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19:33:47

오노 유타카

오노 유타카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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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ff0000> 파일:히로시마 도요 카프 엠블럼.svg히로시마 도요 카프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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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ffffff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1958 1959~1960
나이토 코조 스기우라 류타로 오오타가키 요시오 하세가와 료헤이 비젠 요시오
<rowcolor=#ffffff> 1961 1962~1963 1964 1965 1966
카와무라 히데후미 오오이시 키요시 이케다 히데토시 오오이시 키요시 이케다 히데토시
<rowcolor=#ffffff> 1967 1968 1969 1970 1971
아니야 소하치 오오이시 야타로 아니야 소하치 소토코바 요시로 오오이시 야타로
<rowcolor=#ffffff> 1972 1973 1974 1975~1977 1978
시라이시 시즈오 소토코바 요시로 사에키 카즈시 소토코바 요시로 타카하시 사토시
<rowcolor=#ffffff> 1979 1980~1981 1982~1984 1985 1986~1989
후쿠시 아키오 이케가야 코지로 키타벳푸 마나부 오노 유타카 키타벳푸 마나부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1994 1995
오노 유타카 나가도미 히로시 카와구치 카즈히사 키타벳푸 마나부 사사오카 신지
<rowcolor=#ffffff> 1996 1997 1998 1999 2000~2002
오노 유타카 야마우치 야스유키 오노 유타카 네이선 민치 사사오카 신지
<rowcolor=#ffffff> 2003~2007 2008 2009 2010~2012 2013
쿠로다 히로키 오타케 칸 콜비 루이스 마에다 켄타 브라이언 벌링턴
<rowcolor=#ffffff> 2014~2015 2016~2017 2018 2019~2023 2024
마에다 켄타 크리스 존슨 노무라 유스케 오세라 다이치 쿠리 아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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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히로시마 도요 카프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79 1980 1984

파일:NPB 로고.svg 1988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8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7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1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구원투수
요다 츠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사사키 카즈히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보유 기록
최장 기간 연속 시즌 폭투 (16년)
최고령 최우수 방어율 상 수상 (만41세)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60번
하세가와 료헤이
(1973)
<colbgcolor=#b30000> 오노 유타카
(1977)
이나세 타카요시
(1978)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57번
이나세 타카요시
(1976~1977)
오노 유타카
(1978~1979)
모리 코조
(1980~1986)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24번
와타나베 히로키
(1975~1979)
오노 유타카
(1980~1998)
카와우치 타카야
(2000~2009)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72번
안토니오 구즈만
(1997)
오노 유타카
(1999)
우치다 준조
(2003~2005)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74번
오카 요시아키
(2004~2008)
오노 유타카
(2010~2012)
카와다 유스케
(2003~2005)
}}} ||
파일:오노 유타카.jpg
오노 유타카
大野豊 | Yutaka Ohno
생년월일 1955년 8월 30일 ([age(1955-08-30)]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시마네현 이즈모시
학력 시마네현립 이즈모 상업 고교 (시마네)
신체 177cm, 75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76년 드래프트외 입단 (히로시마)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7~1998)
지도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투수코치 (1999)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헤드코치 및 투수코치 (2010~2012)

1. 개요2. 학창시절3. 프로선수 시절4. 은퇴 이후5. 플레이 스타일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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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오노 유타카 선수시절.jpg
我が選んだ道に、悔いは無し!
나 자신이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습니다!
ㅡ 본인의 은퇴식에서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1]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뛰었던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현 해설가. 카프에서만 22년간 선발, 구원 등 어느 보직이든 가리지 않고 뛰면서 통산 148승 138세이브, 2.9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키타벳푸 마나부, 카와구치 카즈히사 등과 함께 1980년대 카프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좌완 에이스였다.

2. 학창시절

편모 가정에서 태어난 오노는, 어머니의 고생을 보며 자랐기 때문에[2]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고 했으나, 고등학교는 나오길 바랬던 가족의 요청 때문에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상업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해 고향의 이즈모 상업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고등학교에서도 좋은 실력으로 현 내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해 현내에 사회인야구 팀이 있는 이즈모 신용조합에 취직해 은행 업무를 보면서 직장 내 연식야구팀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76년 가을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 주최 야구교실이 이즈모시에서 열리게 되어 이즈모 신용조합의 연식야구팀이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당시 강습에 참가한 카프의 타격코치 야마모토 카즈요시[3]가 연식야구부 감독의 대학 후배여서 감독에게 카프에 입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감독이 이를 받아들여 야마모토에게 제자인 오노에게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여 특별히 입단 테스트를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후 1977년 2월 쿠레시에서 열린 카프 2군 캠프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하여 합격, 한달 뒤 계약금 없이 월봉 12만 5천엔을 받는 드래프트 번외 계약으로 카프에 입단하게 된다.

3. 프로선수 시절

데뷔시즌인 1977년엔 2군에서 담금질을 거듭하다 9월 4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경기에 등판하여 프로 데뷔를 이뤄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카케후 마사유키에게 아웃카운트 딱 1개를 빼앗는 동안 카타오카 신노스케[4]에게 만루홈런을 맞는 등 한신 타선에 무참히 공략당하면서 0.1이닝 5실점, 평균자책점 135.00이란 최악의 피칭을 기록했고, 결국 이 경기가 데뷔 첫 해의 유일한 등판이 되었다. 다만 오노 본인은 후에 아무리 성적이 나빴어도 이때(평균자책점 135.00)보다는 못할 수가 없어서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이 일을 떠올리면서 부진을 풀어나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이듬해인 1978년, 현금 트레이드로 난카이에서 히로시마로 오게 된 대투수 에나츠 유타카를 만나며 오노는 프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에나츠는 오노와 같은 이름에 좌완투수, 편모가정이라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에[5] 오노에게 동질감을 느껴 동생처럼 친밀히 여겼고, 오노를 자신의 후계자로 불릴 만한 투수로 키워내기 위해 투구폼을 교정하고 변화구를 가르치며 철저하게 오노를 지도했다.[6]

에나츠의 지도를 통해 실력 있는 투수로 성장한 오노는 1978년부터 6년간 카프의 든든한 중간계투로 활약하며 1979~1980시즌 카프의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이때 오노는 6시즌 동안 매년 평균 102.2이닝 ERA 3.15를 기록했고, 1981~82시즌엔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한 에나츠의 뒤를 이어 마무리 투수를 맡기도 했다.[7]

이후 1984년부턴 선발로 전향하여 147이닝 10승 5패 평균자책점 2.94의 뛰어난 성적으로 카프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로테이션에 연착륙했고, 1984년 일본시리즈에선 4차전 8회 말 1사 만루의 위기상황에 구원등판하여 부머 웰즈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마츠나가 히로미를 투수 땅볼로 직접 처리해 위기상황을 처리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며 카프의 3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8]

1985년엔 이전 시즌보다 월등히 늘어난 161.2이닝을 던졌으나 반면 평균자책점이 4.06으로 치솟았고 1986년엔 15시합 등판(6승 5패 92이닝 평균자책점 2.74)에 그치는 등 2년 간 다소 부진한 성적을 거뒀으나, 다음해인 1987년부터 완전히 각성하여 리그 정상급 투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해 25경기에 등판해 13승 5패 159.2이닝 ERA 2.93를 기록하더니 1988시즌엔 24경기 13승 7패 185이닝 ERA 1.70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수성하고 쇼와 시대의 마지막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다.[9] 다음 시즌인 1989년에도 19경기 8승 6패 145.2이닝 ERA 1.92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평균자책점 타이틀 수성+1점대 평균자책점 기록이라는 대활약을 펼쳤다.

이후 1991 시즌부터는 츠다 츠네미와 함께 더블 스토퍼를 구성하는 마무리 투수로 다시 활동하게 되었지만, 츠다가 뇌종양으로 인해 투병생활에 들어가자 홀로 마무리 자리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츠다를 위해 싸운다는 일념 아래 팀 모두가 우승을 향해 질주했고, 오노 또한 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 그 해 37경기 6승 2패 26세이브 ERA 1.17를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우승에 공헌했고[10] 본인도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수상했다. 다음 해인 1992시즌에도 36세의 나이로 42경기 5승 3패 26세이브 ERA 1.98로 리그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고 이는 당시 일본 프로야구 최고령 세이브 1위 기록이었다.[11][12] 이때의 활약으로 1993년 오프시즌 당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가 오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입단 제의까지 해봤지만, 오노 본인도 37세의 고령이어서 실제 계약까지 이뤄지진 못했다.

1995년엔 다시 선발로 전향했고, 1996시즌엔 개막전 투수까지 맡게 되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승운이 안따라주며 5월 10일에서야 개막후 첫 승을 기록했다. 그러다 왼팔에 동맥 혈전증이 생기며 부상으로 이탈하기까지 하면서 시즌 성적은 19경기 5승 4패 119이닝 ERA 3.93으로 부진했다. 부상을 겪은 데다 2년 연속 3점대 이상의 평균자책점, 거기에 나이마저 이미 40살을 넘겼기에 팬들은 슬슬 오노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1997 시즌 기적같이 부활에 성공하여 23경기 9승 6패 135.2이닝 ERA 2.85를 기록하며 9년 만에 41세에 나이로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수상했고 이는 아직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기록으로 남아있다.[13]

1998년에도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개막전 투수를 맡았고[14], 4월 12일에는 승리투수를 기록하여 당시 센트럴 리그 기록인 21년 연속 승리라는 대기록을 세웠다.[15] 그러나 많은 나이와 오랜 선수 생활로 인해 지병인 혈행장애가 악화되어 갔고, 8월 4일 원포인트로 등판한 요미우리 전에서 당시 신인이었던 타카하시 요시노부에게 역전 3점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면며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한달 뒤인 9월 27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치러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가 은퇴경기가 되었고, 이 경기에서 오노는 8회말 노아웃 상황에서 구원등판하여 나카네 히토시[16]를 상대로 삼진을 잡으면서 22년간의 긴 선수생활을 마무리지었다.[17]

4. 은퇴 이후

은퇴 직후 곧바로 1999년에 히로시마의 1군 투수코치로 전임했으나 팀 평균자책점이 4.78로 전년도(4.11)보다 폭등하며 투수진 성적이 나빠지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2000년부턴 NHK에서 해설, 스포츠닛폰에선 평론가를 맡는 한편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40대 중반의 나이에 등판해서 최고 시속 146km/h의 투구를 선보이며 사람들을 벙찌게 하기도 했다.

아테네 올림픽[18],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에선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투수코치를 맡으며 아테네에서의 동메달에 기여했지만, 베이징 올림픽에선 노메달로 대회를 마감해야만 했다.

이후 2010년 친정팀인 히로시마에 수석 겸 투수코치로 복귀했지만, 시범경기에서 선발투수의 이닝을 길게 가져가고, 공격적이던 투구를 지향하던 전과 달리 유인구를 이용하게끔 만들어 투구수가 늘어나자, 선발투수들의 상태가 시즌 개막에 이르러도 영 좋지 않았고, 이는 중간계투들의 혹사로 이어지며 불펜진 또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마에다 켄타만이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하며 유일하게 제몫을 해줬지만, 사실 마에다는 프리시즌부터 팀이 아닌 본인만의 루틴을 철저히 관철해왔다. 결국 과거와 같이 히로시마의 평균자책점이 4.80으로 치솟으며 헤드 코치는 내려놔야만 했고, 이후에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며 결국 2012년에 쓸쓸히 팀을 떠나야했다.

5. 플레이 스타일

최고 150km/h까지 기록할 수 있는 직구와 슬러브, 팜볼 등의 여러가지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팔색조 같은 유형의 투수였다. 다만 팜볼은 1992년 한신전에서 당시 신인왕 후보였던 신죠 츠요시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잘 안 통한다고 생각하여 이후엔 봉인했다고 한다.

제구력 또한 뛰어난 편이었고, 투구폼이 허리를 낮추고, 발을 끝까지 뻗으면서 공을 릴리즈해 디셉션이 좋아 던지는 변화구가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에 유리했다.

6. 기타

본인의 스승이라고 할 만한 에나츠 유타카는 히로시마에서 오노를 지도할 때 정말 세세한 것들까지 지도를 해주었다고 한다. 변화구의 그립, 투구법 등은 물론이고, 투구폼 교정, 볼 배합, 심지어는 로진 백을 두는 법까지 가르치며 오노를 지도했다. 당시에 입단테스트로 드래프트조차 받지 못하고 들어온 오노에게 사와무라상까지 수상한 당대의 대선수였던 에나츠는 본인의 모든 것을 전수해주었고, 오노는 은퇴 이후에도 이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있다. 정작 에나츠는 "본인의 노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며 오노에게 공을 돌리고 있다.

같은 시기에 활약한 동갑내기 선수들에 비해 선수생활을 매우 오래 지속했는데, 대표적으로 본인의 첫 아웃카운트를 따냈던 카케후 마사유키보다 10년을 더 현역생활을 이어나갔고, 당대의 에이스 투수 중 하나였던 에가와 스구루보다 11년을 더 뛰었다. 오노가 마지막 타이틀을 획득한 1997년엔 대부분의 동갑내기 1955년생들은 은퇴한지 오래였기에 해설자로 나가있던 동갑내기들에게 "현역으로 1군에서 뛰는 것 조차 경이로운 나이에도 불구하고~"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1] 이후 NHK에서 제작한 오노의 기념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되기도 하였다.[2] 고생하는 홀어머니를 보면서 야구선수로 꼭 성공하겠다는 꿈을 꾼 선수로 장훈, 노무라 카츠야, 도이 마사히로 등이 있다.[3] 히로시마 상업 고등학고, 호세이대학을 거쳐 1961~1975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원클럽맨으로써 외야수 베스트나인을 2차례 수상하는 등의 활약을 펼친 강타자였다. 은퇴 후 히로시마, 킨테츠, 난카이 등에서 타격코치로 활동했으며 1982~1983년엔 롯데 오리온즈 감독을 역임했다. 친정팀이 25년 만의 리그 우승을 거뒀던 일주일 후인 2016년 9월 17일 요관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4] 1971~1986년까지 라이온즈, 한신, 한큐에서 준주전-백업 포수로 활동했다. 은퇴 후 1987~2003년까지 히로시마에서 배터리 코치를 역임하면서 오노와 선수-코치 관계로 재회하기도 했다.[5] 에나츠는 태어난지 얼마 안돼 아버지가 실종되어 어머니, 아버지가 다른 두 형들과 함께 살았다.[6] 이때 오노가 연습 중에 한눈이라도 팔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억지로 등판했을 땐 철권까지 작렬하는 등 사랑의 매도 서슴지 않았다고.. 다만 에나츠는 오노를 때린 이후엔 고바 타케시 감독에게 곧바로 보고하고 오노의 모친에게 "귀한 아드님에게 손을 대어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했다고 한다.[7]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1978시즌을 제외하면 평균 109.2이닝 평균자책점 3.07의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1980년부터 1982년까지 3년간은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평균자책점 2점대를 유지했다.[8] 공교롭게도 카프는 이후 일본시리즈에 4번 진출했으나(1986, 1991, 2016, 2018) 모두 다 졌고, 결국 이 1984년의 우승이 현재까지 카프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남아있다.[9] 2020년 오노 유다이가 11승으로 수상하기 전까진 역대 사와무라상 수상자 중 가장 시즌 승리가 적었던 선수이기도 했다. 물론 2020년엔 코로나로 시합수가 격감한 것을 반영해야 되지만.[10] 일본시리즈에선 아쉽게도 5년 전 역스윕을 허용했던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또다시 3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이후 카프는 암흑기까지 겹치면서 다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무려 25년이 걸렸다.[11] 다만 이 당시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 수상 기준이 세이브 포인트(SP)였기 때문에, 이 해엔 구원승이 7개 더 많았던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2SP 차이로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12] 이후 2012년 이와세 히토키가 37세에 세이브왕을 기록하며 기록이 깨진다.[13] 이 해 센트럴리그의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 레이스는 매우 치열했는데 1위부터 4위까지의 차이가 고작 0.14밖에 차이가 나질 않았다. 이때 타이틀을 두고 경쟁했던 야쿠르트 스왈로즈타바타 카즈야(3위, 2.96), 요시이 마사토(4위, 2.99)에게 타이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시즌 막판 야쿠르트와의 최종전 때 양 투수가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히로시마 타자들이 선발 투수들에게 공격을 몰아붙여 조기 강판시키면서 경기 자체는 후반에 다른 투수진의 불질로 연패를 당했으나 오노의 타이틀을 지켜냈다. 추가로 2위였던 주니치 드래곤즈야마모토 마사(2.92)는 시즌 막판까지 호투를 이어가면서 평자 1위를 수성하고 있었고 시즌 최종전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3.1이닝 2실점으로 부진하자 타이틀 방어를 위해 조기 강판하는 강수까지 두었으나, 하필 주니치의 시즌 종료 이틀 후에 오노가 같은 요코하마 전에서 5이닝 무실점의 역투를 보여주는 바람에 1위 자리를 내주며 타이틀을 놓쳤다(...)[14] 당시 팀 타선이 주니치 상대로 고전하면서 5이닝 3실점으로 패전을 기록할 뻔했으나 이후 팀이 후반에 3-8로 역전 승리를 거두면서 패전은 면했다.[15] 이는 2009년에 주니치의 야마모토 마사에 의해서 깨진다.[16] 킨테츠 버팔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1989~2003년까지 준레귤러 외야수로 뛰었으며, 요코하마의 1998년 우승 당시에 좌투수 전문 플래툰 멤버로 활약한 바 있다. 은퇴 후엔 2006~2013년까지 요코하마에서 코치를 역임하였다.[17] 본디 나카네는 22년간 활약한 대선배 오노의 은퇴식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삼진으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초구부터 시속 143km의 몸쪽 꽉찬 직구가 들어오자 전력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오히려 대선배인 오노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전력으로 상대하기 시작했고 6구에 풀카운트까지 가는 승부 끝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18] 예선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투수 교체를 지시할 때 뜬금없이 코치인 오노에게 등판을 지시했다는 카더라식 에피소드가 있다(...) 느닷없는 플레잉 코치 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