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하라 히로미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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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89 | 1994 | 2000 |
198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우수 신인 | ||||
츠다 츠네미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마키하라 히로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코바야카와 타케히코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카와사키 켄지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마키하라 히로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토마스 오말리 (야쿠르트 스왈로즈) |
보유 기록(NPB) | |
퍼펙트 게임 | 1994년 5월 18일, 카프전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54번}}} | ||||
키노시타 토오루 (1978~1981) | → | 마키하라 히로미 (1982~1986) | → | 타루미 카네노리 (1987~1988)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7번}}} | ||||
키스 컴스탁 (1985~1986) | → | 마키하라 히로미 (1987~2001) | → | 타카하시 히사노리 (2002~2006) |
마키하라 히로미 槙原寛己 | Hiromi Makihara | |
생년월일 | 1963년 8월 11일 ([age(1963-08-11)]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아이치현 한다시 |
학력 | 아이치현립 오오부 고교 (아이치) |
신체 | 187cm, 94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1년 드래프트 1라운드 (요미우리)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2001) |
유튜브 채널 | ミスターパーフェクト槙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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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였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만 활약한 원 클럽 플레이어다.현역 시절 사이토 마사키,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 '거인의 세 대들보(교진 산본바시라)'라는 별칭이 붙은 선수였다.
2. 선수 시절
아이치현립 오오부고등학교[1] 시절부터 장신(187cm)의 파이어볼러로 이름을 날렸는데, 3학년 때인 1981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에서는 당시 역대 최고 구속인 147km/h를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1981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 지명을 받으면서 입단한다.입단 첫 해인 1982년에는 1군 승격 없이 2군에서 담금질을 했지만, 다음 해인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정착해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아 12승 9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67의 성적으로 센트럴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이 당시 NPB 최고구속이었던 155km/h를 기록[2]하기도 했지만, 1984년과 1985년에는 제구에 어려움을 겪으며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투구폼과 패턴에 변화를 주게 되는데, 스피드가 줄어든 대신 컨트롤과 더불어 슬라이더를 비롯한 변화구의 완성도가 크게 향상되면서 리그 정상급 투수로 도약하게 된다. 1988년에는 18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탈삼진 1위[3]에 등극했고, 1991년과 1992년에는 2년 연속으로 요미우리의 개막전 선발투수를 맡기도 했다.
특히 1994년은 마키하라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한 해가 되었는데, 5월 18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홈경기[4]에서 9이닝 102구 7탈삼진 출루 0회를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역대 15번째이자 퍼펙트 게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5][6] 이 해엔 29시합 26선발 12승 8패 185이닝 방어율 2.82 153K를 기록하며 베테랑의 관록을 보여주었으며,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1994년 일본시리즈에서 2차전과 6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2승을 쓸어담으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7]
이후 1998년, 오릭스에서 마무리 투수 후보로 영입한 노무라 타카히토[8]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팀은 후반기부터 마키하라를 마무리 투수로 전향시키게 된다. 마키하라는 그 해 18세이브를 올렸고 다음 해에는 23세이브를 올리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빈말로라도 안정감 있는 클로저라고 말하기는 어려웠고, 언론에서는 마키하라에게 '노답마신(ダメ魔神, 다메마진)'[9]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요미우리의 주축 투수로 뛰어오던 마키하라였지만, 2000년에 성적이 급격히 나빠진 것에 더해 시즌 중반에 다리 부상을 당하며 남은 정규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리게 된다. 이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일본시리즈에 맞춰 복귀했는데, 구원 등판한 1차전에서 다이에의 외국인 타자 멜빈 니에베스에게 홈런을 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었고 이후 일본시리즈 등판 없이[10] 그대로 2000시즌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마키하라를 기다렸는데, 일본시리즈 개막에 맞춰 복귀하기 위해 무리하다 어깨 부상을 당하면서 그 여파로 구속이 130km/h대까지 하락하고 말았다. 어깨 부상의 여파는 다음 해인 2001년에도 계속되었고, 투구 컨디션이 호전되지 않자 결국 마키하라는 이 해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2001년 9월 30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전에서 팀 동료인 사이토 마사키, 무라타 신이치와 함께 은퇴 경기를 치렀고, 이 경기에서 타니시게 모토노부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20년 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통산 성적은 463경기(334선발) 159승 128패 56세이브 2485이닝 2111탈삼진 평균자책점 3.19로, 통산 2111탈삼진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16위이자 요미우리 구단 통산 최다 기록이다.
3. 플레이 스타일
젊은 시절에는 속구파 투수였다. 프로에서 처음 던진 공이 150km/h였는데, 이때가 1983년으로 이 당시 한국프로야구에서는 140만 넘어도 강속구라고 불러주던 시절임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스터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속이 빠른 반면 제구력이 불안해 볼넷도 많고 데뷔 1년차에 리그 1위인 6폭투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소화 이닝도 그다지 많지 않은, 흔한 구속이 빠르고 제구가 불안한 우완 강속구 투수였다.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로 구속을 줄인 대신 제구력을 가다듬었고, 여러 가지 변화구를 장착하며 완전체 선발 투수로 거듭나게 되었다. 특히 80년대 중반 팀 선배인 시노즈카 카즈노리[11]에게 배웠다는 슬라이더는 마키하라를 상징하는 결정구가 되었으며, 여기에 포크볼에 체인지업성 커브까지 던지면서 예전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송곳같이 컨트롤되는 포심 패스트볼에 날카로운 변화구로 수싸움으로 삼진을 잡아내는 타입의 꾀돌이형 투수가 되었다. 구속을 포기한 이후엔 아예 와인드업을 하지 않고 세트 포지션으로만 공을 던지게 되었고, 루상에서 주자들이 도루를 하기가 까다로운 선수여서 뛰어난 제구와 칼같은 주자 견제로 안정감 있는 경기 운영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여담으로는 타격 실력이 형편없었다. 시력이 안 좋아서인지 투수치고도 형편없는 타격실력을 자랑했는데 통산타율 .107에 20년간 선수생활을 했음에도 통산 100안타도 못 쳤다. 오죽하면 후대 세이버로 타격 WAR이 -5였을 정도.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지명타자 없는 리그의 선발투수라 이 점이 영향을 많이 끼쳤는데, 방망이를 좀 치거나 하다못해 번트라도 좀 댈 줄 아는 투수는 찬스 상황에서도 번트라도 대보라고 그대로 끌고가는 경우가 많은데, 마키하라는 방망이를 하도 못 쳐서 경기중반 찬스 상황에 타석이 돌아오면 칼같이 대타로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좀 더 던질수도 있는 상황에서 교체되곤 했으니 이닝소화력이 모자랐던 데는 이런 본인의 타격실력도 한 몫 했다.
정말 여담으로 20년동안 선수생활하며 홈런을 딱 한개 쳤는데, 그게 요미우리 구단 통산 5천호 홈런이었다.
4. 평가
사이토 마사키,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 1980~19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대표했던 간판 투수였고, 전성기 시절 이 3명은 거인의 세 대들보(교진 산본바시라)라는 별칭이 붙기도 할 만큼 독보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였다.그러나 쿠와타와 사이토에 비해 이닝 소화력이 떨어졌던 점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1990년대까지는 에이스들은 200이닝을 척척 먹어주던 시절이었고 실제로 쿠와타나 사이토는 200이닝도 곧잘 기록했지만, 마키하라는 그렇지 못해서 200이닝을 넘긴 것이 1988년 단 1번 뿐이다.
또한 1994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하면서 어느 정도 씻어냈지만, 그 전까지는 1986년 리그 우승이 걸린 중요한 시합에서 결승 홈런을 맞아 팀이 우승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데 이어 1990년 일본시리즈에서 선제 홈런을 맞은 것은 물론, 무엇보다 저 백스크린 3연발 사건 등 멘탈이 약해서 큰 시합에 약하다는 평가도 같이 받았다. 또한 당대는 투수를 평가하는 투승타타였기에 승운도 없었고, 평균자책점 1위도 1번도 달성한 적이 없어서 신인왕을 제외하면 개인 타이틀 수상 또한 1번도 없었다.[12] 나머지 둘은 다 방어율왕, 다승왕,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기에 아무런 타이틀도 없는 마키하라는 이 셋 중에서는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편이라고 여겨졌고 항상 이 둘에 밀려 3선발에 머물렀으며, 팀 사정상 가끔씩 불펜 알바도 뛰는 등 쿠와타나 사이토보다는 서열이 약간 낮았다.
다만 세이버메트릭스가 대중화된 현재 WAR로 보면 쿠와타 마스미와 사이토 마사키가 각각 50, 마키하라가 53으로 셋 중에서 마키하라의 투수 WAR이 가장 높다. 다만 타격을 합하면 마키하라가 가장 낮다. 쿠와타는 타격으로도 10 넘게 WAR을 쌓았고 사이토도 양수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마키하라는 타격 WAR이 통산 -5이기 때문.
게다가 마키하라는 본인의 시력이 매우 나빠서 스스로 사인을 내고 투구를 했던 투수였다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처음엔 시력을 보정하기 위해 콘택트렌즈를 껴 보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수의 사인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어서, 차라리 상대팀에게 사인을 보여주게 되더라도 자신이 직접 사인을 내고 투구를 하는 고육지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핸디캡을 안고도 저 정도의 활약을 한 데다 퍼펙트 게임 피쳐로 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니, 어찌 보면 현역 시절의 활약이 놀랍다고 할 수 있다.
5.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TBS 테레비의 야구 해설자로 일하면서 주로 요미우리 경기 담당 중계를 맡고 있으며 재미있고 정확한 코멘트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13] 방송인으로써 예능 프로그램에도 종종 모습을 비추고 있는데, 후술할 백스크린 3연발으로 인해 야구 관련 프로그램에서는 카케후 마사유키와 콤비로 같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NHK에선 후루타 아츠야가 같이 거들며 진행하기도 했고 스포츠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마키하라와 카케후가 당시 상황을 재현한 것은 덤.사실 마키하라는 원래 저 장면을 대체 언제까지 저걸로 놀릴 거냐며 정말 싫어했다고 하며, 한때는 한신의 응원가 롯코오로시만 들어도 3연발을 얻어맞던 순간이 떠올라 화를 낼 정도로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저 정도의 클린업에 정면으로 승부한 투수는 나뿐이다'라고 생각을 바꾸게 되면서 이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은퇴 후에는 백스크린 3연발 맞은 마키하라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거나 상술했듯 카케후와 토크쇼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하며 노는 등 자학개그 겸 방송 소재로 당시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완전히 트라우마를 떨쳐냈다. 저렇게 자신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본인을 상징하는 유머소재로 쓸 수 있게 된 후엔 인기도 많아졌다고 하니 역시 인생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듯.
2021년부턴 미스터 퍼펙트 마키하라(ミスターパーフェクト槙原)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유튜버로 활발하게 활동 중에 있다. 주로 야구 평론과 전직 선수와의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으며, 구독자 16만명이 넘는 건실한 채널로 꾸준히 성장하는 중. 평소 유튜브에 잘 출연하지 않는 아카호시 노리히로도 고교 후배라 출연한다고 밝혔다.
6. 기타
- 투구 내용도 뛰어났고 강팀인 요미우리에서 활약했던 것에 비해 통산 승리는 159승으로 승운이 매우 없었던 투수다. 단일시즌 개인 최다승은 1993년에 기록한 13승으로[14], 팬들은 명구회에 가지 못한 걸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다. 다만 이는 상술했듯 본인이 이닝을 잘 먹지 못한 점도 있고, 타격 실력의 영향도 있으니 오로지 운만은 아니다.
- 1993 시즌이 끝난 후 고향 연고팀인 주니치 드래곤즈로의 이적을 염두에 두고 FA 선언을 했는데, 이 때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마키하라의 등번호에 맞춘 17송이의 장미꽃을 들고 직접 마키하라의 집에 찾아가서 잔류를 부탁한 것은 꽤 유명한 일화. 그런데 마키하라의 말에 의하면 20송이였다고 한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대선수임에도 은퇴 후 코치로 돌아오지 못하고 방송가만 하염없이 돌고 있는데 그 원인이 상술한 1993년의 FA 선언 때문에 요미우리에게 찍혀서라는 설이 있다. 요미우리 순혈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팀 코치로도 안 가고 계속해서 해설자로만 일하고 있는데, 사실상 대놓고 요미우리에 구애를 하고 있음에도 코치로 부를 움직임조차 없기에 일본 내에서는 거의 정설로 취급되는 썰. 실제로 함께 요미우리와 세 기둥이라고 불렸던 대투수 3명 중 말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쿠와타도 10년 이상 야인 생활을 한 끝에 2021년에야 코치로 돌아올 수 있었고, 구단과 아무런 마찰도 없었던 사이토만이 무난히 투수코치로 지도자 커리어를 이어갔다.[15] 결국 마키하라 본인도 요미우리 복귀를 포기한 것인지 60대를 바라보는 현재는 방송 활동과 유튜브에만 집중하는 중.
- 1군 데뷔 3년차 시즌이었던 1985년 4월 1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한신의 클린업 트리오인 랜디 바스, 카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허용한 3타자 연속 홈런, 이른바 백스크린 3연발은 마키하라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꼽히는 장면.[16] 그리고 1999년 6월 12일 한신전에서 신조 츠요시에게 고의사구를 던지다가 끝내기 안타를 맞은 장면, 1985년 5월 20일 사노 노리요시에게 대타 만루포를 헌납한 장면도 유명한데, 이 세 경기의 임팩트 때문에 일부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한신전에 약한 투수'라는 이미지가 박히기도 했다. 다만 마키하라의 통산 한신전 성적은 38승 10패로 오히려 한신 킬러라 불려도 무방한 수준이다.
- 1985년 6월 28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코시엔 원정경기에서 요미우리 구단 통산 5000호 홈런을 기록했다. 이 홈런이 마키하라 본인의 커리어 사상 유일한 홈런. 영상(4분 15초)
[1] 아카호시 노리히로도 같은 고교 출신이다.[2] 같은 시기 주니치 드래곤즈의 에이스이던 코마츠 타츠오와 함께 '스피드건 시대의 산물'이라 불리기도 했다.[3] 센트럴 리그에서 탈삼진왕 타이틀이 신설된건 1991년이다.[4] 당시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홈구장이었으나, 일본프로야구는 지방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의 일환으로 타 구단의 홈구장에서 종종 경기를 개최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 야쿠르트도 후쿠오카 돔에서 홈경기를 개최한 적도 있다.[5] 이후 일본프로야구에선 헤이세이 시대가 끝나고 레이와 시대가 시작되는 28년 동안 퍼펙트 게임이 나오지 않으며 마키하라의 퍼펙트 게임이 한동안 마지막 기록으로 남아있다가, 2022년 4월 10일 치바 롯데 마린즈의 사사키 로키가 오릭스 버팔로즈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며 마키하라의 기록은 헤이세이 유일이자 현재까지 센트럴리그 최후의 퍼펙트 게임이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6] 이때의 일화로 퍼펙트 게임이 이어지던 후반부에 당시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선수들을 불러 모아 마키하라에게 퍼펙트 게임에 대한 부담을 주지 말자고 지시하였다. 문제는 집합한 선수들 중에 마키하라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다행히도 이날 퍼펙트 게임 달성에 성공하며 이 해프닝은 어찌저찌(?) 유야무야되었다.[7] 여담으로 세이부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는 1994년 일본시리즈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시리즈 패퇴가 결정된 6차전 직전 이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요미우리가 모리의 사임 뉴스를 도쿄돔 전광판에 대놓고 띄우는 만행을 저지르며 요미우리 OB인 모리에게도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8] 이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좌완 중간계투로 뛰기도 했지만, 은퇴 후 마약 복용이 발각되며 완폐아로 몰락했다. 이후 팀 동료였던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마약 복용에 대해 방송에서 증언하기도 했다.[9] 당시 NPB 최강의 마무리 투수였던 사사키 카즈히로의 별명인 '대마신(大魔神, 다이마진)'을 패러디한 것이다. 한국식 어감으로는 대마신이 대망신(...)이 된 꼴.[10] 이해 요미우리는 2연패 후 4연승으로 시리즈 제패에 성공했다.[11] 요미우리의 80년대를 빛낸 교타자 2루수로, 통산 1696안타 타율 .304, 수위타자 2회, 베스트나인 5회, 골든글러브 4회 수상을 달성했다. 타자인 시노즈카에게 슬라이더를 배운 계기는 어느 날 스코어러와 시노즈카가 캐치볼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스코어러가 "시노즈카, 슬라이더 잘 던지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마키하라가 시노즈카에게 가서 슬라이더를 던지는 방법을 배웠고, 본래의 빠른 구속까지 겹치면서 보통의 슬라이더보다 더 빠른 구속으로 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12] 1988년 탈삼진 1위를 기록하긴 했으나, 센트럴리그에서 탈삼진은 1991년부터 시상했다.[13]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쿠로다 히로키, 하라 타츠노리와 같이 해설을 맡기도 했다.[14] 사실 12승을 기록했던 1989년과 1992년에 전반전 한정으로만 각각 12승, 10승을 거두며 커리어하이를 갱신할 뻔했다. 그러나 1989년엔 후반전에 반월판 부상을 당하여 잔여시즌을 날려버렸고, 1992년엔 후반전에 급작스런 부진에 빠져 2승 8패로 성적이 떨어지며 끝내 13승을 넘기는 데 실패했다. 덤으로 1989년엔 평균자책점 1.79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타이틀 수성까지 노렸으나, 하필 팀메이트 사이토 마사키가 20승 7패, 평균자책점 1.62라는 더 훌륭한 성적을 올리는 바람에 무관에 그쳤다.[15] 그러나 이쪽도 타카하시 요시노부-하라 타츠노리 재임과 함께 후배들에게 감독직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지며 감독 취임은 사실상 물 건너 갔다.[16] 이날 마키하라는 경기 종료 후 오 사다하루 감독한테 얻어맞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