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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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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중세2.2. 오스만 제국
2.2.1. 혼란기2.2.2. 중흥기
2.3. 근현대
2.3.1. 사페드 전투
2.4. 현대

1. 개요

히브리어 צְפַת
아랍어 صفد
영어 Safed / Zepat

이스라엘 북동부의 도시.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인구는 약 3만 8천명이다. 중세 십자군 시기 템플 기사단의 주요 요새였고, 맘루크 왕조 시기 팔레스타인 북부의 행정 치소가 되어 번영하였다. 현재도 티베리아스와 함께 갈릴리의 양대 도시이자, 해발 9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전략적 거점이다. 기존의 아랍계 인구는 1차 중동전쟁 때에 추방되어 도시 거주민의 절대 다수는 유대인이다. 특히 하레디 유대교도가 많다. 여름에는 30도를 잘 넘지 않고, 겨울에는 눈이 내린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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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페드 성채 유적

고대에는 세프라는 작은 유대인 마을이었다. 1168년 십자군이 성채를 세웠고, 1188년 살라흐 앗 딘이 포위 끝에 점령했다. 1219년 아이유브 왕조의 알 무아잠이 5차 십자군에 활용될까봐 허물었다가 1240년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휴전 조건으로 십자군 측에 돌려줬다. 이후 성채는 확장되었으나, 1268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에게 함락되었다. 이후 사페드는 갈릴리 지방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향후 이어진 평화의 시기에 양모에 기반한 직물 산업이 발달했다. 또한 캅발라 운동이 일어나는 등 중세 유대교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기에도 사파드 산작의 치소였고, 17세기 초엽 파크르 앗 딘 2세와 18세기 자히르 알 우마르 등 현지 호족들도 중시하였다.

사페드의 상인들은 갈릴리 평원의 곡물을 아크레 등의 항구로 수출하는 중개 무역을 담당했다. 다만 18세기 말엽, 아크레가 부상하며 사페드는 상대적으로 쇠퇴했고 1830년대에는 현지 드루즈 및 무슬림들의 유대인 공격과 지진을 겪었다. 19세기 말엽 2만 4천명이던 인구는 1922년 9천여명으로 줄었다. 당시 무슬림이 60%, 유대인은 33% 정도였다. 그럼에도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안에서 사페드는 유대 국가에 할당되었고, 이듬해 1차 중동전쟁에서 무슬림 민병대가 유대 구역을 포위했으나 이스라엘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영국군은 무슬림 주민들과 함께 떠났고, 전후 이스라엘 정부는 무슬림 주민들의 귀횐을 불허하며 유대 이주민들을 정착시켰다.

2.1.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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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시기 성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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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 유적 입구

본래 유대교의 새로운 달 행사를 알리는 5개의 고지 중 하나인 성채 마을이었다. 현지 지명은 세프였고, 11세기 무렵 앗사파티 라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랍식으로는 사파트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그 무렵 시내의 언덕에는 야팀 성탑이 있었고, 1100년경 십자군이 점령한 후 그를 중심으로 성채를 건설했다. 1165년 기준 사페드 성채의 영주는 티베리아스의 군사령관 풀크였는데, 1168년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 아모리 1세가 구입하여 템플 기사단에 넘겼다. 그후 성채는 증축되었고, 십자군의 갈릴리 지역 방어 중심지가 되었다. 1170년 일대를 방문한 투델라의 벤자민은 도시 자체에는 유대인이 없고, 근교에만 있다고 기록하였다. 1188년 살라흐 앗 딘은 한달의 포위 끝에 사페드를 점령했고, 수비대 및 주민들은 티레로의 철수를 허락받았다.

점령 후 살라흐 앗 딘은 사페드와 티베리아스를 자신의 종손 사드 앗 딘 마수드 빈 무바라크에게 이크타(영지)로 주었고, 1211년 무바라크가 사망한 후에는 아들 아흐마드가 계승했다. 1210년 사페드를 방문한 사무엘 벤 삼손은 최소 50인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2명의 무슬림이 랍비 하니나 벤 호르카노의 동굴 무덤을 관리한다고 기록했다. 13세기의 아랍 역사가 이븐 샷다드는 번성하는 마을이라 기록했다. 1217년 다마스쿠스 에미르 알 무아잠 이사가 사파드 영지를 취하였고, 1219년 5차 십자군의 당도 소식에 적에게 이용될까 우려하여 성채를 파괴했다. 1240년, 나바르 국왕 티발트 1세와 다마스쿠스 에미르 앗 살리흐 이스마일의 협상으로 사페드는 재차 십자군의 영역이 되었다. 이후 템플 기사단과 마르세유 주교 브누아 달리냥이 성채를 재건했고, 1243년까지 4만 베잔트를 들인 끝에 공사를 완료했다.

재건된 성채는 기존 규모보다 커서 평시에 1천 7백명, 전시에 2천 2백명이 주둔 가능했다. 성채와 함께 기슭의 도시 역시 빠르게 발전했고,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사페드는 아크레와 요르단 강 유역 간의 교역 거점으로 번영했다. 1266년 7월,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가 사페드를 6주 간의 포위 끝에 함락하였다. 아크레 공격의 실패 후 가해진 공격에서 템플 기사단 수비대는 대부분 전사했고, 바이바르스는 허물어버린 다른 십자군 성채들과 달리 사페드는 그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고자 보존하였다. 1268년 바이바르스는 성채의 수리와 증축, 강화를 명하여 사페드를 대십자군 거점으로 변모시켰다. 동시에 시내에도 카라반사라이, 시장, 목욕탕 등이 세워졌고 기존의 성당은 모스크(자미 알-아흐마르)로 전환되어 1275년 완공되었다. 또한 바이바르스는 에미르 알라 앗 딘 칸다가니 등 45인의 맘루크를 배치하여 일대를 관장하게 하였고, 팔레스타인 북부를 관장하는 맘라카트(주)의 치소로 삼았다(1271년 몽포르 성채 함락 후에는 샤구르 일대가 관할지에 더해졌다). 맘루크 시기 사페드는 크게 번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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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시기의 수피 수도원인 자위야 바나트 하미드

1327년 사페드에서 사망한 지리가 앗 디마슈키는 바이바르스가 성채 일부를 허물어 쿨라라 불린 원형 성탑을 세웠는데, 3층 규모였고 충분한 군령과 저수조 및 연회장 등의 시설이 있었다 한다. 1309~1311년 총독을 지낸 에미르 바크타무르 알-주칸다르는 시가지 동북쪽에 자신의 이름을 딴 모스크를 세웠다. 그 무렵 하마의 에미르이기도 했던 지리가 아불 피다는 사페드에 대해 중급 규모의 도시에 견고한 성채가 있으며, 3개의 언덕에 걸쳐 있고 수비대를 먹일 지하 저수조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1372~1376년간 부임한 총독 알람다르의 시기에 현지 카디(법관) 샴스 앗딘 알-우스마니는 타리크 사파트를 출간했다. 다만 제목과 달리 주로 지리, 농경, 무역 등을 다루었다. 저자는 사페드가 마드라사(학교), 리바트(여관), 시가지를 두른 성벽 등 기간 시설이 부족하고 집들도 무작위로 세워져 도시 계획이 없다고 평하였다. 다만 공기가 맑아 주민들이 자주 산책할 정도로 자연이 아름답고, 성채와 붉은 모스크가 멋지다는 호평도 더하였다. 번영하던 도시는 1348년 이래로 흑사병과 기근, 자연재해, 정치적 불안정이 겹치며 인구 감소를 겪고 쇠퇴했다.

2.2.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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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5년 바이바르스가 세운 후 1671-1672년 보수된 붉은 모스크

1516년 마르즈 다비크 전투 후 다마스쿠스가 점령되자,[1] 사페드 주민들은 셀림 1세에게 성채의 열쇠를 바쳤다. 이로써 사페드는 무혈 점령되었으나, 1519년 셀림이 이집트 원정 중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자 주민들은 오스만 총독을 축출하고 봉기하였다. 이때 친오스만 성향이라 낙인이 찍힌 유대인들이 주로 피살되었다. 반란이 진입된 후 사페드는 맘루크 시기 맘라카트에서 제즈릴 협곡(오늘날 하이파~제닌 일대) 및 아틀리트 부분이 빠진 사파드 산작의 치소가 되었다. 1526년 사페드에는 무슬림 650여 가구, 유대인 230여 가구, 오스만 군인 60가구가 거주했다. 이후 평화가 이어지고 이베리아 반도 등지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쉴레이만 1세의 허가 하에 정착하며 인구가 늘었다.

특히 이삭 루리아, 모셰 코르도베로, 요세프 카로, 샬모 할레비 알카베츠 등 캅발라 랍비들이 정착했다. 16세기 사페드는 유대교 신비주의인 캅발라의 거점이 되었다. 이로써 사페드는 주요 유대 학문 도시이자 상업 거점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 수피 성인 이븐 아라비의 후계자들이 상당수 사페드에 거주했다. 그중 아흐마드 알 아사디는 사드르 모스크라 불린 자위야(수도원)를 세웠다. 1549년에는 시가지를 두르는 성벽이 세워졌다. 1554년 사페드에는 무슬림 1200여 가구, 8백여 유대인 가구, 50여 무슬림 성직자 가구가 살았다(9가구는 장애로 기록되었다). 이듬해 사페드는 산작 내의 유일한 카사바(도시)로써 19개의 마할라(구역)로 나뉘었다(무슬림 구역 7개[2]와 유대 구역 12개[3]).

유럽계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곧 현지의 아랍 유대인(무스타아립)의 수를 능가했고, 여러 기술을 전파했다. 세파르딤의 유입 후 사페드는 양모 생산과 직물 산업이 발달했고, 1577년에는 프라하 출신의 엘리에제르 아슈케나지와 이삭 부자에 의해 서아시아 최초의 히브리어 인쇄소가 문을 열었다. 1576년 무라트 3세가 키프로스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유대인 부유층 1천명에게 이주 명령을 내렸을 당시 사페드의 유대인 인구는 약 7천명이었다. 1584년 사페드에는 32개의 시나고그가 있었다. 다만 16세기 말엽, 오스만 조정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며 갈릴리 일대는 드루즈와 시아파 농민들 간의 대립으로 얼룩졌다.

그러던 1602년, 레바논 아미르국의 드루즈 에미르 파크르 앗 딘 2세가 사페드의 산작베이(태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1605년까지 도적들을 소탕하여 일대의 안정을 회복했고, 농업과 상업 모두 활기를 되찾았다. 파크렛딘은 사페드의 순니 무슬림 울라마와 친밀했고, 그중 하나피 무프티 아흐마드 알칼리디는 그의 개인 사관이 되었다. 1613년 파크렛딘이 토스카나로 망명한 후, 사페드는 조정의 직할령으로 귀속되었다. 1615년 그의 아들 알리가 시돈을 회복했고, 1618년 레바논으로 돌아온 파크렛딘은 1623년 안자르에서 다마그쿠스 총독을 격파한 후 사페드 산작을 회복했다. 그 무렵, 이탈리아의 오리엔탈리스트 콰레스미우스는 사페드 주민이 대부분 유대인이고 타지의 유대인들이 후원한다고 기록하였다.

2.2.1. 혼란기

1628년 파크렛딘은 사페드를 자신의 조카 물힘 빈 유누스에 주었는데, 그는 유대인 주민들을 약탈했다. 이때 피난한 유대인들은 1632년 다마스쿠스 총독의 토벌을 피해 물힘이 도주한 후에야 돌아왔다. 하지만 1656년 물힘은 재차 사페드를 습격했고, 1660년 물힘이 사망한 후 벌어진 드루즈 내전기에 사페드는 여러 세력들에게 약탈되었다. 드루즈 군대에게 파괴된 사페드에는 1662년이 되어서야 일부 유대 주민들이 돌아왔다. 한편, 사페드 산작은 1660년 다마스쿠스 에얄레트에서 분리되어 인근 시돈-베이루트 산작과 함께 레바논 산지의 드루즈와 아밀 산지의 시아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설된 시돈 에얄레트를 이루었다. 사페드가 그 치소였으나, 곧 시돈으로 옮겨졌다.

17세기 후반, 사페드는 점차 피해에서 복구되었다. 유대인 주민도 대부분 돌아왔고, 1665년에는 신비주의에 기반한 메시야 운동의 일환인 삽바타이 세비가 전래되었다. 붉은 모스크 역시 1671년, 태수 살리흐 베이에 의해 37 m × 24 m 규모로 재건되었다. 그 무렵 사페드를 방문한 튀르크인 여행가 엘리야 첼레비는 3개의 카라반사라이, 7개의 수피 자위야, 6개의 함맘(목욕탕), 여러 개의 모스크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1702~1706년 사페드의 태수 겸 징세관을 지낸 우마르 앗 자이다니의 아들 자히르 알 우마르는 18세기 중반, 티베리아스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다. 기존의 호족 무함마드 나피와 샤힌, 무라드 가문 등이 모두 그에 복속하여 영지를 보존했다.

1742년의 역병과 1759년의 지진으로 사페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2백여명이 사망했다. 1760년대 무렵 자히르는 아들 알리에게 사페드를 영지로 주었다. 1775년 자히르가 사망한 후, 시돈 총독 제자르 파샤의 토벌군은 알리의 강한 저항에도 사피드를 점령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한편, 자히르의 치세부터 급성장한 아크레는 같은해 시돈 에얄레트의 치소가 되었다. 동시에 점차 소외되던 사페드는 결국 독자적인 산작마저 해체되어 악카(아크레) 산작에 속한 카자(읍)가 되었다. 관할지는 사페드 및 메론 산(자발 자르마크) 일대였다. 줄었던 인구는 1776년과 1781년 러시아 유대인, 1809년과 1810년 페루심 운동의 영향을 받은 리투아니아 유대인들이 이주해오며 회복되었다.

하지만 1812년 대역병으로 유대인 주민의 80%가 죽었다. 1820년 8월, 아크레의 압둘라 파샤는 유대인 재상 하림 파르히를 숙청한 후 그의 비호 하에 탈세를 해왔다며 사페드의 유대인을을 투옥했다가 보석금을 받고서야 풀어주기도 했다. 1822-1823년에는 다마스쿠스, 코스탄티니예에서 압둘라 파샤와 파르히 가문 간의 정쟁이 벌어졌고 그 기간 갈릴리 전역의 유대인들이 피신했다가 1824년에야 돌아오는 등 수난을 당했다. 1831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이집트 군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자 압둘라 파샤 시기 갈릴리를 떠났던 유대인들이 그의 관용 하에 돌아왔다. 비록 1833년 드루즈 부족들이 재차 사페드를 습격했지만, 이브라힘 파샤의 이집트군이 당도하여 질서를 회복했다.

1834년, 살리흐 앗 타라쉬히가 주도하는 무슬림 주민들은 이집트 측의 징집 명령을 거부하며 팔레스타인 농민반란에 가담했다. 반군은 30일에 걸쳐 시가지를 약탈했고, 이집트의 동맹인 레바논 아미르국의 바쉬르 쉬하브 2세가 진군해 사페드를 항복시킨 후에야 혼란은 종식되었다. 1837년 갈릴리 지진으로 사페드의 유대인 4천명 중 절반 가량이 희생되고, 14개의 시나고그 전부가 파괴되었으며 페루심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다. 사망자 2158명 중 1507명은 오스만 신민, 나머지는 외국인이었다. 언덕 경사지에 있던 유대 구역은 남쪽의 비교적 평지에 있던 무슬림 구역보다 피해를 덜 입었다. 이듬해인 1838년에는 드루즈 및 무슬림 부족들이 3일간 도시를 약탈했다.

2.2.2. 중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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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후기의 행정기관인 세라야(세레일) 겸 요새

1840년 오스만 지배가 회복되며 혼란이 수습되었고, 탄지마트 개혁과 함께 사페드의 인구 회복이 시작되었다. 1849년 사페드의 5천 인구 중 무슬림이 3천명, 유대인이 2천명, 기독교도가 60명 가량이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 1855년에는 7천명이 되었고, 마그레브 및 이란 등지에서의 이주로 유대인 비율은 서서히 늘었다. 19세기 말엽, 유대인 은행가 모세 몬테피오레는 사페드를 7차례 방문하고 지진으로 무너졌던 시나고그와 주택들의 재건을 후원했다. 1871년 기준 사페드에는 무슬림 1400여 가구와 유대인 1200여 가구, 기독교도 3가구가 있었다. 도시 규모에 비해 경제적으로 번성하여 상점 227곳, 물레방앗간 15곳, 빵집 14곳, 올리브유 공방 4곳이 있었다.

사페드의 상인들은 갈릴리의 밀, 콩, 과일 등 농작물을 아크레의 현지 / 유럽 상인들에게 중개하여 부를 쌓았다. 따라서 사페드는 갈릴리 평원, 요르단 강 유역, 아밀 산지 등의 경제적 중심지로써 번영했다. 사페드는 또한 티레 항구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본래 유대 상인들이 독점하던 무역은 19세기 말엽 무슬림 상인들이 상당 부분 가져갔는데, 이들은 농민들에게 농작물의 가격을 더 쳐주며 빚 차감 등 조정의 혜택을 받았다. 수베흐, 무라드, 캇두라 등 사페드의 무슬림 부자 가문들은 인근 토지를 구매해 대지주가 되었고, 1900년 기준 5만 두만의 땅과 8개 마을을 소유하고 있었다.

1878년 사페드 시의회가 설립되었고, 오스만 당국은 사페드를 드루즈 및 시아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수니파 이슬람의 중심지로 삼으려 했다. 따라서 부유층 혹은 성직자 계층인 나하위, 카디, 무프티, 나킵 등이 도시의 귀족층(아얀)을 구성하였다. 사페드의 수니파 법원은 아크바라, 에인 엘제이툰, 메즈델 이슬림 등의 지역까지 관할하였다(1266년 당시 다수의 다마스쿠스 주민이 정착한 이래 사페드의 무슬림들은 다마스쿠스와 강한 사회, 문화적 유대를 형성하였다). 오스만 당국은 사페드의 무슬림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1860년대와 1878년에 걸쳐 인근에 알제리 및 체르케스 난민들을 정착시켰고, 그중 아라비와 델라시의 두 알제리 가문은 시내에 정착했다.

19세기 말엽의 영국인 선교사 E. W. G. 마스터맨은 사페드의 무슬림이 쿠르드인, 다마스쿠스인, 알제리인, 요르단 강 유역 출신 베두인 등으로 구성이 다양하며 사페드의 무슬림들이 남부에 비해 더 보수적이면서 적극적이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사페드의 알아크라드 구역에는 아랍 노동자, 사와윈 구역에는 아얀 계층과 가톨릭교도, 알 와타 구역에는 아랍 상인들이 거주했고, 유대인들은 서쪽의 가르비예 구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1879년 사페드의 인구는 1만 5천명이었고, 8천명의 무슬림과 7천명의 유대인으로 구성되었다. 불과 8년이 지난 1887년 사페드의 인구는 2만 5천명에 육박했고, 유대인 2650가구와 무슬림 2129가구 및 가톨릭교도 144가구로 구성되어 유대인 수가 무슬림을 앞지르게 되었다.

16세기부터 거주하던 아사디 가문을 필두로 핫즈 사이다, 히자지, 비슈트, 하디드 등이 유력 무슬림 가문들이었다. 그리고 자히르 알 우마르의 경제 고문 이브라힘이 속한 삽바그, 1860년 레바논 내전을 피해 이주한 코우리 등이 유력 기독교 가문이었다. 이러한 무슬림 및 기독교도 아랍 가문들이 현지 행정 및 경제 분야를 주름잡았고, 1897년 오스만 농업은행의 지점이 세워지자 그 이사회 역시 그들로 채워졌다. 주요 멤버는 후사인 압둘라힘 에펜디, 핫즈 아흐마드 알 아사디, 아사드 코우리, 압둘라티프 알 핫즈 사이드 등이었으며, 그중 아사드와 압둘라티프는 1900년에 개설된 농상업부 지점의 이사회로 선출되었다. 19세기 말엽 사페드의 무슬림 구역에는 주택 2천채, 모스크 4곳, 성당 3곳, 목욕탕 2곳, 음수대 2곳, 방앗간 19곳, 올리브유 공장 7곳, 빵집 10곳, 카페 15곳, 가판대 45곳, 상점 3곳, 카라반사라이 1곳이 있었다.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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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의 사페드 전경

1922년 사페드의 인구는 1만명 가량으로 줄어 있었고 5천 4백여명의 무슬림, 3천여명의 유대인, 3백여명의 기독교도로 구성되었다. 1929년 팔레스타인 봉기 시에 사페드는 헤브론과 함께 주요 충돌의 장이었고, 현지 아랍인에 의해 20여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2.3.1. 사페드 전투

1947년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에서 사페드는 1만 2천명의 무슬림과 1천 7백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유대 국가에 배정되었고, 1948년 1월 아랍 민병대가 유대 구역을 공격했다. 2월에는 영국군의 방관 하에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의 출입을 막으며 유대 구역을 포위, 봉쇄하고 유대 가옥들을 폭파시켰다. 4월, 영국군이 철수하자 4백명의 아랍 민병대는 유대 구역에 총공세를 펼쳤으나 2백여명의 하가나 및 팔마크 유대 민병대에 격퇴되었다. 5월에는 증원된 팔마크 병력이 아랍 구역을 공격했고, 이에 아랍 민병대가 언덕에 포대를 설치하고 저항하여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 틈에 아랍 주민 대부분은 인근 에인 엘제이툰 학살 소식에 공포를 느끼며 피난했고, 유대 민병대는 하가나 부대의 포격 엄호 하에 팔마크 부대가 성채를 취하며 사페드 점령에 성공했다. 팔마크는 아랍 구역을 포격하며 연료 창고를 폭파시켰고, 주민들의 결사 항전을 우려해 퇴로를 열어두었다. 이를 통해 후일 시리아 총리가 되는 아딥 시샤클리와 미래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 가문을 포함한 아랍인들이 탈출했다. 사페드 전투는 갈릴리 지역 통치권의 향방을 결정했다. 전후 현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아랍 주민들이 돌아온다면 승리 후의 약탈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테니 귀환을 금지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 요구가 수용되어 사페드는 현재까지 유대인 절대 다수의 도시로 유지되고 있다.

2.4. 현대

1974년의 마알롯 테러에서 사페드 출신 학생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90년대와 2000년대에 사페드에는 다수의 러시아 유대인 및 에티오피아의 베타 유대인들이 이주했다. 2006년 레바논 전쟁기에는 헤즈볼라의 카츄샤 로켓 포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주민 대다수가 타지로 피신했다. 2010년대 들어 1천여명의 아랍 학생들이 학업을 위해 왕래하게 되자, 유대 랍비들이 아랍인에게 재산을 대여 혹은 판매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1] 맘루크 조의 다마스쿠스 총독 잔비르디 알 가잘리가 항복해 지위를 유지했다.[2] 가자 출신이 정착한 가자위야, 주로 쿠르드인들이 정착한 자미 알아흐마르, 칸다크, 사와윈, 알 와타, 앗 수크.[3] 출신지에 따라 푸르투칼, 쿠르투바, 카스틸리야, 무스타아립(아랍어를 쓰는 현지 유대인), 마가리바, 아르군 마 카탈란, 마자르, 풀리아, 칼라브리야, 시빌리야, 탈리얀, 알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