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구치 카즈히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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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84 |
파일:12giants.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코치 |
2012 |
1987, 1989, 1991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1] |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34번 | ||||
타카하시 사토시 (1975~1980) | → | 카와구치 카즈히사 (1981~1994) | → | 시마 시게노부 (1995~1999)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25번}}} | ||||
타니구치 코이치 (1992~1994) | → | 카와구치 카즈히사 (1995~1998) | → | 히라마츠 카즈히로 (1999~2001)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71번}}} | ||||
후지타 히로마사 (2008~2010) | → | 카와구치 카즈히사 (2011~2014) | → | 우치다 준조 (2015) |
카와구치 카즈히사 川口和久 | Kazuhisa Kawaguchi | |
출생 | 1959년 7월 8일 ([age(1959-07-08)]세) |
돗토리현 돗토리시 | |
국적 | 일본 |
학력 | 돗토리죠호쿠 고등학교 |
신체 | 183cm, 75kg |
투타 | 좌투양타 |
포지션 | 투수 |
프로입단 | 1980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2번, 히로시마)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1~1994)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5~1998)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종합코치 (2011~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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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야구인이자 농부. 前 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야구 선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 키타벳푸 마나부, 오노 유타카와 함께 히로시마의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현재까지도 카프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인 1984년 일본시리즈 제패의 크나큰 한 축이었다. 통산 2092탈삼진을 기록해 2021시즌 종료 기준 NPB 역대 17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남긴 투수로서 상술한 두 선수와 함께 히로시마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선수시절 애칭으로는 이름에서 따온 '카와(カワ)', '굿치(グッチ)'가 있었다.
2. 프로 지명 이전
돗토리시에서 료칸을 운영하던 부모님에게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난 카와구치는, 어려서부터 야구를 시작한 형들에게서 야구를 접해 코난 소학교 4학년부터 야구부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1루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후 투수로 전향해 속구파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 덕에 현내의 각 고등학교로부터 러브콜을 받았고 고심 끝에 돗토리죠호쿠 고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죠호쿠 고등학교 시절엔 이름값은 꽤나 날렸지만 예선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시며 끝내 고시엔 진출에 실패했다.[3]1학년 때는 학교를 돗토리현 대회 3위로 입상시킨 뒤 메이지진구 야구 대회 고등부에 출장하게 되었으나,[4] 1차전에서 간토 대표였던 사쿠신가쿠엔 고등학교[5]에게 1:3 패배로 광탈. 이후 2학년 재학 중인 1976년엔, 봄 고시엔도코(센바츠)의 주고쿠 지역 출전팀을 선발하는 춘계 주고쿠 대회에서 1975년 여름 고시엔 히로시마현 대표이자, 초고교급 투수로 불리던 쿠로다 신지를 내세운 소토쿠 고등학교를 상대로 8이닝 1실점 호투했지만, 1:2로 패배했다.[6] 절치부심한 여름 고시엔 예선에선 돗토리현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점쳐졌으나, 어이없게 계속 볼넷을 내주며 충격의 2차전 탈락을 맛보게 된다. 그렇지만 3학년 당시에도 효고의 마츠모토 쇼지, 히로시마의 타나베 시게후미와 함께 고교 좌완 3걸로 꼽히며 스카우트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구단은 롯데 오리온즈였는데, 무려 당시 감독으로 재임하던 카네다 마사이치가 직접 본인의 등번호인 34번을 물려주고, 드래프트 1순위 선수 이상의 대우인 계약금 3000만엔 이상의 거금까지 줄 수 있다며 강력히 카와구치를 원했다.[7][8] 그러나 카와구치는 너무나도 올드스쿨적이었던 롯데의 훈련 환경을 뉴스 등으로 접했기에 드래프트 입단을 일단 거부하고, 사회인야구에서 활동한 이후 롯데에 입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롯데는 드래프트 6라운드에서 카와구치를 강행지명[9]했고 '바로 안 와도 상관은 없지만 마음이 바뀌면 들어와달라'라고 말하며 카와구치를 고민에 빠지게 했다. 왜냐하면 당시 프로는 고졸 출신으로 입단해도 성적이 안나오면 바로 방출당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했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 주변에서는 프로행을 권유했으나, 결국 카와구치가 사회인야구팀 듀프로[10] 입단을 선택하며 롯데 입단은 무산되었다. 여담으로 본인은 학교 선배가 다니던 미쓰비시 자동차 교토 사회인야구부에 가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님이 본인의 선배가 감독인 듀프로로 가는게 더 좋을거라고 반강제적으로 듀프로에 갔다고(...)
듀프로에선 자사의 운동장이 없었기에 훈련도 쉽지 않았고, 평일에도 아침 9시부터 저녁까지 영업 업무를 뛰어야했기에 실질적인 연습은 야간의 2시간 정도 뿐이었다. 본인은 영업이 80%에 연습이 20% 정도였다고. 1년차 때 스미토모 금속 팀의 용병으로 도시 대항 야구대회에 출전했는데, 이때 당시 스미토모에서 뛰었던 모리 시게카즈와 1달 간 같은 방에서 룸메이트로 지내며 많이 예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2년차부터는 꽤나 힘들어했는데, 당시 사장이 전직 해군 출신으로 야구를 좋아하는 한편으로 성질이 매우 더러운 사람이었고, 경기에서 지면 불같이 화를 내며 야구부 전원을 세워놓고 줄빠따를 쳤다고 하며,[11] 야구 내적으로서도 듀프로로 돌아온 1979년에 첫 선발 등판이었던 마쓰시타 전기와의 경기에서 타자에게 강공전환으로 안타도 아닌 홈런을 허용하고, 고등학교 시절에 무릎 부상을 당한 전력이 있음에도 무리한 주루플레이를 강요받으며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인야구에서 3년을 뛰어야 프로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1년간 더 참기로 결정했고 지구 대회 등에서 출전해 호투했다.
이 때 카와구치가 고향인 주고쿠 지방을 대표하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을 희망한다는 소문이 돌자 카프의 키니와 사토시[12] 스카우트가 "그렇다면 카프가 지명할테니, 드래프트외 입단을 방지하기 위해 부상이라고 핑계를 대고 1년간 등판을 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며, 카와구치는 이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벳토 카오루 감독이 직접 시찰을 와도 아프다며 등판을 안 했고, 이후 1980년 드래프트[13]에서 하라 타츠노리의 1라운드 지명에 실패한 히로시마가 1라운드 마지막 지명에서 카와구치를 기습 지명하며 카와구치는 히로시마 입단에 성공했다. 계약금은 3,500만엔, 그리고 연봉은 360만엔.[14]
여담으로 카와구치는 히로시마의 1라운드 지명에 크게 기뻐했고, 사장 또한 듀프로 팀 사상 최초로 드래프트 1라운더가 나오자 기뻐할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장은 한다는 말이 "결혼 할 때 댁의 따님을 주세요라고 부모님께 인사를 하는 게 상식인데, 드래프트도 마찬가지로 회사에 인사는 와야지. 그렇게 지명하는 건 카바레 뿐이야!"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고(...) 스카우터인 키니와가 이후에 인사를 하러 갔을 때에도 곧바로 쫓겨났지만 사장이 사실 츤데레여서 카와구치의 1라운드 지명을 내심 좋아했고, 카와구치는 히로시마에 별 일 없이 갔다.
3. 프로 시절
3.1. 히로시마 시절
프로 1년차였던 1981년에선 시범경기에서부터 침착한 마운드 운영을 보여주며 당시 고바 타케시 감독에게도 호평을 받았다.[17] 이후 곧바로 1군에 등록되었지만, 원포인트로 프로 첫 등판을 한 주니치전에서 곧바로 2루타를 허용하는 등 막 데뷔한 신인답게 얻어맞기 시작했는데 시즌 7경기 11이닝 1패 ERA 5.73으로 크게 부진했다. 본디 무엇이 문제일까 알아보고자 2군에 가보려고 자원했지만, 기각당하며 1군에서 맹훈련에 돌입했는데, 여름 즈음에 캐치볼을 지켜보다 쿠세를 발견한 야마모토 코지에게 던지는 공마다 구질을 모두 간파당하며 공포를 느끼고 이후 한신전에서 투수 야마모토 카즈유키[18]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하며 2군행. 이후 투수코치들에게 철저히 지도받았다. 그래도 2군에서의 주니어 올스타 게임에는 출장하는데 성공했다.미국에서의 교육리그에도 참가하고 자신을 되찾은 1982시즌, 여름이 지나고 1군으로 승격되었고, 7월 10일 요미우리전에서 허리를 삐끗해 다음 선발 등판이 어려운 후쿠시 히로아키를 대신해 15일의 타이요전 선발을 맡아 프로 첫 승을 거두었다. 9월 2일 주니치전에선 4피안타 완봉승을 거두면서 시즌 15경기 4승 5패 ERA 1.94로 선전했다. 1983년엔 임시코치로 온 하세가와 료헤이가 제구를 신경쓰려고 바꾼 와인드업을 안하던 투구폼을 입단 당시의 투구폼으로 바꾸게 시키며, 포텐셜이 터지기 시작했다. 하세가와는 와인드업을 하지 않는 카와구치를 보고 '상체에 의존하는 투구폼은 어깨와 팔꿈치에 무리가 간다'며 구위를 올리기 위해 다시 와인드업을 하도록 지도했고, 카와구치는 그 시즌에 33경기 15승 10패 218.2이닝 ERA 2.92로 선발진의 한 축이 되었다. 물론 제구를 덜 신경쓰다보니 볼넷이 104개로 크게 늘어났지만, WHIP은 전해와 비슷했다. 올스타전에도 2차전에 등판해, 카도타 히로미츠에게 삼진을 잡아냈지만,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겐 홈런을 허용했다.
1984년엔 전반기에 그동안 쏠쏠하게 써왔던 직구와 커브의 일변도 투구가 잘 먹히지 않아 1승 밖에 거두지 못했다. 이후 2군으로 내려가 제구 영점조절을 한 뒤, 후반기에 다시 콜업되어 7승을 거두며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일조했다.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 3차전에 선발 등판해 완투승을 거두며 2승 1패로 리드를 이끌었지만, 6차전에서 1, 2회를 무난히 막고 있다가 3회초 급격하게 무너지며 후쿠하라 미네오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3이닝 7실점 패전투수가 되었다. 다행히 팀은 7차전에 승리하며 일본시리즈 제패에 성공했고, 이후 미일야구에 참가해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1차전에 선발 등판해 칼 립켄 주니어와 에디 머레이 등의 기라성같은 선수들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어냈지만, 마지막 5차전에선 패전투수가 되었다.
1985시즌에 들어가기 앞서 스크류볼을 배운 카와구치는, 스크류볼을 이용해 2년 만에 규정이닝에 도달했고 이후 본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1986년에는 당시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한신 타이거스에게서만 5승을 거두는 등, 24경기 12승 9패 164.2이닝 ERA 3.01로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고, 올스타전에도 3년 만에 다시 출장해 홈구장이었던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하지만 이후 허리에 부상을 당하면서 1986년 일본시리즈에는 출장하지 못했고, 팀은 세이부에게 1무 후 리버스 스윕으로 우승을 내주어야 했다.
1987시즌에는 개막 7연승을 거두며 184탈삼진으로 본인의 첫 리그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기록했다.[19] 1988년에도 27경기 13승 10패 190.2이닝 179탈삼진 ERA 2.55로 훌륭한 성적을 거두며 이후 미일야구 일본 대표팀에도 승선해 3차전의 선발투수로 나섰지만, 2이닝 4실점 패전투수가 되었다.
1989시즌에도 26경기 12승 7패 208.1이닝 192탈삼진 ERA 2.51이라는 호성적을 거두는 등 키타벳푸 마나부와 오노 유타카와 함께 믿음직한 3선발로 활약했으나 1990년에도 200이닝을 넘게 소화하면서 부상이 도져 29이닝 11승 13패 208.2이닝 180탈삼진 ERA 3.97로 기존보다는 부진했다.
이후 1991시즌 직전엔 슬라이더까지 배워버리며, 탈삼진을 무려 230개나 기록해 센트럴리그 최다 탈삼진 타이틀의 최초 수상자가 되며 히로시마의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1991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사사오카 신지가 무너져 1차전을 내준 상황에서 2차전에 선발등판해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에게 투런 홈런을 허용했지만 8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어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후 3일 휴식한 뒤 5차전에도 선발 등판해 8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며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본인의 두번째 일본시리즈 우승과 함께 MVP가 유력했으나 구원등판한 6, 7차전에서 적시타를 연이어 허용하며 결국 팀은 2연패로 5년 전에 이어 또다시 세이부에게 우승을 넘겨줘야했고, 카와구치 본인은 감투상을 받는 데 그쳤다. 그리고 해당 일본시리즈는 본인의 히로시마에서의, 그리고 히로시마 구단의 2016년 이전까지 마지막 일본시리즈가 된다.
1992년부턴 속구의 구위가 나빠지며 탈삼진 개수가 줄고 평균자책점이 올랐으며, 6년간 이어오던 두 자릿수 승수 달성에도 실패했다. 이 해에 프로 입단 이후 처음으로 연봉이 삭감됐으며, 미일야구에도 출전했지만 홈런을 2개씩 허용하며 부진했다. 또 1993년엔 왼팔 팔꿈치에 관절염이 생기고 왼손 검지에 혈액순환장애가 생겨 투구가 어려워져 1991년에 비해 ERA가 3.54까지 올랐다. 투구이닝은 40이닝 가까이 줄었지만, 실점은 비슷하게 해버린 것. 이후 FA권리를 취득했으나 이를 행사하지 않고 원소속팀 히로시마와 연봉 8,000만엔에 재계약했다.
그러나 1994시즌에도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본인도 9시즌 만에 정규시즌에서 선발 로테이션에서 빠져 구원투수로 등판하는 등, 부진을 계속해서 겪었다. 후반기엔 7승 3패로 어느 정도 폼이 올라오나 했지만, 동시에 터진 가족의 악재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1984시즌이 끝나고 결혼한 아내의 장인어른이 1993년부터 난치성 췌장암에 걸려 투병중이었는데, 장인의 상태가 악화되어 아내가 장인이 있는 도쿄도 히노시로 가서 간병을 하길 간곡히 기원했다. 그러나 카와구치는 사회인야구의 듀프로 시절 이후엔 고향인 돗토리현과 소속팀의 연고지인 히로시마현의 주고쿠 지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본인은 아예 14년을 지내며 제2의 고향이 된 히로시마와 본인의 스승과도 같던 좌완투수 오노 유타카를 떠나는 것에 크게 고뇌했다. 도쿄로 이주를 하되 아내만 간병을 위해 도쿄에 있는 것도 생각을 해보았지만, 본인의 직업이 매일같이 원정길에 나서야하는 프로야구 선수인지라,[20] 가족과 더욱 떨어져 지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해 고심 끝에 마감시한인 11월 8일 밤에 구단에 FA 선언을 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최초의 FA권리 행사였지만 카와구치와의 회의 끝에 히로시마 측은 그동안 활약해준 카와구치와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다며 카와구치를 보내주겠다고 밝혔고, 이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스가 카와구치 영입전에 참전했다.
사실 본인은 그동안 자신이 뛰어오지 않아 플레이스타일이 알려지지 않은 퍼시픽 리그에서 뛰는 것도 생각하여 수도권에 위치하며 히노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토코로자와시에 위치한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뛸 의사 또한 가지고 있었다.[21] 또한 사회인야구 시절 본인에게 잘 대해준 모리 시게카즈가 세이부의 1군 투수코치로 재적 중이었기에, 세이부에서 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와구치의 FA선언이 발표되자마자 모리 코치가 제일 먼저 카와구치에게 전화해 세이부로 오라고 러브콜을 날렸고, 이에 카와구치는 울먹이면서 감사하다고 대답했다고.
그러나 본인이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야구 선수인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에게서 직접 요미우리 입단을 권유받았고, 또한 장인이 요미우리의 엄청난 팬이어서[22] 결국 카와구치는 요미우리 입단을 선택한다. 이에 장인어른은 투병 중에도 사위가 쿄진군의 선수가 되자 몹시 기뻐했으나, 카와구치가 울면서까지 대답을 해 당연히 세이부로 올 줄 알았던 모리 시게카즈는 이에 대해 격분하여 바카야로!라는 단말마를 남기고 한동안 카와구치와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장인과의 일화는 mbc 서프라이즈 49화로 다루어져 감동스토리로 방영되었다.
요미우리는 당시 미야모토 카즈토모밖에 없던 준수한 좌완 선발의 역할을 베테랑인 카와구치에게서 기대했고, 또한 지난 해에 요미우리에게서만 4승을 거둔 요미우리 킬러였던 카와구치를 영입해버리면서 위협을 없애려고 했다. 당시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강타자 히로사와 카츠미와 함께 FA로 카와구치의 요미우리 이적이 확정되자, 동시에 FA신청을 한 세이부의 좌완 투수 쿠도 키미야스는 요미우리 이적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이적을 선택한다.[23] 연봉은 기존보다 2,000만엔 증액된 1억엔. 사위의 요미우리 이적에 장인은 감격했지만 그가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선 모습을 보지 못한채 시즌 개막 직전인 1995년 3월에 서거했다.
3.2. 요미우리 시절
하지만 1997 시즌부터 꾸준히 겪어오던 허리의 통증과 어깨, 왼발 등의 부상으로 2군 생활이 늘어나며 사실상 은퇴 수순에 놓이게 됐고, 2군에서 조성민과 오노 히토시 등의 신인 선수들에게 지도를 해주다 1998년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998년 10월 3일 데뷔팀이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경기가 은퇴시합이 되었고, 양 팀의 선수들과 팬들 사이에서 환대를 받으며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4. 은퇴 이후
은퇴 직후엔 TBS 테레비에서 해설자로서 고정 출연하며 방송계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TBS에서의 해설자 생활은 2010년여까지 이어져 거진 11년을 방송계에서 활약했다. 그 외에는 TV나 라디오 등에 게스트 출연도 하고, 배우로 드라마, 영화 등에도 나오며 취미인 경정까지 해설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에도 참가했는데, 고향인 주고쿠 지역팀이 없어서 홋카이도 지역팀이 삿포로 앰비셔스에서 뛰었다.2005년엔 고향인 돗토리의 사회인야구팀 창단에 많은 기여를 했고, 이후 돗토리 키타로우즈가 창설되자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1년여 정도 근무를 했지만, 해설자 생활과의 양립이 어려워 시간을 많이 낼 수가 없자 2007년 1월 경에 사임했다. 이후엔 쭉 해설자 활동을 하다가 2009년과 2010년에 요미우리의 미야자키 캠프에서 임시로 투수코치를 맡은 게 인연이 되어 2011 시즌부터 정식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군 투수 종합코치가 되었다.
이후 요미우리의 2012년 일본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했으나, 2014년 시즌 이후 코치로서는 퇴임을 했고 프런트에서 비상근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TBS의 해설자로 복귀했다.
은퇴 후 의외의 근황이 공개되었는데, 2022년 귀향한 뒤 돗토리시의 소년야구팀을 지도하면서 본업으로 쌀농사를 짓고 있다. 주간베이스볼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농사일을 하는데, 어렸을 적에 농사일을 도운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고. 하필이면 녹화날이 태풍으로 벼가 다 쓰러진 때라 150구 던지고 내려갈 때만큼 힘들었다고 하는데, "어쩐지 농사가 잘 굴러나가나 했는데 역시 이상했다" 라는 말을 남겼다(...).
5. 플레이 스타일
현역시절의 투구 모습.
140km/h대 정도는 꾸준히 찍어주던 포심 패스트볼을 메인으로 하던 속구파 투수로, 비슷한 릴리즈 포인트에서 나오는 커브나 슬라이더가 결정구였던 투수였다. 몸쪽 높은 곳에 찌르는 공이 방망이 중심에 맞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타자가 손을 대기 가장 어려운 코스를 찌르는 것이 특기였고, 이후엔 아웃코스로의 느린 변화구 등으로 삼진을 양산해내는 투수였다. 본디 좋지 않았던 제구 문제를 개선함과 동시에 구종을 파악당하는 투구 습관을 없애기 위해 공의 릴리즈 포인트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는데, 포심과 커브, 슬라이더가 모두 동일한 팔모양에서 나오니 타자가 치는건 물론이고 포수가 잡는 것까지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히로시마 시절엔 수비형 포수로 이름을 날린 타츠카와 미츠오가 있었기에 문제가 덜했지만, 요미우리에선 4년 밖에 뛰지 않으며 카와구치의 피칭에 익숙해진 포수도 적어 소화이닝이 히로시마 시절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폭투 개수가 비슷한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본디 카와구치는 매우 침착한 경기 운영으로 유명했는데 투수가 출루해도 1루에 견제구를 던지고, 타츠카와가 내보낸 사인을 3번 연속으로 거부해 자기가 원하는 공이 나올 때까지 버티는 등, 독특하다 못해 유별난 투구 리듬을 유지했다. 타츠카와 본인도 초기엔 이해가 안갔지만 이후엔 카와구치를 존중해 아예 원하는 방향으로 2스트라이크를 잡고, 이후에 승부를 거는 방향으로 전환했다고. 타자의 약점을 공략한다기 보다는 던지기 쉬운 곳에 던진다는 느낌이어서 중심 타자는 별거 아닌 것처럼 삼진을 잡고 하위타선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는 등의 경우가 있었다.
변화구는 커브, 슬라이더, 스크류볼 등의 다양한 변화구를 익혔는데 2, 3년마다 새로운 변화구를 하나씩 들고 왔다. 프로 초창기부터 유용하게 써먹던 커브는 니우라 히사오에게서 영향을 받았는데, 손바닥과 공 사이에 공간을 둬 릴리즈 때에 중지로 공을 누르며 스핀을 걸었다고 한다. 릴리즈 포인트를 바꾸는 것으로 커브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프로 초창기엔 포심과 커브로 쏠쏠히 재미를 보았다. 또한 포심과 비슷한 폼에서 나오던 슬라이더는 카와구치에게 리그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안겨다 줬으며 포크볼을 베이스로 개량한 스크류볼과 좌타자 상대용 슈트도 사용할 줄 알았던 투수였다.
카와구치는 시즌 내내 1년간 로테이션을 지키기 위해 체력 훈련을 포함해 2군에서의 조정 기간도 계산에 포함시켜 철저히 시즌을 계획했다. 6개월간 매달 2승씩 12승을 거둬 매년 두 자릿수 승수를 올리는 것을 목표로 월초에 전력으로 2승을 따놓으면 이후엔 마음이 편해져 호투에 도움이 됐다고.
선발로 등판했을 땐 단순히 5이닝, 7이닝이 아니라 항상 완투를 상정해 5회까지 전력투구 이후 6, 7회엔 선두타자 출루에 주의를, 8, 9회엔 1타자, 1타자씩 막아나가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투구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슬로우스타터 기질도 있어서 경기 초반 타자들에게 위기상황도 겪지만 영점 조절이 되면 무난하게 호투하는 경기도 많았다. 그러나 요미우리 이적 이후 구원으로 전향했을 땐 선발에 익숙해진 패턴이 오히려 독이 되어 매구 전력투구 해야하는 구원투수로는 안 좋은 결과를 낳았다. 길게 보고 던져도 되는 선발과는 달리 경기의 후반이나 위기상황에 등판한 구원투수는 약한 타자라도 공격적으로 승부해 투구수를 줄여야 했기에 투구폼의 보폭을 줄여 제구를 가다듬고 투구수를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타격 면에선 일본 프로야구 뿐만이 아니라 메이저리그에서도 보기 드문 왼손 스위치히터였다. 사실 고교시절까지는 좌투우타였지만, 오른쪽 어깨에 몸에 맞는 공을 맞아 좌타자로 교정한 좌투좌타가 되었다. 이후 프로까지도 좌투좌타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1994년 야쿠르트전에서 이시이 카즈히사의 머리를 향한 빈볼에 뇌진탕을 입었고 이후엔 스위치히터로 타석에 들어서게 됐다. 투수치곤 나름 타격도 잘했는데, 현역 통산 797타수 128안타 3홈런 타율 0.161을 기록했다. 타격으로 유명한 투수인 잭 그레인키의 통산 타율이 0.225고, 매디슨 범가너의 통산 타율이 0.172인걸 감안하면 어느정도의 기록인지 감이 올 것이다.
[1] 센트럴리그가 탈삼진 타이틀을 1991년부터 지정하였기에, 공식적인 타이틀 수상은 1회이다.[2] 입단 거부 이후 사회인야구팀 듀프로에 입단.[3] 사실 여름 고시엔 뿐만 아니라 봄 고시엔도 수십개의 학교들이 참여하는 예선부터 일일이 뚫어야하기에 프로에서 이름 꽤나 날린다하는 선수들 중에서도 고시엔에 나가지 못한 선수가 부지기수다.[4] 이때의 메이지진구 대회는 추계대회 일정상 지구우승팀이 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5] 198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였으나 한편으로 입단 과정에서 여러 파문을 낳았던 것으로도 유명한 에가와 스구루의 모교이다.[6] 결국 소토쿠 고등학교는 이 해 봄 고시엔 제패에 성공했다. 소토쿠를 우승으로 이끈 에이스 투수였던 쿠로다는 고향팀 히로시마행을 희망했지만 닛폰햄에 지명되자 이를 거부하고 사회인야구를 거쳤다가 야쿠르트에서 데뷔하는데, 부상과 성적 부진이 겹쳐 결국 3년 만에 배팅볼 투수로 전향했다.[7] 카네다는 재일교포 출신으로 NPB 통산 400승에 요미우리의 V9시기 초반 5회 우승을 함께한 레전드 중에서도 레전드로서, 순혈주의가 너무나도 강력한 요미우리에서 타팀 출신인 그의 등번호 34번이 영구결번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런 그가 당시 롯데에서 달고 있던 34번을 주겠다는 것은 엄청난 조건이었다.[8] 카와구치와의 협상 당시 롯데는 계약금으로 3500만엔을 제시했다고 한다.[9] 카네다 마사이치는 롯데 2기 감독 시기였던 1990년에도 롯데 입단을 꺼린 아지아대학의 에이스 투수 코이케 히데오(다카쓰 신고의 대학 동기)를 강행지명하여 8구단 경합(노모 히데오와 함께 최다 기록)이란 초경쟁 끝에 교섭권을 얻어냈으나, 코이케가 끝내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 진출을 선택하며 또다시 물을 먹었다. 덤으로 코이케는 2년 후인 1992년에 킨테츠 버팔로즈의 1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했으나 사회인야구 시절 당한 부상으로 폼이 떨어져 있었기에 1997년 다승왕 타이틀(15승)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성적을 못한 채 킨테츠, 주니치, 라쿠텐 3구단을 떠돌다 통산 51승 47패의 아마추어 시절의 기대와는 어긋난 평범한 커리어를 남기고 2005년 은퇴했다.[10] 인쇄기 제조, 판매를 주업으로 삼았던 기업이었다. 야구부는 2008년 해산.[11] 줄빠따의 어원은 일본 해군이었다. 어찌보면 오리지널을 배워온 사람에게 맞은 셈...[12] 1956년부터 1987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스카우트로 활동했으며, 현역 당시에 카와구치를 포함해 키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코지, 오노 유타카 등 카프의 황금기를 이끄며 구단을 대표하는 스타 선수가 된 선수들을 직접 스카우트한 공로로 스카우트의 신이라고 불리웠다.[13] 이 드래프트의 최종승자는 바로 요미우리인데 2순위도 레전드인 코마다 노리히로를 지명했다.[14] 여담으로 1977년 당시 카와구치에게 가장 열심히 구애를 했던 롯데는 1라운드에서 아이코 타케시를 단독 지명했다. 15년간 롯데에서 뛰었고, 이후 주니치로 이적해 뛰다가 2000년 은퇴. 본디 투수로 지명해서 3년간은 투수로 뛰었지만 신통치 않았고 이후 타자로 전향해,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2할 7~8푼대의 타율과 10개 전후의 홈런을 치는 준수한 타자로 활약했다. 골든글러브도 1차례 수상하기도 한 만큼 완전히 망한 픽은 아니었던 셈. 다만 이 선수는 은퇴 후 현역 시절 안드로스텐다이온을 복용했다고 고백했다.[15]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는 1라운드에서 복수의 팀이 동일한 선수를 지명한 경우 제비뽑기를 통해 선수의 교섭권을 뽑으며, 여기서 교섭권 획득에 실패한 팀은 이후 추가적으로 대체 1라운더를 지명한다. 이때 지명한 1라운더 선수가 원래 지명하려던 선수에 대한 계획이 어긋나서 이를 벗어나 지명한 선수이기에 일본에선 대체 1라운더를 '벗어남, 빗나감' 를 의미하는 하즈레(外れ) 1라운더라 한다.[16] 실제로 드래프트 1라운더가 될 정도로 주목을 받는 선수들은 학교나 소속 사무실에서 마련한 인터뷰장에서 기자들, 내빈들과 드래프트를 지켜보다가 지명이 되면 곧바로 인터뷰를 하는게 관례이다. 인터뷰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도 기자들이 학교 코앞까지는 가 있는 편. 드래프트 당시 수업을 듣고 있던 사카모토 하야토가 이슈가 됐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17] 사실 카와구치는 학생 시절부터 경기 운영을 침착하게 한다고 정평이 나있었다.[18] 1972~1988년까지 한신 타이거스 원클럽맨으로 뛰었던 투수로 구원왕 2회 수상, 에나츠 유타카에 이은 사상 2번째 100승-100세이브를 달성하는 등 선발과 구원 양 포지션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친 투수였다. 은퇴 후 1992~1994년에 카와구치와 선수-코치 관계로 함께 카프에서 뛰기도 했다.[19] 상술했다시피 당시 센트럴 리그에 최다 탈삼진 타이틀이 없었기에 공식적인 타이틀은 아니다.[20] 또한 연고지가 히로시마라 아예 1년 중 절반 이상을 도쿄에서 직선거리로만 약 650km 떨어진 히로시마에서 지내야했다.[21] 도쿄도 분쿄구에 위치한 도쿄돔을 홈구장으로 쓰던 요미우리와 닛폰햄 파이터즈보다 도쿄도 서부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히노시는 사이타마의 토코로자와과 훨씬 가깝다.[22] 카와구치가 결혼할 때, "내 딸의 남편이 어떻게 카프의 에이스일 수가 있냐!"고 덜컥 화를 낼 정도로 대단한 팬이었다.[23] 그래도 훗날 쿠도는 2번째 FA선언으로 2000년 요미우리에 입단했고 2차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함께했다.[24] 이날 경기는 나고야 구장 최후의 1군 경기이기도 했다. 즉, 주니치는 10.8 결전에 이어 홈구장 이전 직전 마지막으로 치르는 경기에서조차 똑같은 장소에서 앙숙에게 우승을 내준 것..[25] 공교롭게도 역전의 대상이 카와구치의 데뷔팀인 히로시마였고, 일본 각 매체에서는 1996년의 역전 우승에 대해 메이크 드라마라고 칭한다. 2008년 요미우리가 한신 타이거스를 제치고 13게임차 역전 우승을 달성했을 땐 1996년의 메이크 드라마를 본떠 메이크 레전드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