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15 00:40:59

이란 혁명

파일:이란 혁명.jpg

페르시아어: انقلاب ۱۳۵۷
영어: Iranian Revolution, Islamic Revolution

1. 개요2. 배경3. 전개4. 이슬람 공화국 수립5. 결과 및 영향6. 참고 자료

1. 개요



1979년 이란 제국에서 발생한 혁명으로 입헌군주제(사실상 권위주의 전제군주제)인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이슬람 공화국을 만든 혁명이다(사실상 신정 체제). 이슬람 성직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하게 되었다.

2. 배경

팔라비 2세는 즉위 후 친서방 외교노선을 취하고 개발독재를 하며 서구식 세속국가를 지향하는 개혁인 백색혁명을 주도했다. 백색혁명의 주요 정책은 아래 목록과 같다.
  • 토지 개혁
  • 세속주의 지향
  • 공교육 보급을 통한 문맹률 감소
  • 여성 교육 참정권 보장 및 히잡, 차도르 착용 금지

친서방 정책으로 미국, 영국의 지지를 받은 팔라비 왕조였으나 내부에서는 반발이 적지 않았다. 1950년대에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던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와 대립하던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1] 모사데크를 내쫓고 전제군주제를 지향했으며, 비밀경찰인 사바크를 만들어 반대파를 탄압했다.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등쌀에 시달리던 이란에서는 이 일로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슬람주의자들도 세속화 정책에 반발했다.

이란의 좌익 정당인 투데당과 좌익 무장단체인 무자헤딘 헐크(Mujahedin Khalq), 페다야네 헐크(Fedayan-e Khalq)도 군주제 타도를 목적으로 반정부 투쟁을 일으켰다.[2] 이슬람주의자들도 1963년에 율법학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란 중부의 종교도시인 (콤)에서 팔라비 황제를 규탄한 죄목으로 체포되자 본격적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였고, 정부는 호메이니를 터키를 거쳐 이라크, 다시 프랑스로 추방했다. 호메이니는 해외에서도 국내 이슬람주의자 세력과 연계하여 반정부 운동을 이어갔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이란은 막대한 경제적인 이득을 보게 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도 1972년 570달러에서 혁명 직전인 1977년에는 2315달러로 급속히 올랐으며[3]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도 성공적으로 개최되며 겉으로 볼 때는 이란의 미래는 화창할 것 같았고, 팔라비 2세의 입지도 강화될 것처럼 보였지만 내실은 결코 탄탄치 않았다. 우선 석유값의 상승으로 이란의 국부는 증가하였지만 그 수익은 일부계층이 독차지하면서 빈부격차는 급속히 커졌고[4], 이란의 산업부문은 갑자기 넘쳐나는 소비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상품공급 부족현상이 유발되었고, 산업생산능력 부족으로 인한 서민들의 불만을 달래려고 통화량을 대대적으로 증가시켰지만 급속한 물가상승으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농촌이 피폐해지고 중소상인들이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도시로 수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도시근교 지역에 대규모 빈민촌들이 확대되었다. 또한 유가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경제성장률은 하강하기 시작했고 이는 팔라비에 대한 저항으로 연결되었다.

3. 전개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는 1978년 8월 20일에 아바단에서 일어난 렉스 극장 화재사건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슬람주의자의 방화라고 주장했지만 반정부 측에서는 사바크의 방화라고 주장했고, 범인의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미 반왕정 시위가 거셌던 정세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이 되었다.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9월 8일에는 테헤란 동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군경은 유혈 진압으로 대응했으며 이 사건은 검은 금요일로 불린다.

혁명이 격화되자 당시 나자프에서 파리로 옮겨진 호메이니는 육성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이슬람주의자들의 결집을 촉구했고 하비비, 바니 사드르, 코틉자데, 야즈디 등의 해외 반샤 인사들을 규합했다. 이들의 혁명 이후 행보는 제각각이었지만 혁명 때는 같은 편이었다.
  • 하비비(Hassan Ebrahim Habibi)는 혁명 후에 이란에 남았고 법무부 장관, 부통령을 맡기도 했다.
  • 바니 사드르(Abol Hassan Bani Sadr)는 이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노선 차이로 호메이니와 대립한 끝에 실각했고 다시 해외로 망명했다.
  • 야즈디(Ebrahim Yazdi)는 과도정부에 참여했지만 미대사관 인질사건 때 퇴임 후 이슬람 정부에 반대하며 재야 인사로 활동했다.
  • 코틉자데(Sadeq Qothbzadeh)는 혁명 후 1982년에 호메이니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그 동안 이란에서는 팔라비 2세가 골람레자 아자리 장군을 내각수상에 인정하여 군대의 힘으로 시위를 억누르려 했고[5], 여러 개혁조치를 약속했지만 우방국인 서방에서도 팔라비의 인기가 떨어지며 안팎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결국 1979년 1월 16일에 팔라비 2세는 퇴위했고 1980년에 지병으로 망명지인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샤가 물러나자 귀국한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했고, 10일간의 접전 끝에 샤푸르 바크티아르 총리가 퇴임하면서 2월 11일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지고 혁명이 성공했다.

4. 이슬람 공화국 수립

호메이니는 일찍부터 이슬람 율법에 따른 신정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혁명에 참가한 다른 정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이란에서는 이슬람주의자 외에도 서구식 민주주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세력, 서구와 이슬람을 절반씩 섞은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 이슬람 사회주의 및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샤를 몰아낸다는 목표가 같았기에 혁명 때는 힘을 합쳤지만 왕조가 무너진 후에는 서로 자기 입맛에 맞는 국가를 세우려 했다. 크게 나누면 이슬람주의 vs 세속주의의 구도였다.

3월 30일~3월 31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발표된 결과는 이슬람 공화국 수립에 찬성하는 비율이 99%였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투표 결과를 근거로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투표율 자체를 의심한 다른 정파들은 당연히 반발했으며, 이슬람 정부는 암살, 숙청, 공산주의자 몰이로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슬람주의 진영에서도 샤리아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는데, 신정 체제를 주장한 호메이니와 이슬람과 서구 민주주의를 절충하자고 주장한 카젬 샤리아트마다리(1905~1986)의 대립은 호메이니의 승리로 끝났고 샤리아트마다리는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

내부 교통정리를 끝낸 이슬람주의자는 6월 18일에 헌법초안을 완성했고, 율법 전문가회의 임원 73명을 8월 3일~4일에 선거로 선출한 다음 심의 끝에 11월 15일에 이슬람 공화국 헌법을 가결한 후 12월 2일~3일에 국민투표에서 98%의 지지율을 근거로 정식으로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6]

5. 결과 및 영향

이란 현대사에서 이란 혁명은 민중의 투쟁으로 독재 정권이 물러나게 된 시민 혁명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혁명 직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며 심각한 전쟁 피해를 입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친팔라비파, 좌파 인사가 탄압당하는 새로운 국가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지금의 이란은 말이 공화제지 실질적으론 신정 독재 국가라 정권만 교체된 채 독재가 이어지고 있다. 거기다 기존에 팔라비 왕조가 내세우던 세속주의 정책이 부정되고 인권 탄압이 매우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여성들이 팔라비 왕조를 끌어내리는데 일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혁명으로 인해 전체 여성들의 인권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머리를 가리는 히잡을 쓰지 않으면 사회 생활과 외출이 불가능해졌고 기업과 정부조직에서 활발히 일하던 여성들은 하루아침에 강제 퇴직을 강요당했으며 교육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탁아소와 유치원의 폐쇄 등을 통해 여성을 가정에만 묶어두려는 정책을 썼다. 군사 부문에서도 최고지도자 직속인 혁명수비대 및 바시즈가 만들어져 이슬람주의자 세력의 무력 기반이 되었고, 이라크와의 전쟁 전까지 왕당파가 숙청당했다.

2017년 12월 28일부터 며칠간 이란에서 일어났던 시위에서는 팔라비 왕조 지지 구호까지 나왔다고 한다. #1 #2 #3 심지어 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신정 체제도 약 40년이 지난 2020년, 자국민이 탄 비행기에 미사일을 쏘는 대형사고를 터트리면서 똑같이 반정부 혁명을 맞이하는 상황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이 혁명이 왕정 붕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 아랍 왕정 국가에서는 종파 문제를 넘어서서,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 국가들이 이란을 견제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친미 일변도의 대외 정책과 세속화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내부적인 불만 등을 달래기 위해서 영화 상영과 음악 공연 등 대중 문화를 금지하는 원리주의로의 반동적인 회귀가 1980년대부터 쭈욱 일어나게 되었다.

인권과 원칙을 앞세웠던 카터 행정부의 최악의 외교적 실패 사례로 꼽힌다. 혁명 이전에는 이란에 무기만 팔아먹고 단물만 빨 줄 알았지 바닥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무지했고 정작 혁명이 발생하자 우유부단한 자세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세속주의자들이 쓸려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급기야는 이슬람 혁명의 대미를 장식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 구출 작전의 참담한 실패 등으로 무능을 제대로 보여준 끝에 카터 대통령이 재선에서 실패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후 들어선 레이건 행정부가 한국의 광주 민주화 운동 사건을 잔인하게 진압한 신군부를 철저히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이란 이슬람 혁명의 트라우마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6. 참고 자료

  • 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혁명 전후 이란을 다룬 만화. 작가가 세속주의자, 여성, 이란계 프랑스인이어서 이슬람 혁명에 비판적인 논조다.
  • 유달승.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국내에 출간된 호메이니 전기. 이란 근현대사에 대한 설명도 포함됐다.


[1] 특히 CIA에서 에이젝스 작전(Operation Ajax)으로 지원했다.[2] 무자헤딘 헐크는 이슬람 사회주의 단체, 페다야네 헐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한다. 이들은 이슬람주의자가 집권한 후 이란 국외에서 반정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3] 참고로 1977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50달러였다.[4]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타 걸프 왕국에서도 석유수익을 소수의 계층이 과점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일반 서민들도 가정부 1명씩을 고용하고 노동력도 외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노동력이 부족해질 지경이었는데 이란은 오일쇼크 직전에 3000만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전 계층에 골고루 퍼지지 않았다.[5] 테헤란 도심부에는 특이한 버스전용차선이 존재한다. 전용차로는 다른 차선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일정한 간격마다 출입용 문이 있는데 그곳을 군인이 지키고 있으며 오직 특정한 버스만이 이 차선의 이용이 가능하다. 이 특이한 운영방식의 이유를 이란 현지인에게 물어보았는데, 1979년 발생한 이란 혁명 때문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혁명 중에 시위대 대응용 군부대가 악명 높은 테헤란의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제시간에 출동하지 못하여 혁명을 막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혁명정부는 비상시 군부대의 출동을 위한 도로(군부대에서 테헤란 중심부까지)를 확보하려고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였다고 한다.[6] 참고 자료: 유달승.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193~199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