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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자치령 | |||||||||
현대 | 캐나다 |
뉴펀들랜드 자치령 Dominion of Newfoundland Le Dominon de Terre-Neuve | ||
대영제국의 자치령 | ||
기 | 문장 | |
1907년 ~ 1949년 | ||
성립 이전 | 통합 이후 | |
뉴펀들랜드 식민지 | 캐나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ce1126; font-size: .8em"''']] | |
수도 | 세인트존스 | |
정치체제 | 대영제국의 식민지 | |
국가원수 | 뉴펀들랜드 국왕[1] (명목상) 뉴펀들랜드 총독 (사실상) | |
언어 | 영어, 프랑스어, 아일랜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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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펀들랜드 자치령은 1907년에 설립된 영국의 자치령으로, 이웃한 캐나다처럼 사실상의 독립 국가였으며, 1949년에 캐나다 자치령과 통합되어 현재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가 되었다.2. 역사
1600년대부터 들어선 뉴펀들랜드 식민지#는 1855년 영국 지배하의 식민지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1907년에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자치령(dominion)이 되었다. 이후 경계선을 맞댄 캐나다 자치령의 연방주로 합류하는 것보다는 독자적인 자치령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발효에 따라 자치령들이 외교·국방 권한까지 영국 정부로부터 넘겨 받아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는데, 뉴펀들랜드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몰아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1934년 독립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영국 정부의 직접 통치를 받는 쪽으로 돌아왔다. 이는 독립국이 스스로 자신의 독립을 포기한 몇 안 되는 사례에 속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고 난 뒤 1949년 주민투표를 통해 근소한 차이로 캐나다 연방으로의 가입을 선택하였다.이 때 두 번에 걸쳐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1차 투표는 옛날과 비슷한 자치령 정부를 복원하는 것(Responsible Government), 캐나다에 가입하기(Confederation with Canada), 기존 정부 형태(Commission of Government. 즉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방식)를 놓고 투표를 했다. 1차 투표에서 영국 직할령 유지를 선택한 사람이 15%정도로 꼴찌를 차지해, 캐나다연방 가입(2위)과 자치정부 복원(1위)의 선택지를 2차 투표에 부쳤고 그 결과 역전되어 5%차로 캐나다 가입이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캐나다에 마지막 10번째로 가입한 주가 되었다.
캐나다 연방 가입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영국의 재정난으로 인해 경제적 지원이 끊겼고, 캐나다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연방에 가입하지 않으면 지원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뉴펀들랜드 지역에는 전쟁 중 섬에 미군기지가 설치되었었고 이때의 경험을 통해 차라리 미국령이 되자는 의견도 상당했지만 영국이 이 안을 투표에 부치는 것을 거부했다. 당시 캐나다는 거의 독립국이 되긴 했어도 같은 영연방 소속인 데다가[2] 당시만 해도 대영제국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한 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 되긴 했어도 전쟁도 치렀던 한때의 가상적국이었고 대영제국의 산하가 아닌 별도의 '제국'이었으니 영국으로서는 이걸 받아들이기 꽤 껄끄러웠을 것이다.
위는 1948년의 주민투표 당시 캐나다 연방 가입 찬성파가 신문에 낸 프로파간다 포스터.
대륙부의 래브라도 지방은 래브라도 반도 주요부를 차지하는 퀘벡 주와 귀속 혹은 경계선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1927년 영국 추밀원 사법위원회에서 양 지역의 경계를 확정하였다. 현재 퀘벡과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의 육상 경계는 대체로 분수계를 따르지만, 남쪽은 그렇지 않다.
[1] 영국 국왕이 겸직하였다.[2] 원래 모든 영연방 회원국은 영국 국왕을 자국 국왕으로 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1949년에 인도 자치령의 요구로 폐지) 당시에는 이런 용어가 없었지만, 영국, 캐나다나 당시의 뉴펀들랜드는 모두 현재 기준으로 영연방 왕국에 해당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