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0:33:14

쿠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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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과정
3.1.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3.2. 그란마 호 상륙 작전3.3. 야과하이 전투
4. 혁명 후
4.1. 카스트로 정부의 개혁4.2. 쿠바 미사일 위기4.3. 에스캄브라이 봉기
5. 여담

La Revolución cubana

1. 개요

「그런데 말야, 신보안법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킨 건 뭐고 공산국가가 된 큐바를 정부가 공식 승인한 건 또 뭐야. 그런 앞뒤 안 맞는 모순이 어딨어?」[1]

누가 갑자기 내놓은 말이었다.

「그래, 나도 그걸 이해 못하겠어. 이북 공산주의는 가까이 있어 적이고 큐바 공산주의는 멀리 있으니까 동지라 그거야 뭐야.」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의 분위기는 금세 진지해졌다.

「그거 혹시 미국이 작용한 거 아닐까.」

「미국? 글쎄, 미국의 입장에서는 큐바가 공산화된 게 배꼽 밑의 혹일 텐데.」

「아니야, 그 정도면 좋게? 사타구니 사이에 난 종기지.」

「그런데 참 이상해. 어떻게 바로 미국 코밑에서 공산국가가 생겨나지?」

「그러게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거지. 멀리 떨어진 쏘련하고 으르렁거리느라고 발밑에서 꽹과리를 치는지 장구를 치는지 모른 거야.」

「좌우간 카스트로 그 친구 물건은 물건이야. 이 시대에 공산혁명을 성공시켜 거대한 미국의 불알을 잡고 늘어지게 생겼으니.」

「그건 우연한 성공이고, 앞으로 미국이 가만 두고 보겠어? 마음만 먹었다 하면 그까짓 것 하루아침일 텐데.」

「그런 황당한 소리 말어. 공산혁명이 무슨 어린애들 병정놀이야? 목숨을 내거는 그런 거사일수록 역사적 필연성과 당위성이 없이는 성취가 불가능한 것 몰라? 그리고 어떻게 미국이 하루아침에 해치우나, 큐바를 치는 건 곧 쏘련을 치는 건데. 그러면 세계3차대전 폭발이야.」[2]

「그럼 카스트로가 장님 문고리잡기 식으로 성공했다는 말이 떠도는 건 뭔데?」[3]

「그야 극성 반공주의자들이 화나고 속쓰려서 토해내는 감정적 발언이지. 큐바는 말야 기존 정권의 부패와 타락, 그에 대한 민심의 불만과 이반, 혁명저항세력의 등장, 민심의 동조와 지지, 이런 함수 관계 속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한 역사현실을 직시해야 된다구.」

「그럼 우리 현실도 지금 엉망인데, 여기서도 그게 가능하다는 거야?」

「이런, 비약이 너무 심하군. 우리와 큐바는 정권 부패와 민심 동요는 같을지 모르지만 전혀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잖아. 6.25로 국민 절대다수가 공산주의에 학질을 뗀 것이고, 그리고 미군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점 아니겠어. 우리 현실은 많이 달라.」[4]
조정래한강(소설) 1권 중에서 남천장학사를 운영하는 강기수 의원에게 세배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법대생들의 대화. 1959년 음력설(2월 8일) 닷새 뒤(2월 13일) 시점이다. 강기수 의원이 고향을 다녀오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세배를 늦게 받는다.[5]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쿠바 제1공화국에서 진행된 혁명. 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다.

쿠바 혁명은 일반적으로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의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이 주도했는데 결국 바티스타의 친미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메리카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세웠다.

공산혁명 이전에도 1933년 마차도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있었고 이때 혁명을 뒤엎고 친미 정권을 세운 자가 바로 풀헨시오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통칭 바티스타 중사다.[6]

바티스타 정권은 1944년 실각한 후 1952년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했지만 국내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정권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뽑힌 정통 정부였던 데다 1933년과 달리 국내외 사정도 안정되어 있었고 실업률, 경제, 모든 것이 안정선을 달리고 있었다. 바티스타의 쿠데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권력욕으로 비춰졌다.

2. 배경

쿠바는 19세기 말까지 스페인식민지였다.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 쿠바 주민 60~70% 가량은 크리오요라고 불리는 백인들이었고 나머지는 아프리카계, 메스티소와 같은 유색인종이었다.# 19세기 말에 호세 마르티 같은 크리오요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지만 그는 1895년 스페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식민지 독립운동은 번번이 스페인군에게 토벌되었다.[7] 하지만 이 지역에서 세력 확대를 꾀하던 미국이 스페인을 약화시키기 위해 쿠바의 독립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는데 1898년 쿠바 독립군을 지원하던 미국 전함 메인호가 아바나 항에서 원인 미상의 이유로 폭발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개시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은 5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스페인 제국이 해체된 후 쿠바는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미국은 쿠바에 군사통치를 실시했으며 1902년 철수 이후 명목상 독립했지만 내정 개입은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내정 개입을 가능하게 한 것은 1902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만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이었다. 이 법에 따라 미국은 쿠바에 미 해군과 육군의 군사 기지를 설치할 권리, 쿠바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미국 철수 이후 쿠바 공화국이 출범하였으며 이 공화국은 줄곧 친미 정책을 고수했다.

1930년대 들어서 중남미 국가에 대한 선린정책을 주장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플랫 수정안’은 무효화되었다. 선린정책을 표방한 이후 미국은 직접적인 무력 개입은 자제했지만, 카스트로 혁명 이전까지는 쿠바 내 대다수 생산시설을 소유하는 등 경제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1950년대 말 미국 기업은 쿠바 소재 광산의 90%, 공공 서비스 부문의 80%, 제당 산업의 40%, 은행 예치금의 25%를 소유했다.# 비록 미국의 영향력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혁명 이전 쿠바는 상당히 잘 사는 나라였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특히 부유한 편에 속했다. 1950년대 쿠바의 1인당 GDP는 이탈리아와 거의 비슷했고 공업 종사자의 임금도 급격히 상승했다. 여기에 미국 마피아와 손잡고 아바나에 호화로운 호텔 여러 채를 건설하는 등 아바나를 관광지로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이른바 라틴아메리카의 라스베가스로 만들었다. 혁명 이전 쿠바에 대한 찬사는 혁명 후 미국으로 이주한 쿠바계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이른바 "지난 날의 쿠바(Cuba de ayer)" 신화에 상당 부분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지옥과 같은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도 심각해졌다. 총인구 600만 명 중 50만 명이 실업 상태에 있었고, 도시의 문맹률은 11%인데 반해 농촌의 문맹률은 41.7%에 달해 도농격차도 극심했다.[8] 여기에 쿠바 수출의 80%를 차지하던 설탕의 가격이 1950년대 내내 요동치면서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요인들은 자연스레 혁명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였다.

3. 전개 과정

3.1.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카스트로는 1년 동안 모집과 훈련 그리고 계획을 수립했는데, 당시 무장봉기에 가담한 병력은 200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로 구성됐다. 대부분은 학생이거나 졸업생이었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의 나이가 26~27살이었는데, 대원들 나이대가 대략 그 정도였다. 또한 습격에 참가한 사람 중에는 피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도 있었다.

몬카다 병영은 피델 카스트로의 고향인 오리엔테의 산티아고 외곽에 위치했다. 무튼 이들의 계획은 새벽에 몬카다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배치된 1,000명의 병사들을 불시에 기습하여 그들의 기관총과 탱크, 장갑차, 최신 소총, 탄약을 포획하고 그 다음 라디오 중계소를 장악하여 쿠바 민중에게 독재자 바티스타에 대항해 일어선 반란군을 지원하도록 호소하는 것이었다.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에서 무장봉기해 몬카다 경찰서를 습격했다. 그러나 습격에 실패해 카스트로를 포함한 지도부들이 잡히고 말았다. 당시 바티스타 정권은 군인 1명이 사망하면 게릴라 10명의 총살로 보복했다. 그런데 마침 카스트로를 생포한 군 수색대장이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것 덕분에 즉결처분은 면할 수 있었다. 법정에서 15년형을 선고받은 카스트로는 "너희들이 현재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고 말하는 당당함을 보였다.

3.2. 그란마 호 상륙 작전

바티스타는 뜨겁게 달아오른 여론에 굴복하여 카스트로를 석방했고 카스트로는 멕시코망명했다. 망명 후 카스트로는 군대를 정비하기 위해서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퇴역장교 알베르토 바조를 교관으로 삼아 기습 작전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혁명으로 독재 정권이 종식된 중남미의 과테말라에서는 정당한 선거로 당선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이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사주한 CIA의 공작으로 인한 쿠데타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과테말라에서 여행하며 머물던 체 게바라는 환멸을 느끼고 혁명에 투신하여 멕시코로 떠났는데 그리고 거기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만났다. 이렇게 해서 정예화된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1956년 82명의 동지들과 함께 그란마(Granma)호를 타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다시 쿠바로 잠입했다. 그러나 이를 알고 미리 기다리던 군에 의해 일행은 섬멸되었고 가까스로 도주한 10여명만이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기나긴 게릴라전을 시작하게 된다.

1957년 미국의 허버트 매튜스 기자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카스트로와 인터뷰를 하고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카스트로는 하루아침에 무명의 게릴라에서 독재에 항거 투쟁하는 ‘현대판 로빈 후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지하 세력을 구축해 그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다음은 상륙에 성공한 혁명군의 명단이다.
  • 대장 피델 카스트로
  • 부장 라울 카스트로[9]
  • 부장 에르네스토 게바라
  • 대원 우니베르소 산체스(Universo Sánchez)
  • 대원 후안 알메이다 보스케(Juan Almeida Bosque)
  • 대원 시로 레돈도(Ciro Redondo)
  • 대원 라미로 발데스(Ramiro Valdés)
  • 대원 아르만도 로드리게스(Armando Rodríguez)
  • 대원 레네 로드리게스(René Rodríguez)
  • 대원 프란시스코 곤살레스(Fransisco González)
  • 대원 라파엘 차오 산타나(Rafael Chao)
  • 대원 에피헤니오 아메이헤이라스(Efigenio Ameijeiras)
  • 대원 칼릭스토 모랄레스(Calixto Morales)
  • 대원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 대원 레이날도 베니테스(Reinaldo Benítez)
  • 대원 성명불명
  • 대원 성명불명

이후 추가로 생존해서 합류한 6명의 대원은 다음과 같다.
  • 대원 호세 모란(José Morán)
  • 대원 루이스 크레스포(Luis Crespo)
  • 대원 훌리오 디아스(Julio Díaz)
  • 대원 칼릭스토 가르시아(Calixto García)
  • 대원 카를로스 베르무데스(Carlos Bermúdez)
  • 대원 성명불명

생존한 혁명군은 아바나를 향해 진격하면서 수많은 게릴라전을 펼쳤고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의료와 교육을 서비스했다. 특히 체 게바라가 본래 의료인이었다는 점에서 변변찮은 병원과 의사도 없었던 마을 주민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그 대가로 혁명군은 마을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그렇게 혁명군은 마을을 이용해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마을에 들러갈 때마다 바티스타 정권의 독재와 공산주의를 가르쳤다. 이미 폭정에 지쳐 있었던 쿠바인들은 그들의 교육에 크게 동조하고 혁명군의 뒷받침이 됐다. 심지어 대학교에서 첨단장비를 이용하여 혁명군의 전투를 돕기도 했다. 혁명군은 아바나로 향하면서 동지를 계속 모아 갔다.

3.3. 야과하이 전투

쿠바의 도시 전체에 탄탄한 지하 무장 세력을 구축한 카스트로 혁명군은 1958년 12월 체 게바라를 선봉으로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기선을 제압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전국에 숨어 있었던 지하 혁명 세력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나 정부군을 습격했다. 사방에서 적을 맞이한 바티스타 정부군은 전투의욕을 상실하고 줄지어 투항하게 되었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혁명군은 마침내 1958년 12월 31일 아바나에서의 시민봉기와 함께 아바나를 함락시켰고 독재자 바티스타는 쿠바를 떠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1959년 1월 3일 혁명군이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면서 쿠바의 혁명은 마침표를 찍었다.

4. 혁명 후

4.1. 카스트로 정부의 개혁

카스트로는 2월 16일 정권을 잡은 뒤 제일 먼저 미국계 기업과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했다. 이어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여 대다수가 미국인 소유로 되어 있었던 설탕, 석유 회사를 몰수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고 집단농장 운영을 통해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동시에 군비를 강화해 미국의 침공에 대비했다. 집단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문맹 퇴치 정책을 통해 모든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교육과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보건과 복지정책 향상을 통해 중남미 지역에서 최고의 의료 서비스와 주민복지 정책을 추구했다. 60년대 말 일부 종속이론가들은 쿠바를 그들 이론의 실천국가로 간주했다.

4.2. 쿠바 미사일 위기

처음에는 쿠바 혁명의 개혁과정을 주시하기만 했던 미국은 1960년 7월부터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하자 경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1961년 1월에 국교단절까지 했다.

카스트로는 이에 미국과 대립하는 소련과의 관계 확립에 주력했다. 소련 정부는 쿠바 혁명정부를 미국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쿠바혁명정부방위위원회를 발족시켜 카스트로 지원에 나섰고 대규모 자문단을 쿠바에 상주시켜 미국과의 대립을 본격화했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카스트로 제거를 위하여 비밀리에 마이애미에 거주하던 쿠바 출신 젊은이들을 규합한 후 CIA 요원들의 지도 아래 군사훈련을 시켜 쿠바 침공을 시도했다. 1961년 CIA 요원들에게 특수훈련을 받은 1,400여 명의 쿠바 출신 부대는 피그만 침공을 감행했다. 이때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과소평가하여 금방 전복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피그만에 침공한 부대원 중 100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전원이 카스트로의 혁명군에게 생포되는 참패로 끝났다. 피그만 침공으로부터 1년 반이 지난 후 카스트로는 5,3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을 받고 포로들을 미국에 송환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쿠바 관계는 더욱 멀어졌고 미국은 미주기구를 통해 중남미 국가들이 쿠바와 외교관계를 끊도록 했다.

미국의 압박에 불안을 느낀 카스트로는 소련의 원조를 받아들였고, 소련은 미국의 코앞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는 소련에 미사일 기지를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소련은 쿠바에 설치하는 미사일이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용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은 쿠바 해역 밖에서 미사일을 선적하고 쿠바로 오는 소련 함대를 봉쇄했다. 소련 선박들이 미국이 설정한 해상 봉쇄선을 넘을 경우 소련과의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최후통첩이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전달되자 미소 양국은 극적으로 타협했다.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는 대신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이로써 피델 카스트로 정권의 체제 안전보장이 이루어졌다.

4.3. 에스캄브라이 봉기

쿠바 혁명 이후 중부 산악지대 에스캄브라이(Escambray) 산맥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의 정부에 반대하는 반군의 봉기가 발생했다. 1965년까지 이어진 이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00명에서 7,000명이 살해되었다.

5. 여담

수영선수 출신 배우 조니 와이즈뮬러는 하필 쿠바 혁명 당시 골프 대회에 초청을 받아 친구들과 쿠바를 여행하다가 카스트로의 군대에 붙잡혔다.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와이즈뮬러는 기지를 발휘해 자신이 타잔을 연기한 배우임을 알리려고 두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특유의 고함 소리를 냈고 알아본 병사들은 깜짝 놀라 그에게 인사를 청하며 사인을 받고 풀어줬다.

영화 대부 2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쿠바 혁명이다. 하이먼 로스를 비롯해 쿠바의 이권과 관계된 마피아 두목들과 미국인 사업가들은 혁명군을 과소평가하나 주인공 마이클 콜레오네는 혁명군의 승리를 점치고 사업에서 발을 뺀다. 1959년 새해를 맞이한 직후 바티스타가 사임을 표명하고 아바나가 혁명에 휩싸이며 미국인들이 미국 대사관 등을 통하여 탈출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쿠바 혁명을 소재로 한 중국 노래 아바나의 아이가 있다.

SNK게바라라는 게임의 배경이 쿠바 혁명이다. 애초에 내용 자체가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상륙 이후 최종 보스 바티스타를 축출하는 것이다.


[1] 쿠바가 아니라 영어식 발음인 '큐바'라고 표기했다.[2] 실제 피델 카스트로는 이후로도 50년 넘게 집권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독재자가 되었다. 심지어 조정래가 소설을 발표한 1998년에는 아직도 국가이사회 위원장으로 집권중이었다.[3] 무모하게 도전하여 성공했다는 뜻이다.[4] 실제 냉전기 대한민국 반정부운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공산혁명보다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주를 이루었다.[5] 이후 2월 16일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에 취임한다.[6] 바티스타 중사가 쿠데타를 이끌어 쿠데타 성공 뒤 군최고 통수권자가 되었고 1940년까지 쿠바의 최고권력자로 바지 사장 대통령 뒤에서 실권을 잡고 있었다가 1940년에 직접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선 장성 계급은 명예직이고 실무는 영관급에서 하는 경우가 제법 흔하기 때문에 무하마르 알 카다피처럼 대령이 집권하기도 하지만 위관도 아닌 부사관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은 정말 희소하다.[7] 영토가 굉장히 방대하고 식민지 독립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져 스페인 제국의 제어 능력이 붕괴되어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하였던 멕시코와 중앙/남아메리카 국가들(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페루,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칠레 등)과 달리 쿠바는 4면이 바다에 갇힌 고립된 지형의 섬나라였기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 독립운동 진압과 통제가 비교적 수월했다.[8] Jeffries, C. Illiteracy: A World Problem. London: Pall Mall Press. 1967. Print.[9] 대장 피델의 친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