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9 17:12:50

차탈회위크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튀르키예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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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터키 차탈회윅.jpg
유적지 전경. 보호를 위해 덮개를 씌워둔 상태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지
영어 Neolithic Site of Çatalhöyük
프랑스어 Site néolithique de Çatal Höyük
국가·위치 튀르키예 콘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2년
등재기준 (iii)[1], (iv)[2]
지정번호 1405
파일:고대 터키 비너스.jpg
대표 유물인 기원전 6천 년경의 여신상

Çatalhöyük

1. 개요2. 발굴3. 건축학적 특징4. 문화적 특징5. 경제적 특징

[clearfix]

1. 개요

차탈회위크는 기원전 7100년쯤부터 기원전 5600년 무렵까지, 오늘날 튀르키예 콘야도 퀴칙쾨이(Küçükköy) 지역에 있었던 신석기 시대의 도시 유적이다.

2. 발굴

1958년 영국고고학자인 제임스 멜라트(James Mellaart)가 처음으로 발견하여 발굴했고, 1961년부터 65년까지 멜라트가 이끄는 발굴팀이 다시금 발굴조사 하였다. 이런 조사로 유적이 위치한 장소의 맨 아래 지층이 기원전 7100년 무렵, 가장 위 지층은 기원전 5600년 즈음으로 밝혀지자 당대 고고학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시기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3]이 세워지기 훨씬 이전인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라서, 이 시대에 건설된 도시 유적이 발굴되자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발굴자 제임스 멜라트가 희대의 흑역사도락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이었다.[4] 이 때문에 차탈회위크 유적을 발굴했을 당시에 주류 학계로부터 주작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1965년의 발굴 이후에 멜라트가 유적에서 나온 문화재를 해외로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추방당하면서, 한동안 유적 연구는 답보하였다.

그러나 1991년에 영국고고학자 이언 호더(Ian Richard Hodder)가 이끄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고고학 연구진들이 멜라트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발굴을 재개하여 그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을 밝혀내자 차탈회위크는 다시금 주목받았다. 2023년 현재까지도 유적을 조사하는 중이다.

3. 건축학적 특징

파일:터키 차탈회윅 1.jpg
예상 복원도

차탈회위크는 기원전 7100년 무렵 건설되었다고 추정한다.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에 있는 예리코와 함께 인류 역사상 현존하는 가장 초창기 무렵의 도시 유적인데[5], 흔히 생각하는 도시를 떠올리면 곤란하고 대강 수백 명에서 많아야 만 명 정도가 거주했다고 추측한다.

건물도 이후 시대와 비교하면 형태가 꽤나 색다르다. 입구가 건물 옆면이 아니라 옥상에 있는데, 외적이나 맹수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구조는 초창기 도시 유적들의 특징으로, 인더스 문명모헨조다로 역시 같은 목적으로 입구를 옥상에 설치했다.[6] 따라서 도시 내부를 이동할 적에는 건물의 옥상을 걸어서 넘어다녔으리라 여긴다. 건물에는 출입구 이외에도 굴뚝 역할을 하는 구멍이 따로 있었거니와 유적 바깥에 동물 배설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므로, 오물이나 쓰레기를 건물 밖으로 내버렸다고 추정한다.

차탈회위크의 각 건물들의 대부분이 방이 두 칸이었다. 하나는 남쪽에 조리실과 화덕을 갖춘 주방 겸 침실, 다른 하나는 각종 생활용품을 만들던 공작실로 쓰였다.

유적 자체는 진흙을 말려서 만든 벽돌로 지었는데,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돌보다는 흙을 구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4. 문화적 특징

차탈회위크는 평균적으로 대략 인구 5천-7천 명 사이를 유지하였으나 전성기에는 1만 명 남짓 살았다고 추정한다. 고고학자들이 차탈회위크 주변 지역을 조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소규모 거주지 유적들을 여럿 발견하였다. 이로 미루어 인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이 모인 차탈회위크가 현지의 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했다고 여긴다. 차탈회위크를 포함한 여러 거주지들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 이전에 거주민들이 떠나가면서 멸망한 듯하지만, 이런 쇠퇴를 야기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학자들은 기후변화로 농업에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차탈회위크 주민들은 죽은 사람을 갈대를 엮어 만든 매트나 바구니에 담아 땅에 묻었다. 주로 집의 침대 밑이나 거실 바닥에 매장했는데, 죽은 자의 머리를 잘라 종교적 의식에 사용하기도 했다. 유적을 발굴했을 적에 집 터 안에서 유골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는 참수된 시신도 적지 않았다.

의 털로 짠 천으로 옷을 해입었던 듯한데, 실을 뽑는 데 사용하는 방추와 같은 도구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대리석방해석, 석회암 등으로 만든 여인상이 출토되기도 했는데, 최초 발굴자인 제임스 멜라트는 이를 원시적인 종교의 흔적으로 추정했다. 같이 발굴된 벽화 등에도 여인상과 모습이 같은 여자가 그러졌음을 근거로 묘사된 여자의 정체를 차탈회위크에서 숭배하던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지모신으로 추정했는데[7], 이를 근거로 멜라트는 차탈회위크가 종교적인 성지 노릇도 했다고 여겼다.

가옥 유적들의 크기와 형태가 거의 모두 비슷하며, 유물들과 발굴된 유골을 통해 추정되는 영양상태 등에서도 경제적 부의 불평등을 유추할 흔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체로 상당히 평등주의적인 사회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다수의 석제 도구 등이 공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임을 생각한다면 특히 적잖은 인구가 거주하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거주지 유적만이 발견되었을 뿐, 특별히 집중된 권력구조 등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할만한 흔적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여신상'으로 여겨지는 조형물 등이 다수 발굴되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조직되고 제도화된 종교체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질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위계나 그에 따른 불평등 역시 거의 없는 사회였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역시 유물이나 유골의 영양상태 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는 남녀 사이의 특별한 사회적 지위 등의 격차가 있었다고 판단될 수 있을 자료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경제적 부를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상당히 평등주의적인 사회상을 지녔었을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앞서 언급된 것처럼 공유된 것으로 여겨지는 도구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개별적 소유가 완전히 부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는 유물도 있으며, 그 경우엔 유물의 질과 양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에 대해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전반적으로 비교적 평등한 사회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적 격차가 완전히 부재했던 것은 아니며, 한편으로는 평등주의적 양상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추론하기도 한다.

때문에 괴베클리 테페등의 수렵채집 사회였던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여겨지는 거석 유적의 발견이 '농업의 등장 -> 인구증가 -> 수렵채집 시대의 소규모 공동체에서 대규모 정주사회로 변화'라는 기존의 도식을 의문에 처하게 만든 것과 유사하게, 농경의 도입과 그에 기반한 대규모 정주사회의 형성이 (그 자체로) 곧 (수렵채집 시대의 대체로 평등주의적이었던 공동체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위계적 권력구조를 지닌 '계급사회'로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전통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인류학 전반에 적잖은 고민거리를 제공하는 발견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5. 경제적 특징

차탈회위크가 발견된 지역의 상층부 지층에서 곡식의 낟알이 출토되기도 하여, 중후반기에는 상당한 규모로 농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신석기 시대 농업 기술의 한계로 인해 생산량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대개는 수렵채집이나 목축업으로 얻어진 육류가 주식이었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유적 내부에서 을 사육한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수확한 곡물로 만든 빵이 출토되기도 했다.

주변에도 소규모의 거주지들이 꽤 있던 만큼 타 지역과 무역을 하기도 했는데, 멀리 오늘날의 시리아 지역과 무역을 한 증거가 발견되기도 했다.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일단 현존하는 기록이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수메르 문명이 역사상 최초의 문명이다.[4] 제임스 멜라트와 사라진 도락의 보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멜라트는 사실 도굴꾼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일방적인 피해자다. 하지만 한동안 학계로부터 공명심에 없던 유물을 만들어서 주작질한 인간으로 찍혔고, 당시 튀르키예 정부로부터는 귀중한 문화재들을 도굴꾼들과 짜고 빼돌린 파렴치한이라고 오해받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주류 학계가 조사하여 주작 논란은 사실무근임이 밝혀져서 학자로서 명예를 회복하였으나, 뒷날 차탈회위크의 발굴 과정에서 또다시 문화재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튀르키예에서 추방당했다. 결국 그는 학계에서 영구히 은퇴하고 교사로 전업했다고 한다.[5] 건설시기는 예리코가 더 이르다. 이쪽은 무려 기원전 1만 년 즈음까지 올라가는 유적지다.[6] 다만, 모헨조다로는 일반적인 건축물처럼 문이 옆에 나있는 경우도 흔했는데, 이는 도시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형태라서, 차탈회위크보다는 훨씬 방어에 용이했기 때문이다.[7] 차탈회위크에서 숭배된 지모신은 고대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의 원형이 되는 신격이라고 추정한다. 키벨레 신앙은 그리스 신화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을 정도로 신앙의 세력권이 넓고 강했다. 마찬가지로 아나톨리아에서 숭배받던 레토 여신과 동일시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