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 프랑스에 대한 내용은 보나파르트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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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년 ~ 1980년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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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 ||
시리아 | ||
인도 [[푸두체리| 푸두체리 ]] | ||
위치 | 전 세계 | |
수도 | 파리 | |
국가원수 | 국왕 (1534 ~ 1792, 1815 ~ 1848) 국민공회 의장 (1792 ~ 1795) 총재 (1795 ~ 1799) 통령 (1799 ~ 1804) 황제 (1804 ~ 1815, 1852 ~ 1870) 대통령 (1848 ~ 1852, 1870 ~ 1980) | |
언어 | 프랑스어 | |
통화 | 프랑 | |
면적 | 12,898,000km²(1936년)[2] 23,500,000Km²[3] | |
인구 | 110,600,000명(1936년)[4] |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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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식민제국을 가리킨다. 이 명칭은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쓴 명칭은 아니며 식민지로 세워진 이때의 시기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용어라고 봄이 옳다. 프랑스는 캐나다 퀘벡주 가스페(Gaspé) 만에 프랑스 깃발을 꽂은 1534년을 프랑스 식민제국의 시작으로 본다.19세기 이전까지는 영국의 역사적 라이벌이였고 그 이후로는 대영제국에 보조를 하여 세계적인 제국주의적 팽창을 진행하였다.[5][6]
프랑스는 곧잘 영국의 라이벌처럼 여겨지지만 식민제국의 규모에서 격차가 컸다. 19세기 영국은 독자적으로 거대한 시장이 되는 인도제국을 식민지화하여 유럽 전체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스케일의 세계제국을 형성하고 영토적으로도 스페인, 포르투갈의 남아메리카 신대륙 개척 및 러시아 시베리아 개척에 버금가는 북미대륙과 호주대륙 등 엄청난 영역적 대외 팽창을 진행하여 전 세계 해상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바다를 지배해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과 세계적 무역질서를 구성한 반면, 프랑스는 대외 식민지 측면에선 영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보조를 하며 아프리카의 일부 식민지, 중동 지역 수에즈 운하 ,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등 영국의 세력권의 남는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영국의 유럽 대륙 내에서의 영향력은 대륙국가인 프랑스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경쟁했으나 큰 무력 충돌은 없었고 오히려 이해관계에 따라 러시아와 독일의 패권을 저지하기 위해 연합하기도 했다. 한편 두 식민제국 모두 본토의 생산력은 열강 중에서도 월등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1871년 독일 통일 후 독일 본토의 생산력 대비에 비하자면 영국은 70%, 프랑스는 50%에 불과했다.
왕정 시절에는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인도, 세네갈 등 여러 지역에 손을 뻗었지만, 7년 전쟁으로 영국에게 인도와 캐나다를 내주고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에 양도하여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나폴레옹 시절에 루이지애나를 되찾긴 하였으나 관리상의 문제로 미국에게 매각했고 가장 알짜배기 식민지였던 아이티도 독립해 나가면서 왕정 복고 시에는 카리브 해의 몇몇 섬과 기아나, 세네갈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를 '1차 식민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는 식민제국 건설을 위한 식민지 확보에 다시 나섰다. 프랑스는 일부 해안 거점 외에는 유럽 국가들이 발을 들이지 못한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고 왕정 복고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 제2제국, 제3공화국 모두 적극적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섰다. 그 결과 1830년 알제리 정복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마그레브 지역)과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인도차이나 반도), 남태평양 일대를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를 '2차 식민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대부분은 2차 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프랑스와 독립 전쟁을 치른 끝에 독립할 수 있었으며, 이때 점령한 지역 중 아직까지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는 곳도 있다. 프랑스령 기아나나 누벨칼레도니, 생피에르 미클롱, 마요트, 레위니옹 등이 대표적.
현재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등에서 프랑스어는 극소수만 쓰이지만, 벨기에 식민제국과 더불어 프랑스 식민제국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및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아직까지도 프랑스어가 폭넓게 쓰이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나 퀘벡에 비해 동남아 지역이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명을 형성해왔기 때문이다.
2. 프랑스 제1식민제국(1534년 ~ 18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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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확보했던 북미 식민지. 면적- 대략 8,100,000Km²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한 것은 1604년의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였다. 누벨 프랑스는 동쪽으로는 뉴펀들랜드, 서쪽으로는 로키산맥, 남쪽으로는 멕시코 만, 북쪽으로는 허드슨만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자랑했으며 이밖에도 프랑스령 기아나(1624), 과들루프(1626)와 마르티니크(1635), 아이티(1665), 인도 해안 일부(17세기 후반), 세네갈(18세기 후반) 등을 정복하며 프랑스는 거의 영국과 맞먹는 판도를 지녔다.
식민지인들의 자치가 허용되었던 영국 식민지와는 달리 프랑스 식민지는 프랑스 군주의 관할에 있었고 설탕 플랜테이션 및 모피 무역을 토대로 세워졌다. 또한 프랑스 본국에서 선택한 정착민들만 이주가 가능했기에 인구 수는 영국 식민지보다 비교적 적었다.[7][8] 물론 프랑스의 본토 인구는 1500년에 이미 15,000,000명이었고 1685년에 21,500,000명이나 되어서 본토 인구와 별개로 식민지 개척도 순위권에 들어가는 국가였지만 어디까지나 프랑스 정도 되는 규모에 비해서 그렇기는 하다.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1600년에 이미 220,000명이었고 1685년에 510,000명이어서 국력을 집중해서 해외에 투입하기도 충분했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결과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허드슨 만과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를 영국에 넘겨주면서 세력이 위축되더니 7년 전쟁에서 패배, 영국에게 퀘벡, 아카디아, 미시시피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스페인에게는 루이지애나를 넘겨주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날려 먹었다.
프랑스 혁명은 두 가지 의미에서 결정타였다. 하나는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 및 국내의 혼란으로 프랑스가 정신이 없는 사이 영국이 7년 전쟁 시즌 2를 찍으면서 그나마 남은 프랑스의 모든 식민지들을 마음놓고 털어버릴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대단히 아이러니한데, 프랑스의 식민지에도 전파된 자유와 평등 사상이 식민제국을 더 빨리 허물어트렸다.(...) 가장 알짜배기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흑백평등을 내세운 흑인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1804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독립국가를 세운 것이다!(아이티 혁명)[9]
또한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으로부터 돌려받기는 했으나 제대로 경영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중근동 일대의 정복을 노리던 이집트 원정도 실패로 돌아가자, 나폴레옹은 그 즉시 식민지들을 대부분 정리하고 본토인 프랑스에 더 신경을 썼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으로부터 루이지애나의 광대한 땅을 돌려받은지 3년 만에 미국에게 팔아넘긴 것도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미국에게 안 팔고 그대로 가졌어도 나폴레옹 본인의 몰락으로 그 땅은 영국이나 스페인에게 넘어갔을 것이 확실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에게 남은 식민지는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를 위시로 한 카리브 해의 섬 몇개, 기아나와 세네갈밖에 없었다.
3. 프랑스 제2식민제국(1830년 ~ 1980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는 다시 한 번 식민지 확장에 나섰다. 1830년 샤를 10세의 알제리 침략과 선교사 보호를 명분삼은 베트남 개입을 시작으로 나폴레옹 3세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남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와 폴리네시아를 확보하고(1853)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를 확보하였다(1862). 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운동에 개입한 것도, 병인양요(1866)도 이때의 일이다.본격적인 시작이 나폴레옹 3세 때였다면 가장 왕성한 확장은 제3공화국 때였다. 당시 프랑스의 본토 인구는 1870년에 38,400,000명이었고 1910년에 41,500,000명이었기 때문에 개척에 나서기에도 충분했고 원래부터 해외로 투입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유럽 열강들이 지들 딴에는 신세계인 아프리카로 달려들 때 프랑스도 역시 달려들었으며 1884년 베를린 회담을 기점으로 아프리카 내륙을 향해 쭉쭉 뻗어나갔고 코친차이나를 넘어서 메콩 강 동쪽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전체를 확보하였다.(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그렇게 프랑스는 다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복귀했다.
다만 이때의 식민제국은 영국과 경쟁하지 않고 협력하며 빈자리를 나눠먹는 게 특징이다. 또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본토의 인력을 식민지로 투사하는 현상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는데 이는 프랑스 본토의 인구 증가가 정체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투입할 인력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1920년대 이후로 상황이 반전되지만.
그리고 서아프리카와 지부티에서 점차 파고들어간 횡단정책이 시행되었다. 이것이 영국의 종단정책과 부딪혀 1898년 오늘날의 남수단에서 벌어진 파쇼다 사건도 정치적 및 군사적 상황에서 불리했던 프랑스가 양보해 쉽게 해결되면서 영국의 종단정책을 인정하는 대신 서아프리카의 점유를 인정받았으며,(프랑스령 서아프리카) 태국은 영국령 미얀마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의 완충국이 되었으며,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크림전쟁과 의화단 운동, 수에즈 운하의 건설의 경우 함께 개입하였다.
중동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붕괴 뒤 영국과 함께 "사이크스-피코 조약(Sykes-Picot Agreement)"으로 대(大)시리아[10]를 나눠먹어 레바논과 시리아를 차지했다.(시리아-레바논 위임통치령)[11]
결국 이런 프랑스의 제국주의도 제2차 세계 대전과 비시 프랑스의 성립과 함께 망해가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에게 프랑스 본토가 점령당해 괴뢰 정권 비시 프랑스가 세워지고, 힝전파들은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를 꾸렸다. 따라서 식민지들도 자유 프랑스와 비시 프랑스로 갈라지게 되었고, 인도차이나는 일본 제국의 침략이 이뤄졌다. 전쟁을 끝낸 시점에서 인도차이나는 호치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세력이 장악하여 사실상 독립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큰 유혈사태 없이 1947년경부터 순순히 식민지를 포기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1950~60년대까지 식민지를 유지하려 발악을 했지만 2차대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다시피 한 프랑스에게 식민지를 유지할 국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마다가스카르와 알제리 그리고 인도차이나 등에서 식민지인들을 탄압 및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베트남에서는 월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강대국이라는 프랑스군이 월맹군에게 패전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며 세계적인 굴욕을 겪게 되었고, 알제리와의 전쟁에서도 부질없이 질질 끌면서 피해가 커지며 굴욕을 연속으로 겪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수에즈 운하의 권리를 둘러싸고 영국, 이스라엘과 합작해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지만, 영국과 힘을 합쳤음에도 미국과 소련의 압박에 꼬리를 내려, 결국 2차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헤게모니가 미국과 소련에게 넘어갔다는 사실만 재확인했을 뿐이었다.[12] 냉전 구도에서 프랑스는 더 이상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고, 이후 1960년대 샤를 드 골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면서 프랑스 식민제국은 1980년 바누아투의 독립을 마지막으로 끝을 맞이했다. 이후 독립하지 않고 프랑스에 잔류한 식민지들은 프랑스의 국외 영토가 되었다.
4. 평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프랑스 식민제국이 다른 제국주의보다 유난히 악랄했다는 밈적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관점이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당연히 제국주의 특유의 수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고 그 때문에 결국 20세기 중반의 독립전쟁들로 끝을 맺었지만, 동시대 식민제국보다 일방적으로 더 악랄했다거나 혹은 더 관용적이었다고 단순화할 수만은 없는 면모도 있었다.[13]일단 프랑스 2차 식민제국은 당대 프랑스와 라이벌 호각을 다투던 영국과 함께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쪼개먹고 자국의 편의에 맞게 민족과 종교 등을 고려하지 않은 국경선 등을 확정하고 식민지 시기 내내 통치에 용이하게 특정 현지 세력을 지원하여 민족, 종교 간 분열들을 조장했다. 이렇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에 그들을 독립시킨 결과 내전과 전쟁 등 분쟁으로 이어졌다.
당장에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세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의 경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에게 패전 후 뒷처리도 제대로 안 한 채 급하게 철군했고, 그 과정에서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에 대한 주도권을 미국이 이어 받았는데 이후 통킹만 사건의 조작을 시발점으로 베트남 전쟁 등이 벌어졌다. 아프리카의 경우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코트디부아르, 말리의 국경선을 프랑스가 민족, 종교 등 토착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획정하였기 때문에 독립 이후 내전이 발생했으며, 중동의 경우 식민 통치의 편의를 위해 쿠르드족과 아랍족, 이슬람교 수니파와 알라위파 간의 이슬람 종파 대립을 키워 온 시리아는 시리아가 프랑스에서 독립한 지 60년 뒤에 이슬람 수니파와 알라위파가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폭발하였고 그 과정에서 최악의 악마들이 강림하면서 21세기 중동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프랑스의 하류층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레바논 또한 프랑스의 인위적인 국경선 조정으로 독립 후에도 종교, 종파간 대립을 봉합하지 못하다가 내전이 일어났다.(레바논 내전) 그래도 그나마 레바논은 1990년에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기라도 했지, 시리아는 아직도 반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이 끝이 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피해를 많이 본 곳은 알제리로, 프랑스 추산 30만 명, 알제리 추산 15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전쟁이 8년간 벌어졌고, 1961년에는 파리 중심부에서 알제리의 독립을 외치는 평화 시위대 수백명을 학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1961년 파리 학살) 또 기니는 아메드 세쿠 투레의 주도로 독립한 후 프랑스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자 보복성으로 모든 인프라를 파괴하고 인력을 철수시킨 후 기니에 위조지폐를 살포하여 투레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제국주의 시절 프랑스의 만행 정리
그러나 한편으로는 프랑스는 영국과 비교할 때, 식민지에 동화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펼치는 경향이 있었다.[14] 이는 프랑스 문화에 완벽하게 적응한 친불 성향의 식민지인들을 중용하거나 의원직에 선출하는 형태의 유화적인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등장한 자유주의자들과 공화국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어, 서구권 최초의 비백인 사단장(장군)인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인 토마알렉상드르 뒤마나, 펠릭스 에부에 같은 흑인 출신 총독 같은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는 본토로 취급되던 알제리부터 서서히 식민지인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기도 했다. 1표가 아닌 0.7표. 0.4표인 불평등 선거권인데다가 본토 정부에 크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도록 제한을 두기는 했지만.
"나는 두 아이를 잃었는데, 당신들은 20명의 하인을 두고 있소."
- 1882년, 프랑스 극우파 협회인 '애국자 연맹'의 회장 폴 데룰레드(Paul Déroulède)의 평가. '두 아이'는 알자스 로렌을, '20명의 하인'은 식민지들을 의미한다.
- 1882년, 프랑스 극우파 협회인 '애국자 연맹'의 회장 폴 데룰레드(Paul Déroulède)의 평가. '두 아이'는 알자스 로렌을, '20명의 하인'은 식민지들을 의미한다.
또한 프랑스 내부에서도 식민지 지배에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1880년대 제국의 대확장은 당시 프랑스 총리(Président du Conseil des Ministres)와 외무장관을 겸임했던 쥘 페리가 강행하던 것이었는데, 프랑스 국민 감정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에 정말 불만이 많았다. 이들은 식민지 건설을 10년 전 상실한 알자스 로렌 문제를 정부가 외면하는 증거라고 보았고, 실익에 비해 너무 많은 예산이 지출된다며 비판했다.
현재 프랑스는 형식상으로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 당시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들을 착취하지는 않지만, 과거 아프리카 식민지들이었던 나라들 한정으로 21세기에도 경제, 사회, 문화적인 방법으로 자원과 이득이 되는 것을 흡수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가 1인당 GDP가 4만 달러가 넘는 부국인 이유가 이러한 착취 때문에 달성된 성과라는 것 역시 부정하지 못할 일이다.
5. 식민제국 당시의 괴뢰국
프랑스 제1식민제국의 괴뢰국 참조프랑스 제2식민제국의 괴뢰국 참조
6. 제2식민제국 당시의 식민지
프랑스 식민제국의 식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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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령 알제리(1830 ~ 1962) - 특이하게도 알제리는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취급되었는데 이는 알제리가 지리적으로 인접해 식민화가 유리했기 때문이다.[15] 총독 관할인 대다수 식민지들과 달리 알제리에는 프랑스 본토의 행정이 적용되었다. 알제리를 아예 영구지배하기 위해 프랑스는 도시들을 아예 프랑스 스타일로 바꾸고 상당한 수의 프랑스인들을 이주시키고 스페인인과 이탈리아인 등 다른 유럽인 이민까지 장려하여 특별히 관리하였고 데파르트망까지 설정하는 등등 여기만큼은 죽어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때문에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지 중 독립 과정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나라가 되었다. 이는 프랑스 정부는 물론 당시 프랑스 일반 국민들도 알제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고유의 영토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 프랑스령 모로코(1912 ~ 1956) - 보호령
- 튀니지(1881~1956) - 보호령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1895 ~ 1960)
- 프랑스령 기니(1895 ~ 1958)
- 니제르(1892 ~ 1960)
- 코트디부아르(1893 ~ 1960)
- 모리타니(1903 ~ 1960)
- 프랑스령 수단(1895 ~ 1960)
- 세네갈(1895 ~ 1960)
- 프랑스령 다호메이(1904 ~ 1960)
- 프랑스령 오트볼타(1896 ~ 1960)
- 프랑스령 토고(1919 ~ 1960) - 구 독일령 토고의 일부,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 포르사도스&바지보(1900 ~ 1927) - 1898년 프랑스령 니제르와 영국령 나이지리아와의 국경 획정 당시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조차한 나이지리아 내의 월경지이다. 조차 기한은 1900년부터 30년이었으며 조차 기간 만료 직전인 1927년 영국에 반환하였다.
-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1910 ~ 1960)
- 프랑스령 가봉(1839 ~ 1960)
- 프랑스령 콩고(1885 ~ 1960)
- 우방기샤리(1903 ~ 1960)
- 프랑스령 차드(1920 ~ 1960)
- 프랑스령 카메룬(1919 ~ 1960) - 구 독일령 카메룬의 일부,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1897 ~ 1958)
- 프랑스령 인도(1668 ~ 1954)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7 ~ 1954)
- 프랑스령 코친차이나(1862 ~ 1949)
- 안남(1883~1945, 1945 ~ 1948) - 보호령.
- 통킹(1883 ~ 1945, 1945 ~ 1948) - 보호령.
- 라오스(1893 ~ 1941, 1945 ~ 1950) - 보호령.
- 캄보디아(1863 ~ 1941, 1945 ~ 1953) - 보호령.
- 광저우만(1898 ~ 1946) - 조차지.
-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레바논(1923 ~ 1946) - 구 오스만 제국의 일부,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 프랑스령 소말릴란드(1896 ~ 1977)[16]
- 뉴헤브리디스 제도(1906 ~ 1980) - 영국과의 공동 통치령
- 프랑스령 톈진(1860 ~ 1946)
7. 프랑스의 외부 영토
- 프랑스령 기아나 - 해외 레지옹.
- 카리브 해의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 외방 레지옹.
- 인도양의 레위니옹, 마요트 - 외방 레지옹.
- 북아메리카의 생피에르 미클롱 - 외방 집합체.
- 카리브해의 생마르탱, 생바르텔레미 - 외방 집합체.
- 남태평양의 왈리스 퓌튀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 외방 집합체.
- 남태평양 멜라네시아의 누벨칼레도니 - 특별 공동체.
- 클리퍼턴 섬 - 외방 영토.
- 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 - 외방 영토.
[1] 이 시기의 다른 식민제국의 통칭(예: 대영제국 등)처럼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쓴 명칭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프랑스와 프랑스 지배하의 식민지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하여 편의상 붙여진 명칭이다. 식민제국 기간 동안 프랑스의 공식 국호는 프랑스 제국(Empire Français), 제정 폐지 이후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공식 국호는 프랑스 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이다. 다만 대영제국과 달리 진짜로 황제국이었던 적이 있었고 왕정을 폐지하고 최종적으로 미국처럼 공화국이 돼서 식민제국을 끝냈다.[2] 프랑스 본토 면적 552,000km² 포함.[3] 1534년 ~ 1962년 총 면적.[4] 프랑스 본토 인구 41,500,000명 포함.[5] 참고로 프랑스 이전에 영국과 경쟁하던 나라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였다.[6] 19세기 이전까지는 영국과 프랑스는 역사적인 라이벌 관계였으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는 프랑스는 영국의 세력권에서 보조 역할을 맡으며 독일 제국이 부상하기 전까지 유럽대륙에서의 주도국 포지션을 맡았다.[7] 국교인 가톨릭이 아니라 칼뱅파 신자였던 위그노들은 프랑스 식민지 이주가 금지됐기에 대부분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향했다.[8]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프랑스인과 인디언과의 통혼이 많이 이뤄져 이들의 혼혈을 메티스(Métis)라고 부른다.[9] 다만 이때 나폴레옹이 전유럽을 상대하느라 프랑스가 바다 건너 작은 식민지에 집중할 수 없었다.[10] 오스만령 아랍: 현재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을 합친 지역. "레반트"라고도 한다.[11] 영국의 벨푸어 삼중 선언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이크스-피코 밀약 역시, 오스만 격퇴에 공을 세운 하심 가문과 아랍반란군의 의사를 무시하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국경선을 당시 입맛대로 확정했다는 면에서 계속 비판받고 있다. 참고로 이 영프간 밀약을 폭로한 건 다름아닌 소련이었고 양측은 굉장히 당황했다고 한다(...)[12]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나세르의 정치공세로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넣어 수에즈 운하는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13] 무엇보다, 하나의 체제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줄세우기 식으로 순위를 메기는 건 극도로 난해한 작업이다. 흔히 제기되는 "일제는 동시대 열강보다 특별히 악랄/느슨했나요?" 같은 질문에 확답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4] 전반적으로 영국이 현지의 통치체계를 온존하는 간접통치를 선호했다면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식민지에 중앙집권적인 행정을 갖추고 동화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내부에 응우옌 왕조가 명목상 잔존하는 등, 식민지마다 양상이 달라 예외는 존재한다.[15] 영국이 아일랜드, 일본이 조선을 취급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16] 1946년부터는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해외영토로 전환. 1967년부터는 프랑스령 아파르이사로 명칭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