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22:06:31

토리타니 다카시

토리타니 다카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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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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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tablecolor=#555,#aaa>
1965년 ~ 1988년
<rowcolor=#20272c,#d3dade>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이시도코 미키오
(石床幹雄)
에나츠 유타카
(江夏豊)
니시무라 코이치
(西村公一)
노가미 토시오
(野上俊夫)
타부치 코이치
(田淵幸一)
<rowcolor=#20272c,#d3dade>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우에다 지로
(上田次朗)
타니무라 토모히로
(谷村智啓)
야마모토 카즈유키
(山本和行)
사오토메 유타카
(五月女豊)
사노 노리요시
(佐野仙好)
<rowcolor=#20272c,#d3dade>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코가 마사아키(6)
(古賀正明)
아다치 요시오(6)
(足立義男)
마스야마 세이쿄쿠
(益山性旭)
이토 후미타카
(伊藤文隆)
에가와 스구루(2)(6)[1]
(江川卓)
<rowcolor=#20272c,#d3dade>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오카다 아키노부(2)
(岡田彰布)
나카다 요시히로
(中田良弘)
겐고로마루 히로시(1)
(源五郎丸洋)
키도 카츠히코
(木戸克彦)
나카니시 키요오키
(中西清起)
<rowcolor=#20272c,#d3dade>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시마다 아키히로(2)
(嶋田章弘)
토오야마 쇼지(1)
(遠山奬志)
이노마타 타카시(1)
(猪俣隆)
노다 코지(1)
(野田浩司)
나카고미 신
(中込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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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 2018년
<rowcolor=#20272c,#d3dade>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카사이 미노루(1)
(葛西稔)
유후네 토시로(1)
(湯舟敏郎)
하기와라 마코토
(萩原誠)
아다치 토모지로(1)
(安達智次郎)
야부 케이이치(3)
(藪恵壹)
<rowcolor=#20272c,#d3dade>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야마무라 히로키
(山村宏樹)
후나키 사토시(3)
(舩木聖士)
이마오카 마코토(3)
(今岡真訪)
나카타니 진
(中谷仁)
후지카와 큐지
(藤川球児)
<rowcolor=#20272c,#d3dade>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마도바 칸이치(3)
(的場寛一)
후지타 타이요(3)
(藤田太陽)
안도 유야(3)
(安藤優也)
스기야마 나오히사(3)
(杉山直久)
토리타니 타카시(3)
(鳥谷敬)
아사이 료(3)
(浅井良)
에구사 히로타카(3)
(江草仁貴)
츠츠이 카즈야(3)
(筒井和也)
<rowcolor=#20272c,#d3dade>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노미 아츠시(3)
(能見篤史)
츠루 나오토(4)
(鶴直人)
노하라 마사시(1)(4)
(野原将志)
타카하마 타쿠야(1)(2)(4)
(髙濱卓也)
샤오이지에(1)
(蕭一傑)
오카자키 타이치(3)
(岡﨑太一)
이와타 미노루(3)(5)
(岩田稔)
코지마 타츠야(3)(5)
(小嶋達也)
시라니타 히로카즈(1)(5)
(白仁田寛和)
<rowcolor=#20272c,#d3dade>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후타가미 카즈히토(1)
(二神一人)
에노키다 다이키(1)
(榎田大樹)
이토 하야타
(伊藤隼太)
후지나미 신타로(2)
(藤浪晋太郎)
이와사다 유타(1)
(岩貞祐太)
<rowcolor=#20272c,#d3dade>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요코야마 유야(1)
(横山雄哉)
타카야마 슌(2)
(髙山俊)
오오야마 유스케
(大山悠輔)
바바 코스케(1)(2)
(馬場皐輔)
치카모토 코지(1)
(近本光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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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레이와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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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
<rowcolor=#20272c,#d3dade>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니시 준야(1)
(西純矢)
사토 테루아키(2)
(佐藤輝明)
모리키 다이치(1)
(森木大智)
모리시타 쇼타(1)
(森下翔太)
시모무라 카이토
(下村海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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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추첨 성공.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1] 한신이 중복 추첨 끝에 교섭권을 획득했으나, 쿄진 입단을 희망해서 거부하였다가, 입단 직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 이른바, '공백의 1일' 사건. 1977년에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지명되었으나 역시나 입단을 거부했다.
틀:한신 타이거스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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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
이바타 히로카즈
(주니치 드래곤즈)
토리타니 다카시
(한신 타이거스)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0, 201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자이언츠)
토리타니 다카시
(한신 타이거스)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3~201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자이언츠)
토리타니 다카시
(한신 타이거스)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소요기 에이신
(히로시마 도요 카프)
토리타니 다카시
(한신 타이거스)
이바타 히로카즈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3~201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이바타 히로카즈
(주니치 드래곤즈)
토리타니 다카시
(한신 타이거스)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무라타 슈이치
(요미우리 자이언츠)
토리타니 다카시
(한신 타이거스)
미야자키 토시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1년 센트럴 리그 최고 출루율

보유 기록(NPB)
연속 경기 풀 이닝 출장(유격수) 667경기
한 시즌 최다 타점(유격수) 104타점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1번
타니나카 신지
(2001~2003)
토리타니 다카시
(2004~2019)
모리시타 쇼타
(2023~)
{{{#fff [[치바 롯데 마린즈|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00번}}}
조시 레이빈
(2019)
토리타니 다카시
(2020~2021)
현재공번

}}} ||
파일:230615 토리타니 타카시.jpg
토리타니 타카시
鳥谷敬 | Takashi Toritani
생년월일 1981년 6월 26일 ([age(1981-06-26)]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
학력 세이보학원 고교 (사이타마) - 와세다대학[1]
신체 180cm, 79kg
포지션 내야수[2]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2003년 드래프트 자유획득제 (한신)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2004~2019)
치바 롯데 마린즈 (2020~2021)
등장곡 롯데 시절 : 세븐틴 - HOME;RUN[3]
세븐틴 - HIT
응원가 한신 시절[4]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선수 생활
3.1. 한신 시절3.2. 롯데 시절
3.2.1. 2020 시즌3.2.2. 2021 시즌
4. 은퇴 후5. 기타6. 연도별 기록

[clearfix]

1. 개요

전 야구선수.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말년을 보냈던 야구선수. 등번호는 한신 시절에는 1번이었으나 롯데에서는 00번을 달았다. 주 포지션은 유격수였으나, 공수에서 노쇠화가 뚜렷이 드러난 2016년을 기점으로 3루수로 주로 출장했다.[5] 다만 롯데로 이적한 2020년부터는 다시 유격수로도 꽤 자주 나왔다. 어차피 내야 백업 겸 대타, 가끔 줄부상이 났을 때 땜빵 선발로 나오는 선수라 체력적인 걱정이 덜해서 그럴 수도 있다.

2010년과 2011년에 한신 선수회장, 2012 년에 야수 캡틴을 역임했다. 2013년부터 팀 주장을 맡는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해 2라운드 대만전에서 9회말 2아웃에 도루를 성공해 일본의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2. 플레이 스타일

이 선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꾸준함.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전경기 출장 기록을 이어갔으며, 기누가사 사치오, 카네모토 토모아키에 이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3위의 연속경기 출장 기록(1939경기)을 갖고 있다. 2005~2007년 사이에 유격수로서 392경기 연속 풀이닝 출장을 하며 일본 기록을 세웠으며, 2016년 4월 24일에는 유격수로 600경기 연속 풀이닝 출장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연속 출장 기록은 체력 부담이 큰 유격수로서는 매우 드문 업적이다. 이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토리타니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타격은 2루타와 3루타가 많은 중거리 타자이며 찬스에 강한 클러치 히터라는 평가를 받는다. 선구안이 뛰어나고 참을성이 뛰어나 볼넷을 잘 골라내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높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 연속으로 최다 사사구 타이틀을 가져갔다. 2할 8푼 정도의 타율에 10 ~ 15개 정도의 홈런, 4할에 근접한 출루율, OPS 0.800 정도의 타격성적을 꾸준히 내고 있다. 좌투수/우투수 상대 스플릿도 균일한 편. 2010년에는 104타점을 때리며 일본프로야구 역대 유격수 1시즌 최다타점 기록도 세웠다.

수비에서는 눈에 띄게 화려한 플레이는 적지만 넓은 수비범위, 부드러운 글러브질, 강한 어깨[6]를 두루 가져 평가가 높다. 특히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인 한신 고시엔 구장이 흙 내야라는 내야수비에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6년 490보살, 2013년 .994로 센트럴리그 유격수 단일시즌 최다 보살 및 최고 수비율 기록을 수립했다.[7] KBO 골든글러브와 비슷하게 선수의 종합적인 평가를 보는 베스트나인은 6회, 수비로만 평가하는 골든글러브는 4회 수상[8]하였다.

타이틀이나 눈에 띄는 화려함이 적은 데 비해 높은 수준의 활약을 했다. 일본에서 세이버메트릭스가 주류는 아니지만, 2013년 일본의 <세이버메트릭스 매거진>에서 평가한 바에 따르면 UZR 26.4로 유격수 부문 1위, WAR은 8.0으로 양 리그 1위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2014년부터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연속출장을 강행한 것의 영향인지 UZR 등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2015년에는 -20.4의 민폐급 UZR을 찍고서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3. 선수 생활

3.1. 한신 시절

파일:external/hanshintigers.jp/1.jpg

토리타니의 응원가

원래는 왼손잡이였지만 오른손잡이로 교정되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우타자였지만, 왼손에 젓가락을 쥐면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본 감독이 좌타자로 전향을 권유했다고 한다. 최근에도 연습타격 때 우타석에서 치는데 파워가 대단하다고. 고교 졸업 후 와세다대학에 진학하면서 유격수에만 전념하였고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역사상 가장 빠른 타이 기록이 되는 2학년 봄대회에서의 3관왕을, 4학년 봄에는 당시 리그 기록이 되는 19개의 사사구를 기록했다. 4학년 가을에는 통산 두 번째의 수위타자를 석권해 베스트 나인에도 다섯 차례나 선정되었다. 주로 3번 타자로 뛰면서 대학 동기인 아오키 노리치카등과 함께 팀의 중심 선수로서 활약하는 등 리그전 4연패 달성에 기여했다.[9] 주루, 공격, 수비를 모두 갖춰진 대형 유격수로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합을 한 끝에 2003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의 자유 획득범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2014시즌을 마치고 해외 FA권리를 행사, 스캇 보라스를 에이전트로 선임하는 등 MLB 도전을 선언했다. 니시오카 츠요시나카지마 히로유키등 최근의 일본인 내야수 영입으로 큰 재미를 보지못한 MLB 구단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 귀추가 주목되었다. 하지만 결국 끝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단념하고 원 소속팀인 한신과 약 5년 20억엔의 계약에 합의했다. 나이와 계약기간을 감안하면 한신에서 은퇴를 할 공산이 커졌다.

2015년 이후로는 팍 떨어진 UZR 수치에서도 볼 수 있듯, 노쇠화와 연속출장의 후유증으로 인해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시즌에는 노쇠화가 뚜렷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감독인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계속해서 주전 유격수 붙박이로 쓰는 똥고집을 부리면서 자신의 말년처럼 팀의 세대교체를 가로막는 민폐화의 길을 걷게 하고 있다.


오죽하면 2016년 "봄 허접수비 컬렉션"이라는 동영상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2016년 시즌 중반부터는 주전 유격수 자리를 신예 호조 후미야에게 완전히 내주고 3루수로 출장하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완전히 3루수로 정착했다. 5월까지는 3할 타율-4할 출루율을 찍으며 아직 선구안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토이 요시오, 후쿠도메 코스케와 함께 베테랑 3총사로서 한신 타선을 이끌고 있다. 다만 3할 5푼대의 장타율에서 볼 수 있듯 전성기의 갭파워는 많이 잃어버리고 완전한 똑딱이가 된 상황. 그래도 시즌 중 큰 부상을 당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올해 안에 2000안타를 치며 무난히 명구회 가입자격을 얻게 될 거라 전망된다. 2017년 5월 5일 기준으로 1900안타를 기록하며 요시다 요시오, 와다 유타카 등의 레전드들을 제치고 한신 역대 누적안타 기록 2위에 올라있다. 1,2년 정도만 기량을 유지한다면 1위인 후지타 타이라의 2064안타도 제칠 가능성이 크다. 다만 5월 24일 고시엔에서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서 상대 선발 요시카와 미츠오에게 안면 직격 데드볼을 맞고 코피를 흘리며 실려나갔는데, 이후에는 페이스 가드를 착용하고 대타로만 출전하고 있지만 풀 가동은 힘들어진 상황이다. 8월 9일 한신 타이거즈 팀 역사상 유일하게 2,000안타를 기록한 후지타 타이라[10]가 보는 앞에서 안타 1개를 추가하며 2,000안타 달성에 34개를 남겨두게 되었고, 9월 8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적시 2루타를 치면서 2000안타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2018년에는 타율 2할도 넘지 못하는 부진의 와중에도 연속출장 경기 기록이 걸려있는 탓에 꾸역꾸역 선발출장을 하고, 대타로 나오면서 한신 팬들의 골칫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그 와중에도 출루율은 3할대를 기록하는 등 선구안은 아직 날카롭다는 점 정도만 남고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타격도 안 되는 데다가 40에 가까운 나이로 인해 작년도에 이미 3루수로 전향한 선수를 1번-2루수로 배치하는 이해하기 힘든 기용은 덤. 역시 연속경기[11] 출장이 걸리는 바람에 성적이 폭락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기용되던 카네모토 토모아키 감독의 말년처럼 한신의 '성역'으로 불리면서 비아냥받은 역사가 토리타니에게서 반복되게 되었다.

결국, 2018년 5월 2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결장하여 연속출장 기록은 1939경기에서 중단되었다. 기누가사 사치오의 2215경기에 이은 2위 기록.

시즌이 끝나가는 10월 4일 야쿠르트 전에서 안타를 쳐내, 후지타 타이라의 기록을 제치고 구단 최다안타인 2065안타를 기록했다. 그걸 빼면 2018년은 타율 0.232로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며 이래저래 상처만 남은 시즌이 되었다.

2019시즌에는 시즌초 내야수 유망주 키나미호조의 부진으로 3년만에 유격수로 선발 출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주전으로써의 경쟁력은 거의 상실한 채 대타로만 출장하고 있다. 하지만 벤치멤버로써도 제 역할을 전혀 해주지 못하고 있다. 시즌 타율은 2할은 커녕 1할 5푼도 채 되지 않으며 당연히 홈런도 못 쳤다. 거기다 주로 득점권 상황에서 대타로 기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득점권 타율이 .000이다.[12]

이렇게 있느니만 못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노 아키히로 감독은 별다른 이유없이 토리타니를 계속 1군에 두고 있다. 이 때문에 한신팬들은 부진한 토리타니와 그런 토리타니를 계속해서 1군에 잡아두는 야노 감독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성토하는 중.

그러나 도리타니의 1군 철밥통은 감독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도리타니는 명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2003년 한신에 드래프트 1순위에 준하는 자유획득 슬롯으로 입단했으며 일찌감치 구단에서 감독후보로까지 점찍은 타이거스 성골이다. 비록 팀내 공로자에 프랜차이즈 취급이긴 하지만 타팀 출신인 가네모토나 야노가 감독이라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팀내에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지 않는 한 감독들이 마음대로 1군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는 게 한신을 아는 팬들의 중론이다.

결국 구단이 나서서 2019년 8월 29일 도리타니와 면담을 가지고 2020년도 전력구상에서 제외할 것임을 통보했다. 본인은 아직 현역연장에 미련을 가지고 있어 만약 현역을 연장하고 싶다면 타 팀을 알아봐야 할 듯.

다만 한신은 요미우리와는 달리 프랜차이즈 스타가 현역 막판에 선수생활 연장을 위해서 타 팀에 잠깐 몸을 담는 것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실제 2004~2008년까지 감독을 역임한 오카다 아키노부도 현역 막판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해서 선수생명을 연장했으며, 그 후임인 마유미 아키노부, 현재 감독인 야노 아키히로, 그 전임인 가네모토 도모아키 등은 한신에서 NPB 커리어를 시작한 것도 아닌 타구단 출신 이적생이다. 요미우리처럼 선택지가 은퇴냐 감독포기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도리타니가 현역연장을 위해서 타팀으로 이적한다고 해도 선수 개인에게 부담은 적은 상황이다.

9월 1일 결국 타구단을 알아보겠다고 선언했다. 시즌 후 이적의 형식이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타율 .208에 홈런 0개짜리 38세 지명/대타요원을 영입할 팀이 있을 리가 없는지라 전망은 어둡다. 다만 찌라시에 의하면 도리타니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이구치 타다히토가 감독으로 있는 롯데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13]

3.2. 롯데 시절

3.2.1. 2020 시즌

한동안 아무 말도 없어서 은퇴하나 싶었는데 1월 18일에 도쿄스포츠에서 다시 토리타니 롯데행 기사를 냈다. 도쿄스포츠가 원래 찌라시로 유명하지만 이와세 히토키 보상선수 사건을 밝혀내는 등 최근에는 신뢰도가 조금 올라갔기 때문에 롯데 팬들은 다시 긴장 시작.[14] 그러나 에나츠 유타카의 인터뷰에서 이구치 감독이 영입을 원했으나 롯데 구단 OB들의 결사반대로 롯데마저 입단이 좌절되었다고 뜨면서 그대로 은퇴하는 것이 기정사실화...였는데 3월 10일 한창 시범경기 중이던 상황에서 롯데 입단이 발표되었다.[15] 어쩌다보니 33-4를 경험한 선수로서는 마지막으로 롯데에서 뛰는 현역 선수가 되었다.[16] 등번호는 00번.[17]

3월에 영입돼서 시즌 초는 2군에서 시작한다고 하지만 시즌이 코로나 19 때문에 미뤄져서 롯데 팬들의 반응은 '시바타 코헤이[18]보다는 잘 치겠지?'부터 이마오카 마코토[19]의 은퇴 파티에서 이구치와 이마오카가 말했던 "토리타니의 은퇴경기는 우리에게 맡겨라."가 이걸 계획한 거였냐는 반응까지 나오는 등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처음 영입 찌라시가 나올 때 만큼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6월 2일 연습경기 개막전에 3번 타자 3루수로 출장했다. 그 외에도 연습경기에서는 멘도사 라인의 타격을 보여주지만 꾸준히 출전하고 있다. 개막 1군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결국 연습경기가 모두 끝난 6월 16일 개막전을 1군에서 맞이하게 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개막전에서는 벤치에만 앉아있었고 6월 20일 브랜든 레어드대주자로 출전하였다.

그 후로 대주자나 3루 대수비 위주로 나오다 6월 27일 처음 타석에 나와 9회말 1:1 1사만루 끝내기 찬스에서 삼구삼진을 당했다.

7월 18일 드디어 롯데에서의 첫 안타를 기록했다. 타율 .200.

7월 25일 2타점 적시 2루타를 쳤다.

8월 2일 7번 유격수로 선발출장한다. 이전에 3루수 선발출장은 있지만 유격수로 선발출장한 건 롯데 1군 정식경기에선 처음. 다만 무안타를 기록했다.

8월 4일 9회초에 대주자로 나온 후에 9회말에 3루수로 들어가서 1이닝 2실책으로 다 이긴 경기를 무승부로 만드는 초대형 사고를 쳤다. 이구치가 우겨서 데려온 것의 결과는 1이닝 2실책과 이길 경기를 날려먹은 것. 이래놓고 다음날 말소도 되지 않았다. 진정한 적폐 양아들이다.

9월 2일 대타로 나와서 끝내기 삼진을 당했다. 이젠 배트에 갖다대지도 못하는데 왜 데려온건지 모르겠다.

9월 27일 8번 유격수로 오랜만에 선발출장. 땅볼타점을 기록하며 1타점을 추가했다.

10월 6일 코로나바이러스-19 양성 판정을 받고 1군에서 말소되었는데, 이게 프로데뷔 후 첫 2군행이었다고 한다. 동월 15일에 2군 훈련에 합류했고, 16일에 바로 1군에 올라와 시즌을 마쳤다. 최종적으로 42게임 출장에 타율 .139로 커리어로우를 다시 대폭 갱신했다.

롯데와 차기시즌 계약에 합의하며 일단 현역생활은 이어가게 됐다. 연봉은 동결로 1600만엔. 비록 야구는 못하지만 인기선수라 유니폼과 상품이 굉장히 잘 팔리는데 비해 1600만엔이라는 연봉은[20] 신인 선수급으로 저렴해 오히려 돈을 벌어다주는 선수인데다 팀으로서도 2020년 리그 2위로 순항해 리빌딩이 필요한 시점도 아닌지라 현역 연장을 원하는 토리타니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서로 재계약이 원만히 합의되었다.

3.2.2. 2021 시즌

오가와 류세이의 부상으로 인해 얼떨결에 개막전 주전 유격수로 낙점. 이날 7번 타자 유격수로 선발출장하여 1안타를 기록했다.

이후로는 평범하게 타율 1할 7푼 정도를 기록하며 작년이나 재작년과 비슷한 수준의 성적을 기록하며 1군과 2군을 오가며 주로 대타, 대주자 위주 백업으로 출장하고 있다. 작년과 같이 팀은 파리그 우승을 다투어서 굳이 리빌딩이 필요한 시점도 아니고, 여전히 인기선수이며, 토리타니 또한 어차피 돈이 궁한 처지는 아니니 최저연봉을 감수하고 계속 뛰기를 원한다면 한해 더 같이 갈 가능성은 충분하다.

시즌 성적은 6안타 2타점 .170 .279 .226 .505 31WRC+ -0.3WAR

결국 10월 31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4. 은퇴 후

은퇴 후 2022년에는 야구해설가 일과 사회인야구 팀 코치직을 병행한다.

2023년 10월에 방영 된 하극상 야구 소년에 까메오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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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롯데로 이적하게 되었을 때 팬들 사이에서는 반대가 중론이었으나, 막상 영입한 후에는 엄청나게 굿즈가 팔리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직관을 가 보면 사사키 로키보다 토리타니의 유니폼이 더 자주 보인다. 그도 그럴 게 사사키는 이 당시 터지기 전 1년차 루키였지만 토리타니는 근 15년간 인기팀 한신의 최고 스타에 국가대표 유격수로 일본프로야구 전체를 통틀어서도 인기가 손에 꼽히는 선수였으니. 심지어 프로야구 스피리츠 A에서 특별 S랭크 선수 발매를 팬들의 인기투표로 정한다고 했는데, 이 투표에서 토리타니가 압도적인 1등을 기록했다! 참고로 2위는 놀랍게도 이시카와 아유무. 문제는 이러한 대인기와 함께 토리타니가 백업으로 몇 번 활약하자 돈맛을 본 구단 측에서 더 많은 수익을 위해[21] 토리타니 중용을 감독과 코치진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 2014시즌 이후 MLB 진출설이 돌았을 때, 같은 해 MLB의 관심을 받았고 포지션도 같았던 강정호의 경쟁자로 국내 언론에서도 기사화가 많이 되었다. NPB에 관심없던 국내 팬들은 도리타니라는 이름을 이 때 처음 접했을 확률이 높다.
  • 2005년 시즌 종료 후, 고등학교때 야구부 매니저였던 1년 연상의 일반인 여성과 일찌감치 결혼했다. 슬하 자녀는 5명으로 대가족이다..
  • 묘하게 LG 트윈스김용의랑 닮았다.[22]
  • 오승환이 한신시절때 주전 유격수였으며 한국 팬들에게도 인지도가 꽤 있다.

6. 연도별 기록

역대 기록(NPB)
<rowcolor=#000000>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04 한신 101 261 59 13 0 3 17 28 2 21 66 .251 .320 .345 .665 -0.4
2005 146 646 159 27 1 9 52 82 5 53 115 .278 .376 .343 .719 3.1
2006 146 609 157 28 2 15 58 65 5 60 111 .289 .362 .431 .793 5.1
2007 144 642 154 19 4 10 43 67 7 63 106 .273 .350 .373 .723 2.4
2008 144 605 147 17 6 13 80 66 4 68 85 .281 .365 .411 .776 5.2
2009 144 617 155 31 2 20 75 84 7 65 83 .288 .368 .465 .833 5.5
2010 144 651 173 31 6 19 104 98 13 66 93 .301 .373 .475 .848 6.3
2011 144 590 150 28 7 5 51 71 16 78 72 .300 .395 .414 .809 7.3
2012 144 624 135 22 6 8 59 62 15 94 91 .262 .373 .375 .748 5.7
2013 144 643 150 30 4 10 65 74 15 104 65 .282 .402 .410 .812 7.4
2014 144 644 172 28 2 8 73 96 10 87 80 .313 .406 .415 .821 5.1
2015 143 646 155 21 4 6 42 69 9 89 77 .281 .380 .367 .747 4
2016 143 533 106 16 1 7 36 49 13 75 80 .236 .344 .323 .667 0.1
2017 143 570 143 23 3 4 41 57 8 77 62 .293 .390 .377 .767 1.5
2018 121 261 51 11 0 1 22 15 1 34 37 .232 .333 .295 .628 -0.7
2019 74 105 19 3 1 0 4 9 1 9 12 .207 .298 .261 .559 -0.1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20 롯데 42 39 5 2 0 0 6 5 0 1 8 .139 .205 .194 .399 -0.2
2021 32 61 9 3 0 0 2 7 0 8 11 .170 .279 .226 .505 -0.3
NPB 통산
(18시즌)
2243 8797 2099 353 49 138 1004 830 131 1055 1258 .278 .368 .393 .762 57


[1] 당시 신설된 스포츠 추천 입학제의 최초 대상자다.[2] 고교 시절엔 주로 2루수를 보았고, 한신 시절의 전성기에는 유격수, 전성기 이후엔 3루수를 주로 보았다. 롯데 시절엔 1루수로도 몇번 수비를 섰다.[3] 1,3번째 타석에 사용[4] 夢乗せてはばたけよ 鋭いスイング魅せてくれ さあ君がヒーローだ 鳥谷敬(꿈을 싣고 날아라 날카로운 스윙으로 매료시켜줘 자 네가 히어로다 토리타니 다카시 )[5] 하지만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사카모토 하야토가 유격수를 보고 토리타니는 2루수로 주로 출장하였다.[6]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말년에 제대로 된 송구가 어려울 정도로 어깨가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연속출장기록의 이유로 거의 모든 경기를 주전으로 출장했는데, 때문에 강견의 토리타니가 사실상 좌익수가 맡아야 할 플라이 수비나 터치업 송구를 책임지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일본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토리타니가 쇼트 + 레프트를 겸임하는 '쇼프트'(ショフト)라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7] 194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스기우라 키요시가 502보살을 기록했으나 단일리그 시기의 기록이라 센트럴리그 기록엔 반영되지 않는다. 이 기록은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기록이기도 했으나 2018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겐다 소스케가 526보살로 기록을 경신했다.[8] 젊은 시절에는 보다 이름값 높은 노장 이바타 히로카즈의 골글 독점에 밀려 수상 횟수의 손해를 봤다.[9] 지금이야 아오키의 인지도가 훨씬 크지만 대학교 에서는 아오키가 2번, 토리타니가 3번으로 훨씬 잘 쳤다고.. 현재는 둘다 명구회 회원이다.[10] 1966~1984년 19시즌 동안 한신 타이거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한신 타이거스에서만 뛴 선수 중 유일한 명구회 회원이다. 1995년 나카무라 카츠히로를 대신해 한신 감독대행으로 취임 후 1996년에 정식 감독이 되었으나, 시즌 도중 성적부진으로 해임되었다.[11] 덤으로 카네모토는 연속 이닝 출장도 걸려있었어서서 대타/대수비로 교체도 제대로 못하기도 했다.[12] 7월 3일 기준 득점권 26타수 무안타[13] 다만 후쿠우라 카즈야가 은퇴하면서 정신적 지주가 없어서 필요로 한다는데(사실 베테랑이라면 1980년생 호소카와 토오루가 있는데도.), 구단에서는 또 다른 베테랑 유격수의 영입을 원해서 의견충돌이 있다고 한다.(아마 이 베테랑 유격수는 오오비키 케이지나 니시오카 츠요시로 예상.)[14] 거기다가 다른 찌라시에 의하면 구단에서는 토리타니를 영입할 바에는 오오비키 케이지를 영입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다는데, 이 오오비키는 얼마 전에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15] 이로써 토리타니는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될 전망이다. 본인은 어릴때 골수 세이부팬이었다.[16] 참고로 33-4를 롯데 소속으로 경험한 선수 중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뛴 선수는 후쿠우라 카즈야. 딱 2019년까지 현역으로 뛰었다.[17] 한신 시절 1번은 기요타 이쿠히로가 쓰고 있었다. 근데 2021년에 사고 쳐서 방출된 건 함정[18] 토리타니처럼 한신에서 있다가 방출 후 롯데로 와서 똑같은 등번호인 00을 달았던 외야수. 토리타니처럼 엄청난 커리어를 보냈던 것은 아니고 백업 외야수였지만 이 선수도 30대로 나이가 꽤 많았다. 롯데에서는 2017년 한 시즌 뛰었으며 타율 .121을 찍고 1년만에 방출당해 은퇴.[19] 타점왕 출신 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 그러나 말년에 퇴물이 된 후 롯데에서 잠깐 말년 커리어를 보냈으며 은퇴 이후에는 롯데에서 코치를 하다가 퇴임하고 평론가가 되었다. 즉 이구치랑 같이 토리타니를 롯데에 데려올 만한 연줄이 있는 롯데의 멤버다.[20] 1군 최저연봉이다.[21] 실제로 굿즈도 2020년 롯데 선수단에서 토리타니가 제일 잘 팔린다.[22] 공교롭게도 김용의 역시 2021년 시즌이 끝나고 은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