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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재통일, 1990년. |
1. 개요2. 명칭3. 동유럽(동구권)
3.1. 헝가리 인민공화국3.2.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3.3.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3.4. 폴란드 인민공화국3.5. 독일민주공화국3.6. 불가리아 인민공화국3.7.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3.8.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3.9.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4. 영향과 의의5. 해결되지 못한 점들6. 대중매체7. 여담8. 관련 문서[clearfix]
1. 개요
냉전의 피날레를 장식한 사건. 소련의 위성국이자 소련과 중국을 제외한 사실상 유일한 제2세계였던 동유럽의 수많은 공산권 국가들의 울분이 곳곳에서 터지기 시작하며 최종적으로 공산국가의 수장이었던 소련이 멸망하면서 인류의 공산 시대가 끝났다.[1]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에서는 공산주의가 완전히 몰락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상당수 자리잡고 정치적으로 일당 독재를 유지한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도 시장 경제를 도입하는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는 사실상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시초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 것으로 공산주의에서 벗어나더라도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1989년 초 폴란드, 헝가리에서 시작되었고 1992년 5월 알바니아에서 열린 총선에서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패배함으로서 혁명은 막을 내린다. 알바니아의 경우는 1997년 내전에 준하는 소요 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후에는 치안 회복 및 경제 재건에 있어 상당한 시간을 소모해야 했으며 구 유고슬라비아권은 2001년 마케도니아 소요 사태가 끝날 때까지 10여년 가까이 유혈 사태를 겪어야 했다. 슬로베니아도 유고 내전의 영향으로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에 휩싸였으나[2] 이후 독립하여 새로운 시작을 하였으며 현재 슬로베니아는 무려 일본보다도 1인당 GDP가 높은 동유럽 최부국이다.
2. 명칭
1989년에 시작되어 동유럽과 그 인근에서만 일어나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도 이곳의 영향을 받아서 나타난 항쟁들이 나타나서 1989년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동유럽 혁명 역시 이 1989년 혁명 중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3]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도 동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 지역 및 인근 지역에서도 일어났기 때문에 단순히 1989년에만 나타났던 사건은 아니었다. 동구 혁명 혹은 동구권 혁명이라고도 부른다.3. 동유럽(동구권)
3.1. 헝가리 인민공화국
사망 31년 만에 공식적으로 치러진 너지 임레의 국장. 멀레테르 팔(Maléter Pál)을 포함하여 헝가리 혁명 직후 소련에 의해 처형당한 너지 임레의 측근 4명의 장례식도 같이 열렸다. 부다페스트, 1989년 6월 16일 |
카다르의 사망 몇 개월 전인 1989년 1월 12일 헝가리 의회는 집회, 결사의 자유와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보장하고 개정된 선거안을 통과시켰으며 2주 후인 1월 29일에는 그동안 폭동으로 치부되었던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민중 봉기로 재규정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시민 및 비 공산계열 준정당들이 결성되기 시작했으며 헝가리의 집권 여당인 청년민주동맹(Fidesz)도 오르반 빅토르를 위시한 시민 운동가들에 의해 이때 창당되었다. 5월 2일부터 헝가리는 자국과 오스트리아 간 국경에 쳐져 있던 철조망을 철거하기 시작해 실질적인 국경 개방을 단행했는데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탈출을 사실상 묵인하여 동독 정권을 붕괴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6월 16일에는 31년 만에 너지 임레가 복권되어 부다페스트에서 국장 및 이장식이 열리면서 헝가리 혁명이 폭동이 아닌 혁명이라는 것이 의회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공식 인정되었다. 9월 18일 열린 원탁 회의에서 헌법 재판소 설치 및 다당제에 기반한 총선 실시가 합의되었으며 10월 7일 헝가리 사회노동자당이 당명을 헝가리 사회당으로 개명했다. 이듬해인 1990년 3월 24일 총선 및 대선이 동시에 치러지고 헝가리 인민공화국이라는 국명도 헝가리 공화국으로 개명되어 헝가리에서 공산주의 체제는 완전히 소멸했다.
3.2.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부쿠레슈티, 1989년 12월 |
특이하게도 똑같이 중공업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서 서방세계로부터 무리하게 큰돈을 대출했다가 외채에 시달리던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다르게 루마니아는 외채를 전부 갚았다. 그러나 이는 수입은 일체 안 하고 수출만 밀어붙이던 괴악한 경제 계획의 산물로 이로 인해 인민들의 생활 수준은 동구권에서도 알바니아에 뒤이은 최악으로 떨어졌다. 흔히 루마니아 하면 동유럽의 후진국이라는 평가는 수출에만 올인하는 해괴망측한 경제정책에서 기인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당시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해 중진국 상위권 국가로 회복되었다.[4]
이런 가운데서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통제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소소한 시위도 유혈 진압하여 국민들의 저항을 원천 차단하였기 때문에 1989년 중순까지만 해도 루마니아는 끄떡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한 달이 지난 12월 16일 헝가리계가 많이 살고 있던 트란실바니아의 도시 티미쇼아라(Timișoara)에서 공산당 정부를 비판하던 개신교 소속 퇴케시 라슬로(Tőkés László, 1952~)[5] 목사가 정부의 강압에 의해 교구에서 사임하고 지역 주민들이 여기에 항의하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대규모 사상자를 낸 소위 티미쇼아라 사건이 터진 후 본격적으로 루마니아에도 저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12월 21일 이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차우셰스쿠가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관제 집회를 열었지만 이것이 시민들의 분노로 인해 역효과를 내고 마침내 다음날인 12월 22일 루마니아에서도 본격적으로 반차우셰스쿠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잔인한 독재를 싫어하던 군인들도 정권의 수혜를 입던 보안군 '세쿠리타테(Securitate)'를 제외하고 시민들 편에 서서 시민들을 도와주게 되었으며 이는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6]
이렇게 차우셰스쿠의 비밀 보안군과 무장군중, 정부군의 대결이 일어나면서 루마니아의 정권 타도는 인명살상이 벌어지는 교전양상으로 치달았고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7] 결국 시민들에게 붙잡혀 체포당했다. 이어 그의 아내였던 엘레나 차우셰스쿠와 함께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처형됨과 동시에 보안군의 준동도 대부분 진압되었다. 이렇게 루마니아도 1989년의 마지막 주를 해피엔딩으로 장식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차우셰스쿠 처형 직후의 루마니아 모습을 보도하는 1990년 1월 5일 당시 MBC 뉴스 영상.
이 사건을 루마니아 혁명이라고 부르며 1989년 12월 25일 혁명 이후 루마니아인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인 민주화를 쟁취했다. 그리고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 부부의 처형을 끝으로 사형 제도도 폐지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광명엔 저의가 있든 아니든 그 빛을 가리려는 암막이 있는 법. 루마니아 민주혁명은 단락의 초입에서 명기했듯 동유럽 도미노 붕괴사상 유일한 유혈혁명이다. 급진주의에 경도된 유럽 사상계는 루마니아 민주화의 폭력성을 강조해 언뜻 사망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접근 이면에 혁명을 격하, 폄훼하는 경향이 존재해 왔고 이는 21세기에도 이런 낙인을 일소하는 과제를 루마니아 학계에 안기고 있다. 이런 과제는 루마니아 혁명 30주년인 2019년에 재차 대두되어 조명된 바 있다.[8]
3.3.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티라나에서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시위대, 1991년 2월 20일 |
같은 해 슈코더르(Shkodra)에서 이 같은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긴 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1990년에 들어서도 알리아를 위시한 집권 공산당은 타 국가들의 개혁 상황에서도 기존 스탈린주의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타 국가들의 소식이 음성적으로 알바니아 국내에 유통되기 시작했고 동구권의 개방 소식을 알던 국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져 갔다.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해를 넘긴 지 얼마 안 된 1991년 2월 20일 수도 티라나에서 시민들이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결국 알바니아 공산당도 굴복하여 같은 해 3월 1923년 이후 68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 선거를 실시했다.[15] 선거 결과 공산당이 승리하여 라미즈 알리아가 민주화된 알바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긴 하였으나 일당독재를 유지할 수는 없었으며 이듬해인 1992년 5월 다시 실시된 총선에서 공산당이 패하고 민주화를 주도했던 알바니아 민주당 소속 살리 베리샤[16]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동유럽 공산권 중에서도 최악의 폐쇄 정책을 펼친 알바니아 공산당은 정권을 잃었다.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알바니아는 극도의 사회 불안 및 궁핍에 시달려야 했으며[17] 이는 1997년 피라미드 사기 사건으로[18] 국민의 대부분이 재산을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하여 일으킨 내전 수준의 반정부 소요사태로 절정에 달했고 공산당에서 이름이 바뀐 사회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후 사회당은 재빨리 사태 이전 수준으로 알바니아의 경제 수준을 회복시키며 사회를 안정시켰고,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확실히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며 현재는 하위권으로나마 중진국 수준에 이를 정도로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3.4. 폴란드 인민공화국
1989년 2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열린 자유노조-공산당 간 원탁 회의, 바르샤바 |
그러나 이후 10년 가까이 같은 폴란드 출신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원 아래 반정부 투쟁은 계속 이어졌으며 바웬사는 가택연금 중이던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그 노력을 인정받았다. 폴란드 정부의 강력한 긴축정책과 노동자 탄압에도 경제는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명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1988년에 들어서면서 해빙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으며 1989년에 이르자 이러한 자유화 과정은 본격화되었다. 역사적인 공산당-자유노조간 원탁 회의 결과 6월 4일[21]과 6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 폴란드 인민 공화국 최초의 상하원 자유선거[22]가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원의 경우 자유노조가 원내 제2정당, 집권 공산당인 폴란드 통일노동당(Polska Zjednoczona Partia Robotnicza, PZPR)이 1위를 차지했다. 공산당은 "자유 선거에서 단 한 석도 승리하지 못했다". 당시 폴란드 하원 자유선거에서 자유노조는 개선의석 135석(전체 하원 의석의 30%) 전 석을 휩쓸었다. 공산당은 오로지 배정의석으로만 1위를 했을 뿐이다. 그나마도 위성정당[23]들이 국회가 열리자마자 공산당과의 연정을 해소하고 자유노조와 연정을 구성하기로 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상원에서는 100석 중 자유노조가 99석을 가져가는 초압승을 거두었다. 나머지 1석은 무소속인데 이후 자유노조에 합류했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직에는 원탁회의 합의에 따라 야루젤스키가 7월 19일 대통령에 선출되어 민주화된 폴란드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통일노동자당)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려다가 자유노조의 반발을 사 철회되고 자유노조 인사를 총리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실권은 개혁파로 완전히 넘어갔고 개혁의 지연과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은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다. 12월의 헌법 개정에서 국명을 폴란드 공화국으로 개명하고 사회주의 조항을 삭제했으며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더불어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10월에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amendment)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2대 폴란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1년에는 드디어 완전 자유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폴란드 공산당이었던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은 1990년 해산한 뒤 폴란드 사회민주당으로 재창당하였고 민주좌파연합을 거쳐 신좌파로 재개편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24]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이때까지 런던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망명 정부는 해체되었고 1935년의 폴란드 헌법 원문과 폴란드 대통령의 상징물 등이 레흐 바웬사에게 전달되었다.
3.5. 독일민주공화국
베를린 장벽 붕괴 다음날 소식을 전하는 서독의 공영방송 ARD의 뉴스 프로그램 타게스샤우. 1989년 11월 10일 |
3.6.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지프코프의 처벌을 요구하는 불가리아 시위대, 소피아, 1989년 11월 18일 |
3.7.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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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바츨라프(벤체슬라우스) 광장, 1989년 11월 27일 |
민주화 과정에서 둡체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일 정부 구성 협의에 실패한 체코와 슬로바키아 양측은 결국 1993년 1월 1일에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하는 소위 '벨벳 이혼'을 실행하게 되었다.
3.8.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옥상 위에서 파괴된 도시를 바라보는 크로아티아군 병사.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찍힌 사진이다. |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도 아래 동유럽 공산권에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영향력에 있지 않았던 유고슬라비아는 1980년 티토 사후 외채 문제를 겪게 되었고 해결책을 놓고 발흥하던 각 민족별 민족주의로 인한 분열 위기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다. 초기에는 일단 단합된 모습을 보이던 각 공화국의 지도층들도 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긴축적인 경제정책을 펼쳤지만 물가 상승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집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 인기를 잃어 갔다. 그러면서 각 공화국의 공산당 별로 각자도생을 도모했고 이 과정에서 내셔널리즘에 편승했다.
당시 내셔널리즘을 내세워서 입지를 단단히 굳힌 지도자로는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이 있었고 이외에도 마케도니아[29]의 키로 글리고로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등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세를 넓히고 있었다. 당시의 갈등 구도는 연방의 정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세르비아 대 경제권을 쥐고 있었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주가 되었다. 특히 1988년에 세르비아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오른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 주민의 민심을 얻은 것을 이용하여 시위를 조직해 몬테네그로, 보이보디나, 코소보 등의 서기장을 강제로 교체하는 데 성공했고[30] 유고슬리바아 내 6개 공화국과 2개 자치주 가운데 4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도 내셔널리즘 세력의 움직임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렇게 갈등이 커져가던 와중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90년 1월에 들어 본격적인 자유화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유고슬라비아는 구성국 별로 민주 총선을 시행이라는 결정을 했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대악수가 되고 말았다.[31] 구성국 별 총선에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제외하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10% 내외의 득표로 처참히 몰락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죄다 민족주의 정당들이 차지한 것이다.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슬로베니아 사회민주당[32]),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크로아티아 민주연합[33]) 등등 모조리 내셔널리즘 성향의 정당들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이 제일 가관이었는데 보슈냐크인의 민주행동당, 세르비아인의 세르비아 민주당, 크로아티아인의 크로아티아 연합당 등 민족주의 정당들이 득세했고 하필이면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였다. 그러자 보스니아의 내셔널리즘 세력들은 자기네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난리 부르스를 치면서 보스니아는 1990년 4월 민주 총선 이후 1992년 3월 1일 독립 선언 직전까지 2년동안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세르비아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사회당이 65%를 차지하였다.
자유화 논의와 더불어서 이미 발흥하기 시작했던 내셔널리즘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이라는 뇌관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4월에 실시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총선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이는 11월에 실시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마케도니아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세르비아 총선도 민족주의자들이 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물론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이는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34] 비슷한 시기에 초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시행한 경제개혁의 여파로 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고 각 공화국의 대통령들은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을 따르지 않게 되며 물가 상승은 재개되었고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이에 따라 각 공화국간 독립 요구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으로부터 이탈 및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 지옥의 문이 열리고 말았다. 이후의 전개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참고.
내전이라는 대규모 유혈 참극으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유고슬라비아는 7개국으로 분리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때의 충돌이 서로에게 뿌리 깊은 상처와 불신을 남겼다. 현재는 코소보를 제외한 구 구성국들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코소보는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사이에서 간헐적인 충돌이 벌어지고 있고 국제사회에서도 코소보의 독립국 인정 여부를 두고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3.9.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의 공산당 체제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몇 년 후 소련마저도 붕괴되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몰도바 등 15개 국가로 분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 붕괴 참조.4. 영향과 의의
동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35]의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멘에서는 사회주의가 종식되었고 남북이 통일되었다. 캄보디아도 1993년에 사회주의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다시 왕정으로 복고되었다. 미얀마는 국호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는 등 형식적으로는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했지만 억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던 새로운 군부독재 체제가 이어진다.공산주의가 완전히 약해지게 되었고[36] 이후 소련 붕괴에 영향을 주어서 1991년에 냉전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대한민국은 1989년부터 1990년까지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맺게 되었다. 또한 586 운동권 중 보수로 전향한 이들 상당수가 이 당시의 충격으로 전향한 경우가 많았다. 북한은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이웃들이 사라진 셈이다. 그리고 아시아 공산권의 경우 중국, 베트남, 라오스가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정치적으로는 일당 독재를 유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했다. 현재까지 공산주의를 계속 고수하는 쿠바도 2015년에 미국과 복교하면서 경제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펼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그리고 공산권 붕괴 후 동유럽의 경제는 오히려 한동안 악화되었고 다시 성장을 재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공산주의 시절 말기의 무능, 붕괴 후 혼란기,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동유럽이 서방에서도 할 수 없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험장이 되었던 탓도 있다. 체제전환 과정 동구권 국가들은 전반적으로 실업자는 급증했고,[37] 공산주의 시절 복지제도는 사라졌으며[38], 물가는 매년 수십~수백% 비율로 폭등했다.[39] 때문에 국민들은 민주화세력의 통치 하에도 나아지지 않는 경제에 실망했는데, 그 실망감이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몇몇 국가들[40]에서는 민주화 10년도 채 안 되어 공산당의 후신 정당이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잡기도 했을 정도였다. 1990년 당시 서독의 국민 소득은 15,000달러, 동독 10,000달러, 체코슬로바키아 8,000달러, 헝가리 6,000달러였으며 그 비율의 격차는 21세기 들어 오히려 커졌다. 가장 빨리 성장한 폴란드를 보아도 서독: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3:1이었으나 지금도 3:1이다.[41]
소련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1991년에 해체되었다.
우크라이나의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 또는 유로마이단 혁명 역시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당시 공산주의로부터 벗어난 구 동구권의 나라들도 우크라이나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4.1. 비슷한 시기 및 주변 국가들의 사건들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 과정을 거친 나라들인 필리핀에서 일어난 피플파워 혁명(1986년), 한국의 6월 항쟁, 대만과[42] 라틴아메리카의 민주화 시기보다는[43] 조금 뒤의 일이고 남아공의 민주화보다는 약간 앞선 일이다. 동유럽 및 동구권은 아니었지만 동구권 근처 남쪽의 그리스 역시 1974년에 군부들이 물러난 후 민주화가 이루어졌다.[44]소련이 붕괴함에 따라 저 멀리 아프리카에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어버리고, 멜레스 제나위가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함과 동시에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4.2. 동북아시아
4.2.1. 몽골 인민공화국
몽골 민주화 시위 당시 사진, 울란바토르, 1990년. 목마를 타고 확성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산자수릉깅 저릭이다. |
욤자깅 체뎅발의 뒤를 이은 몽골 인민혁명당 서기장 잠빈 바트뭉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모티브로 '신칠렐'이라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나 페레스트로이카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국민들의 큰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소련의 모스크바에 유학 중이던 대학생 차히아깅 엘베그도르지와 몽골 국립 대학교의 강사 산자수릉깅 저릭이 몽골 민주동맹을 결성해 1989년 12월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렸으며 이 시위는 다음해 1월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1990년 3월에 바트뭉흐를 포함한 몽골 정치국원 전원이 사퇴하였다. 당시 바트뭉흐는 정치국원들의 무력진압 요구를 묵살하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몽골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몽골 인민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나 1996년에 75년만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야당인 민주동맹이 총선에서 승리하였다.
대다수의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갑작스러운 민영화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몽골은 경제규모가 너무 작아서 민영화시킬 생산수단이 없었던 탓에 경제적으로 아주 큰 문제를 겪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물가 상승 문제에 시달린 것은 매한가지였기는 했다.
한편 차히아깅 엘베그도르지는 1998년 겨우 35세라는 나이에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몽골인민당의 반대로 8개월만에 물러났다. 2004년에 다시 총리직에 올랐고 2009년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5] 산자수릉깅 저릭은 민주화 이후 첫 자유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98년에 의문의 괴한이 찌른 칼에 암살당했다. 암살 직후에는 단순 강도 범죄로 알려졌으나 증거가 불충분하고 애초에 범인이 잡히지 않아 이후 미제사건이 되었다.[46]
이후 몽골은 민주당과 몽골인민당이 정권을 주고받는 양당제가 고착되었으며 2021년 몽골인민당이 대선과 총선에서 압승하였다.
5. 해결되지 못한 점들
체제 전환 이후 구 소련권 국가[47]와 내전을 겪은 일부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소속 국가, 특히 보스니아, 코소보들을 제외한 동구권 국가들은 올바른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정착했으며 체제 전환 실패로 큰 진통을 겪은 루마니아, 불가리아도 30년 이상 지난 후에는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다만 알바니아는 그다지 상황이 좋지 못한 편이다.사실 벨라루스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동유럽 혁명에서 사실상 생존하고 소련 체제를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러시아와는 달리 어느 정도 소련 시절의 복지와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치 상황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의 1인 독재로 심각한 상태다.
사회 혼란 속에서 급증한 빈곤층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편이며 서유럽, 북유럽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열악한 건 여전하다. 정치적으로 볼 때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구 동독 지역 등지에서 경제 위기를 틈타 극우 세력들이 준동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48] 공산주의 정권 붕괴 후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은 발칸반도 국가들은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 세르비아인 간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며 알바니아 본토도 선거를 실시할 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벌어지는 등 민주주의 정착 측면에서 다소 어려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동유럽권의 절대 다수 국가들이 인구 감소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이는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포함한 남동유럽권이 특히 심각하다. 2016년에는 마케도니아에서도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불만으로 시위가 일어난 적이 있었고 7월 이후 시위는 종식되었다. NATO가 여전히 있지만 이들의 군사 개입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 문서의 문제점 문단 참고.
우크라이나는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준독재를 몰아냈으나 동시에 친러 또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반발로 인한 분리주의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이는 내전에서 분쟁으로, 나아가 전면전으로 변하기도 했다.
6. 대중매체
이원복의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에서 본격적인 21세기의 시작이라는 말이 나온다.한편 2009년에는 동유럽 혁명 20주년을 맞이했다. 2009년 11월 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이하였고 여러 행사도 열렸다.
2012년에는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동유럽 역사기행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을 참고하는 것도 어느 정도 흥미로울 것이다.[49]
7. 여담
21세기에도 비슷한 나비 효과 및 도미노 현상으로 2000년대의 색깔혁명[50], 2010년대의 아랍의 봄이 나타났다.한편 북한에서는 1992년에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이 일어나서 김일성 정권을 엎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1995년에는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동구권 붕괴와 소련 붕괴, 중국의 개혁 등을 보고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언론에서는 아랍의 봄이 동구권 붕괴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확실히 나비효과로 인한 영향력으로 인해 여러 정권들이 같이 무너졌다는 점은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유럽 혁명은 거의 성공했나 평화로웠던 반면 아랍의 봄은 시리아나 예멘처럼 일부 아랍 국가들이 내전으로 시달리거나 종교 극단주의 단체들이 나타났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차이점이 보인다. 게다가 아랍의 봄이 성공하거나 개혁을 이룬 나라들은 순조롭게 정치가 안정된 튀니지와 모로코, 알제리 정도뿐이고 대부분은 실패했다.[51] 아랍의 봄은 동유럽 혁명보다 오히려 중국의 신해혁명이나 러시아의 러시아 혁명, 대한민국의 4.19 혁명과 비슷하다.
동유럽 혁명의 특징으로, 바로 혁명 과정에서 군부의 영향이 사실상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국가 자체가 분해된 유고슬라비아나 차별 대우로 인해 반감을 가진 정규군이 아예 시민들의 편에 선 루마니아[52]를 제외하면 동유럽 각 국가의 군부는 혁명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각국 정규군은 혁명 와중에도 본연의 임무를 계속 수행했으며 민주 정부가 수립된 뒤 정부의 통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는 공산권 시절 특유의 강한 문민통제에서 기인한다. 소련이나 동유럽과 같은 정통 제2세계 국가들은 정치장교와 같은 수단을 이용해서 민간 정부가 군부를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었고 군부는 현실 정치에 거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8. 관련 문서
[1] 중국과 베트남 등 동방의 공산권 국가들도 동유럽의 민주화 이후 계획경제 정책 포기를 선언, 경제의 세계화를 이룩하면서 공산주의의 경계가 모호해 지고 있다.[2] 하지만 전쟁은 단 10일만 지속되었고, 사망자도 두자릿수에 그쳤다.[3] 위키백과에서는 실제로 1989년 혁명으로 문서 제목이 바뀌었다.[4] 그렇다고 수출에만 올인하는 행위가 비단 그 시절 루마니아만의 일은 아니고 상당수 중남미 국가들이나 이집트 등의 제3세계 국가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루마니아는 자국민이 사용해야할 자원마저도 모조리 팔아치우니 일제강점기 시절의 산미증식계획을 뛰어넘는 참사가 터진 것.[5] 이름을 봐도 알겠지만 헝가리계이다. 트란실바니아는 원래 헝가리 왕국 영토였고, 트리아농 조약 당시 루마니아 왕국이 헝가리인이 많이 살아도 루마니아인이 조금이라도 거주하는 지역은 다 빼앗았기 때문에 세케이족이 거주하는 카르파티아산맥 산악지대 말고도 클루지나포카, 오라데아, 티미쇼아라, 트르구무레슈 등 대도시 중심으로 헝가리인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6] 혁명 당시 국민들은 루마니아 국기 가운데에 그려져 있던 공산당 문장을 도려내어 이를 혁명군 깃발로 쓰면서 무력 저항을 했는데 이는 혁명의 목적이 차우셰스쿠 일족과 공산당 타도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러한 행위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이라는 선례가 있다. #, 시민들을 도와주는 군부 및 군인들[7]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로 도망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8] 실제로 혁명의 개념과 의미를 정의하는 조건엔 정치 기득권층의 주류와 비주류를 불문한 일소 및 이러한 일소행위로 대표되는 사회적 폭력, 그것의 성취수단으로서의 물리적 폭력이 필수대전제로 요구되기 때문에 혁명의 의미를 축소하는 데 있어 폭력성은 다소 설득력 있는 근거라고 보기에는 힘들다.[9] 루마니아조차 1989년 12월에 성공하여 1990년이 되기 전에 공산독재를 종식한데 비해 알바니아는 사실상 1990년 12월이 되어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1991년에 독재정권으로부터 벗어났다.[10] 과장이 아니라 당시 알바니아의 억압성은 북한과 동급 수준이었다.[11] 차우셰스쿠 하에서 경제 붕괴 상태에 놓인 루마니아도 같은 해 1인당 GDP가 1,789달러였으니 알바니아의 경제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알 수 있다.[12] 공무원, 스포츠 선수, 유학생의 출국만 허용되었다.[13] 국영 항공사가 있긴 있었지만 알바니아 공군으로부터 소규모 프롭기 3대를 임대받아 간헐적으로 운항하는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수준이었다.[14] 1972년 뮌헨 올림픽 빼고 다 참가를 거부했다. 그 북한도 1984년, 1988년 올림픽을 뺀 모든 올림픽에 참가했다.[15] 이는 독일 재통일보다도 5개월 가량 늦은 것이다.[16] 심장 전문의이자 엔베르 호자의 주치의 출신으로, 그 폐쇄적이던 알바니아에서 프랑스 유학을 2번이나 갔다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17] 1992년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고작 201달러로 무려 부룬디에 버금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11개국 중 하나였다. 비록 고도성장을 해나가 1995년 공산정권 시절 경제력을 회복하고 1996년에는 공산정권 시절보다도 더 잘 살게 된 것을 넘어 최빈국 수준에서 벗어났다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1996년 시점에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4개국 중 하나에 들어갔다.[18] 사유가 걸작인 게 정부가 자본주의 체제 하의 경제발전을 하려고 했는데 나라에 자본주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부에서 경제전문가를 불러왔는데 그 '경제전문가'가 폰지사기꾼이었다.(...) 심지어 저 폰지사기에 국민의 60%가 투자하여 고도성장에 성공했지만 실체가 드러나면서 현재 한화로 약 3조 원, 알바니아 GDP의 1/3이 날아가버렸다.(...)[19]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면적인 자유화 조치가 일어난 건 아니다.[20] 야루젤스키 본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당시의 계엄령 선포 및 자유 노조 탄압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따라 소련이 1956년 헝가리 혁명이나 1968년 프라하의 봄 때처럼 폴란드에 무력 개입할 의사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으며 개혁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한다고 밝혔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할 시 야루젤스키는 그의 강력한 우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1981년 야루젤스키가 계엄령으로 자유노조를 탄압한 상황에서 새로 집권한 유리 안드로포프는 소련군이 폴란드 군사개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공개된 바 있다.[21] 이 날은 지구 반대편인 중국에서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났지만 모두 다 아는대로 유혈 진압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22] 일부 의석(전체의 30%)에 대해서만. 하원에 공산당 할당 의석이 있었다.[23] 역시 선거로는 한 석도 얻지 못했다.[24] 이후 바웬사는 경제정책을 말아먹고(...) 공산당이 재집권(!)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민주화는 이뤄냈다. 공산당의 재집권도 정당한 민주투표에 의한 것이라...[25] 이 때문에 불가리아는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발칸반도에서 평화적으로 민주화와 정치 안정이 순조롭게 정착한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26] 물론 인접한 폴란드나 헝가리에 비해 그랬다는 거지 동구권에서도 유별나게 폭압통치를 펼쳤던 루마니아나 알바니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27] 실제로 학생이 죽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고 한다.[28] 진압 과정에서(머리, 등 위주로 구타한 것으로 보인다) 568명(미성년자 46명, 노인 16명 포함)이 부상을 입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29] 현 북마케도니아[30] 이른바 반관료혁명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사건도 따지고 보면 동유럽 민주화 시위의 단초가 될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자유화와 경제난을 빌미로 타민족을 깔아뭉갰다는 점이나 밀로셰비치가 이후 인종청소 같은 막장 행각을 벌인 탓에 영어 위키백과의 1989년 동유럽 혁명 문서에는 빠져 있다.[31] 참고로 유고슬라비아는 1974년 헌법 개정으로 구성국들이 연방에서 탈퇴할 수 있는 조항이 신설됐다. 한마디로 연방 구성국들이 합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던 셈. 특히 당시 석유 파동과 외채 상환 문제 등에 의한 경제문제가 헌법 개정을 촉발시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1980년대 말 상황이 1970년대 초 상황과 판박이나 다름없다.[32]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따르는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분당하여 창당되었다.[33] 여기는 아예 크로아티아 사회당이 5%로 몰락하고 민주 크로아티아가 60% 이상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는 세르비아 사회당이 차지했다.[34] 밀로반 질라스 전 부통령 등 일부 전직 지도층 인사들이 연방의 통일을 주장하며 각 공화국들이 분열 시도를 자제하고 평화적으로 협상할 것을 호소했으나 허사였다.[35] 오세아니아에서는 공산주의 정권이 없었지만 바누아투에는 월터 리니의 친소 사회주의 독재 정권이 있었다. 물론 1991년에 해체되었지만.[36] 공산주의가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아직 중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 쿠바 등의 공산국가들과 공산당이 연립정권에 참여한 국가가 일부 존재하기 때문.[37] 체코와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정도를 제외하면 실업률이 10%를 넘기는 일은 기본이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국들도 슬로베니아를 제외하면 10%를 넘기는 것은 기본에 북마케도니아와 몬테네그로는 무려 30%를 거뜬히 넘겼다. 알바니아도 1992년에는 실업률이 30%였고 1994년까지도 20%대였다. 보스니아도 20%를 거뜬힌 넘긴 적이 있지만 보스니아 전쟁의 여파인 만큼 논외. 참고로 1998년, 1999년 한국의 실업률이 7%/6.3%였다.(물론 1996년 2%, 1997년 2.6%였던 것을 감안하면...)[38] 벨라루스는 제외[39] 이러한 상황은 당대 라틴아메리카나 필리핀에 대입하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데 해당 국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되었으며 민주화 이전에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경제적인 문제를 겪었던 것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40]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알바니아. 다만 알바니아의 경우,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이 내전으로 번졌던 것의 여파도 크다.[41] 다만 그렇다고 폴란드가 아무 성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산권 국가의 환율이 정부의 개입으로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실질적인 차이는 더 컸기 때문이다. 동독 마르크만 해도 공식적으로는 서독 마르크와 교환비가 1:1이었지만 암시장에서 교환비는 10:1에 근접했다. 즉, 공산주의 시절 서독: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3:1이 아니라 더 열악했을 가능성이 높다.[42] 대만은 민주화 과정이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지만 단계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민주화 과정이 완료된 것은 직선제 총통선거가 치러진 1996년으로 간주된다.[43] 나라별로 민주화 시기가 다르다. 중남미 민주화의 시작점을 찍은 에콰도르는 1979년에 민주화되었고 이후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순으로 민주화됐으며 라틴아메리카 민주화 붐의 끝물을 장식한 파라과이와 칠레는 1989년도의 일로 동유럽 국가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되었다.[44]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에서도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났으며 스페인도 프랑코 총통의 사후 민주화 과정에 돌입하여 1970년대 말에 민주화가 되었다.[45] 2008년 7월에는 몽골에서 부패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는 2000년대 여러 유라시아 국가들에서 나타났던 색깔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나타난 반정부 시위였다. 이때 소규모의 폭력이 일어나기도 했었다.#[46] 설령 진범이 잡힌다고 해도 몽골 기준으로도 공소시효 기간이 소멸되어 처벌도 불가능하다. 물론 한국의 공소권 없음에 해당하는 처분을 통해 그 사람이 진범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릴 수는 있겠지만 이전에 현재까지도 누가 범인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은 게 문제다.[47] 특히 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이 나라들은 일단 경제는 성장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야말로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해당 국가들 중 카자흐스탄은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사임을 기점으로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나마 나아지고 있다.[48] 이는 아시아의 몽골도 마찬가지다.[49] 이 책에는 몇 개의 오류가 좀 있다. 그냥 간단히 볼 수 있는 책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50] 2003년 조지아의 장미 혁명이나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 혁명, 2006년 벨라루스의 수레국화 혁명(jeans revolution), 2007년 미얀마의 샤프란 혁명, 2009년 이란의 녹색 혁명, 2011년에서 2012년 러시아의 눈꽃 혁명, 2014년 타이완의 해바라기 혁명이나 우산 혁명, 2015년 아르메니아 전기 혁명, 2016년 마케도니아 색깔혁명 등이 있다.[51] 다만 2019년 이후 알제리와 더불어 이라크, 수단, 레바논도 성공했으며 모두 과도기에 접어들었다.[52] 세쿠리타테에 대응하기 위해 위수령을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