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0:22

엘레나 차우셰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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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C0000> 개인 <colbgcolor=#fff,#2d2f34>생애 · 엘레나 차우셰스쿠 · 가족
행적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 루마니아 혁명
관련 음악 친근하신 챠우쉐스꾸 동지의 노래
관련 인물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엘리자베스 2세 · 김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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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부총리
본명엘레나 차우셰스쿠
Elena Ceaușescu[1]
출생1916년 1월 7일
루마니아 왕국 듬보비차(Dâmboviţa) 주 페트레슈티(Petrești)[2]
사망1989년 12월 25일 (향년 73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듬보비차 주 트르고비슈테(Târgoviște)
국적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틀:국기|]][[틀:국기|]]
학력초등학교 중퇴
시민권루마니아인
배우자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947년 결혼)
자녀장남 발렌틴 (1948년생)
장녀 조이아 (1949 ~ 2006)
차남 니쿠 (1951 ~ 1996)
정당루마니아 공산당
재임기간부총리: 1980년 3월 29일 ~ 1989년 12월 22일
종교무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집권 이전까지2.2. 집권 이후
2.2.1. 우상화2.2.2. '유명 화학자'로서의 엘레나2.2.3. 여러 일화들
2.3. 몰락과 처형
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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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정치인.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 부총리를 역임했으며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부인이기도 하다.

기초적인 화학 지식이 결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였던 남편을 등에 업고[3] 다른 학자들의 성과를 훔쳐 저명한 화학자 행세를 하는 등 온갖 악행들을 저질러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끊임없이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남편보다 더한 지탄을 받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집권 이전까지

1916년 1월 7일에 루마니아 왕국 듬보비차(Dâmboviţa) 주 페트레슈티(Petrești)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이 때의 이름은 레누차 페트레스쿠(Lenuța Petrescu)였다. 초등학교에 다니긴 했으나 가난한 환경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하고, 결국 4학년 때 14과목 중 9과목을 낙제하여[4] 유급 위기에 처하자 유급이 싫다고 학교를 중퇴하여 초등학교 중퇴로 학업을 마치고 오빠 게오르게(Gheorghe)와 같이 부쿠레슈티로 이사를 가서 제약 공장, 다음에는 직물 공장의 비숙련 노동자가 되었다.

1937년에 루마니아 공산당 부쿠레슈티 지부에 가입하며 플로리나(Florina)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이때부터 사회주의를 이끌 여성 지도자가 되기를 다짐했다. 1939년 5월 1일에 있던 노동절 시위에서는 남편이 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만났는데 니콜라에는 과감하게 선봉대로서 시위를 주도하는 그녀를 보고 홀딱 반해 버렸다지만 니콜라에가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결혼은 한참 뒤에야 할 수 있게 되었다.[5]

1945년에 그녀는 외무성에서 비서로 일했으나 무능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으며 1947년 12월 23일에 니콜라에와 결혼한 후 '아내는 남편보다 어려야 한다'는 생각에[6] 서류상 생일을 1919년 1월 7일로 3년 늦춘 데다가 이름도 '엘레나'로 바꿨고 니콜라에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그녀는 니콜라에를 공산당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의 단점들을 고쳐 주었는데 특히 말을 심하게 더듬는 니콜라에를 위해 말더듬는 것을 교정하는 훈련을 시켰고 그 결과 완벽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고쳐졌다. 이렇게 그녀는 니콜라에의 참모이자 조언자로써 부족함이 없었으며 적어도 한 남성의 부인으로써는 내조를 잘 했기 때문에 니콜라에는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버렸다. 이는 차우셰스쿠의 집권 후 그녀가 고속 승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 외에는 다른 여성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던 니콜라에는[7] 그녀에게 의지하면서도 그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대중 앞에서는 니콜라에에게 충실한 아내였지만 사석에서는 니콜라에를 남편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했다.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시간이나 약속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차우셰스쿠는 안절부절 못하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긴장하면 항상 그랬듯이 말 더듬는 습관이 튀어나왔고 땀까지 흘렸다."고 한다.

2.2. 집권 이후

니콜라에가 1965년 3월 22일에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 것을 계기로 그녀도 공산당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차우셰스쿠의 집권 초기에 그녀는 정치적인 욕심은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8] 1971년 6월 1~9일에 남편을 따라 중국에 가서 마오쩌둥아내 장칭을 만났는데 장칭이 '지도자의 아내는 좀 더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는 말을 남긴 것과 중국 정치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에 큰 인상을 받아 자신도 장칭처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9]

아무튼 그녀는 1972년 7월에 루마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회원이 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승진하여 당내 요직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1980년 3월 29일에 루마니아의 초대 부총리직에 올라 루마니아의 권력 서열 3위에 올랐다. 그녀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그녀가 아들 니쿠와 연합해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을 몰어내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퍼졌을 정도였다.[10]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악행으로 알려진 것들의 많은 부분은 정확히는 그녀가 입안하고 남편이 실행한 것이었는데 '체계화 프로젝트'를 가장한 농촌 파괴, 민생 파탄을 동반한 1980년대의 긴축 정책, 부쿠레슈티의 사적지 무단 철거, 그리고 그 악명 높은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등이 바로 그녀가 입안한 정책들이었다. 1985년 1월 20일에 그녀는 '에너지 절약'을 명분으로 루마니아의 국영 방송국인 텔레비지우네아 로므너의 채널 2개(TVR1, TVR2) 중 TVR2를 폐국하도록 지시하고는 평일 TV 방송 시간도 오후 8시~오후 10시까지의 단 2시간으로 줄였다.[11]

또 엘레나는 정치적으로도 남편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당시 공산당의 최고위 인사였던[12]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Iosif Maurer, 1902~2000)의 증언에 따르면 "엘레나가 차우셰스쿠를 지배하고 있으며, 니콜라에는 엘레나가 말하고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한다. # 또 니콜라에는 연설을 할 때 마치 엘레나의 얼굴에서 인정을 구하려는 듯 아내에게 눈을 돌리기도 했으며, 엘레나가 나중에 그를 비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먼저 엘레나와 상의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피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니콜라에가 보는 모든 문서들은 엘레나의 손을 거쳐야 했다. # 사실상 말년의 엘레나는 김정일, 말년의 니콜라에는 노년기의 김일성 포지션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13]

2.2.1. 우상화


엘레나 차우셰스쿠 우상화 노래. 후술할 차우셰스쿠 부부의 최후를 생각하면 음악 분위기가 참으로 묘하다. 멜로디가 아깝다. 북한에서도 김씨 3대를 '탁월한 인간'이라고 강조하긴 한다.

그녀는 장칭을 만나고 깊은 감명을 받아 중국에서 돌아온 후부터 본인에 대한 우상화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70년대 초까지 그녀는 신문에 잘 나오지 않았고 나오더라도 '차우셰스쿠의 아내' 정도로만 언급되었지만 이후에는 '성녀 엘레나', '인민의 자애로운 어머니', '루마니아의 모든 어린이들의 어머니', '천공의 영원한 아치에서 빛나는 별 옆에 존재하는 또 다른 별' '세계에서 가장 정의로운 여성', '정치인, 과학자, 아내 및 어머니의 선별된 자질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결합하는 저명한 인물' 등의 칭호로 불리며 남편인 니콜라에와 동급으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이 '존재가 국가의 운명과 합쳐지는 역사적인 부부' 중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최고의 전능한 신이었다면 아내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반신반인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의 초상화는 니콜라에의 초상화와 함께 전국의 관공서는 물론 학교 교실과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었고 루마니아의 모든 학생들은 니콜라에의 초상화에서처럼 그녀의 초상화에도 충성 맹세를 해야 했으며 그녀의 생일은 남편의 생일과 함께 국경일이 되었다. 게다가 루마니아 백과사전은 반 페이지 이상을 차우셰스쿠 부부의 칭호와 그들이 받은 상만 나열하는 데만 할애했으며 심지어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중 문단이 넘어갈 때 특수한 문자로 써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엘레나 차우셰스쿠'라는 이름이 분리되는 것도 금지되었다고 한다.[14]

게다가 남편이 65세 생일을 맞이한 해이자 루마니아에서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해인 1983년부터 루마니아의 국영 TV 방송국은 전통적으로 어머니와 여성을 기리는 달이던 3월에는 1일부터 8일까지 1주일 동안 그녀를 찬양하는 방송들을 주구장창 내보내야만 했다. 이 기간에 루마니아의 TV에서는 그녀의 '이상적인 여성, 어머니, 아내로서의 자질'뿐만 아니라 '최고의 과학자'로서의 자질을 찬양하기 위한 음악과 시들이 송출되었다. 물론 이 부부의 생일이 있는 1월에 루마니아의 TV는 차우셰스쿠 부부와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 채워졌다.

루마니아의 TV 방송국은 전반적으로 평범한 외모를 가진[15] 그녀를 스크린에 만족스럽게 나오게 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실제로 당시 루마니아의 TV에서는 큰 코를 가진 그녀의 옆모습을 송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물론 신문에 재현된 그녀의 도상 역시 그녀의 '미모와 젊음, 지적 능력'을 강조했는데[16] 이를 위해 당시 루마니아의 언론은 그녀를 멀리서 촬영하거나[17] '유리한' 각도에서 촬영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명확하게 식별할 수 없게 하거나 아예 조심스럽게 수정한 사진을 써야 했음에도 그녀의 모든 이미지들은 '광범위한 청중이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에 대한 세심한 검사를 받아야만 공개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진사들은 그녀의 '미모와 젊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진 속의 주름을 없애고 코의 크기를 줄이는 등의 보정 작업을 해야만 했고[18] 열악한 인쇄로 신문 속 그녀의 얼굴이 찢어지거나 얼룩이 생기면 신문 전체가 회수된 후 재인쇄를 거쳐야만 했다. #

루마니아 최초의 컬러 TV 방송이던 1983년 8월 23일 국경절 기념식의 컬러 중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당 전체회의에서 '루마니아는 언젠가는 컬러 TV를 도입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에 근거하여[19] 당시 TVR의 기술이사였던 니콜라에 스탄치우(Nicolae Stanciu)가 차우셰스쿠 부부 몰래 송출한 것이었기 때문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이 중계가 컬러로 송출된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이후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스탄치우를 칭찬하기는 커녕 오히려 펄떡 뛰면서 방송 책임자를 가혹하게 질책했으나 '대통령 부부의 공개석상의 위엄이 컬러 이미지로 증폭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마음이 누그러졌다고 한다. 즉, 차우셰스쿠 시기에 루마니아의 컬러 TV 방송은 오직 차우셰스쿠 부부를 선전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던 것이나 다를 바 없었던 셈이다.[20][21]

거기에 보건관리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던 그녀는 어린이를 사랑해 학교 교육과 고아원 증설, 보건소 위생 관리 등에 주력하고 있다고 선전되었으며[22] 그녀가 공식적으로 60세를 맞이한 1979년에 한 시인은 그녀의 60세 생일에 '이 나라의 영부인은 모든 인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위대한 지도자 옆에 선 영부인은 루마니아가 나아갈 영광의 길을 굽어 살피신다.'는 글을 남겼고 루마니아의 소설가 겸 영화 대본 작가 에우젠 바르부[23]는 그녀를 '국가의 고귀한 여인'이라고 아첨한 데다 심지어 1983년 한 잡지는 '그녀의 주름에서 드러나는 온화한 에너지는 모든 예술의 영감이 된다'는 노골적인 아첨을 남겼다. 물론 후술할 내용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녀는 '상당한 지식과 인품을 가진 학자'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시인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Corneliu Vadim Tudor, 1949~2015)[24]가 쓴 차우셰스쿠 부부를 찬양하는 시 역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다. #

1984년에는 그녀의 65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루마니아 작가 연합의 전 회장이었던 버질 테오도레스쿠(Virgil Teodorescu, 1909~1987)가 '국가의 목소리로 생일 축하드립니다!(Cu glasul tarii, La Multi Ani!)'라는 제목의 시로 '학자' 엘레나의 '육체적, 정신적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를 지었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멀리 내다보는 눈으로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부지런한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
그녀의 얼굴에 살아있는 부드러운 에너지는
예술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출처

2.2.2. '유명 화학자'로서의 엘레나

그녀가 오늘날까지 큰 비판을 받는 이유는 니콜라에의 괴팍한 독재와 실정에 협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니콜라에보다도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녀를 모시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인민 전부를 괴롭게 했다. 개인적인 내조에서 멈추었다면 아마 그녀는 '어쩌다 보니 괴팍하고 정신나간 남편을 둬서 내조한 죄 밖에 없는 아내'가 되었을 것이고[25] 모든 분노를 피할 순 없더라도 최소한 거대한 인민들의 분노는 피했을 수도 있었겠지만[26] 학력 콤플렉스와 욕심이 화를 불렀으며 그녀는 거기서 멈출 성격이 아니었다.

니콜라에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자 오르자 그녀는 자신도 걸맞은 영부인이 되기 위해 화학 강좌에 참여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는 자기가 무식하니까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좋게 보고 문제점도 영부인의 학력 세탁으로 적당히 눈 감아줄 수 있는(?) 정도였다. 문제는 그녀가 학력 세탁 정도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 참여하면서 그 무식함이 현장을 고통스럽게 했단 것이다.

1955년부터 4년간 야간 과정으로 화학 강좌를 수강하며 화학 실험실에서 조수로 일했던 그녀는[27] 1957년에 루마니아 국립 화학연구소에 전임 연구원이 되었고 1960년대 초에는 부쿠레슈티 중앙화학연구소 당위원회 서기가 되었으며 남편이 루마니아 공산당 총서기가 된 직후인 1965년 3월에는 부쿠레슈티 중앙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승진했고 동년 12월에는 새로 설립된 국립과학연구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7년 12월 8일에 그녀는 '공중합에 대한 합성고무의 안정화에 관한 이소프렌의 입체특이적 중합'이라는 논문을 비공개로 심사받은 후 박사 학위를 얻었는데 이는 거의 모든 과목을 유급한 끝에 초등학교를 중퇴한 것이 기존 학력의 전부에 그 이전까지 어떠한 화학 학위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능력이라 하기에는 기적(?)에 가까운 성과였다.

1974년 3월 1일에 그녀는 루마니아 아카데미의 화학 과학 분과의 회원이 되었으며 1985년 11월 29일에는 국가 과학 및 교육 위원회 회장이 되었고 1988년까지 총 6개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이런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그녀와 대화하기는 매우 힘들었는데 이는 그녀가 명령만 했지 전공 분야에 대한 대화와 토론은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화학에 대해 거의 기본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토론을 극단적으로 꺼렸고 무엇이 연구되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데다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것에만 힘을 쏟았음에도 연구소에서 발표되는 논문에는 꼬박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녀는 고분자화학의 대가로 알려졌으며 그녀가 썼다는 책들은 19개 언어, 루마니아의 선전대로라면 '지구의 모든 언어로' 출판되어 국제적으로 저명한 저널에 총 90회 이상 인용되었다.[28]

그녀가 죽은 지 몇 달이 지난 상태에서 연구소의 과학자들과 인터뷰를 했을 때 이들은 도청장치가 없다는 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확인한 뒤에 증언했다고 하지만 습관 때문인지 증언을 하는 중에도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눈치를 봤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그녀가 천박하고 악마 같았다는 점에 동의했으며 직원들의 복지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경비를 삭감했고 월급을 대폭 줄였으며 전화 교환원의 임금을 줄인다며 연구소와 실험실을 연결하는 전화 교환기를 없애 연구소의 전화기를 먹통으로 만드는 등 별의별 방법으로 시설에 들어가는 돈을 줄였다고 증언했다.[29] 물론 엘레나 본인에게만큼은 월급 명목으로 엄청난 돈이 지급되었다.

그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봉제공 출신이라 무식에 한이 맺혔는지 남편의 집권 직후에 부쿠레슈티 중앙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자마자 그녀의 명의로 100개가 넘는 논문도 발표했고 명함도 신나게 뿌렸다. 물론 그녀가 썼다는 논문들은 전부 다른 학자들에게 쓰도록 지시한 후 그 논문들을 가로채 자신의 이름을 내걸어 출판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화학연구소에서 일했던 한 학자는 '엘레나의 이름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논문을 써서는 안 되며, 출판은 더더욱 안 된다'고 증언했고 그녀와 토론을 하기는 커녕 그녀를 본 적도 없었으며 연구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그녀는 실제로 부족한 만큼 공부하고 교양을 쌓아서 무지를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신 겉으로 드러나는 학위와 직함에만 집착했다. 그녀는 명령을 내려 다른 저자들 명의로 작성된 과학 논문들도 자신의 이름이 제1저자로 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출판될 수 없게 했다.

거기에 그녀는 남편의 집권 기간 동안 많은 특허의 공동 발명자로 기록되었으나[30] 많은 과학자들은 이 특허들이 그녀의 강요로 강제로 그녀에게 양도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상술한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도 원래는 법에 따르면 논문 작성자가 공개적으로 심사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되었으나 후술하듯 화학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는 게 전혀 없던 그녀는 공개 변호를 피하기 위해 법까지 바꿔가며 서면으로만 심사에 참여했다. 물론 논문 공개 발표가 예정된 날에 발표 장소로 예고된 곳에 온 사람들은 굳게 잠긴 문 위에 있는 '논문 공개 발표 시간이 옮겨져 이미 끝났다'는 메모를 봐야만 했다.

루마니아의 과학자들은 그녀가 '과학에 거의 문맹이다'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녀가 과학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냐면 명색이 화학 박사 출신의 화학연구소 소장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savant de renume)'였는데 크로마토그래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황산의 화학식(H2SO4)도 몰랐다고 하며 심지어 루마니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의 화학식이 H2O라는 것도 모른다는 마냥 거짓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소문까지 암암리에 돌 정도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한 마거릿 대처의 증언에 따르면 엘레나는 고분자와 다각형을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

아레틴 코르시오베이(Aretin Corciovei)라는 물리학자는 "우리는 그녀가 발음할 수 없는 단어로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이해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는데, 실제로 엘레나는 한 방송에서 이산화 탄소의 기호인 CO2를 '코도이(codoi)'[31]라고 읽는 바람에 망신살을 사기도 했으며 코르시오베이가 전한 사실은 당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던 판이었으니 그녀는 단 한 번도 국제적인 과학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으며 유명한 화학자라는 그녀가 왜 과학 토론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 학자들도 동서양 막론하고 전혀 없었다. 그녀는 화학 관련 회의에 갈 때에는 항상 통역사를 데리고 갔는데, 그 통역사는 유능한 화학자로서 청중들의 질문에 대해 엘레나가 하는 헛소리 대신 올바른 답변을 제공했다. #

사실 그녀는 남편처럼 글을 겨우 읽고 쓸 줄 아는 수준이었다고 하며 그녀의 실태를 보면 (자신이 교정해 준 후의) 남편보다도 훨씬 무식했다. 일단 닥치는 대로 공산주의 관련 책들을 탐독하며 공산주의를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할 수 있던 남편과는 달리 그녀는 서류도 제대로 읽지 못해 그녀에게 보고를 해야 할 때에 그녀에게 서류를 보내는 대신 국무대신이 직접 그녀 앞에서 서류의 내용을 읽어주는 방식으로 해야 했던 것은 물론, 심지어 어설프게나마 서류를 작성할 수 있었던 남편과는 달리[32] 그녀는 국가 정책에 관련된 서류를 전혀 작성할 수 없었고 그녀의 사무실에는 서류가 단 한 장도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일생 동안 표면적인 학위에만 집착했지 자신의 부족한 문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게 전혀 없었던 모양.

그러나 이렇게나 무식했던 그녀의 공식적인 명칭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화학자', '부통령, 동지, 의사, 학자, 엔지니어 엘레나 차우셰스쿠'였다. 자신의 이름 뒤에 칭호를 붙이면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원시적인' 자신의 이미지가 바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그녀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명예 박사 학위를 요구했다.[33] 이렇게 그녀는 집권 기간 동안 국내외에서 무려 74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실제로 차우셰스쿠 부부는 그녀에게 학위가 준비되지 않은 경우 외국의 초대를 수락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물론 누구 말마따나 그녀에게 새로운 명예 학위나 직함이 주어질 때마다 루마니아인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물론 그녀의 해외 순방 당시 공식 일정의 대부분은 그녀의 '과학적 작업'을 인정하여 명예 학위를 수여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는데 실제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해외정보국(DIE)에 그녀의 명예박사 학위를 얻어내기 위해 방문하는 국가의 저명한 기관과 협상하라는 특정 명령을 받았고 그렇지 않으면 차우셰스쿠 부부는 국빈 방문 초대를 거절했다.

심지어 그녀는 노벨상에까지 손을 대려고 했다. 먼저 그녀는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 감축 운동에 참여하고 팔레스타인 편에 서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한 중개자 역할 하기, 니쿠가 대통령직을 승계받을 때 노벨평화상을 수여받을 계획을 짰으나 이것도 루마니아의 국제적 위상 때문에 되지 않자 중합체에 관련된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타려고 했다가 이것조차 되지 않자 그녀는 뜬금없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노벨생리학·의학상에 도전했는데 이렇게 연구한 것이 마늘을 이용한 항암치료였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노벨생리학·의학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자녀들의 직업이 물리학자(장남 발렌틴, 차남 니쿠), 수학자(딸 조이아)와 같은 이공계 관련 직업인 것도 이런 열등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2.3. 여러 일화들

차우셰스쿠의 전용 헬리콥터 조종사였던 바실레 말루찬 공군 대령은 "엘레나는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모두 우리들의 잘못이었다, 헬리콥터 안 카펫에 보푸라기가 일어나거나 날씨가 나빠 카펫이 들춰지기라도 하면 모두 우리 탓을 했고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고 모두를 증오했다"고 한다. 훗날 말루찬 대령은 차우셰스쿠 부부가 민중들에게 체포당하는 것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녀의 개인 비서들은 그녀는 생물체 중 래브라도 애완견이던 코르부[34]와 샤루나밖에 없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식탁에 다른 사람들은 초청되는 것을 꺼렸는데 물론 차우셰스쿠 부부가 다른 사람들을 잘 초청하지도 않아서 그런 면도 있었지만[35]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공식 석상에서 언제나 무슨 요리가 나오든 만족하지 못했으며 자신이 만든 요리만 맛있다고 언제나 이야기하며 요리사들에게 "내가 차우셰스쿠를 위해 손수 요리한 시금치가 훨씬 맛있다"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러니 차우셰스쿠조차 그녀를 어루만지며 "여보, 그만해, 그만해"라고 말하던 판이었다.

그녀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사진사는 그녀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진을 보면 "왜 내 코가 높게 나왔어?"라거나 당신에게 이렇게 값비싼 장비들을 사 주었는데 왜 사진을 이렇게밖에 못 찍냐는 말을 퍼부었으며 옷이 예쁘지 않으면 디자이너도 아닌 뜬금없이 사진사를 탓하며 "사진도 못 찍는 머저리 같으니, 차라리 내가 찍는 게 더 잘 나오겠다."라며 쉬지 않고 잔소리를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지성'을 모두가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

거기에 그녀는 자존심이 심하게 강한 나머지 '내 명예가 실추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말을 남긴 것은 물론[36], 의심도 많아서 대통령궁 직원들이 물건이나 음식을 훔쳐갈까 봐 계속 주방과 숙소를 돌아보며 직원들을 닦달했고 심지어 항아리에 든 요구르트를 훔쳐먹거나 독을 탈까 봐 항아리에 자물쇠를 채우기도 했으니 손님들이 보고 좋은 인상을 받는 것이 더 이상한 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15개의 방을 중축한 저택[37]의 새 방이 침실 페인트 냄새가 싫다면서 한 번도 잔 적이 없는데 청소부들이 헤맬 정도로 큰 이 집에서 청소부들이 카페트를 제대로 청소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카페트 밑과 귀퉁이에 핀을 숨겨두었고 이를 치우지 않자 즉시 해고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질투심과 편집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했는데 실제로 엘레나는 자기보다 세련되거나 예쁘거나 똑똑한 여성들은 모두 질투하여 자기보다 예쁜 여성은 자기 근처 어디에서도 머물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인디라 간디[38]골다 메이어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여성 정치인들을 자신의 정적으로 생각했다. 물론 남편과 동행한 해외 순방에서도 상대국에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해 그 뇌물을 모든 해외 순방 비용으로 채우는 등의 행적으로 해외에서도 '칼만 안 들었지 강도랑 똑같다'는 말을 들으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심지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부부도 그녀의 희생양이 되었다. 1978년에 그녀는 일리노이 과학 아카데미(IAS)의 명예 회원으로 제의되었으나 워싱턴 D.C.의 연구소에서 학위를 받는 것만을 원했는데 이 요구를 카터가 거부하자 카터가 땅콩 농장주였던 과거를 트집잡아 "꺼져! 당신은 미스터 피넛이 나에게 일리노이 연구소의 졸업장을 줄 수 있지만 워싱턴에서 온 졸업장은 줄 수 없다는 생각을 나에게 팔 수는 없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리노이에는 가지 않을 거야!"라는 막말을 남겼다.[39]

이러니 워싱턴의 연구소에서는 그녀에게 학위를 주지 않겠다는 것을 더욱 굳게 결심했고 결국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IAS의 명예 회원 자리를 승낙해야 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IAS의 소장 에마누엘 메르딩거(Emanuel Merdinger, 1906~1997)의 혈통을 들먹이며 '저런 더러운 혈통의 손으로 주는 낮은 계급의 학위는 받고 싶지 않다'는 더한 막말을 남겼다.[40]

게다가 그녀는 자식의 연인들에게도 무자비했다. 딸 조이아의 남자친구가 평범한 집안 출신에 부모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딸의 남자친구를 의심하기 시작해 결국에는 "이런 '더러운 놈'은 가나에 보내 기생충 감염으로 죽여야 한다. 그 남자가 죽으면 그의 뇌의 사진을 찍어와라"는 잔혹한 지시를 내려 그 남자친구를 '실종'시켰으며 아들 니쿠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한 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니쿠가 잠시 해외로 나간 사이 병사들을 시켜서 그 미녀를 집단 성폭행을 시킨 뒤 그 사진을 니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는 극악무도한 일화까지 있다. 그러나 그 미녀가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이 싫어하는 공산당 동료의 방을 보안국을 통해 도청해 그들이 성관계를 하는 녹음을 엿듣는 기괴한 취미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자신보다 아름다운 루마니아의 여배우, 가수들에게도 열등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

이런 그녀에게 루마니아 공산당이 부여한 정식 명칭은 '인민의 자애로운 어머니'였지만 비슷한 시기에 그녀는 "인민들은 마치 벌레와 같다. 아무리 먹여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는 망언을 남겼다.

물론 그녀는 이멜다 마르코스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사치에도 열중했다. 1970년 10월에 남편과 같이 처음으로 미국에 방문했을 때는 '내가 얼마나 고급 문화에 익숙하고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는지 알아야 한다'며 자신이 먹을 모든 메뉴를 자신은 물론 남편도 전혀 모르는 프랑스어로 작성하게 했으며[41][42] 국민들이 빵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몇 시간이나 서야만 했음에도 지하에 대형 냉장고를 설치해 언제나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은 것은 당연했고 부쿠레슈티에 위치한 방이 174개나 되는 호화 저택인 '봄의 궁전'에 따로 방을 마련해야 했을 정도로 많은 모피 코트는 물론, 수백 벌의 드레스와 수십 벌의 밍크코트, 엄청난 보석, 다이아몬드가 박힌 구두를 포함한 그보다 더 많은 신발을 보관했다. 물론 일반 국민들의 사치는 금지되어 한 여인은 금반지를 꼈다는 이유만으로 세쿠리다테에 끌려간 후 '실종'되던 판이었다. 그녀는 디올, 샤넬, 에르메스 옷들을 여럿 가지고 있었으며, 체포될 당시에는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

2.3. 몰락과 처형

동유럽 혁명의 영향을 받아 티미쇼아라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나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고[43] 북한인 용병까지 동원하여 단 하루 동안 현장에서만 최소 66명의 반독재 시위대를 사살했는데 그녀는 이들의 시신을 비밀리에 화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녀의 지시를 들은 차우셰스쿠의 부하들은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43명과 병원에서 처형된 부상자들의 시신을 영안실에서 훔치고 강제로 부쿠레슈티로 옮겨 화장해 쓰레기통에 버린 후 그 재를 운하 입구에 버렸다.

티미쇼아라에서의 학살이 계기가 되어 루마니아의 전국민이 차우셰스쿠의 독재에 질려 들고 일어났고 차우셰스쿠 부부의 괴팍한 행각과 푸대접에 질린 루마니아군이 차우셰스쿠를 버림으로서 차우셰스쿠 부부는 권좌에서 쫓겨나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어느 산림 감시원의 숙소에 남편과 같이 3일 동안 감금된 상황에서도 종일 평소처럼 온갖 투정을 다 부렸는데 실제로 음식, 방, 침대, 깨끗한 옷이 없다며 "이렇게는 살 수 없다. 집에서는 충분한 음식이 있지 않았냐?"고 말하며 심한 욕을 퍼붓기까지 했다.

1989년 12월 25일에 그녀는 오만 악행으로 인해 남편 니콜라에와 동급의 범죄자 취급을 받아 소규모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혁명재판에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고 잔혹하게 총살당했다. 그녀는 자신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난 너희들을 어머니로서 대해왔다!",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죽이려 하다니!"라고 울부짖었으며 심지어 당시 처형에 참여했던 한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총살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문자 그대로 "이 개자식아!"였다고 한다. 출처

재판 당시 그녀는 탁자 위에 놓아둔 한 봉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안에 스위스 계좌번호와 차우셰스쿠를 배반한 사람들의 명단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부부를 처형한 후 봉투를 열어보니 스위스 계좌번호는 없었고 대신 당뇨병 환자였던 남편에게 주기적으로 투여해야 했던 인슐린 주사기가 있었다고 한다.[44] 여담으로 레누차 페트레스쿠가 태어난 페트레슈티 마을과 엘레나 차우셰스쿠가 사망한 트르고비슈테 시 사이 거리는 고작 40km밖에 되지 않는다.

자세한 몰락 과정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생애 문서 참조.

한껏 증오를 받아서 처형된 뒤 장례도 대충 치러졌는데 2010년에 제대로 된 묘가 만들어졌다.

그녀가 처형된 지 32년이나 된 2021년 기준으로도 엘레나가 썼다는 논문들은 여전히 화학 저널들에 인용되었으며 엘레나의 거짓된 박사 학위들은 취소되지도 않아 루마니아의 과학자들은 그녀의 행각을 '가혹한 지적 유용 회의'라고 부르며 그녀의 명의로 작성된 논문들과 특허들에 있는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박사 학위들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3. 평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독재자였다면, 그의 아내 엘레나는 폭군보다 더한 인물이었다.
셸리 클라인, '독재자의 최후' 267쪽 중
우리가 루마니아를 방문하는 동안 국민을 얼어붙게 하고 굶주리게 한 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세스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좋은 점은 그가 아내보다 낫다는 것이었다.(During a visit we made to Romania, the only good thing anyone could say about the late dictator Nicolae Ceausescu, who froze and starved his people, was that he was better than his wife.)
1991년 10월 16일에 워싱턴 포스트에 올라온 기사 중 출처

영부인으로서나, 총리로서나, '자칭' 화학자로서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나 그 어떠한 장점도 눈 씻고 봐도 먼지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며[45] 모든 면에서 실격이라는 혹평을 받는다. 평생 동안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태도와 화학자 사칭 등 악행으로 인하여 주변인들에게조차 완전히 버림받고 모두가 그녀를 손절할 정도로 최악의 인품으로 악명이 높았다. 게다가 상술했듯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당시 국가원수이던 니콜라에를 좌지우지하며 루마니아의 실권까지 사실상 뺏어가 차우셰스쿠 정권의 막장화에도 일조했으니...

당시 대부분의 루마니아인들은 그녀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악의 원천'이라고 여기며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이상으로 증오했다고 한다. 실제로 차우셰스쿠 집권기에 질병 AIDS가 발견되었을 때 루마니아인들 사이에서는 AIDS의 어원이 엘레나와 연관된 역두문자어라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였고[46] 훗날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된 뒤 한 인터뷰 중에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라고 말한 차우셰스쿠의 최측근들마저도 그녀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경멸식으로 말할 정도였으며 심지어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니쿠를 제외한 자식들마저도 그녀를 증오했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루마니아의 보건성 장관이었던 에우게니우 프로카(Eugeniu Gh. Proca, 1927~2004)는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래도 니콜라에는 인간의 냄새가 좀 남아 있었지만 엘레나는 철저한 악마였다.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 중국의 장칭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47]

2013년 여론조사에 의하면 차우셰스쿠 이전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에 대해서는 42.3%의 긍정과 39.1%의 부정적 답변으로 나뉘었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 대한 질문에는 47%가 '루마니아 역사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답변했으며 '부정적이었다'는 46.9%였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부인인 그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은 단 12.1%에 불과했던 것과 정반대로 부정적인 답변이 80.2%로 월등히 높았다.[48] 출처[49] 심지어 이것도 그녀가 살아 있었을 적보다 그녀에 대한 인식이 덜 '거칠게' 다루어진 것임에도[50] 그런 수치가 나온 것이다.

4. 여담

  • 1939년 8월 13일에 '환희의 공원'에서 개최된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 회원들을 위한 야유회에서 그녀가 주위에 있는 수많은 미녀들을 제치고 자기 번호가 찍힌 티켓을 가장 많이 팔아 '무도회의 여왕'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차우셰스쿠고 살아 있을 당시 루마니아의 공식 차우셰스쿠 일대기에서는 이 사건이 대규모 집회에서 '미스 근로자'를 뽑는 행사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니콜라에가 친구들에게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 회원 중 한 사람의 석방을 탄원하는 캠페인이라고 속이면서 그녀의 티켓을 사 달라고 하는 바람에 많은 티켓이 팔려 '무도회의 여왕'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 그녀의 어머니 알렉산드리나(Alexandrina Petrescu, 1887?~1989)는 딸이 처형될 무렵에도 살아 있었으나 딸이 처형된 직후에 향년 102~103세라는 고령으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차우셰스쿠 부부의 별장에서 살다가 차우셰스쿠 부부의 처형 직후 혁명가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딸이 처형당한 것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모녀간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대신 사위에 대해서는 "그는 죽임을 당해서는 안된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호의적으로 평가했으며 딸의 생전에는 딸의 고향에 살던 주민들에게 딸의 권력을 이용해 '극도로 권위적인 행동'을 했다고 한다. 반면 엘레나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아 어머니를 거의 하인처럼 취급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 1975년 6월에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의 초청으로 요르단의 홍해 인근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요르단 왕실 요트가 마음에 든다며 당장 달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사실 요트가 아니더라도 남의 것을 내놓으라는 건 상당히 무례한 일인데 하필이면 그 요트는 다름 아닌 후세인 1세가 자신의 딸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녀는 '안 사주면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겠다'면서 남편에게 흐느끼고 애원하며 이 요트를 사달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의 땡깡에 질린 후세인이 다른 요트를 즉시 선물하겠다고 약속해서 일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그래도 후세인 국왕은 국가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요트 이름을 '우정'이라고 지어 보냈는데 차우세스쿠 부부는 요트를 받고 나서는 자기들 멋대로 요트의 이름을 '지도자'를 의미하는 '콘두커토르(Conducător)'로 바꿨다. 문제의 요트는 루마니아의 민주화 후 루마니아의 민간 여행사에 관광용으로 팔려 드라큘라 백작 관광 코스에 쓰이게 되었다.
  • 그녀의 올케였던 아델라는 죽기 직전에 그녀가 독일군을 상대로 매춘부 노릇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주변인들은 그 주장을 대체로 부정했는데 그들은 그녀가 그런 일을 할 성격도 아닌 데다 애초에 독일군들이 좋아할만큼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그녀다 니콜라에보다 이성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실제로 1955년부터 차우셰스쿠 부부의 주치의였던 유대인 의사 아브라함 셰히터(Abraham Schechter)는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가 1973년 3월에 병원 5층에서 의문의 투신자살을 했다. 그 외에도 성생활이 문란했는지 마우레르의 증언에 따르면 아들 발렌틴과 딸 조이아는 니콜라에와의 관계에서 낳은 딸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 말대로라면 니콜라에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은 아들 니쿠 1명밖에 없게 된다. #


[1] 출생 당시에는 레누차 페트레스쿠(Lenuța Petrescu). 나중에 엘레나로 개명하고 니콜라에와 결혼하면서 성이 바뀌었다. 국립국어원이 정한 루마니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의거하면 '체아우셰스쿠'가 맞는 표기지만 관용적으로 '차우셰스쿠'가 많이 쓰여 왔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차우셰스쿠'가 표준 표기로 지정되었다. 물론 원 발음도 빨리 하면 나름 비슷하게 들리지만. 사실 루마니아어에서 ia와 ea는 둘 다 '야'처럼 발음하는데 어원에 따라 구분한다.[2] 차우셰스쿠의 집권 기간 동안 엘레나의 공식적인 생일은 1919년 1월 7일이었다.[3] 하술하듯 남편의 위세를 업은 게 아니라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아예 엘레나 본인이 남편을 조종하는 수준이었다.[4] 음악, 스포츠, 재봉 및 육체 노동 과목만 낙제를 겨우 면하는 수준으로 통과했다고 한다. 이 성적표는 엘레나가 '저명한 화학자'로 포장되던 생전에는 공개될 수가 없었고 사후에야 공개되었다.[5] 참고로 엘레나는 이전에 차우셰스쿠의 형제 중 한 명과 우연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6] 앞서 봤듯이 니콜라에보다 연상이다.[7] 그 일례로 1974년 젊은 시절의 동료였던 키부 스토이카가 실연을 당하고 자살하자 고작 그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냐며 경멸하기까지 했다.[8] 아마 당시에는 단순히 남편에게 정책을 조언해주는 고문 수준에 그쳤을 것으로 보인다.[9] 후술하겠지만 진짜로 장칭처럼 되긴 했다. 장칭과 마찬가지로 엘레나도 본인의 히스테리적인 성격적 결함으로 남편 못지않게 국민들을 괴롭혔으며 이후 정치, 사회적인 상황 탓에 고국에서는 어찌어찌 옹호받는 남편들 대신 이들은 고국에서도 무능함과 죄악을 본인이 전부 뒤집어썼기 때문이다.[10] 의미 없는 가정이긴 하나 만약 그녀가 남편을 몰아내고 집권했더라면 남편도 쌈싸먹는 악행을 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1] 물론 이들 중 무려 40분이 차우셰스쿠 부부에 대한 우상화로 채워졌다.[12] 외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13] 그나마 니콜라에를 위해 변명하자면 엘레나가 정계에 입문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라 적어도 이때까지는 아내에게 조종당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때는 잘 쳐봐야 남편의 비공식적 정책 고문에 그쳤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마침 시간이 흐르며 엘레나의 직책이 높아질 때마다 차우셰스쿠 정권의 막장성이 증가한 것도 똑같고.(...)[14] 사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우상화는 북한을 따라한 것이며 실제로 그녀의 남편 니콜라에가 생전에 제일 존경하던 사람이 김일성이었다.[15] '촌스러운' '가정적인' 같은 표현으로 묘사되었다.[16] 이와 비슷하게 남편의 우상이던 김일성과 그의 후계자들인 김정일&김정은도 자신의 얼굴을 '태양과도 같은 얼굴', '봄날의 햇빛 같은 미소'라는 등의 표현을 동원해 묘사하게 했으며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도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용모'의 절세미녀처럼 묘사된다. 다만 김정숙은 사후에 우상화된 거라 엘레나 차우셰스쿠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다.[17] 차우셰스쿠의 몰락 4개월 전인 1989년 8월 23일 국경절 행사 영상에서 이런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을 보면 차우셰스쿠 부부의 모습이 나올 때 항상 멀리서 차우셰스쿠 부부의 모습을 촬영했기 때문에 차우셰스쿠 부부의 얼굴을 명확히 확인하기 힘들다. 마치 김정일이 생전에 북한 주민들에게 목소리를 사실상 공개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다.[18]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사진 속의 니콜라에가 50세 정도로 보여야 한다면 사진 속의 엘레나는 35~45세 사이로 보이게 해야 했는데 엘레나는 사진 속의 자신이 젊어 보이고 싶었다고 한다. 문서 최상단에 있는 엘레나의 초상화는 엘레나의 23세 시절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1968년 남편의 생일 때 남편, 시부모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실물에 비해 상당한 수준의 미화가 들어간 모습이긴 하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별다른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던 젊었을 적의 얼굴은 꽤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권세를 잡고 성격이 악독해지면서 역변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19] 물론 차우셰스쿠는 이전부터 극도의 긴축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컬러방송을 근시일에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20] 참고로 루마니아의 컬러 TV 방송은 유럽에서 가장 늦게 시작했는데 이는 1980년 컬러 방송을 시작한 대한민국(이쪽도 세계적으로 보면 컬러 방송이 늦은 편이었다)보다도 3년이나 늦은 것이며 하다못해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는 물론이고 북한 이상으로 폐쇄적이었던 엔베르 호자 시절의 알바니아마저 루마니아보다 2년 빠른 1981년 컬러 TV 방송을 시작했다.[21] 루마니아의 컬러 방송 비중은 1989년 80%로 늘어났으나 이를 뒤집어 말하면 1980년대 말에도 방송 시간의 20%를 흑백으로 채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이는 당시 루마니아에서 컬러 TV의 가격이 자동차 가격의 절반에 육박하는 고가였기에 당시 시점에도 루마니아 국민들 중 컬러 TV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의 영향이 큰데 이 때문에 루마니아에서 컬러 TV는 차우셰스쿠 부부의 처형 후, 즉 1990년대에야 대중화되었다.[22] 실제로 (그녀가 입안한)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때문에 고통받던 루마니아의 여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사람이 오직 엘레나밖에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23] Eugen Barbu, 1924~1993. 루마니아를 탈출한 지식인들과 반차우셰스쿠 작가들을 '외설적인' 어조로 비난했던 친차우셰스쿠 인사였으며 그가 운영하던 신문들에서 반유대주의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고 1979년에는 루마니아에서 그의 소설이 소련의 소설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심지어 2005년에는 연쇄 미성년자 성매매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그나마 이는 무혐의로 종결되었다.[24] 1992~2008년 대루마니아당 소속 상원의원이었다.[25] 한국 초대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이 사례에 속한다. 그녀 역시 비록 흠이 없다고는 할 수 없고 또 고령인 남편의 신변을 염려해 과잉내조를 해서 이승만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지만 그래도 그녀의 활동은 아내로서 남편을 내조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권력을 노리거나 그런 것도 없었던지라 현재도 이승만은 비판받는 데 반해 그녀에 대해서는 딱히 비판이나 악평은 없다.[26] 이쪽 사례가 바로 육영수. 글도 제대로 모르고 학력 콤플렉스가 가득했던 엘레나와는 달리 중학교 교사를 역임했으며 대학을 가지 못한 것도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반대였다. 만약 육영수 자신도 걸맞은 영부인이 되기 위해 화학 강좌에 참여했다면 학력세탁이 아닌 실력으로 전임 연구원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이상으로 증오를 받았던 엘레나와 정반대로 육영수는 남편을 증오하던 사람들조차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비록 사후에는 실제로는 성격이 나빴는데 자애로운 부인으로 위장했다는 의혹이 돌고 있기는 하나, 육영수의 성격이 가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엘레나와는 달리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말뿐만이 아닌 직접적으로 노력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연히 엘레나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27] 물론 대부분의 수업은 다른 사람이 대리 출석해서 들었다. 그 일례로 시험 중에 부정행위를 하던 엘레나를 쫓아냈던 한 젊은 교수는 수십 년 동안 공포에 떨면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는 남편이 당내에서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던 것 덕분이었다.[28] 물론 북한, 투르크메니스탄이 그러던 것처럼 외국 출판사에 돈을 주고 출판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9] 엘레나에게는 연구 지원금과 장학금을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30] 실제로 2021년 기준으로도 무려 36개의 특허가 유럽특허청에 엘레나 차우셰스쿠 명의로 등록되었다.[31] 참고로 '도이(doi)'는 루마니아어로 '2'를 의미하며 'codoi'는 루마니아어로 '큰 꼬리'를 의미한다. 한국으로 치면 코투, 코이로 읽는 셈이다.[32] 물론 이조차도 기본적인 문법도 맞지 않아 '정확한 루마니아어'로 교정해야 했다고 한다.[33] 영국 방문 당시 영국 정부는 이러한 무리한 요구에 대해 고민하였는데 옥스퍼드 대학교케임브리지 대학교, 헤리엇-와트, 서섹스, 리버풀, 사우스햄턴, 심지어 아들이 공부한 임페리얼 칼리지 등 명문 대학들은 영국의 루마니아 주재 대사가 이 사실을 밝히자마자 일찌감치 명예 학위 수여를 거부했지만 혹시 모를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영국 외무성은 간신히 Polytechnic of Central London,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의 학위를 수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 #[34] 니콜라에는 이 개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고급 가구와 TV가 설치된 전용 침실을 마련한 것은 물론, 축출되기 직전이던 1989년 말에는 대령으로 추대하기까지 했다.(...)[35] 실제로 차우셰스쿠의 자택에 공식적으로 사람이 초대된 경우는 집권 초반인 1969년에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밖에 없었다.[36] 그녀의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중퇴였던 이유만 봐도 알 만하다.[37] 정황상 차우셰스쿠 가문의 본가였던 '봄의 궁전'이 아닌 전국에 40여 개나 있던 별장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38] 그녀도 시크교도 수백명을 학살하도록 명령한 악랄한 독재자이긴 했지만 적어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반문맹 엘레나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이었던 데다 그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유했을 정도의 엘리트였다.[39] 참고로 카터는 미국해군사관학교 출신에 단기 과정이었다 해도 원자력발전공학도 전공한 사람이었으며 이를 넘어 하이먼 리코버 휘하에서 원자력 잠수함 개발에도 참여할 정도로 당시 미국 해군에서도 촉망받던 진짜배기 엘리트였다.[40] 참고로 메르딩거는 유대인홀로코스트 생존자였다.[41] 그녀가 그날 메뉴로 뭐가 나오는지 알았을지는 상상에 맡긴다.[42] 사족으로 그녀의 식습관이 어쨌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남편이 소박한 식생활을 가진 것은 확실한데, 그녀도 출신상 생각보다 소박한 식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호화 생활을 하는 독재자들의 입맛이 소박한 것은 특이한 게 아니라 일반적인 일이며, 화려하게 먹었다는 김일성모부투 세세 세코도 호화음식과 전통음식을 같이 먹는 절충형이었다.(김정일&김정은 부자는 어릴 때부터 지도자의 자식이었으니 논외)[43] 다만 당시 엘레나가 루마니아의 실권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엘레나가 승인한 후에야 발포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100%이고, 심지어는 아예 엘레나가 니콜라에로 하여금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고 지시했을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44] 대신 배반자 명단은 진짜로 있었다고 한다.[45] 하다못해 엘레나 이상의 악녀로 평가받는 셰이크 하시나도 군사정권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민주화영웅에 타락 전에는 방글라데시를 최빈국에서 건져낸 지도자였으며, 이엥 티릿도 프랑스 대학에 유학을 가 영문학 학위를 따고 영어 교육 학교 교장을 역임한 진짜 엘리트였고, 심지어 라나발로나 1세조차 문맹이긴 했어도 메리나 왕국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지켜내고 전통 문화를 부흥시키는 업적이 있었는데, 엘레나는 그런 긍정적으로 평가할 개인 성과나 업적이 티끌만큼도 없다.[46] 정확히는 엘레나의 이름 앞에 붙은 국립과학아카데미회원(Academician), 지식인(Intellectual), 박사(Doctor), 과학자(Scientist)의 약자에서 유래했다는 내용이다.[47] 이는 각 인물들의 행적을 보아 종합해 보면 이멜다의 사치와 에바의 포퓰리즘, 장칭의 권력욕과 성격이 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에바는 이멜다와 장칭과 엘레나와 비교하면 이 명단에 끼이기에는 다소 억울한 감이 없지는 않다.[48] 한국갤럽 조사 기준 한국에서 전두환에 대한 긍정평가 비율이 18%, 부정평가 비율이 73%다.[49] 다만 통계에서는 긍정평가 비율은 뺀 체 부정평가와 모르겠다&무응답 비율(7.7%)만 언급했다. 루마니아에 엘레나를 아직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셈.[50] 상술했듯 차우셰스쿠 집권기에 루마니아인들은 엘레나를 에이즈랑 동일시했을 정도였는데, 이쯤이면 과장이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폭로 당시의 박근혜(긍정평가 4%, 부정평가 93%)보다도 더한 증오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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