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의 정경과 평화의 문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글 | 이스탄불 역사 지구 | |
영어 | [1] | ||
프랑스어 | [2] | ||
국가·위치 | 튀르키예 이스탄불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5년 | ||
등재기준 | (i)[3], (ii)[4], (iii)[5], (iv)[6], (vi)[7] | ||
지정번호 | 356 |
"Hakan-ı sahib kudretin
위엄을 지닌 왕이시여
Devrinde âlem-ber-murad
그 분의 치세가 세상에 녹아들어
Dergâh-ı vâlâ şevket-i
장엄하고 위대한 문들이
Yâ Rabb! ola dâim küşâd
주여! 항상 열려있게 하소서"
톱카프 궁전 제2중정과 제3중정을 잇는 지복의 문 - Bâb-üs saâdet에 새겨진 시
위엄을 지닌 왕이시여
Devrinde âlem-ber-murad
그 분의 치세가 세상에 녹아들어
Dergâh-ı vâlâ şevket-i
장엄하고 위대한 문들이
Yâ Rabb! ola dâim küşâd
주여! 항상 열려있게 하소서"
톱카프 궁전 제2중정과 제3중정을 잇는 지복의 문 - Bâb-üs saâdet에 새겨진 시
오스만 튀르키예어: کاخ توپقاپی (Kâh-ı Topkapı) 또는 صرای توپقاپی (Saray-ı Topkapı) [8]
튀르키예어: Topkapı Sarayı (톱카프 사라이으)
영어: Topkapi Palace 혹은 The Seraglio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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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 이스탄불 구성곽 동쪽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의 정궁.2. 상세
메흐메트 2세 시기인 1478년에 세워져 1856년, 압뒬메지트 1세가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이궁하기까지 약 400여 년간 오스만 제국의 정궁이자 디완 회의의 의사당이었으며 제국의 인재들을 길러내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또한 궁전 제1정원에는 조폐소(Darphane)가 있어서 제국의 화폐를 찍어내기도 했으며, 재무부 건물에는 보물관이 있어 황실의 보물과 기록을 보존했다. 이후 1922년에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수립된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1924년 4월 3일에 톱카프 궁전을 박물관으로 공개해 오늘날에 이른다.전체 부지면적은 약 70만㎡[10]로 도중에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지만 오스만 제국 시기에 세워진 각종 모스크, 학교, 목욕탕, 상가, 대상들의 숙소 등의 공공건축에 비하면 정말로 소박한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유럽 각국의 궁전들과 비교해 보아도 전성기 오스만 제국의 위용에 비해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작고 단촐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11]
톱카프 궁전이 이렇게 소박한 이유는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이 모두 작용했다. 종교적으로 볼때, 이슬람의 관점에서 과시적이고 지나치게 거대한 건물은 오만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파디샤가 마드라사나 모스크, 다리 등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은 존경받을 일이나 사치스런 건물을 짓는 건 쓸모없고 거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전성기 시절의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는 그 국력에 비해서 소박한 궁전에 거주했다. 그런 오스만 제국도 서구화의 물결이 몰아치던 18세기, 19세기 들어서는 유럽을 따라 유럽식으로 궁궐을 화려하게 증축하기 시작했지만,[12] 문제는 이 시기의 오스만 제국은 이미 유럽에게 경제적으로 침탈당하고 망해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건물을 원하는만큼 거대하게 지을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의 톱카프 궁전은 전성기 오스만의 국력에 비해서는 매우 소박한 편으로 남게 되었다.
3. 역사
톱카프 궁전이 위치한 사라이부르누(Sarayburnu) 지역은 골든 혼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좋은 곳으로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이미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로마 제국이 비잔티움으로 천도하자 이곳에는 바실리카와 지하 저수조가 들어섰고 지금의 궁전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부콜레온 궁전(Βουκολέων)[13]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 이리니 성당(Aya İrini)을 제외하고는 군사들이 주둔하는 공터였다.원래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던 정궁은 현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부지에 존재하던 콘스탄티노플 대궁전(Μέγα Παλάτιον/Büyük Saray)으로 330년 콘스탄티노플 천도부터 1081년 콤니노스 왕조 설립까지 종종 다른 궁전을 이용한 기간을 제외하면 690년 넘게 정궁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콤니노스 왕조 이후 동로마 황제는 거처를 별궁으로 쓰던 블라헤르네 궁전(Βλαχέρναις Παλάτιον)으로 완전히 옮겼다. 대궁전은 버려졌고 1204년 제4차 십자군 이후 도시를 장악한 라틴 제국은 황제의 거처로 부콜레온 궁전을 쓰면서 블라헤르네 궁전도 버려지게 된다.
1261년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자 라틴 제국을 통치하던 십자군은 퇴각하며 대궁전과 블라헤르네 궁전의 보물들을 털어가며 크게 훼손시켰다.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블라헤르네 궁전은 수리해 정궁으로 썼으나 대궁전은 여전히 버려져 감옥으로 쓰는 신세가 되었고 라틴 제국이 쓰던 부콜레온 궁전 또한 버려지면서 훼손 상태가 날로 심해졌다.
메흐메트 2세가 내려다보았을, 톱카프 궁전에서 내려다본 보스포로스 해협의 경치 |
메흐메트 2세 이후에도 황제들은 메흐메트 2세가 잡아놓은 궁전의 기본적인 골조 안에서 끊임없이 궁전을 개축했다. 특히 쉴레이만 대제 시절에 대폭 확장공사를 벌여 하렘 궁전의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1574년에는 큰 화재로 황실 부엌, 즉 수라간이 불타버리자 셀림 2세가 미마르 시난에게 공사를 맡겼다. 미마르 시난은 손상된 수라간 일대 뿐만 아니라 하렘, 목욕탕 등 해안선을 따라 다양한 파빌리온과 건물들을 신축했다. 톱카프 궁전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건 16세기 말의 일이다.
오스만 제국 시기의 궁정을 묘사한 그림 |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자 톱카프 궁전은 튀르키예 정부 소유로 이전됐다. 바로 다음해인 1924년 4월 3일자로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됐고, 그 이래로 100년 동안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1985년에는 이스탄불 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 톱카프 궁전에는 수백 개의 방이 있지만 관광객들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하렘과 보물들이 전시된 수장고, 알현실 등 지극히 일부 뿐이다.
4. 구조
톱카프 궁전은 베르사유 궁전 같은 하나의 단일체 구조라기보다는, 여러 안뜰(Avlu)들을 중심으로 주위에 여러 개의 낮은 건물들이 둘러싸고 이게 서로 회랑과 갤러리들로 연결된 광범위한 복합 단지에 더 가깝다. 2층을 넘는 건물은 거의 없으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4.1. 황제의 문
디완 욜루와 황제의 문 |
"신의 은총과 허락으로 두 대륙의 술탄이자 두 바다의 지배자, 현세와 내세에서의 신의 그림자, 동방과 서방에서 신의 총애를 받는 자, 육지와 바다의 통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성의 정복자인 술탄 메흐메트 한의 아들인 술탄 무라트 한의 아들이신 술탄 메흐메트 한께서 신의 부를 영원히 간직하기를, 그리고 그 권좌가 천상의 가장 빛나는 별보다 더 위에 하기를, 정복자들의 아버지인 술탄 메흐메트 한의 명령으로 883년의 신성한 라마잔 달에[16] 이 신성한 성의 기초를 닦고,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 건축을 매우 튼튼하게 세웠도다."
(톱카프 궁전 제1정문인 황제의 문 - Bâb-ı Hümâyûn에 새겨진 글귀)
황제의 문(Bâb-ı Hümâyun)은 톱카프 궁전의 제1중정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1478년에 건설됐고 19세기에 대리석으로 덮어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중앙 아치는 높은 돔형 통로로 이루어져 있고 금박을 입힌 이슬람 서예로 정교하게 장식했다. 메흐메트 2세과 압뒬아지즈 황제의 '투그라' 즉 이름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톱카프 궁전 제1정문인 황제의 문 - Bâb-ı Hümâyûn에 새겨진 글귀)
180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이 황제의 문 위에 목조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상속인 없이 궁전 안에서 죽은 황실 구성원들의 재산을 대신 맡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했고, 황실 재무부가 사람들에게서 보물을 받고 내주는 창고 역할도 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하렘의 여인들이 나와서 밖을 바라보는 전망대로도 사용됐다고도 한다.
4.2. 제1중정
제1중정 내부 모습 | 성 이리니 성당 |
예니체리들의 주거지와 훈련장, 성 이리니 성당[17], 제국 조폐소, 병원, 황실이 사용할 일상용구들을 제조하는 공방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일반 백성들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는데, 특히 매주 금요일 아야 소피아 사원으로 행진하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군중들이 대기하곤 했다. 이때 백성들은 자유롭게 황제에게 청원할 수 있었으며, 황제는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이곳에 위치한 성 이리니 성당은 1846년 궁중 보물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도 했다. 박물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된 1978년부터 각종 콘서트나 축제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가 2013년부터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다만 톱카프 궁전 하렘처럼 별도의 입장료를 사야하고, 볼것도 딱히 없는편 이다. 성상파괴주의 양식으로 지어져서 애초에 모자이크나 성화같은것도 없고,[18] 그냥 돔부분에 거대한 십자가 문양 하나만 떡하니 있는것을 볼 수 있다.
4.3. 제2중정
평화의 문 | 제2중정의 내부 모습 |
평화의 문은 톱카프 궁전의 상징이기도 한데, 메흐메트 2세가 문을 세우고, 쉴레이만 대제가 두 개의 탑을 세워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사신이나 외국에서 온 손님이나 국내 귀빈이 이곳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때까지 이 탑에 마련된 응접실에서 대기했었다. 한편 이곳에는 제2중정 마당에서 처형된 죄인의 목을 걸기도 했으며, 이 문 안쪽에는 사형집행인이 칼에 묻은 피를 씻었다는 우물이 남아있다.
제2중정은 메흐메트 2세 통치기인 1465년에 만들어졌고 쉴레이만 대제 시기에 현재 모습으로 완성됐다.
제국의회 의사당 | 제국의회 회의실의 내부 모습 |
제국의사당과 그 뒤로 보이는 정의의 탑 | 황실 보물고 |
황실 보물고의 내부 모습 |
황궁의 주방(Saray Mutfakları)은 15세기 궁전이 처음 지어질 때 에디르네의 궁정부엌을 본떠서 함께 지어졌다. 현재의 건물은 1574년 화재를 전설적인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리모델링한 것으로 20개의 넓은 2열의 굴뚝들이 늘어선 거대한 건물이다. 주방 건물은 제2중정과 마르마라 해 사이에 끼어있는데 황실주방, 여성 숙소, 궁전 외부서비스 구역, 제과 주방, 유제품 제조장, 음료 주방, 창고 및 요리사 숙소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주방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는 하루에 2만 명이나 되는 궁정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음식들을 만들 수 있었으며, 크게 10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각각 셰르베트(여름에 시원하게 마시는 튀르키예의 전통 음료수), 잼, 헬와(밀가루와 우유, 버터, 설탕으로 만드는 튀르키예의 전통과자), 고기요리, 채소요리 등등 전문적인 요리사들이 각자 담당한 요리들을 만들었다. 튀르키예 요리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했는데, 이유인즉 황제에게 똑같은 밥을 먹이면 손모가지가 날아가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때문에 요리사들은 정말로 창의력을 총동원해 온갖 요리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20]
황궁 주방과 내부에 전시된 중국 도자기들 |
주방 건물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도자기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은 1400년대 중반부터 중국 도자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이 500년 동안 모은 중국 도자기 컬렉션이 그대로 보관해놨는데 그 수가 무려 10,700점에 달해서 세계 최대 규모의 중국 도자기 컬렉션들 중 하나다. 이마저도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거라서 18세기에는 16,566점의 도자기들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파디샤는 이 도자기들을 황족들이나 고관들에게 선물로 내리곤 했다.
황실 마구간 | 미늘창병들의 숙소 |
황실 마구간 끝에는 미늘창병들의 숙소가 있다. 미늘창병들은 호위 임무는 물론 건물들에 땔감을 공급하는 등 잡무를 도맡아서 처리했다. 머리에 쓴 두건이 길수록 더 고위 계급이었다. 이들의 숙소는 1400년대에 처음 지어졌고 무라트 2세 시절에 크게 개축됐다. 붉은색과 녹색 칠을 한 나무로 만들어진 숙소 자체는 평범한 오스만식 주택의 모습으로 목욕탕, 모스크, 담배 피우는 방 등이 딸려있다. 당시 호위병들은 하루 일과나 임무 등을 벽에다 새겨놓곤 했는데, 아직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4.4. 제3중정
지복의 문 | 오스만 시기 즉위식 재현식 |
이곳은 황제 및 황제의 남자친척들만 통과할 수 있었으며, 내부에는 황제의 알현실, 튤립 시대의 파디샤 아흐메트 3세가 세운 도서관, 역대 황제들이 거주했던 공간, 황제 전용 모스크 등이 위치해 있었다. 그야말로 궁전의 심장. 제2중정까지는 외정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지극히 비밀스러운 내정이었다.
제3중정의 가장 중요한 공간은 바로 청원실(Arz Odası)이다. 지복의 문 바로 뒤에 있는데 처마가 달린 거대한 지붕을 지탱하는 22개의 열주로 둘러싸인 정사각형의 오스만식 정자다. 건물은 15세기에 지어졌다. 천장은 군청색으로 칠했고 금빛 별들을 박아 그려넣었다. 방에는 귀중한 카펫과 베개들로 장식했다. 현재의 알현실 건물은 185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압뒬메지트 1세가 재건한 것이다.
청원실 | 내부 모습 |
황제는 수많은 보석들로 가득찬 황금빛 천에 완전히 뒤싸인, 약간 높은 왕좌에 앉아있고, 사방에 헤아릴 수 없는 값어치의 쿠션들이 있었다. 알현실의 방은 하늘색과 금색으로 반짝이는 모자이크 작품들로 뒤덮여있었다. 이 방의 벽난로는 순은으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했으며, 방 한쪽에서는 샘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발다친[21] 형태의 옥좌는 메흐메트 3세가 만들었다. 보석이 박힌 옻칠한 왕좌의 천장에는 힘의 상징인 용과 신화 속의 새인 사무르그의 싸움이 묘사된 문양이 새겨졌다. 왕좌에는 에메랄드와 루비, 진주가 흩뿌려진 비단으로 만든 덮개가 있다.
- 코르넬리우스 두플리시우스 데 셰퍼[22]
이 곳은 방문객들이 청원을 하러 오는 공간이었다. 방문객들이 출입하는 정문은 1856년에 만들어졌으며 압뒬메지트 1세에 대한 찬사가 적혔다. 정문 바로 위에는 아흐메트 3세가 추가한 '자비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를 의미하는 이슬람 축사 '베스멜레'가 양각으로 새겨졌다.- 코르넬리우스 두플리시우스 데 셰퍼[22]
입구 옆에는 쉴레이만 대제가 만든 작은 분수가 있다. 사람들은 파디샤를 바다와 같이 모든 권위와 힘의 원천이라고 믿었기에 일부러 물의 상징을 그 앞에 가져다 놓은 것. 또한 파디샤를 알현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거나, 졸졸 흐르는 물소리로 내부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는걸 차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알현실 뒤쪽에는 친위병들의 숙소가 있는데 지금은 황제가 입었던 옷들을 전시하고 있다. 파디샤들이 입었던 카프탄 등을 포함해 무려 2,500여 점의 옷들을 소장하고 있고 360여 개의 도자기도 있다. 이 숙소는 무라트 4세가 1635년에 처음 지었고 18세기 초에 아흐메트 3세가 재단장해서 14개의 기둥들이 세워진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 숙소에서 북서쪽으로 약간 걷다보면 황실 보물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는 정복자의 정자가 있다.
정복자의 정자 | 제3중정의 내부 모습 |
제2중정에도 무기 전시관이 있지만 진짜 보물 전시관은 여기다. 수많은 예술품, 보석, 세공품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튀르키예 내에서도 최대 규모의 소장 컬렉션들 중 하나로 꼽힌다. 무스타파 3세가 직접 있었던 갑옷과 사용했던 무기들, 그 유명한 '톱카프의 단검', 아흐메트 1세의 옥좌, 니콜라이 2세가 선물한 옥 그릇, 스푼메이커의 다이아몬드, 48kg에 달하는 거대한 순금 촛대 2개, 줄마노로 장식된 거대한 왕좌, 나디르 샤가 인도의 무굴 제국에서 약탈해 선물한 황금 옥좌 등 수없이 많은 보물들이 여기에 쌓여있다.
정복자의 정자 북쪽에는 '미니어처 및 초상화 갤러리'가 있다. 원래는 궁정인들이 묵는 숙소였는데 지금은 다양한 지도와 쿠란, 성경, 미니어처, 초상화, 이슬람 서예작품 따위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귀중한 쿠란 사본과 아랍어로 쓰인 1700년 된 성경, 그리고 1513년 제작된 최초의 세계지도가 유명하다. 특히 이 세계지도가 최고 볼거리인데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해안선은 물론이고 심지어 저멀리 남미의 브라질 해안선까지도 묘사해놨기 때문. 윗층에는 파디샤들의 초상화가 줄줄이 걸려있는데 원본은 워낙 파손되기 쉬워서 전시되어 있는 것들은 모조리 복제품이다.
아흐메트 3세 도서관의 외관과 내부 모습 |
이 도서관에는 신학, 샤리아 등에 관련된 책들이 주류였다. 무려 3,500여 권 이상의 책들이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키예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서 보관되어 있었다고. 일부는 진주층과 상아로 안감을 넣어서 책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에 더 가까울 정도로 화려하다. 현재는 도서관 옆의 건물을 새로 단장하고 컬렉션들을 추가해서 장서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데, 황제의 개인 서적 3,000권을 포함해 무려 2만 권에 달하는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3대 칼리파인 우스만 시절에 쓰인 코란 사본, 8세기 경에 쓰인 코란 사본 3천권, 일 칸국과 티무르 제국의 궁정에서 쓰인 페르시아어 사본들 등이 가장 귀중한 전시품으로 손꼽힌다.
아가의 모스크 | 성유물 보관소 |
황궁 시종들의 숙소로 쓰이던 돔형의 건물(Hasoda Koğuşu)은 황실 초상화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다. 모든 오스만 파디샤들의 초상화와 후기 파디샤들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는데,[26]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고 365일 온도습도가 조절된다. 오스만 통치자들의 계보가 새겨져 있어서 한번쯤 볼만하다.
4.4.1. 성유물 보관소
성유물 보관소 내부 |
참고로 하렘은 제2중정에 입구가 있으며, 제3중정에 출구가 있는데, 현재는 그렇게 관람하게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제2중정의 하렘입구는 하렘에 들어갈 물자나 새로 하렘에 들어온 여인들을 반입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제3중정으로 통하는 출구는 황제가 하렘을 방문하거나, 하렘의 여인들이 산책이나 기타 용무를 위해 바깥으로 나올 때 사용되었다. 제3중정은 오로지 황제 및 직계가족만 출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곳만큼은 하렘의 여인들도 얼굴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 요셉의 터번 | 다윗의 검 |
무함마드의 검 | 카바의 자물쇠와 열쇠 |
무함마드의 발자국 | 무함마드의 턱수염 | 무함마드의 망토 |
4.4.2. 하렘
하렘의 내부 구조 |
하렘은 1500년대 초부터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점점 골든 혼 방향으로 확장되어 오스만 제국 말기에는 거대한 복합단지로 발전했다.
하렘은 제2중정에 입구가 있다. 이를 '수레의 문'이라고 부른다. 이 문을 통과하면 '돔형 벽장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방은 1587년 무라트 3세가 하렘의 현관으로 쓰기 위해 만들었고 하렘의 재무관들이 여기서 일했다. 황제와 하렘 여인들의 재무를 여기서 도맡아 관리했던 셈이다. 이 방의 벽장들에는 하렘의 재무표와 빚 증서, 각종 서류들이 빼곡하게 차있었고 수석 환관이 특별히 직접 관리했다.
분수 홀 | 황금의 길 | 후궁들의 권역 |
환관들의 처소를 가로질러 가면 마침내 황후와 후궁들이 사는 진짜 하렘 구역으로 향하는 홀이 나왔다. 이 홀에서 길이 3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후궁들의 구역이, 중앙의 문으로 직진하면 황태후의 구역이, 오른쪽의 문으로 들어가 '황금의 길'[29]을 따라가면 황제의 구역이 나왔다. 이 홀에는 황금 거울들이 있는데 이 거울들도 무려 역사가 300년이 넘은 골동품들이다.
제일 먼저 후궁들의 권역은 1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권역으로 하렘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작다. 열주로 둘러쳐진 작은 안뜰 주위에는 목욕탕, 빨래용 분수, 숙소, 아파트 따위가 빼곡하다. 폐쇄적이기 짝이 없는 공간인데, 후궁들은 골든 혼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창문들이 뚫린 아파트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지하에서 먹고 자는 후궁들도 있었다.
황태후의 접견실 |
황제의 목욕탕과 화장실 |
황제의 알현실 | 알현실 천장의 돔 |
현재의 모습은 1666년 대화재 이후 오스만 3세가 로코코 양식으로 재단장한 것으로, 이슬람 캘리그라피가 새겨진 화려한 청화백자 타일들과 베네치아산 유리로 장식해놨다. 이 곳에는 황제의 옥좌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옥좌와는 달리 기다란 소파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여기에 전시된 황금 의자들은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의 선물이고 시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선물이다. 홀의 규모에 걸맞게 여러 개의 문들이 있어 황제의 아파트, 황태후의 아파트, 침실, 대기실 등 다양한 장소들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이 방에 있는 거울 뒤에는 비밀 통로가 있어 유사시 파디샤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무라트 3세의 방 | 아흐메트 3세의 방 |
이 무라트 3세의 방 옆에는 사이즈는 조금 작지만 역시나 화려한 방 2개가 있다. 하나는 아흐메트 1세의 방이다. 역시나 화려한 이즈니크 타일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캐비닛, 문, 창문, 테이블, 코란 독서대 등은 진주층과 상아로 장식해서 매우 호화롭다. 또다른 하나는 아흐메트 3세의 방이다. 벽은 꽃과 과일 무늬로 칠했다. 옛날에는 이 곳에서 식사를 하곤 했기 때문에 '과일의 방(Yemis Odası)'이라고 불렀다.
황태자의 숙소 |
오스만의 황태자들은 즉위하기 전까지 이 곳에 은둔하며 살았다. 어찌나 갑갑하게 갇혀 살았는지 '새장'이라고 불렸을 정도. 황태자를 포함한 모든 남자 황족들은 이 곳에서 성인이 될때까지 갇혀살며 오스만 하렘의 규율에 따라 살아야만 했다. 성인이 되면 마침내 하렘에서 풀려나 오스만 제국 각지로 발령나서 주지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후궁들의 뜰 | 황금의 길 |
하렘 내부에는 '황금의 길'이라는 길이 있다. 진짜 황금으로 장식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건 아니고 실제로는 돌과 회반죽으로 만들어진 상당히 투박한 모습의 길이다. 황금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축제일마다 황제가 이 곳에서 첩들에게 금화를 펑펑 뿌려댔기 때문. 이 황금의 길은 하렘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으며, 하렘, 침실, 황태자의 숙소, 알현실, 황후의 숙소, 황태후의 숙소 등 중요한 장소들은 다 이 길 바로 옆에 붙어있어서 파디샤들은 주로 이 길을 이용해 하렘을 드나들었다.
4.5. 제4중정
제4중정 | 할례실 |
황자들이 할례를 받던 할례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1640년 파디샤 이브라힘 1세가 젊은 황자들을 할례시키기 위해 지은 장소다. 내부와 외부는 꽃문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하늘색 타일로 장식되어있다. 특히 방 정면에 장식된 극동 양식의 푸른색과 흰색 타일들은 원래 쉴레이만 대제 시절의 제국의사당을 장식하던 타일들이었는데, 나중에 쉴레이만 대제의 영광을 추억한다는 의미로 여기로 재활용해서 써먹었다. 건물은 상대적으로 넓은 편인데, 널찍한 창문과 분수들이 존재하며 입구 오른편에는 금박칠한 벽난로도 있다.
무라트 4세 휘하의 황실 건축가였던 '하산 아가'는 예레반과 바그다드에서 오스만 제국이 거둔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1635년에는 예레반 정자를, 1638년에는 바그다드 정자를 각각 하나씩 지었다. 2개의 정자 둘다 4면에 하나씩 아이완이 있고 위에는 돔이 올라간 전형적인 이슬람식 정자다. 내부에는 진주층으로 상감한 목제 장식물들이 화려하게 널려있다.
작은 돔으로 덮인 '예레반 정자'는 40일 간 종교적인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3개의 후진은 소파와 쿠션, 직물들을 깔아뒀고 나머지 1개의 후진에는 출입문과 벽난로를 설치했다. 정문이 있는 벽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나머지 벽면들은 옛날 양식을 모방한, 상대적으로 값싼 하늘색과 백색 타일로 마감했다.
예레반 정자 | 바그다드 정자 |
이프타르 정자 | 테라스 정자의 내부 모습 |
'테라스 정자'는 16세기 후반에 지어진 전망대이자 정자다. 1704년에 재건했고 1752년 마흐무트 1세가 로코코 양식으로 재단장했다. 제4중정에 있는 유일한 목조 건물로 메인 홀, 기도실, 달콤한 과일 음료를 마시던 휴식실로 구성되어 있다. 거대한 창문들이 달린 개방형 건물이기 때문에, 황제들은 이 곳에 누워 정원에서 열리는 스포츠 경기나 오락을 관람하곤 했다. 튤립 시대인 1700년대 초반에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별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황실 병원 | 대 정자 |
'대 정자'는 1840년에 지어져 제4중정에 지어진 주요 건축물들 중에 가장 늦게 들어선 건축물이다. 압뒬메지트 1세가 개인 알현실이자 휴식실로 쓰기 위해 지었다. 황제가 여기에다 정자를 지은 이유는 여기서 마르마라 해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조용히 관망할 수 있기 때문. 유럽식과 오스만 전통 양식이 혼합된 아름다운 건물인데, 워낙 전망이 좋아서 황제들은 톱카프 궁전을 방문했을 때 바다가 보고 싶을때마다 여기를 들렀다. 이 바로 옆에는 엘리자베스 2세, 재클린 케네디, 리처드 닉슨, 무하마드 알리 등 유명인들이 방문한 식당도 있다.
5. 이야깃거리
- 하렘은 입장료를 따로 받는데 본 입장권이 2024년 현재 1250리라(한화 5만 3150원). 참고로 이스탄불 패스는 궁전 본관과 하렘 모두 입장이 가능하지만 아야 이리니는 돈을 따로 내야 하며, 튀르키예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나 튀르키예 국적자만 발급받을 수 있는 뮈제카르트는 본관만 뚫린다. 물론 단체할인 같은 거 없다.
- 튀르키예 내 다른 박물관, 궁전과는 달리 특이하게 화요일에 쉰다. 입장시간은 09시부터 동절기에는 16시 45분까지, 하절기에는 18시 45분까지이다.
-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는 한 건물 사진촬영은 자유이지만, 시계 박물관, 도자기관, 보물관, 무기관, 황실 의복관, 이슬람 유물전시관 등등 모든 전시실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 제4중정에는 오스만 궁중요리를 만드는 레스토랑이 있고, 제2중정의 디완 회의실 옆에는 카페가 있는데, 바깥 물가에 비해 상당히 비싸다. 다만 제4중정의 레스토랑은 창가 쪽 경치가 좋아서 잠시 차 한 잔 마시면서 쉬기에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6. 보물
6.1. 스푼메이커의 다이아몬드
예니카피 근처 이스탄불의 한 가난한 어부가 빈손으로 해안가를 따라 한가롭게 헤매다가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반짝이는 돌을 발견했다. 어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계속 뒤집어보기만 했다. 어부는 며칠 동안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보석상 시장에 들어 처음 만난 보석상에게 돌을 보여주었다. 보석상은 무심한 척 돌을 들여다보며, '그냥 유리조각일 뿐이군. 도로 가져가든지, 아니면 숟가락 3개를 받고 내게 팔게나. 이 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불쌍한 어부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보석상은 선심쓰는 척 3개의 숟가락을 주고 돌을 받아갔다. 이 돌을 가공하니 어마어마한 가치의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이후 재상이 보석을 사들였고 이 보석은 '스푼메이커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리게 되었다.
'스푼메이커의 다이아몬드'. 황실 보물고에 소장된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톱카프 궁전에 보관된 보물들 중 가장 귀중한 보물들 중 하나로 손꼽히며 세계에서 4번째로 거대한 다이아몬드다.이 거대한 다이아몬드는 2열의 브릴리언트컷 다이아몬드 49개가 박힌 은제 틀 안에 들어있다. 가이드북에는 이런 모습이 '밤하늘 별들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보름달'을 닮았다고 설명해놨다. 마흐무트 2세가 이런 디자인을 의뢰했다는 설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 다이아몬드가 정확히 언제 톱카프 궁전에 들어왔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미 메흐메트 4세 시절인 17세기에 '스푼메이커의 다이아몬드'라는 기록이 남아있긴 하지만, 문제는 이 기록에 적힌 다이아몬드는 50~60캐럿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기록도어 있기 때문에 거의 90캐럿에 육박하는 스푼메이커의 다이아몬드와 다른 다이아몬드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래서 이 다이아몬드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하지만, 톱카프 궁전 가이드북 등에서 공식적으로 소개하는 설은 위에서 언급된 '순진한 어부의 이야기'다.
6.2. 톱카프의 단검
큼직한 에메랄드 3알이 박힌 우아한 곡선형의 단검. 1746년 오스만 제국의 마흐무트 1세가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에게 선물하기 위해 제작한 단검이다. 원래는 나디르 샤에게 선물로 전달하기 위해 국경지대까지 운반되고 있었는데, 운반 도중 나디르 샤가 암살당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오스만 사절단은 단검을 갖고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현재는 톱카프 궁전의 보물고에서 보관 중이다.
한편 나디르 샤는 오스만 제국에게 먼저 황금 옥좌와 페르시아 만의 진주, 인도산 코끼리를 선물해줬다. 특히 이 옥좌는 한동안 백양왕조의 샤 이스마일의 옥좌로 알려져 있었다가 20세기 초 연구결과 제작방식이 무굴 제국의 특유한 기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이 밝혀져, 사실 이 옥좌는 무굴 제국에서 만들어졌으며 나디르 샤가 델리를 갈아버릴 때 가져왔다가 오스만 제국에 선물한 걸로 여겨지고 있다. 즉 노획품이다.
단검의 칼집은 수많은 작은 로즈컷 다이아몬드들과 과일로 가득 찬 바구니가 그려진 다색 에나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검의 칼자루에는 3알의 거대한 콜롬비아 에메랄드가 박혀있는 것이 특징. 특히 칼자루 끝부분에 달린 에메랄드 뚜껑을 열면 안에 영국제 시계가 들어있다.
오스만 제국에서 단검은 단순한 악세사리가 아니라 군사적, 종교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겸하고 있었다. 권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스만 궁정에서는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장식용으로 단검을 가지고 다니곤 했다.
이슬람에서 녹색은 전통적으로 선지자 무함마드의 색이자 천국의 색깔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값비싼 녹색 에메랄드는 단검에 신성함의 의미를 더해준다. 특히 이 단검에 박힌 거대한 사이즈의 에메랄드는 저 남미의 콜롬비아에서 수입해온 것인데, 먼 곳에서 건너온 보석인만큼 당시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높았을 것이다. 근현대에는 1964년 영화 '톱카피'에서 주인공이 탐내는 아름다운 보물로 등장하면서 인지도를 더욱 높였다.
6.3. 인도의 황금 왕좌
나디르 샤가 오스만 제국에 선물한 황금 왕좌. 놀랍게도 원래는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의 왕좌였다. 나디르 샤는 1739년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를 함락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재화를 뜯어갔는데 이때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6.4. 기타 보물들
무스타파 3세의 철제 갑옷 | 마흐무트 1세의 왕좌 |
황금 주전자 | 쉴레이만 대제의 투구 | 아흐메트 1세의 왕좌 |
무라트 3세의 왕좌 | 술탄의 머리장식 | 황제의 물통 |
순금 촛대 | 금제 컵 | 메흐메트 2세의 검 | 황금 요람 |
[1] Historic Centre of Istanbul[2] Centre historique de Istanbul[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7]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8] 위키백과 튀르키예어판에는 طوپقپو سرايى 라고 쓰여있지만 현대어 Topkapı sarayı를 그대로 옮긴 틀린 표기이다. 심지어 톱카프의 철자도 '톱카푸'라고 틀리게 썼다. کاخ (kâh)는 궁전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단어이며 صرای (saray)는 튀르크어 단어인데,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둘 다 쓰였으며,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전자와 같이 표기하고 '커헤 톱카피' (kâh-e Topkapi)라고 읽는다.[9] 본래 하렘부분만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역사적으로 궁전 전체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했다.[10] 자금성이 72만㎡이니 자금성보다 조금 작다.[11] 궁의 면적을 단순 비교하기 위해 사례를 들자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름별궁인 빈의 쇤브룬 궁전 전체 면적이 약 186 헥타르(186만 제곱미터)이다.[12] 실제로 이렇게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모방하던 시기에 지어진 돌마바흐체 궁전은 극도의 화려함을 자랑한다.[13] 5세기에 건설된 궁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제4차 십자군이 옛 동로마 영토에 라틴 제국을 세우면서 정궁으로 사용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에는 폐허가 되어있었고 그 유적은 1873년 기차역을 건설하면서 철거되었다. 하지만 일부 유적이 남아있으며 베낭여행자들이 숙소로 잡는 술탄아흐메트 지구를 돌아다니다보면 사람사는 건물들 사이에서 이 유적과 마주칠 수 있다.[14]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 제일 먼저 뚫린 문은 현재는 에디르네 카프(Edirne Kapı)라고 불리는 '아드리아노폴리스 문'이었는데, 블라헤르네 궁전은 이 문 바로 북쪽에 위치해있으며 심지어 일부가 삼중벽에 딱 붙어있다. 오스만군이 대포를 쏘아댈 때 당연히 궁전의 피해도 컸다.[15] 이 블라헤르네 궁전중 일부가 여전히 유적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멀쩡한 건물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이교도 왕의 궁전'이란 뜻의 테크푸르 사라이(Tekfur Sarayı)라고 불렸는데,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파디샤의 별장 겸 동물원, 후기에는 매춘굴, 병원, 유대인 시나고그, 유리병 제조공장 등으로 쓰이다 191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공화국 시기 들어서 문화유적으로 지정되고 한동안 옛모습 그대로 보존했었다. 튀르키예/관광항목에 옛날 사진도 있다. 그러다가, 2010년대 들어와 복원되긴 했지만 도립박물관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사진에서 보다시피 유리문을 설치하고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현대 장비들이 들어가있다. 하지만 건물 외형 자체는 추정복원도와 거의 일치한다.[16] 이슬람력에서는 헤지라가 일어난 서기 622년을 원년으로 잡지만 1년의 길이가 그레고리력에 비해 10일 정도 짧으므로 단순히 서력-622로 계산하면 틀리게 된다. 이슬람력 883년 라마단은 그레고리력으로 1478년이다.[17]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시절의 성 이리니 성당을 무기고로 사용했다. 무기고로 쓰였기에 동로마 시대의 성당들 중 유일하게 모스크로 전환되지 않은 성당이기도 하다. 2016년 현재 입장료를 받고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데 톱카프 궁전 통합티켓이나 뮈제카르트와는 별도로 입장권을 끊어야하니 참고할것.[18] 그래서 아야 소피아처럼 성화 모자이크들이 회칠당하는 수난도 겪지 않았다.[19] 내부의 벽에는 황금 창살로 막혀 있는 창문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황제가 직접 회의를 관찰하거나 대리인을 보내 관찰하게 했다. 황제는 보통 회의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디완 회의 이후 대재상(Vezir-i âzam)을 불러 접견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전달했다.[20] 물론 항상 새로운 요리를 내놓을 수 없고 너무 빡빡하면 궁전에 취직하려는 요리사가 없어질 것이기에 일정 기간을 정해두고 그 기간 동안만 똑같은 요리를 안내면 된다는 융통성을 발휘했으며 요리사에게도 온갖 특권이 보장되었다.[21] Baldachin. 왕좌 뒷쪽에 캐노피처럼 천과 금속 따위로 지붕을 만들어놓은 구조물을 의미한다.[22] 1533년 신성 로마 제국의 특사 자격으로 1533년 톱카프 궁전을 방문했다.[23] 이탈리아 건축에서, 한쪽 벽이 없이 트인 방이나 홀을 이르는 말.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발달했다.[24] 여름 한정으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베란다를 개방하고 있으니 한번 보기 바란다. 전망이 정말로 탁 트여서 아름답다.[25] 제국의 장군들.[26] 특히 초기에 재위한 파디샤의 초상화일 수록 이상화된 경향이 강하다. 파디샤가 사람들 앞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파디샤의 초상화가 만들어진 건 사진이 보급되기 시작한 마흐무트 2세의 개혁 이후다.[27] 이곳에 입장할 때는 모스크에 입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복장에 신경써야 한다.[28] 대부분의 방들은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29] 하렘 내부에서 메인 로드 역할을 한 황금의 길(Altın yol). '황금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길에서 파디샤들이 금화를 뿌려대면 후궁들이 그걸 주워가곤 했기 때문이다. 이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하렘내 직급에 따라 여인들의 방이 배치되었으며, 하렘의 입구에는 환관장의 방이 있었다.[30] 1574년에도 한번 화재가 일어나 목욕탕이 불타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황제가 여기서 살아남은 타일들을 재활용해서 블루 모스크를 장식하는 데에 써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