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21:05:55

함단 왕조

아나톨리아의 역사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상고대 / 고대 / 중세 / 근현대
ANADOLU TARİHİ
Η ΙΣΤΟΡΊΑ ΤΟΥ ΑΝΑΤΌΛΙΑ
11세기 12세기 13세기 14세기 15~19세기 20세기




셀주크
제국
/
아나톨리아
베이국들
동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colbgcolor=#4c81af> 트라페주스 제국



<colbgcolor=#015197> 영국 - 이탈리아 튀르키예
공화국
라틴 제국 동로마
제국
동로마







오스만
제국
룸 술탄국 니케아 제국 오스만 그리스
룸 술탄국 아나톨리아
베이국들
아나톨리아
베이국들
앙카라 정부
다니슈멘드 카라만 아르메니아
소 아르메니아 공국 몽골 제국 일 칸국 소 아르메니아 왕국 맘루크 둘카디르
라마잔
프랑스
}}}}}}}}} ||


파일:Hamdanids_955_AD.jpg
사이프 알 다울라 통치 기간 중인 955년경의 함단 왕조 영토

1. 개요2. 배경3. 왕조의 성립4. 대 동로마 제국 전선5. 역대 군주

1. 개요

905~1004년의 100여년간 모술을 중심으로, 동부 모술(자지라) 지역과 서부 알레포 일대를 통치한 쉬아파 왕조.

수니파 종주국인 아바스 왕조가 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자 모술 총독 직위를 이어오던 함단 가문이 힘을 키워 세운 왕조이다. 왕조명은 창건자 아부 알 하이자 압둘라 이븐 함단(Abu'l-Hayja Abdallah ibn Hamdan, 905~929 재위)의 부친인 타글립 부족장 함단 이븐 함둔에서 따온 것이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마케도니아 왕조동로마 제국에 맞서 이라크시리아를 지켜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나시르 알 다울라의 동생 사이프 알 다울라는 945년~967년간 알레포를 거점으로 삼아 레반트(시리아 + 팔레스타인)를 노리는 동로마 제국군과 싸웠다.(함단 전쟁) 타르수스 산맥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고, 한때 공세로도 나가 아나톨리아 남부를 점령하기도 하는 등 동로마 제국의 남진을 저지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과의 국력 차이는 현저했고, 결국 10세기 중후반에 로마노스 2세(959~963)와 니키포로스 2세(963~969)에게 차례로 털리며 쇠퇴했다. 962년에는 알레포가 함락되기도 했고, 969년에는 안티오키아를 상실했다. 그러다가 10세기 중후반부터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키워온 쉬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파티마 왕조가 북진하자 간신히 버텨오던 함단 왕조는 양면전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979년에 역시 쉬아 계열 12이맘파부와이 왕조에게 대패하여 모술을 빼앗겼고, 남은 영토는 대부분 두 국가에게 분할되었다. 그리고 990년에 디야르바크르에서 일어난 쿠르드계 수니파 마르완 왕조에 의해 멸망당했다(1004). 티무르 제국사마르칸트(트란스옥시아나)와 헤라트(호라산)의 2중 체제로 운영된 것처럼 함단 왕조도 모술(이라크)과 알레포(시리아)의 2중 체제로 국정을 운영했다.

2. 배경

동로마 제국 시대부터 시리아 북부에 거주하던 바누 타글립이라는 아랍계 부족이 있었다. 이슬람 정복 이후에도 기독교(단성론) 신앙을 유지하던 이들은 우마이야 왕조의 친위 세력이 되어 활약했고, 9세기가 되어서야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9세기 중후반 아바스 왕조사마라의 혼란기를 겪으며, 쇠퇴한 틈을 타 이들은 자지라 일대의 패권을 쥐었다. 비록 9세기 말엽 아바스 왕조는 안정을 회복했지만 이미 바누 타글립의 세력은 강대해졌고, 이에 아바스 조 제15대 칼리파 알 무타미드모술에 튀르크인 총독을 파견해 중앙집권을 시도했다. 그러자 부족의 유력자 중 한 명이었던 함단 이븐 함둔이 카와리지파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함단 이븐 함둔의 반란은 4년간의 격전 끝에 884년 그가 항복하면서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의 차남이었던 후세인 이븐 함단(895~915 재위)이 아바스 왕조의 몇 안되는 아랍인 장군이 되어 카와리지파, 쉬아파 카르마트, 바누 칼브, 이집트의 툴룬 왕조 등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자 함단과 다른 아들들이 석방되었다. 911년, 후세인은 모술의 아미르가 되었는데 915년 아바스 왕조의 와지르 직을 놓고 벌어진 바그다드의 권력 투쟁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25년 함단의 3남 압둘라 이븐 함단(925~929 재위)이 바그다드 궁정의 동맹덕에 재차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3. 왕조의 성립

929년 압둘라는 칼리파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가 살해되었고, 6년간의 내분 끝에 그의 장남 하산(즉 나시르 알 다울라, 935~967 재위)이 모술을 계승했다. 938년 아바스 왕조의 대장군('아미르 알 우마라') 바즈캄이 대군과 함께 모술을 점령했으나 경쟁 군벌이 바그다드를 공격하자 그는 하산의 지배를 인정하고 회군했다. 그러던 941년 바즈캄이 암살당하자 바그다드는 맘루크 아미르들간의 각축장으로 변했고, 제21대 칼리파 알 무타키는 대장군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와 함께 모술로 피신했다. 하산과 그의 동생 알리(즉 사이프 알 다울라, 945~967 재위)는 그들과 함께 남하해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수복했고,(942년 4월) 구원에 대한 대가로 칼리파 알 무타키는 하산과 알리 형제에게 각각 나시르 앗 다울라(왕조의 방어자) 및 사이프 앗 다울라(왕조의 검)라는 라카브를 내려 치하했다. 이는 와지르가 아닌 바그다드의 외부인에게 라캅이 내려진 첫 번째 경우였다. 특히 하산 나시르 알 다울라는 대장군 직위와 칼리파의 사돈이 되는 명예까지 얻었다. 한편 알리 사이프 알 다울라는 튀르크계 장군 투준과 함께 와시트를 수복했는데 봉급 지불이 늦어진 것에 분노한 투준이 반란을 일으켰고, 하산과 알리 형제는 바그다드를 버린채 도주했다.(943년 6월)

이후 이라크 대신 시리아로 시선을 돌린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는 사촌 후세인을 파견했는데 그는 이흐시드 왕조의 동맹인 라흐바의 아미르를 격파하고 손쉽게 할랍을 점령했다.(944년 2월) 한편 바그다드의 내분이 지속되자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는 바그다드에 재차 파병했고, 칼리파와 와지르는 이들과 함께 모술로 피신했다. 이에 투준이 북진하여 나시르 앗 다울라를 두 차례나 격파하고, 모술을 점령했다.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와 알리 사이프 앗 다울라 형제는 칼리파를 대동하고 누사이빈을 거쳐 라카로 도주했다. 투준은 하산에게 이라크에 대한 불간섭 및 350만 디르함의 연공을 대가로 모술을 돌려준 후 회군했다.(944년 5월) 이 타협에 분노한 칼리파는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이흐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가 북상하자 함단 군대는 라카와 할랍에서 철수했다. 그해 8월 라흐바에서 칼리파와 만난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그에게 이집트 체제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회군했다. 홀로 남겨진 칼리파 알 무타키는 투준의 안전 보장 약속을 믿고 바그다드로 돌아갔다가 실명당하고 폐위되었다.

파일:1280px-Al-Jazira.svg.png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

한편 이라크 원정의 실패 이후, 잠자코 지내던 '나시르 앗 다울라' 하산의 동생 '사이프 앗 다울라' 알리는 형의 지원하에 이집트 군대의 철수 직후 시리아로 향했다. 이흐시드 왕조의 알레포(할랍) 총독 아불 파스 우스만은 동맹인 바누 킬랍의 배신 소식을 접하자 저항을 포기했고, 사이프 앗 다울라 알리는 할랍에 무혈입성했다.(944년 10월) 이로써 시리아 북부와 자지라에 걸쳐 함단 형제가 경영하는 함단 왕조가 건설되었다. 한편 알레포, 안티오크, 타르수스, 라카, 디야르바크르, 마야파리킨 등의 영토를 지니게 된 사이프 앗 다울라는 모술, 라흐바, 마르딘, 누사이빈으로 구성된 형 나시르 앗 다울라보다 더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함단 왕조는 당시 드물었던 아랍인 군주로서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손쉽게 알레포를 얻은 사이프 앗 다울라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이흐시드 왕조를 침공해 홈스를 포위했다. 홈스의 구원 요청에 아불 미스크 카푸르 휘하 이흐시드 군대가 출정했으나 사이프 앗 다울라에게 격파되었고, 이에 홈스가 항복했다.

이후 시리아 통일에 나선 사이프 앗 다울라는 945년 초엽 일시적으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시민들의 반발로 후퇴하긴 했으나 이집트까지 위협의 대상이 될까 우려한 이흐시드 왕조의 무함마든 이븐 투그즈는 그해 4월 친정에 나섰다. 그는 사이프 앗 다울라에게 알레포 영유 인정을 대가로 휴전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이에 진격하여 여름 무렵, 함단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사이프 앗 다울라는 라카로 도주했다.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알레포 일대를 습격하곤 재차 협상을 권하여 기존 제안대로 시리아 분할이 성사되었다. 그해 10월의 협정에서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프 앗 다울라가 다마스쿠스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는 대가로 도시에 대한 연공까지 납부하는 저자세를 취했다.

다가오는 죽음 이후를 대비해 확실한 국경의 안정을 원했던 이흐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연공에 더해 사이프 앗 다울라를 자신의 조카와 결혼시키고 나서야 안심했다. 하지만 지극히 관대한 협상에도 불구하고 사이프 앗 다울라는 946년 7월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가 사망한 직후 곧바로 침공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남하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사이프 앗 다울라는 카푸르가 이끄는 이흐시드군에게 패배했다. 홈스로 후퇴해 전력을 재정비한 사이프 앗 다울라는 이듬해 봄 재차 남하했으나 패배했고, 이번엔 이흐시드군이 북진하여 알레포를 점령했다.(947년 7월) 하지만 쉬아파 파티마 왕조의 동진과 함께 다마스쿠스 너머의 지배에 한계를 느낀 카푸르는 다마스쿠스에 대한 연공 조항만 뺀 945년의 협정을 갱신하고 귀국했다. 이때 정립된 이집트-다마스쿠스 / 알레포-자지라의 구도는 향후 맘루크 왕조 때까지 오랜기간 유지되었다. 겨우 할랍을 되찾은 사이프 앗 다울라는 955년까지 바누 칼브 등을 위시한 아랍 부족들의 반란들을 강경 진압하며 내부를 결속했다.

4. 대 동로마 제국 전선

파일:Capture_of_Berroia_by_the_Byzantines.png

한편 934년에 말라티야, 949년에는 에르주룸을 수복하는 등 동로마 제국의 역습이 가시화되자 무슬림들 사이에선 '지하드'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모술에 있었던 때부터 936년 사모사타 구원 시도와 938년 말라티야 습격, 940년 아르메니아 원정 등의 반격에 나섰던 알리 사이프 앗 다울라는 할랍을 거점으로 삼고, 946년 동로마 영토에 대한 습격을 재개했다. 하지만 반격에 나선 동로마군은 함단군를 연패시키고 안티오크까지 습격했다. 이에 사이프 앗 다울라는 950년 대군을 모아 카파도키아를 약탈했지만 회군 도중 동로마 장군 레온 포카스와 맞붙어 8,000명의 전사자를 내는 대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측의 평화 제의를 무시하며, 습격을 지속하던 사이프 앗 다울라는 953년 마라쉬 전투에서 동로마 대군을 격파했고, 부상당한 패장 대 바르다스 포카스는 은퇴했다. 이후 2년간 동로마군의 반격을 막아낸 사이프 앗 다울라는 국경의 성채들을 재건했다. 한편 955년 바르다스 포카스의 장남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동로마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956년 봄, 재차 습격에 나선 사이프 앗 다울라는 요안니스 치미스케스가 지휘하는 동로마군의 매복에 걸렸으나 승리했다. 하지만 동시에 레온 포카스가 시리아를 침공해 사이프 앗 다울라의 사촌 아불 아쉬르를 패배시키고 그를 포로로 잡아갔다. 이듬해(957) 사이프 앗 다울라가 친로마 세력을 진압하는 동안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국경에 있었던 하다스 성채를 파괴했다. 958년 요안니스 치미스케스는 다라를 점령하고, 아미다 근교에서 10,000명의 함단군을 격파했다. 이에 사이프 앗 다울라가 반격에 나섰지만 라반 전투에서 패배했다. 960년,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크레타 섬 수복으로 부재한 틈을 타 사이프 앗 다울라는 카파도키아를 습격했다. 하지만 회군 도중 레온 포카스의 매복에 걸렸고, 이어진 안드라소스 전투에서 함단군이 전멸당했다. 사이프 앗 다울라는 불과 300명의 병력만 가지고 도주했다. 961년에 복귀한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킬리키아를 침공했고, 이듬해(962) 사이프 앗 다울라는 그 곳에서 철수했다. 현지의 무슬림들을 학살 혹은 추방하며 킬리키아를 석권한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마라쉬를 점령하고 나서 시리아 정복에 나섰다.

962년 가을, 니키포로스는 무려 7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만비즈를 점령한 후, 12월 중순 할랍에 이르렀다. 급조된 함단군은 괴멸되었고, 동로마군은 할랍에 입성하여, 저항하는 시타델을 놔두고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후, 10,000명의 포로와 함께 회군했다. 사이프 앗 다울라는 파괴된 수도에 킨나스린의 난민들을 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이내 부관인 카르쿠야에게 할랍을 맡기곤 제2의 수도인 마야파리킨으로 물러났다. 963년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틈을 타 사이프 앗 다울라는 킬리키아를 수복하고 북진하여 이코니움(콘야)까지 습격했다. 하지만 후임 사령관인 요안니스 치미스케스가 반격에 나서 킬리키아의 함단군을 패배시켰고, 965년 두 차례의 포위 끝에 마미스트라를 점령했다. 이후 타르수스가 항복하면서 킬리키아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같은해 카르마트군이 시리아를 습격하고, 디즈바리 등 킬리키아 출신 아미르들이 안티오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할랍을 점령하는 등 난관이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966년, 막대한 비용을 들여 동로마로부터 포로들을 돌려받은 사이프 앗 다울라는 들것에 실려 할랍에 귀환했다. 그는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지만 동로마군이 재차 침공해오자 샤이자르로 도주했다. 동로마군은 시리아 북부를 약탈한 후, 동로마측에 전향한 안티오크 총독과 함께 회군했다. 그 후 할랍으로 돌아온 사이프 앗 다울라는 병사했다.(967년 2월)[1] 알리 사이프 앗 다울라의 유일한 아들 샤리프는 치세의 시작부터 홈스 총독인 숙부 아부 피라스의 반란에 시달렸고, 968년 아부 피라스가 사망할 때즈음 동로마군이 침공했다. 샤리프는 재상 카르쿠야의 조언대로 홈스로 피신했는데, 카르쿠야가 할랍을 차지해버리면서 졸지에 수도를 잃어버렸다. 그 틈에 모술의 사촌인 아부 타글립 우다트 앗 다울라가 라카와 마야파리킨을 점령했다. 역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동로마 장군 페트로스는 969년 10월 안티오크를 점령하여 시리아에 확고한 거점을 마련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할랍의 카르쿠야는 경쟁 아미르에 맞서 안티오크의 페트로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페트로스는 해당 아미르를 격파한 후 할랍을 포위하여, 970년 1월 할랍에 입성했고 카르쿠야는 70만 디르함의 연공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2] 같은 시기 이집트를 장악한 쉬아 이스마일파(7이맘파) 파티마 왕조는 이제 허울 뿐인 함단 왕조를 두고 동로마 제국과 경쟁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총독으로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카르쿠야는 975년 부관인 바크주르에 의해 폐위되었는데, 2년 후 샤리프는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바크주르를 패배시키고 할랍을 되찾았다.[3] 979년 샤리프는 모술의 사촌인 아부 타글립 우다트 앗 다울라와 대립하고 있었던 부와이 왕조에 복속하여, 실지의 일부를 되찾았고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라카브 '사드 앗 다울라'를 하사받았다. 이후 샤리프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복속을 철회하려고 시도했지만 981년 동로마군이 할랍 앞에 당도하자 970년의 협정을 재확인했다. 이때부터 동로마-파티마 간의 할랍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983년 9월 파티마군이 홈스의 바크주르와 함께 할랍을 공격했는데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의 요청에 따라 동로마 장군 바르다스가 개입하자 철수했다. 내친김에 바르다스는 10월에 홈스를 점령하고,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에게 반환했다. 도망친 바크주르는 파티마령 다마스쿠스 총독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동로마군과 함단군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연공을 20,000 디나르로 올리는 대가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986년 파티마군이 트리폴리를 넘어 발라냐스를 점령하자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연공을 거부했고, 이에 동로마군이 킬리스를 점령한 후 아파메아를 포위했다.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그 보복으로 할랍 부근의 성 시메온 성당을 파괴했다. 하지만 동로마-파티마 간에 휴전이 추진되자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다시 기존 조건대로 동로마 제국에 복속했다. 한편 그해 말엽, 바르다스는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바르다스를 원조하며 3년간 이어진 내전 기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러던 991년, 다마스쿠스 총독직에서 해임된 바크주르가 라카로 도주한 후, 독자적으로 할랍을 공격했다. 이에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동로마령 안티오크 총독의 도움을 받아 그해 4월 바크주르를 패배시키고 포로가 된 그를 처형했다. 이후 파티마 왕조를 공격하려던 샤리프 사드 앗 다울라는 991년 12월에 병사했다. 그의 아들인 사이드 앗 다울라가 계승했지만 재상 룰루가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1002년 알레포의 지배권은 룰루가 차지했다. 룰루는 1002~1004년 함단 왕조의 마지막 두 왕인 알리 2세와 샤리프 2세의 섭정으로 있다가 파티마 왕조의 봉신이 되었다.

5. 역대 군주

자지라의 함단 왕조

1. 함단 이븐 함둔(Hamdan ibn Hamdun), 바누 타글립 부족장
2. 알 후세인 이븐 함단(al-Husayn ibn Hamdan) (895~915 재위)
3. 창건자 압둘라 이븐 함단(Abdallah ibn Hamdan) (905~929)
4. 나시르 알 다울라(Nasir al-Dawla) (935~967 재위)
5. 파들 알라 아부 타글립 알 가단파르 우다트 알 다울라 (Fadl Allah Abu Taghlib al-Ghadanfar Uddat al-Dawla) (967~978 재위)
6. 부와이 왕조의 지배 ( 979~989)
7. 아부 타히르 이브라힘 이븐 나시르 알 다울라(Abu Tahir Ibrahim ibn Nasir al-Dawla) & 아부 압둘라 알 후세인 이븐 나시르 알 다울라(Abu Abdallah al-Husayn ibn Nasir al-Dawla) (989~990 재위)
  • 우카일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알 무사야브에 의해 폐위됨

알레포의 함단 왕조

1. 사이프 알 다울라(Sayf al-Dawla) (945~967 재위)
2. 아부 알 마알리 샤리프 사드 알 다울라(Abu 'l-Ma'ali Sharif Sa'd al-Dawla) (967~991 재위)
3. 사이드 알 다울라(Sa'id al-Dawla) (991~1002 재위)
  • 굴람 룰루 알 카비르에 의해 폐위됨

[1] 사이프 앗 다울라 알리는 지하드 전사의 이미지 때문에 기독교에 적대적이었을 것이라고 오해받지만 그의 신민들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도인 이상, 정상적인 통치에 있어서 이는 불가능했다. 그가 가장 신뢰했던 비서 역시 기독교도였다. 한편 동생 알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모술의 하산 나시르 앗 다울라는 장남인 아부 타글립에게 실권을 맡겼다가 그에 의해 폐위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948년부터 지속된 부와이 왕조의 침공에 결국 979년 정복되고 말았다.[2] 이때 트리폴리 북쪽까지의 해안 영토가 할양되었고, 알레포에는 관세를 거둔다는 명목하에 동로마 제국의 관리가 상주했으며, 아미르와 카디 임명권 역시 동로마 황제에게 있었다. 그에 더해 할랍의 아미르는 다른 무슬림 군대의 그 일대 통과를 불허해야 했다.[3] 이후 카르쿠야와 바크주르 모두 사면되어 바크주르는 샤리프가 머물던 홈스 총독이 되었고, 카르쿠야는 재상으로 복권되어 990년 4월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