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04:47:37

프랑스령 알제리

알제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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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알제리
Algérie française
الجزائر المستعمرة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파일:150px-Seal_of_the_Government-General_of_Algeria.svg.png
국기총독 휘장
1830년 7월 5일 ~ 1962년 7월 5일
성립 이전독립 이후
오스만령 알제리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지위 식민지(1830~1848)
프랑스 본토의 일부(1848~1962)
위치 알제리
수도 알제
면적 2,381,741㎢
인구 3,000,000명(1830년)
10,920,000명(1962년)
정치체제 왕정(1830~1848)
공화제(1848~1852, 1870~1962)
제정(1852~1870)
국가원수 (1830~1848)
대통령(1848~1852, 1870~1962)
황제(1852~1870)
정부수반 주지사
통화 알제리 프랑
언어 프랑스어(공용어), 아랍어

1. 개요2. 지위3. 역사
3.1. 알제리 점령3.2. 지배와 개발 및 토착민 차별3.3. 비시 프랑스 시절3.4. 독립전쟁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알제리. 1830년부터 1962년까지 존속했다.

2. 지위

원주민의 대우는 여타 식민지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알제리만큼은 지배 기간 내내 본토의 일부로 취급하였는데 실제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에 프랑스 본토의 행정구역과 동일한 데파르트망을 설치했고 데파르트망 지사를 파견하여 알제리 지역을 관할했다. 이는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프랑스의 다른 식민지들에서 정부로부터 자치를 위임받은 총독이 실권을 쥐었던 것과 크게 다르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본토로 편입한 이유는 지중해만 건너면 바로 도달할 수 있는 프랑스 본토와 가장 가까운 식민지였던 데다 프랑스 본토와 지리적 환경이 유사하고 각종 자원이 풍부하여 개발 가치가 높은 땅이었을 뿐더러 공식적인 영토가 될 경우 프랑스-알제리 사이의 해역, 즉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길목을 프랑스가 완전히 장악하는 이점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또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삼기 적절하였는데 실제로 프랑스군의 주요 군항과 군수물자 공장들이 위치했으며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 역시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만큼 지정학적 가치가 매우 높았고 또한 유럽과도 가까워 당대 프랑스인들에게도 알제리는 프랑스의 적법한(?) 본토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근시점인 1960년대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프랑스의 집착은 다른 식민지의 독립 과정보다 알제리 전쟁이 훨씬 더 잔인하고 폭압적인 형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의 일부였으므로 알제리의 유권자는 프랑스 국민의회에도 진출할 수 있었지만 당시 프랑스는 시민권자인 프랑스계와 기타 유럽계(피에 누아르), 세파르딤 유대인들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었고 아랍계 알제리인들에게는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레옹 블룸 총리 시절에 연정에 참여했던 공산당사회당의 요구로 알제리 아랍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지배민족의 지위를 잃을 것을 두려워한 피에 누아르들의 극심한 반대에 급진당 의원들이 휘둘리면서 결국 좌초되었고[1] 이전부터 개종을 해야 시민권을 준다는 타협안이 제시되었지만 이에 호응한 아랍계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 본토인 대접받은 사람은 꽤 있었고 이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은데 애니메이션 영화파리의 딜릴리가 대표적이다.

3. 역사

3.1. 알제리 점령

알제리 일대는 이슬람화 직후부터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1516년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오스만 치하에서는 명목상의 총독이 있었지만 상당부분 자치적인 형태를 띄었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했을 때는 바르바리 해적들이 지중해에서 대놓고 노략질을 일삼으며 나름 세력을 떨쳤지만,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먹구름이 꼈다.

이를 틈타 서구 열강들은 유럽 본토를 괴롭히던 바르바리 해적을 공격해 쫓아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 왕국의 국왕 샤를 10세는 아예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는 북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당시 오스만 제국의 알자자이르 총독 후세인 이븐 파샤가 자신을 능멸한 프랑스 외교관 피에르 디발(Pierre Deval)의 뺨을 파리채로 때린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후세인 이븐 파샤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이것이 거절당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 왕국은 군대를 보내 알자자이르를 점령했고 후세인 이븐 파샤는 항복했다. 이로서 바르바리 해적은 완전히 토벌되었고 프랑스는 복아프리카 서부 지중해 해안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주요 도시인 '알자자이르'의 프랑스어명 '알제'를 따 '알제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통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제리 정복을 주도한 샤를 10세는 프랑스군의 주력 상당수가 알제리로 가 있는 틈을 타 프랑스 본국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왕 자리에서 쫓겨났다. 새로 등장한 7월 왕정 초반 샤를 10세가 주도한 프랑스령 알제리의 통치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결국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초기에는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출발한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식민 지배 기간 내내 계속되었는데 모로코 왕국, 베르베르인, 투아레그인 등 내륙의 유목민들을 물리치면서 사하라 사막 방면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1936년에 현재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3.2. 지배와 개발 및 토착민 차별

식민 통치를 하면서 알제리 북부 해안지대가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와 유사한 자연환경[2]을 가졌음을 파악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를 제2의 프랑스로 만들어 영구히 지배하겠다는 계획으로 강력한 프랑스화 정책을 추진했다. 알제리 내륙이 건조하고 척박한 것과 다르게 해안지대는 겨울에 춥지도 않으면서 여름에는 지나치게 덥지도 않고 비가 적당히 와서 토질이 비옥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화에 발맞춰 수많은 유럽인[3]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대거 알제리로 이주했는데 식민 통치가 끝날 무렵인 1950년대 말 이들 유럽계 이주민들의 수는 알제리 인구 1,000만 중 100만 명 이상이었다. 중세부터 알제리에 거주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잽싸게 프랑스 식민통치의 지지자가 되었다.[4] 알제오랑 등의 알제리의 주요 도시들은 유럽 도시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는데 당시 이주해 온 유럽인들이 이 도시들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검은 발이라는 뜻의 피에 누아르(Pied-Noir)라 불리며 식민 지배 시기 알제리 사회에서의 기득권을 독차지했다.

피에 누아르들은 사막에 물을 끌어올려 개간해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녹림과 밭으로 만들었고 포도 등을 재배해 프랑스에 수출하여 많은 이득을 얻었다. 수출용 제조 공장들도 다수 있었다.

알제리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프랑스 공군, 육군, 해군의 주요 군항과 많은 군수물자 공장들도 알제리에 있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외인부대가 여기서 시작했고 이 최정예 부대의 본거지였다.

물론 현지 토착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은 차별받았다. 현지인들은 유럽계 이주민보다 높은 세금을 내야 했고 알제리의 유럽계 이주민들은 현지인들을 열등하고 나태한 민족으로 보았으며 '쥐새끼'라고 부르면서 공공연히 경멸했다. 프랑스 지배 이전 현지인들은 부족 단위로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프랑스는 현지에서 사유재산권을 확립하면서 공유재산인 부족 재산의 처분에 대해 제약을 가했고 이런저런 구실로(주로 프랑스 통치에 반항했다는 이유) 현지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유럽계 이주민에게 매각했다. 공업에 있어서도 프랑스 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알제리를 산업의 원료가 될 자원의 공급지와 자신들의 공업 상품을 팔아줄 시장으로 두었으며 이를 위해 현지인들이 공업 자본가가 되는 것을 방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맞서기 위해 알제리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했는데 이때 28만 명 정도의 알제리인들이 프랑스군에 징병되어 참전했고 약 8만 명 정도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많은 수의 알제리인들은 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알제리는 많은 인력을 희생하고 물자를 제공했지만 하지만 전후 프랑스 본국은 알제리에 대한 푸대접을 이어갔다.

프랑스 극우 진영과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 일부 우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근대화하여 알제리인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나아졌다고 주장하지만 프랑스의 인프라 투자는 피에 누아르들이 대거 정착한 식민도시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작 알제리 현지인들은 비옥한 해안가의 옥토들을 빼앗기고 추방당한 뒤 내륙의 척박한 토지를 경작해야 했다. 피에 누아르들의 소득이 계속 증가하던 것과는 반대로 알제리 현지인들의 소득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계속 감소했으며 피에 누아르들에게만 평등 교육이 진행되고 무슬림들을 일부러 학교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등 차별적인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알제리 독립 이후에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엘리트 대우를 받거나 교사를 할 수 있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등 알제리 토착민들이 차별받자 토착민들은 '알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을 각성해 알제리 민족국가, 즉 독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실 프랑스 점령 이전까지는 같은 알제리 지역에 살아도 '알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이 희미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자체적인 국가가 있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알제리 전역을 확고하게 통일한 왕조가 없었다. 15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명목상으로 알제리 전역을 통치했지만 중앙집권적인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고 지역 유력자들을 명목상 태수로 임명해 자치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했다.

3.3. 비시 프랑스 시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본국은 나치 독일무력하게 점령당해 비시 프랑스 정부가 들어섰으며 샤를 드골 등의 주전파는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 정부를 세웠다. 프랑스령 알제리는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비시 프랑스를 따랐다.

그러나 1943년에 연합군지중해 전선을 안정시키고 이탈리아를 위협하기 위해 횃불 작전을 벌여 알제리를 공격했고 연합군은 비시 프랑스군 내 일부 자유 프랑스 내통자들의 협력을 얻어 알제리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제리는 자유 프랑스 및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하기 이전까지 자유 프랑스의 거점이 되었다.

3.4. 독립전쟁

그러나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것, 그리고 자유 프랑스가 알제리를 되찾고 나서 알제리에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통치를 이어가면서 알제리인들의 독립 열망에 다시 불이 붙었다. 자유 프랑스군에는 알제리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프랑스를 위해 독일군과 싸웠지만 정작 그들이 알제리에서 본 것은 독립 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탄압받고 학살당하는 동포들이었다.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그리고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등 다른 식민지들은 다 내주더라도 본토로 여겼던 알제리만큼은 내주지 않으려 했다. 알제리 독립 시위대를 탄압한 것을 계기로 독립 열기가 높아지자 프랑스는 독립 대신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는데 알제리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유럽계 피에 누아르와 나머지 알제리 현지인에게 같은 숫자의 의석이 배당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했으며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일단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에 숨죽여 지냈다. 그러나 2차 대전에서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알제리인들이 속속 알제리로 들어오고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북베트남군에 추하게 패배하자 알제리인들은 참전자들을 중심으로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해 8년간 프랑스와 격렬한 알제리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군은 FLN에 대해 군사적으로 내내 우위를 점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알제리인 학살과 탈식민주의 바람 등으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국제 여론은 점점 악화되었는데 특히 튀니지[5]와 아랍 국가들, 소련이 연일 프랑스를 비난하면서 알제리 독립에 힘을 보탰고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프랑스군도 67만 대군 중 9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면서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 억지로 징집되어 싸우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알제리에서 똑같이 전쟁을 치르면서 징병 기피자들만 늘어갔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수에즈 전쟁까지 벌여 결국 1958년에 프랑스 제4공화국이 무너지고 샤를 드골개헌을 통해 신임 프랑스 대통령이 되면서 알제리에 대한 독립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권을 잡은 드골 정부는 알제리에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의 세 가지 제안을 내놓았고 알제리 독립세력은 이에 3번안을 선택하여 1962년 에비앙 협정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

독립 과정과 그 직후 프랑스군에 복무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싸운 알제리인(Harki/아르키)들은 보복으로 학살당하거나 프랑스 본토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은 상당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정착해서 좀도둑이나 막노동일에 종사하며 빈민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피에 누아르들도 보복을 당해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은 아르키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으나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피난오는 과정에서 파산한 사람들이 많기는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알제리에서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는 프랑스 본토로 피난 온 후에 명목상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1]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배하던 시절은 프랑스 본토에서조차 여성참정권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2] 실제로 알제리의 이웃국가인 튀니지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빈번해지기 전인 2013년 무렵까지도 프랑스인들이 휴가철마다 즐겨찾던 휴양지였다.[3] 많은 수가 프랑스 혈통이었지만 스페인, 몰타 등의 혈통도 있었다.[4] 오늘날 프랑스 유대인의 상당수는 세파르딤 유대인이며 프랑스 세파르딤 유대인의 과반수가 바로 알제리 독립 이후 프랑스로 건너온 알제리 출신이다. 프랑스 유대인은 원래 아슈케나지가 다수였으나 홀로코스트로 인해 수가 크게 줄었다.[5] 이때 튀니지가 독립을 지지한 것 덕분에 지금도 알제리와 튀니지는 이웃나라치고 이례적으로 사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