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18 21:10:30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의 역사
Lịch sử Việt Nam | 歷史越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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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Việt Nam Cộng Hòa | Republic of 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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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Tổ quốc, Công minh, Liêm chính
조국, 공명, 청렴
상징
국가 공민에게 고함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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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1975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베트남국 남베트남 공화국
자유 베트남 임시정부
역사
제1공화국 수립 1955년 10월 26일
제2공화국 수립 1967년 9월 3일
멸망 1975년 4월 30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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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단일국가, 총통제, 공화제, 단원제(1955~1967), 양원제(1967~1975), 군정(1963~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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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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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대한민국: 1956년 5월 23일 수교
북한: 미수교

1. 개요2. 상징
2.1. 국호2.2. 국기
3. 역사
3.1. 설립 배경3.2. 베트남 제1공화국3.3. 군사정부3.4. 베트남 제2공화국3.5. 멸망3.6. 멸망 이후
4. 멸망 후 숙청5. 패망의 원인6. 정치7. 경제8. 교육9. 문화10. 군사11. 치안12. 외교
12.1. 북베트남과의 관계12.2. 미국과의 관계12.3. 대한민국과의 관계12.4. 대만과의 관계12.5. 태국과의 관계12.6. 프랑스와의 관계12.7. 캄보디아와의 관계
13. 남베트남의 해외 이주자14. 베트남에서의 평가15. 망명정부16. 역대 총통1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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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공화국, 약칭 남베트남1955년 10월 26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북위 17도 베트남 군사분계선 이남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군사분계선 이북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과 대치하였다.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종결되면서 프랑스베트민의 휴전으로 1954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분단되었는데, 가끔 베트남 공화국의 전신인 베트남국(1949년 6월 14일 - 1955년 10월 26일)을 남베트남의 역사에 포함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진영에선 정치이념에 따라 북베트남과의 구분을 위해 자유 월남, 자유 베트남 등으로도 불렸다.

2. 상징

2.1. 국호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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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어 Việt Nam Cộng Hòa
프랑스어 République du Viêt Nam
영어 Republic of Vietnam
태국어 สาธารณรัฐเวียดนาม
중국어 越南共和
일본어 ベトナム共和国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Вьетнам
한국어 베트남 공화국 (표준어)
윁남공화국 (문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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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파병을 했던 한국에선 베트남 공화국을 (자유)월남이나 베트남이라고 불렀고, 반대로 북베트남월맹이나 베트민(또는 비엣민)이라고 구분했다. 현재의 베트남 전쟁 관련 자료 등에서도 당시 명칭대로인 경우가 많다.

1992년 대한민국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교한 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베트남'이라고 부르며, 베트남 공화국을 남베트남,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이라고 부른다.

586세대 전 세대가 "월남"이라고 하면 대개 1975년 망한 베트남 공화국을 말하는 것이며, 통일 이후 사회주의 베트남을 말할 때에는 그냥 "베트남"이라고 한다.

현행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베트남 민주 공화국 시절 포함)에서는 사이공 정권(chính quyền Sài Gòn)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남부윁남이라고 부른다.

2.2.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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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3.1. 설립 배경

현재의 베트남 남부는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참파라는 이민족 나라가 따로 있었다. 참파 국민들은 따로 참인이라 했는데, 참어도 베트남어와는 다르며[4] 대만 원주민들이나 마인어(말레이,인도네시아 계열), 필리핀어에 훨씬 가깝다.

베트남이 남진 정책을 펴면서 참파는 이미 17세기에 빈사상태에 빠졌으며, 종속국으로 전락한 끝에 1832년 베트남에 흡수됐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근처의 메콩 강 유역도 원래 '쁘르이노꼬'라는 캄보디아 영토였으나 18세기에 베트남에게 할양됐다.

인도차이나 동부를 모두 제패하나 했던 베트남이 이번엔 정(Trịnh, 鄭) 씨의 북부와 완(Nguyễn, 阮) 씨의 남부로 분열되었고[5], 1858년 남의 완조의 혼란을 틈타 프랑스가 침공한다.

패배한 베트남은 비엔호아, 가정, 딘쯔엉 3개 성을 직할로 프랑스에 할양하긴 했어도 보호국 형태로 황실은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소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그러나 결국 베트남 황제는 거듭 된 독립 시도 끝에 프랑스 군에 체포돼 프랑스령 알제리로 유배를 가고, 황자는 청나라로 망명하는 등 왕조가 위기에 처한다. 프랑스는 1, 2차 후에(Hue) 조약 등을 맺고 베트남을 완전한 식민지로 삼는다.

1940년 7월 프랑스가 2차 대전 초기 나치 독일에 항복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운명도 안갯 속이었다. 나치 독일은 비시 프랑스라는 괴뢰국을 세우면서 인도차이나 프랑스 총독부를 비시 정부 아래 그대로 둔다.

1940년 9월 일본 제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했다. 비시 프랑스 식민 당국은 같은 추축국인 일본과 강화를 맺으려 했다. 일본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

1944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에서 물러나고 프랑스는 국권을 회복했다. 독일과 같은 추축국인 일본은 더이상 눈치를 볼 필요 없었다. 일본은 명호작전으로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 라오스 왕국 등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각각 괴뢰국들을 세워 인도차이나를 장악했다. 만주국 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1945년 8월 일본 항복 직후,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 북쪽엔 중화민국군이, 남쪽엔 영국군이 베트남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베트남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때 호치민의 베트민이 삽시간에 베트남 북부를 장악.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일본군의 억류하에 있던 과거 프랑스 총독부 관련자들은 계속 억류된 상태였다.

베트남 북부로 진입한 중국군은 프랑스 총독부 잔당 처리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고 베트민의 통치 행위도 인정했다. 한편 북위 16도선 이남의 영국군 주둔 지역에선 베트남인들의 자치 조직이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월남 주둔 중국군은 귀국해야 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프랑스 총독부 잔당들의 억류를 풀어주었고, 그들은 영국군의 주둔지인 남베트남의 행정권의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정권을 재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면서 베트남은 분단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에서도 프랑스는 환영받지 못했고 반프랑스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결국 사이공에 코친차이나 공화국이란 괴뢰국을 세운다. 이후 베트남 재정복의 야욕을 감추지 못하는 프랑스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자 1946년, 중국의 중재 아래 정전 협정에는 합의했으나 프랑스가 이 협약을 파기, 베트남 남부를 재점령해 괴뢰국인 베트남국을 선포하고 하이퐁[6]에 상륙, 베트남을 재침공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대항한다.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에게 처절하게 깨지고난 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위해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이 열렸다.[7]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인도차이나 전역이 공산화될 것이라는 우려에 빠져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통칭 월맹)과 베트남국[8](남베트남, 과거식 표현으로 자유월남)으로 분단된다.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북위 18도선을 고집했고[9], 월맹은 북위 13~14도선[10]을 주장했다. 중국이 북위 16도선[11], 소련이 16~18도선의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분단된다.

하지만 중재를 맡아 일단 전쟁은 끝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이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한 뒤 2년 후 남북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총선거를 실시할 경우 공산세력이 압승을 거둘 것임이 확실했고 이럴 경우 베트남의 공산화는 불보듯 뻔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국무 장관 덜레스는 선거를 하면 분명 호치민이 80% 이상의 득표로 승리할 것이라 보았다. 이는 '민주적이고 정통성 있는 북베트남'이 민심을 얻어서 이긴다는 이상주의적인 전망이 아니라 일당독재와 공포정치로 북베트남을 장악한 공산당이 부정선거로 이길 것이 틀림없다는 전망이었다. 동유럽 공산정권이 그렇게 수립되었고, 베트남 공산당 자체도 30~40년대부터 이미 수많은 폭력과 동맹 배신을 일삼은 폭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독재체제였기에 전혀 믿을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선거를 감독할 예정이던 프랑스군이 남북을 가리지 않고 베트남 전역에서 난타당하다 손털고 나갔기에 공정한 선거는 물건너 갔다고 본 것이다. 결국 미국과 베트남국은 총선거를 거부한다.

이러한 시각은 미국만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제네바 합의와 총선거는 공산주의자들의 비열한 획책이라는 것이 남베트남 반공세력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12] 여론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55년 당시 인구가 1200만 명, 수도 사이공 인구는 130만 정도였던 남베트남에서 20만의 인원이 반 제네바 합의 시위를 위해 모였고, 그들 중 일부가 북베트남 대표들을 향해 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미국이 원하건 말건 총선거는 쫑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이 시위에 참여했던 근로인격혁명당과 혁명위원회의 협력 아래 베트남국의 체제가 뒤집힐 준비가 되고 있었다.

3.2. 베트남 제1공화국

1955년 10월 26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베트남국을 폐지하고 보대제를 폐위,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응오딘지엠은 정치적 선전방송을 통해 보대제를 쾌락 추구자로 비난하고 자신은 국가를 위한 경이로운 일꾼으로 선전했다. 응오딘지엠을 행운의 상징으로, 보대제를 불행의 상징으로 띄운 선거 전략은 주효하여 보대제는 98.2%의 찬성 투표를 통해 폐위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CIA가 배후에서 깊이 관여한 부정선거였다. 98.2%라는 결과도, 99%로 발표하려던 것을 미국에서 너무 비민주주의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해서 낮춰서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있었으니, 공화국을 건국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트남국의 무지막지한 부패를 베트남 공화국이 그대로 계승하고 만다.

또한 북베트남에서 파견한 간첩과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동안 베트민에 가담한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커졌는데 북베트남 간첩의 대표적인 예가 야당의 유력 총통 후보였던 쫑딘쥬였다. 이런 식으로 간첩이 정부와 국회 등 국가 지도부 전체에 쫙 깔리니 국가 기밀이 북베트남에 유출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초기에는 응오딘지엠의 불교도 군벌 숙청과 치안력 회복 덕분에 6년 정도 평화를 누렸던 베트남 공화국이었지만, 북베트남이 국가정책으로 남베트남의 전복을 채택하고 남베트남의 친베트민 게릴라 세력인 베트콩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퍼붓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은 악명 높은 베트콩의 준동으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응오딘지엠 집권 시기만 하더라도 풍부한 쌀 수확이 담보되는 기름진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의 가파른 성장, 외자 적극 유치 정책을 통한 유리공업/고무공업 등의 경공업의 대단위 육성, 질 좋은 수산물의 해외수출을 장려하는 국가 정책 덕분에 북베트남보다 경제력이 앞섰지만[13] 미국의 원조를 받아 양성한 군인들이 훌륭한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무능하고 의지가 없으며 정치 개입과 쿠데타를 일삼아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초대 총통이던 응오딘지엠이 초기에는 친불 군부 숙청, 공화국 체제 수립, 매춘 타도, 부정부패 타도[14], 정치깡패 토벌을 통한 치안 안정[15] 북베트남의 무리한 토지 개혁과 종교 탄압 때문에 발생한 80만에 달하는 탈북민을 정착시키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그리고 경공업과 농업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외자유치를 포함한 각종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는 등 그럭저럭 잘 출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에 맞서기 위해 응오딘지엠이 내세운 것이 천주교도, 남베트남에선 소수인 북부 통킹인, 중부 안남인 중심 내각[16], 친족들로 정부를 채우는 족벌정치였고 미국의 입김을 줄이겠다는 이유로 조성된 가족정치 덕분에 공직을 맡을 사람을 뽑는 기준이 '친인척인가' 혹은 '가톨릭을 믿는가'였으니 말 다했다.[17] 또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 성격을 강화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nhu_1882962f.jpg
쩐레쑤언
(Trần Lệ Xuân, 陳麗春, 1924~2011)
1963년 5월에 접어들어 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분개한 베트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승인 틱광둑(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이 소신공양으로 세계에 베트남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으나 응오딘지엠 일당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Ngô Đình Nhu, 吳廷瑈)의 아내이자 역시 부패의 핵심 축 중 하나였던 쩐레쑤언은 마담 뉴(Madame Nhu)라는 별명으로 독신이었던 응오딘지엠의 사정으로 인해 남베트남의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는데 그녀는 소신공양에 대해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영상
그에 비하면 불교 지도자 놈들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중놈 하나 바베큐로 만든 것뿐인데 말 입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역대급 고인드립에 그동안 쌓인 대중의 분노가 전국적인 규모로 폭발했다. 심지어 당시 미국 정부도 어이를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여론의 분위기를 보고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楊文明)[18] 장군을 위시한 고위 군사 사령관들이 작당하였다. 그 해 11월 1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인혁명회의를 설립한다.[19] 응오딘지엠과 동생 응오딘뉴는 도망쳐서 교회에 숨어있다가 다음 날 발견되어 사살당했다.

이 쿠데타는 사실 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총 42,000달러나 되는 뇌물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저런 망언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조차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감안하면 CIA가 쿠데타를 지원한 것은 단순한 독단이 아니라 미국 정부도 못해도 묵인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쿠데타 지원 자체를 행정부 차원에서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외로 달아난 쩐레쑤언은 베트남 정부를 비난하면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과거 냉전 시절에 반공 투사인 양 행세하기도 했으나 미국에선 용녀(Dragon Lady. 동양의 용과 달리 서양의 드래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수의 이미지가 강하다) 같은 악랄한 여자라는 비아냥만 쏟아졌으며,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거지 꼴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죽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타도하고 세워진 새 군사정부를 승인한다. 그러나 비록 독재자일지언정 국가 건설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룰 정도의 지도력이 있는 지도자는 당시 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을 제외한다면 찾기 너무나 힘들었다.

3.3. 군사정부

군인혁명회의 주석이 된 즈엉반민은 베트콩과 대결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는 방향을 추구했다.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1964년 1월 30일 응우옌카인이 미국 지원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즈엉반민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러나 그후에도 쿠데타가 계속되는 등 매우 불안정해졌다. 이를 틈타 베트콩이 농촌에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또한 1964년 8월에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며 미국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무력 충돌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1965년에는 응우옌반티에우가 군사정부의 수반이 되며 안정을 되찾지만, 응우옌반티에우 정부는 자주적으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미국에 의해 끌려다니며 자주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응우옌반티에우는 1967년에는 군정을 폐지하고 민정으로 복귀한다 선언했다. 총통으로 당선된 사람은 본인인 응우옌반티에우였다.

응우옌반티에우가 집권하는 몇년 뒤에 그나마 상대적으로 안정되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남베트남 군부는 격화된 베트콩과의 전투에 집중하는 대신 자기들끼리 파벌 싸움을 벌이며 쿠데타를 반복해 베트콩이 농촌 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사실상 방치했다. 1965년 빈 지아(Binh Gia) 전투와 동 쏘아이(Dong Xoai) 전투에서 북베트남에서 원조받은 박격포와 무반동포까지 동원한 베트콩이 공수부대, 해병대, 레인저까지 포함된 진압군을 교환비에서도 처참한 수준으로 갈아버렸는데도 말이다.

3.4. 베트남 제2공화국

민정으로 복귀하고 정치적으로는 어느정도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앞서 말했듯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막장을 다시 시작하였다. 자기 힘으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진지한 태도를 가지지 않고 미군의 전투력과 쇼미더머니 신공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재정 적자, 무역 적자, 인플레이션의 3박자가 겹치면서 그 앞선다는 경제도 점차 안습이 되고 농촌 지역의 상당수가 베트콩의 영향력하에 들어가면서 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치적 혼란과 여러 이유로 병역기피도 만연하였다. 휴가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다거나 가족에게 가야 할 전사자 보상금을 장교가 빼돌리기 때문에 군대는 자주 농촌 마을들을 수색하여 징병을 해야 했다고 한다. 원래 수도인 사이공과 메콩 델타 일대만 하더라도 남북 베트남 분단 이전에는 오히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사이 단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던 사이공 소비에트와 이를 지지한 빈농들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때문에 월맹이 1950년대의 토지 개혁을 둘러 싼 혼란을 극복하고 1960년에 본격적인 해방 전쟁을 선포하자 순식간에 수도권은 최전방이 되어버렸다. 1960년대 중반에는 아예 나라 전체가 베트콩에게 넘어갈 뻔하다가 미국이 이제까지 해 왔던 간접 지원에서 아예 대규모 지상군 파병을 하면서 겨우 살아 남았다.

응오딘지엠이 적지 않은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하게 미움을 사긴 했지만, 남베트남 역대 지도자 가운데서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국정을 추구할 만큼 그릇과 세력이 있었던 인물 또한 응오딘지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나마 미국에게 받아 먹을 건 다 받아 먹으면서도 독자적인 정책을 시도하던 응오딘지엠 시절과 달리,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북베트남의 선전 문구 그대로, 아예 1969년 파리 평화회담 같은 전쟁의 경과에 직결되는 중요한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식으로 무시를 당하는 등 허울뿐인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애당초 남베트남은 존립시기 내내 정상적이고 독자적인 행정 체계를 세우고 실행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래도 1970년 총선에서 불교세력이 대거 진출하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치러졌고 그나마 정통성을 세울 기회였지만 1971년 대선에서 부정선거가 펼쳐지는 바람에 안 그래도 없던 정통성마저 아작나버리고 말았다. 응오딘지엠 이후부터는 미국이 아예 전쟁 자체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남베트남은 실제 역사보다 10년은 일찍 망했을 것이라는 말도 간간이 나오는 편으로 이건 내부 자체 평가용 자료와 미국 측의 시선이나 모두 동의 하는 내용이다.[20]

베트남 공화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내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자립 경제 체제로의 변화가 필요했는데, [21] 가장 무난한 쌀 산업은 이전에 말했듯이 무능한 군부가 정치싸움이나 하는 동안 농촌 지역이 베트콩 하에 들어가 육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트남 공화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기생하여 돌아가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1970년대 중반에는 물가 상승률이 74퍼센트까지 올라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군 역시 부패해 국민들을 약탈하고 심지어 베트콩에 무기를 거래하기도 했다. 응오딘지엠이 금지했던 매춘도 쿠데타와 전쟁으로 인한 대혼란과 대규모 외국군 주둔이라는 변수 때문에 다시 심각해진다. 베트남 전쟁 영화를 보면 가끔 나오는 매춘 행위는 지엠 시절에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3.5. 멸망

파일:남베트남 최후의 날.jpg
독립궁(현 통일궁) 정문을 쳐부수고 들어오는 베트콩군의 전차(1975년 4월 30일 11시 30분 사이공)

1973년 1월에 파리 협정을 체결한 미국이 전쟁에서 손 털고 떠나버리자 베트남 공화국은 완전히 새 되고 말았다. 북베트남, 베트콩과의 교전은 공식적으로는 멈춰졌지만 북베트남은 협정을 파기하고 전쟁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74년 12월 18일부터 1975년 1월 8일까지 '남부 해방'에 대한 노동당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1975년 3월 10일에 시작된 북베트남의 막판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은 쑤언록에서 치열하게 싸운 18사단(역설적이게도 18사단은 원래는 최약체 사단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같은 일부 부대의 영웅적인 항전을 제외하면 일패도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병합되고 말았다.[22] 미국이 철수하면서 엄청난 군사지원을 해줘서 일시적으로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도 패퇴하고 만 것이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이 준 장비만으로도 공군력 세계 4위, 총 병력수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 순위권의 군사력이란 것은 잘 보면 빈 껍데기였다. 공군력도 숫자로만 4위, 실제 전력은 북폭을 할 능력도 없고 거의 다 지원기나 수송기 위주였다. 100만 병력이란 것도 정규군은 45만 수준이고 나머지는 민병대와 지방대이다, 민병대와 지방대는 실제 전투전력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겉은 그나마 번드르르했지만 안은 엉망이었다. 미국이 준 무기의 규모는 정말 세계 순위권에 들 수준이었으나, 정작 그 순위권에 드는 규모의 무기를 굴릴 돈과 물자는 주지 않았다.

미국도 일부러 안 준 게 아니라 베트남 전쟁의 수렁 때문에 경제난이 심각했고, 미국 행정부가 지원을 위해 예산을 편성해 미국 의회에 허락을 받으려고 했으나 미 의회에서 더이상 부패 정권에게 지원은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삭감했고 여론도 이미 남베트남 지원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1975년의 최종공세 당시 남베트남군은 연료와 부품이 없어 비행기도 제대로 띄우지 못했고 탄약의 부족으로 전투에도 제한을 받았다. 전투 중에 탄약 아껴쓰라는 명령[23]이 내려올 지경이었다. 전술적으로도 미국식 전술과 미군의 지원에 너무 의지하게 된 것이 약점이 됐다. 미군만 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군대가 미군처럼 싸우는 데 익숙해져버렸다.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베트콩 게릴라를 잡으려고 전군을 국토에 넓게 분산시켰는데, 부족한 병력을 무리하게 넓게 펼치다보니 전 국토의 치안 유지 능력이 악화되었다. 결국 전략을 수정하여 주요 거점을 안전하게 확보한 다음 토벌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부대 재배치를 감행하였으나, 그 첩보를 입수한 북베트남이 부대 재배치가 이루어지는 빈틈을 노려 침공해왔다. 방어체계를 제대로 굳히기도 전에 전격전을 당한 것이다. 티우의 전략은 현재 병력으로는 모든 곳을 지킬 수 없으니 해안 주요도시 등 지킬 곳만 지키는 식으로 병력 재배치 계획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2군단 몰락을 가져와 전체적인 남베트남 육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24]

그리고 부패하고 무능한 베트남 공화국에 이미 민심은 떠나 있었다. 이로 인해 개전 초기에 100만이 넘는 병력 중 반 이상이 탈영을 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은 미국을 맹비난하며 1975년 4월 21일 대만으로 망명했고, 그 후임인 쩐반흐엉 역시 4월 28일 하야하고 즈엉반민[25]에게 총통직을 주었다. 즈엉반민은 4월 30일 결국 항복해버렸다.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찌민은 생전에 베트남 공화국을 정복하는데 30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죽은 지 몇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개전 1개월 만에 정권이 무너졌다.[26] 이후 남베트남에는 북베트남의 괴뢰 정권인 '남베트남 공화국(Cộng hòa Miền Nam Việt Nam)'이 세워져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과 통합하여,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다.

3.6. 멸망 이후

북베트남이 비록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통일시키기는 했지만 정작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남부 통치에서 고전을 거듭했다. 농촌의 사회주의화 개조 작업은 자영농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남부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새로히 협동농장에서 일하게 된 농민들은 저임금에 대한 불만으로 태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산성은 오히려 이전보다 크게 떨어졌다. 또한 협동농장화가 완료된 북부 농촌과 사회주의 개조가 지지부진한 남부 농촌의 공존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태풍이 연속적으로 들이 닥치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데다가 협동농장화되지 않은 자영농들의 농산물은 암시장으로 흘러들었고, 공무원들조차 배급이나 정부공급가가 아닌 암시장에 의존해 식량을 수급해야 했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이러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물가조정조치 및 신 화폐 발행을 단행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별 효력을 얻지 못한채 물가상승률만 높여주는 요인이 되었고[27]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 다른 국가로 배를 타고 이민가는 보트피플이 더욱 성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부인들은 사이공 등의 도시에서 이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해가면서 암시장을 비롯한 시장경제 활동을 이어나가며 베트남 정부가 꿈꿨던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교란시켰다. 이러한 경제운용의 난맥상과 통일 후 장기간 이어져온 경기침체를 극복하려는 베트남 공산당 내 개혁파들의 노력이 1980년대 몇 차례의 개혁을 거쳐 결국 도이머이로 불리는 대대적인 시장화 개혁으로 이어졌다.[28] 다만, 북부 출신들도 1954년 이전에는 자본주의 밑에서 살았으니 그것이 크게 낯설지 않았다.

지금도 구 북베트남 지역보다 구 남베트남 지역이 경제적으로도 훨씬 부유해서, GDP도 옛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호치민(사이공)이 북부의 수도 하노이보다 두 배나 높다. 정작 분단 시기에는 남베트남이 다소 앞서다가 얼마 가지 않아 북베트남과 동일한 수준이 되었음을 감안하면 격세지감. 또한 이쪽 지역에는 해외로 도망간 남베트남인들의 자손들이 투자를 하기 때문에 이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비슷하게 중국의 공산화 이전이나 개혁개방 후에 양쯔강 이남 지역이 이북 지역보다 부유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통적으로도 온난 습윤한 기후와 풍부한 수자원 덕에 벼농사에 유리하다. 해상 패권에 근거한 서구 열강들의 경제적 진출 뿐만 아니라, 홍콩인대만인 기업인들도 푸젠성, 광둥성 등 홍콩 및 대만과 문화가 비슷한 지역에 우선 투자함으로써 경제발전이 더 빨리 이루어져 북부 지역보다 먼저 자본주의화와 대도시화가 이루어졌다. 베트남의 경우 유연성이 부족한 사회주의 통제경제하에 북부 사람들이 더 오래 있었던 후유증도 있다.

4. 멸망 후 숙청

대다수 공산 국가들처럼 매우 잔혹한 숙청이 동반되었다. 1975년부터 10년간 사법적 과정없이 처형된 자들만 최소 65,000명에서 최대 1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미국의 연구자가 1990년에 발표한 논문이며, 굉장히 많이 인용된다. (당시 남북 베트남의 인구는 1973년 기준으로 북쪽이 2,393만, 남쪽이 1,937만). 사법적 과정을 거쳐 처형된 자들의 수까지 생각하면 더 많다. 남베트남에서 근무했던 군인, 공무원이 재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민학살이나 심각한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관리나 지주 대부분도 재교육 캠프에 들어갔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석방되었고, 이 숫자는 100만명 정도 된다. 다만 공산정권은 특별히 베트콩에게 잔혹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부패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해외로 망명하도록 허가해주기도 했다. 물론 망명 간 사람들은 그냥 맨몸으로 추방당한 것과 같았기에, 미리 재산을 빼돌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은 북베트남군에서 남파한 인력이므로 애초에 숙청대상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베트콩(정부)은 남파된 북베트남군+자생적 반정부주의자(소위 민족주의자)의 공생조직이었으므로, 남베트남이 패망할 무렵부터 베트콩은 서서히 공생조직에서 북베트남군 일색으로 교체되어 간다. 이는 베트콩 정부에서 사법부장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 계열의 반정부 지식인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얼마 전까지 남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던 부대가 머지않아 다시 봤더니 온통 북베트남인(군)으로 채워져 있었고, 북베트남군 정치장교가 통제하고 있더라는 증언을 했다. 베트콩들 역시 1968년 일어난 구정 대공세로 인해 대부분의 간부들이 남베트남군과 미군에 의해 토벌당했고 살아남은 민족주의계열 간부들은 거의 없었고 남은건 남파된 북베트남 정치장교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피해를 봤다면 민족주의 세력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남베트남의 패망이 유력해질 무렵부터 베트콩 정부와 군대의 요직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밀려나면서 베트콩 정부가 북베트남 정부와 다를 바 없게 되자 북베트남은 베트콩 정부와의 상의도 없이 남베트남 패망 2년 후 일방적 합병선언으로 통일을 완수했다. 북베트남의 강력한 재교육 정책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재교육 캠프에 수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민족주의 계열인사(베트콩 정부의 법무부 장관)는 결국 승리했음에도 보트 피플로 망명해 최종적으로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프랑스에서 발간한 자서전의 일부이며, 실제로 그 외에도 북베트남 정규군 출신으로 통일 후 남베트남에 대한 정책에 회의를 품고 망명해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직 북베트남 장교들도 유사한 증언을 한 바가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 계열(대개 북베트남 남파인원)들은 당연히 문제가 안 됐고, 자생적 민족주의자(반정부) 계열은 통일 이후 가치 하락과 반항 정도에 따라 요직에서 제외 혹은 재교육 캠프행이 결정됐고, 남베트남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보면 된다.

최후의 남베트남 총통이었던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29] 1980년대 한국의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는[30]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사이공 함락 후 간단한 조사를 거쳐 귀가시켰고, 후에 프랑스 망명을 허가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즈엉반민이 해외에서 사망했을 때도 베트남 정부에서 유감을 표명했을 정도. 이는 즈엉반민의 경우 사이공 함락 당시 무조건 항복한 당사자라는 점, 그리고 해외 망명생활에서도 공산 베트남 정부에 대해 크게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하지도 않고, 비교적 조용히 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베트남 현 정부에서도 크게 거슬려 하지는 않았다. 반면 남베트남계 이주민들은 즈엉반민을 곱게 보지 않는다. # 남베트남 공군 총참모장이었던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의 경우도 2004년 베트남 방문을 허가해줬다.

5. 패망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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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치

독재국가[31]였던 거에 비하면 의외로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동시기 한국의 집권당들처럼 보수 우파 정당들도 존재했으나,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나 심지어는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나 인물들이 눈에 띄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장 1955년 4월 혁명의 주역인 혁명위원회 구성 정당에 '베트남 민주사회당'이란 이름의 정당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후 응우옌반티에우 시기의 집권여당이었던 국가사회민주전선도 표방하던 성향이 비슷하다.[32] 베트남 국민당 역시 사회주의 정당이다.[33] 반공주의 국가에 이렇게 좌파 정당이 많은 이유는 이 나라가 근본적으로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편협하고 폭압적인 성향에 반발한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좌우파 상관없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제외하고는 다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헌법에 반공주의를 명시할 정도로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웠으며[34], 공산주의자 정치범들을 투옥한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총통의 임기는 제1공화국 시절에는 5년, 제2공화국 시절에는 4년이었으며[35][36], 국회의원의 임기는 제1공화국 시절에는 3년, 제2공화국 시절에는 하원의원 4년, 상원의원은 6년이었다.[37] 형식상으로는 자유롭고 민주적이라 총선, 대선이 치뤄졌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너무 혼란한 탓에 국회가 제 기능을 못 했다는 것이다. 선거는 별 의미가 없고 실질적으로는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의국는 처음에는 단원제였지만, 1967년 개헌에 의해 양원제로 바뀌었다. 집권당은 응오딘지엠 시기에는 근로인격혁명당이었으며, 응우옌반티에우 시기에는 국가사회ㅅ인주전선이었다. 그 외에도 응우옌카인 집권 시기에 '대월국민당', 줄여서 대월당이 잠깐 여당의 위치에 오른 적이 있다. 야당으로는 베트남 국민당이나 국민저항운동 등의 정당이 있었으며 일부는 패망 이후에도 미국 등지로 망명하여 활동하고 있다.[38]

7. 경제

베트남 공화국은 시장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풍부한 쌀 수확량으로 북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보다 잘 살았다. 패망 당시의 1인당 GDP는 한국의 9분의 1 정도인 65달러였고 통일된 공산 베트남은 경제제재와 급진적인 토지 개혁, 이후에도 계속되는 전쟁(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등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한다.(당시 한국은 608달러) 다만 이후 점차 안정적으로 변하면서, 지금은 신흥공업국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여전히 발전 가능성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은 설립 당시 북베트남의 약 5배의 GDP를 자랑했으나 1970년대 이후 북베트남에 따라잡힌다.[39][40] 그리고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이후 미국의 원조에 점점 의존하여 결국 GDP의 10% 정도를 차지하는 소규모의 산업만을 보유하게 되었고 미국 없이는 못 사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남베트남 주도로 통일되었다면, 남한보다 잘 살았었지만 과도한 소련, 중국 의존도와 자체적인 산업도 없었던 북한처럼 결국 경제가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가 주도 투자를 통한 어업과 농업의 증진과 유리공업 등의 경공업 육성이 진지하게 시도되는 등 나름대로 경제 개발에 매진한 모습도 보여줬다. 응오딘지엠의 리더쉽 아래 치안 상황이 안정되고 북베트남도 농민 반란으로 남베트남에는 거의 신경을 못 썼던 당시 정세 흐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공업 쪽으로 가면 프랑스의 시트로앵 사와 협력해 수도 사이공에 자동차 기업을 육성하려는 시도 역시 했다.[41]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시트로앵 본사가 생산한 자동차 부품들을 베트남에서 조립하는 초보적인 수준의 공정만 수행했다. 점차 백미러나 조명 같은 제조에 그리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지 않은 부품들을 베트남 현지에서 생산하는 식의 점진적인 국산화 시도가 이뤄졌다.그리하여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총 5천 대의 자동차가 베트남 현지에서 생산되었다. 1975년 시점에서 부품의 국산화 비율은 최대 25%~40%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1975년 이후로는 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하면서 시트로앵 사가 현지 공장을 폐쇄하자 생산이 중단된다.

남베트남의 기업 중 유명했던 곳으로 히노스(Hynos)라는 치약 생산업체가 있었다. 이 기업은 1960년대에 유대계 미국인이 세운 사업체를 브엉다오응이어(Vuong Dao Nghia)라는 사람이 헐값에 구매한 것으로, 당대 기준으로 파격적인 광고 기법(영화 광고, 빌보드 광고 등)을 도입한 덕택에 남베트남 치약 시장을 독점할 정도로까지 몸집을 불렸으며, 홍콩 영화배우까지 광고에 출연시켜가며 동남아시아 주변국에도 치약을 수출했다. 당시 사이공 시를 찍은 사진을 보면 흑인 남성이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모습의 광고판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바로 이 회사의 광고였다. 히노스 사는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콜페를론(Kolperlon) 사와 합병되었고, 이어서 북베트남 정부에 의해 국유화되었다. 한동안 이 치약은 단종되었으나, 2007년부터는 다시 베트남에서 이 브랜드명으로 나온 치약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만큼의 인기는 회복하지 못했다.

통화는 북베트남과 동일하게 '동(dong/銅)'과 '추(xu/su/樞)'를 사용했다. 남베트남 동의 발행은 남베트남의 베트남은행(Ngân-Hàng Việt-Nam, 구 동방회리은행)이 담당했다. 일부 고액권(표범이 새겨진 5,000동과 물소가 새겨진 10,000동)은 사이공 함락 직전에야 발행되었기 때문에 널리 유통되지 못했다. 1955년에 발행된 1,000동 지폐는 매우 희소하여 수집가들 사이에서 수억 원 가량의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8. 교육

남베트남은 학제를 12학년제로 운영했다. 독립 당시에는 프랑스식 3학기제 기반 학제가 유지되었으나, 1954년부터 패망 때까지는 미국식 학제를 따랐다. 통일 뒤에도 북베트남은 소련식 10학년제, 구 남베트남 지역은 미국식 12학년제를 한동안 유지하다가 1989년에야 현행 12학년제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남베트남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사이공 문과대학교(Trường Đại học Văn khoa Sài Gòn, 1949년 '베트남 문과대학교'로 개교)와 사이공 과학대학교(Trường Đại học Khoa học Sài Gòn, 1941년 '인도차이나 과학대학교'로 개교 후 1956년 개칭)가 있었다. 이 두 대학은 사이공 함락 이후 1977년 병합되어 호치민시 종합대학(Trường Đại học Tổng hợp Thành phố Hồ Chí Minh)이 되었다. 사이공 문과대학교는 개교 당시 불문과영문과밖에 없었으나, 1958년 무렵 철학과가 신설되는 등 점차 체계를 갖춰나갔다.

하노이 출신의 남베트남 여가수였던 카인리(Khánh Ly)는 사이공 문과대학 캠퍼스에서 후술할 찐꽁선의 곡을 공연하면서 유명해졌고, 호앙오안(Hoàng Oanh)과 응우옌응옥응안(Nguyễn Ngọc Ngạn) 등 이 대학 출신의 인기 가수들도 많았다. 사이공 문과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유일한 한국인 유학생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월남어과 제2회 졸업생 이숙자 씨로, '1847년에서 1888년까지의 천주교 박해사의 비교 연구'를 졸업 논문으로 제출한 채 1973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기 2년 전에 귀국했다.

9. 문화


태생부터 미국의 영향이 짙다보니 미국식 록 음악이 유행했다. 프랑스식 샹송의 영향을 받은 곡들도 많이 나왔다. 남베트남 특유의 서정성 짙은 노래들은 '냑방(Nhạc vàng, 樂黃, 황금빛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냑방은 베트남 통일 이후 한동안 금지곡 취급을 받다가, 서정적인 음악에 목말라하던 대중의 요구로 인해 점점 해금되었다. 남베트남의 냑방을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찐꽁선(Trịnh Công Sơn, 1939-2001)이 유명했다.

그리고 베트남 텔레비전(THVN, Truyền hình Việt Nam) 방송국에서 대중방송을 방영했으며 라디오 방송은 '라디오 사이공' 채널에서 송출되었다. 방송 초기에는 TV 송출탑이 없었기 때문에 사이공 교외 32km쯤 되는 곳에서 3,150m 상공에 헬리콥터를 띄워 송출하는 스트래토비전(stratovision, 성층권 송출)[42] 방식으로 방송했다. 또한 한국의 AFKN과 유사하게 베트남에도 주월미군이 운영하는 채널인 AFVN이 존재했다. 1972년에는 예수회에서 닥로(Dac Lo) 방송국을 개국했는데, 종교 방송보다는 교육방송 제작을 주로 했고 독립된 채널 없이 THVN9 방송국에 프로그램을 납품하기만 했다.


1973년에 개봉된 남베트남 코미디 영화 '사이공의 네 괴짜들(Tứ quái Sài Gòn)'

장편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영화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스크린 쿼터제를 실시했고 심지어 국제영화제에 진출해 수상까지 받은 경력이 있다. 남베트남 영화는 각종 새로운 예술적 기법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시도하며 호평을 받았고 그렇기에 1970년대 당시 짧은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가 붕괴되면서 짧았던 황금기는 결국 종식되었다.

수도인 사이공에서는 1960년부터 중산층이 대두하면서 서구식 생활습관과 가치관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에 비해 지방에서는 전통적인 분위기가 강해서 집집마다 한 지붕 아래 3대의 대가족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10.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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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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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국가경찰 깃발

1970년 당시 남베트남 국가경찰 모습.

베트콩들이 국가 전체에 암약하다보니 치안은 영 좋지 않았는데 그래서 도시에서 베트콩들을 소탕할 남베트남 경찰의 권력도 막강해졌다. 1962년, 응오딘지엠이 창설한 남베트남 국가경찰은 창설 초기 1만 6000명이었지만 70년대에는 13만 명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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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국가경찰 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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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오른쪽)을 즉결처형하는 국가경찰 총감독 응우옌응옥로안(왼쪽)

대한민국 경찰청처럼 사이공에 위치한 국가경찰총국(TCCSQG)이 모든 경찰 시스템을 총괄하는 구조였으며 국가경찰 총감독은 군장성이 부임하는 경우가 잦았다. 남베트남 경찰청에는 9가지의 부서가 있었다.
  • 강 및 해안 경찰
  • 교통 경찰
  • 사법 경찰
  • 특수 경찰
  • 과학 경찰
  • 경찰 의료부서
  • 행정 부서
  • VIP 경호부서
  • 현장 경찰

경찰학교에서 12주의 훈련기간을 거치거나 육군 사관학교에서 경찰 부사관으로 훈련받으면 경찰관이 될 수 있었다. 도시에서 베트콩과 틈만나면 교전하다보니 미군 군사고문단이나 호주 군사고문단이 현장 훈련을 제공할 때도 있었다.

계급은 군대식 계급을 채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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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함락 당시 남베트남 야전경찰부대원들

그리고 야전경찰 부대도 운용했는데 대한민국경찰특공대에 대응되는 부대이다. 이들은 후방에서 중무장한 베트콩들과 교전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부대이다. 독특한 위장패턴 빼면 남베트남군과 다를 바 없었으며 무장도 남베트남군과 동일한 것을 사용했다. 부대원은 총 1만 6500명에 달했다.

베트콩들 입장에선 남베트남군과 더불어 주적이었으며 그래서 경찰 공무원들이 베트콩들에 의해 테러를 당하거나 학살당하는 일이 잦았다. 적화통일 이후에는 재교육대상에 포함되어 숙청을 당했다.

12. 외교

1975년까지 전 세계 91개국과 수교했었다.

주로 제1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제2세계 국가와의 수교는 전무했다. 1957년 유엔 가입을 신청하지만 소련에 의해 거부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부를 인정한 국가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는 1973년 파리 평화 협정 이후로 사실상 폐기되어 남베트남과 수교한 일본, 프랑스 등은 월맹과도 수교했다.

12.1. 북베트남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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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미국과의 관계

말이 필요 없는 최대 우방이었다. 미국은 최대 교역국이었으며,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병사를 파병했다. 또 반공 군사동맹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를 창설해 도미노 이론에 따른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으려 애썼다. 그러나 주월미군은 남베트남군을 믿지 못해서 남베트남군과 합동작전을 하려 하지 않았으며, 남베트남 측도 자신들을 무시하는 미국과 미국의 괴뢰국이라고 선전해대는 북베트남 때문에 작전지휘권은 미국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결국 국내의 반전 시위등으로 미군은 1973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남베트남은 미국이 남겨준 무기들로 버텨보려 애썼으나, 2년 만에 사이공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통일 베트남)에 경제 제재를 가함으로써 남베트남의 복수(?)를 해주었다. 통일 베트남과는 남베트남이 멸망한 지 20년이나 지난 1995년 수교한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현재 많은 구 남베트남의 해외이주자는 대부분 미국에 거주하는 중이다. 베트남계 미국인도 구 남베트남의 국민과 그들의 후손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청사도 미국에 존재하였다.

12.3. 대한민국과의 관계

베트남 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서로가 냉전 체제하에 분단된 국가와 자본주의 진영 국가라는 점을 공유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베트남전에 파견했다. 1956년 국교를 맺었고, 미국, 대만 등과 함께 당시 주요 우방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의외로 갈등도 있었는데, 주월한국군이 미군과 마찬가지로 베트남과 베트남 공화국군을 상당히 깔보았다고 한다. 모든 군인들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남베트남군을 오합지졸 취급하는 군인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남베트남군 병사와 한국군 병사 간에 시비가 붙어서 남베트남군 병사가 빈딘성의 한국군 기지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일도 일어났을 정도다. 여담이지만 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하자 대한민국 제4공화국은 민주화 요구를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베트남 패망이라는 사건을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며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국민들도 불안해져 긴급조치 9호에도 별 저항을 하지 못했다. 현대 한국에서도 일부[43]가 베트남 공화국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월남(베트남 공화국)이 월맹(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통일했다면 베트남이 더 잘 살 수 있었고 우리 우방국으로 남아있을 거라 주장하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12.4. 대만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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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월 22일, 타이베이를 방문한 응오딘지엠 총통(좌측)과 응오딘지엠을 맞는 장제스 총통(우측)
베트남 공화국과 대만은 꽤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베트남 공화국은 중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1955년 대만과 수교했다. 대만 역시 북베트남을 인정하지 않았다. 각국의 수도인 사이공타이베이는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남베트남의 학생들이 대만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대만은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을 지원했다.[44]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기 직전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이 대만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다만 남베트남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대만에게 "배신"당한 적이 없지는 않다. 1974년 파라셀 군도 해전 때 대만 해군이 장제스의 결정으로 파라셀 군도로 증원되는 중국 함선들을 가로막기는커녕 무사히 통과시켜 준 것. 중국이 파라셀 군도를 장악한 뒤 대만이 대륙을 되찾는다면 대만의 영토가 한 뼘이라도 더 넓어지지 않겠냐는 비현실적인 망상에 가까운 생각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45]

12.5. 태국과의 관계

태국 역시 미국 주도의 베트남 전쟁에 깊숙히 개입한 국가 중 하나다. 태국은 미국과 한국의 뒤를 이어 베트남 전쟁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1964년부터 C-47 수송기와 C-123 수송기,전차상륙함,초계정을 파견하는 것으로 개입을 시작했다. 1966년부터 대대급 지상군 전투부대의 파병이 이뤄졌고 1967년부터 철수 직전까지 최대 반개 사단 11,000명으로 증강된다. 부대 명칭은 흑표범 사단[46]이었다. 전쟁 기간 내내 훌륭한 전투력과 포로에 대한 신사적인 대우를 선보이며 명성을 날렸다. 태국은 전쟁 전 기간 동안 351명의 전사자와 1,358명의 부상자를 냈다. 종전과 본국으로 철수 이후에 파병에 참여한 부대들은 태국군 제9보병사단으로 개편된다.

12.6. 프랑스와의 관계

과거의 식민지배국으로 1956년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공군 조종사들은 프랑스로 가서 교육을 이수하고 오기도 했다. 민간에서도 프랑스로 유학을 많이 갔다고 한다. 경제적인 협력 역시 작지만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자동차 대기업 시트로앵 등은 베트남 공화국에 현지 지사와 공장을 두었다. 베트남이 패망하자 일부 베트남인들은 프랑스로 망명했고, 프랑스는 미국, 호주 다음으로 많은 베트남인들을 받아 주었다.

12.7. 캄보디아와의 관계

1963년, 캄보디아가 노골적인 친공, 친월맹 성향을 보이자 단교했다가 1970년 크메르 공화국이 수립되자 재수교했다.

13. 남베트남의 해외 이주자

프랑스의 경우는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하고 있었던 관계로[47], 지금도 베트남계 혼혈들이 있으나, 프랑스를 제외한 여타 서유럽 국가들, 호주-뉴질랜드, 미국캐나다북미나 그 이외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서[48][49] 베트남계 주민이 보인다면 대다수가 남베트남 시절 넘어왔거나[50], 남베트남 패망 이후 도망쳐 어떻게든 그 지역까지 흘러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하면서 본국과의 교류는 자유로워졌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현 베트남 정부는 그들을 외국으로 도망가게 만든 1등 공신인지라 아직도 공산 베트남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에 남아있는 남베트남 시절에 넘어온 베트남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네오콘보다 훨씬 극단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51] 반대로 당시 동맹국이자 파병국인 한국에 대해서는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넷상 월남참전동지회 페이지에도 미국, 한국, 대만, 호주, 태국 등의 참전용사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거나 월남군 출신들도 심심치 않게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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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웨스트민스터 리틀 사이공, 베트남계 미국인들이 황저삼선기를 들고 행진하고있다. 원출처의 설명 " A colorful procession of South Vietnamese flags (now a symbol of the Vietnamese-American community) leads the Tet parade in “Little Saigon.”"

남베트남의 국기인 황저삼선기는 현재 베트남계 미국인의 기로서 여러 주에서 공인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된 뒤 미국에 건너온 베트남계 이주민과 베트남 공화국 패망기에 건너온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 사이에 반목도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 이주민들이 가게에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를 걸면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뭐라 하고, 현 베트남 출신 이주민들이 현 베트남의 국기인 금성홍기를 걸면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들이 비난하는 등. 다만 구 베트남 공화국 출신이 압도적으로 숫자도 많고 베트남계 미국인들 사이 권위도 더 강하다. 1990년도에 반 호치민 시위까지 일어날 정도이니.

한국 웹 사이트 일각에서 아시안 프린스의 노래라고 잘못 알려진 Heart2Exist의 Who i am/25 Years(Tôi Là Ai/25 Năm, 2002)가 바로 이러한 이민자(들의 2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래도 앞서 말했듯 남베트남 패망 후 도망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베트남계 미국인은 정치적으로 다른 아시아인들과 달리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2012년 미국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아시아계 미국인의 77%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를 뽑았지만 베트남계 미국인 사이에서는 공화당 롬니(54%) 후보의 득표율이 오바마(44%) 후보를 앞섰다. 참조. 다만 이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 베트남계 미국인들의 공화당 득표율이 70%대가 나오던 거에 비하면 꽤 내려간 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더 이상 나라도 없고, 거주하는 나라에 배경도 전혀 없는 관계로 잃을 게 없다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도 많다. 베트남계 갱들이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거나, 잔인하기로 유명한데는 이런 뒷이야기도 약간 있다.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블랙 라군의 배경이 되는 도시 로아나프라는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하여 피난온 군인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라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미국이나 프랑스같이 규모가 큰 베트남계 이민자 사회가 형성된 곳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보트 피플로서 망명해 온 구세대 이민자들과 1990년대에 서방과 베트남의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유학이나 사업 등의 이유로 정상적으로 이민을 온 전후 세대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 크다. 1990년대 이후 많은 수의 통일 베트남 출신 베트남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원래 이민자들의 도시이며 베트남계 이민자 공동체도 큰 뉴욕에 정착하였으나, 이런 저런 문제로 이전부터 뉴욕에 정착해 있던 기존 이민자 사회의 텃세 때문에 위치적으로 가까운 필라델피아로 내려가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걸쳐 필라델피아에는 상당한 규모의 베트남계 공동체가 생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통일 베트남 내부에서 남부와 북부 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지역감정이 심한 것과도 비슷한 양상이다.

14. 베트남에서의 평가

"Việt Nam Cộng hòa" đại diện cho các tầng lớp tư sản mại bản và phong kiến thân Mỹ... Bước chuyển từ "Quốc gia Việt Nam" sang "Việt Nam Cộng hòa" là bước chuyển từ làm tay sai cho thực dân Pháp sang làm tay sai cho đế quốc Mỹ.
"베트남 공화국"은 친미 봉건과 자본가 계급을 대표한다... "베트남국"에서 "베트남 공화국"으로 넘어가는 단계는 프랑스 식민지의 앞잡이에서 미제국의 앞잡이로 넘어가는 것이다.
정의는 "베트남 공화국" 체제에 속하지 않는다.[52]
과거 북베트남과 현재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공화국을 미국괴뢰 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괴뢰국까지는 몰라도 분명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는 아니었음은 명백하기 때문에 베트남 외부에서도 비슷한 평가가 많다. 베트남 전쟁도 내전이 아닌 미국의 침략 전쟁이라고 보는데,[53][54] 따라서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정부고, 황저삼선기는 매국노의 깃발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베트남인들이 황저삼선기만 보면 부정적이고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현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황저삼선기의 게양은 금지되며 게양할 경우 공안에 연행되어 처벌된다. 당장 아래 문단에서도 보듯 베트남 공화국을 계승한 국가 전복 또는 분리주의 세력, 베트남 공화국 부흥운동 세력들도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공화국은 베트남인 입장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이니 베트남인 앞에서 베트남 공화국을 언급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유튜브에 베트남어로 Việt Nam Cộng Hòa라고 검색하면 관련 영상들이 나오는데, 싫어요 수가 표시되지 않도록 개편되기 전에는 싫어요 비율이 굉장히 높았다.[55] 사실 공식적인 역사관에 기대지 않더라도 남베트남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극도로 문제가 많고 자주적이지 못한 국가였기 때문에 인상이 좋지 못한 게 당연하다.

베트남 공화국군이 매장된 비엔호아 국립묘지는 공산화 이후 군사 구역으로 지정되어 출입을 통제하며 묘지를 방치하였으나[56], 2006년부터 출입을 허용하였고 유족들에 의해 이장되거나 보수되고 있다.

그렇다고 베트남 민주화 인사들도 무조건 베트남 공화국을 좋게 보는 것도 아니다.[57] 이들은 호치민 살아생전의 그나마 민주적인 느낌이 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 국호로 회귀한 하에서 자생적인 민주화를 원하지 베트남 공화국의 체제 회복 및 정치적 복권을 원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2009년 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베트남 민주화 운동인 No-U 운동에서 시위자들이 황저삼선기가 아닌 금성홍기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즉 현 베트남의 틀은 유지하되 일당독재만 끝내자는 것이며 이들도 베트남 공화국을 현 공산독재와 다를 바 없었다고 평가한다.

베트남인들도 베트남 공화국 편을 들때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파라셀 제도 분쟁이다. 현 베트남은 남베트남 측 문서들을 근거로 파라셀 제도가 역사적으로 자국 영토임을 강조하며, 1974년 중국 측의 점령을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점령 당시인 1974년에도 베트남 민주 공화국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우려했으며,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베트콩) 측에서도 중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5. 망명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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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역대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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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residential_Standard_of_South_Vietnam_(1955–1963).svg.png 파일:Presidential_Standard_of_South_Vietnam_(1963–1975).svg.png
베트남 공화국 총통기[58]
파일:Seal_of_the_President_of_the_Republic_of_Vietnam_(1963–1975)_(Gold).svg.png
베트남 공화국 총통 문장
사진 이름 원어명 정당 임기
1 파일:attachment/응오딘지엠/ngo_dinh_diem.png 응오딘지엠 Ngô Ðình Diệm 근로인격혁명당 1955년 10월 26일 - 1963년 11월 2일
군인혁명회의 주석 파일:ID_28530-front_politics_1973.jpg.jpg 즈엉반민 Dương Văn Minh 1963년 11월 2일 - 1964년 1월 30일
파일:응우옌카인.jpg 응우옌카인 Nguyên Khánh 1964년 1월 30일 - 1964년 2월 8일
파일:ID_28530-front_politics_1973.jpg.jpg 즈엉반민 Dương Văn Minh 1964년 2월 8일 - 1964년 8월 16일
파일:응우옌카인.jpg 응우옌카인 Nguyên Khánh 1964년 8월 16일 - 1964년 8월 27일
임시영도위원회 주석 즈엉반민, 응우옌카인, 쩐티인키엠[59] Dương Văn Minh, Nguyên Khánh, Trần Thiện Khiêm 1964년 8월 27일 - 1964년 9월 8일
국가고위급회의 주석 파일:ID_28530-front_politics_1973.jpg.jpg 즈엉반민 Dương Văn Minh 1964년 9월 8일 - 1964년 10월 24일
판칵스우 Phan Khắc Sửu 무소속 1964년 10월 24일 - 1965년 6월 14일
국가영도위원회 주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guy%E1%BB%85n_V%C4%83n_Thi%E1%BB%87u.jpg 응우옌반티에우 Nguyễn Văn Thiệ 1965년 6월 14일 - 1967년 9월 3일
2대 국가민주전선 1967년 9월 3일 - 1975년 4월 21일
3대 파일:쩐반흐엉.png 쩐반흐엉 Trần Văn Hương 무소속 1975년 4월 21일 - 1975년 4월 28일
4대 파일:ID_28530-front_politics_1973.jpg.jpg 즈엉반민 Dương Văn Minh 1975년 4월 28일 - 1975년 4월 30일

17. 관련 문서


[1] 지금은 호찌민 시로 변경되었으나 아직까지도 베트남내에서는 사이공으로 불리고 있다.[2] 공식적으로는 베트남어인데 사회 지도층 사이에서는 프랑스어가 광범위하게 쓰였고 교육에서도 프랑스어가 많이 쓰였다.[3] 1975년의 수치로, 한창 잘 나간 시절인 1960년대에는 118달러까지 찍었으나 결국 계속된 전쟁으로 떨어진다.[4] 베트남어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로 분류되는 데 반해, 참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로 분류된다.[5] 현대 베트남 남북 분단 시기의 북위 17도선보다 좀 더 북쪽에서 대치했다. 하띵성과 꽝빙성의 경계가 당시 두 세력의 대략적인 경계.[6] 수도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약 100㎞에 위치한 항구로, 최단진격거리에 상륙한 셈이다.[7] 더불어 이 회담에선 한국 전쟁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논의도 벌어졌다.[8] 이후 본 문서의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뀜[9] 하띵성과 꽝빙성의 경계와 거의 동일하다. 옛 대월이 북쪽의 정씨 세력과 남쪽의 완씨 세력으로 나뉘었을 때 두 세력의 경계와 이와 거의 동일했다.[10] 13도선의 경우 남베트남은 코친차이나와 안남 최남부 일대만 남으면서 남북간의 국력 차가 너무 커지게 된다.[11] 투아티엔 성과 꽝남 성의 경계와 거의 동일하다. 이 방안대로라면 완조의 고도 후에는 북베트남령이 되며 다낭은 재수없게도 16도선이 도심을 정확히 관통하기 때문에 둘로 분단된다.[12] 당연한 것이, 이 당시 남베트남은 아프간의 북부동맹처럼 수많은 세력들이 반공/반 베트민의 기치 아래에 집결해있는 나라였고, 애초에 이들이 반공성향이 된 것이 베트남 공산당의 폭력과 배신 때문이었다. 30~40년대에 공산당의 탄압에 치를 떨다가 내려온 국민당 같은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근로인위혁명당의 우두머리 응오딘지엠과 응오딘뉴는 친형이 베트민에게 살해당했다.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는 46~47년경에 자신들의 교주나 군사 지도자가 베트민에게 배신당해 납치당하거나 살해당한 뒤 반공주의로 돌아섰다.[13] 물론 그렇게까지 잘 살지는 못하였다.[14] 공무원 부패 문제 해결을 위해 뇌물 없이도 부유히 살 수 있게끔 월급을 올리고, 부패한 공무원은 엄하게 처벌하는 당근과 채찍을 썼다.[15] 훗날 베트콩이 설치면서 흔히들 치안이 굉장히 안 좋은 나라 정도로 인식하지만 디엠 집권 시기 한정으로 치안은 상당히 괜찮았다. 수도 사이공에서는 담이 낮아도 도둑 들 걱정이 없을 정도로. 위의 공무원 부패 문제 각주와 함께 출처는 '나라를 빼앗긴 군대의 비망록-월남군,그들의 이야기'[16] 응오딘지엠 본인도 북베트남령인 안남 지방 꽝빈 성 출생이었다.[17] 당시 남베트남의 종교 비중은 불교 신자가 90% 이상이었다.[18] 후일 사이공 함락 당시의 마지막 총통이었다. 위의 사건 이후 불과 11년 반 후의 일.[19] 베트남 제2공화국 시절에는 이 쿠데타를 63.11.1 혁명(Cách mạng 1-11-63)이라고 불렀다고 한다.[20] 단적으로 17년 가을 현재 방영중인 켄 번즈의 베트남전 다큐멘터리만 봐도 미국측 내에서도 이런 비관적인 육성 증언들을 많이 들을 수 있고, 전임자들이 키워놓은 판을 패배자처럼 포기할 수 없다는 존슨 행정부의 부담감은 결국 전면 개입으로 이어졌다.[21] 응오딘지엠 정권 때만 해도 농업투자로 쌀 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외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해 대단위 유리 공업 육성과 대단위 고무 공업 육성,직물 공업 육성,수산물 수출 등의 경제정책이 진행중이었지만 쿠데타로 인한 혼란과 전쟁으로 사실상 물거품이 되어버렸다.[22] 결국 18사단을 이끌었던 살아남은 지휘관들은 전쟁후 숙청당했고 전투 후 포로로 붙잡혔던 장병들은 모조리 재교육수용소에 들어가야했다.[23] 적군이 눈에 보이면 쏘라고 할 지경이었다.[24]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군도 이런 식으로 주요거점을 중심으로 재배치를 감행하다가 마오쩌둥의 공산군에게 각개격파당하고 결국 장제스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쫓겨났는데 남베트남이 똑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다.[25] 1960년대 군사정부 수반을 역임한 즈엉반민 맞다.[26] 아이러니하게도 46년 뒤 중동에서 미국에게 지원받은 또 다른 친미 국가에게 똑같은일이 벌어지게 된다, 둘 다 미국에게 수없이 많은 지원을 받았으나 점점 나아지기는 커녕 악화되는 상황과 부패한 정권 답없는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이 빠지자 마자 똑같이 1달만에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27] 이런 물가안정조치들의 1차 목표는 체제 유지의 근간인 공무원들이 국가 월급만 가지고 국정가격으로 식량을 수급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러다보니 화폐개혁을 하면서도 시장가를 인정하지 않고 국정가격은 계속 묶어두는 모순적인 행동이 이어졌고 당연히 현물은 국가수매를 외면하고 죄다 암시장으로 흘러가면서 시장가만 높아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28] 이런 흐름 때문에 일부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해외 거주 남베트남 이주자들이 현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경제 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29] 1963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응오딘지엠 정권을 전복시킨 인물이기도 하다.[30] 당시까지는 반공교육이 정식으로 도덕 교과에 포함되어 있었다. 반공교육은 1990년대 초~중반쯤에 끝났다.[31] 정확히 말하자면 총통의 부정부패와 권위주의가 심했었다.[32] 물론 국가사회민주전선은 빅텐트 정당이고, 베트남 민주사회당은 호아하오교의 정당이었기에 실제 성향은 꽤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33] 정치동맹이었던 중국 국민당이 보수주의 정당으로 분류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34] 냉전 시절 대한민국, 대만 등 반공 국가에서도 공산주의 규제에 관련한 법을 제정했을지 몰라도, 헌법에서까지 반공주의를 명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35] 제1공화국 시절에는 2회 연임이 가능했고, 제2공화국 시절에는 1회 연임이 가능했다.[36] 부총통도 동시기 총통과 임기가 같았다.[37] 상원의원은 3년마다 의원의 절반을 선출하는 식으로 선거를 진행하였다.[38] 이들 중 베트남 국민당의 경우, 1927년 옌바이 봉기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45년 하노이로 돌아왔으나 공산당과의 세력다툼에서 패해 사이공으로 망명, 그러다가 75년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무려 3차례의 망명이다! 해외 망명만 따져도 두번이었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 패망 1년 전의 1인당 GDP는 북베트남과 같은 65달러였다. 즉 북폭을 맞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안정된 북베트남과 국토 전역이 전쟁으로 뒤집어진 남베트남의 소득이 동급이었다는 것이다.[40] 남베트남인들의 생활 수준은 비교도 못할 정도로 북베트남인보다 풍요로웠다. 아오자이와 양복들을 입고 다니던 남베트남인과 달리 북베트남인들은 그 정도의 의류 문화를 지닐 여유가 없었다. 육류 소비는 물론이고 TV,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 보급율도 남베트남인이 압도적이었다.[41] 라 달랏 모터스 (La Dalat Motors)라는 이름으로 응오딘지엠 정권 당시 창사되었다. 모체는 시트로앵 사의 베트남 지부.[42] 이러한 송출 방식은 미국에서 개발한 것으로, 미국 국내에서 격오지에 교육방송을 송출하거나, 이라크 전쟁 중에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용도로 운영했다.[43] 대부분 기성세대나 반공 성향이 강한 우파다.[44] 파병까지 하려 했으나 남베트남 측이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는 아무리 베트남 공화국과 대만이 같은 반공 진영에 속해 있어도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대만의 국민감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중에 대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수의 대만군이 참전한다. 운전병 등이 소수 파병되었다. 이들은 개구리 병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45] 장제스의 희망대로 대만이 대륙을 되찾고 파라셀 군도까지 장악하는 일은 거의 47년 뒤인 2021년에 이르기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결정은 그 이전까지 서로를 철저하게 불신하던 양안간의 상호 신뢰 구축에는 도움이 되었다.[46] The Black Panther Division.[47] 모두가 식민지 시절 이주한 건 아니고, 남베트남 시절에도 자주 이주했으며, 패망 당시에도 많은 난민을 받아들였다.[48] 보트피플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홍콩이었다. 홍콩 식민정부는 1979년 베트남계 난민을 정식 수용하고 이들을 구룡성채 내의 난민촌으로 보낸다. 물론 구룡성채도 상태가 안 좋은 곳이었지만 최소 굶어죽진 않았고, 성채 해체 후에는 밖으로 나와 2세 이상은 홍콩화되었다. 태국에는 캄보디아를 거쳐 육로로 도망간 피난민도 많이 건너가 파타야나 라용 주 등에 정착했다. 월남전 당시 독립한 싱가포르는 인구 부족 해결 목적으로 베트남 난민을 정식으로 받아 들이며 이 인연으로 현재도 싱가포르는 베트남과 교류가 많은 편이다.[49] 물론 비단 홍콩이나 마카오로만 온 건 아니고 중국 대륙으로 온 보트피플도 상당수 있었기는 했으며 육로로 추방된 사람도 있다. 다만 이들 중 대부분은 베트남에서 대대로 거주하던 화교들인데 베트남의 화교 탄압 정책과 중월전쟁으로 인해 추방된 케이스다. 물론 일부 순혈 베트남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에 관대한 중도 성향이지만 모종의 이유(예를 들어 친중 성향이거나 완전한 친중은 아니지만 화교들과 친분이 있다든가, 혹은 북베트남 주도의 베트남 통일에는 찬성하지만 남베트남 유민들을 지나치게 탄압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경우)로 베트남 공산당의 비위에 거슬리게 된 케이스다.[50] 단, 동유럽(20세기 후반에 공산주의국가였던 유럽국가들)이나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들 그리고 쿠바라면 해당되지 않는다. 구 공산권인 해당 국가들에 거주하는 베트남계 주민 대다수가 북베트남에서 해당 국가들로 돈 좀 벌려 일하러 들어왔다가 정착한 이들이 대다수라 현 베트남 정부와는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기 때문이다. 한편 냉전시기에 공산권이었던 곳에는 동독이 포함되며, 그래서 독일 통일 후에 서독의 남베트남계 거주민과 동독의 북베트남계 거주민 사이에서 갈등이 꽤 심했다고 한다.[51] 예를 들어 현재 베트남 공화국은 경제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52] 베트남 국영방송국인 베트남의 소리에서 나온 논평이다.[53] 베트남 전쟁은 형식적으로는 미국의 침략 전쟁은 아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정당하지 못한 명분으로 개입한 내전이라서 사실상 미국의 침략 전쟁이라고 보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다수였다. 다만 2010년대 이후 동아시아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유행하는 신보수주의와 역사 수정주의 탓에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54] 베트남인들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을 침략군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한국은 미국을 따라서 미국의 괴뢰 정부 남베트남을 지원한 것이기 때문이다.[55] 그나마 베트남 공화국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영상은 싫어요가 적었는데, 베트남계 미국인들이 황저삼선기를 들고 있는 영상에서는 싫어요 비율이 아주 높았다.[56] 묘지 밖에는 "범죄의 대가를 치른 미국의 괴뢰군이 이곳에 누워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57] 공산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반공 계열 민주화 인사들은 베트남 공화국을 좋게 보는 경우도 있다.[58] 왼쪽은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쓰인 기이고, 오른쪽은 1963년부터 1975년까지 쓰인 기이다. 왼쪽의 문구는 유교의 영향을 짙게 받은 인물이었던 응오딘지엠이 넣은 것으로, 한자성어 절직심허(節直心虛, 마디는 곧고 마음은 비었다)가 어원이다. 대나무처럼 올바르고 사심이 없음을 뜻한다. 남베트남 총통직을 거쳐간 인사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역설적이다.[59] 3명이 국가원수인 삼두정치 체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