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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제4대 샤한샤 나스레딘 샤 카자르 ناصرالدین شاه قاجار | |
<colbgcolor=#F16765><colcolor=#fff,#fff> 이름 | 나스레딘 샤 카자르 ناصرالدین شاه قاجار |
출생 | 1831년 7월 16일 |
카자르 왕조 타브리즈 | |
사망 | 1896년 5월 1일 (향년 64세) |
카자르 왕조 테헤란 | |
재위 기간 | 카자르 왕조 샤한샤 |
1848년 1월 3일 ~ 1896년 5월 1일 (48년) | |
전임자 | 모하마드 샤 카자르 |
후임자 |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 |
종교 | 이슬람 시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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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자르 왕조의 제4대 샤한샤.가장 오랫동안 페르시아를 다스린 군주들 중 하나다. 집권 초기에는 아미르 카비르 재상의 근대화 정책을 뒷받침하고 유럽식 문물을 받아들이려 시도하는 등 계몽군주의 면모를 보였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반대파의 꼬드김에 넘어가 아미르 카비르를 축출하고 근대화 정책을 철회한다. 이후 헛발질을 계속하면서 담배 전매권을 영국에 팔아넘기고 각종 이권들을 아낌없이 외세에 뿌리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면모를 보였다. 나스레딘 샤가 페르시아의 이른 근대화의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카자르 왕조는 나스레딘 샤 사후에도 점차 쇠락한다.
2. 통치
2.1. 재위 초기 : 미약한 개혁
전근대적인 사회제도와 후진적인 행정시스템으로 망해가던 카자르 왕조는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재위기에 미약한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848년 아버지 모하마드 샤 카자르가 드디어 세상을 떠나자 나스레딘 샤는 수석 가정교사이자 조언자였던 아미르 카비르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나스레딘 샤는 개혁주의자 아미르 카비르를 재상으로 세웠고, 1846년부터 시작되어왔던 하산 칸 살라르의 반란을 종결지었다. 당시 카자르 왕족이던 하산 칸 살라르가 모하마드 샤의 건강이 위중한 틈을 타 마슈하드와 호라산 지방 대부분을 장악해버렸는데, 나스레딘 샤의 중앙군이 1850년 봄에 마슈하드를 포위해 공성에 성공하면서 결국 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다. 이후 나스레딘 샤는 아미르 카비르와 함께 페르시아의 첫 근대적 개혁을 시도하면서 국내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그러나 그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비교 사건이 터졌다. 평범한 상인 계급 출신이던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어느 날부터 자신을 마흐디, 곧 새로운 시아파의 이맘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를 불리면서 나중에는 스스로를 신의 전령이라고 주장했다. 카자르 왕조의 폐단과 부정부패에 지쳐있던 사람들은 그 곁에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아랍어로 '문'을 뜻하는 '바압'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바비교도'들이라고 불렸다. 그는 페르시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교리를 설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 개혁을 제시했는데, 당연히 이런 그의 모습의 기존의 시아파 성직자들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성직자들은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를 하루빨리 감옥에 처넣으라고 탄원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나스레딘 샤는 그를 체포한 뒤 감호소를 바꾸어가며 여러 곳에 수감했다. 다만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타브리즈에서 배교죄로 재판받아 채찍질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그는 타브리즈에서 체리크 요새로 이송 수감되었다가, 1850년 중반에 아미르 카비르 재상에 의해 총살형으로 살해당했다. 2년 후에야 사형이 집행된 이유는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도가 확연히 떨어졌기 때문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일부 바비교도들이 나스레딘 샤의 암살을 시도했던 탓이 컸다. 이렇게 되자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의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고 수 만명이 끌려가거나 학살당했다. 한편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타브리즈로 다시 끌려와 1850년 7월 9일 병영 뜰에서 수 십명의 병사들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가 죽자 그의 추종자들은 두 분파로 나뉘어졌다. 첫 번째 무리인 아잘리파는 카자르 왕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1905년 혁명에 동참했고, 두 번째 분파는 수피 지도자였던 바하올라를 추종하면서 지금의 바하이교의 시작을 알렸다.[1]
페르시아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 '다르 올 포눈'의 전경.
나스레딘 샤는 재위 초반부에 야심찬 근대식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반쯤 파산 상태나 다름없는 위치였는데, 재정을 메꾸기 위해서 정부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한편 정부 예산과 샤의 개인용 자산을 구분했다. 지방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쳐부수며 기반을 다진 아미르 카비르는 조세 제도 개편을 통해 누락되는 세금을 모조리 거둬들이려 시도하기도 했다. 아미르 카비르는 성직자들의 사법부 개입 권한을 억제했고 여러 군사 공장들을 건설했으며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페르시아 최초의 근대식 신문을 발간하는 업적을 남겼다. 개혁의 동력이 떨어진 치세 중반부에도 나라 곳곳에 전신과 우편 서비스를 깔고 테헤란에 그랜드 바자르를 세우는 등 인프라를 확충했고, 국가 직속의 상비군을 늘렸으며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2]을 창설하며 근대식 군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나스레딘 샤 재위기 가장 큰 업적은 1851년 최초의 서양식, 근대식 교육 기관인 '다르 올 포눈'의 설립이다. 사실 나스레딘 샤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아미르 카비르 대재상의 업적에 더 가깝지만 어쨌든 다르 올 포눈은 중동과 페르시아를 통틀어 최초의 현대식 대학이었다. 서양식 근대 교육에 관심이 많던 샤는 경제학, 언어학, 의학, 수학, 법률, 지리, 역사 등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도록 했고, 나중에 추가적인 확장을 할 수 있도록 다르 올 포눈을 도시 외곽에 지으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아미르 카비르는 저멀리 빈에서부터 직접 유럽인 교수들을 초청할 정도로 다르 올 포눈 창립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아미르 카비르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재정 개선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연금 수급자들의 연금 지급을 중지한 일은 수많은 기득권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벌인 일이었고, 울레마[3]들이 자신의 모스크나 사원에서 범죄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고자 한 시도는 엄청난 반대 끝에 반쯤 무산되고야 말았다. 마찬가지로 사법부에 성직자들의 입김을 억누른 것도 아미르 카비르에 대한 여론을 악화하는 또다른 요인이 되었다. 결국 대왕대비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반대파들의 연합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나스레딘 샤를 살살 꼬셔서 결국 아미르 카비르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페르시아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개혁에 열심이었던 아미르 카비르가 1852년 1월 10일 살해당하고 말자 페르시아의 이른 근대화의 기회는 완전히 물건너가고야 말았다.
페르시아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나스레딘 샤의 성향도 한몫했다. 기본적으로 그의 개혁은 독단적이고 남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방향이었기에 수많은 반대 세력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는 국민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장악하는 데에도 실패했고 국민들이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납득하게 만드는 데에도 실패했다. 게다가 왕가의 권위도 너무나 약했다. 페르시아는 특성상 부족들이 지역을 휘어잡고 있는 상태였고 이들은 모두 자치적인 군대를 데리고 있었다. 반면 나스레딘 샤의 친위군은 즉위 당시 겨우 3,000여 명에 불과했다. 개혁에 가장 필수적인 무력이 부족했으니 당연히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지기란 불가능에 더 가까웠다. 그가 개교시킨 다르 올 포눈은 입학 정원이 너무나도 적었으며, 조세 개혁은 했지만 징수원의 숫자 부족으로 기껏 거둬들인 세입이 재무부가 아닌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세리들은 세금을 남용했고 정부는 썩어빠졌다는 평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2.2. 담배 불매운동
아미르 카비르를 실각시킨 나스레딘 샤는 전형적인 암군의 면모를 보이며 국내 이권을 외세에 거리낌없이 팔아넘겼다. 개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병크가 바로 이 담배 사건이었다. 나스레딘 샤는 1890년 3월 20일 50년 동안의 담배 전매권을 영국의 G. F. 탈버트 소령에게 팔아치웠다. 그 대가로 탈버트 소령은 연간 이익의 4분의 1을 샤에게 납부하고 자본에 대한 5%의 배당금과 연간 15,000파운드, 현재 가치로 31억 원 정도를 매년 바치면 되었다.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 전국민이 골초인 나라에서 담배 전매권을 팔아치운 미친 짓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페르시아에서만 나는 희귀한 담배 품종들은 상당한 가치를 가진 산업이었는데, 이 품종들을 수출할 길이 막혀버렸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모든 담배 농사꾼들은 먼저 전매회사에 강제로 담배를 매매해야 했고, 페르시아인들은 그 회사에서만 담배를 사서 피울 수 있었다. 담배 회사가 판매하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해결 방법은 없었다.당시 담배 농업에 종사하는 페르시아인은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샤가 멍청하게 담배 전매권을 팔아버리면서 이들의 생업에는 치명타가 가해졌고, 페르시아 농부들의 평균 수입은 수직하락했다. 이제는 자신이 재배한 담배의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었고 키우는 담배의 양도 일일이 통제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샤가 대중들 몰래 체결한 이 조약이 국민들에게 공개되자 당연히 엄청난 분노가 터져나왔다. 샤는 조약을 밀어붙였지만 테헤란, 이스파한 같은 주요 대도시들에서는 플래카드와 함께 대중 시위들이 벌어졌다.
담배 시위를 담은 그림.
1891년 봄부터 본격적인 시위들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소농민과 일부 담배 판매업자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성직자들이 가담하자 그 규모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불어나게 된다. 성직자들도 만약 샤가 이 정도의 양보를 해준다면 외세가 페르시아에 더욱 깊숙이 침투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조약이 코란에 나온 일할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조약을 당장에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성직자 계급들이 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자 시위는 거세게 불어났다.
시위는 1891년 12월 페르시아의 최고 이슬람 권위자인 미르자 하산 시라지가 담배 사용을 금하는 칙령 즉 '파트와'를 발표하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테헤란의 시민들은 담배 불매운동을 펼쳤고 이 불매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사람들은 바자르와 시장들의 문을 닫았다. 나스레딘 샤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시도했지만, 만일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시 안그래도 영국의 페르시아 담배 산업 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던 러시아 제국이 이를 빌미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우려에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어찌나 불매운동이 강력했던지 심지어 샤의 하렘에 머무르던 여인들조차 담배를 끊었을 정도였다. 평소 페르시아인들이 수입의 3분의 1을 담배 구매에 썼고 라마단 기간에도 빵을 안먹을지언정 파이프에 담배 채우는 일만은 꼬박꼬박 지켰던 걸 생각하면 이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나스레딘 샤는 1892년 1월 결국 담배 전매권 판매를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담배 전매권 판매가 취소되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는 조약 파기로 인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만 했는데, 약 50만 파운드, 인플레이션을 넣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016억 원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스레딘 샤는 국민들에게 강제로 굴복했다는 모욕감에 더더욱 폐쇄적인 성격이 되었고, 재위 말기에는 어떠한 형태의 서양 여행이나 서양식 교육도 모두 금지하는 등 개혁과는 거리가 있는 망한 정책들만 골라서 펼쳤다.
2.3. 영국과 러시아의 충돌
나스레딘 샤가 알아서 내정을 개판으로 만들고 있던 와중, 한창 전세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페르시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외교적 전쟁을 벌였다. 서로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나마 개혁 성향이던 아미르 카비르 대재상이 집권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이같은 상황이 덜했다. 그는 영국이나 러시아나 둘다 신뢰하지 않았으며 둘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로 실리를 추구했다. 아미르 카비르는 러시아와 영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러시아인들이 아스트라바드 지역에서 병원과 무역소를 운영할 수 없게 만드는가 하면 카스피 해 남동쪽의 아슈라데 섬을 불법점거하던 러시아인들을 쫒아냈다. 영국에게도 마찬가지라 페르시아 만을 통과하는 페르시아 선박에 대한 영국의 취조권을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미국, 오스트리아 제국 등 페르시아와 접점이 없었던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수립하려 노력했지만... 이를 고깝게 보던 영국과 러시아가 힘을 합쳐 아미르 카비르를 몰아내면서 페르시아의 외교 상황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나스레딘 샤는 집권 초기인 1856년에 헤라트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파트 알리 샤 시절에 러시아에 빼앗긴 캅카스 지방을 되찾기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기에 헤라트라도 다시 먹어보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이에 극렬히 반발했다. 이미 카자르 왕조가 반쯤 친(親) 러시아 세력이라 보고 있었던 영국이 페르시아의 헤라트 공격은 곧 인도 제국에 대한 위협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카자르 왕조에게 헤라트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으나 나스레딘 샤가 이를 듣지 않자 바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를 '앵글로-페르시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영국은 페르시아 만을 공격해 강을 따라 도시들을 연달아 함락하며 북상했다. 화들짝 놀란 나스레딘 샤는 그제서야 강화 협상을 시작했고, 3월 4일 '파리 조약'을 맺는 굴욕을 맛봤다. 카자르 왕조는 파리 조약으로 인해 헤라트에서 철군해야만 했고,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인정해주는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페르시아의 대(對) 아프가니스탄 영향력이 모조리 날아간다.
나스레딘 샤는 1873년, 1878년, 1889년 유럽을 연달아 방문하면서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근대 페르시아 군주'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그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서양의 발전된 근대적 문화를 즐겼지만 정작 개혁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스레딘 샤는 첫 유럽 순방을 떠나기 1년 전인 1872년에는 영국의 줄리어스 데 로이터 남작에게 페르시아 전역의 도로, 제분소, 전신, 공장, 자원 등에 대한 통제권을 팔아넘겼다. 로이터는 그 대가로 5년 간의 매출과 20년 간의 순이익의 60%에 해당하는 금액을 나스레딘 샤에게 지불했다. 물론 페르시아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손해였지만 나스레딘 샤는 그딴건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시아에서 로이터 남작 개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것을 우려한 영국 정부에서 이를 중단시키면서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허나 확실한 건 이따위 조약을 좋다고 맺을 정도로 당시 카자르 왕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나스레딘 샤와 그의 아들 모자파르 앗딘 샤의 재위기는 한창 그레이트 게임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로서, 카자르 왕조는 그레이트 게임의 가장 대표적인 희생국들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1828년 체결된 투르크만차이 조약 이래 야금야금 페르시아 영토를 먹어갔다. 카자르 왕조가 곧 멸망할 수준까지 약해지자 러시아는 나중에 전략을 바꿔 페르시아를 지원해주는 척 하며 물밑에서 조종하는 수법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방법으로 거의 1세기 가까이 페르시아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영국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의 남하를 신경질적으로 경계하던 영국도 페르시아에 가까이 접근했는데, 페르시아 궁정은 결국 러시아와 영국의 은행가들에게 시달리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1879년에 러시아 장교들이 페르시아 궁정에 진입한 이래 90년대에는 러시아인들이 대놓고 궁에서 설쳤고, 영국인들도 이에 질세라 페르시아의 주권을 무시한 채 활보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경쟁적으로 페르시아에 전신, 철도 등을 깔며 이권 침탈을 가속화했다. 외세의 간섭이 이어지자 카자르 왕조의 인기는 바닥을 쳤는데, 오죽하면 영국인들이 영국 정부에게 '우리가 나가면 이 왕조는 바로 엎어질 것이다'라고 보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나스레딘 샤는 1896년 암살당했다. 앞선 1891년 샤는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를 담배 불매운동을 선동한 혐의로 추방했다. 아프가니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지만 오스만의 황제와도 마찰을 빚으면서 이스탄불에서 허망하게 사망했지만, 페르시아에 남아있던 아프가니의 추종자였던 미르자 레자 케르마니가 나스레딘 샤에게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평소 나스레딘 샤를 증오하던 미르자 레자 케르마니는 1896년 5월 1일, 나스레딘 샤가 테헤란 인근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노리고 그를 총으로 쏴 암살해버렸다.[4] 나스레딘 샤가 죽자 그의 후계자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가 새로운 페르시아의 샤한샤로 즉위했다.
3. 여담
- 유럽식 문물을 상당히 좋아했다. 특히 사진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데, 페르시아 최초의 사진가들 중 하나로도 꼽힌다. 어찌나 좋아했는지 유럽에서 직접 사진술을 배워와 하렘의 여자들을 이리저리 찍어대기를 즐겼다고. 골레스탄 궁전에 사진 스튜디오를 세워 머무르는가 하면 시종들과 신하들에게도 사진술을 배울 것을 장려하는 수준이었다.
나스레딘 샤가 가장 좋아하던 소년 시종 '아지즈 알 술탄'을 담은 그림. 황제가 직접 1892년 6월에 그렸다.
- 잉크로 그리는 펜화 전문가였다. 전문적인 교육을 따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펜화 그림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 중 몇몇개는 아직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 시인을 자처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그가 지은 약 200여 수의 시들이 보존되어 있지만 딱히 시적으로 뛰어나지는 못한다. 역사와 지리에도 관심이 많아 개인 도서관에 관련 장서들을 대거 보유했었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둘 다 알고 있었지만 두 언어 모두 유창하지는 못했다.
- 흔히 그의 하렘을 찍은 사진이 유명하다. 보기 흉할 정도로 뚱뚱한 여인이 '페르시아 최고 미인'이라는 짤로 인터넷에 돌아다니기 때문.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사실이 아니며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날씬하고 갸름한 여인들을 좋아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카자르 왕조 문서 참조.
[1] 아잘리파가 결국에는 급진적인 해석을 포기하고 다시 12이맘파로 합류한 것과 다르게, 바하이교도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이슬람의 분파가 아닌 별개의 종교라고 창립 초기부터 주장했기 때문에 이슬람과는 아예 다른 종교로 분류되고 있다. 바하이교 신도들은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를 '바압'이라고 부르며, 그가 예수와 후세인의 환생이라 주장한 적이 없고, 대신 에녹과 요한을 계승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2] 이름만 들어도 알겠지만 러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3] Ullema. 이슬람 율법학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카자르 왕조 초기부터 왕조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왕권 강화에 끊임없는 걸림돌이었다.[4] 살짝 멀리서 총을 쐈기 때문에 나스레딘 샤가 조금만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으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유언은 '만약 내가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통치 방식을 바꿀텐데....'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그대로 죽어버리면서 나스레딘 샤의 통치는 거기서 끝나버렸다.[5] 지도자로 나오기에는 부적합한 암군이지만 카자르 왕조가 워낙 무능한 지도자들밖에 없었는지라 초반에 개혁시도라도 했던 이 인물이 지도자로 나오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