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3:06:25

제임스 멜라트와 사라진 도락의 보물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external/5b2b7e6b8dbd40770149d8f7607874b68da8b8041076dc661275ff2f8c55b0ef.jpg

제임스 멜라트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발표한 도락의 보물에 관한 기사

1. 개요2. 사라진 보물3. 멜라트의 조작?

1. 개요

영어로는 "Dorak Affair(도락 사건)"으로 불리는 일련의 소동. 영국튀르키예를 발칵 뒤집어 놓은 고고학계의 일대 사건이다.

2. 사라진 보물

사건의 발단은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James Mellaart)가 이스탄불을 출발해 이즈미르로 가는 완행열차를 타면서 시작되었다. 멜라트는 건너편 자리에 앉은 소녀가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듯한 팔찌를 찬 것을 보았는데 소녀에게 자신이 고고학자라고 소개하면서 팔찌를 볼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팔찌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집에 팔찌 말고도 많은 보물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에 혹한 멜라트는 소녀를 따라 소녀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 후 소녀가 꺼낸 보물들을 본 멜라트는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멜라트는 보물들의 사진을 찍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소녀는 사진 촬영은 안 되고 스케치는 할 수 있다고 했다. 멜라트는 당장 그 집에 머무르면서 보물들을 관찰하고 스케치하고 상형문자탁본을 뜨는 등 일을 계속해나갔다. 그리스계라는 소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 보물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그리스군이 이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시기에 호숫가에 있는 '도락'이라는 마을에서 도굴된 것이라고 했다.

멜라트는 45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에 버금가는 부와 세력을 보유한 대도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고대의 보물들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정확한 집 주소나 소녀의 신원 등 다른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부주의가 멜라트에게 나중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원흉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소녀의 집을 떠난 뒤 멜라트는 이듬해 1959년 11월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라는 신문에 자신이 발견한 도락의 보물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멜라트의 실수와 알 수 없는 농간 때문에 멜라트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멜라트의 실수는 우선 소녀가 누군지 전혀 파악해 볼 생각도 안 했다는 것이었다. 멜라트는 소녀의 이름이 '안나 파파스트라티(Anna Papastrati)'고 주소는 '카짐 디레크(Kazim Direk)가 217번지'이며 미국식 영어를 했다는 것만 기억했다. 하지만 튀르키예 경찰이 조사해 보니 그런 주소도, 그런 소녀도 없었다. 아예 "카짐 디레크 가"라는 거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멜라트의 또 다른 실수는 불필요한 거짓말을 한 점이었다. 앙카라의 영국 고고학회에서 멜라트는 시튼 로이드(Seton Lloyd) 교수에게 도락의 보물을 보고했는데 발표하면서 '로이드 교수가 6년 전에 보고한 보물에 대해서 이제 발표해도 좋다고 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는 사실 도락의 보물에 대해서 밤새 연구하면서 소녀와 한 집에 있었기 때문에 괜히 부인이 오해할까봐 꾸며낸 거짓말이었지만...

한편 멜라트는 도락의 보물에 대해 발표하기 전에 튀르키예의 문화재청에 글을 발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튀르키예 문화재청은 멜라트의 편지를 받지도 못했다. 물론 일반우편이 망실되는 경우야 왕왕 있지만 멜라트는 편지가 잘 도착했겠거니 생각하고 도락의 보물에 대해서 발표했다.

그러나 튀르키예 문화재청은 노발대발했다. 관리들이 당장 찾아와 보물을 왜 발견해 놓고 알리지 않았느냐, 보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따졌다. 멜라트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부 제공했지만 멜라트가 아는 정보는 다 허위였다. 이 때문에 멜라트는 튀르키예의 국보급 유물들을 빼돌린 파렴치한 자로 몰렸다. 튀르키예의 신문 "밀리예트"는 멜라트가 보물을 빼돌렸다는 추측 기사들을 남발했다.

튀르키예 경찰의 조사를 통해 멜라트가 보물을 빼돌리지 않았고 그도 피해자였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멜라트는 튀르키예에서 추방당하고 조력자 역할에 한정해서 1964년 겨우 복귀할 수 있었다.

고초를 겪던 멜라트는 1961년부터 자신이 발굴하던 차탈회위크라는 아나톨리아의 최초이자 초기 신석기 유적 조사로 돌아왔지만 골때리게도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여기서도 신석기 유적의 벽화 묘사본과 일부 유물을 공개했지만 막상 그 원본은 찾을 수 없었던 것. 결국 1965년 멜라트는 유물매매 혐의로 튀르키예 고고학계에서 영구추방되고 말았다.

오늘날까지도 멜라트가 보았던 도락의 보물은 행방이 묘연하다. 멜라트가 이런 일을 겪은 이유를 두고 일부에서는 도굴단이 멜라트를 보물 감정가로 사용한 게 아닌가 여기기도 한다. 멜라트는 당시 저명한 고고학자였고 멜라트가 도락의 보물을 관찰하여 이 발견을 발표하면 도락의 보물은 값이 더 비싸질 것이기 때문에 도굴단이 멜라트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어쨌든 이런 고난을 겪은 뒤 멜라트는 영국에서 교육에 종사하다가 2005년에 은퇴하여 2012년에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3. 멜라트의 조작?

일각에서는 애초부터 보물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멜라트가 '공명심 때문에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미국의 미술 칼럼니스트 수전 마주르(Susan Mazur)는 이렇게 주장했다. 멜라트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도락 보물의 존재를 공개한 뒤 보물을 발견한 경위를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사진 촬영을 하지 못해 탁본과 스케치만으로 발견을 공인받으려 하자 학계에서는 믿을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멜라트는 안나 파파스트라티가 보물 발견을 공개해도 된다고 보낸 편지를 증거로 제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전 마주르의 분석에 의하면 이 편지의 구성이 멜라트가 쓴 편지와 흡사하다고 한다. 멜라트는 편지에 날짜를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로마 숫자로 썼는데 안나 파파스트라티가 멜라트에게 보냈다는 편지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날짜를 표시했다고 한다.

또 일각에서는 도락 보물을 훔쳐냈고 밀거래했다고 의심되는 도굴단의 실체도 명확하지 않아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아무리 도굴단이 철저한 보안 아래 보물을 밀거래했을지라도 어딘가에는 흔적이 반드시 남기 마련이다. 멜라트가 발견했다는 보물이 아무리 비밀리에 돈 많은 수장가의 손에 떨어졌다고 해도 세월이 흐르면 한두 개 정도는 미술시장에 흘러나와야 할 텐데 전혀 그런 유물이 미술시장에 나온 적이 없다. 그러므로 애당초 '도락의 보물'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한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때문에 수전 마주르를 비롯한 일각에서는 멜라트가 학자의 공명심으로 있지도 않은 보물을 날조했고 자신이 날조했음을 숨기고자 있지도 않은 안나 파파스트라티와 도굴단의 존재까지 만들어 자신은 도굴단에 이용당했다고 연극을 한 게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고고학자들은 멜라트의 스케치와 탁본을 집중 분석해 보니 멜라트가 비록 사진 촬영을 하지 않는 등 기본적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문제긴 하지만 그가 한 스케치나 탁본은 매우 상세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보물을 상상으로 그려낸 수준이 아니라고 보고 보물을 두고 6만여 단어로 설명하였는데 과연 가공의 보물을 이 정도로 자세히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멜라트가 불필요한 거짓말을 한 점, 밀거래되었으리라는 도락의 보물이 현재까지도 종적이 묘연하고 미술 시장에 한 점도 흘러나오지 않는 것 등은 여전히 의문이다.

멜라트의 조작설을 주장하는 수전 마주르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