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9:02:20

라 포르비에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예루살렘 왕국 - 홈스 - 다마스쿠스 - 트란스 요르단 연합군3.2. 이집트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서기 1244년 10월 17일~10월 18일,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군과 예루살렘 왕국 - 성전 기사단 - 구호 기사단 - 다마스쿠스, 홈즈, 카라크의 아이유브 왕조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예루살렘 왕국의 최후의 공세였으나,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3차 십자군 이후 반세기 가량 세력을 회복해가던 예루살렘 왕국은 내륙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해안 성채들을 중심으로 방어에 일관하게 된다.

2. 배경

서기 122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아이유브 왕조 술탄 알 카밀[1]은 2년간의 협상 끝에 예루살렘 왕국이 예루살렘을 양도받는 성과를 거뒀다. 다만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여전히 무슬림의 관리에 두었고, 군대는 상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모두 이 결과에 불만족했고, 어떻게든 예루살렘을 확고히 장악하고 싶어 했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랑스, 영국, 아라곤, 카스티야, 포르투갈의 왕들에게 십자군 원정에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모든 왕이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집결시키고 예루살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성지로 항해하기를 원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들의 입지가 위태로웠기에, 이들의 원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이에 응한 국왕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 바로 나바라의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 티발트 1세였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의 호소에 응하기로 결심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여러 질문을 던졌다.
1. 프리드리히와 알 카밀이 맺은 휴전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가?
2. 새로운 십자군을 환영하는가?
3. 출항하기 가장 좋은 항구는 어디인가?
4. 키프로스에서 물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귀족들은 사라센인들이 휴전 이후에도 계속 공격해왔기 때문에 휴전은 무효라고 대답했으며, 최고의 항구는 제노바와 마르세유이고, 키프로스에 풍부한 물자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새로운 십자군을 따뜻하게 환영해줄 것이니 가급적 빨리 와달라고 호소했다. 티발트 1세는 십자군을 단행하기로 마음 먹고, 1239년 리용에 군대를 집결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통과하여 브린디시에서 출항하기로 하고, 약 1,200명의 기사와 8,000~9,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출발했다.

처음에는 항해가 순탄했지만, 성지에 접근하면서 많은 배가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키프로스 해안으로 표류했고, 일부는 시칠리아까지 표류했다. 그렇지만 1239년 9월 1일 나바르 왕의 직속 부대가 아크레에 도착하여 군중이 환영하는 가운데 깃발을 계양했다. 티발트 1세가 도착했을 무렵, 중동의 정세는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1238년 알 카밀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과 조카들 간의 분쟁이 내전으로 번졌고, 트란스요르단의 에미르 알 나시르가 예루살렘을 점거한 뒤 다윗의 탑을 해체하고 기독교도들을 예루살렘에서 내보냈다. 또한 다마스쿠스에서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티발트 1세는 군사 회의를 소집해 예루살렘을 영구 점령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논의했다.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아크레의 주교, 예루살렘 왕의 조카인 야파 백작 고티에 4세 등으로 구성된 회의 참석원들은 논의 끝에 이집트를 먼저 공격하고, 다마스쿠스를 그 다음을 치기로 결정했다. 이집트와 다마스쿠스를 제압한다면, 예루살렘을 항구적으로 점유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바라 왕은 제5차 십자군이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봤던 걸 잘 알고 있어서 이집트 공격을 꺼렸지만, 회의 구성원들의 강력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1239년 11월 2일, 나바라 왕의 군대는 이집트의 전초기지인 아스칼론과 가자 지구를 공격하기 위해 아크레에서 출발했다. 약 4천 명의 기사와 1만 2천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자파를 지나가던 중, 브르타뉴 백작 드뢰의 피에르는 스파이로부터 부유한 캐러밴이 요르단 계곡을 따라 다마스커스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이 행렬을 습격하기로 마음 먹고, 나바르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200명의 기사들과 함께 습격대를 구성한 뒤, 캐러밴 행렬을 습격했다. 캐러밴 행렬을 지키던 무슬림 전사들은 인근 성으로 달아났고, 기사들은 소와 양떼를 확보하고 많은 수비병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브르타뉴 백작의 성공은 많은 기사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침 가자 지구에 이집트의 술탄 알 아딜 2세가 파견한 군대가 집결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들은 가자 지구를 기습하려 했다. 나바르 왕은 너무 위험한 계책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도 동의했다. 그러나 브르타뉴 백작을 포함한 여러 기사들은 가자 지구에 배치된 적군은 천 명밖에 안 될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나바르 왕은 모두가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음을 상기시켰으나, 그들은 불복종했다.

급기야 바르 백작 앙리가 이끄는 일부 기사들이 제멋대로 가자 지구로 출격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스칼론에서 매복한 무슬림군에게 기습당하여 섬멸되었다. 바르 백작 앙리는 전사했고, 기사 8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1,200명의 십자군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얼마 후 아스칼론에 도착한 나바르 왕은 이미 모든 게 끝장났다는 걸 깨달았다.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가자 지구를 공격하려 했지만,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이 그러면 적군이 모든 포로를 참수할 것이라고 지적했고, 나바르 왕은 어쩔 수 없이 아크레로 철수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아크레로 철수하는 십자군을 지켜본 기독교도들이 슬피 통곡했는데, 그 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티발트 1세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다음 원정을 준비했다. 마침 1240년 5월 알 아딜 2세가 암살되고 트란스요르단의 왕의 도움으로 살리흐 아이유브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이에 다마스쿠스의 살리흐 이스마일이 반발하면서, 이집트와 다마스쿠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살리흐 이스마일은 티보 4세에게 사신을 보내 벨포르, 티베리아스, 사페드, 그리고 갈릴리 강의 넓은 평지와 시돈 고원을 양도할 테니, 자신이 이집트의 술탄이 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다마스쿠스와 연합하여 장차 이집트를 도모할 준비에 들어갔다.

나바라 왕이 이끄는 십자군과 다마스쿠스의 무슬림 연합군이 야파에 이르자, 이집트의 술탄 살리흐 아이유브는 대사를 보내, 포로들을 모두 석방하고 십자군이 예루살렘과 베들레햄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할 테니, 철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바라 왕 티발트 1세는 이를 수락한 뒤,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묘 교회의 무덤을 참배한 뒤, 아크레에서 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조국으로 돌아갔다. 뒤이어 성지에 도착한 콘월 백작 리처드[2]는 이 협정을 공식적으로 합의한 뒤 아스칼론을 요새화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모처럼 평화를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러나 리처드가 돌아간 뒤,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들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은 서로 심하게 다투면서도 알 나시르의 영토를 함께 침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일부 귀족들은 아크레에서 이벨린의 발리안을 새 국왕으로 추대할 음모를 꾸몄고, 몇몇 귀족들은 1245년 16살이 된 콘라드 4세 대신 키프로스의 왕비 알릭스가 예루살렘의 여왕 칭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예루살렘 왕국의 내분이 극에 달하면서, 예루살렘의 방비는 자연스럽게 약화되었다.

급기야 1244년 6월, 이집트 술탄이 고용한 호라즘 용병들이 갈릴리를 침공하여 티베리아스를 점령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쳐 죽인 뒤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대한 저항은 미약했고, 호라즘 용병대는 그해 7월 11일 예루살렘에 입성한 뒤 예루셀렘 왕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성묘 교회 제단에서 미사를 지내던 사제들의 목을 베었다. 수비대는 내성에서 한 달간 항전했으나, 결국 8월 23일에 항복했다.

호라즘 용병대의 예루살렘 점령은 십자군 국가들에게 심한 충격을 안겼으며,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던 홈스와 트란스 요르단, 다마스쿠스의 지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로 뭉쳐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홈스와 에미르이자 카라크의 통치자 알 만수르는 친히 2천 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달려왔고,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알 나시르가 파견한 부대도 가담했다.

여기에 야파의 백작 브리엔의 고티에와 티레의 영주 몽포르의 필리프가 이끄는 십자군이 가세했으며, 트란스 요르단도 2천 가량의 베두인 전사를 파견했다. 브리엔의 고티에가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아 예루살렘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이에 알 사라흐 아이유브가 지휘하는 이집트군이 이에 맞서고자 출격하였고, 양군은 가자 지구에서 북동쪽에 있는 라 포비에 마을 근처 모래 평원에서 마주쳤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을 둘러싼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예루살렘 왕국 - 홈스 - 다마스쿠스 - 트란스 요르단 연합군

  • 지휘관: 브리엔의 고티에, 아르망 드 페르고르[3], 살리흐 이스마일[4], 알 나시르[5], 알 만수르 이브라힘[6]
  • 병력: 십자군 - 약 1,000명의 기병과 6,000 명의 보병 / 무슬림군: 4,000명의 베두인 기병대

3.2. 이집트군

  • 지휘관: 알 살라흐 아이유브[7]
  • 병력: 연합군보다 다소 적은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됨.

4. 전투 경과

전투가 벌어지기 전, 알 만수르는 동맹을 맺은 이들에게 진지의 방비를 강화하고 수비 태세를 취해서 호라즘 용병대가 제풀에 흩어지고 이집트군이 불리한 상황에 놓일 때까지 기다리자고 조언했다. 그러나 총지휘관을 맡은 브리엔의 고티에는 수적 우위를 믿고 즉각적인 공격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십자군은 바다 근처에 있는 우익에 집결했고, 알 만수르의 부대는 중앙에 위치했으며, 알 나시르의 부대는 좌익에 배치되었다. 전투는 1244년 10월 17일 오전부터 다음날 오후까지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첫째 날, 기사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적군을 도발했고, 각 전선에서 베두인 족과 호라즘 용병대 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집트군은 위치를 사수하며 어떤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이집트군은 연합군 중앙의 다마스쿠스군을 향해 호라즘 용병대를 출격시켰다. 적이 갑자기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다마스쿠스군은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졌다. 이후 호라즘 용병대는 연합군의 좌익으로 반전하여 베두인 전사들을 공격했다. 우익의 십자군은 전면의 이집트군과 측면에 위치한 호라즘 용병대의 협공에 맞서 수차례 돌격을 감행했지만, 끝내 전세를 바꾸지 못했다.

알 만수르는 기병 280명만 거느리고 도주했고, 십자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5천 명 이상의 전사들이 전사했고,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한 성전 기사단은 33명, 구호 기사단은 27명, 튜턴 기사단은 3명 뿐이었다. 브리엔의 고티에를 포함한 여러 고위 지휘관들이 생포되었고, 성전 기사단장 아르망 드 페르고르는 전사했다. 브리엔의 고티에는 나중에 카이로의 지하감옥에서 옥사했다. 이리하여 알 포르비에 전투는 이집트군의 완승으로 종결되었다.

5. 결과

라 포르비에 전투는 예루살렘 왕국이 공세를 개시할 수 있는 군사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성곽과 요새화된 도시들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다시는 대규모 군대를 조직할 수 없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1245년 제1차 리옹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왕국을 구원하기 위한 제7차 십자군 원정을 요구했고,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이에 호응하여 1248년 이집트를 침공한다.


[1] 살라흐 앗 딘 유수프의 조카다.[2] 영국 국왕 헨리 3세의 조카이다.[3] 성전 기사단장[4] 다마스쿠스 술탄[5] 다마스쿠스-홈스-트란스 요르단의 에미르[6] 홈즈의 영주[7] 바이바르스가 전투를 지휘했다는 설이 있으나, 바이바르스는 18살 때인 1246년에서야 알 사라흐의 맘루크가 되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