더한 등번호 21을 달기도 했다.

은퇴 후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닛폰 테레비의 야구해설가를 역임했고,[17] 1978년엔 명구회 초대 멤버로 가입했다. 1988년에 요시다 요시오의 후임으로 한신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6위[18], 5위에 그치면서 와다 유타카를 주전으로 발탁한 것 이외엔 좋은 성적을 남기지 못한 채 1989년 시즌 종료 후 퇴임했다.

1990년 이후 사망 전까지 아사히 방송, 선 텔레비전의 해설가를 맡았고, 1993년엔 일본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 당시 아시야시에 있던 자신의 아파트가 무너져[19] 자동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모습이 TV에서 방송되거나 생방송 인터뷰도 하는 등 불운한 모습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1998년 8월 22일에 지병인 직장암으로 향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 땐 한신 팬들이 그의 관을 실은 영구차를 뒤따라가면서 롯코오로시를 열창하며 무라야마의 명복을 빌었다.

5.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관계

현역 시절 나가시마가 무라야마를 상대로 거둔 통산 성적은 타율 .281(302타수 85안타) 21홈런 39삼진.

둘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사실 인간적으로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다. 무라야마는 평소 나가시마에 대해 얘기할 때 꼭 이름에 상(さん)을 붙여 예우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가시마 또한 "그는 현역 때 나에게 빈볼을 던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조건 정면 승부였다."라는 등 무라야마의 인간성을 대놓고 칭찬하고 다니기도 했다.

무라야마가 나가시마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듯이, 팀 후배 에나츠 유타카는 나가시마와 ON포를 결성한 오 사다하루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다.

6. 진기록

  • 1970년 시즌에 25경기 14승 3패 승률 .824 평균자책점 0.98을 기록했다. 선수 겸 코치로 달성한 기록이고, 양대 리그 체제 이후 유일한 평균자책점 0점대다. 시즌 자책점 0점대는 11번 기록되었으나 나머지 10번은 모두 양대 리그 체제 이전에 기록된 것이다.
  • WHIP은 역대 통산 1위인 0.954다. 현대 야구에서 1.00 미만이면 야구계를 대표하는 에이스라고 말하는 경이적인 수치이다. 동 시대를 대표하는 에이스 가네다 마사이치는 통산 1.072로 통산 12위이다.
  • 포크볼을 주무기로 한 투수였음에도 폭투가 적었다. 3,000이닝 이상 투구해도 단 16개에 불과하다. 시즌 최고는 1961년의 4개, 나머지 시즌은 모두 2개 이하였다. 1959년에는 295 1/3이닝, 1965년에는 307 2/3이닝을 던져 폭투를 1개도 기록하지 않았다.
  • 손가락이 짧았던 무라야마는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스스로 검지와 중지를 째기 위한 시도까지 했다.
  • 사와무라상 3회 수상은 역대 최다 타이기록이다.[20]
  • 통산 평균자책점 2.09는 센트럴리그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이다.

7. 기타

  • 대학 시절 배터리를 짰던 포수 우에다 토시하루도 같은 해 함께 프로에 발을 들였으나 무라야마와 달리 우에다는 부상으로 일찍 은퇴하고 코치로 전임하면서 무명의 선수로 남았다. 그러나 지도자로서는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무랴아마와는 정반대로 우에다는 감독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면서 한큐 브레이브스일본시리즈 3연패를 이끈 명장이 되었다.

[1] 태어난 직후 아버지의 전근으로 곧바로 아마가사키시에 이사를 가 그곳에서 자랐다.[2] 現 아마가사키시립 아마가사키산업고등학교.[3] 입단 당시 팀 이름은 오사카 타이거스였으며 1961년에 지금의 구단명인 한신 타이거스로 개칭했다.[4] 1972년 시즌 초반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카네다 마사야스 코치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명목상 감독으로만 남은 채 선수에만 전념했다.[5] 이 우승은 당시 대회 역사상 최초로 서일본 지역 소재 대학이 우승한 것이었다.[6] 당시 어깨 부상으로 곤란해하던 무라야마에게 대학 선배이자 당시 타이거스 구단 사장이던 타나카 키이치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을 주선해 준 것은 물론, 직접 병문안까지 와서 무라야마에게 "자네가 타이거스에 오길 원해서 굳이 이러는 것이 절대 아니니 안심해라. 난 그저 후배를 걱정하는 한 명의 선배일 뿐이다."라고 격려하는 등 따뜻하게 대해줬고 타나카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에 감격한 무라야마는 훗날 프로에 가게 되면 무조건 타이거스에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7] 여담으로 앞서 언급한 사유 외에도 계약 내용에 "한신 전기철도에서 타이거스로 출향한 사원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넣어 사실상 은퇴 후에도 본사 사원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준 것도 타이거스 입단에 호감을 느낀 사유였다고 한다.[8] 당해 31홈런으로 신인 단일시즌 홈런 기록을 수립했으며, 이 기록은 1986년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타이 기록을 수립한 것 외에는 현재까지 아무도 도달한 적이 없다.[9] 이 해엔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이름을 날리는 오 사다하루도 데뷔했으나 당시 프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탓에 신인왕 후보로 언급조차 되지 못했다. 퍼시픽리그에서는 오 사다하루와 동갑내기인 장훈이 1년차부터 주전으로 정착하며 무난하게 신인왕을 수상했다.[10] 정반대로 팀 선배 코야마 마사아키는 무라야마와 달리 힘들이지 않고 편안히 던지는 투구폼을 가졌는데, 그 편안한 인상의 투구폼과는 정반대로 예리한 제구력과 상당한 구속을 선보이며 타자들을 농락했다.[11] 사실 당시 조명 상태가 좋지 않아 좌측 폴대를 맞혔는지 파울이었는지 알 수 없었고, 당시 폴대 쪽 타구가 뻗은 시각이 저녁 9시 무렵인데 히로히토의 귀가시간이 9시 15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협회에서 홈런 판정을 내리게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다만 훗날 2011년 닛폰 테레비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당시의 타구를 분석한 결과 홈런이 맞다는 것이 밝혀졌다.[12] 물론 거품만 문 건 절대 아니고, 1980년대에 한 방송사가 해당 경기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땐 당시 홈런을 때린 나가시마 시게오와 농담을 주고 받는 등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의 썰을 풀었다.[13] 당시 무라야마는 1500탈삼진을 나가시마에게서 빼앗은 후 "이것으로 천람경기의 빚을 갚았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14] 그래도 1970년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마지막 0점대 방어율 투수(0.98)가 되는 등 실력은 여전히 뛰어났다.[15] 아쉽게도 이날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몸에 맞는 공으로 부상을 당한 데다 편도선염까지 겹친 탓에 도쿄로 귀경했다고 한다.[16] 여담으로 경기 전 한 소년과 캐치볼을 했는데, 이 소년이 훗날 한신에 입단해서 선수(1985년 일본시리즈)와 감독(2023년 일본시리즈)으로 각각 한신의 우승을 이끈 오카다 아키노부다.[17] 같은 니혼TV 계열의 요미우리 TV히로시마 TV에서도 해설가를 맡았다.[18] 시즌 도중 랜디 바스가 아들의 치료비 지원 문제로 구단과 갈등하다 퇴단하고, 구단 사장이 자살하는 등 암울한 사건들만 계속 터졌다.[19] 그냥 자택이 아니라 사업수완이 좋던 무라야마가 돈을 모아 직접 산 아파트였다.[20] 3회 수상자는 가네다 마사이치, 스기시타 시게루, 무라야마 미노루, 사이토 마사키, 야마모토 요시노부 등 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