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6:57:31

알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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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SCO World Heritage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2013~ )[1]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알레포 고대 도시
아랍어 مدينة حلب القديمة
영어 Ancient City of Aleppo
프랑스어 Ancienne ville d'Alep
국가·위치
[[시리아|]][[틀:국기|]][[틀:국기|]] 홈스 알레포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21
등재연도 1986년
등재기준 (ⅲ)[2], (ⅳ)[3] }}}

1. 개요2. 역사
2.1. 상고대
2.1.1. 얌하드 왕국2.1.2. 불안의 연속
2.2. 고대2.3. 중세2.4. 오스만 제국2.5. 근대2.6. 현대
3. 다마스쿠스와의 지역감정4. 경제5. 교통6. 기독교 공동체7. 여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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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leppo_and_the_citadel (1).jpg파일:church and mosque.jpg
시타델과 대사원 성 요르요스 성당과 타우히드 모스크

아랍어 : ﺣﻠﺐ‎ (할랍)
영어 : Aleppo
프랑스어 : Alep
러시아어 : Алеппо

한때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였지만, 시리아 내전의 여파로 파손되었고 복구가 진행중인 시리아 제2의 도시. 할랍은 아랍어로 '우유'란 뜻인데, 기독교와 이슬람의 사도 아브라함 (이브라힘)이 이곳을 지나던 중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양의 젖을 짜서 나눠주었다는 일화로 유래되었다는 설과 하얀 대리석이 특산물이어서 아람어로 하얗다는 뜻의 할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 병존한다. 알레포는 이 할랍의 이탈리아식 발음으로, 십자군 전쟁 때부터 서방에선 통용되었다. 알레포는 모스크와 성당,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전형적인 레반트 지역 도시이다. 2020년의 알레포 브이로그

알레포는 명실상부한 시리아 북부의 중심 도시로 시리아뿐만 아니라 레반트 지역 최대 규모의 도시다. 알레포 주의 주도이며 2004년 기준 인구 213만명을 자랑했다. 인구의 80%는 수니파 무슬림이고 12%는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등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알레포 전투 당시 반군이 지배하는 시가지 동부의 인구가 4만 명까지 줄어들었다는 추정도 있었다. 2018년 현재의 인구는 180만 정도로 추정된다. 위도가 대전광역시와 비슷하나 대륙 서안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겨울 평균기온은 제주도와 비슷하다. 1986년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을만큼 관광 자원이 풍부하지만 시리아는 2011년부터 내전 발발의 영향으로 여행금지국가에 등록되었기에 지금은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2. 역사

파일:Aleppo 1993.png
알레포 성채, 1993년 촬영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도시로 꼽힌다. 1986년 유네스코는 알레포의 구시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살라딘이 축조했다는 알레포 성채와 도심의 우마이야 대사원, 9세기에 1만권의 장서를 소장했다고 전해지는 사이피야 도서관[4] 등 유구하고 동시에 유수한 문화재가 풍부한 것이 그 이유이다. 시타델을 제외하면 과거 도시 유적과 현재 시가지가 거의 겹치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문헌 자료가 있기 전에는 언제부터 도시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5] 다만 확실한 것은 최소한 기원전 5천년 경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기원전 2500년 경의 엘바 문서에서 '할람'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알레포는 서아시아 문명의 발상지인 자지라와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와 비교적 가까운[6] 관계로 남쪽의 경쟁 도시인 다마스쿠스보다 먼저 도시로 발전하였다. 알레포 1승

2.1. 상고대

파일:Udgravning_(Citadellet_Aleppo).jpg
시타델 내부에 위치한 폭풍의 신 하다드 신전[7]

상술하였듯이 할랍 (알레포)의 첫 이름은 '할람'이었고 당대에는 셈계 아르미 왕국의 수도였다. 당시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처럼 아르미 왕국 역시 알레포 일대만을 지배하는 도시 국가였는데,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에블라 (텔 마르디크, تل مرديخ)와 친교와 경쟁을 반복하였다. 그러던 기원전 2350년 경 에블라의 왕이 수메르의 키쉬와 연합하여 아르미 군을 격파하였고 스스로 '이그리쉬 할람' (할람을 물리친)을 칭하였다. 이때부터 에블라의 속국이던 아르미 왕국은 전자가 동쪽의 마리와 국운을 건 전쟁[8]을 벌이던 틈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에블라의 재상 이비 스피쉬에게 수도가 함락되며 진압되었다. 이비 스피쉬의 아들 엔지 말리크가 할람의 총독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수메르를 평정한 아카드 인들이 침공하였고 아르미와 에블라 모두 그에 파괴되었다. (기원전 2290년) 이후 에블라 왕국은 복구되었지만 아르미 왕국은 그러지 못하였다.

아카드 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배에 만족하며 돌아가자 도시는 재차 에블라 왕국 (제2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번엔 3세기간 지배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할랍에선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폭풍의 신인 하다드 숭배가 번영하였는데고 이로써 할람은 동시에 '하다드의 도시'로도 일컬어지게 되었다.[9] 한편 기원전 2154년 구티 인들의 침공으로 아카드 제국이 붕괴된 후 수메르 제국 (우르 제3 왕조)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하자 에블라 왕국 역시 그에 복속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004년 수메르 제국 역시 붕괴되었고 비슷한 시기 에블라 역시 후르리 인의 침공으로 2왕국이 멸망하고 3왕국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동부 셈 족[10]의 일파인 아모리 인이 나타났다. 이들 중 동쪽으로 향한 무리는 고 바빌로니아를 세웠고 서쪽으로 향한 무리는 얌하드를 세웠는데, 후자는 대가뭄 이후 쇠퇴하던 에블라로부터 할랍을 점령하고 이를 수도로 삼았다. (기원전 1800년 경)[11]

2.1.1. 얌하드 왕국

얌하드 왕국 대에 이르러 그와 경쟁하던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측에게 도시는 현재의 지명인 '할랍'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기존 에블라의 경쟁국이던 마리가 쇠퇴한 후 얌하드는 동쪽의 새로운 적수로 떠오른 고 아시리아와 대립하였다. 아시리아가 카르케미쉬, 카트나 (홈스) 등과 동맹하며 할랍을 남북으로 압박해오자 얌하드는 같은 아모리 계열인 바빌로니아 및 에쉬누나와 동맹하여 이에 맞섰다. 원교근공 특히 얌하드의 야림림 1세와 함무라비 대왕 간의 동맹이 유명했고 그 영향인지 전자의 후계자 이름 역시 함무라비였다. 당시 얌하드는 바빌로니아 버금가는 서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 시리아 대부분을 다스렸고 에블라, 마리, 우가리트 등이 그 번국이었다. 카르케미쉬와 카트나 역시 결국 아시리아와의 동맹 대신 얌하드와의 휴전을 택할 정도였다.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야림림 1세는 수메르 동부의 도시 데르에 15년간 군사 지원을 약속, 무려 5백척의 함대를 주둔시켰다고도 한다.

바빌로니아와 얌하드 간의 군사 동맹은 기원전 1761년 함무라비 대왕이 후자의 속국인 마리를 침공, 파괴하며 종식되었다. 다만 양측 모두 군사적 충돌은 피하는 상황에서 경제적 교류는 지속되었고 함무라비 1세의 증손자 니크메파 때까지 얌하드는 조금씩 영토를 늘리며 번영하였다. (~ 기원전 1675년)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쇠퇴와 함께 북쪽의 후루르 인과 바다 민족의 선조격인 하비루의 출현에 얌하드는 위기를 겪었다. 또한 출신이 불분명한 함무라비 2세와 야림림 3세의 즉위기에 함무라비 1세의 차남 야림림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진 번국 알랄라카 (안티오크 근교)의 군주 암미타쿰이 스스로 왕을 칭하는 등 내분도 일어났다. 그러던 기원전 1620년경 히타이트 제국의 핫투실리 1세가 알랄라카와 카르케미쉬를 정복, 파괴하며 얌하드는 해안으로 향하는 통로를 상실하게 되었다. 야림림 3세는 핫투실리 1세가 프리기아 원정하는 틈에 후르리 인들의 도움으로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듬해 핫투실리 1세는 아예 할랍으로 진격해왔고 이에 야림림 3세가 야심차게 준비한 1백의 전투마차를 포함한 얌하드 정예군은 아탈루르 산 전투에서 히타이트의 철기군에 대패하였다. 비록 핫투실리 1세는 할랍 자체를 함락시키진 못했지만 그의 두 차례에 걸친 원정은 시리아 지방에 대한 얌하드의 패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였다. 이때부터 얌하드 군주들은 대왕 칭호를 쓰지 않았다. 한편 핫투실리 1세는 할랍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후계자인 아들 무르실리 1세는 친정을 시작하며 부왕의 복수를 천명하며 얌하드를 침공해 결국 할랍을 함락하였다.[12] (기원전 1600년 경) 많은 포로들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로 끌려갔고 마지막 국왕 함무라비 3세 역시 더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후 무르실리 1세가 바빌로니아 원정 후 회군 도중 암살당하며 히타이트 제국이 분열된 틈에 얌하드의 왕자 사라 엘은 할랍을 되찾고 왕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한편 사라 엘은 '할랍의 왕'만을 칭하였고 얌하드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아바 엘 2세는 알랄라카 등 기존 얌하드의 본토를 수복하고 하다드 신앙을 강조하며 단합과 중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히타이트의 분열과 얌하드의 쇠락을 틈타 후자의 동맹이었던 후르리 인들의 세력이 막강해졌고 이들은 미탄니 제국을 세워 자지라를 장악하였다. 기원전 1524년, 미탄니 제국의 파르샤타타르 (바라타르나)는 내란을 획책하여 할랍을 점령하였다. 마지막 국왕 일림 일리마 1세는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이드리미는 하비루에 망명하였다가 7년 후 돌아와 알랄라카를 점령하였다. 이후로 미탄니 제국에 맞서던 이드리미는 협상을 통해 미탄니에 복속하는 대신 할랍의 지배권을 얻을 수 있었다. (기원전 1510년) 다만 수도는 알랄라카로 제한되었으며 '할랍의 왕' 칭호도 금지되었다. 이로써 왕가는 이어졌지만 얌하드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

2.1.2. 불안의 연속

얌하드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알랄라카 왕국 하에서 할랍은 불안한 시기를 이어갔다. 그 종주국인 미탄니 제국은 파르샤타타르의 아들 샤우쉬타타르 때에 아시리아를 복속시키는 등 전성기를 누렸고 이는 후자의 아들 아르타마타 1세와 손자 슈타르나 2세 때까지 이어졌다. 다만 점차 세력을 회복해가던 히타이트에 맞서기 위해 아르타마타 1세는 분쟁지이던 가나안을 이집트에 넘겨주고 파라오 투트모스 4세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한편 히타이트의 투달리야 2세는 미탄니와의 대결에 앞서 그 속국인 알랄라카 왕국을 습격하는 것으로 제국의 부활을 알렸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수필룰리우마 1세가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와 동맹하고 미탄니 제국군을 격파, 비록 실패했지만 그 수도 와슈칸니를 포위하였다. 그 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마침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할랍을 점령하곤 차남 텔레피누를 그 왕으로 봉하였다. (기원전 1330년 경) [13]

할랍 번왕국은 텔레피누에서 시작하여 3대간 이어졌는데 기원전 1200년 경 바다 민족의 침공으로 단절되었다가 새로운 히타이트계 왕국인 팔리스탄 (와타사티나)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바다 민족의 침공과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 이후 아람 인들이 시리아 지방에 유입되었는데 팔리스탄은 이에 맞섰고 일각의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국다윗 왕과 연합했다고도 한다. 한편 팔리스탄과 팔레스타인의 어원인 골리앗의 필리시테 (블레셋) 인 사이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하나 별 근거는 없다.[14] 그러던 기원전 900년 경 팔리스탄은 바다 민족 계열의 하마와 히타이트 계열의 파틴, 아람 계열의 비트 아구시 등으로 분열되는데 할랍은 이들 중 후자에 속하였다. 다만 이번엔 중심지가 아니었고 할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아르파드 (텔 리파트, تل رفعت)가 수도였다. 초대 군주인 아구시는 아시리아 제국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쳐들어오자 복속하고 조공하여 파괴를 면하였다.

이후 아시리아의 샬마네세르 3세 대에 이르러 비트 아구시의 군주 아라무는 그에게 완전히 복속하였다. (기원전 830년 경) 그러나 그의 아들인 아타르슈므키 1세는 아르메니아의 우라르투 왕국 등 아시리아의 적국들과 동맹하여 독립을 꾀하였는데 아시리아의 아다드니라리 3세가 진격해오자 재차 그에 복속하였다. 한편 기원전 8세기 중반 들어 우라르투 왕국은 7대 국와 사르두리 2세의 지휘 하에 자지라 북부와 시리아 일부를 장악할만큼 버금갈만큼 강성해졌는데, 동시에 아시리아는 아다드니라리 3세 사후 내전으로 약해져 있었다. 이에 비트 아구시의 마지막 군주 마티일루는 재차 우라르투에 복속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745년 아시리아를 재통합한 티글라스틸레세르 3세는 즉위 2년만에 응징에 나서 비트 아구시의 수도 아르파드를 포위하였다. 우라르투 대왕 사르두리 2세와 카르케미쉬 등 신히타이트 연맹군 등 원군이 모두 패퇴했음에도 계속 저항하던 아르파드는 3년의 공성전 후에야 함락되었다. (기원전 740년) 티글라스틸레세르 3세는 도시의 파괴와 더불어 주민들을 학살하곤 자신의 환관 중 한 명을 총독으로 봉하였다.[15]

2.2. 고대

파일:sy553_Simeonskloster.jpg파일:Church_of_Saint_Simeon_Stylites_17.jpg
알레포 외곽의 시메온 산에 위치한 성 시메온 성당. '북시리아의 고대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있다.[16]

아르파드의 파괴와 함께 다시 일대의 중심지가 된 할랍은 이후 한세기 반동안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이집트 연합군과 메디아-칼데아 연합군 간의 메기도 전투 및 하란 공방전이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며 아시리아 제국은 20년간의 대전쟁 끝에 멸망하였다. 이때 할랍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카르케미쉬와 가까워 비교적 나중에 신바빌로니아 (칼데아)령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70여년 후인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하며 할랍 역시 자동으로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별다른 언급 없이 아람어로 '강 건너편'이란 뜻의 에베르-나리 사트리프 (총독령)에 소속되어 있던 할랍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점령되며 그리스 문명권 하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400년 순삭

대왕의 사후 디아도코이의 일원인 셀레우코스 1세는 할랍을 그리스식 도시로 개조하고 본국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로이아 (Βέροια)의 이름을 붙였다. 베로이아는 기원전 24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중심지가 수메르의 셀레우키아에서 시리아의 안티오크로 이전되며 그 배후 도시로 발전하였다. 다른 그리스 문명권 도시들처럼 불레 (βουλή)라고 부르는 귀족들의 평의회에 의해 자치를 누리며 평화롭게 지내던 베로이아는 기원전 88년 아르메니아 왕국티그라네스 대왕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되었고 마침내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셀레우코스 조를 멸할 때에 로마령 시리아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어진 약 3세기간의 팍스 로마나 기간동안 로마 총독은 그리스어를 쓰는 귀족층이나 아람어를 쓰는 평민들에게 세금을 제외하면 별 간섭을 하지 않았고 제국의 유럽 부분이 침체기를 겪던 5세기에도 인구 증가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시리아 주에서 베로이아는 안티오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그러던 3세기 무렵부터 베로이아는 이웃 안티오크와 함께 크리스트교가 주를 이루었다. 문헌상 첫 등장하는 베로이아 주교인 320년경의 성 에우스타시오스는 324년 안티오크의 주교가 되어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 아리우스파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는 330년 안티오크 총회에서 아리우스 주의에 호의적인 사제들에게 간통 혐의로 폐위되었다. 이에 안티오크 시민들이 봉기하려 하였으나 에우스타시오스는 폭력을 만류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는 모범을 보였다. 한편 시민들은 아리우스파 주교 멜레티오스에 반발하여 니케아 주의 주교를 선출해 대립하였는데 이는 반세기 이상 이어졌다. (멜레티오스 분열) 그후 432년에 베로이아에선 주교 아카시오스의 주관 하에 성 키릴로스 (치릴로)와 그에 반대하는 동방 주교들 간의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다만 5세기부터 시리아는 단성론이 대세가 되었고 518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칼케돈 주의를 거부한 베로이아 주교를 추방하기도 하였다.

2.3. 중세

파일:알레포 옛사원.jpg파일:Aleppo_Citadel_10_-_Mosque_of_Abraham.jpg
637년 아부 우바이다 아미르가 세운 알 슈아이비야 사원 시타델의 이브라힘 사원. 11세기 미르다스 왕조 시대에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었다

7세기 초반 사산 제국의 점령[17]기를 지나 시리아는 634년부터 라쉬둔 칼리파조의 침공에 직면했다. 그해 남쪽의 다마스쿠스가 점령되었고, 636년엔 에메사(홈스)의 함락과 더불어 야르무크 전투 이후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시리아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마침내 637년 4월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이슬람 제국군은 세 방향으로 흩어져 진군했는데 총사령관 아부 우바이다 아미르는 전임자이자 야전 사령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함께 오론테스 강을 따라 북상했다. 6월 칼키스를 손쉽게 접수한 아부 우바이다는 8월 베로이아를 포위했다. 포위는 별다른 공성전없이 2개월간 이어졌고, 마침내 10월 도시가 항복했다. 도시는 헬라스식 '베로이아' 대신 현지 이름인 '할랍'으로 돌아왔다. 그 직후 수비대장 요아킴은 4,0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뒤이어 할랍의 북쪽 거점인 아자즈 점령때 활약했다. 10월 말엽 안티오크 역시 항복하면서 시리아는 이슬람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할랍은 이미 532년을 끝으로 주교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음에도 다수의 기독교도들이 거주하며,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를 거쳐 10세기 무렵까지 큰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안티오크와 할랍 사이의 로마 시대 빌라들은 안티오크의 쇠퇴와 무역로의 변화 등을 겪으며 유령도시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할랍은 제국의 중심인 시리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써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그러던 750년, 아바스 조가 우마이야 조를 멸하고 시리아를 장악하자 동쪽에서 온 호라산 군대가 시리아에 대한 군정을 실시했다. 그들의 가혹한 통치에 대해 시리아에선 킨나스린 총독이었던 아불 와르드 마즈자 이븐 알 카우싸르를 필두로 한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발리스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여인들이 희롱당했다는 소식에 봉기한 마즈자는 무아위야 1세의 직계인 아부 무함마드 지야드 앗 수피아니와 합류했다. 할랍에서는 지야드의 조카 알 아바스 이븐 무함마드가 거병했다.

그러나 아바스 조의 반격은 신속했다. 시리아 총독 압둘라 이븐 알리가 750년 말엽 마즈자를 전사시켰고, 지야드는 팔미라를 거쳐 사막으로 도주했다. 할랍의 알 아바스 역시 자지라 총독 압둘라(훗날의 알 만수르)가 파견한 토벌군에게 진압되었다.[18] 이후 아바스 조의 통치는 150여년간 이어지다가 9세기 후반, 재차 혼란기가 도래했다.[19] 그무렵 알레포(할랍)의 강 건너편 자지라에선 동로마 시대부터 거주하던 아랍 부족인 바누 타글립이 득세했다. 본래 기독교를 믿었던 이들은 9세기 무렵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아바스 조의 중앙집권에 반발하여 수차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중심에는 함단 가문이 있었다.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가문의 일원인 후세인 이븐 함단이 아바스 칼리파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며 모술 총독으로 봉해졌다. 비록 그는 바그다드의 권력 투쟁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로잡혀 처형되었지만 그 동생 압둘라는 승자의 편에 선 덕에 모술 총독직을 얻을 수 있었다. (925)

2.3.1. 함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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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만에 베로이아(할랍 또는 알레포)을 점령하는 동로마 제국군과 시타델의 수비대(960년)

929년 함단 가문 출신의 모술 총독 압둘라는 아바스 칼리파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가 살해되었고, 6년간의 내분 끝에 그의 장남 하산이 집권했다. 942년 칼리파 알 무타키가 바그다드의 내분을 피해 피신해오자 하산은 동생 알리와 함께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칼리파에게 돌려주었다. 그 공로로 형제는 칼리파로부터 각각 나시르 앗 다울라(왕조의 방어자, 하산) 및 사이프 앗 다울라(왕조의 검, 알리)라는 라카브를 하사받았다. 이후 사이프 앗 다울라 알리는 튀르크인 장군 투준과 함께 와시트를 수복했는데 봉급 지불을 미루다가 결국 투준의 반란에 직면하여 형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와 함께 모술로 돌아갔다. 이후 시리아로 시선을 돌린 하산은 사촌인 후세인을 파견했고, 그는 이집트의 이흐시드 왕조로부터 할랍을 점령했다.(944년 2월) 그 무렵 칼리파가 재차 모술로 피신해오자 투준이 북진하여 두 차례에 걸쳐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를 격파하고 모술을 점령했다. 함단 형제는 칼리파와 함께 라카로 도주했다. 하산은 이라크에 대한 불간섭 및 350만 디르함의 연공을 낸다는 조건으로 모술을 회복할 수 있었다.

타협에 분노한 칼리파는 이집트에 도움을 청했고, 이에 이흐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가 북상하자 함단 군대는 라카와 할랍에서 철수했다. 다만 무함마드는 칼리파가 이집트 체제 제안을 거절하자 회군했다. 이후 칼리파는 바그다드로 돌아갔다가 투준에 의해 폐위되었다. 한편 이라크 원정 이후 잠자코 지내던 알리 사이프 앗 다울라는 형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의 지원하에 이집트 군대의 철수 직후 시리아로 향했다. 이흐시드 왕조의 알레포(할랍) 총독 아불 파스 우스만은 동맹인 바누 킬랍의 배신 소식에 저항을 포기했고, 사이프 앗 다울라는 할랍을 점령했다. (944년 10월) 이로써 시리아 북부와 자지라에 걸쳐 형제가 경영하는 함단 왕조가 건설되었다. 이후 사이프는 시리아의 통일을 위해 남하했으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가 친정에 나서자 대패했고, 현상 유지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다.(945년 10월) 그럼에도 이듬해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사이프 앗 다울라는 재차 남하하지만 이집트의 실권자였던 카푸르의 반격에 연패하고 할랍까지 점령당했다.(947년 7월)

다만 장거리 지배의 한계를 느낀 카푸르는 사이프와 945년 때의 휴전을 갱신하고 철수했다. 겨우 할랍을 되찾은 사이프 앗 다울라는 955년까지 바누 칼브 등을 위시한 아랍 부족들의 반란들을 강경 진압하며 내부를 결속했다. 한편 934년에 말라티야, 949년에는 에르주룸을 수복하는 등 동로마 제국의 역습이 가시화되었다. 모술에 있었던 때부터 말라티야, 아르메니아 방면 원정에 나섰던 사이프 앗 다울라 알리는 할랍을 거점으로 삼고, 946년 동로마 제국 영토에 대한 습격을 재개했다(함단 전쟁).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동로마 군대의 반격에 사이프는 연패했고, 이에 950년 대군을 모아 카파도키아를 약탈했지만 회군 도중 동로마군 장군 레온 포카스에게 8,000명의 전사자를 내는 대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동로마군의 평화 제의를 무시하며 습격을 지속하던 사이프는 953년 마라쉬 전투에서 동로마 대군을 격파했다. 이후 2년간 동로마군의 반격을 막아낸 사이프 앗 다울라는 국경 성채들을 재건했다.

그러던 955년, 마라쉬 전투에서 부상당한 동로마군 사령관 대 바르다스 포카스가 해임되고, 그의 장남인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동로마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956년 봄, 재차 습격에 나선 사이프는 요안니스 치미스케스 휘하 동로마군의 매복에 걸렸으나 승리했다. 하지만 동시에 레온 포카스가 시리아를 침공하여, 함단군을 격파하고, 그 장군인 사이프 앗 다울라의 사촌을 포로로 잡아갔다. 957년에는 사이프가 친로마 세력을 숙청하는 동안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국경 성채인 하다스를 파괴했다. 958년 요안니스 치미스케스는 다라를 점령한 후, 함단 대군을 격파했고 이에 사이프 앗 다울라가 반격에 나섰지만 그마저 라반 전투에서 패배했다. 960년,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크레타 섬 수복으로 부재한 틈을 타 사이프는 카파도키아를 습격했는데 회군 도중 레온 포카스의 매복에 걸려 대패했고, 오직 300명의 잔존 병력과 함께 도주했다.(안드라소스 전투) 961년에 복귀한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킬리키아 정복을 개시했고, 이듬해 사이프는 킬리키아를 포기했다.

마침내 962년 가을, 마라쉬를 점령한 니키포로스는 7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할랍으로 진격했다. 12월 중순 할랍 외곽에서 마지막 함단 군대를 격파한 니키포로스는 저항하는 시타델을 놔두고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후, 10,000명의 포로와 함께 회군했다. 사이프 앗 다울라는 파괴된 수도에 킨나스린의 난민들을 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이내 부관인 카르쿠야에게 할랍을 맡기곤 제2의 수도인 마야파리킨으로 물러났다. 963년,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틈을 타 사이프는 킬리키아를 수복했고, 더 나아가 이코니움(콘야)까지 습격했다. 이에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후임인 요안니스 치미스케스가 반격에 나서 킬리키아의 함단군을 격파하고 965년 타르수스를 점령하면서 킬리키아를 평정했다. 같은해 쉬아파 카르마트군이 시리아를 습격했고, 디즈바리 등 킬리키아 출신 아미르들이 안티오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할랍을 점령하는 등 난관이 이어졌다.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966년 사이프 앗 다울라는 들것에 실려 할랍으로 돌아왔다.

사이프는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반란을 강경 진압했지만 동로마군이 재침해오자 샤이자르로 도주했다. 동로마 군은 시리아 북부를 약탈한 후 동로마측에 전향한 안티오크 총독과 함께 회군했다. 그 후에야 할랍으로 돌아온 사이프 앗 다울라는 그곳에서 병사했다.(967년 2월)[20] 사이프 앗 다울라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샤리프는 치세의 시작부터 홈스 총독인 숙부 아부 피라스의 반란에 시달렸고, 968년 아부 피라스가 사망할 때즈음 동로마군이 침공했다. 샤리프는 재상 카르쿠야의 조언대로 홈스로 피신했는데, 카르쿠야는 스스로 할랍을 장악해버렸다. 그 틈에 동로마 장군 페트로스는 969년 10월 안티오크를 점령했고, 970년 1월에는 할랍에 입성했다. 카르쿠야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어 연공 70만 디르함을 내는 조건으로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 총독으로서 평화를 유지하던 카르쿠야는 975년 부관인 바크주르에 의해 폐위되었는데, 2년 후 샤리프는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바크주르를 패배시키고 할랍을 되찾았다.

2.3.2. 연이은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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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4년 함단 왕조 시대에 세워진 킨나스린 문. 1256년 앗 나시르 유수프가 중건.

이미 취약해진 함단 왕조에서 샤리프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북쪽의 동로마 제국 외에도 남쪽에선 이흐시드 왕조를 대체한 쉬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파티마 왕조가 북진하고 있었고, 동쪽에선 쉬아 계열 12이맘파 국가인 부와이 왕조가 자지라를 노렸다. 979년 샤리프는 모술을 장악한 부와이 왕조에 복속하여, 혼란기 도중 잃은 영토를 돌려받고,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라카브 '사드 앗 다울라'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981년 동로마군이 할랍에 당도하자 재차 동로마 제국에 복속했다. 이에 983년 파티마군이 할랍을 공격했지만 동로마 장군 바르다스가 개입하자 철수했다. 바르다스는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에게 반기를 든 홈스를 점령했고 이를 돌려받는 대가로 샤리프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연공을 20,000 디나르로 올려야 했다. 그러던 986년, 파티마군이 북상하자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재차 동로마에 대한 연공을 거부했고, 바르다스가 침공해오자 그 보복으로 할랍 인근의 성 시메온 성당을 파괴했다. 하지만 동로마-파티마 간에 휴전이 추진되자 샤리프는 다시 기존 조건대로 동로마 제국에 복속했다.

다만 얼마 안 지난 986년 말엽, 바르다스가 바실리오스 2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샤리프는 바르다스를 원조하며 3년간 이어진 내전 기간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러던 991년, 재차 할랍을 노린 파티마군을 동로마령 안티오크 총독 미카일의 도움으로 격퇴한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그해 12월에 병사했다. 그의 아들 사이드 앗 다울라가 계승했지만 재상 룰루가 실권을 지닌 상태였다. 룰루가 친로마적인 경향을 이어가자 992년 파티마 장군 만주타킨이 할랍을 포위했고, 미카일의 원군도 격파했다. 다만 할랍은 포위를 견뎌냈고 보급품이 바닥난 만주타킨은 이듬해 철수했다. 994년, 만주타킨은 재차 할랍을 포위했고, 미카일의 동로마-함단 연합군을 격파했다. 할랍의 주변 도시들을 모두 점령하며, 도시를 봉쇄하던 만주타킨은 995년 봄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친정에 나서자 철수했다. 사이드 앗 다울라는 친히 황제 앞에 출두해 엎드렸고, 이에 바실리오스 2세는 연공 의무를 면제해주었다.

996년 바실리오스 2세처럼 친정에 나서려던 파티마 칼리파 알 아지즈가 병사하면서 할랍은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실권자인 룰루는 파티마 칼리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며 중립 외교를 추구했다. 그러던 998년, 함단 군대는 남쪽의 아파메아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동로마군이 나타나자 철수했다. 그러자 도시는 파티마 측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어진 아파메아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대패했다. 999년 바실리오스 2세는 재차 침공하여 샤이자르를 점령했으나 1001년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과 10년 휴전을 맺었다. 이듬해 1월 함단 왕조의 사이드 앗 다울라는 알리와 샤리프라는 두 아들을 두고 승하했다. 재상 룰루는 두 왕자들의 섭정을 자처하며 통치했는데 1004년 결국 그들을 축출하고 아미르가 되었다. 룰루는 파티마 왕조에 복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 연공을 납부하며 양쪽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비록 1007년 누마이르 왕조에게 라카를 상실했지만 1008년 룰루가 사망할 때까지 할랍은 평화를 누렸다.

룰루의 사후, 그의 아들 만수르 (무르타다 앗 다울라)[21]가 계승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으로 피신했던 사이드 앗 다울라의 동생 압둘라는 마르완 왕조 및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할랍에 함단 왕조를 재건하려고 시도했다. 만수르는 바누 킬랍을 매수하고 파티마 군대의 도움을 받아 압둘라를 격퇴했는데 파티마군에게 그 대가로 할랍 시타델을 넘겨준다는 약속을 어겼다. 이에 1011년 파티마군은 함단 왕자 샤리프와 함께 북진했는데 마라트 알 누만의 바누 킬랍이 저항하여 후퇴했다. 그러나 만수르는 바누 킬랍에게도 약속된 영지를 주지 않았고, 1012년 그들은 할랍을 봉쇄했다. 만수르는 협상을 제안하여, 킬랍 부족 지도부를 초청한 후 학살해버렸다. 그러나 1014년 여름 할랍을 탈출한 바누 킬랍의 일원인 살리흐 이븐 미드라스[22]가 부족을 재규합하여, 할랍 근교의 전투에서 부족의 원수인 만수르를 사로잡았다. 이후 살리흐는 할랍을 포위했지만 만수르의 동생들이 버텨내자 50,000 디나르의 몸값으로 그를 석방했다.[23]

석방 후 만수르는 파티마 왕조에 복속하면서도 동로마 측에 도움을 청하는 등 킬랍 부족의 살리흐와의 대립을 이어갔는데 할랍 시타델의 수비대장 파스 알 칼리가 적과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모의를 들은 파스가 정말 살리흐와 결탁했고 만수르는 동로마 측에 망명했다.(1016년 1월)[24] 이후 할랍에선 폭동이 일어나 함단 왕조의 왕궁이 약탈되었고, 부속 도서관에 있었던 28,000권의 필사본이 소실되었다.[25] 파스는 킬랍의 살리흐와 파티마 왕조 중에 고민하던 중 살리흐에게 설득되었으나 파티마군의 진격과 함께 칼리파 알 하킴이 하사한 티레 총독위에 만족하고 파티마군에 항복했다.(1016년 10월) 이후 파티크 (아지즈 앗 다울라)가 총독으로 봉해졌는데 그는 살리흐와 화해하고 파티마군 장교들을 축출한 후 자립해버렸다.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은 할랍 원정을 준비했지만 1021년 사라져버렸고[26] 섭정 시트 알 물크는 파티크와의 화해를 가장하며 할랍 시타델 수비대장 바드르를 설득해 그를 암살시켰다.(1022년 7월)[27]

이후 밀약대로 바드르 (와피 앗 다울라)가 할랍의 총독으로 봉해졌으나 불과 몇 달만에 해임되었고, 파티마 조의 핵심 세력인 쿠타마 베르베르인 무함마드 (사피 앗 다울라)로 교체되었다. 이때부터 기존의 아미르가 부관에게 시타델을 맡기던 전례 대신 도시의 총독과 시타델 성주가 중앙정부에 의해 따로 임명되었다. 다만 무함마드 역시 1023년 4월에 해임되었고, 그 후임자인 사나드 앗 다울라는 이듬해 7월에 병사했다. 그 뒤에 사나드의 동생인 사디드 알 물크 투반이 부임했는데 이내 살리흐가 이끄는 바누 킬랍의 도전에 직면했다. 1024년 10월 파티마군을 격파한 살리흐는 다음달 할랍을 포위했고, 두 달간의 공성전 끝에 성내의 민병대가 배신하면서 도시를 점령했다.(1025년 1월) 투반은 파티크 아지즈 앗 다울라가 세운 요새화된 궁전과 시타델에서 버텼지만 각각 3월과 6월 말엽에 함락되었다.[28] 시타델이 포위되는 동안 살리흐는 파티마 왕조로부터 홈스, 바알벡, 시돈 등지를 점령했다.

2.3.3. 미르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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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대 1의 열세에도 황제가 친정에 나선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한 미르다스 (바누 킬랍) 군대. 아자즈 전투 (1030년)

시리아 원정 후 살리히는 1025년 9월 하랍에 개선하였다. 그는 몸값을 받고 투반을 석방하지만 시타델 성주 마우수프는 처형되었다. 이후 살리흐는 카이로에 사절을 보내 칼리파 앗 자히르에게 복속을 표하고 예복을 하사받으며 평화를 구가하였다. 또한 그는 할랍의 기독교도들을 독점적으로 와지르에 임명하고 무슬림들과의 사안을 공정히 처리하는 등 공명정대한 통치로 지지를 받았다.[29] 이는 기독교도들을 지지 세력으로 삼는 것 외에도 동로마와의 친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적인 내치와 달리 1029년 5월 살리흐는 팔레스타인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랍 부족들을 도와 파티마 군과 맞섰으나 일부가 이탈해 대패하고 와지르, 막내아들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알 우쿠와나 전투) 그의 수급은 카이로에, 몸통은 시돈 방면 길에 전시되었다. 살아남은 장남 나스르 (쉬블 앗 다울라)가 기존 후계자였던 동생 티말 (무이즈 앗 다울라)과 공동으로 통치하였다.[30]

한편 살리흐의 전사 후 파티마 군은 바알벡, 홈스, 시돈을 수복하였고 미르다스 왕조는 준드 킨나스린 (할랍 주)로 축소되었다. 그러자 동로마령 안티오크 총독이 로마노스 3세의 인가도 없이 할랍 정복을 시도했는데 나스르와 티말은 도중에 매복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1029년 7월) 이에 로마노스 3세는 2만 대군과 친정에 나섰고 나스르는 티말을 할랍에 두고 1천의 바누 킬랍-누마이르 군과 출정해 동로마 대군을 격파하였다. (1030년 8월)[31] 승전 후 나스르는 동생 티말이 할랍을 떠나 있는 틈에 시타델을 장악하고 단독 군주가 되었다. 그는 동로마가 동생 티말을 지지할까 두려워 연공 50만 디르함과 함께 재차 그에 복속하였다. (1031년)[32] 1036년 동로마는 파티마 조와 재차 10년 휴전을 체결한 후로 할랍에 대해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이후 나스르는 동로마 황제 미카일 4세의 중재 하에 홈스를 할양받는 대가로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에 복속하였다.[33]

내치에 있어 나스르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인 알 무암말을 와지르로 봉하였고 그는 이어진 전란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수용을 위해 시가지를 확장하였다.[34] 또한 나스르는 기존 할랍 군주들처럼 시내 궁전에 머무는 대신 시타델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는데 이는 향후 군주들의 거처가 되었다. 한편 1033년 파티마령 트리폴리 총독이 히신 이븐 아카르를 점령하자 나스르는 그 건너편의 히신 알 사프를 요새화했는데, 이는 향후 히신 알 아크라드 (크락 데 슈발리에)가 되었다. 그외에 나스르는 하란의 누마이르 왕조와의 동맹을 강화했고 동생 티말과도 결국 화해하여 그에게 라흐바 등 유프라테스 동안의 영지를 주었다. 1038년 봄, 다마스쿠스 총독 아누쉬테킨이 카이로의 승인도 없이 북진해오자 나스르는 티말과 함께 그와 대적했으나 텔 파스에서의 두 번째 전투에서 후자가 이탈해버려 대패하고 전사하였다.[35] 그의 수급은 아누쉬테킨에게 보내졌고, 몸통은 하마 시타델에 못박혔다.

티말은 할랍을 장악했지만 아누쉬테킨이 북상해오자 사촌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가족들과 라흐바로 도주하였다. 1038년 6월 아누쉬테킨은 짧은 포위 후 할랍의 항복을 얻어내며 시리아를 통일하였다. 이후 그는 심복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는데 파티마 와지르 알리의 사주로 반란이 일어나자 할랍으로 피신하였다.[36] 1042년 1월 그는 상심한 채로 사망하였고 아내의 영지인 라카에 머물며 파티마 조의 승인 하에 할랍 공격을 준비하던 티말은 손쉽게 도시를 수복하였다.[37] 다만 아누쉬테킨의 용병들이 저항하던 시타델은 7개월 후에야 점령되었다. 그동안 티말은 동로마 측에 사절을 보내 재차 연공 납부 및 복속을 표하였고 1045년엔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책봉 역시 받았다.[38] 그러나 2만 디나르의 연공을 중단하며 후자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048년 파티마 군대가 북상해 할랍을 포위했지만 때마침 홍수로 진영이 붕괴되자 철수하였다.[39]

이후 티말은 파티마 측과의 평화를 수복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40] 1049년 리파크 휘하 3만 대군이 재차 북상하였다. 다양한 이유로 리파크의 진격이 지연되는 동안 티말은 동로마와 동맹하는 등 철저히 준비하였고 그해 8월 할랍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파티마 대군을 격파하였다.[41] 부상당한 채로 사로잡힌 리파크는 며칠 후 사망하였다. 승전 후 티말은 포로들을 모두 석방하며 재차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고 티레의 카디가 중재에 나섰다. 1050년 티말이 부인 앗 사디야와 아들을 포함한 사절단을 카이로에 보내 2년치 연공인 4만 디나르를 납부하고 라흐바[42] 할양을 제시하자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는 그의 지배권을 승인하였다. 이후 티말은 동로마와 파티마 양 제국에 연공을 바치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할랍은 적지 않은 조공 부담에도 불구하고 매우 번영하였다. 많은 건축물들이 지어졌고 시민들 역시 낮은 물가에 만족하였다.

평화가 유지되던 1058년 8월, 티말은 돌연 파티마 조에 할랍을 넘겨주고 대신 베이루트-아크레 영지를 얻었다. 이후 하산 이븐 물힘 (마킨 앗 다울라)가 할랍 총독으로 봉해졌는데 그에 반발한 바누 킬랍은 티말의 조카 마흐무드 이븐 나스르를 지도자 삼아 두차례의 시도 끝에 1060년 9월 할랍을 수복하였다.[43] 이로 인해 당시 카이로에 있던 티말의 영지는 압수되어 하산에게 주어졌고 티말은 할랍으로 돌아가 바누 킬랍 유지들의 지지를 얻었다. 저항하던 마흐무드는 그의 생모인 앗 사디야의 중재로 보상금을 받고 물러났다. (1061년) 다만 티말은 이듬해 말엽 사망하였다. 그는 라흐바의 독립 영주인 동생 아티야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조카 마흐무드가 반발, 내전이 터졌다. 1063년 7월의 전투는 무승부였고 아티야는 분할안을 거부, 튀르크 인들을 고용해 맞섰다. 하지만 그들이 마흐무드에게로 배신하며 1065년의 2차전에서 패하였고 할랍에서 3달간 농성하다 그해 8월 항복하였다.[44]

2년의 내전 후 새로운 분할안이 제시되었는데 마흐무드는 할랍과 홈스, 아티야는 기존 라흐바와 라카가 주어졌다. 그러나 1067년 마흐무드가 라흐바 원정을 준비하고 1068년 아티야가 홈스를 공격하는 등 대립은 이어졌다.[45] 다만 후자의 원정 동안 자지라의 우카일 왕조가 라흐바를 점령해버렸고 상심한 아티야는 동로마로 망명한다.[46] 한편 마흐무드는 집권에 도움을 주었던 튀르크 인들이 동족들을 부르며 세력을 증대시켜 할랍 일대에 불안정을 초래하자 1070년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이들의 통제를 부탁한다.[47] 후자의 호의를 사기 위해 마흐무드는 쉬아에서 수니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파티마 대신 셀주크 보호 하의 압바스 칼리파에 복속하였다. 그럼에도 1071년 초엽 알프 아르슬란은 할랍을 포위하였으나[48] 완강한 저항으로 포위는 장기화되었고 4월 마흐무드가 복속을 표하자 만족하고 북상, 그 틈에 침공해온 동로마 대군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2.3.4. 혼란기와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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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년 우마이야 칼리파 왈리드 1세가 건설한 우마이야 대사원에 셀주크 왕공 투투쉬 1세는 45m 미나렛을 추가해 풍미를 더했다

셀주크 제국의 위협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마흐무드는 1075년 사망하였다. 그는 막내 아들 샤빕을 후계자로 정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장남 나스르가 집권하였다. 그해 가을 나스르 휘하 튀르크 용병들은 동로마로부터 만비즈, 파티마 조로부터 라파니야를 수복하였다. 하지만 나스르는 그 대장인 아흐마드 샤를 이드 알 피트르 때에 체포해 감금하였고 직접 알 하디르의 튀르크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도중 활에 맞아 전사하였다. (1076년 5월) 이후 그의 동생 사비크가 카파르탑의 아미르 알리의 도움을 받아 즉위했는데 다른 동생 와싸브가 바누 킬랍의 지지 하에 반발하며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1080년, 모술-라카 일대를 지배하던 우카일 왕조의 무슬림 (샤라프 앗 다울라)이 시민들의 요청으로 할랍에 입성하였다. 사비크는 시타델에서 농성했지만 후원자인 알리의 중재에 부근 작은 영지를 대가로 항복하였다. 이듬해 무슬림은 하란을 점령, 미르다스 조의 동맹인 누마이르 왕조를 멸하였다.[49]

모술-하란-할랍-홈스에 이르는 대국을 통치하게 된 무슬림은 주군 말리크샤에게 반기를 들었고 진압되었으나 사면받았다. 이후 안정적으로 할랍을 통치하던 무슬림은 1085년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진격해온 룸 술탄 쉴레이만의 침공에 맞섰으나 패하고 전사하였다. 그의 동생 이브라힘이 모술을 계승하였고 할랍은 민병대장 하산 이븐 히바트가 맡았는데 그는 말리크샤에 복속하였다. 한편 후자의 동생 투투쉬는 쉴레이만을 전사시키고 1086년 5월 도시를 장악했는데 하산은 시타델에서 저항하였다. 그해 10월 말리크샤가 친히 할랍으로 향하자 투투쉬는 다마스쿠스로 철수하였다. 12월 할랍에 입성한 말리크샤는 튀르크인 아크 순쿠르를 총독으로 봉하였다. 1092년 말리크샤가 사망한 후 터진 내전에서 투투쉬는 할랍을 점령하였고 자신에 충성하길 거부한 아크 순쿠르를 처형하였다. (1094년) 그러나 그 역시 이듬해 전사하였고 장남 리드완이 할랍, 사남 두카크가 다마스쿠스를 계승하였다.

형제들은 안티오크, 예루살렘 총독들을 끌어들여 싸웠고 이 내전은 2년 후 1차 십자군이 당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리드완 (파크르 알 물크)의 소극적 대처에 안티오크는 십자군에게 함락되었고 이후 할랍은 안티오크 공국의 위협에 시달린다. 1102년에는 탕크레드의 협박에 대사원에 십자가를 게양할 정도였다.[50] 자세한 내용은 십자군 전쟁/연표 참고. 다만 1108년 탕크레드의 도움으로 모술 총독 자왈리와 에데사 연합군을 격파하기도 했으나 그 대가로 할랍은 안티오크 공국의 속국이 되었다. 이에 할랍의 카디 이븐 알 카샤브가 1111년 바그다드에서 지하드를 요구하며 시위하기도 하였다. 1113년 리드완은 사망하고 아들 알프 아르슬란 (샴스 알 물크)가 계승하였다. 1114년에는 리드완 대에 우대되던 아사신들이 학살되었고 같은해 아타베그인 환관 룰루가 주군 알프 아르슬란을 시해하고 동생 술탄 샤를 옹립하였다. 다만 1117년 룰루 역시 암살되어 할랍은 혼란에 빠졌다.[51]

1118년 7월, 마르딘의 아미르 일가지 (나즘 앗 딘)가 할랍에 입성해 술탄샤를 감금하고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듬해 그는 툭테긴과 동맹하고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안티오크 공 로제르를 전사시키며 일약 지하드 영웅이 되었다. 1122년 일가지가 사망하자 장남 술레이만이 마르딘, 조카 술레이만이 할랍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에데사 백작과 예루살렘 국왕을 연이어 사로잡은 일가지의 차남 발라크 (누르 앗 다울라)가 1123년 6월 압도적인 지지와 할랍에 입성하였다. 한편 그해 에데사 병력이 할랍 근교를 약탈하자 도시의 카디가 시내의 성당 5개 중 3개를 모스크로 바꾸기도 했다. 1124년 6월 발라크는 만비즈 포위 중 전사하였고 사촌 티무르타쉬가 계승했는데 그는 마르딘을 선호하며 할랍을 방치하였다. 그러자 그해 10월 십자군이 할랍을 포위하였고 카디 이븐 알 카샤브의 요청에 모술의 총독 아크 순쿠르 알 보르소키가 포위를 풀어내며 도시에 입성하였다. (1125년 1월)

알 보르소키는 카파르탑을 수복했으나 아자즈 전투에서 십자군에 패한 후 1126년 11월 아사신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모술은 아들 마수드, 할랍은 부관 투만에게 맡겨졌는데 셀주크 술탄이 봉한 쿠틀라가 1127년 6월 도시를 장악한다. 그러나 할랍 시민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그해 10월 총독을 축출하고 발라크의 사촌 술레이만을 아미르로 추대하였다. 그러자 다음달 십자군이 만비즈 영주와 재차 할랍을 포위하였고다. 한편 1127년 7월 마수드가 사망한 후 그 어린 아들의 아타베그로 봉해진 이마드 앗 딘 장기 (말리크샤의 할랍 총독 아크 순쿠르의 아들)는 술탄으로부터 할랍 통치권을 인정받곤 포위된 도시에 부관을 파견하였다. 이 군대는 1128년 1월 십자군을 격퇴하고 할랍에 개선하였고 6월엔 장기 본인이 입성하였다. 이에 마르딘의 티무르타쉬와 홈스, 샤이자르가 장기에게 복속하였다. 이듬해 술탄이 모술 양도를 지시하자 장기는 무력시위와 선물로 명령의 철회를 유도하였다.

2.3.5. 장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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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 앗 딘에 의해 지어진 시타델 내의 하맘 (목욕탕)과 모스크

장기는 1130년의 홈스 원정 후 부관 사와르에게 할랍을 맡기고 이라크 문제에 집중, 1132년 술탄 마수드를 도와 바그다드로 진군하였다.[52] 하지만 그해 8월 칼리파 군에게 대패한 장기는 홀로 쫓기다가 티그리트의 영주 아이유브에게 구출된다. 이후 칼리파와 동맹한 장기는 1135년 실패한 다마스쿠스 원정의 이듬해에 술탄 마수드를 격파하고 칼리파 알 라시드의 모술 피신을 받아주나 결국 술탄의 협박으로 축출한다. 이라크 대한 야욕을 접기로 한 장기는 1137년 7월, 재차 홈스를 포위하던 중 그 동맹인 트리폴리 백작을 바린 전투에서 격파하고 카파르탑과 마라트 알 누만을 점령하며 '지하드'에 나섰다. 이듬해엔 아르카를 점령하였고 동시에 다마수쿠스 태후와 결혼, 지참금으로 홈스를 얻었다. 한편 1138년 8월 시리아에서 23만명이 죽은 대지진이 발생, 할랍도 성벽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1139년 바알벡을 점령한 장기는 이듬해 다마스쿠스를 포위, 아미르를 복속시켰다.

장기의 위협에 다마스쿠스의 섭정 우누르는 십자군과 동맹하였고 이에 장기는 안티오크 습격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지냈다. 그러던 1144년, 장기는 에데사 백작을 할랍 방면으로 유인한 후 에데사 (우르파)를 포위하였고 그해 12월 함락하였다. 이로써 장기는 일약 이슬람권의 영웅이 되었고 이듬해 칼리파로부터 기존 아타베그 대신 정식 아미르 직위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1146년 십자군의 에데사 공격을 격파한 장기는 반란 진압 중 그해 9월 암살되었다. 모술은 장남 사이프 앗 딘, 할랍은 차남 마흐무드 (누르 앗 딘)이 계승하였다. 마흐무드는 재차 십자군의 에데사 공격을 격파하고 1147년 우누르를 도와 보스라의 십자군을 격퇴했으며 아르타를 점령하였다. 이후 우누르와 연합한 마흐무드는 1149년 6월 이나브 전투에서 안티오크 공 레몽을 전사시키며 명성을 떨쳤다. 직후 우마르가 사망하자 1150년과 1151년 다마스쿠스 포위에 나섰는데 십자군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1152년 타르투스를 일시 점령하는 등 힘을 과시한 마흐무드는 마침내 1154년 4월 아이유브의 도움으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한다. 1157년 6월 마흐무드는 야곱의 여울에서 보두앵 3세의 십자군을 격파했으나 이내 와병하였고 할랍에선 일대 혼란이 일었다. 1158년 조금 회복한 마흐무드는 샤이자르를 점령하고 십자군이 포위한 다마스쿠스를 구원했는데 7월 부타이하 전투에선 보에몽 3세에게 패하였다. 이후 1163년 파티마 조의 재상 샤와르가 망명해 온 것을 계기로 마흐무드는 십자군과의 이집트 쟁탈전에 들어갔다.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 참고.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가 이집트 원정에 나선 그해 9월 마흐무드는 크락 데 슈발리에를 포위하나 부카이아 전투에서 안티오크-트리폴리 군에게 패하였다. 다만 1164년 8월, 아이유브의 동생 시르쿠를 이집트에 보낸 후 재차 겨룬 하림 전투에서 마흐무드는 안티오크 공작과 트리폴리 백작을 사로잡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1168년, 아모리가 대대적으로 이집트를 침공하자 파티마 칼리파가 도움을 요청해왔다. 이에 마흐무드는 시르쿠와 조카 유수프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십자군이 철수하자 이집트를 장악, 재상 샤와르를 처단하였다. (1169년 1월) 이후 시르쿠가 재상이 되었는데 두달만에 그가 병사하자 유수프 (살라흐 앗 딘)가 뒤를 이었다. 그는 같은해 누비아 인들의 반란과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동로마 연합군을 격파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1170년 유수프는 가자를 공격하고 아카바를 점령하는 등 명성을 드높혔다. 한편 마흐무드는 이집트의 수니파 복원 지시에 유수프가 머뭇거리자 분노하였고 1171년 여름 남하하였는데 요르단에 있던 유수프가 대면을 거부하고 회군하자 의심은 증폭되었다. 다만 유수프가 사과 편지를 보내고 그해 9월 마지막 파티마 칼리파가 사망하자 수니파를 복원하며 긴장은 완화되었다. 한편 유수프는 유사시를 대비해 리비아와 예멘을 정복해둔다.

1173년 7월, 마흐무드는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가 부재한 틈에 카라크를 포위하고 유수프를 소환하였다. 하지만 후자는 부친 아이유브의 위독함을 이유로 도중 철수해버렸고 마흐무드의 의심은 증폭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아이유브가 병사하며 양측의 중재자가 사라지자 1174년 마흐무드는 이집트 원정을 준비했는데 그해 5월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하였다. 후계자인 앗 살리흐 이스마일은 불과 11세였고 그의 삼촌인 모술의 마우두드가 에데사와 할랍을 점령해버렸다. 7월엔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노리던 아모리 역시 사망하였고 13세의 보두앵 4세가 계승한다. 다마스쿠스 총독과 할랍 총독이 이스마일의 섭정권을 두고 다투는 사이 시칠리아 군의 침공과 파티마 부흥운동을 진압한 유수프는 겨우 7백의 기병과 북상해 다마스쿠스를 장악한다. (1174년 11월) 이후 홈스, 하마를 접수한 유수프는 이스마일이 있는 할랍을 포위하는데 십자군과 아사신의 개입으로 철수한다. (1175년 2월)

2.3.6. 아이유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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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랍의 아미르 알 아지즈 대에 완성된 시타델 입구 방어 시설

1175년 4월, 하마 전투에서 할랍-모술의 장기 군대를 격파한 유수프는 재차 할랍을 포위하고 이스마일로부터 할랍을 제외한 시리아의 지배자로 인정받은 후 회군하였다. 이후 십자군과 휴전한 유수프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왕'을 칭하며 내치에 주력하였고 1176년 4월 텔 술탄 전투에서 재차 모술 군을 격파, 할랍을 포위하나 수비대의 강경한 저항으로 포기하였다. 다만 만비즈, 비자아 등 인근 요새들을 점령하며 도시를 봉쇄하였고 그해 5월 칼리파로부터 술탄 칭호를 받는다. 한편 1177년 할랍의 이스마일은 모술측 총독을 처형하고 친정에 나섰다. 유수프는 그해 11월 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했다가 몽지스가르 전투에서 패하였고 1179년 6월 마르즈 아이윤 전투에서 보두앵 4세를 격파하며 반격하였다. 다만 1180년 유수프는 재차 십자군과 휴전을 맺었다. 그러던 1181년 12월, 할랍의 이스마일이 사망하였고 사촌인 모술의 마수드 (이즈 앗 딘)가 도시를 접수하였다.

1182년 5월, 마수드는 할랍을 신자르 영주인 형 장기 2세에게 넘기고 모술로 돌아갔다. 한편 유수프는 벨부아 전투와 베이루트 포위 등 십자군과 맞서고 장기 왕조와의 2년 휴전이 종료된 9월에야 할랍을 포위하였다. 역시나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그는 포위를 풀고 북진해 에데사, 누사이빈을 점령하였고 이에 라카가 항복하였다. 이후 유수프는 모술을 포위했는데 셀주크 술탄과 칼리파가 개입하자 회군, 도중 신자르를 점령한다. 1183년 할랍-모술 연합군이 결성되었으나 유수프가 진군해오자 도주하였고 그해 5월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한 그는 마침내 할랍을 포위한다. 비록 포위 도중 수비대의 공격으로 동생 부리가 전사했음에도 6월 장기 2세가 항복하자 유수프는 그에게 기존 신자르 영지를 돌려줄 뿐만 아니라 라카, 누사이빈, 사루즈까지 더해주었다. 유수프는 동생 알 아딜 아흐마드 (사이프 앗 딘)를 할랍 총독으로 봉하였다.

한편 1180년대 들어 메카 순례단을 습격하던 카라크의 르노 드 샤티용이 1183년 메카 자체 기습을 시도하자 유수프는 두차례에 걸쳐 카라크를 포위한다. 다만 1185년 십자군과 휴전이 체결되자 유수프는 재차 모술 포위에 나서지만 하란에서 중병에 걸려 회군하였고 겨우 회복한다. 결국 이듬해 모술의 마수드가 복속하는 것으로 유수프는 만족하였고 그해 11월 르노가 재차 순례단을 습격하자 유수프는 휴전 종료를 선언한다. 그리고 1187년 7월,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파한 유수프는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3차 십자군과 맞선 후 1193년 3월 사망한다. 장남 알리가 다마스쿠스, 차남 우스만이 이집트, 삼남 가지 (앗 자히르)가 알레포를 계승하였다. 할랍에 거쳐 이집트, 다마스쿠스 총독을 지낸 알 아딜은 자지라를 맡게 되었다. 1194년부터 다마스쿠스의 알리와 이집트의 우스만은 내전을 벌였는데 앗 자히르는 전자로부터 라타키야, 자블라를 얻어내었다.

양측의 내전을 중재하며 명망을 쌓던 알 아딜은 1196년 본심을 드러내 알리를 축출하고 다마스쿠스를 장악한다. 그리고 1198년 이집트의 우스만이 요절하자 알리는 어린 술탄의 후계자로 추대된다. 이듬해 알리의 요청에 앗 자히르는 홈스의 시르쿠 2세와 알 아딜이 부재한 다마스쿠스를 포위한다. 하지만 이듬해 알 아딜은 아들 알 카밀의 원군으로 포위를 뚫고 알리를 추격해 격파, 이집트를 정복해 술탄이 되었다. (1200년 2월) 이에 이듬해 앗 자히르는 알리와 함께 재차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나 알 아딜이 후자에게 마야파리킨을 내어주며 연합을 붕괴시켰다. 결국 1202년 3월 앗 자히르는 숙부 알 아딜에게 복속한다. 한편 앗 자히르는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4세와 친선을 유지했는데, 1203년 아르메니아가 안티오크를 공격하자 킬리키아를 침공해 그들을 철수시켰다. 양측의 깊은 관계에 120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그에게 서신을 보내 안티오크의 라틴 교회 지지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1216 10월 앗 자히르 가지는 사망하였고 그와 알 아딜의 딸 다이파 카툰 사이의 아들 알 아지즈 무함마드가 계승하였다. 다만 그는 2세로 어렸기에 환관 토그릴이 섭정을 맡았다. 한편 2년 후 알 아딜 역시 사망하였다. 아들 알 카밀, 알 무아잠, 알 아슈라프가 각각 이집트, 다마스쿠스, 자지라를 계승한다. 그러던 1218년 2월, 알리는 룸 술탄 카이카우스 2세와 할랍을 공격하는데 이를 알 아슈라프가 개입하여 격퇴하자 섭정 토그릴은 그에 복속하였다. 1231년 토그릴은 자블라를 침공한 십자군을 격파, 그들과 2년 휴전을 체결하였다. 그해 7월 성년이 된 알 아지즈는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알 카밀의 딸 파티마 카툰과 결혼, 부친과 마찬가지로 술탄과 인척을 맺었다. 그럼에도 알 아지즈는 알 카밀의 아르투크 왕조 원정 때에 도움을 거부한 유일한 시리아 아미르였다. 다만 할랍을 위협하던 룸 셀주크에 대한 원정엔 파병하였고 그외에 부왕 대에 시작된 할랍 시타델 증축을 마무리 하였다.

할랍의 자치와 평화를 유지하던 알 아지즈는 1236년 11월 요절하였고 6세 아들 앗 나시르 유수프가 계승하였다. 이에 그 조모인 다이파 카툰이 섭정에 나섰다. 이듬해 성전 기사단이 침공해왔지만 할랍 군에게 격파되었고 한편 다마스쿠스는 알 무아잠, 알 아슈라프에 이어 또다른 동생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게 넘어갔다. 이스마일은 할랍, 홈스와 동맹하여 이집트의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에 맞섰고 1244년에는 전자가 십자군, 후자가 호라즘 인들을 끌어들인 라 포르비에 전투로 이어졌다. 여기서 이스마일이 패하자 다이파 카툰은 아이유브와 동맹하였고 1245년 할랍-이집트 군이 다마스쿠스를 포위, 10월 이스마일이 항복한다. 한편 1240년부터 할랍을 침공하던 호라즘 인들은 1246년 아이유브의 계약 해지에 반발해 이스마일과 동맹하고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지만 그해 6월 홈스의 알 만수르가 할랍 군대와 이를 격파하였다. 이후 이스마일은 할랍으로 망명한다.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은 술탄 아이유브는 1247년까지 홈스, 하마를 복속시키고 살카드, 바니야스, 바알벡 등을 정복하며 시리아의 직할지 편입에 나섰다. 이제 카라크를 제외하면 그와 맞설 이는 할랍의 앗 나시르 유수프 뿐이었다. 1248년 5월, 유수프는 홈스를 포위하였고 아이유브가 와병하여 돕지 못하자 그해 8월 아미르 무사가 항복하였다. 10월 아이유브는 병중임에도 재차 홈스를 포위했지만 이듬해 칼리파의 중재로 유수프의 지배를 승인하고 7차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회군하였다. 다만 1249년 9월 카라크는 아미르 다우드가 할랍을 향한 틈에 이집트 군에게 점령되며 양강 구도가 확실해졌다. 그러나 그해 11월 아이유브가 병사하고 후계자인 투란 샤가 1250년 5월 십자군을 격파하며 집권한 바흐리 맘루크들에게 암살되자 정세는 급변하였다. 졸지에 아이유브 가문의 당주가 된 유수프에게 다마스쿠스가 항복해온 것이다. (1250년 7월) 한편 카라크는 재차 자립한다.

2.3.7. 대 몽골 전쟁

시리아를 통일한 유수프는 아이유브 왕조 재건에 나섰다. 시리아 대군과 남하한 유수프는 1251년 2월 압바사 전투에서 이집트의 섭정[53] 아이바크와 맞섰는데 할랍의 맘루크 (아자지야) 병력이 후자에게 투항하며 패하였다. 이듬해 아이바크가 십자군과 동맹해 북진을 시도하자 유수프는 직접 남하에 이를 저지시켰다. 그리고 1253년 칼리파의 중재로 유수프는 팔레스타인을 이집트에 할양, 아이바크와 휴전하곤 십자군의 시돈을 습격하였다. 다만 1254년 유수프는 십자군과 2년 반의 휴전을 맺는다. 한편 같은 시기 아이바크가 바흐리 맘루크를 숙청하자 바이바르스 등 잔존 아미르들이 유수프에게 망명하였다. 이듬해엔 아지자야 맘루크마저 아이바크를 배신하고 투항해왔는데 유수프는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고 1256년 재차 칼리파의 중재 하에 팔레스타인을 할양받는 것에 그쳤다. 실망한 바이바르스는 1257년 가을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수프가 친히 반격하자 패하고 카라크에 의탁한다. 한편 그해 유수프는 술탄으로 책봉되었다.

한편 1242년 할랍 북쪽을 약탈했던 몽골군은 1256년 왕공 훌라구 하에 대대적으로 출정하였다. 1258년 2월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함락하였다. 공포를 느낀 유수프는 훌라구에게 사절을 보냈는데 후자는 유수프 본인 출두를 지시하였다. 유수프는 자신 대신 장남 무함마드가 대신 파견되었다. 유수프의 저자세 외교에 분노한 쿠르드 맘루크들이 카라크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카라크의 바이바르스가 팔레스타인을 약탈하고 시리아 군을 격파하자 1259년 유수프는 재차 친정에 나서 그를 패배시켰다. 바이바르스는 항복하고 유수프 휘하로 돌아왔는데 그해 말엽 훌라구가 시리아를 침공하며 상황은 급변하였다. 유수프는 이집트 술탄 쿠투즈와 동맹하고 다마스쿠스에 머물렀는데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1260년 초엽 일단의 맘루크들의 그의 암살을 꾀하였고 실패하자 가자로 도주, 유수프의 동생 가지를 술탄으로 옹립하였다. 한편 그해 1월 18일 훌라구는 할랍을 포위한다.

할랍의 총독인 투란 샤 (살라딘의 막내 아들) 는 훌라구의 항복 제안을 무시하였다. 이후 몽골군은 5일간의 투석기 세례와 땅굴 공격 후 1월 24일 할랍을 점령하였다. 기독교도를 제외한 시민 대부분이 학살되었고 몽골의 동맹인 아르메니아 군대가 대사원에 방화하였다. 다만 시타델에서 저항하던 투란 샤는 한달 후에야 항복하였고 훌라구의 사면을 받았다. 한편 할랍의 함락에 놀란 유수프는 다마스쿠스도 버리고 가자로 도주하였다. 이에 3월 다마스쿠스가 몽골군에 항복하였다. 바이바르스는 유수프에게 반격을 제안하나 거절당하자 쿠투즈와 연락, 그의 우대 약속에 이집트로 돌아간다. 한편 이집트와 몽골 사이에 고심하던 유수프는 하마의 알 만수르에게 병력 대부분과 가족들을 맡겨 쿠투즈에게 보냈다. 이후 북상한 유수프는 카라크의 초청도 거부하고 훌라구의 부관 키토부카에 항복, 후자의 요구에 따라 알 준 성채를 몽골군에 항복시키고 이란의 훌라구 궁정으로 압송되었다.

할랍 점령 후 뭉케 칸 사후 내전 소식에 이란으로 돌아갔던 훌라구는 유수프를 후히 대접해주었다. 1260년 9월 술탄 쿠투즈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키토부카를 전사시키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근데 그 군대 중 기존 유수프의 병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에 훌라구는 분노하여 그를 처형하였다. 한편 아인잘루트 전투 직후 시리아에선 몽골 부역자들에 대한 시민들이 린치가 벌어졌는데 할랍도 예외는 아니었고 기독교도 일부가 학살되었다. 10월 20일 맘루크 군이 할랍에 입성하고서야 질서는 회복되었다. 얼마후 이집트로 돌아가던 바이바르스는 할랍 총독 요구가 거절되자 쿠투즈를 암살하고 술탄이 되었다. 한편 11월 할랍에선 아미르들이 쿠투즈가 임명한 총독을 축출하고 맘루크 장교 라긴을 추대했는데 다음달 몽골군이 재침하자 하마로 철수, 12월 홈스 아미르 무사의 지휘 하에 1차 홈스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몽골군은 할랍을 점령, 학살을 자행하였다.

2.3.8. 맘루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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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총독 아크부가 알 우트루쉬의 이름을 딴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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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4년 지어진 아르군 알 카밀 비마리스탄 (병원)

1261년 1월, 다마스쿠스 총독의 반란을 진압한 바이바르스는 할랍에 파병하였고 그해 4월 몽골군은 철수한다. 그러자 모술의 아미르가 이집트로 찾아와 복속하였다. 한편 1261년 7월 맘루크 군대가 할랍에서 철수하자 군벌 아쿠쉬 알 바를리 (샴스 앗 딘)가 도시를 장악, 의탁해온 압바스 왕자를 칼리파 알 하킴 2세로 옹립하여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카이로에선 다른 왕자인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가 옹립됨) 10월, 바이바르스는 재차 군대를 파견해 할랍을 수복하였고 아쿠쉬는 하란을 새 거점으로 삼았다. 1262년에 안티오크 공국이 아르메니아 군과 할랍을 노렸으나 맘루크 주둔군에 격퇴되었다. 한편 바이바르스는 할랍까지의 바리드 (군사적 연락망)를 정비해 도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1268년 몽골군이 재차 할랍을 공격해오자 친정에 나서 후퇴시켰다. 그러곤 할랍을 거점으로 안티오크를 공격, 마침내 한세기 반가량 도시를 위협했던 안티오크 공국을 멸하였다.

1269년엔 몽골군이 할랍 북쪽을 습격했으나 바이바르스가 다마스쿠스에 온 것 만으로도 후퇴하였다. 그러던 1271년 가을 사마가르 휘하 1만 몽골-룸 셀주크군이 재침해오자 할랍 주둔군은 11년 전처럼 하마로 후퇴하였다. 다만 사마가르 역시 술탄이 친정에 나서자 철수하였고 11월 바이바르스는 할랍에 개선하였다. 그 틈에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기습하였으나 이듬해 바이바르스와 10년 휴전을 맺는다. 1272년 11월 몽골군은 알 비라를 포위하며 시리아 침공을 시도했으나 바이바르스에 격파되었다. 1273년 바이바르스의 명으로 할랍 총독 라긴은 아르메니아의 친몽골 성채 카이뉘크를 점령하였다. 1277년, 이번엔 몽골의 동맹 룸 셀주크를 응징하기로 한 바이바르스는 그해 4월 할랍을 거져 엘비스탄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였고 카이세리를 점령한 후 귀환하였다. 이로써 룸 셀주크는 붕괴되었다. 1266년, 1275년의 원정으로 아르메니아 역시 쇠퇴, 맘루크 패권이 확립되었다.

한편 1277년 7월 술탄 바이바르스는 룸 셀주크 원정 사망하였고 어린 후계자들을 거쳐 2년 후 그의 부관이던 칼라운이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이번에도 다마쿠스 총독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1280년 칼라운에게 패해 일 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몽골군은 1280년 가을 재차 시리아를 침공해 10월 할랍을 점령, 시장을 약탈하고 사원들에 방화하였다. 다마스쿠스는 할랍 출신 난민들로 가득하였다. 다만 몽골군의 지원 요청에 십자군이 술탄과의 휴전이 1년 남았다며 거절하였고 몽골군은 칼라운의 북상에 이듬해 귀환을 약속하고 철수하였다. 한편 홀로 출정한 구호기사단이 맘루크 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1281년 봄 칼라운은 십자군과 재차 10년 휴전을 맺었고 가을 무렵 몽골군은 조지아-아르메니아-구호기사단의 4만 대군과 시리아로 남하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2차 홈스 전투에서 칼라운은 격전 끝에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이듬해 구호기사단의 마르캅을 점령해 이들을 응징하였다.

재침을 준비하던 아바카 칸은 1282년 4월 사망하였고 후계자인 아흐마드 테쿠데르 칸은 무슬림으로서 칼라운과 친교를 맺으며 시리아에 평화가 찾아왔다. 비록 테구테르 칸은 2년 후 처형되었고 뒤를 이은 아르군 칸은 서유럽에 4차례나 사절을 파견해 협공을 논의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 틈에 칼라운은 1287년 라타키야, 1289년 트리폴리를 점령하며 트리폴리 백국을 멸하였다. 1290년 11월 아크레 원정을 앞두고 칼라운은 사망하였고 계승한 아들 칼릴은 1291년 5월 아크레를 함락, 예루살렘 왕국을 멸하였다. 동시에 아르군 칸과 교황이 모두 사망하여 칼릴은 별 방해를 받지 않고 레반트를 통일하였다. 아르군 다음대의 게이하투 칸은 1292년 칼릴에게 할랍을 할양하라 협박했지만 무시되었다. 이후 내전 끝에 즉위한 마흐무드 가잔 칸은 무슬림이면서도 맘루크 조와의 대립을 이어갔다. 1299년 가을, 가잔 칸은 6만 대군과 시리아를 침공해 할랍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3차 홈스 전투에서 맘루크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를 격파하지만 보급품 부족으로 이듬해 회군하였다. 한편 십자군은 마지막 시도로 1300년 알렉산드리아, 비블로스, 아크레, 타르투스를 습격하곤 시리아 근해의 루아드 섬에 거점을 마련하고 서유럽의 도움을 기다렸다. 가잔 칸은 1301년 2월 재차 할랍을 약탈한 후 다마스쿠스에 쿠틀루그 칸 휘하 2만 대군을 남기고 귀환하였다. 1302년 9월, 술탄 무함마드는 십자군 거점 루아드 섬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1303년 4월 쿠틀루그 칸은 아르메니아 군과 함께 남하했지만 바이바르스 알 자샨키르가 이끈 맘루크 군에 대패하고 물러났다. 이후 몽골군은 더이상 시리아를 넘보지 못하였고 1313년 올제이투 칸의 라흐바 포위를 마지막으로 무력 충돌은 없었다. 결국 1323년 일 칸국의 아부 사이드 칸은 섭정 추판의 조언대로 할랍 조약을 맺어 맘루크 왕조와의 대립을 종식시켰다. 이로써 시리아는 평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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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할랍에서 술탄을 칭한 총독 자캄이 세운 알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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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년 지어진 얄부가 함맘 (목욕탕)

맘루크 왕조 하에서 할랍은 헬레니즘기와 이슬람 제국 이후 처음으로 장기간의 평화를 누렸다. 1354년의 비마리스탄 (병원), 1398년의 알 아투루쉬 모스크 등의 건축물이 지어졌다. 그러던 1400년, 시리아를 침공한 티무르는 할랍을 점령하고 시민 2만명을 학살해 도시 외곽에 해골탑을 쌓았다. 이후 혼란기를 틈타 1404년 할랍 총독 자캄 (사이프 앗 딘)이 술탄을 칭하고 시타델에 알현실을 세우는 등 독립 군주로 행세하였다. 2년 후 자캄은 이집트 술탄에게 다시 복속, 다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406년 5월) 하지만 이듬해 술탄이 해임하고 새 총독 (나입)을 파견하자 재차 반기를 들었으나 붙잡혀 처형되었다. 한편 혼란기 이후 피난민들이 할랍으로 돌아왔는데 무슬림 시민들이 구도심의 기독교도 구역을 선점해버렸다. 이에 기독교도들은 성벽 북쪽에 정착하였고 알 자디다 (신구역)을 형성하였다. (1420년) 그후 다시 한세기간 평화를 누리던 할랍은 1516년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2.4.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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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화가 마트락츠 나수흐 에펜디 할랍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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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쿠스루위야 모스크 (1546년 건립)

오스만측 통계에 의하면 술탄 셀림 1세가 점령한 1516년 당시 할랍에는 11,224 가구에 5만여 시민이 거주 중이었다. 이후 할랍은 동명의 주 (eyalet)의 치소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사파비 제국을 이어주는 교통로 상에 놓인 할랍은 매우 번영하였고 제국의 제2의 도시로 추산되기도 한다. 시내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활약으로 할랍은 16세기 중반부터 이미 다마스쿠스를 제치고 레반트 일대의 무역 중심지로 떠올랐는데, 이는 1581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설립한 런던 레반트 회사가 18세기 말까지 할랍에 본부를 두고 다마스쿠스에는 오스만 당국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진출하지 않았던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외에 베네치아 공화국 (1548년), 프랑스 (1562년), 네더란드 (1613년) 등 많은 서유럽 국가들이 할랍에 대사관을 세워 무역을 감독하였다. 할랍의 명성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멕베스와 오델로에까지 언급될 정도였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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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기인 17-18세기 아르메니아인 상인 가문의 저택[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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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년 중앙 시장에 지어진 칸 알 와지르

18세기 들어 사파비 제국이 붕괴되고 이란의 비단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동시에 그 판매처였던 할랍 역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는 서유럽이 관심을 둘만한 기반 산업이 없었고 18세기 중반 페르시아 카라반이 적어지며 유럽 상인들 역시 도시에 오지 않게 되었다. 18세기 말엽 오스만 제국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며 사막의 베두인들이 도시를 습격하였고 부유했던 할랍은 이들의 주 목적지가 되어 수난을 겪었다. 주변의 농지가 모두 황페화되자 할랍 시민들은 1798년의 기근과 1822년의 지진 (이때 시타델의 유적들이 파괴됨), 1823-27년의 콜레라로 40만에 달하던 인구가 19세기 말에는 1/4인 10만도 채 되지 않게 폭락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민심도 흉흉해져 1850년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총독이 도주하자 무슬림 군중이 기독교도 구역을 습격해 많은 이들이 살해되고 성당들이 약탈을 겪는 일도 있었다.[56] 결국 오스만 군이 개입하여 5천의 전사자를 내고서야 할랍의 질서가 회복되었다. 링크 참고

2.5.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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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오스만 자본과 프랑스 설계자, 할랍의 기술자가 세운 밥 알 파라즈 시계탑 / 1912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40 순교자 성당에 세워진 종탑

그러던 19세기 중반 할랍은 인근 목화와 담배 등 신작물 생산을 바탕으로 다시 서유럽 상인들을 끌어들이며 중흥기를 맞았는데, 이는 오래가지 못하여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함께 서유럽의 관심을 이집트에 빼앗겼다. 동시에 이집트와의 무역을 책임지는 다마스쿠스가 시리아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다. 한편 1866년 오스만 제국의 행정 개편으로 할랍은 주 (vilayet)의 치소가 되었고 1901년 기준 인구는 11만으로 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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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기준 구도심 일대

1차 대전 시기 알레포는 비교적 후방이었으나, 전쟁 막바지인 1918년 10월에 파이살 1세가 이끄는 아랍 반란군이 하루 간의 시가전 끝에 점령한다. 이때 오스만 육군의 정예인 을드름 부대를 이끌고 할랍에 주둔하던 무스타파 케말은 후퇴 도중 기습을 가해 온 영국-아랍 연합군을 격퇴하며 1차 대전 레반트 전역의 마지막 전투만큼은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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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랍의 오스트레일리아 차량 정찰대

전후 세브르 조약으로 할랍 주는 프랑스령 시리아에 포함되었는데 무스타파 케말은 아랍과 쿠르드인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군을 몰아내고 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어진 로잔 조약에서 할랍 & 안타키야 일대만 터키 영토에서 제외되자 할랍은 배후 도시들인 킬리스, 안테프, 하란, 우르파, 사루츠 등지를 상실해 경제적으로 고립되었다. 1939년엔 외항으로 기능하던 이스켄데룬마저 터키에 포함되며 상황은 악화되었다.

2.6.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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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프랑스 당국이 시리아 양식을 가미해 건설한 그랜드 사라이. 본래 알레포 국의 정부 청사로 쓰일 예정이었다

1920년 9월 프랑스 장군 앙리 구로가 알레프 국을 선언, 할랍은 재차 수도가 되었다. 알레프 국에는 할랍 뿐만 아니라 라카 일대의 평야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시리아 아랍 왕국[57]의 저항을 경험한 구로가 할랍과 다마스쿠스와의 연합을 경계하여 일부러 전자를 우대, 식민주의의 기본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위한 술책이었다. 이후 1923년 알레프, 다마스쿠스, 알라위국이 합쳐진 시리아 합중국이 세워지는데 수도는 다마스쿠스였고 대통령은 할랍 출신 수브히 바라카트가 임명되었다. 그러다 1925년 시리아 남부에서 대반란이 터지자 프랑스 당국은 알레프국을 분리 독립시키려 투표를 시행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뜻과는 달리 다마스쿠스와의 연합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고 할랍을 독립시켜 다마스쿠스에 타격을 주려던 시도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다마스쿠스와 함께 시리아로 독립했음에도 이내 두 도시는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다마스쿠스의 국가당 (1946년 성립)과 할랍의 인민당 (1948년 성립)이 강력히 대립하였고 전자는 이집트, 후자는 이라크와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1할랍 출신의 두 장교들이 연달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후자는 이라크와의 합병을 선언하려 하였으나 그해 12월 하마 출신의 장교가 또 정권을 찬탈해 이를 막았다. 이후 1958년 시리아는 오히려 이집트와 합병하였다. 할랍은 이 역시 지지했는데 1960년 다마스쿠스 장교들이 쿠데타로 이를 무산시켜버렸다. 1963년 그 정부를 뒤엎은 바트당과 나세르 주의자들은 할랍 출신이 주류인 후자가 이집트와의 연합을 재추진하려 하자 다시 분란이 일었다. 이에 바트당은 할랍 출신의 아민 알 하피즈를 내세워 분란을 잠재웠으나 1971년 집권한 하페즈 알 아사드는 다마스쿠스 우대 정책으로 할랍의 소외감을 격화시켰고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의 여파로 시리아에도 심각한 파괴 및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곳도 건물이 무너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3. 다마스쿠스와의 지역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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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알레포의 쇼핑 거리
수도 다마스쿠스와의 지역감정이 있으며 현재 시리아 내전에서도 반군이 점거한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반정부 정서가 엄청나게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알레포 서부는 정부군이 한참 몰리던 2013년에도 견고한 정부군 지역이었다.

시리아 내전/원인 항목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시리아는 원래 지역 이름이었을 뿐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는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바트당이 정권을 잡아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지주들의 땅을 몰수했는데, 특히 알레포 지역의 지주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수도인 다마스쿠스가 사회주의 정책을 입안한 만큼 단순한 지역 차이는 증오를 내포한 지역주의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변수가 존재했다. 다마스쿠스 지방의 유력자들은 어쨌든 친정부적 태도를 취한 반면 알레포 지역은 그렇지 않았고 무슬림형제단이 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했다. 바트당이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지역감정은 개인간의 원한까지 더해 더욱 공고화되었다.

하마 전투에 비해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하마 전투의 전주곡 격으로 알레포에서도 무슬림 형제단이 1979년 6월 16일 알레포의 포병학교를 공격해 생도 수십 명이 학살당하였고, 1980년 4월부터는 알레포 시에서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을 진압하는 데에 10개월이 걸렸고, 수천 명이 그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1980년 6월의 하페즈 알 아사드 암살미수로 이어진다.

3.1. 시리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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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제

파일:Aleppo,_textile_suq_market.jpg
직물 시장

내전 전만 해도 알레포는 시리아 최대 도시이자 가장 경제적으로 활발한 도시였고, 2000년대 초엽 내내 시가지가 확장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히자즈, 이집트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써 무역이 발달했다. 현지에서는 직물업 및 수제 비누 제조업이 발달했고, 1885년에는 직물공들을 중심으로 아랍권 최초의 근대적인 상인회가 설립될 정도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오스만 제국 시기 알레포는 코스탄티니예, 카이로 다음 가는 경제 규모를 지닌 도시였다 한다. 근현대에도 제조업이 발달하여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그에 종사했고, 금속 및 석제 가공이 성행했다. 금 가공업은 한때 시리아 전체 생산의 40%를 차지했다. 이슬람주의 반군이 득세하기 전까지는 알코올 음료 제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내전으로 침체되었던 경제는 2022년 7월, 화력 발전소가 일부 가동을 재개하는 등 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5.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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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포 기차역

알레포는 시리아 국영철도의 본부가 위치하는 등 시리아 철도 허브이다. 1912년 역사가 건설된 후 이스탄불 ~ 바그다드를 잇는 바그다드 철도를 따라 열차가 운행되었으나 2011년 내전 발발 후 중단되었다. 라타키아, 다마스쿠스, 데이르에조르 등의 국내선 철도 역시 내전 도중 중단되었다가 2020년 들어 다마스쿠스 방면을 중심으로 복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1924년 세워진 알레포 국제공항 역시 2013년 들어 운영이 중단되었고, 2020년 재개되었다가 2022년 이스라엘 군의 공습으로 활주로가 파괴되어 재차 중단되었다.

6. 기독교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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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포의 가톨릭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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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교 구역의 알 자지다 골목

알레포에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도 주민이 있으며, 시리아 주요 도시 중 최대의 기독교도 인구가 있다. 주로 시리아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그리스 정교회,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7. 여담

아는 사람은 아는 알레포 비누 (غَار 가르)의 원산지다. 고온건조한 기후를 이용, 특유의 제법으로 올리브오일과 월계수오일로만 만든다고 한다.

8. 관련 문서


[1] 시리아 내전[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대모스크 내부에 위치한다[5] 후술할 아르미, 에블라, 얌하드의 역사에 관한 내용도 주변국 혹은 주변 언덕 (텔)에서 발굴된 점토판으로 재구성한 것이기에 깊히 들어갈수록 애매한 경우가 많다[6] 알레포는 '문명의 젖줄'인 유프라테스 강과 불과 60km 떨어져 있다[7] 기원전 10세기 경 팔리스탄 왕국 시기 타이타 왕이 묘사된 부조가 있다. 2003년 독일 발굴단에 의해 조사되었다[8] 무려 백년간 서로 싸웠다. 기원전 24세기의 백년 전쟁이었다. 기원전 2320년 경 키쉬와 연합한 에블라 군이 마리 군을 격파하며 승기를 잡았지만 불과 3년 후에 아카드의 사르곤에게 둘다 점령되어 버리며 전쟁은 허망히 끝났다.[9] 공식적으로는 얌하드 왕국의 야림림 1세가 국가의 공식 수호신으로 선정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달의 신 센을 섬겼고 그의 아들 함무라비 1세 역시 주신으로 센을 주신으로 여겼다[10] 제1,2 에블라 왕가 역시 동부 셈 족 계열이다. 3왕조는 아예 아모리 인이었다[11] 이후 에블라 왕국은 얌하드의 속국으로 연명하다 기원전 1600년 무렵 히타이트 제국에게 최종적으로 멸망한다. 이때 재차 파괴된 에블라는 제대로 복구되지 못하고 작은 마을이 되었으며 서기 7세기 이후 무주지가 되며 현재의 유적으로 남았다. 옛날 할랍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완전히 역전된 것.[12] 이때 얌하드의 속국이던 에블라 제3 왕국도 멸망하였다. 마지막 군주는 인딜림마였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13] 할랍 원정 이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재차 미탄니 제국을 침공하였고 그 와중에 대왕 투쉬라타가 아들에게 암살당한 후 내전이 터졌다. 이후 즉위한 투쉬라타의 조카 슈타르나 3세는 아시리아와 연합해 히타이트와 맞서려 했지만 패하였고 수필룰리우마 1세는 와슈칸니로 진격해 투쉬라타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샤티와자를 옹립하였다. 이후 미탄니는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연명하다가 후자에게 정복되었다 (기원전 1250년 경).[14] 애초에 전자는 히타이트계 루위어를 쓰고 후자는 바다민족 계열이다. 다만 팔리스탄의 후신들 중 하나인 하마의 왕 토우의 영토에는 바다민족들도 상당수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15] 아르파드 (텔 리파트)는 이후로 재건되지 못하였고 유적으로 남아있는데, 현재도 8m 높이의 성벽 일부가 언덕에 남아있다.[16] 19세기만 해도 돔이 남아있었다고 한다[17] 시타델 함락에 난관을 겪자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염소 가죽을 씌워 들여보내 점령했다고도 한다. 이는 440년에 벌어졌다고도 한다.[18] 이후 사모사타에서 농성하던 60,000명의 잔당 역시 알 만수르에게 요직을 보장받는 조건부 항복을 하며 소멸했다.[19] 878년 이집트의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시리아를 장악할 무렵, 할랍의 총독 시마 앗 타윌만이 유일하게 불복하여 안티오크에서 항전했는데, 현지인 여성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흐마드는 타르수스로 향했고, 동로마 원정이 무산되어 귀환할 시에 부관 룰루를 할랍 총독으로 봉했다. 그러나 882년 룰루는 아바스 조로 전향했다. 이듬해 아흐마드는 진격하여 그를 축출하고 압둘라 이븐 파스를 총독으로 세웠다. 다만 그후 반란을 일으킨 타르수스를 포위했으나 함락에 실패하고 철수했다.[20] 사이프 앗 다울라 알리는 지하드 전사의 이미지 때문에 기독교에 적대적이었을 것이라고 오해받지만 그의 신민들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도인 이상 정상적인 통치에 있어 이는 불가능했다. 그가 가장 신뢰했던 비서 역시 기독교도였다. 한편 동생 사이프 앗 다울라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모술의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는 장남 아부 타글립에게 실권을 맡겼다가 그에게 폐위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948년부터 지속된 부와이 왕조의 침공에 결국 979년에 정복되고 말았다.[21]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이 하사한 라캅이었다.[22] 만수르에게 고문당했고, '세기의 미녀'로 불리던 아내 타루드까지 빼앗겨 복수를 추구했다.[23] 그리고 살리흐는 아내 타루드와 다른 부족원들을 되찾았다[24] 바실리오스 2세는 만수르에게 영지를 하사하고, 700명의 타그마와 함께 국경 수비를 맡겼다. 이후 로마노스 2세는 그를 알레포에 복권시켜주겠다며 함께 진군했으나 아자즈 전투에서 미드라스군에 패하여 무산되었다.[25] 상당수의 기독교도 및 유대인들의 가옥들도 약탈되었다고 한다.[26] 한편 파티크 아지즈 앗 다울라는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바실리오스 2세는 아인타브(가지안테프)에 이르렀지만 사태가 종료되자 아지즈는 태세를 바꿔 바누 킬랍과 동맹해 동로마군에 맞섰다. 이에 바실리오스 2세는 철수했다.[27] 정확힌 시트 알 물크로부터 주군을 죽인다면 알레포 총독위를 하사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바드르가 파티크 아지즈 앗 다울라와 그의 충복인 인도인 굴람 투준을 이간질한 후, 후자가 주군을 살해하자 그를 시해자로 몰아 처단하고는 권력을 장악한 것이었다.[28] 1월 18일에 입성한 살리흐는 23일부터 시타델을 포위하며 다시 도시를 잃을 경우, 쉽게 되찾기 위해 성탑들의 파괴를 지시했는데 이에 그가 동로마 제국측에 도시를 넘길 것이라 여긴 시민들이 파티마군과 협력하여 점령이 늦어졌다. 그래도 3월 13일에 궁전이 점령되었고, 살리흐는 시민들에게 약탈하게 했다. 한편 요새화된 시타델의 공성전에 익숙지 않았던 살리흐는 안티오크 총독에게 요청하여 300명의 궁수를 지원받았는데 살리흐를 지원하기 싫었던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철회되었다. 한편 시타델의 파티마군 병력은 6월 6일에 휴전을 제안했으나 살리흐에게 거절당하자 동로마 측에 도움을 청했다. 성벽에 십자가가 내걸리고, 바실리오스 2세를 찬양하며 파티마 칼리파 앗 자히르를 저주하는 모습을 보이자 시내의 무슬림 병력이 살리흐를 도와 시타델를 함락시켰다.[29] 예를 들어 1026-27년 마라트 알 누만에서 무슬림 여성이 희롱당했다는 고발에 군중이 해당 기독교도의 와인 창고를 부수자 살리흐는 창고 습격에 가담한 이들을 체포하였다. 그외에도 살리히는 시내의 궁정에 머물기보다 군주가 되기 전처럼 성밖의 베두인식 야영지에서 머물기를 선호하는 소박한 모습도 보였다[30] 정확힌 나스르가 할랍 도시, 티말이 시타델을 지배했고 후자는 재차 후계자 (왈리 알 아흐드)로 지목되었다[31] 로마노스 3세는 나스르에게 알레포 할양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함. 나스르는 사촌 무칼리드를 사절로 보내 미드라스 왕조는 970년의 협정을 준수하고 있었으니 명분이 없고 싸운다면 준비되어 있다고 응수. 이에 로마노스는 무칼리드를 구금하고 알레포의 관문인 아자즈로 진격했는데 무더위로 본군은 쉬고 정찰대만 성채로 보냈다가 수비대에 격파당해 모두 전사 혹은 사로잡힘. 그러자 로마노스는 우선 철수하기로 했는데 갑작스런 후퇴에 동로마 군은 혼란에 빠졌고 아르메니아 보조군이 물자를 약탈하고 참호 지키던 용병들은 도주. 그 틈에 나스르가 후퇴하는 동로마 군을 기습해 격파. 두 장군 전사, 로마노스는 근위대가 시간 벌어준 덕에 도주. 나스르, 70마리의 낙타로 운반하던 보물 습득. 테오토코스 이콘 제외하고 모조리 노획됨. 이후 기세를 타고 8백의 베두인들이 동로마령 아인타브 당도. 총독 요르요스 마나이케스에게 항복 요구하자 그는 식량 내어주며 순응하는척 하다가 습격해 격퇴. 1031년 마나이케스는 누마이르 왕조령 우르파 (에데사)를 점령한다[32] 그해 4월 아들 아므르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체결. 이듬해 하림의 자발 숨마크 일대 드루즈파 봉기가 일어나자 동로마 장군 니케타스가 진압 도움. 한편 부친 살리흐를 도와 알레포의 킨나스린 문을 열어주었던 민병대장 살림 이븐 알 무스타파드가 나스르의 동로마 복속에 반발해 1034년 반란을 꾀했으나 진압되었고 나스르는 안티오크 총독의 요구에 따라 그를 처형하였다[33] 홈스를 내어준다는 것은 그 북쪽의 하마, 살라미야 등도 포함된 뜻인데 당시 카이로의 와지르 알리가 점차 독립적으로 변하는 다마스쿠스 총독 아누슈테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34] 그 과정에서 모스크와 하맘 등도 세우는데 이슬람 사원의 건축을 기독교도 재상이 명하는 것이었으나 당대엔 크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35] 아누쉬테킨은 카이로에 알레포 공격 청하는 사절 보내곤 답변 오기도 전에 출정. 동로마 측엔 기존 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할랍 공격 승인받음. 살라미야 부근에서 1차 전투에서 나스르 패배, 하마로 후퇴하나 아누쉬테킨이 추격해오자 하마 외곽의 텔 파스에서 전투하고 패배[36] 할랍에 3개월 머문 후 돌아갔고 1040년 만비즈와 라카 부근 발리스, 자바르 성채 점령하며 티말을 압박하였으나 라흐바는 함락되지 않았다. 파티마 조로부터 독립 의도로 길만 (튀르크 용병) 모병. 이에 예산이 부족해지자 파티마 군대 대신 자신의 용병들만 봉급 지불. 이에 기존 파티마 군부가 와지르 알리의 선동으로 반란, 궁전 습격당하자 아누쉬테킨은 3백의 친위대와 도주. 하마, 바알벡 등 다른 도시들에도 이 소식 퍼지며 파티마 수비대가 모두 입성 거부. 아누쉬테킨은 유일하게 호의 보인 바누 문키드의 호위 받으며 휘하 용병들이 주둔하는 할랍 향한 것[37] 티말은 형 나스르의 과부이자 누마이르 공주인 앗 사이디야 알라위야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039-40년 오빠인 샤히브가 사망하자 라카와 라피카를 상속받았고 동시에 티말의 영토가 되었다. 티말은 라흐바보다 알레포와 가까운 라카로 옮겨갔다. 한편 1042년 초엽 아누쉬테킨이 사망하자 곧바로 할랍으로 향했으나 민병대 및 (칼리파의 결정에 불복한) 파티마 수비대가 항복 거부. 이에 바누 킬랍의 거점인 킨나스린으로 철수, 수비대와 민병대 간에 도시 지배권 놓고 내분 생기자 후자의 도움으로 2월 22일 입성. 파티마 수비대는 아누쉬테킨의 길만들과 시타델에서 농성. 7개월 후 항복,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축하[38] 테오도라는 티말 뿐만 아니라 그 부인을 포함한 6명의 가족원들에게도 칭호를 내렸다. 한편 파티마 측과는 아누쉬테킨이 시타델에 남긴 60만 디나르 금화와 20만 디나르 어치의 식량 중 티말이 일부만을 파티마 측에 돌려주자 갈등 일기 시작[39] 미르다스 왕조의 제2의 수도. 당시 파티마 군은 다마스쿠스 총독 나시르 앗 다울라 이븐 함단이 이끌었다. 시리아 함단 왕조의 후예였던 그는 하마와 마라트 알 누만을 점령하였고 알레포 외곽에서 티말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후 티말은 알레포에서 농성하였고 나시르 앗 다울라는 식수를 구하기 쉬운 인근 카와이크 강 주변에 주둔했는데 가을임에도 장맛비가 내려 강이 범람하자 진영이 물에 잠겨버렸고 결국 철수하였다. (1048년 10월) 그는 후에 카이로를 장악하고 폭정을 펼치다 살해된다. 이후 집권한 이가 바로 그 유명한 아르메니아 출신의 바드르 앗 자말리이다[40] 알리 이후 두 유대인 재상들에게 접근했으나 그들 역시 신속히 숙청되며 실패. 더욱이 티말의 사촌인 자파르 이븐 카밀이 공세에 나서 카파르탑에서 파티마 장군 이븐 쿨라이드를 살해하며 돌이킬 수 없게 됨. 티말은 저번 원정 때 점령된 하마와 마라트 알 누만의 성벽 파괴[41]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가 직접 배웅할 정도로 기대가 많았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는 사절을 파견하였고 리파크는 라말라에서 이들을 접견하곤 카이로로 보내 상부의 결정을 기다렸다. 와지르 후세인 (알리의 조카)은 동로마 사절을 최대한 오래 머물게 하곤 리파크에게 진격을 명한다. 한편 라말라에 주둔하는 동안 바누 타이의 습격으로 보급품과 장비를 약탈당한 리파크는 반격 대신 그들을 매수해 보조병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중 바누 칼브와 바누 파자라의 습격을 받자 그들 역시 고용하였다. 이로써 그렇지 않아도 베르베르, 튀르크, 누비아인으로 구성되었던 군대의 분파주의는 더욱 커졌다. 다마스쿠스에선 일부가 교외를 약탈했고 홈스와 하마를 점령한 후에도 내분이 이어지자 리파크는 더 많은 현지인을 고용하였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한 상태에서 8월 24일 알레포 부근에 당도하였고 티말은 바누 킬랍 및 민병대와 함께 출정하였다. 안티오크 총독 역시 유사시에 티말을 돕기 위해 출정 대기하였다. 이틀 후 벌어진 전투에서 바누 칼브는 티말에게로 이탈하였고 장교들은 리파크에게 남쪽으로 후퇴하여 베두인들을 단속하고 재정비하자고 청했지만 묵살되자 그를 버리고 후퇴해버렸다. 그동안 다른 베두인들은 할랍 근교와 파티마 군의 보급 기지인 마라트 미르신을 약탈하였고 리파크는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8월 27일 리파크는 얼마 남지 않은 병력과 티말의 포로가 되었고 머리에 입은 부상이 도져 3일 후 할랍에서 사망하였다[42] 이후 부와이흐 왕조의 잔당인 알 바사시리가 그 총독이 되었고 그는 마즈야드 왕조 (두바이스 1세) 및 우카일 왕조와 연대해 1057년엔 모술, 1058-59년엔 셀주크 내전을 틈타 바그다드를 점령해 파티마 칼리파의 이름으로 40차례나 쿠투바를 진행한다. 그러다 1060년 셀주크 술탄 토그릴에게 패해 전사한다[43] 정확힌 1060년 7월 마흐무드가 알레포를 점령했는데 파티마 수비대 버팀. 그리고 한달 후 파티마 조의 증원군이 당도하자 빼앗김. 그리고 3주 후인 8월 30일 마흐무드의 숙부인 라흐바의 아티야가 할랍과 시타델 점령. 다만 이틀도 안되어 마흐무드가 도시를 장악하고 파티마 증원군 역시 격파. 이후 마흐무드와 티말의 협상으로 아티야는 라흐바의 독립 영주로 인정받았다[44] 1차 전투 후 아티야가 할랍과 라흐바, 마흐무드가 홈스와 하마 및 서부 영토를 다스리는 분할안이 제시되었다. 아티야는 이를 거부하고 마흐무드로부터 더 많은 영토를 양도받기 위해 디야르바크르의 알 나와키야 튀르크 궁병 1천을 고용했다. 이는 튀르크 인이 노예 용병이 아닌 상태로 시리아에 진입한 첫 사례였다. 아티야는 그들에게 매달 1만 1천 디나르를 지급하고 할랍 외곽의 알 하디르에 주둔지를 마련해주었다. 한편 마흐무드는 바누 킬랍과 하마, 마라트 알 누만, 카파르탑을 점령하였다. (1064년 5월) 이후 마흐무드는 알레포를 포위하였는데 튀르크 병력이 반격에 나서 그를 격퇴하고 도시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튀르크 인들의 지도자 이븐 칸이 내정에 간섭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자 갈등이 시작되었다. 아티야와 민병대는 그와 동로마 원정에 나선 후 귀환하였고 튀르크 인들은 성벽 주둔지에 머물렀다. 그러던 1065년 1월 10일 밤, 아티야는 알레포 민병대를 시켜 알 하디르의 튀르크 진영을 습격하였고 그들 중 다수가 살해되었다. 이븐 칸은 생존자들과 자지라로 도주했지만 베두인들이 막아서자 회군하여 사르민에 주둔하던 마흐무드와 합류하였다. 이븐 칸은 마흐무드와 파티마령 트리폴리로 향하여 튀르크 동료들을 모집하고 할랍으로 향하여 8월 아티야를 패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마흐무드가 할랍을 포위하는 동안 이븐 칸은 자지라로 떠난다[45] 파티마 조가 아티야의 할랍 지배권을 주장하며 대립이 이어졌고 마흐무드가 하마를 장악한 후 라흐바 원정을 준비할 정도로 악화되었는데 트리폴리의 카디 이븐 암마르의 중재로 파티마 조가 1065년의 분할안을 인정하며 잠잠해졌다. 한편 튀르크 군벌 이븐 칸은 자지라에서 1천의 튀르크-쿠르드-다일람 인들을 모아 1066년 돌아왔고 마흐무드는 그에게 마라트 알 누만을 영지로 주었고 그는 그해 9월 10일 도시에 입성한다. 이듬해 이븐 칸은 홈스에 있던 마흐무드를 도와 하마 평원의 친아티야 베두인들을 복속시켰다. 한편 파티마 칼리파가 이븐 칸의 해임을 명하자 마흐무드는 그를 해임할 수 없었고 그가 자립할 시에 초래될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고용해 둔 것이라며 파티마 군이 이븐 칸 공격에 나서면 도울 것이라고 답함[46] 정확힌 다마스쿠스로 향했다가 파티마 측이 도움 거절하자 동로마령 안티오크에 의탁한 것. 하지만 동로마 역시 많이 약해져 있던 상태였고 할랍 통치권보다 튀르크와의 싸움에 집중하던 때라 별 도움 안됨. 다만 1071년 5월 마흐무드가 셀주크 장군 아이타킨 알 술레이마니와 파티마령 시리아 원정에 나서 바알벡 점령할 틈에 아티야가 안티오크 총독과 마라트 알 누만 공격해 마흐무드를 회군시키긴 했다. 다만 이후 만지케르트 전투가 터지며 도움받을 가망이 적어졌고 1073년 7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병사. 한편 1068년 동로마 군이 만비즈, 1071년 우카일 왕조가 라카 점령하는 등 미르다스 왕조 축소됨[47] 그러자 마라트 알 누만의 튀르크 군벌 이븐 칸은 티레로 도주하나 암살됨. 이후 그의 조카 크룰루가 알프 아르슬란의 알레포 포위 때에 마흐무드 도우러 오나 아흐마드 샤 휘하 1천의 병력만 제공하고 다시 도주[48] 이때 아르슬란의 주둔지는 텔 술탄으로 알려지게 됨. 수비대는 술탄이 성벽 가까이 왔을 때에 투석기로 그의 말을 죽이는 등 강력히 저항. 체면 구긴 알프 아르슬란은 마흐무드가 형식상 복속하며 자신의 모친 타루드 인질로 내어주자 그틈에 아르메니아 침공한 동로마 군을 응징하러 북상[49] 당시 셀주크 제국의 시리아 부왕이던 투투쉬 1세가 셀주크의 속국 우카일 왕조를 키워준 결과[50] 카디 이븐 알 카샤브의 항의에 성 헬레나 성당으로 옮김[51] 한편 이해 십자군은 알레포 근처 아자즈를 점령하며 도시를 압박한다[52] 바스라 총독 시절부터 칼리파와 대립하던 술탄을 도와 두각을 드러냈다[53] 알 카밀의 손자 알 아슈라프 무사를 술탄으로 옹립해 친아이유브 세력의 반발을 막고자 했다[54] 전자에선 선박 '호랑이 호'의 행선지가 할랍으로 나오고 후자에선 베네치아를 무찌른 튀르크 인들의 도시로 나온다. 그외에 1675년 영국 해군의 장교 헨리 티언지의 방문기가 있다[55] 시리아 내전기에 일부 파괴되어 복구 중이다[56] 이는 몽골 침공 때를 제외하곤 전례가 없던 일로, 탄지마트 개혁의 진행과 함께 기독교도들의 지위 향상에 대한 반동으로도 여겨진다.[57] 이 봉기를 이끌었던 하심 가문의 파이잘 1세는 후에 이라크 국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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