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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산, 아라라트 산을 배경으로 한 예레반. |
예레반의 심장부인 공화국 광장(Հանրապետության հրապարակ). 소련 시절에는 레닌 광장으로 불리었다. 왼쪽 건물은 역사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이 입주한 박물관이고, 오른쪽 건물은 아르메니아 정부제1청사.[1] |
1. 개요
아르메니아의 수도이다. 1918년 수도가 되었고, 아르메니아 역사상 열세번째 수도다. 인구는 약 11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의 1/3 가까이가 거주한다.평균적으로 해발 1,000m의 고지대에 해당한다. 아르메니아를 유럽 국가로 본다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도에 있는 수도이다.[2] 기후는 대륙성 스텝 기후이다. 기온만 놓고 보면 서울보다 여름에 약간 덥고 겨울에 약간 추운 정도다. 단 강수량은 연간 318mm 정도로 건조하며, 서울과 정반대로 지중해성 기후에 가까운 강수패턴을 보이므로 여름은 체감적으로 시원하고 겨울에 비나 눈이 자주 내린다. 단 최근에는 기후 온난화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 눈 오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었다고 한다.
위 사진과 같이 날씨가 좋을 때 민족의 영산인 아라라트산이 보인다. 다만 이 산은 현재 터키 영토에 속해 여길 성지로 받아들이는 아르메니아는 두고두고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사진에서처럼 예레반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터키군이 포탄만 날려도 예레반은 불바다가 된다.[3] 따라서 아르메니아는 터키에 이를 갈면서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며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강력한 우방인 터키군을 두려워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와 긴밀한 우호를 맺으며 러시아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다만 니콜 파시냔 총리의 친서방 정책으로 2024년 8월 1일 철군하였다.
시내 교통으로는 버스, 무궤도전차, 지하철이 있다. 과거에는 노면전차도 운행되었으나 2003년 폐선되었다.
2. 역사
기원전 782년에 고대 아르메니아인의 조상인 우라르투 왕국의 6대 왕인 아르기슈티 1세의 명으로 쐐기문자로 기록된 비문에 근거해 이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때의 도시는 에레부니(Erebuni)라는 유적으로 남아있다. 이후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 제국시기를 거쳐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고대부터 성립해서 쭉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예레반의 어원은 여러가지 이론이 있으나 고대 아르메니아의 왕인 예레반드 4세의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허나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우라르투 왕국의 에레부니 요새에서 따온 것으로 점차 아르메니아어와 섞이면서 예레반으로 변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Erebuni = Erevani = Erevan= Yerevan) 이는 쐐기문자가 적힌 비문을 비교해봤을때 가장 과학적인 설로서 인정 받고 있다. 도시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던 시기 이 도시는 페르시아어로 이라반(ایروان)으로 알려졌고 이 말의 변형이 아제르인들의 말로도 비슷하게(İrəvan) 불렸다.
이후 바그라투니 왕조 아르메니아 왕국과 셀주크 제국,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이란의 다양한 왕조들과 오스만 제국이 번갈아가며 차지하면서 현재의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시기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전쟁의 결과 예레반이 황폐해지면서 아르메니아인의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고 주변의 무슬림 인구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1604년에 아바스 1세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추방했는데 이때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추방됐다. 그래도 여전히 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숫자가 새로 이주한 무슬림 인구보다도 많았다. 17세기 예레반을 6번 방문한 프랑스인 여행자 장 밥티스트 타베르니에의 기록을 보면 예레반의 인구는 아르메니아인이 절대다수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도시의 인구는 17세기 감소하기 시작하여 오스만-호타키 왕조 전쟁까지 유지되다가 나디르 샤가 호타키 왕조를 쳐부수고 이란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 주변의 무슬림 인구가 전란으로 예레반으로 이주하면서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18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늘어난 무슬림 인구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페르시아인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구성하던 도시였다. 하지만 1827년 10월 6일 러시아 제국의 이반 파스케비치가 예레반을 점령하고, 이후 페르시아와의 튀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예레반은 러시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1827년 점령당시 예레반은 소도시 규모로 2400여호에 대략 12000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 일부가 점령 후 러시아의 박해로 인해 이란과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했으며, 1829년 4월에 실시된 인구조사에서 예레반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인(당시에는 타타르라고 부름)의 숫자는 1807호 7,331명이었고, 아르메니아인은 567호 4,132명이었다.
1830년 인구 조사결과는 아르메니아인 4132명, 아제리인 7331명, 기타 195명 합계 11463명이다. 출처는 영문위키#,아르메니아어 위키#,러시아어 위키#. 이는 아제르바이잔어 위키도 대동소이하다. 이처럼 아제르바이잔인 인구가 많으나 절대다수라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러시아는 예레반을 중동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군사중심지로 만들고자 했고 자국내에 들어와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을 집중적으로 이주시키는 반면, 아제르바이잔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쫓아내었다. 그리하여 1880년에 실시된 인구조사에서는 총 2880호, 12449명의 인구중 6,293명이 아제르바이잔인, 5,975명이 아르메니아인으로 거의 1:1 비율이 되었다.
러시아의 통치에서 예레반은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887년에 와인과 브랜디 공장이 문을 열었다. 1890년대에 주류와 미네랄 워터를 생산하는 다른 공장이 문을 열었다. 기념비적인 성그레고리 교회는 1900년에 문을 열었다. 전기와 전화선은 각각 1907년과 1913년에 도시에 도입되었다. 영국 여행자 린치가 1893 ~1894년에 예레반을 방문 했을때 그는 이곳을 동방의 도시로 여겼지만 도시의 극적 성장으로 오래된 건물이 철거되고 유럽의 스타일로 변모해있었다.
20세기 초에 예레반시의 인구는 29,000 명이 넘었다. 1902년, 철도선이 예레반과 연결되고 같은 해에 예레반의 첫 공공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1905년 나폴레옹 1세의 종조카 루이 조셉 제롬 나폴레옹[4]이 예레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 시에 전화선 가입자가 80명을 넘었다.
예레반은 1917년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함께 예레반 총독이 해산 될 때까지 아르메니아 총독부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1905년~1906년 사이에 아르메니아-타타르간에 충돌로 상호학살이 일어나 바쿠, 예레반, 나흐츠반, 슈샤, 간자, 트빌리시 등등 카프카스 전역에서 3천에서 1만명의 아르메니아인과 백인 타타르 무슬림(아제르+페르시아인+쿠르드+터키인 등등)들이 살해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혼란에 휘말려서 128개의 아르메니아 마을이 파괴되고 158개의 백인 타타르 마을이 파괴됐다고 한다. 예레반의 아제르바이잔인 마을도 많이 파괴됐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는 제대로 폭동을 진압하지 못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조직이 더 효율적으로 조직화됐기 때문에 백인 타타르인들의 피해가 더 컸다고 한다. 이 사건의 원인은 다 말이 다른데 Van Der Leeuw에 따르면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이 타타르 남학생과 가게 주인을 살해하는 일로 시작됐다고 하고 Dasnabedian, Luigi Villari 또는 Walker 같은 인물들은 타타르인들이 1905년 비무장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하는 사태로 촉발됐다고 한다. 예일대 역사교수인 피루즈 카젬자데에 따르면 "양쪽에서 학살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떤 경우에는 바쿠와 간자에서 타타르가 먼저 사격을 했고 다른 경우에는 슈샤와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이 먼저 사격을 했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20세기 초에 예레반의 인구는 약 3만명의 작은 도시였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의 혼란속에 빠저들자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도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독립의 혼란속에 전화에 빠저들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10월 혁명으로 붕괴하고 터키군의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오스만 제국 국경과 인접한 예레반 일대에 아르메니아인 대략 7만5천명이 정착하면서 예레반은 독립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대도시이자 수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1919년 예레반 대학교가 개교하고 트램이 개통되는등 짧은 독립 기간동안 발전했지만 이후 1921년 4월 소련 적군이 침공해서 함락되었다. 소비에트 통치기간 동안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도로서 처음엔 15만명 도시의 계획도시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100만명 규모로 빠르게 성장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소련계의 외국인들 특히 러시아인들도 예레반에 많이 이주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숫자는 1916년 12,000명 수준이었으나 1926년에 5,216명으로 줄었고[5] 1939년 소련의 이주정책의 결과로 6539명으로 다시 늘었으나 이후 차츰 감소하기 시작하여 1979년엔 2341명까지 줄었다. 이후 1989년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자 완전히 떠나 지금은 한명도 찾아볼 수 없다.
1924년 소련정부는 대규모 소비에트 스타일로 도시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이 대규모 도시 개조는 명암이 있는데 상수도와 하수도가 설치되고 도시 인프라가 많이 좋아젔지만 문제는 오래된 도시 유적도 구세대적인 반동이라는 이유로 대거 철거됐다. 이때 사르다르 궁전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 유물이나 모스크나 이슬람 유물들이 많이 철거됐다.[6] 주변 언덕의 조림사업은 옛 예레반의 재앙이었던 먼지폭풍을 종식시켰다고 한다. 도시 개발 사업을 주도한 건축가는 알레크산드르 타마냔(Ալեքսանդր Թամանյան)이었는데, 타마냔이 설계한 예레반 도심부는 상당히 편이 좋은 편이다.
이때 만들어진 레닌 광장은 현재 공화국 광장으로 아르메니아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서 아르메니아 총리 취임식도 하고 중요한 정치 이벤트를 많이 한다. 1982년에 도시는 레닌훈장을 받았다.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되고 난후 독립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된 예레반은 독립 직후 구소련 국가들이 그랬듯이 경제난으로 전력난에 시달렸다. 전력난은 1996년까지 지속적으로 예레반을 괴롭혔다. 2006년에 도시개발이 대거 시작되고 난후 예레반 아파트의 가격이 90년대 초반과 비교해서 10배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이러한 건설붐의 결과로 중앙 아람로 주변의 역사적 건물들이 많이 훼철되고 현대적 건물로 많이 변모했다. 예레반은 정치의 중심지기 때문에 2008년 아르메니아 선거부정 시위나 2016년 세르지 사르키샨에 반대하는 시위 등 잦은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2018년 결국 세르지 사르키샨이 물러나고 니콜 파시냔이 총리가 돼서 민주화를 이룩했으나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가 패전하자 또 다시 니콜 파시냔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2021년 초기 총선의 결과 니콜 파시냔이 다시 승리함으로써 정국은 일단 안정화됐으나 야권은 반발하고 있어 다시 대규모 시위가 열릴 지도 모른다.
3. 예레반 지하철
자세한 내용은 예레반 지하철 문서 참고하십시오.4. 관광
- 예레반 캐스케이드 (Կասկադ)
언덕 위에 555개의 계단을 만들고 그 앞에 조각 공원을 세워 놓았다. 계단 안에는 미술관이 있다.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추모공원(치체르나카베르드) (Հայոց ցեղասպանության զոհերի հուշահամալիր, Ծիծեռնակաբերդ)
- 마테나다란 (Մատենադարան)
예레반 캐스케이드 근처에 있는 박물관이자 고문서관으로, 정식 명칭은 '메스로프 마슈토츠 고문서 협회'이다. 메스로프 마슈토츠는 아르메니아 문자를 만든 사람으로, 정문에 그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 계몽자 그레고리오 성당 (Սուրբ Գրիգոր Լուսավորիչ մայր եկեղեցի)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예레반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는데,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지 1700주년이 되는 2001년에 완공되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초대 수장이자 아르메니아의 수호성인인 계몽자 그레고리오의 성유물이 모셔져 있다.
- 어머니 아르메니아 동상 (Մայր Հայաստան)
본래 이오시프 스탈린의 동상이 있던 자리였으나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후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나면서 스탈린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운 동상이며 매년 5월 9일(승리의 날)이 되면 소련군 소속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아르메니아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렬이 이어진다.
그 외에 에치미아진, 즈바르트노츠, 게하르트, 가르니, 코르비랍 등의 유적지가 인근에 있어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5. 여담
6. 둘러보기
[1] 정부제2청사도 공화국 광장에 있다.[2] 첫번째는 서유럽의 소국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라베야.[3] 예레반 중심가에서 터키 국경까지는 대략 21km 정도 거리이다. 서울시청에서 일산 정도 거리와 비슷하니, 예레반이 얼마나 안보적으로 불안한 입지에 있는지 알 수 있다.[4] 제롬 보나파르트의 삼남 나폴레옹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둘째 아들[5] 러시아 혁명 당시 바쿠에서 있었던 스테판 샤후만을 비롯한 바쿠 소비에트와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충돌로 있었던 3월 학살 사건과 이에 따른 터키군과 아제리인들의 보복으로 있었던 9월 학살로 인한 충돌의 결과 자캅카스 전체에서 아르메-아제리인들의 대규모 충돌과 추방이 있었다. 그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제리측의 선전과 달리 예레반에서의 대규모 학살은 영문자료, 러시아어 자료, 아르메니아 자료에선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예레반에서 13만명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학살됐다는 자료는 아제르바이잔 자료를 빼고는 어디에도 확인할 수 없다. 즉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 내용은 그저 예레반에서 발간됐다는 당시 아제르바이잔 노동신문에 실린 한줄 기사가 전부다. 이 사건 이후 현대 예레반에서 아제르바이잔인이 전멸했다는 것도 허구인데 실제로 당시 인구조사를 보면 적지만 예레반에 아제르바이잔인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6] 굳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때문에 파괴된게 아니고 소련이 공산주의적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거한 것이다. 모스크 뿐만 아니라 교회도 많이 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