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9:16:37

딘 애치슨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c224,#db9e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토머스 제퍼슨 에드먼드 제닝스 랜돌프 티모시 피커링 존 마셜
<rowcolor=#ffc224,#db9e00>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매디슨 로버트 스미스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rowcolor=#ffc224,#db9e00>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헨리 클레이 마틴 밴 뷰런 에드워드 리빙스턴 루이스 맥래인
<rowcolor=#ffc224,#db9e00>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존 포시스 대니얼 웹스터 에이벌 P. 업셔 존 C. 칼훈
<rowcolor=#ffc224,#db9e00>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임스 뷰캐넌 존 M. 클레이턴 대니얼 웹스터 에드워드 에버렛
<rowcolor=#ffc224,#db9e00>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윌리엄 L. 마시 루이스 카스 제레미아 S. 블랙 윌리엄 H. 수어드
<rowcolor=#ffc224,#db9e00>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엘리후 B. 워시번 해밀턴 피시 윌리엄 M. 에버트 제임스 G. 블레인
<rowcolor=#ffc224,#db9e00>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프레드릭 T. 프레링후이슨 토머스 F. 바야드 제임스 G. 블레인 존 W. 포스터
<rowcolor=#ffc224,#db9e00>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월터 Q. 그레셤 리차드 올니 존 셔먼 윌리엄 R. 데이
<rowcolor=#ffc224,#db9e00>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존 헤이 엘리후 루트 로버트 베이컨 필랜더 C. 녹스
<rowcolor=#ffc224,#db9e00>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윌리엄 J. 브라이언 로버트 랜싱 베인브리지 콜비 찰스 에번스 휴스
<rowcolor=#ffc224,#db9e00>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프랭크 B. 켈로그 헨리 L. 스팀슨 코델 헐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주니어
<rowcolor=#ffc224,#db9e00>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제임스 F. 번즈 조지 C. 마셜 딘 애치슨 존 포스터 덜레스
<rowcolor=#ffc224,#db9e00>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크리스찬 허터 딘 러스크 윌리엄 P. 로저스 헨리 키신저
<rowcolor=#ffc224,#db9e00>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사이러스 밴스 에드먼드 머스키 알렉산더 헤이그 조지 P. 슐츠
<rowcolor=#ffc224,#db9e00>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임스 베이커 로렌스 이글버거 워런 크리스토퍼 매들린 올브라이트
<rowcolor=#ffc224,#db9e00>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rowcolor=#ffc224,#db9e00> 제69대 제70대 제71대
렉스 틸러슨 마이크 폼페이오 토니 블링컨 }}}}}}}}}
<colcolor=#000000>
미합중국 제51대 국무장관
딘 구더햄 애치슨
Dean Gooderham Acheson
파일:Dean_Acheson.jpg
<colbgcolor=#172172> 출생 1893년 4월 11일
미국 코네티컷주 미들타운
사망 1971년 10월 12일 (향년 78세)
미국 메릴랜드주 샌디스프링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51대 국무장관
1949년 1월 21일 ~ 1953년 1월 20일
정당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냉전 시대의 첫 국무장관2.3. 말년
3. 기타 자료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1]
딘 애치슨은 미국의 51대 국무장관으로, 해리 트루먼 시기에 재임했다. 냉전 시기 미국 외교정책의 서문을 연 인물이다.

6.25 전쟁 직전 애치슨 라인을 선언한 장본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때문에 한국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1893년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났다. 1915년에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였다.

그 후 애치슨은 민주당에 가입하고,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의해 재무부 부장관에 임명된다.

2.2. 냉전 시대의 첫 국무장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타계하자, 후임 대통령에 취임한 해리 S. 트루먼에 의해 국무부 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애치슨은 소련에 회유적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과의 갈등이 노골화되면서, 그 역시 서유럽에서 대소 강경 노선으로 점차 기울어졌다. 1949년 트루먼이 재선되면서, 애치슨은 트루먼의 2기 내각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미국이 주도하는 NATO 결성이 이루어졌다.

1949년 일명 <중국백서>(China White Paper) 정식명칭 <United States Relations with Chin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Period 1944~1949>를 발간했다.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의 끔찍한 부패를 비난하면서 그를 버리는 대신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에 접근하려고 시도하였다. 애치슨은 마오쩌둥이 티토처럼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할 가능성을 주목했다. 그것을 위해 나온 것이 바로 애치슨 라인이다.

기존에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여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식으로 알려졌는데, 냉전 이후 연구성과에 따르면 애치슨 선언은 남침을 유도한게 아니다. 국내에서 남침유도설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조차도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애치슨 라인은 남침을 유도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리처드 쏜턴 같은 남침유도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NSC-68을 주목하지, 애치슨 라인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현대에는 애치슨 라인은 티토-스탈린 결렬처럼 중소결렬을 시도했다고 본다.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에서 애치슨 라인은 중소 결렬 시도라고 한다. 한마디로 애치슨 라인은 중국에게 보내는 유화책이었다. 헨리 키신저가 한 핑퐁외교의 선배격 되는 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소 결렬이 이뤄진다면 대만과 한반도를 중국의 세력권으로 넘겨줄 수 있었지만, 중소 동맹이 이뤄졌기에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하지 않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1차 회담 후, 마오를 모스크바 외곽의 어느 한적한 지역에 머물게 하고 오랫동안 관찰하였다. 마오도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안하고 먹고 싸고 자기만 한다"라고 원색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였다. 마오는 담판을 짓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빼들었다. 그는 스탈린을 향해 "영국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다. 우리도 영국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려 한다"

그리고 미국도 이에 호응한다. 미국은 마오쩌둥이 소련에 한 달 이상 머무르는 특이한 현상에서 중·소 불화 가능성을 파악한 것이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와 대만을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시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미국은 중국을 위협할 의도가 없다는 호의적인 신호를 보낸 것이다. 스탈린은 고민이 깊어진다. 마오가 소련을 떠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손잡으면 어떻게 하나, 마오쩌둥이 공산권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유고의 티토처럼 독자노선을 걸으면 어떻게 하나⋯ 등등. 모두가 소련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들이다.
임방순, 어느 육군 장교의 중국 체험 보고서, 50~51p

1953년 공화당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2.3. 말년

공직을 떠난 후에도, 그는 외교계 원로로서 후임 정부들에 자문을 제공하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 케네디 행정부의 요청을 받고 정책 조언을 하기도 했는데, 소련과의 일전 불사를 포함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하지만 케네디 행정부는 그보다는 온건한 쿠바 봉쇄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애치슨은 위기 당시 유럽 특사로 파견되어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아데나워 서독 수상 등으로부터 쿠바 봉쇄에 관한 지지를 얻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애치슨은 케네디의 피살 후 들어선 린든 존슨 행정부에서도 일정 수준의 자문을 했다. 당초 그는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전 개입을 지지했지만, 이후 철회하였다. 후임 닉슨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헨리 키신저도 애치슨의 자문을 받았다.

이후 1971년, 메릴랜드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뇌졸중으로 눈을 감는다. 향년 78세. 유해는 워싱턴 조지타운에 안장되었다.

3. 기타 자료

트루먼 도서관acheson paper에 애치슨이 남긴 자료들이 있다.

4. 둘러보기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0044C9; border-right: 10px solid #0044C9;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직위 명단
부통령 <colbgcolor=#fff,#1f2024> 앨번 W. 바클리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주니어제임스 F. 번스조지 C. 마셜딘 애치슨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 주니어프레드 M. 빈슨존 웨슬리 스나이더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탈루이스 A. 존슨조지 C. 마셜로버트 A. 로벳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톰 C. 클라크J. 하워드 맥그래스제임스 P. 맥그레너리
체신장관 프랭크 C. 워커로버트 E. 해네건제시 M. 도널드슨
내무장관 해럴드 L. 아이크스줄리어스 알버트 크루그오스카 L. 채프먼
농무장관 클로드 R. 위커드클린턴 앤더슨찰스 F. 브래넌
상무장관 헨리 A. 월리스W. 에이버럴 해리먼찰스 W. 소여
노동장관 프랜시스 퍼킨스루이스 B. 슈웰렌바흐모리스 J. 토빈 }}}
}}}}}}}}}



[1] "Korea came along and saved us" 역설적이게도 애치슨 라인을 그었던 자신의 실수로 한국 전쟁이 벌어지자 그로 인하여 미국의 동맹이 강화되고 소련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챙길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