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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라자비 호라산 주 | ||
면적 | 351㎢ | ||
인구 | 3,372,090명 (2016년) | ||
3,600,650명(광역권) | |||
인구밀도 | 9,601명/㎢ | ||
시장 | 압둘라 에르자이 쉬라지 |
이맘 레자 성지 |
나디르 샤 무덤 |
칸 멜레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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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의 도시. 이란 제2의 도시로[1], 동부 호라산 주의 중심 도시이다. 사실 마슈하드는 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작은 도시였는데, 인근의 도시이자 호라산의 중심지로 기능하던 니샤푸르가 쇠퇴한 이후 그를 대체하며 성장하기 시작하였다.이란의 주요 종교인 쉬아 이슬람의 8번째 이맘 알리 알 릿다(레자 샤)[2]가 독이 든 포도로 암살된 곳으로, 시아파 좀 더 정확히는 12이맘파의 성지이기도 하다. 1년에 무려 2 500만에 달하는 순례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3] 8천만에 달하는 이란 무슬림의 성지가 된 점도 도시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이란의 2대 라흐바르 알리 하메네이와 이란 전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의 고향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아라비안 나이트의 모델이 된 아바스 왕조의 5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가 원정 중 사망한 곳으로, 그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그의 장남이자 아바스 조의 7대 칼리파 알 마문은 레자 샤를 하룬 영묘 바로 옆에 매장하여 쉬아 무슬림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다.
2. 역사
도시의 존재 이유인 알리 레자 영묘
페르시아 제국, 즉 아케메네스 왕조의 샤한샤 다리우스 1세 시절에 각인된 베히스툰 암각문에 의하면, 파르티아 인들의 첫번째 정착지 중 하나인 파티그라바냐가 현재의 마슈하드 인근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마슈하드는 9세기에 12이맘파의 8번째 이맘인 알리 알 릿다와 아바스 왕조의 제 5대 칼리파인 하룬 알 라시드의 무덤을 비롯한 여러 묘소들을 중심으로 건물과 시장이 생겨나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993년 가즈니 왕조의 사북티긴에게 파괴되었지만 1009년 그의 아들인 술탄 마흐무드가 재건했다. 이때 성벽도 둘러졌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입을 겪었지만 처참히 파괴된 다른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파괴되어서 인근의 사람들이 마슈하드로 이주하기도 했다. 1333년에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충분한 과실수, 수로, 방앗간이 있는 큰 도시이고 돔과 벽의 타일이 장엄하다고 가록했다.
레자 영묘와 인접한 고하르샤드 모스크
14세기 티무르 제국이 마슈하드 인근의 도시였던 투스(Tus)를 파괴하면서 마슈하드의 중요성이 상승하였으며 티무르 제국 시기 마슈하드는 티무르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4]이는 16세기 티무르 제국이 멸망하고 이 지역이 사파비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국경 도시였기에 1586년 전까지 우즈베크 족들로부터 수차례 공격을 받으며 아바스 1세 시기 전까지 불안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18세기에 아프샤르 왕조가 들어선 뒤 마슈하드는 나디르 샤의 통치아래 왕국의 수도 역할을 하며 번영을 누렸다. 나디르 샤가 죽고 나서는 아프샤르 왕조가 약화되면서 이전과 같은 번영을 누리진 못하게 되었다. 이후 건국된 카자르 왕조 시기에는 수도지위를 상실하였으며 1911년 러시아에 의해 도시가 폭격당하기도 하였다.
팔라비 왕조의 팔라비 1세치하에서 마슈하드는 1930년대부터 병원, 공장, 대학, 발전소가 세워지고 교통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급속한 현대화, 세속화 정책에는 문제점이 많았고 이에 반발한 성직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1935년 이맘 레자 성지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이 시위는 군대에 의해 유혈진압되었다.
마슈하드는 시위, 제2차 세계 대전, 가뭄 등을 겪었지만 팔라비 1세의 뒤를 이은 팔라비 2세치하에서도 가파르게 인구가 증가하였고 여러 인프라가 세워졌다.
이란 혁명이후에도 도시는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에 이른다.
3. 이맘 레자 성지
레자 성자 전경
본래 조로아스터교 사원이었다가 3차 피트나 당시 활약한 압바스 조의 공신 후마이드 빈 카흐타다가 궁전 혹은 정원인 다르 알 이마라로 개조했다. 9세기 초엽에는 호라산 로의 성채로 쓰였고, 809년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가 안정되었다. 818년 이맘 레자 사후 그는 하룬 곁에 안정되었고, 이후 마슈하드 알 릿다로 불렸다. 9세기 말엽 영묘 위에 돔이 얹혔고, 순례자들이 모이며 바자르가 형성됐다. 993년 가즈니 제국에게 파괴되었다가 1007년 술탄 마흐무드가 재건했고, 12세기 초반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는 성지에서 아들이 낫자 증축하였다.
1215년에는 호라즘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가 양쪽 문에 아랍어 서예 부조와 미흐랍 3개를 더했고, 몇년 후 몽골의 호라산 학살 시에 생존자들이 성지로 피신한 후 일대에 정착했다. 14세기 초에는 시아파로 개종한 올제이투 칸이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티무르 제국기에는 샤루흐가 수도 헤라트에서 종종 방문했고, 영묘 남쪽에 고하르샤드 모스크를 더했다. 1600년경 아바스 1세는 안뜰을 확장했고,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도 성지에 후원금을 보냈다. 이때 기본적인 형태가 완성되었다.
이맘 레자의 무덤 (자리흐)
18세기 아프샤르 왕조기 일부 증축이 있었고,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 시기에 보수가 있었다. 1911년 헌정 위기 시에 러시아 군이 혁명군이 피신한 성지를 폭격, 큰 피해가 있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1928년 보수 시에는 옛 건물 중 상당수가 그대로 철거된 후에 새로 지어졌다. 1935년 7월, 반서구화 시위대가 성지를 장악했다가 팔레비 군대가 150여 사망자를 낸 끝에 진압했다. 이란 혁명 중인 1978년 11월에는 팔레비 군이 시위의 거점인 성지에서 무력 진압을 가해 1만 전후가 사망하는 참극이 있었다.
4. 기후
스텝 기후(BSk)에 속하며 비가 잘 내리지 않는다. 마슈하드에서 관측이래 기록된 최고온도는 43.8°C였으며 최저온도는 -28°C였다.5. 경제
이란의 자동차 생산 중심지이자 관광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덕분에 2010년대 기준 이란의 호텔 중 절반 이상이 마슈하드에 위치해있었다.
6. 기타
시아파 성지다 보니, 2000년대 초반엔 매춘부가 성지를 더럽힌다는 이유로 연쇄살인마 사이드 하네이가 매춘부를 연쇄살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성스러운 거미가 나왔는데, 이란 정부가 촬영을 허가하지 않아서, 실제 촬영은 요르단에서 진행되었다.2024년 이란 대통령 헬기 추락 사고 후 마슈하드 출신인 에브라힘 라이시의 유해가 이맘 레자 성지에 안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