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07:50:38

후세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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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압둘라 1세 탈랄 1세 후세인 1세 압둘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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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문재인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김정숙 영부인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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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대통령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튀르키예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2021년 6월 14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 오스트리아
2021년 6월 16일 펠리페 6세 국왕 스페인
2021년 6월 16일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 스페인
2021년 8월 25일 이반 두케 대통령 콜롬비아
2021년 9월 21일 보루트 파호르 대통령 슬로베니아
2023년 7월 13일 안제이 두다 대통령 폴란드
2023년 11월 21일 찰스 3세 국왕 영국 }}}}}}}}}

요르단 제3대 국왕
후세인 빈 탈랄
الحسين بن طلال | Hussein bin Talal
파일:hussain bin talal.jpg
<colbgcolor=#ce1126><colcolor=#fff,#fff> 출생 1935년 11월 14일
요르단 암만
사망 1999년 2월 7일 (향년 63세)
재위기간 1952년 8월 11일 ~ 1999년 2월 7일
서명 파일:후세인 1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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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르단 왕국의 제3대 국왕. 초대 국왕인 압둘라 1세의 손자이다.

1935년 11월 14일에 암만에서 요르단의 제2대 국왕이자 선왕인 탈랄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2. 생애

파일:EhJZyYGXYAEak8K.png
▲ 리비아의 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와 함께. 이후 한 사람은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 자신의 정권이 붕괴/전복되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여 반군과 나토 공군의 공격을 받아 피범벅이 되어 얻어맞아 죽었고, 또 한 사람은 오랫동안 왕위를 지키며 천수를 누리다 1999년 노환으로 승하했으니 이를 미루어보아 인생지사 새옹지마가 아닐 수 없다.

아랍 최고의 명문가인 하심 가문 출신이다. 고향 암만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뒤 알렉산드리아의 빅토리아 칼리지에서 중등과정을 공부했고, 그 다음에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 해로우 스쿨을 졸업한 후 샌드허스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1951년 7월 20일에 압둘라 1세와 함께 예루살렘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드리던 중 팔레스타인 과격분자에게 총격을 받았다. 당시 15살이던 후세인은 천운으로 살아남았지만, 할아버지인 압둘라 국왕은 그 자리에서 시해당하였다. 후세인이 살아남은 과정도 알고 보면 기적인데, 할아버지가 피격당하는 걸 본 후세인은 바로 할아버지를 시해한 암살자를 목격했고, 이에 암살자가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천만다행으로 할아버지가 수여한 훈장 때문에 탄환이 튕겨져 구사일생으로 생존했다고 한다.

압둘라 1세 사후엔 그의 아버지인 탈랄이 즉위했으나, 얼마 안 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바람에 1952년 양위를 선언하였고, 왕태자이던 후세인이 차기 왕위에 올랐다. 덧붙여 탈랄은 상왕 자리에 머물러있다가 1972년에 사망했다.

후세인 1세는 국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요르단의 인적자본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덕분에 요르단은 중동국가 중에서 가장 발전된 교육시설과 의료시설을 갖추는데 성공하였다.

석유없는 국가의 비애[1][2]인 셈이지만, 그 대신 아랍에서 기후론 사람 살만한 곳이 꽤 되어서 왕실과 부유층이 피서지를 적극적으로 건설하고, 더불어 고대 유적지들을 세계적으로 홍보하면서 요르단을 관광대국으로 발전시켰다. 더불어 이스라엘과의 대외관계도 가능한 합리적으로 유지하면서 평화협상을 하는 등 중동에 평화를 안착시키는데도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후세인 1세의 행적은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요르단은 국가의 출발부터가 영국의 외교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나라다. 인구의 구성 또한 60%가 팔레스타인인이고 40% 미만이 본토인인 베두인이며 대략 2% 정도가 체르케스인체첸인[3]이다.[4] 즉 민족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다 하심 가문 등 국가를 지배하는 왕실 지배층들은 요르단 출신이 아닌 아라비아반도 출신이다.[5]

초대 국왕은 왠 과격파한테 시해당하고, 차대 국왕은 즉위하기 전부터 계승 위기로 말이 많았던데다 아예 정신질환으로 양위해 버리는 불안정한 정국이 이어지자, 후세인 1세는 즉위 직후부터 이어진 자국 내 정치적 불안정을 해결하고자 '민주화'를 실시하였다.[6]

그리고 1980년대 후세인 1세의 통치 후반기 경제위기가 찾아와 국내의 여론이 후세인 1세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재차 '민주주의 확대'라는 도구로 그 위기를 극복했다. 한편,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다수당이 후세인 1세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댈 것 같으면 가차 없이 의회를 해산하며 전제정과 헌정을 병행하며 통치했다. 현재 요르단이 아랍 왕국 중 민주주의가 그나마 정착됐다고[7] 평가받는 데에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외교적으로도 요르단 국내에 반미 정서가 들끓어 친미 정책 추진 시 왕실이 위태로울 것 같으면 미국과의 관계도 끊어버렸으며, 반면에 국내에 반미감정이 없고 미국과의 관계가 자신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친미 정책을 추진했다. 즉, 후세인 1세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데 매우 훌륭한 명군이었다.

게다가 검은 9월 사건은 내부 치안의 유지라는 면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국내에서 무장한 채 국경을 넘어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요르단 영내에서 로켓을 발사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해 이스라엘의 침공을 불러왔고, 조직을 결성하여 요르단 경찰과 군대의 통제를 거부하는 한편 요르단인들에 대한 폭력적 행동까지 벌였다.

그가 승하하고 나선 아들인 압둘라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압둘라 2세가 덕업일치의 밀덕후로 유명하지만 실은 후세인 1세부터 그랬는데, 후세인 1세의 취미가 사격, 복싱, 카레이싱, 서핑이었다. 심지어 보잉 747 조종 자격까지 갖고 있어 해외 순방시 전용기를 직접 조종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무선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중동 사람과 교신을 나누고 좋아했다가 나중에 귀한 요르단 우표가 잔뜩 붙은 후세인 1세의 QSL 카드[8]를 받고 기절초풍했다는 에피소드를 무선인들 사이에서 간혹 들을 수 있다.

3. 일화

  • 인디아나 존스 3편 촬영을 적극 후원하면서 촬영지인 페트라를 관광단지로 키우는데 크게 공헌했다.
  • 1980년대 중후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요르단을 순방했을 때 그의 아내 엘레나가 뜬금포로 후세인 1세에게 "요트 내놔" 드립을 시전했다. 그런데 하필 그 요트가 이미 딸에게 준 선물인지라 후세인은 엘레나를 잘 달래서 그 요트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요트를 선물로 줬다. 후세인 1세는 친히 그 요트에 우정이라고 이름을 지어줬건만 엘레나는 그걸 갖고 루마니아로 귀국하자마자 그 요트의 이름을 지도자로 바꿔버렸다.
  • 그는 일부다처제이슬람 국가에선 특이하게도 4명의 아내를 둔 게 아니라 아내를 딱 하나씩 두었다. 첫번째와 두번째 결혼[9]은 이혼으로 끝났고, 3번째 결혼상대인 알리아 왕비는 1977년 헬기추락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 이후 1978년 시리아-레바논계 미국인인 리사 할라비 (훗날 누르 알 후세인 왕비로 개명)와 4번째로 결혼했다. 아랍에선 이런 왕이 희귀한 편이라고 한다.[10] 게다가 그는 일부다처제를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사회활동도 허가하는 등 꽤나 개방적인 세속적 정책을 취하여 여성 정치인과, 교수, 성직자까지 나왔다. 인권 등의 측면에 있어 아랍에서는 보기 드문 개혁적인 국왕. 게다가 1952년엔 입헌군주제를 선포해 현재 요르단은 입헌군주제 국가다. 그래서인지 아랍에 가서 여러 나라 군주들을 대놓고 씹고 욕하는 배짱을 보이던 이탈리아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가 유일하게 멋진 군주라고 칭했다.
  • 1983년 대한민국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한 적이 있었다.당시 대한뉴스 이때 후세인 1세를 정말로 성대하게 맞아들이고 방송국에서도 대대적으로 중계를 했는데, 이계진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이게 알고보니 얼마 뒤의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 방한을 대비한 연습중계였다고. 해당 서적에는 J국(Jordan)의 국왕이라고 나왔지만 이 시기에 한국을 방한한 '국왕'이 이 분밖에 안 계신다.


[1] 사실 요르단 사막 지역 영토 일부를 사우디아라비아와 교환했는데 그 사막에서 석유가 나왔다. 하지만 요르단 국민들이나 하심 왕실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간절히 원하던 항구(아카바)와 바다가 통하는 땅(해안선길이는 20여Km정도)을 얻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요르단은 관광대국으로 두둑히 돈을 벌기에 석유가 꼭 아쉬운 것도 아니다.[2] 자원의 저주라는 말도 있을 만큼 천연자원 위주로 경제가 운영되는 나라들은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내부적으로는 썩어 있는 경우가 많다. 호주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영기업이나 왕족들이 죄다 해쳐먹고, 사회적 인프라 미비나 초중등 교육이 엉망인 경우가 대부분.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항구를 얻은 게 오히려 백 번 나은 결정이다. 요르단은 석유가 없었기 때문에 서비스업과 관광업이 발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석유가 안 나오는 빈국인 단점은 여전히 국가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는지라 요르단은 국가경제에 돌릴 석유를 이라크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주변 아랍 산유국들로부터 대거 수입하고 있다.[3] 캅카스에 살던 사람들이 요르단에 다수 거주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1859년 러시아가 겨우겨우 이맘 샤밀을 제압하며 체첸을 합병한 뒤 러시아는 체첸인들의 메카 순례를 권장, 지원해 주었다. 문제는 끊어주는 출국표가 편도, 그러니까 순례 끝난 뒤에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추방인 셈. 왜 이렇게 했냐면 러시아는 체첸을 병합한다고 하도 고생했던 터라 체첸인들의 수를 체첸에서 줄여보려고 순례를 권장한 것. 결국 순례를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된 체첸인들은 추방당하였고 주로 요르단에 정착하게 되었다.[4] 최근에는 시리아인들과 이라크인들이 내전을 피해서 많이 살고 있다. 현재는 다소 정세가 안정되자 시리아, 이라크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5] 상술한 후세인 1세의 할아버지 압둘라 1세메카 출신이다.[6] 당장에 같은 아랍계 왕국이자 자신의 6촌 형인 파이살 2세[11]가 재위하던 이라크와 먼 친척인 파루크 1세가 각각 1958년1952년에 군부 쿠데타로 총살당하거나 국외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이집트 건너편의 리비아국왕이 해외에 순방길에 나선 사이에 카다피가 주도하는 소장파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으며,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이란 제국은 훗날이긴 하지만 이란 혁명으로 제정이 폐지되고 팔라비 왕조가 몰락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당시 후세인 1세가 요르단 왕실을 영구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헌정을 실시하는 등 전제 왕권을 조금씩 유연화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남쪽의 사우디아라비아오만은 강력한 국왕 중심의 전제정권과 모든 고위장교단과 고위 공직자들 대부분이 국왕의 최측근이나 왕족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민심에 신경을 쓰며 빈틈이 없을 정도로 내치를 잘 하고 있었기에 이라크나 이집트, 리비아, 혹은 이란처럼 쿠데타나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붕괴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다. 당장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왕가가 철권통치를 유지하는 이유가 국민들에 대한 경제지원과 족벌정치 때문이다.[7] 사실 그래봤자 민주주의지수가 118위로 권위주의로 평가받는다. 즉 무늬만 민주주의라는 얘기. 애초에 후세인 1세부터가 진짜 민주주의 군주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를 왔다 갔다 했는데 말이 필요 없다..[8] 아마추어 무선인들끼리 교신을 나눈 뒤 서로 감사를 표하기 위해 교환하는 엽서. 이게 모이면 무선인들의 경력을 나타내는 귀한 컬렉션의 의미를 갖는다.[9] 현재 국왕인 압둘라 2세가 영국계인 두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10]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만 해도 20번 넘게 결혼한 왕도 있다! 아내를 4명까지만 두기에 그 수를 넘으면 이전 여자는 이혼하고서 새로 결혼한다든지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서류상으로만 이혼할 뿐 대우는 이혼 전과 동일하며 같이 데리고 살며 이혼한 아내는 호적상의 아내와 대우가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