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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제21대 칼리파 알 무타키 المتقي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름 | 아부 이스하크 이브라힘 이븐 자파르 알 무크타디르 أبو إسحاق إبراهيم بن جعفر المقتدر |
출생 | 908년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
사망 | 968년 7월 (향년 60세) |
아바스 왕조 | |
재위 기간 | 아바스 칼리파 |
940년 12월 15일 ~ 944년 8월 26일 (4년) | |
전임자 | 알 라디 |
후임자 | 알 무스탁피 |
별명 | 알 무타키 릴라(المتقي: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
부모 | 아버지 : 알 무크타디르 어머니 : 칼루브 자흐라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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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스 왕조 제21대 칼리파. 혼란스러운 치세 속에서 실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 생애
908년경 아바스 왕조 제18대 칼리파 알 무크타디르와 동로마 제국에서 끌려온 여노예 칼루브의 아들로 출생했다. 944년 12월 12일 형 알 라디가 사망한 후, 아미르 알 우마라를 역임하고 있던 바즈캄에 의해 추대되었다. 와시트에 머물던 바즈캄은 바그다드로 직접 오지도 않고 비서를 보내어 형식적인 회의 후 그를 즉위시켰다. 무타키의 첫 지시 역시 바즈캄에게 예복과 문장을 보내며 그의 지위를 인정한 것이었다.941년 봄 바즈캄은 부관 투준을 보내어 바스라의 하산 알 바리디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자 친히 와시트에서 남하하였다. 다만 도중에 투준이 반격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와시트로 돌아갔는데, 도중에 사냥에 나섰다가 쿠르드 유랑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941년 4월 21일) 바스라의 포기까지 고려하던 하산 알 바리디는 곧바로 이라크의 유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바즈캄의 사후 그의 병력 중 튀르크 용병들은 칼리파에 충성하였고, 1천 5백의 다일람 용병들은 하산 측으로 전향하였다. 처음으로 군대를 지니게 된 무타키는 바즈캄의 막대한 부 역시 지니게 되었다. 한편 하산은 7천 병력을 이끌고 와시트로 북상하며 무타키에게 자신의 군대에게 줄 급료를 요구, 응하지 않을 시에 바그다드로 진군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바그다드는 혼란에 빠졌고, 무타키는 튀르크 군대와 함께 디얄라 운하로 진군하였다. 다만 승리를 자신할 수 없던 그는 일정 금액의 지불을 약속하는 패착을 범하였다. 하산 측의 병력은 사기가 올랐고, 튀르크 인들 역시 봉급을 요구하였다. 당황한 무타키가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튀르크 병사들은 하산 측으로 전향하거나 모술로 도주해버렸다. 이로써 무타키는 칼리파의 권위를 회복할 기회를 놓쳤고, 5월 31일 하산이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미르 알 우마라의 예로써 환영받았다. 6월 4일 무타키의 와지르 아흐마드 이븐 마이문의 사임과 함께 와지르에 오른 그는 4일 후 전임자를 사로잡아 와시트로 보내었다.
탐욕스러웠던 하산은 칼리파를 단 한번도 알현하지 않으면서 그를 위협해 50만 디나르가 넘는 돈을 갈취하였다. 하지만 그후 병사들이 하산의 부를 탐내며 쿠란키즈 이븐 파라디의 주도 하에 폭동을 일으켰다. (6월 28일) 하산의 동생 아불 후세인의 저택이 전소되었고, 시가지 동부의 주민들 역시 가세하자 서부에 있던 하산은 티그리스 강의 다리를 끊고 와시트로 도주하였다. 이후 쿠란키즈가 아미르 알 우마라로 등극하였다. 얼마 후 하산이 재차 아시트로 접근하자 쿠란키즈가 이스파한 휘하의 다일람 병력을 파견했고, 이에 하산은 바스라로 후퇴했다.
다만 쿠란키즈의 집권 역시 단기간에 그쳤고, 938년 이후 북쪽에서 힘을 기르던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가 무타키의 복귀 요청에 8월 말엽 바그다드에 입성하였다. 시가전 끝에 패배한 쿠란키즈는 감금되었고, 그의 핵심 세력인 다일람 용병들은 학살되었다.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의 남하에 우크바라로 피신했던 쿠란키즈는 며칠 간 이어진 전투에서 우세를 점했다. 그럼에도 8월 23일 부관 이븐 무카틸에 이어 이틀 후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가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쿠란키즈 역시 역시 하루 후에 입성하여 시가전 벌였다.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시리아 귀환까지 고려했지만, 일단의 병력이 쿠란키즈 휘하 다일람 부대를 후방에서 기습하며 승기를 잡았고, 민중 역시 공격에 가세하며 승리했다. 쿠란키즈는 은거했고, 집권한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9월 22일 살아남은 다일람 용병들을 처형하고 다음날 아미르 알 우마라로 복귀했다. 이후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된 쿠란키즈는 궁전에 감금되었다. 9월 23일 아미르 알 우마라로 복귀한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하산이 와시트에서 열린 금요 예배에서 그를 칭송하는 등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 묵살하고 10월 16일 옛 거점인 와시트의 수복을 위해 출정했다. 이에 하산은 바스라로 도주했지만, 11월 28일 투준과 누쉬타킨의 튀르크 병력이 반기를 들고 하산 측으로 전향하였다.
이에 전황이 알 수 없게 되자,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의 비서 아부 압둘라 아흐마드 이븐 알리 알 쿠피의 중재 하에 양측은 협상해, 하산이 17만 디나르를 바치고 앞으로 60만 디나르를 연공으로 납부하는 조건으로 현상 유지의 휴전을 맺었다. 12월 9일 하산은 재차 와지르에 임명되었고, 대리인으로 아부 자파르 이븐 쉬르자드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하산이 돌연 직접 바그다드로 향하려 하자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그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아부 이스학크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알 카라리티가 임명했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예배 시에 하산을 저주했다. 이에 하산 역시 동생들에게 군대를 주어 바그다드로 파견하였다.
942년 3월 7일 양측은 디얄라에서 충돌하였고,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바그다드 주민들까지 가세했음에도 패하였다. 11일 하산의 군대는 재차 바그다드에 입성하였고, 전과 달리 무자비함을 보이며 칼리파 궁전을 약탈했다.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무타키와 그 아들을 대동하고 함단 왕조의 모술로 피신했다. 바그다드에 대한 하산의 가혹한 수탈은 110일간 이어졌고, 그동안 만여명이 기근, 질병, 또는 폭력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보다못한 투준 등 튀르크 장교들이 정변을 시도했으나 발각되자 칼리파가 있는 모술로 도주했다. 이들을 환영한 함단 왕조의 수장 하산은 곧 본색을 드러내어 4월 11일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를 암살해 시리아 북부 영지를 흡수한 후 라카브 나시르 앗 다울라를 받고[1] 아미르 알 우마라에 올랐다.
하지만 나시르는 투준의 설득에 따라 칼리파와 함께 바그다드로 진군했고, 6월 4일 하산이 바그다드에 도망친 후 무혈 입성했다. 나시르는 자신의 딸을 무타키의 아들과 결혼시키며 입지를 강화했다. 한편 와시트로 도주한 하산은 세력을 재정비한 후 동생 아불 후세인에게 군대를 주어 바그다드 수복을 시도했다. 나시르 역시 동생 알리에게 군대를 주어 맞서게 하였고, 양측은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마다인에서 격전을 벌였다. 3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하산 측은 다수의 사상자를 내며 패했다. 비록 함단 군대 역시 약화되어 아불 후세인을 추격하지 못했지만, 승장 알리는 9월 2일 개선하여 사이프 앗 다울라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 후 사이프 앗 다울라는 튀르크 군과 와시트를 장악하고 주둔, 바스라의 하산을 견제하였다. 그러던 943년 봄, 급료 체불에 분노한 튀르크 병사들이 투준의 지휘 하에 봉기했다. 5월 7일 이들은 사이프 앗 다울라의 진영을 습격해 불을 질렀고, 그는 바그다드로 도주했다. 투준은 와시트에서 허브를 가져와서 축하하는 옛 페르시아 방식으로 아미르로 추대되었다.. 함께 봉기를 주도한 카즈카즈는 이스파살라르(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5월 20일 하산과 공모했다는 혐의로 침상에서 끌어내려져 실명당했다. 얼마후 투준이 북상하자, 함단 왕조는 바그다드 마저 포기하고 모술로 돌아갔다. 투준은 6월 3일 바그다드를 접수하고 아미르 알 우마라에 올랐다. 3일 후 하산은 그의 부재를 틈타 와시트를 점령했고, 투준은 전향한 하산의 비서 무함마드 이븐 쉬르자드를 자신의 비서로 삼은 후 남하했다.
943년 8월, 오만의 군벌 유수프 이븐 와지흐가 샤트 알 아랍을 거슬러 올라오며 우불라를 점령하고 바스라를 포위했다. 안정을 추구하던 투준은 하산의 딸과 결혼하며 혼인 동맹을 맺었다. 오만 함대는 한 바스라 선원이 잠입하여 불을 지르자 철수했다. 944년 봄 튀르크 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탐낼 것을 염려하던 와지르 아불 후세인 이븐 무르카는 재차 함단 왕조에 개입을 요청했다. 이에 시리아 방면 사령관 아부 압둘라 후세인이 남하, 하르브 성문에 당도했다. 후세인은 무타키와 함께 합류하여 모술로 향했다. 이에 놀란 투준은 하산에게 와시트를 영지로 내어준 후 북상하여 티크리트 부근에서 사이프 앗 다울라를 두 차례에 걸쳐 격파한 후 모술을 점령했다. 함단 왕조와 무타키는 니시비스로 후퇴하였고, 사이프 앗 다울라는 칼리파를 호위하며 라카에 머물렀다.
한편 협상에 나선 나시르 앗 다울라는 5월 26일 모술을 돌려받는 대가로 이라크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고, 360만 디르함의 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휴전했다. 실망한 무타키는 이집트 익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구즈와 연락하였고, 8월 익시드 군이 북상했다. 무타키를 알현한 무함마드 이븐 투구즈는 882년의 경우처럼 이집트로 그를 초청하려 했지만 거부당하자 시리아에 병력을 주둔시킨 후 회군했다. 한편 투준이 안전과 충성을 맹세하며 바그다드 귀환을 청하자 무타키는 이에 응했다. 하지만 그가 바그다드에 당도하여 둘이 만나자, 투준은 알 무타키를 실명시키고 폐위한 후 사촌 알 무스탁피를 칼리파로 추대했다. 그러자 나시르가 반발하며 연공 납부를 거부했는데, 투준이 재차 진격하여 복속시켰다.
한편 바스라에서는 942년 말엽 부와이 왕조의 알리 이븐 부야가 칼리파의 요청을 받았다며 바스라를 공격하여 점령할 뻔 했으나 몇몇 장교들이 하산 측으로 전향하자 철수했다. 943년 11월, 하산은 동생 아부 유수프를 암살,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944년 6월 하산은 일주일 간의 감기를 앓은 후 병사하였고, 아들 아불 카심이 숙부 아불 후세인을 물리치고 계승했다. 그러다 947년 부와이 왕조가 바스라를 점령하면서 바리디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실명당한 알 무타키는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 968년에 사망했다.
3. 여담
그의 치세에 바그다드가 6번이나 점령당했다. 941년 5월 하산 알 바리디가 잠령했고, 한 달 후에 쿠란키즈 이븐 파라디가 점령했으며, 두 달 후인 941년 8월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가 점령했다. 942년 3월 하산이 바그다드를 탈환했지만 석달 후인 942년 6월 나시르 앗 다울라가 하산을 몰아내고 바그다드를 공략했다. 최종적으로 943년 6월 튀르크 장군 투준이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바그다드는 튀르크 군부의 수중에 넘어갔다.[1] 앗 다울라 형식의 칭호가 와지르 외의 인사에게 부여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