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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 제5대 황제 아바스 1세 شاه عباس بزرگ | |
<colbgcolor=#008000><colcolor=#fff,#fff> 이름 | 압버스 대왕(셔헤 압버세 보조르그) شاه عباس بزرگ |
출생 | 1571년 1월 27일 |
사파비 제국 헤라트 | |
사망 | 1629년 1월 19일 (향년 57세) |
사파비 제국 마잔다란 | |
재위 기간 | 사파비 제국 황제 |
1588년 10월 1일 ~ 1629년 1월 19일 (42년) | |
부모 | 아버지 : 모하마드 호다반다 어머니 : 카이르 알 니사 베굼 |
아들 | 모하마드 바케르 미르자[1], 모하마드 미르자, 콜리 아마놀라 미르자 |
종교 | 이슬람 시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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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사파비 제국의 5대 황제.위 초상화는 아바스 제위시절 유럽에서 사절단 일행으로 왔던 무명의 이탈리아인 화가가 그린 것이다. 아바스 대제시절 지정학적, 상업적 이유로 크게 늘어난 유럽과의 교류를 보여준다.
2. 생애
2.1. 즉위
아바스의 할아버지이자 2대 샤였던 타흐마스프 1세가 죽은후 아바스 1세가 왕위를 이어받을 때까지 이때의 사파비 왕조는 사실상 키질바시 부족 연맹체 사이의 내분으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키질바시 부족 연맹체는 사파비 왕가를 권좌에 올려놓았고 사파비 왕국이 오늘날의 이란에 비슷한 영토를 차지하도록 기여하였지만 내란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과 우즈베크 족이 사파비 왕국의 영토를 넘보게 되었다. 이때 아바스는 아버지인 무함마드 호다반다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통치에 어려움이 있자 1587년 몇몇 키질바시 부족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16세에 왕이 되었다.2.2. 국내 개혁
그는 왕이 된 후에 여러가지의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첫째로 기존의 키질바시 부족 연맹체와 그 수장들 중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자들을 숙청하였다. 두번째로는 그동안 정치,군사적으로 소외되었던 키질바시 부족 연맹체 이외의 구성원들을 하위 씨족이나 종속 부족으로 삼아 포용했다.[2] 마지막으로는 그동안 중용하지 않았던 굴람 부대를 주목해 그들을 기용했다.[3]종교적으로 열렬한 쉬아 무슬림이었던 그는 오스만 조와의 빈번한 전쟁으로 순례가 어려워진 기존 성지 카르발라 대신 호라산 지방의 마슈하드를 대규모 성지로 개발하였다. 이후 샤가 친히 맨발로 순례를 한 후 마슈하드는 이란의 12이맘파 신도들에게 메카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편 카르발라로 향하던 순례객들이 반감한 결과 오스만령 이라크의 경제가 타격을 입었다.
2.3. 대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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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라 칸국의 발리 모하마드 칸을 접견하는 아바스 대제
당시 사파비 왕조는 3가지 위협 세력이 있었다. 첫 번째는 서쪽의 오스만 제국, 두 번째는 동북면의 우즈베크 족, 세 번째는 걸프 해안 일대로 진출하기 시작한 포르투갈이었다. 그외에 동남쪽의 아프간 족들도 틈틈이 준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파비 왕조는 내분으로 국내 정세가 안정되지 못하였던 데다가 오스만 제국에 비해 군사력에서 열세였고, 수 차례 패배하여 이미 메소포타미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상실하여 오스만 제국의 저력을 체감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오스만 제국에 저자세로 나온다. 그래서 그는 1590년 오스만 제국과 이스탄불 조약을 맺어 이란 고원 내부의 북서부 지역을 양도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굴욕적이게나마 서쪽 국경을 안정시킨 아바스 1세는 동방의 적수였던 우즈베크 족과 대결한다. 그 결과 헤라트와 베셋을 탈취하여 동방을 안정시킨다. 그러면서 영국의 군사 전문가를 초빙하여 사파비 제국의 군대를 현대화시키는 데에 착수한다.
두 번째의 사파비 왕조의 위협세력이었던 포르투갈은 당시 강력한 해군력을 앞세워 바레인, 호르무즈, 반다르곰브룬을 점령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포르두갈의 적대 관계를 이용하였다. 이러한 적대 관계를 이용하여 영국과 협력한 아바스 1세는 먼저 바레인과 반다르곰브룬을 탈환하였다. 반다르곰브룬은 이후 반다르 압바스로 이름이 바뀐다. 최종적으로 1622년 영국의 도움으로 오르무즈(호르무즈)를 점령하여 이란 내에 포르투갈 세력을 완전히 축줄하게 된다.[4]
이후 아바스 1세는 1603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유럽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이스탄불 내에서도 예니체리와 시파히 사이의 내분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꽤 적절한 시기에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1603년 원래 이란의 수도였던 타브리즈를 탈환한다. 이에 대응하여 당시 새 술탄이었던 메흐메트 3세가 전장으로 출진하지만 1604년 사파비 왕조는 최초로 우르미아 전투에서 야전으로 오스만 제국을 꺾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은 여러 재상들을 보내지만 딱히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1612년 나수흐 파샤 조약을 통해 결국 사파비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매해 공물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1555년 아마시아 조약 당시의 국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어 북서부 이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이란의 영토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아바스 1세는 공물을 주지 않았고, 오스만이 이를 구실로 10만의 병력으로 다시 침공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지만 아바스 1세의 전략으로 수피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5] 영토를 사수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던 아바스 1세는 1623년 전쟁을 재개하여 1624년 바그다드를 수복하게 된다. 조지아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느라 바그다드는 위기를 겪지만 아바스 1세는 다시 바그다드 일대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여 바그다드를 수호하게 된다. 이후 바그다드는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4세에 의해 1638년 재정복되기 전까지 사파비의 땅으로 남는다.
한편으론 타바리스탄에 남아있던 마지막 사산왕조계 국가인 판두스판 왕조를 1598년에 공격하여 정복하기도 하였다.
2.4. 이스파한 천도
연회를 즐기는 아바스 대제
이스파한을 수도로 삼아 이란의 이름난 도시로 만든 황제도 아바스 1세이다. 그는 1598년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각지에 도로, 다리, 대상숙(隊商宿)을 건설하여 이란의 경제 발전에 노력한 점이 많았다. 그가 수도를 정한 이스파한은 그의 치세 아래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당시 이스파한의 별명은 세계의 절반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부흥하였다. 아바스 1세가 아르메니아에서 이스파한으로 강제이주시킨 아르메니아인들은 사파비 황실과 외국인 무역상들 사이에 중개인으로 활약하면서 무역 적자를 감소시켰으며, 몽골 제국 시대 이후 침체되었던 이란의 수공업을 다시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복구시켰다. 이스파한에서 생산된 비단, 벨벳, 다마스크, 새틴, 태피터가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중국인 자기 기술자들을 수입하여 기술을 전수시켜, 도자기 산업을 다시 부흥시켰다.
2.5. 비극의 가족사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중 샤 아바스는 가정사에서 만큼은 실패를 거듭하였다. 특히 그는 아들 5명 중 2명이 요절했으며 자식들과의 관계가 나빠 아들들이 제위를 찬탈할까 극도로 염려했다고 한다. 샤 아바스는 장남 모하마드 바케르(사피 미르자)를 처음에는 아꼈지만 바케르와의 갈등이 커지다가 결국에는 갈등 끝에 1615년 그를 처형하였다. (장성한 자녀들 중) 차남 모하메드 미르자와 삼남 콜리 아마놀라 미르자와도 갈등하다가 그들이 신하들과 짜고 아버지를 폐위하려는 것을 알게 되어 각각 1621년과 1627년 실명되고 감금되었다. 따라서 임종 시에 남아있던 두 아들들이 모두 장님이었기에 장남 사피 미르자의 아들인 손자 삼 미르자가 사피 샤로 계승하였다. 1632년 반란을 우려한 샤 사피가 숙부들을 처형하며, 샤 압바스의 장성한 세 아들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선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헨리 2세, 프리드리히 2세, 쉴레이만 1세 등과 마찬가지로 유능한 군주도 자녀 문제에 있어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역사적 고찰을 보여준다. 장기 재위하며 국가를 안정시켰고, 자식에게 비정한 막장 부모이며 친히 주살한 장남의 아들이 대를 이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영조와 유사한 면이 있다.[1] 샤 사피의 아버지[2] 쿠르드인, 루르인, 차가타이 투르크족 등등.[3] 키질바시 부족 연맹체 이외의 부족 출신 지원병, 개종한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이에 속한 소규모 부대이다.[4] 하지만 육군을 지휘해 결정적인 공을 세운 장군 이맘 콜리 칸은 1632년 샤 압바스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샤 사피에 의해 처형된다[5] 6만의 페르시아군이 10만의 오스만군을 격파했는데 이때 오스만군은 2만명의 사상자와 많은 장군들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보니 이 패배는 오스만 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