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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마사토시 権藤正利 | Masatoshi Gondoh | |
출생 | 1934년 5월 1일 |
사가현 토스시 | |
학력 | 야나가와 상고 |
투타 | 좌투좌타 |
포지션 | 투수 |
프로 입단 | 1953년 타이요쇼치쿠 로빈스 입단 |
소속팀 | 타이요쇼치쿠 로빈스-요쇼 로빈스-타이요 훼일즈 (1953~1963) 토에이 플라이어즈 (1964) 한신 타이거스 (1965~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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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2. 유년시절
1934년 5월 1일 일본 사가현 토스시 태생. 다섯살 되던 해 대나무 목마를 만들다 칼에 왼손 검지손가락이 1cm 정도 잘리는 중상을 입고, 소아마비로 한때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지만 가족들의 도움과 자신의 의지로 회복되는 등 순탄치 않은 유년시절을 지냈다.3. 현역시절
맹훈련으로 악명 높던 야나가와 상고를 졸업, 1953년 타이요쇼치쿠 로빈스에 입단하였다. 어릴 적 불구가 된 왼손 검지손가락을 역으로 활용하여 고안한 폭포수같은 커브[1]를 바탕으로 첫해 15승 12패 평균자책 2.77 이란 빼어난 성적으로 신인왕을 수상하였고, 이듬해 1954년에는 11승 20패로, 승패로만 보면 부진했지만 평균자책 2.83, 탈삼진 222개로 나름 활약을 보였다.1955년 시즌 3승 21패로 부진한 성적을 마크한 곤도는 1957년 중반까지 거의 2년동안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하고 무려 28연패의 늪에 빠져 암흑시대를 구가하며 괴로운 시절을 보냈다.
1960년 타이요 감독으로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는 곤도를 구원투수로 중용했고, 그 해 곤도는 타이요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제패[4]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후 1964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이적하여 1년을 뛴 후, 1965년부터 한신 타이거즈의 선수로 활동했다. 그런데 1973년 시즌 도중 한신의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야스의 "원숭이도 담배를 피우냐?" 라는 폭언으로 인해 곤도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그 이후로도 가네다의 괴롭힘이 심해지며 곤도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결국 곤도는 그 해 시즌 종료 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팬 감사행사가 끝나고 감독실로 가서 가네다에게 "그 때 원숭이라고 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 고 요구했으나 가네다는 "그런 말 한 기억 없다. 설사 했더라도 뭐 어쩌라고?" 라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감정이 폭발한 곤도는 감독인 가네다를 코뼈가 돌아갈 정도로 마구 두들겨 패버리고 말았다.[5]
이후 곤도는 "감독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나잇값도 못하는 짓거리를 저질렀다. 21년 간의 선수 생활에 큰 오점을 남겨 후회스럽지만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다" 라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센트럴리그 징계위원회가 엄중징계 처분을 내리자 곤도는 바로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하였다.
곤도의 통산 성적은 21시즌, 719경기 출장, 117승 154패 평균자책 2.78 이다.
은퇴 후 곤도는 고향으로 내려가 가업인 주점을 이어받았지만 1987년 도산하였고, 야구계와 아예 인연을 끊은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6]
4. 에피소드
- 평소 곤도는 성격이 상냥하고 온후한 것으로 유명했다. 팀 후배인 에나츠 유타카는 "곤도 선배가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밝힌 적도 있다. 그 때문에 1973년 한신의 가네다 감독을 구타하고 현역에서 은퇴했음에도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야구계 안팎에서 오히려 동정을 받았다고 한다...
가네다가 막장인 탓도 있었겠지만 - 곤도는 평소 침대 머리맡에 과자를 상비하고, 밥에 설탕을 뿌려먹을 정도로 단 것을 좋아했다. 그것도 설탕을 산더미같이 뿌린 밥을 세 그릇은 기본으로 비웠고, 선수단 회식 때 모두들 맥주를 마시는 와중에도 곤도는 진하게 탄 설탕물을 마실 정도였다. 이런 괴악한 식성 탓에 위하수병에 걸려
당뇨병에 안 걸린게 다행이다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경기에 나서는 통에 28연패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이후 타이요 감독에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가 곤도에게 "조금씩 자주 먹으라"고 권유하여 소량으로 하루 다섯끼를 먹었고 덕분의 곤도의 체력은 전보다 회복될 수 있었다. - 1960년 미하라 오사무가 타이요의 감독에 취임하자 당시 스태미너 부족으로 고전하던 곤도가 "더 이상 못 뛰겠다. 은퇴하고 싶다" 라고 말했는데, 미하라는 "야구를 그만 두는건 언제든지 가능하다. 단, 1년만 나에게 몸을 맡기지 않겠는가? 내가 책임지고 자네의 체력을 키워주겠다" 라고 권유했고, 곤도는 이에 감복하여 은퇴 의사를 철회하고 미하라의 지시대로 훈련에 임했다. 바로 위에 언급한 식사법도 미하라의 처방 중 하나였다.
- 1968년 9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의 경기 때, 선발투수인 진 바키가 오 사다하루를 위협하는 공을 던지며 난투극이 벌어졌고,[7] 바키가 퇴장 당하여 구원투수로 곤도가 마운드에 올랐는데, 곤도는 바로 오 사다하루의 뒤통수를 때리는 빈볼을 던졌다. 그럼에도 요미우리 감독이던 카와카미 테츠하루는 "다들 들어와라. 곤도가 일부러 그런 공을 던졌겠는가?" 라면서 그라운드로 뛰쳐나간 선수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 1960년대 주니치 드래곤즈의 에이스였던 곤도 히로시(이하 히로시)와는 성이 같고 동향(시가 현) 출신에 활동시기도 비슷했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었다. 그런데 히로시가 감독으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를 38년 만에 일본시리즈 에서 우승시킨 1998년 요코하마의 한 백화점에서 기념 사진전이 열렸는데, "곤도 투수" 제목으로 1960년 우승 당시 한 주축선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의 주인공은 히로시가 아닌 곤도 마사토시였다. 한자까지 성이 같은 히로시는 이듬해 1961년 입단하였고 더구나 주니치 소속이었는데, 마사토시야 말로 1960년 우승팀인 타이요의 일원이었으니 당연할지도...
[1] 미국의 모데카이 브라운, 일본의 호리우치 츠네오의 경우와 유사하다.[2] 곤도의 키는 177cm로 당시로선 상당한 장신이었지만 지병 탓에 체중이 50kg 대에 불과했다(...)[3] 그날 경기에서 패배한 요미우리 선수들과 팬들도 곤도의 연패탈출을 박수로 축하해 줄 정도였다.[4] 4전 전승 스윕을 기록했으나 모두 1점차 승리였을 정도로 접전이었다. 미하라 감독의 팀 전력, 전략 운용이 빛났던 시리즈.[5] 이 때 절친한 후배인 에나츠 유타카도 동행했는데, 시즌 도중 곤도가 에나츠에게 "가네다 감독 때문에 힘들어서 정말 못살겠다" 라며 고충을 털어놓자 띠동갑을 넘어 14살 연하의 새까만 후배인 에나츠도 곤도의 심정을 이해하고 "제가 할수 있는게 있다면 도와드리겠다"며 협력할 뜻을 보였다. 사실 에나츠도 가네다와 견원지간 이었기 때문에 존경하는 선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은 것이다. 그 날 에나츠는 감독실에 곤도와 가네다 둘만 남기고 밖에 나와 감독실 문 앞을 가로막았고 잠시 후 가네다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코치들이 들어가려 했지만 에나츠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다. 비명소리가 잦아든 후 그제야 에나츠가 문을 열었는데 가네다는 감독실 구석에 코피를 흘리며 웅크리고 있었고 에나츠가 곤도에게 "선배, 이제 속이 풀렸수?" 라고 묻자 곤도는 조용히 "그래..." 라면서 감독실에서 나왔다고 한다.[6] 만약 살아 있다면 현재 90대의 고령으로 실제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꽤 높다. 장명부도 한국과 일본 야구계와 인연을 다 끊고나서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2005년 사망하고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뒤늦게 그 소식이 알려진 바 있다.[7] 이 과정에서 바키는 요미우리의 타격코치인 아라카와 히로시에게 죽빵을 날렸다가 오른손 엄지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는 바람에 이듬해인 1969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