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21:31:08

압뒬하미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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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지만 하산도 잠깐 동안이지만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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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제27대 파디샤
압뒬하미트 1세
عبد الحميد برنجی | I. Abdülhamit
파일:오스만 압뒬하미트 술탄.jpg
출생 1725년 3월 20일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사망 1789년 4월 7일 (향년 64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묘소 이스탄불 압뒬하미트 1세 영묘
재위기간 오스만 파디샤
1774년 1월 21일 ~ 1789년 4월 7일
서명
파일:압뒬하미트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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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아흐메트 3세
어머니 라비아 셰르미 카든 (출신: 불명)
배우자 아이셰 술탄 (출신: 불명)
아이셰 시네페르베르 술탄 (출신: 불가리아 / 조지아 / 체르케스 추정)
루흐샤 하티제 카든 (출신: 불명)
빈나즈 카든 (출신: 불명)
딜페지르 카든 (출신: 불명)
휘마샤 카든 (출신: 불명)
메흐타베 카든 (출신: 불명)
무테베르 카든 (출신: 불명)
파트마 셰비세파 카든 (출신: 불명)
나크쉬딜 술탄 (출신: 조지아 추정)
뉘크헷세쟈 술탄 (출신: 조지아 / 압하지야 추정)
자녀 무스타파 4세, 마흐무트 2세를 포함한 11남 16녀
종교 이슬람 (수니파)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즉위와 패전 조약2.3. 제한적 개혁과 반란 진압2.4. 러시아와의 전쟁
2.4.1. 오스트리아의 참전2.4.2. 비보와 죽음

[clearfix]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27대 술탄이자 21대 파디샤.

러시아 제국과의 패전이 짙은 상황에서 즉위해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하고 제한적인 개혁을 거쳤으나, 러시아가 협정을 어기고 크림 반도를 합병하는 등 야욕을 보이자 참다 못해 1787년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러자 러시아와 동맹 관계였던 오스트리아 역시 참전, 가뜩이나 쇠약해진 제국을 양면으로 공격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베오그라드, 왈라키아, 몰다비아, 우크라이나 해안 등을 상실하였다.

또한 흑해의 요충지 외쥐의 상실과 주민 전원의 학살 소식을 접한 압뒬하미트는 충격을 받아 몸져누웠고, 1789년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사망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725년 아흐메트 3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년 후 부황이 퇴위당하자 형 무스타파 3세와 함께 연금되었고, 무스타파 3세가 즉위한 후에야 1순위 후계자로 지목되어 풀려났다. 30여년 간의 유폐 생활 동안 그는 모친 라비아 셰르미로부터 역사와 서예를 배웠다. 그는 종교에 투신하여 매우 경건하였으나 천성이 비관적이었다.

2.2. 즉위와 패전 조약

더 이상 제국의 국고에 하사금은 없도다. 짐의 아들들인 병사들도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니라.
ㅡ 취임식 당시. 예니체리들에게 관례적인 보너스 지급을 할 수 없음을 밝히며[1]

1774년 1월 무스타파 3세가 사망하자 압뒬하미트는 황위에 올랐다. 당시는 전시 상황으로,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식량 부족이 벌어질 만큼 힘든 시기였다. 그럼에도 오스만 조정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 협상을 지연시키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1774년 6월 20일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휘하 러시아 군대는 불가리아로 남하하여 코줄드자 (현 수보로보)에서 오스만 군을 격파하였고, 이렇듯 궁지에 몰린 후에야 오스만 조정은 다음날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에 서명하였다. 조약에 따라 크림 칸국은 독립국(이라 쓰고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450만 루블의 배상금을 납부하며, 아조프와 케르치가 공식 할양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북캅카스의 카바르디노발카르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고, 오스트리아에게 부코비나 (몰다비아 서북부)를 할양하였다. 가장 중요하게도,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 내의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자 지위를 얻어 향후 팽창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크림 반도와 몰다비아 일부를 제외하고 오스만 제국이 잃은 영토는 없었지만, 해당 전쟁의 패배는 오스만 군대의 취약함을 여실히 드러내며 제국의 위상과 흑해 및 지중해 장악력을 앗아갔다.

2.3. 제한적 개혁과 반란 진압

파일:오스만 압뒬하미트.jpg

장기간의 유폐 생활로 인해 압뒬하미트는 정무에 무지하였고 참모들의 말에 휘둘렸다. 즉위 직후부터 패전을 맛본 압뒬하미트는 군제 개혁에 나섰다. 우선 예니체리 부대의 수를 파악한 후 근대적인 개조에 들어갔고 새로운 포병 부대가 창설되었다. 육군의 개혁 있어서는 실라흐타르 셰이드 메흐메트 파샤와 할릴 하미트 파샤 등이 주도하였다. 해군 역시 '제국 해군 기관학교'와 함께 혁신에 돌입하였다.

압뒬하미트는 기존 파디샤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아랍 지역에 대한 지배력 강화에 나섰고, 시리아와 모레아 등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1775년 카프타느데르야 가지 하산 파샤와 제자르 아흐메트 파샤의 활약으로 아크레의 자히르 알 우마르가 전사하였고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쾰레멘 역시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크림 반도의 상실을 상쇄하지는 못하였고 제자르 파샤가 다시 아크레를 중심으로 자립하며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치른 직후인 1775년에는 이란의 잔드 왕조가 이라크를 침공, 1년 간의 포위 끝에 바그다드 다음으로 중요한 바스라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의 대인도 교역이 큰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1779년 잔드 조의 카림 칸이 사망한 틈에 반격하여 회복하였다.

여러 실패에도 불구하고 압뒬하미트는 가장 자애로운 오스만 파디샤 중 한명으로 꼽힌다. 1782년 코스탄티니예의 7천 가구를 전소시킨 대화재 당시 압뒬하미트는 친히 소방대를 이끌고 진화에 나섰다. 또한 종교적 경건함으로 인해 그는 민중들로부터 벨리 (성인)이라 불렸고 정부를 세심히 관리하였으며 관리들과 함께 일하며 개혁 정책의 윤곽을 잡았다.

2.4. 러시아와의 전쟁

파일:오스만 러시아 전쟁 지도.jpg
실수는 반복된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정교회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오스만 내정에 개입하였고, 1775년 아이날르카바크 조약을 위배하곤 크림 칸국의 내분에 개입한 끝에 결국 1783년 크림 반도를 병합하였다. 1787년 예카테리나 2세는 크림 반도에 개선 행진을 하였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협정 위반에 코스탄티니예의 여론은 분노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대사들은 주전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같은해 오스만 조정은 러시아 군의 크림 반도 철수 및 흑해 연안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당연히 무시되었고, 8월 17일 러시아가 선전포고하였다. 압뒬하미트는 러시아 대사 야코프 불가코프를 감금하고 전쟁에 나섰다. 오스만 군대는 남부크강 하구에 위치한 요충지인 외쥐에서 드네프르강 하구 건너편에 있는 러시아군의 요새 킨부른을 공격하였다. 수비를 맡은 수보로프는 9월과 10월 두 차례의 해상 공격을 격퇴하며 오스만 군의 크림 반도 접근을 차단하였다.

2.4.1. 오스트리아의 참전

파일:오스만 군대 러시아.png
1788년 소피아에서 출병하는 8만 오스만 대군

1781년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동맹을 갱신한 상황에서 전쟁 시기를 잘못 선정한 오스만 제국은 1739년 이후 재차 양면전선을 맞게 되었다. 개입 전에도 오스트리아는 고토 회복을 노리는 세르비아 민병대를 1787-88년 겨울 두 차례 파견하여 베오그라드 수복을 노렸다. 그리고 1788년 2월 요제프 2세의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편을 들어 참전하였고, 두 연합군은 몰다비아로 진격하였다. 러시아 군은 18세기에만 3번째로 호틴과 이아시를 점령하였다. 그 전인 7월 오스만군은 다뉴브를 넘어 오스트리아령 바나트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8월 중순 2만이 넘는 오스트리아 군대가 당도해 수보로프와 함께 포즈샤니에서 승리하였고 바나트,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 진출해 있던 오스만군은 축출되었다. 비록 트란실바니아로 진출한 오스만군은 9월 말엽 커란셰베시를 점령하는 쾌거를 올렸지만 이는 오스트리아 특유의 다민족 혼성군의 통신 오류로 인한 상호 간의 오인 사격에 일시적으로 어부지리를 본 것에 불과하였다.[2]

파일:베오그라드 오스만 전쟁.jpg
베오그라드 포위

파일:오스만 러시아 전투.jpg
전쟁의 향방을 가로지은 리므니크 전투

오스트리아 군의 남하와 함께 세르비아인들이 내응하여 코자 안델코비치의 주도 하에 반란을 일으켰고 수천 명의 세르비아계 의용군이 오스트리아령 바나트에서 다뉴브를 건너 세르비아로 건너가 오스만 측의 반격 시도를 방해하였다. 비록 주동자 코자 안델코비치는 1788년 9월 사로잡힌 후 11월 꼬챙이형[3]으로 공개처형당했지만 반란군은 오스트리아군의 협력 하에 다뉴브에서 니슈 바로 북쪽까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한편 크로아티아에서 반격에 나선 12만의 오스트리아-세르비아군에게 포위된 베오그라드의 1만 오스만 수비대는 한 달간 버텼으나 결국 10월 8일 항복하였다. 비슷한 무렵인 9월 22일 수보로프가 이끄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리므니크 전투에서 10만에 달하는 오스만 대군을 궤멸시켰고, 그후 왈라키아를 장악하였다.

2.4.2. 비보와 죽음

파일:오스만 러시아 전쟁 1.jpg
1789년 외쥐의 함락. 그림 자체는 1853년 작인데, 크림 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도 반격에 나선 수보로프와 그리고리 포템킨이 6개월 간의 포위 끝에 외쥐를 함락하였고, 후자의 명으로 2만 명에 달하는 모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1788년 12월 6일) 참담한 소식에 충격을 받은 압뒬하미트는 4개월 후인 1789년 4월 초엽 사망하였다. 사후 조카 셀림 3세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1] 16세기 초기 황제인 셀림 1세가 황위 계승 과정에서 예니체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보너스를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황제가 즉위하면 예니체리에게 특별 보너스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2] 다만 오인사격 당일에는 요제프 2세가 낙마하는 등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3] 블라드 3세가 자주 써먹었던 그 형벌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