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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72b><colcolor=#fff> 이집트 왕국 제2대 국왕 파루크 1세 فاروق الأول | Farouk I | |||
출생 | 1920년 2월 11일 | ||
이집트 술탄국 카이로 | |||
사망 | 1965년 3월 18일 (향년 45세) | ||
이탈리아 로마 산 카밀로 병원 | |||
재위기간 | 이집트 국왕 | ||
1936년 4월 28일 ~ 1952년 7월 26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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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파루크 빈 아흐메드 푸아드 빈 이스마일 빈 이브라힘 빈 무함마드 알리 빈 이브라힘 아아 Farouk bin Ahmed Fuad bin Ismail bin Ibrahim bin Muhammad Ali bin Ibrahim Agha | ||
아버지 | 아흐메드 푸아드 1세 | ||
어머니 | 나즐리 사브리 | ||
배우자 | 이집트의 파리다 (1938년 결혼, 1948년 이혼) 나리만 사데크 (1951년 결혼, 1954년 이혼) | ||
자녀 | 푸아드 2세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
[Clearfix]
1. 개요
이집트 왕국의 제2대 군주이자 이집트 5,300년 역사상 사실상 마지막 국왕.공식적으로 진짜 마지막 국왕은 그의 아들 푸아드 2세지만 생후 6개월 만에 왕위에 올라 11개월 만에 폐위되어 큰 의미는 없다.[1]
2. 생애
2.1. 국왕 시절
1920년 2월 11일에 사실상 영국 식민지나 다름없던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났다.이 왕가의 시조인 메흐메드 알리는 알바니아계 오스만 제국인이었고 19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이집트에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독립하여 왕가를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의 정통성은 희박한 데다 19세기 말에는 영국의 침략을 받아 보호령이 되어 버린지라 이집트/역사 항목에 서술되었듯 당시 이집트는 영국 식민지나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정통성이나 지지가 희박한 왕가도 이집트인들의 민심을 좇기는 커녕 스스로 알바니아인이라는 식으로 행동했고 측근이나 경호원은 모조리 알바니아계, 튀르크(터키)계로 채운지라 이집트인들은 이 왕가를 매우 좋지 않게 보았으며 왕가 자신들도 그렇지만 이집트를 지배하던 귀족 집단은 대부분 튀르크계였다. 파루크 자신도 모어가 튀르크어였으며[2] 아랍어에는 유창했으나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부쩍 커진 아랍 민족주의는 잘 이해하지 않았고 이는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이집트 왕가의 종교는 공식적으로 수니 이슬람이었으나 실제로는 서방인 측근을 두면서 서방식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이슬람 극단주의를 금지하고 단속했으며 여성들에게 베일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파루크 1세 본인은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술을 매우 즐겨 마시기도 했다.[3]
1935년 고등교육을 받으려고 서방 선진국의 여러 엘리트 학교의 문을 두드렸으나 실패하였다. 이튼 스쿨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입시에서 낙방했고 영국 울리치 왕립사관학교의 문을 계속 두드렸으나 입학에 실패하였다. 당시 그를 관찰한 여러 서방의 관찰자에 따르면 공부보다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주색잡기에 몰두했다고 한다.
1936년 아버지인 푸아드 1세가 붕어하자 급거 귀국하여 제위(술탄)를 이어받았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반(半) 식민지였지만 그는 10대에 등극하여 국정에 관심을 두기보다 왕위를 즐기는 데 더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던 미남이라서 백성들에게 인기는 있었다고 한다.
당시 국왕에 도전하는 세력은 와프드당이었는데 이 당은 세속주의-입헌군주제를 내세운 아랍민족주의 정당이었고 이 당의 지도부에는 콥트 정교회 신도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는 총리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전가하면서 교묘하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북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와 영국이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파루크 자신은 영국보다는 이탈리아에 더 기울어졌으나 이집트 왕국은 이탈리아 편을 들지 않고 일단 중립을 지켜 자리 보전에 성공했다. 1943년에는 카이로 회담을 유치하여 국가적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외교적으로 여전히 꼭두각시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집트산 목화의 가격이 크게 올랐고 이 때문에 영국이 이집트에게 4억 파운드의 빚을 지게 되면서 적어도 경제적으로 갑을관계가 역전되었지만 이러한 경제호황에도 극심한 빈부격차는 여전했으며 이집트 정부의 부정부패와 물가상승으로 인해 좌파는 공산당, 우파는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율이 높아졌고 이 시기 본격화된 그의 엽색행각에 대한 소문도 이집트 대중들에게 퍼지면서 그에 대한 지지율도 떨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토지개혁에 소극적이었 던것이 결정타였다.
이렇게 제2차 세계 대전 와중에도 권좌를 위태위태하게 유지했으나 결정적으로 그를 퇴위로 몬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시오니즘의 대두였다. 당시 이집트군은 국내 치안유지에만 쓰이고 있었고 영국의 감시 하에 있어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집트 군부와 내각은 모두 이스라엘 공격에 반대했지만 전국에서 이어지던 참전 촉구 시위와 무슬림 형제단 및 아랍 연맹의 압박으로 그는 참전을 결정했다. 여기까지는 내부적 압력 해소를 위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파루크는 15일 안에 텔아비브 함락이 가능하다는 전쟁장관 하이다르의 허풍을 그대로 믿고 보급, 통신, 교통편은 고사하고 탄약도 없는 이집트 원정군을 이집트 참모부의 조언은 조금도 듣지 않고 마구 밀어넣었다는 점이다. 난데없이 사지로 내몰린 이집트 장교단의 분노는 폭발했고 이스라엘은 아랍 원정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이집트군을 집중적으로 타격하여 이집트는 제1차 중동전쟁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전쟁 패배로 그는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여기에 그가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장교단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것을 우려한 자유장교단은 마침내 1952년 7월 23일 가말 압델 나세르가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1952년 이집트 혁명이 발생했다. 이미 그는 계속된 실책으로 인해 민심은 땅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군은 대부분의 기관을 무혈로 장악했다. 그에게 남겨진 병력은 대대급의 궁전 수비대 정도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의 지원을 모색해 봤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7월 몬티자 궁전을 버리고 라스엘틴 궁전으로 향했다. 쿠데타군 사이에서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나기브와 나세르가 추방을 주장하면서 추방령을 내리기로 결정되었다.
7월 26일 나세르는 쿠데타 이후 주요 기관을 장악한 가운데 궁전에 있던 그에게 오후 6시까지 이집트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는 정오에 자신의 퇴위문서에 서명한 뒤에 자신의 아들 푸아드 2세에게 양위했다. 이후에는 가져갈 만한 재산과 물품들을 급히 챙겨든 뒤에 자신의 요트에 가족들과 함께 승선해 이집트를 떠났고 이탈리아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재산은 1억 달러가 넘었으며[4]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한다. 쿠데타 후 국내 재산은 대부분 몰수당했지만 해외 곳곳에 부동산과 예금이 많았기 때문에 집도 로마 외곽의 위치한 3층짜리 대형저택에서 살았고 자식들을 학비 비싼 스위스의 사립기숙학교에서 공부시킬 정도로 잘 살았다. 쿠데타군은 궁정을 장악한 후 귀금속을 포함한 그의 여러 개인 집기를 공개했는데 그 사치품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여자 관계이며 부패이며 전제주의적 성향이며 워낙 막장행각이 많았던 인물인 만큼 미국은 파루크 1세 치하 이집트에서 미국의 이해에 반하는 정치적 변화를 우려했기 때문에 CIA 국장 앨런 덜레스[5]와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그에게 압박을 가해 이집트에 개혁정책을 도입함으로서 이집트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방지한다는 프로젝트 FF(Project FF)[6]라는 계획을 입안했지만 그가 미국이 도입을 압박한 개혁정책을 시행하지 않자 CIA는 프로젝트 FF의 방향성을 선회해 이집트 자유장교단과 접촉하여 그에 대한 쿠데타를 지원했는데 이 계획의 결과는 1952년 이집트 쿠데타 및 왕정 폐지였다. 여담으로 프로젝트 FF는 1년 뒤 이란 제국의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 축출 쿠데타 계획의 전체적인 형식을 따 오게 했다.
2.2. 퇴위 이후
이탈리아에서 아내 나리만 사데크(1934년 ~ 2005년)[7][8]과 아들인 푸아드 2세[9][10]와 같이 찍은 사진.
전술했듯 해외에 마련해 둔 재산이 많았던 덕에 추방을 당했음에도 엄청 잘 살았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후 모국에서 추방되어 몰타에서 사망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메흐메트 6세나 무아마르 카다피의 군부 쿠데타와 이란 혁명으로 왕정체제가 전복되면서 해외로 쫓겨나 궐석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타국에서 노환과 암으로 쓸쓸이 사망한 이집트의 이웃나라 리비아 알 세누시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이드리스 1세[11]와 이란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팔라비 2세, 아들 카부스의 쿠데타로 추방당해 망명지 영국에서 쓸쓸이 죽은 오만 알 부사이디 왕조의 전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 세력들에게 총탄 세례를 받고 살해당하고 조리돌림 당한 이라크 하심 왕조의 마지막 국왕 파이살 2세 등 다른 중동권 국가의 여러 폐왕들과 달리 꽤 여유롭게 잘 살 수 있었다.
그의 누이동생 파우지아 시린은 이란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첫 번째 아내였기 때문에[12] 왕정 폐지 직후 이란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레자 샤가 거절해서 갈 수 없었다. 이렇게 문전박대를[13] 당하자 파루크 1세는 "그놈이라고 언제나 그 왕위를 유지할 지 아느냐?"며 비아냥거렸는데 정말 1979년 이란 혁명에 의해 레자 샤는 퇴위당했으며 퇴위 직후 이집트로 망명했고 2년도 못 가 1980년 죽어서 이집트에 묻혔다.[14]
이탈리아에서 모나코 국적을 얻어 살아가던 그는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보내다가 1965년 3월 18일 로마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양고기 요리와 굴 요리로 푸짐한 식사를 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쓰러졌는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사후 시신으로나마 조국으로 보내져 무덤에 안장되었다.
아들 푸아드 2세(1952년 ~ )의 현재 모습으로 [age(1952-01-16)]세가 된 그는 아버지의 과거 모습처럼 비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다.[15] 푸아드 2세는 프랑스에서 살았으나 현재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고 이집트는 어쩌다가 한 번씩 방문하는 정도다.[16] 압델 파타 엘 시시를 지지하지만 2017년에 엘 시시 정부가 제2의 수에즈 운하 개통식을 열 때 참석은 거절했다.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 무하마드 알리(1979~)는 아프가니스탄 자히르 샤의 손녀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있다.
3. 못말리는 기행
1967년 4월 5일자 중앙일보에 소개된 파루크 1세 전기 소개 기사살아생전에 별 괴상한 행동거지를 많이 한 괴짜였고 군주나 왕족이라기에는 되레 방탕하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졸부에 가까운 행각을 해 댔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따금 이야깃거리가 된다. 이외에도 온갖 기행으로 소문난 군주인지라 이집트에서는 왕정복고 주장이 별로 힘을 얻지 못하는 편이다.
3.1. 사치와 도벽
자동차 운전 및 수집을 좋아했다. 한 가지 특이점은 붉은색을 좋아했는지 그가 차를 사는 족족 붉은색으로 모조리 도색했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법으로 붉은 차를 모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유는 자기 혼자만 붉은 차를 몰아서 아무리 도로에서 과속이나 음주운전을 해도 경찰들이 자신인 것을 알아보게 해서 벌금을 매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번은 프랑스 여배우를 데리고 캐딜락으로 카이로를 질주하다가 속도위반으로 경찰이 다가오자 순금으로 장식한 권총을 뽑아들기도 했다. #매우 심각한 도벽 증세도 있었는데 윈스턴 처칠과 회담 도중 처칠의 시계를 몰래 훔쳐서 본국으로 가지고 왔다고 하며 이란 팔라비 1세 장례식에 참석한 그날 밤 샤의 관을 털어서 보검과 보석 등을 훔치기까지 해서 영국과 이란과의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킬 뻔 했다. 오죽했으면 차기 샤이자 상주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노발대발하며 이집트 대사에게 "당신네 국왕은 좀도둑이나 다름없다!" 라며 일갈했을 정도.
실제로 당시 이집트에서 최고의 소매치기라 불리던 범죄자를 국왕의 권한으로 사면시키고 그 댓가로 그의 스승이자 제자가 돼서 전설적인 소매치기 기술을 직접 익혔다고 할 정도였다. 애초에 130kg이 넘는 거구로 어떻게 감쪽같이 소매치기가 가능했는지가 참으로 용하다 못해 미스테리인데 안녹산처럼 비만인 체형과는 별개로 몸이 매우 민첩하고 운동 신경도 좋았던 모양이다. 고대~중세 시기에 만들어진 자국 골동품은 물론이고 타 유럽권 유물도 모으는 걸 좋아했으며 282개 정도의 동전을 수집하기도 했다.
잠을 자다가 사자에게 습격당하는 꿈을 꾸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중무장한 왕실 근위대를 이끌고 카이로 동물원에 있는 사자들을 다 쏴죽이기도 했으며 나치가 폭격할 것에 대비해 온 이집트가 등화관제를 하던 와중에도 어두우면 안 보인다고 왕궁 주변의 불을 켜 놓기도 했다.
3.2. 여색
그는 매우 여자 관계가 복잡했다. 18살 때 파리다 왕비와 결혼하여 공주만 셋을[17] 얻었는데 당시의 왕답지 않게 28살에 이혼했다가 1951년에 나리만과 재혼하면서 아들 푸아드 2세를 얻게 되었지만 나리만과도 그의 퇴위 후인 1954년에 이혼했다.포르노도 엄청나게 좋아해서 포르노 사진과 영화들을 수집하는 데 열중이었고 퇴위 직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포르노 자료실을 갖추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망명할 때도 배에 포르노를 실어서 가지고 갔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자리를 빼앗기는 순간에도 정신 못 차리고 색욕에 탐닉한다면서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건 덤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먼 친척이던 어느 이집트 왕족 출신 남성은 왕정이 무너진 후 카이로에서 주차장 관리인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자신을 찾아온 영국인 르포 작가한테 "그 녀석(파루크 1세)은 여자의 가슴 모으기를 가장 좋아했지."라고 경멸했다. 참고로 이 왕족 남성은 죽을 때까지 군부를 몰아내려는 쿠데타 음모를 꾸미는 것을 막기 위한다는 목적 하에 이집트 군부의 감시에 시달리면서 행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여성을 밝히는 호색한으로 상당한 색욕남이기까지 해서 파리다 왕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자들을 가리지 않고 건드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수가 5,000명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 무렵에 첫경험을 했다고 가정하면 1년마다 185명의 여성과 잤는데 이것도 이틀에 한번 꼴로 빈틈없이 이랬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이런 막장성은 그리스 국왕 파블로스 1세 내외가 이집트에 공식 방문을 했을 때 왕비 하노버의 프리데리케 공주가 미녀인 것을 알고 밤중에 몰래 그리스 왕비의 처소로 침입[18]해 강간을 시도했다가 무산[19]된 적도 있다. 이렇게 바람기가 심하다 보니 가정적으로 아내와의 불화가 심했고 2번의 결혼 생활이 이혼으로 끝났지만 망명하고도 여성을 밝히면서 수많은 여성들을 건드리고 다녔다.
3.3. 식탐
엄청난 대식가이자 고급 요리와 술을 즐겨먹는 미식가이기도 했다.1940년대 후반 즈음 들어 본격적으로 식탐이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 아침으로 계란 12개로 만든 큼직한 오믈렛, 시리얼 한 사발, 베이크드 빈즈 한 접시, 생크림을 얹은 초콜릿 푸딩 하나를 먹었고 이어서 점심으로 곱게 다진 아몬드, 설탕, 생크림을 넣고 만든 소스를 얹은 랍스터 한 마리, 로스트 치킨, 치킨 프리카세, 사프란과 각종 향신료로 향과 맛을 낸 양고기 한 덩이를 감자, 콩, 쌀, 아티초크를 곁들여서 먹었다.
그의 식탐은 생애 마지막 날까지 일상화되어 그가 죽던 날 저녁에는 샌드위치 여섯 조각, 감자튀김 4인분, 치즈무스 케이크 2조각, 탄산음료 3병을 눈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우고는 미리 예약을 해 놓은 고급 요리 레스토랑에서 푸짐한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로는 타바스코 소스를 뿌린 생굴 12개, 에비앙 1리터, 감자튀김,
자신의 정력을 위해 매주 덴마크 코펜하겐에 여행을 가서 랑구스틴과 신선한 생굴을 300개씩 주문해서 샴페인 2병을 곁들어서 먹었다. 종교는 엄격히 술을 금한다는 이슬람이었지만 무슬림이라도 마실 사람은 마시는 데다 애주가라서 프랑스 와인, 코냑, 영국산 에일, 스카치 위스키를 무척이나 즐겨 마셨는데 한 끼 식사에 세 병의 와인을 족히 비울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말년에 들어 신장약과 고혈압 약을 달고 살았으며 40대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망하던 날에는 혈압약을 복용해야 했기 때문에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다만 그도 상술한 것처럼 10대~20대 중반 시절에는 미남이었지만 대략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기를 기점으로 가장 믿고 따르던 최측근들이 고령화되면서 사망하고 원하던 아들은 나오지도 않고 국정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를 먹는 것으로 해결하면서 비만이 되어버렸다. 어찌나 살이 쪘는데 폐위되어서 해외로 망명할 때 체중이 무려 130kg에 달했다.
[1] 단, 이는 이집트를 다스린 모든 국왕을 통틀어서 따졌을 때의 이야기고 근현대 이집트 왕국은 알바니아-터키계 메흐메트 알리 왕조이기 때문에 이집트 토착민이 아니며 이전에는 페르시아, 로마 제국, 아랍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 영국 순으로 외세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이집트의 마지막 토착민 군주는 고대 제30왕조의 3번째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였다. 이집트는 넥타네보 2세가 죽고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한 후 파루크 1세가 물러나기까지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외세의 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다만 이게 꼭 암울한 것만은 아닌 것이 넥타네보 2세 이후로도 토착민이 아니었을 뿐이지 파라오라는 직책은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까지 계승되었고 로마 시대 군주들도 비슷한 컨셉을 유지했고 뒤를 이어 이집트를 다스린 아랍인 군주들도 이집트를 자신의 나라로 생각하고 다스렸기 때문에 이집트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당시에도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지금도 중동의 대중문화를 책임지는 주요한 중동의 문화강국이다. 거기다 근현대 메흐메트 알리 왕조 역시 파루크 1세가 다 말아먹어서 그렇지 메흐메트 알리를 비롯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왕족들과 왕실 문화가 있었기에 이 시절의 역사 또한 현대 이집트인들에게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2] 당시 이집트 궁정에서는 프랑스어가 상용어였다. 19세기 유럽 왕가들의 대부분은 프랑스어를 상용어로 썼던 만큼 여기에 발 맞춘 것으로 보인다.[3] 이슬람은 공식적으로는 술을 금하지만 실제로는 술을 즐겨 마시는 신자들도 많은 편이다.[4]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11억 5135만 달러 정도다. 한화로 대충 환산해도 약 1.4조 원이나 된다.[5] 국무장관으로 유명한 존 포스터 덜레스의 동생이다.[6] 참고로 여기서 FF는 Fat Fucker (살찐 씨발놈)(...)의 약자이며 여기서 '살찐 씨발놈'이 의미하는 것은 파루크 1세 본인이다.[7] 왕비가 된 지 1년 만에 아들을 낳고 그 해 퇴위했다.[8] 퇴위 후 망명 생활의 고달픔과 파루크 1세의 바람기에 질려 1954년 이혼하고 이집트로 돌아왔다. 2번 더 결혼한 후 2005년에 카이로 근교에 있던 세번째 남편의 집에서 살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카이로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9] 1952년생으로 지금도 생존해 있다.[10] 푸아드 2세는 1976년에 프랑스인 여성 도미니크와 결혼하여 장남 무하마드 알리, 차남 파크루딘, 딸 파지아-라티파를 두었지만 도미니크와는 1996년에 이혼하고 말았다. 2013년 10월 대통령 후보로 압델 파타 엘 시시를 지지했다.[11] 리비아의 전 독재자 카다피는 이드리스 1세 전 국왕에게는 사형 판결을 내렸지만 정작 집권 후 이드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구(舊) 왕가의 사람들은 징역형이나 재산 몰수 등 낮은 처벌을 내렸거나 구(舊) 왕가 인사들 중 일부는 정부 장관직에 임명하는 등 어느 정도는 구(舊) 왕족들을 포용적으로 대했다.[12] 다만 이들은 1948년에 이혼했다.[13] 문전박대를 당한 원인도 따로 있었는데 자기 여동생과 매제인 팔라비까지 도둑질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중 한 건은 팔라비 1세 국상 중에 발생한 선 넘는 짓거리라 팔라비 2세가 너네 왕은 도둑놈이라고 이집트 외교관들에게 화를 낼 정도였다.[14] 다만 나세르 정권 이후 엣 무함마드 알리 왕조 일가들의 귀국이 허용되었던 이집트와 달리 이란은 여전히 망명 중인 옛 팔라비 왕가 인사들의 귀국을 불허하고 있다.[15] 그래도 아버지의 비대함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것이며 그것도 노년이 되면서부터 간신히(...) 얻은 것이다. 1990년대 프랑스 언론에 공개된 푸아드 2세의 40대 후반 시절 사진을 보면 아버지에 비해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슬림함을 자랑한다.[16] 나세르 정권 시기에 내려진 구 왕조 일가의 입국 금지령이 나세르 사후에 폐지되었고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푸아드 2세를 위시한 구 왕조 일가들이 이집트에 갈 수 있게 되었다.[17] 페르알, 파지아, 페디아 공주[18] 이것도 나름대로 손을 써서 프리데리케 왕비가 머무는 왕궁을 정전시켜 버리고 혼란한 틈을 타 어두운 밤중에 몰래 침입한 것이었지만 체취로 인해 금방 정체를 들켰다고 한다.[19] 다행히 프리데리케 왕비는 "밖에 보초 서고 있는 근육질 남자가 내 남편인데, 이길 자신 있겠어요?"라고 도리어 협박했고 파루크 1세는 그냥 웃음으로 무마하고 물러남에 따라 프리데리케 왕비가 간신히 정조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