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진 조계들을 나타낸 지도. 독일어로 되어 있다.
보라색 = 일본령,(Japan)
민트색 = 프랑스령,(Frankreich)
주황색 = 영국령,(Großbritannien)
파랑색 = 독일령,(Deutsches Reich)
노랑색 = 벨기에령,(Belgien)
갈색 = 러시아령,(Russland)
녹색 = 이탈리아령,(Italien)
분홍색 = 오스트리아-헝가리령(Österreich-Ungarn)
1. 개요
톈진 조계는 '상하이 공공 조계'나 베이징 공사관 지역 등과 같이 열강들의 하나된 국제 통치를 받은 지역은 아니었으나 매우 많은 국가들이 톈진에 조계를 얻었으며 상당수가 동 시기의 동 사건으로 얻은 것이었기에 한 문서로 묶어 서술한다.톈진은 예로부터 대운하와 하이허 강의 교차지라는 위치 덕에 전략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가치를 지녔으며 특히 베이징의 외항이자 북중국의 주요 항구 중 하나였다. 때문에 오랜 기간 유럽 열강들이 눈독들이던 지역 중 하나였고 특히 1860년 베이징 조약 이래 프랑스와 영국 상인들의 무역이 허가되고[1] 당산의 탄광개발과 북중국의 각종 철로 사업들[2]로 인해 중요도는 증가하기만 하였다.
이리 중국 내 유럽 열강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던 때 중국에 의화단 전쟁으로 8개국 연합이 결성되어 승리하자 이 8개국 연합의 일원이었던 열강 대부분은 각자 지분을 요구, 톈진에 조계를 얻게 된다.
2. 영국령 톈진 (1860 ~ 1943)
자세한 내용은 영국령 톈진 문서 참고하십시오.3. 프랑스령 톈진 (1860 ~ 1946)
프랑스 조계 또한 위의 영국 조계와 마찬가지로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얻어낸 조계였다. 프랑스는 통치 중 많은 유럽 양식 건축물들을 남겼는데 이 건축물들은 오늘날 톈진에도 대부분 남아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3] 하지만 이곳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완전히 피하지 못해 지역 중심에 있던 프랑스풍 가톨릭 성당은 파괴당했다. 다행히 지금은 톈진 당국이 파괴된 성당을 원형 복원했다.4. 일본령 톈진 (1898 ~ 1945)
일본령 톈진 조계는 1898년 청일전쟁에서의 승전으로 얻어낸 조계지로 추후 의화단 운동 진압 참여로 확장되었다.일본령 톈진을 거쳐간 유명인사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있다. 1924년 청나라 소조정의 폐지로 자금성에서 쫓겨났던 푸이는 1931년 만주국 수립까지 일본령 톈진에서 지냈었다.
일본령 톈진은 1945년 일본 패망 후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5. 독일령 톈진 (1899 ~ 1917)
1870년대 북중국 지역에 지대한 영향력 및 이권을 가졌던 독일 제국은 1877년 톈진의 독일 상인들이 위협받은 이래 톈진에 조계를 얻고자 하였는데, 1898년 독일령 칭다오의 조차 이후 조계를 얻게 된다. 당대 독일은 세계 정책을 펼치며 대외 영향력 확장을 중시했기에 이 독일 조계 내 독일-아시아 은행[4] 본부 및 독일 무역회사들의 상관이 세워지게 된다.또한 의화단 운동 당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 진주를 위한 교두보로 사용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중화민국이 협상국 편으로 참전하자 중국은 독일 조계 지역을 돌려받게 된다.
6. 러시아령 톈진 (1900 ~ 1920)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령 톈진 문서 참고하십시오.7.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톈진 (1901 ~ 1917)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톈진 문서 참고하십시오.8. 이탈리아령 톈진 (1901 ~ 1943)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령 톈진 문서 참고하십시오.9. 벨기에령 톈진 (1902 ~ 1931)
자세한 내용은 벨기에령 톈진 문서 참고하십시오.10. 번외: 미국령 톈진 (1869 ~ 1902)
1869년에서 1880년간 미국은 톈진 지역의 일부를 사실상 조계로서 경영했고, 미국 수병의 영구 주둔지도 있었다. 위 지도에 미국령 톈진 조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는 이유는 명목상으로는 미국은 톈진에 조계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1902년 영국에 매각하여 사라졌다.여담으로 마셜 플랜으로 유명한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C. 마셜이 1920년대에 이곳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