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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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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29f6d><colcolor=white> 이란 혁명[1]
انقلاب ۱۳۵۷ | Iranian Revolution, Islamic Revolution
파일:이란 혁명.jpg
기간 1978년 1월 7일 ~ 1979년 2월 11일
장소 이란
원인 팔라비 2세의 통치에 대한 불만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추방
목표 팔라비 왕조에 대한 전복
결과 팔라비 왕조의 붕괴, 이슬람 공화국 수립

1. 개요2. 배경
2.1. 카자르 왕조
2.1.1. 제1차 세계대전
2.2. 팔라비 왕조
2.2.1. 1953년 이란 쿠데타 이후2.2.2. 단기 경제 쇼크와 전통적 보수주의
2.3. 시위의 발전
3. 전개4.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의 수립5. 결과 및 영향6. 여담7. 각종 매체8.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페르시아어: انقلاب ۱۳۵۷
영어: Iranian Revolution, Islamic Revolution

1979년 이란 제국에서 발생한 입헌군주제(사실상 권위주의 전제군주제)인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사실상 신정 체제).

팔라비 정권은 집권 시기 1963년부터 백색혁명을 통해 이란 현대화를 실시하는 대규모 개혁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현대화에 반대하여 1964년에 추방되었다. 팔라비와 호메이니와의 이념대립으로 긴장상태에 놓이며 1977년부터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어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슬람주의를 포함하는 시민 저항 운동으로 시작되어 발전했다.

이 혁명으로 이슬람 성직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하며 현재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창건되었고 이란의 수천 년 동안 이어진 군주제도 막을 내렸다. 또한 혁명으로 대규모 이민자가 발생했고 대중주의, 시아파 이슬람주의, 민족주의를 띄는 정부가 탄생했다.

이란 혁명 이후 기존 왕조 스탠스인 친서방, 권위주의군주제 대신 반서방, 이스라엘 축출, 정치적으로 호메이니 사상을 통해 수니파를 견제하고 시아파의 정치적 확장을 지원하며 이란 세력권 형성을 목표로 하는 전력을 세운다.

2. 배경

이란 혁명이 발생한 이유로는 다음과 같다.

1.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
2. 1953년 이란 쿠데타
3.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석유 판매수입 증가로 인한 높아진 기대
4. 급격한 경제개발계획
5. 1977~1978년 사이의 짧은 경제 쇼크
6. 구 체제의 산재한 문제점들

2.1. 카자르 왕조

이전 카자르 왕조부터 위기는 감지됐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영국에 50년간 담배 전매권을 팔아 넘기자 1891년~1892년 페르시아 담배 시위가 일어나 12이맘파 위주 상인들과 성직자 계층을 중심으로 각 도시들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담배 독점 생산 판매를 취소받았다.

또한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는 여행 때문에 60년간 석유 채굴권 관련한 이권들을 팔아넘겼다. 이런 왕실의 행동에 분노한 페르시아 민중들은 1905년~1911년 입헌 혁명을 일으켜 당시 샤(왕)의 권력을 막고, 처음으로 이란 의회를 만들었다.[2]

이는 그레이트 게임으로 이란 지역을 노리던 영국과 러시아에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오스만과 인도 사이의 좋은 전략적 위치와 많은 석유 매장량으로 관심이 많았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란 없는 영러협상을 맺고 이란의 북부는 러시아 합병, 남부는 영국 합병, 중부는 중립 지역으로 남겨놓기로 합의하였다. 반면 샤(왕)는 의회를 해산할 계획을 세워 절대군주로의 회기를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았고, 1908년부터 입헌혁명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러시아군이 입헌혁명에 개입해 의회에 폭격을 가하고 샤와 러시아가 합쳐 공세했지만 1908년 실패했고, 시민들은 더 크게 러시아와 샤의 결탁에 일어났지만 의회는 무장해제를 당하며 1911년 샤와 러시아군 12000명이 개입해 군대를 통해 의회를 내쫒아 해산당했다.

2.1.1.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전쟁의 소용돌이를 맞았다.

기존의 영러협상대로 러시아는 남캅카스 문화권 지역을 더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인도와 가까운 남이란을 점령하는 것을 원했다. 러시아는 이전부터 입헌혁명으로 이란 북부를 점거하고 있었고, 영국은 1914년 남부를 점령했다. 동맹국인 오스만은 이란의 석유가 러시아로 가는 것을 차단하는 것을 원했고 독일 제국은 영러협상을 분열시켜 협상국이 가지고 있는 이란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힘썼다. 그 중 오스만 전쟁부 장관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는 범투란주의를 통해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와 연결 될 기회라고 여겨 아시아 내륙 식민지 확보는 늦다고 판단해 유럽 영향력을 벗어나려고 했다.

독일 제국은 1차 세계 대전 직전에 동방정보국[3](The Intelligence Bureau for the East)을 설립하여 영러협상을 해체하기 위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정보 및 파괴 임무를 실시했다. 작전은 빌헬름 바스무스가 이끌었다. 독일군은 이란을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해방하고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 갈등을 더욱 심화시켜 결국 현지 군대가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기를 바랐다.

협상국인 이란 내 주둔중인 러시아와 영국, 동맹국인 오스만과 독일이 이란-오스만국경에 집결하며 전쟁터가 되었다. 오스만과 접경한 이란령 아제르바이잔 북부, 이란령 쿠르디스탄에서 주요 전투가 일어났고 이란이 협상국에 붙어 전투를 진행했다. 러시아는 혁명 이후 1918년에 철수 했지만 영국은 1921년까지 남아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란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였고 약 200만명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란이 1차대전 이후에는 큰 혼란에 빠지고 수도 테헤란 이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껍데기 국가가 되었고, 1921년 레자 칸 장군(레자 샤)이 쿠데타로 왕조를 세워 팔라비 왕조가 세워졌다.

2.2. 팔라비 왕조

1941년, 연합국인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침공해 독일과 우호적으로 알려진 레자 샤가 퇴위당하여 레자 샤의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즉위했다. 이란은 1946년 붉은 군대가 철수할 때까지 소련의 점령하에 있었다. 전쟁 후 몇 년은 샤가 친소련 총리 아흐마드 카밤(Ahmad Qavam)과 충돌하고 공산당 투데당의 규모와 영향력이 커졌으며 소련이 지원하는 이란령 아제르바이잔과 이란령 쿠르디스탄 분리주의 운동을 다스려야 했기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1901년부터 영국의 석유 회사인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4](현 BP plc)는 이란 석유의 판매, 생산에서 독점권을 누렸다. 영국계 회사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자랑했다. 당시 기업과 이란 정부 사이의 이익을 무려 9:1로 나누었다. 이란에서는 석유산업의 이익을 5:5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요구를 내세웠으나 영국에서는 이를 전면 거부하였고 이러한 갈등으로 영국의 바지사장인 총리 알리 라즈마라(Haj Ali Razmara)가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며 결국 모사데크가 총리에 오른다. 이란 1951년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를 몰아내고 외세 강국으로부터 해방을 내세웠다.

결국 1952년 모사데크는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를 국유화하고 국민 영웅이 되었다. 영국은 이에 반발하며 비록 따르지 않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유엔에 처벌을 요청하고 군함 파견과 금수조치를 내렸다. 모사데크는 영국의 반발에 굴하지 않았고, 영국 윈스턴 처칠은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군사지원 요청을 보냈지만 제국주의를 극심히 싫어하던 해리 트루먼은 거절했고, 영국은 이 때 쿠데타를 준비했다. 하지만 52년 11월 미국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며 미국이 입장을 바꿨고 미국, 영국 지원을 받아 MI6, CIA에서 아작스 작전을 벌이며 53년 쿠데타로 이란 민주주의 정부를 몰락시켰다. @

2.2.1. 1953년 이란 쿠데타 이후

입헌군주제[5]팔라비 왕조에서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와 대립하던 (왕) 팔라비 2세는 모사데크의 석유 국유화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미국영국의 도움으로[6] 민주화 정부인 모사데크를 내쫓고 1953년 이란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을 잡았다. 1957년에는 비밀경찰인 사바크를 만들어 반대파를 탄압했다.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 하에 있었던 이란에서는 이 일로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슬람주의자들도 팔라비 왕조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했다.

팔라비 왕조는 당시 사회 고위층의 일부와 결탁해 시민을 억압하였으며 부패하고 사치스러운 정권이었다.[7] 또한 공급 독점, 상품부족,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며 경제 기초적인 부분에서 실패를 겪었다. 이란 국민들은 팔라비 2세가 비무슬림인 서구 강대국들 덕에 집권해 빚을 졌다고 여겨 왕조에 대한 지지를 낮추는 데 한 몫 했다.

2.2.2. 단기 경제 쇼크와 전통적 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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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 단지를 방문한 팔라비 2세 (1970년)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이란은 막대한 경제적인 이득을 보게 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1972년 570달러에서 혁명 직전인 1977년에는 2315달러로 급속히 올랐으며[8]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겉으로 볼 때는 이란의 미래는 화창할 것 같았고 팔라비 2세의 입지도 강화될 것처럼 보였지만 내실은 결코 탄탄하지 않았다. 우선 석유값의 상승으로 이란의 국부는 증가하였지만 그 수익의 대부분을 팔라비 왕가와 왕실을 지지하는 고위층[9] 등 일부 계층들이 독점하면서 빈부격차는 급속히 커졌고[10] 이란의 산업부문은 갑자기 넘쳐나는 소비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상품공급 부족현상이 유발되었고 산업생산능력 부족으로 인한 서민들의 불만을 달래려고 정권에서 선심성 재정지출을 확대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닥쳤다. 결과적으로 농촌이 피폐해지고 중소상인들이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도시로 수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도시 근교 지역에 대규모 빈민촌들이 확대되었으며 오일쇼크가 지나가고 유가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곧바로 경기가 침체되었고 이는 거의 모든 중동 산유국에 도미노처럼 경제위기를 일으켰으며 왕정이 크게 흔들렸다. 이슬람 극단주의 이념이 힘을 얻게 된 것도 이때의 왕정에 대한 불만이 중요한 계기다.

비슷한 시기인 1960, 197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쿠웨이트, 모로코 같은 다른 중동 군주국들은 샤리아 등 이슬람 법계를 국법으로 채택해 이슬람의 영향이 강력한 보수적인 자국 사회의 분위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고 국내 정책을 안정적으로 펼쳤다. 반면 이란 팔라비 왕가는 철저히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제와 가까운 정체를 확립해 국민들의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은 급격한 탈종교화 정책을 펼쳤다. 게다가 이란은 다른 중동 군주국들보다 인구가 워낙 많았고 급진적이고 부의 편중이 심각한 경제개발 및 탈종교화 정책으로 국민들의 왕가에 대한 지지가 극도로 약했다.

2.3. 시위의 발전

루홀라 호메이니는 1963년 이란 시위에서 백색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을 이끌었고, 첫 명성과 동시에 유명해졌다. 호메이니가 (콤)에서 샤한샤를 규탄한 죄목으로 체포되자 3일 간 반정부 투쟁이 일어나 진압 과정에서 32명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부는 호메이니를 가택연금에 처한 뒤 8개월 후 풀려났지만 이스라엘 관련된 미국 정부 인사의 외교특권 적용에 반대하며 1964년 말 체포돼 추방되었다. 약 1년간 터키에 머물다 이라크 나자프에서 대부분 추방 기간을 보냈다. 추방기간 동안 호메이니의 사상을 완성했으며, 해외에서도 국내 이슬람주의자 세력과 연계하여 반정부 운동을 이어갔다. 이란의 좌익 정당인 투데당과 좌익 무장단체인 무자헤딘 헐크(Mujahedin Khalq), 페다야네 헐크(Fedayan-e Khalq)도 군주제 타도를 목적으로 반정부 투쟁을 일으켰다.[11] 호메이니는 1978년 프랑스에 망명 뒤 언론이 대서특필하며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호메이니를 견제할 수단이 많았고 기간도 충분히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팔라비 왕조가 반개혁파, 기존의 전통을 가진 전통주의, 근본주의에 잘 대응하지 못했다. 백색혁명 하 개혁에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 사바크를 통한 폭압정치, 부정부패, 사원 토지개혁으로 양성된 도시 슬럼화, 1935년 히잡 금지, 경제정책의 탈선, 가난한 국민과 대비되는 화려한 왕실행사로 반체제인사, 반정부인사가 통제되기 어려울 정도로 늘었다. 하지만 정부는 혁명 이어지기 전까지 시위 관련한 훈련도 없을 정도로 무능력했다. 혁명시작 이후 팔라비 2세 전 황제가 78년 암 선고를 받으면서 제대로 된 대응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이란 제정 자체가 마비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7년 10월, 호메이니의 장남 모스타파 호메이니가 이라크 나자프에서 원인 모를 이유로 죽었다. 정부와 사바크(비밀경찰)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주장했지만, 다수의 시민들은 사바크가 관여되있다고 주장했으며 호메이니의 사상과 군주제 폐지파, 망명의 이유로 종교와 정치의 색깔을 띄는 시위가 많은 이란 도시에서 일어났다.

3. 전개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는 1978년 8월 20일에 아바단에서 일어난 렉스 극장 화재 사건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슬람주의자의 방화라고 주장했지만 반정부 측에서는 사바크의 방화라고 주장했고 범인의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미 반왕정 시위가 거셌던 정세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이 되었다.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지던 가운데 9월 8일에는 테헤란 동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군경은 유혈 진압으로 대응했으며 이 사건은 검은 금요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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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비 2세 이란 황제의 사진을 지르면서 규탄 구호를 외치는 이란 시민들

혁명이 격화되자 당시 나자프에서 파리로 옮긴 호메이니는 육성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이슬람주의자들의 결집을 촉구했고 하산 하비비(Hassan Ebrahim Habibi),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Abol Hassan Bani Sadr), 사데크 코틉자데(Sadeq Qothbzadeh), 이브라힘 야즈디(Ebrahim Yazdi) 등의 해외 반왕정 인사들을 규합했다. 이들의 혁명 이후 행보는 제각각이었지만 혁명 때는 같은 편이었다.
  • 하비비는 혁명 후 이란에 남았고 법무부장관, 부통령을 맡기도 했다.
  • 바니 사드르는 이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노선 차이로 호메이니와[12] 노선 차이와 대립 끝에 실각했고 재차 프랑스로 망명했다.
  • 야즈디는 과도정부에 참여했지만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때 퇴임 후 이슬람 정부에 반대하면서 재야 인사로 활동했다.
  • 코틉자데는 혁명 이후인 1982년에 호메이니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그동안 이란에서는 팔라비 2세가 골람레자 아자리 장군수상에 임명하여 군대, 경찰의 힘으로 시위를 통제하려고 했고 불만이 터진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민주적 다당제에 입각한 새 총선 실시와 국왕권력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로의 개헌[13], 언론 자유 허용, 정치범 사면, 세금 감면, 사바크 해체[14]. 국내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 등 여러 개혁안들을 발표했지만 이미 민심의 이반으로 불만이 터질때로 터진 이란 국민들과 왕당파를 제외한 이슬람주의파와 공화주의파 등 이란 내 각 정파 세력들은 국왕의 개혁안에 찬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팔라비 2세 국왕의 즉각 퇴진과 왕정폐지를 요구했다.
파일:1699690700523.jpg
시위를 진압하러 온 육군 장교에게 꽃을 주는 시민

당시 이란군 내부에서도 육군과 공군, 해군 등을 막론하고 팔라비 왕조에 반기를 들어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거나 혁명을 지지하는 장교와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더욱이 이란의 우방국인 미국과 유럽 등 서방권 국가들에서도 팔라비의 인기가 떨어진 데다 1979년 1월 과달루프 선언으로 미국, 영국, 서독,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이란 사태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하여 팔라비를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팔라비 왕조는 안팎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한편 혁명이 격화되던 1978년 말에 이웃나라였던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부 내 반란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 대통령과 영부인, 자식들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팔라비에게 알려지자 자기도 다우드 칸처럼 정권이 몰락하여 가족들과 함께 혁명 세력들한테 타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더욱 커졌고[15]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팔라비 2세는 정권 유지를 포기하고 퇴위 밎 국외 망명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파일:1699691010401.jpg 파일:1699691579728.jpg
이란을 떠나는 팔라비 2세 철거되는 팔라비 2세의 동상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샤푸르 바크티아르를 신임 총리로 임명한 다음 퇴위하였고 이란을 떠나 미국, 파나마, 멕시코, 모로코 등 여러 국가들을 전전하다가 1980년 지병이었던 암이 악화되어 마지막 망명국이던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팔라비 2세의 퇴위 이후 이라크와 프랑스 등 외국에서 망명하던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이란 정부의 초대를 받고 귀국했다. 망명생활을 마친 그는 이슬람 혁명 위원회를 조직했다. 한편 팔라비 2세가 임명한 마지막 총리인 샤푸르 바크티야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정부 구성과 정국안정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호메이니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바크티야르의 무조건적인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면서 바크티야르에게 맞섰다.

이러한 호메이니의 즉각적 사퇴에 반발하던 바크티야르 내각, 왕실 쪽인 이란 육군 공수부대, 내무부 보안군과 호메이니 쪽으로 돌아선 정부군이 전투를 벌이다가 10일여간의 접전 끝에 호메이니가 바크티야르 총리와 친 팔라비 왕조파 세력들을 제압하고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2월 11일 팔라비 2세 전 이란 황제의 퇴위와 구 왕가의 해외 도주로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던 팔라비 왕조의 이란 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혁명이 성공했다.

4.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의 수립

호메이니는 일찍부터 이슬람 율법에 입각하여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통치하는 신정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혁명을 주도한 다른 정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이란에서는 이슬람주의자 외에도 서구식 민주주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세력, 서구식 정체와 이슬람주의를 절반씩 섞은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 이슬람 사회주의 및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왕정을 폐지/전복해야 한다는 의견은 일치했기 때문에 혁명 때는 을 합쳤지만 팔라비 왕조가 무너진 후에는 서로 자기 입맛에 맞는 정부를 세우려고 하며 적이 되어 대립했다. 크게 나누면 이슬람주의 vs 세속주의의 구도였다.

1979년 3월 30일과 3월 31일에 실시되었던 왕정 폐지 이후 이란의 새로운 정체 수립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발표된 결과는 이슬람 신정 국가 수립에 찬성하는 비율이 98.2%였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투표 결과를 근거로 이슬람 신정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투표 전 친민주주의 정당, 공산/사회주의 정당 등은 호메이니의 강제적인 선택을 하는것을 반대했으며, 일부 정당은 투표를 보이콧 했다. 투표율 자체를 의심한 비이슬람 정파들은 당연히 부정 투표라고 주장했으며[16] 이러한 타 정파 세력들의 반발에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암살, 숙청, 공산주의자 몰이로 이들을 억압하거나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슬람주의 진영에서도 샤리아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는데 아예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통치하는 신정 체제를 주장한 호메이니와 이슬람과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충, 혼합하여 공화주의적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한 카젬 샤리아트마다리(1905~1986) 사이에 대립이 있었지만 결국 신정 체제를 주장한 호메이니 지지파의 승리로 끝났다.[17]

내부 교통정리를 마친 이슬람주의자들은 6월 18일에 헌법초안을 완성했고 율법 전문가회의 임원 73명을 8월 3일~4일에 선거로 선출한 다음 심의 끝에 11월 15일에 이슬람 공화국 헌법을 가결한 후 12월 2일~3일에 국민투표에서 98%의 지지율을 근거로 정식으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18]

5. 결과 및 영향

이란 현대사에서 이란 혁명은 민중의 투쟁으로 이란 역사상 수천년간 이어져 온 군주제를 쓰러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한 것으로 이란 당국에서 위대한 시민혁명이었다고 기려지고 있지만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가 수립된 후 결과적으로 친팔라비파, 좌파 인사가 신정 신정부에 탄압당하는 새로운 국가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혁명 이후 수립된 이란의 정부는 말만 공화제이지 실질적으론 종교 지도자 라흐바르 하의 신정 독재 체제로서 아직까지 독재정치가 이어지고 있으며[19] 기존에 팔라비 왕조가 내세우던 세속주의 정책이 부정되고 인권 탄압이 매우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론 이슬람 근본주의로의 퇴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주의로 변질된 이란 혁명은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란-이라크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란의 잠재력을 크게 깎아먹은 대재앙이었다. 일단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팔라비 2세가 강탈해간 샤트알아랍 강을 탈환할 계획은 있었어도 이란을 전면 침공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호메이니의 망명을 받아주고 후원해 줄 만큼 호메이니에 우호적이었지만 이란 혁명 이후 호메이니가 대놓고 이라크에 대한 정복욕을 드러내고 실제로 이라크 시아파의 폭동을 부추기는 등 온갖 위협을 했기 때문에 예방전쟁 차원에서 이란과의 전면전을 결정했다.[20] 게다가 이라크 뿐만 아니라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파탄이 나고 현재까지 적대 관계가 지속되고 있으며 이슬람 혁명 수출 선동 같은 온갖 도발을 일삼은 결과 소련, 서방, 중동 할 것 없이 이라크를 지원해 주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지원 탓에 이란은 국력과 군사력에서 훨씬 열세였던 이라크를 상대로 8년 동안 엄청난 국력과 인명을 소모한 끝에 무승부로 전쟁을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표면상의 무승부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이란의 국력을 소모시킨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세인의 승리였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의 끔찍한 경험에서 배운 바가 전혀 없었는지 이란 이슬람 정권은 지금까지도 온갖 외교적 행패로 고립과 국력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원수질 일도 없었던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 아랍 국가들을 넘어서는 초강경 반이스라엘 국가로 변모하고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까지 개입하며 시아파 종주국을 자처한다. 그리고 옛 팔라비 왕실이 누리던 부와 특권들이 시아파 성직자들과 혁명 수비대 같은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옮겨졌을 뿐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여전히 극심하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란 혁명은 처음에는 팔라비 왕가의 독재에 반대하는 고결한 목적으로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더 심한 독재를 불러왔을 뿐이다. 애당초 히잡을 금지하고 여성인권을 증진시키는 독재와 히잡보다 더 심한 차도르를 강제하고 여성인권을 추락시키는 독재는 동일선상에서 비유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다.

또 이 혁명은 왕정 붕괴라는 결과를 초래했던 데다 호메이니가 와하비즘사회주의를 공격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 아랍 왕정 국가에서는 종파 문제를 넘어서서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불러일으켰고 친미/친서방 성향의 아랍의 군주국들이 이란을 견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친미 일변도의 대외 정책과 세속화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내부적인 불만 등을 달래기 위해서 영화 상영과 음악 공연 등 대중문화를 금지하는 원리주의로의 반동적인 회귀가 1980년대부터 쭈욱 일어나게 되었다.[21]

결과적으로 이란이 이 혁명을 계기로 신정체제로 바뀌면서 반미, 반서방 국가가 되었으며 팔라비 왕조 시절 미국 등에 무기를 주문한 계약이 파기되었고 당시 왕정에 대한 불만으로 발흥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겐 자기 라이벌(시아파의 종주국) 나라가 신정국가로 변신한 데 대한 경쟁심과 자신감으로 인해 엄청난 자극이 되었는데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 중동 전체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그해 11월 메카 그랜드 모스크 폭동 유혈사태라는 이슬람 전체에 충격을 크게 주는 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수많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완전히 각성해 지금의 지하디스트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이어지면서 이들이 무자헤딘, 무장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동 전체가 도미노처럼 이슬람 극단주의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 또한 존재한다. 이란 혁명은 이슬람 신정으로의 보수반동으로 받아들일 측면이 있으나 사후적인 평가에 따르면 그 전개는 오히려 전형적인 근대 혁명에 가깝다는 것이다.[22] 문맹률의 감소와 보편교육 기회의 확대, 여성의 경제적•공적 영역에서의 역할 증대[23] 등 이란 혁명에는 보수적 반동과 근대 혁명이라는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다. 실제로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 신정국가로 퇴보했다는 이란은 여전히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에 속한다.[24] 그러나 혁명은 냉전 시기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고 그 자체로 정치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중립적으로 평가받기가 어렵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신보수주의적 경향의 학자들이 이란 혁명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크게 부각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냉전과 이후의 양국 관계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들어간 것이다.

실제로 이란 혁명 이후에 국제사회 제재 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명백한 수치로 드러난다.[25] 여기에 원리주의자들의 내부 통제로 인한 숙청과 탄압으로 희생된 숫자도 크다. 단순히 서구 학계의 비판적 시각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매우 정치적인 반골 의견일 뿐이다. 내부적으로는 원리주의에 의거한 살인적인 독재가, 대외적으로는 신정체제에 의한 국제고립이 국운을 수십년 후퇴시켰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철권 통치에 대한 비판이 신보수주의에 의한 일반화라는 주장은 이란의 정치적 자유 등 여러 실태만 확인해봐도 모순이 증명된다. 현대 사회와 국가의 존립 이유는 신앙의 실현이 아니라 국민의 안녕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여파로 1979년 이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취소되었다.

6. 여담

서구 학자 중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한때 이란 혁명을 지지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이란 혁명이 서구근대와는 다른 방식의 대안 정체를 지향하리라고, 그리하여 그의 정치철학적 경향에 부합하는 공간을 형성하리라고 믿지만 그 결과는 이슬람 신정 체제의 수립이었고 사후의 전개는 일반적인 근대 혁명의 양상을 따라갔다. '자기의 테크놀로지' 개념을 호메이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등[26] 제법 진지하게 이란 혁명을 지지했던 푸코는 상당히 실망했다고 한다.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붕괴되고 혁명 직후 이란의 정권을 장악한 혁명 세력들은 팔라비 전 왕과 미국, 유럽, 캐나다 등 서방권 국가들로 도주한 팔라비 황족들에 대해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는데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정이 붕괴된 지 수십년이 넘도록 이란에서 이 사형 판결은 현재까지도 사법부나 정치권에서 존치되고 있어 현재 망명 중인 팔라비 구 왕족들의 이란 귀국이나 방문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는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팔라비 왕조의 왕정이 전복된 이란보다 일찍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전복되었던 동쪽 이웃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이 왕정폐지 이후 국외로 추방당했던 구 바라크자이 왕가의 귀국을 허용해 주고 현 이란 신정체제보다 더 잔인하게 이슬람 신정 통치를 펼치는 현 아프간의 실질 집권세력인 탈레반과 탈레반 정권과 대립하는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 등 아프간 내 반 탈레반 저항세력들이 구 바라크자이 왕족들을 사형시키거나 처벌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국민으로 살려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27][28]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만든 게임 개발자 나시르 게벨리가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 망명하면서 전설적인 프로그래머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관련 영상

7. 각종 매체

  • 페르세폴리스 - 이란 출신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자전적 만화로 이란 혁명 전후 이란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혁명 전 어린 소녀인 주인공이 샤의 독재와 비밀경찰을 통한 국민 감시, 공산주의자 및 반대파 탄압 등으로 인해 팔라비 왕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란 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히잡이 강제되고, 서구 문화를 단속하고, 여성 인권이 추락하고, 정치적 탄압이 더욱 강화되면서 세속주의자로서 샤에게도, 호메이니에게도 비판적이었던 부모에 의해 이란을 떠나 유럽으로 유학가게 된다. 이후 이란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결국 이란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다.
  •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 브릴(진 해크먼 분)이 주인공 로버트 딘(윌 스미스 분)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력을 잠깐 언급하는데 그는 이란에서 공작활동을 벌이다가 이란 혁명이 벌어진 후 그동안의 공작이 드러나 존재의 부정을 당하게 됐고 함께 활동했던 파트너는 탈출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 1979 Revolution : Black Friday - 이란 혁명을 소재로 한 모바일 게임. 스팀에는 2016년에 출시되었고 구글스토어에는 2022년 2월 8일에 출시되었다. 다운로드 주소: #

8. 참고 자료

  • 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혁명 전후 이란을 다룬 만화. 작가가 세속주의자, 여성, 이란계 프랑스인이어서 이슬람 혁명에 비판적인 논조다.
  • 유달승.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대한민국에 출간된 호메이니 전기. 이란 근현대사에 대한 설명도 포함됐다.

[1] 또는 이슬람 혁명으로도 부른다.[2] 헌법을 만들었으며, 특징은 국교가 12이맘파 시아파 였으며 통과된 법률이 이슬람의 법률에 위배되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 5명의 고위 십이이맘파 시아 성직자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3] 영국령 인도와 이란, 이집트 위성국에서 파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선동을 조장하고 유지하는데 전념했다.[4] 1935년 이후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5] 명목상이고, 전제군주제에 많이 가까웠다.[6] 특히 CIA에서 에이젝스 작전(Operation Ajax)으로 지원했다.[7] 팔라비 2세의 아버지 레자 샤는 강제 매각 협박과 재산 몰수로 큰 돈을 벌었다. 당시 이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으며 "상속인에게 300만 파운드의 계좌와 300만 에이커를 넘는 재산을 남겼다. 테헤란 주재 영국 대사관의 1932년 보고서에서 레자 샤는 "땅에 대한 불경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주장하며 피해 가족들이 재산을 매각하는 데 동의할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팔라비 2세는 팔라비 재단(현 알라비 재단)을 설립하고 정치경제에 대규모로 결탁해 석유자금과 같은 큰 돈을 빼돌렸다. 알려진 자산만 1조 정도.[8] 1977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50달러였다.[9] 결국 이들은 이란 혁명이 일어나자 호메이니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재산들을 모두 몰수당하고 하층민으로 몰락하거나 미국이나 캐나다서방 국외로 망명을 떠났다. 그 덕분에 팔라비 왕조 시절에 일가가 고위층으로 부를 누리다가 이란 혁명 이후 몰락한 이란 사람들은 호메이니를 원수 취급하거나 증오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10]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오만 같은 여타 아랍 왕국에서도 석유 수익을 소수의 계층이 과점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일반 서민들도 가정부 1명씩을 고용할 정도로 수익이 늘고 노동력도 외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노동력이 부족해질 지경이었는데 이란은 오일쇼크 직전에 3000만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전 계층에 수익이 골고루 퍼지지 않았다.[11] 무자헤딘 헐크는 이슬람 사회주의 단체, 페다야네 헐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한다. 이들은 이슬람주의자가 집권한 후 이란 국외에서 반정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12]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 이란은 크게 극좌 성향의 투데당, 좌익 성향의 인민 무자헤딘, 중도파 성향의 이란 자유 운동 등과 바니사드르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호메이니의 이슬람공화당과 전투적 성직자회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있었다. 이 중 좌익들과 중도파들이 숙청당하는 것과 반미 정책에 반발한 것이 혁명 임시 정부 총리 메흐디 바르자간과 초대 대통령 바니사드르였다. 결과론적으로 중도파들이 이슬람주의자들과 성직자들한테 밀렸으며 바르자간과 바니사드르 모두 망명했다.[13] 무려 내년인 1979년에 총선과 신헌법 개헌을 시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14] 이건 결국 이란 제국의 마지막 총리였던 바크티아르의 지시에 의해 해산됐다.[15] 1978년 다우드 칸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로 살해당했을 당시에 팔라비는 그저 이웃 타국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취급했으나 같은 해 이란에서 혁명 분위기가 격화되어 왕정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자 자기도 다우드 칸 전 대통령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16] 이들은 다시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7] 하지만 그럼에도 호메이니는 정적 샤리아트마다리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 대통령, 부통령공화제의 국가수반 직을 신설하였다. 한편 팔라비 왕조 시대에 존재했던 총리 제도는 팔라비 왕조의 왕정 폐지 후에도 형식상으로나마 남겼으나 결국 1989년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18] 참고 자료: 유달승.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193~199페이지.[19] 거기다 호메이니의 손자는 정계 거물이고 하메네이의 아들들도 정계 유력인사로 잘 살고 있다. 단, 호메이니의 후손들은 호메이니와 달리 개혁적 성향이 강하며, 이로 인하여 하메네이 체제인 현재 주류에 들지 못하고 있다.[20] 샤트알아랍이나 후제스탄 문제 같은 영토적인 분쟁은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가장 큰 근거 중 하나가 후세인이 이란 침공 계획과 준비를 겨우 2달 안에 얼렁뚱땅 짜고 끝냈다는 건데 처음부터 이란을 침공할 계획이었으면 그전부터 준비했지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21] 물론 이후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태자의 개혁정책의 주도로 폐지, 완화되긴 했다.[22] 예컨대 에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이 이런 해석을 채택했다.[23] 그러나 이는 이미 팔라비 왕조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해 오던 정책이었고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란의 이슬람주의 세력은 이를 마지못해 이어온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문맹 퇴치나 공교육마저 반대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많았고 이웃의 사담 후세인 정권도 성공적인 교육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당대 이라크의 여성들이 신정 치하 이란 여성보다 훨씬 많은 권리를 누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혁명 이후 이란의 여성 인권은 퇴보한 게 맞다.[24] 그러나 이는 이란의 많은 인구와 넓은 국토, 그리고 팔라비 시절의 유산 덕이지 이란 이슬람 신정 정권이 이란의 국력에 기여한 것은 눈꼽만큼도 없고 오히려 깎아먹기만 했다. 그 국력 낭비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란-이라크 전쟁이다. 원래 이 전쟁은 국력으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이란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쟁이었고 후세인의 삽질 덕에 승리는 거의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후세인의 군사적인 무능을 훨씬 능가하는 호메이니의 총체적인 무능 덕에 전쟁은 8년 동안 질질 끈 끝에 무승부로 끝났다. 말이 무승부이지 그래도 걸프 전쟁에 투입할 만한 군사력을 보존한 이라크와 달리 이란군은 거의 괴멸 수준으로 소모되었다. 이는 서방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 거의 대부분 이라크에 흘러간 탓도 있지만 이것마저 호메이니의 막장 외교로 인해 발생한 결과다. 게다가 이란 또한 미국과 중국, 북한 등으로부터의 지원을 상당히 많이 받았었다.[25] 물론 내전과 부족간 내분으로 혼란한 세계 최빈국으로 남아 있는 이웃나라 아프가니스탄보다는 낫지만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도 모자라 온갖 내전과 ISIS에 시달린 이라크보다도 일인당 소득이 낮다.[26] 이 부분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27] 사실 당장에라도 탈레반 1차 정권 초기에 나지불라 정권 시기의 대통령이었던 나지불라도 일방적으로 공개처형하여 죽였다가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전적도 있었던 탈레반이 이미 정치적으로 몰락했어도 나지불라 정권보다 더 정통성이 있는 자국의 구 집권 세력이었던 바라크자이 구 왕실가 사람들을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무릅쓰고 사형시켜 죽여야 할 이유나 명분이 하나도 없다. 일례로 이란 혁명 이후 팔라비 1세 전 국왕의 왕묘와 여타 팔라비 구 왕가 사람의 묘지들이 모두 호메이니 정권에 의해 전부 파괴당하거나 훼손됐던 이란과 달리 아프간은 탈레반의 1차 정권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잠깐 붕괴된 후 귀국해 돌아와 모국에서 숨을 거뒀던 자히르 샤 전 아프간 국왕의 묘를 자히르 샤 전 왕이 사망한 지 수년뒤인 2021년 탈레반이 다시 재차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탈레반 측이 왕묘를 파괴하지 않았다.[28] 사실 탈레반의 이슬람 신정주의 정권이 성립되기까지 1973년 왕정 폐지 이후의 역대 정부들만 여러번 무너지고 왕국 시대를 겪은 구 세대들이 전쟁통에 전부 다 증발해 버린 아프가니스탄과 달리 이란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된 후 이슬람 신정체제 정권이 수립되었고 팔라비 왕조 시절을 경험했던 자국민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에 팔라비 구 왕가가 아프가니스탄의 바라크자이 구 왕가들처럼 원래 모국으로 귀국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