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이자 제2대 대통령에 대한 내용은 존 애덤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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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 1767년 7월 11일 |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매사추세츠 식민지 브레인트리 (現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레인트리) | |||
사망 | 1848년 2월 23일 (향년 80세) | ||
미국 워싱턴 D.C. | |||
재임기간 | 제6대 대통령 | ||
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4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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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루이사 캐서린 존슨[1] | ||
자녀 | 조지, 존 애덤스 2세 , 찰스, 루이사 |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B.A.) 하버드 대학교 (M.A.) | ||
종교 | 유니테리언[2] | ||
신장 | 171cm | ||
소속 정당 | [[연방당| 연방당 ]] → [[민주공화당(미국)|민주공화당 ]] → [[국민공화당|국민공화당 ]] | ||
문장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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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is is the end of Earth. I am content.
이승도 끝이구만. 난 만족한다.
애덤스의 유언.
이승도 끝이구만. 난 만족한다.
애덤스의 유언.
미국의 제6대 대통령.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장남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다.[3] 정계 활동 당시 민주공화당내 계파 싸움으로 인해 결국 당을 쪼개지게 만들었다.[4] 퇴임 후 노예제 폐지 등에 힘써 지미 카터와 더불어 퇴임 후의 업적이 임기 중의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줄여서 JQA라고도 하며 나무위키에선 저 단어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2. 생애
2.1. 대통령 당선 전
1818년의 애덤스. |
매사추세츠에서 존 애덤스와 애비게일 퀸시 애덤스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가인 애덤스 가문과 외가인 퀸시 가문은 보스턴의 명문가이자 보스턴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들이다.[5] 유년기부터 외교 업무로 유럽에 출장을 다닌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가정 교육을 받는데 유년기의 경험은 애덤스의 국제적 안목과 외국어 학습에 큰 도움이 준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1791년에 유럽 각지를 다니며 외교 사절로 근무한다. 이후 귀국하여 여러 공직을 거치다가 제임스 매디슨에 의해 프로이센 대사와 영국 대사를 지내며 미영전쟁 종전 협상인 겐트 조약에도 참석하며 외교 분야에서 명석함을 발휘한다.[6]
제임스 먼로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는데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와 북서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교섭을 맡았고 매입을 성사시킨다. 매입 성공으로 미국의 영토는 태평양에서 대서양에 이른다. 먼로 독트린을 구상하고 작성한 사람 역시 애덤스이다. 먼로 행정부 8년을 국무장관으로 일하였는데 업적이 매우 커서 현대에도 유능한 미국 국무장관으로는 상위권을 기록한다. 화려한 언변과 뛰어난 외교 능력 덕분에 애덤스에게는 '노련한 능변가(Old Man Eloquent)'라는 별명이 붙는다.
2.1.1. 1824년 대통령 선거와 당선
미국사의 3대 부패한 거래 Corrupted bargain | ||
1824년 애덤스와 클레이의 거래 | 1877년 1876년의 타협 | 1974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령 사면 |
애덤스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 결과. |
화려한 가문과 출중한 능력을 검증받은 애덤스는 1824년에서 먼로의 뒤를 이을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지만 미영전쟁 당시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하여 유력한 영웅으로 부상한 앤드루 잭슨도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이 시기 야당인 연방당은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없는 것에 가까워져서 사실상 대선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이 민주공화당 소속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윌리엄 크로퍼드 재무장관이 대통령 후보, 앨버트 갤러틴이 부통령 후보로 당의 지명을 받았지만 일부 당원 위주의 폐쇄적인 전당대회 방식에 불복하여, 다수의 후보가 비공식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난립한다.
결국 애덤스와 잭슨을 비롯하여 헨리 클레이나 윌리엄 크로퍼드가 후보로 떠올라 각자 선거운동을 한다. 아무래도 인기는 미영전쟁의 영웅인 잭슨이 우세했기 때문에 득표 수에서는 41.3%로 1위를 차지하고 선거인단에서도 반란표가 등장하면서 선거인단 역시 1위를 차지한다. 뒤를 이은 2등인 애덤스는 30.9%를 얻는 선에 그쳤다.
하지만 4명의 후보 모두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정헌법 12조에 의해 의회에 대통령 결정이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연방 하원의원으로 다시 선거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대략 얻은 선거인단이 애덤스가 84, 잭슨이 99, 크로퍼드가 41, 클레이가 37이었는데 애덤스와 클레이가 서로 협상해 일종의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클레이를 지지하던 서부의 4개 주가 애덤스 지지로 돌아선 것.
연방 하원의원을 통한 선거는 '주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7] 13개주에서 앞선 애덤스가 7개주에서 앞선 잭슨에게 승리, 제6대 대통령은 애덤스가 차지한다. 2등과 4등의 연대가 1등을 이긴 것이다. 참고로 애덤스의 득표율은 역대 당선자 중 득표율이 가장 낮았다. 그 다음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39%.
아이러니한 사실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어느 후보도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의회가 결정한다는 수정헌법 12조가 채택될 당시 애덤스는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자신이 반대한 법안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헨리 클레이와의 타협으로 대통령이 된 애덤스는 취임하자마자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고 라이벌인 잭슨은 당연히 클레이를 이스카리옷 유다라고 조롱하며 애덤스와 같이 싫어하였다. 국무장관이 될 당시 40대였던 클레이는 이후로도 상원의원을 역임하며 1850년대까지 미국 역사의 한 폭을 장식한다.
부통령 선거는 갤러틴이 마틴 밴 뷰런의 설득으로 출마하지 않으면서[8] 민주공화당 후보들의 난립 속에 존 C. 칼훈이 260명 중 182명을 확보하면서 당선된다. 잭슨과 애덤스 모두 부통령으로 칼훈을 지명하였는데 애덤스가 승리하면서 칼훈은 애덤스 정부의 부통령이 된다. 다음 대선에서 칼훈은 잭슨과 손을 잡고 재선 부통령이 되었으나, 다시 잭슨과 갈라지면서 부통령직을 사임한다.
2.2. 대통령 당선 후
제임스 먼로의 임기 중반부터 나타난 경기침체가 조금씩 호전되고 나라가 안정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애덤스의 임기는 대형 사건이나 눈에 띄는 업적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연방파가 정계에서 소멸된 상황이었지만 애덤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강한 연방주의를 신봉하였다.매디슨과 먼로는 각 주의 도로나 운하 건설에 연방 정부가 개입하는 건 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애덤스는 연방 정부가 중심이 되어 도로나 운하 건설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박식한 지도자답게 교육과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워싱턴에 국립대학과 천문관측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미국은행의 허가를 유지하는 것도 찬성하였고 뉴잉글랜드와 뉴욕에 집중된 미국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겼지만 남부와 서부 지역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바람에 이는 남부에서 증오스러운 관세법이라고 비판받았다. 주특기인 외교에서도 국무장관 시절과 달리 이렇다할 성과가 나지 않았다. 1826년 파나마 국제회의에서 미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 회의에 미국 대표를 참석시키자는 것은 남아메리카의 시몬 볼리바르가 서구 국가들의 협력을 증진시키자는 의도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남부 출신 의원들이 중심이었던 연방의회는 미국에서 실시하는 노예제가 국제회의에서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서 국제회의에 참석할 대표단의 인준을 늦게 가결한다.[9] 뒤늦게 대표단은 파나마로 출국했지만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회의는 종료되었다.
애덤스 본인도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에, 융통성도 없어 전임자인 먼로와 달리 연방 의원들을 소집하여 설득할 수완과 대화를 이끄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애덤스의 정치적 기반이 뉴잉글랜드와 뉴욕에 한정된 점도 새로운 정책을 발의해도 국민들에게 지지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임기 말인 1828년에 애덤스는 재선을 노렸고 경쟁자는 4년 전 애덤스에게 대통령 자리를 빼앗겨 설욕을 다짐하던 잭슨이었다. 이 시기 민주공화당도 잭슨을 지지하는 일파와 애덤스를 지지하는 파벌로 분열되는데 잭슨을 지지하는 파벌이 현재의 민주당을 창당하고 애덤스를 지지하는 파벌이 국민공화당을 창당한다.
국민공화당은 훗날 휘그당의 전신이 되는데, 휘그당이 정식으로 출범한 해는 1834년이지만 애덤스를 지지하고 잭슨을 반대한 세력들이 모여서 창당한 당이므로 이들이 휘그당의 전신이다.[10] 잭슨은 자신의 인기를 십분 활용하는 것은 물론 애덤스를 귀족들과 부유층의 대통령이라고 대대적으로 힐난하는데, 애덤스는 잭슨의 선전에 대해 크게 방어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잭슨에게 참패한다.[11]
2.3. 퇴임 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의 농장에서 은거하며 지내다가, 1830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정치 경력을 이어간다. 그리고 애덤스는 원로 정치인이자 전직 대통령으로서 노예제 폐지의 선봉장이 되어 노예제를 강하게 비판했다.[12] 1830년 하원에서 노예제 반대의 청원이 토론이나 행동을 비롯한 어떤 형태로도 거론되면 안 된다는 내용의 법안이 채택되자 폐지하기 위해 수 년을 투쟁하였다. 결국 미국 헌법을 거론하며 이 법안이 위헌이라는 투쟁을 벌인 끝에 1844년에 이 법안은 폐지된다. 1843년에는 "만약 노예제가 피와 전쟁을 통해야만 없어질 수 있다면 전쟁이라도 해야 한다."라고 발언하였다.천문 관측소를 임기 도중 설치하지 못하였으나, 1843년에 신시내티 천문관측소가 설립되자 이 자리에 참석하여 그 기쁨을 누렸다. 천문 관측소는 거의 20년만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였다. 그리고 쿠바에서 도망쳐 미국 해안에 잠입한 후 스페인 함선에서 일어난 반란인 아미스타드 호 사건의 주범인 흑인들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연방 대법원에서 이들을 변호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스미스소니언 재단 설립을 주도하였고 결국 1846년 재단 설립법이 통과되는 데 기여했다.
1848년 제임스 포크가 멕시코 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그로부터 2일 뒤인 1848년 2월 23일에 사망한다.
3. 여담
1843년 3월 16일에 촬영한 사진.[13] |
1846년에 촬영한 사진. |
-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사진을 남긴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는 1년 뒤인 1844년에야 첫 사진을 남긴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보다도 이른 기록이었지만, 애덤스가 첫 사진을 남기기 1년 전인 1842년에 프랑스의 루이필리프 1세 국왕이 사진을 남겼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진을 남긴 국가원수'라는 타이틀은 루이 필리프에게 선수를 빼앗기게 되었다. 물론 애덤스의 재임 시기는 사진의 태동기였기 때문에[14] 재임기간 중에 사진을 찍은 건 아니고 퇴임 후에 찍은 것이다. 재임 중에 사진을 찍은 첫 대통령은 제임스 K. 포크이다.
참고로 존 퀸시 애덤스는 평소 과학 발전에 관심이 많아 미국 특허청에서 새로운 발명품을 확인하는 데 시간을 보낼 정도였으나, 웬일인지 사진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결국 이 사진은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던 호레이스 에버렛[15]에게 보내졌으며, 1991년에 에버렛의 후손이 부모님 집의 책상 서랍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참고로 이 사진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한동안 이 사진이 호레이스 에버렛의 사진인 줄 알았다고 한다. #
- 아버지가 연방주의자였고 본인도 영향을 받아 이념 갈등이 있었음에도 애덤스는 제퍼슨의 반연방주의자들과 한 편이 되었다. 물론 초기 연방주의자들이 내세운 연방 정부의 권한 강화는 존 애덤스 집권 시기 어느정도 이뤄졌기 때문에, 이후의 세력 약화나 형태 변화는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이후부턴 다른 의제를 가지고 싸우는 경우가 더 많아졌기 때문. 다시 연방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남북 전쟁 시기에 접어들어서다.
- 장남 조지 워싱턴 애덤스는 28세에 자살했다고 여겨지며, 차남 존 애덤스 2세도 알코올 중독으로 31세로 요절했다. 3남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시니어는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활약했고, 그의 아들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주니어와 손자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3세가 대를 이어 정계에서 활약했다.
- 영부인 루이사는 미국 외교관과 영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지는 영국이었다. 그래서 미국 국민들은 루이자를 최초의 외국인 출신 영부인으로 취급한다.
- 애덤스의 이색적인 취미는 수영이었다. 임기 도중 새벽에 일어나 혼자 포토맥 강으로 가서 옷을 모두 벗고 다이빙을 한 후 한참 헤엄치다가 다시 뭍으로 올라와서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애덤스가 일과를 시작하는 방법이었다.
- 과일을 매우 좋아했다. 과일 중에서도 신선한 과일을 골라서 먹었다고 한다.
- 미국 최초의 여성 기자인 앤 로얄이 국정 현안에 대한 애덤스의 생각을 듣기 위해 애덤스를 찾아가서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이에 애덤스가 앤의 요청을 거절하고 말없이 강으로 뛰어들어 수영을 시작하자 앤은 애덤스의 옷을 깔고 앉은 다음 애덤스에게 "인터뷰에 응하실 때까지 저는 여기 앉을 거에요."라고 압박하였다. 당황한 애덤스가 "알겠소. 인터뷰할 테니까 옷부터 입읍시다. 옷을 갈아입을 동안 수풀 안으로 가 주시오."라고 요청하자 앤은 "믿을 수 없어요. 옷만 입고 가시려고요?"라고 버텼다. 결국 애덤스는 인터뷰에 제대로 응하겠다고 몇 번을 약속한 후에야 물 밖으로 나와서 인터뷰를 하였다.
-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평가받는데, 아내인 루이사와 혼인 서약을 마친 후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내 조국을 더 사랑하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상술했지만 아내인 루이사는 영국 출신이다.
- 젊어서도 고지식한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하버드 대학교 학생 시절 독립전쟁의 격전지인 벙커힐에서 기념식이 열리고 학생들이 바베큐 파티를 준비하는데 친구들이 애덤스에게 참석을 권유하자 애덤스는 화를 내며 거절한다. 친구가 이유를 묻자 "우리 독립군들이 영국과 싸워 수많은 희생자를 낸 신성한 그곳에서 바베큐나 구울래?"라고 구박하였다. 말만 들으면 독립군이 참패한 전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독립전쟁 초기에는 보기 드물 정도로 독립군이 완승한 전장이 벙커힐이다. 훗날 애덤스가 정계에 입문한 후에도 이 성격은 변하지 않아서 지지자들도 화강암 조각처럼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 임기 중 오리건 국경 분쟁과 관련하여 컬럼비아 강 하구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영국 대사와 설전을 벌였다. 점점 언성이 높아진 끝에 애덤스가 "당신 주장처럼 컬럼비아 강 하구가 영국의 소유라는 말을 인정한다면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셰틀랜드 군도는 우리 미국 땅이오!"라고 말하자 영국 대사는 발끈하여 "그럼 달도 영국 땅이라고 하시죠?"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애덤스는 이렇게 반박하며 영국이 지구 곳곳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아니오. 난 영국이 달에 대해 독점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소. 하지만 사람이 살 수 있는 이 지구에는 영국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곳이 없지 않소?
- 애덤스의 임기 중에 백악관에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수세식 화장실은 애덤스의 미들네임인 '퀸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이던 시절 상무장관인 허버트 후버와 백악관 복도를 거닐다가 애덤스의 초상화를 보고 후버에게 "저 초상화의 머리가 너무 빛나지 않소?"라고 물었다. 후버가 대답하기도 전에 쿨리지는 물감과 사다리를 가져와서는 애덤스의 초상화로 올라가서 머리를 검은색으로 칠했다. 쿨리지가 퇴임하고 후버가 대통령이 된 후 애덤스의 증손자인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3세는 해군장관이 되어 후버를 만나려고 백악관에 왔다가 훼손된 애덤스의 초상화를 보고 기겁을 했다. 찰스는 후버를 만나서 강력하게 항의했고, 후버는 찰스에게 사과하고 훼손된 초상화를 복구했다고 한다.
-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주관할 때 드물게 2명의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대상은 자신의 아버지[16]인 존 애덤스와 아버지의 정적이었던 토머스 제퍼슨. 두 사람은 같은날인 1826년 7월 4일에 사망하였고 당시 애덤스가 대통령이었다.[17][18]
-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외국어를 구사하였던 대통령이다.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이탈리아어와 러시아어도 어느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여가 시간때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로 쓰여진 문서를 공부했다.
- 2006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의 심리학자 딘 사이먼튼 교수가 역사계량학적 방법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IQ(지능 지수)를 추정하는 연구를 실시한 결과, 존 퀸시 애덤스의 IQ는 168.75에 달해 IQ가 가장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대통령으로 꼽혔다. 같은 조사에서 2위인 토머스 제퍼슨(153.75), 3위인 존 F. 케네디(150.65)보다도 월등히 높았다.[19]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0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매사추세츠 제1구 | [[연방당| 연방당 ]] | 1,839 (49.21%) | 낙선 (2위) | |
1803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매사추세츠 | 86 (50.29%) | 당선 (1위) | 초선[결] | |
180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213 (46.10%) | 낙선 (2위) | |||
1820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0 (0%, 1명) | [22] | |
1824 | 미국 대통령 선거 | 116,296 (31.95%, 84명) | 당선 (1위) | 초선[23] | ||
1828 | 미국 대통령 선거 | [[국민공화당| 국민공화당 ]] | 500,897 (43.63%, 83명) | 낙선 (2위) | ||
183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매사추세츠 제11구 | 1,811 (74.77%) | 당선 (1위) | 초선 | |
183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매사추세츠 제12구 | 2,592 (78.40%) | 재선 | ||
1833 | 미국 주지사 선거 | 매사추세츠 | [[반메이슨당| 반메이슨당 ]] | 18,274 (29.14%) | 낙선 (2위) | |
183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매사추세츠 제12구 | [[국민공화당| 국민공화당 ]] | 3,234 (86.29%) | 당선 (1위) | 3선 |
183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 3,125 (83.31%) | 4선 | ||
183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4,100 (59.23%) | 5선 | |||
184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5,948 (54.60%) | 6선 | |||
1841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매사추세츠 | 3 (0.74%) | 낙선 (3위) | ||
184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매사추세츠 제8구 | 5,996 (51.86%) | 당선 (1위) | 7선 | |
184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8,089 (57.12%) | 8선 | |||
184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5,765 (62.23%) | 9선[24] |
[1] 1775년 ~ 1852년, 런던 출신으로 첫 외국 출신 영부인이다.[2] 아버지를 따라 개신교나 가톨릭을 믿지 않고 유니테리언을 믿었다.[3] 다음으로 부자 대통령 기록을 세운 사람은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4] 이때 찢어진 세력이 여차저차해서 지금의 민주당과 공화당이 된다.[5] 이들은 보스턴의 상류사회를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줄을 만들고 메사추세스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연방 정치권에도 많이 진출하였다.[6] 기나긴 외교관 생활을 통해서 애덤스가 구사할 수 있던 외국어는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스웨덴어로 6개 국어였다.[7] 예를 들어서 A주의 연방 하원의원이 총 11명, B주의 연방 하원이 8명이고 A주에서 애덤스가 6명, 잭슨이 5명 / B주에서 애덤스가 0명, 잭슨이 8명의 표를 얻었다고 가정하다. 이렇게 되면 단순 지지 의원수 합계로는 6:13으로 잭슨이 승리하지만, 주 단위로는 A주에서는 애덤스가 B주에서는 잭슨이 이겼기 때문에 실제로는 1:1로 무승부가 되는 형태다.[8] 결국 크로퍼드 측의 부통령 후보는 노스캐롤라이나 연방상원의원 나다니엘 메이컨으로 교체되었다.[9] 미국 외교에서는 정부보다 의회의 권한이 더 크기 때문에 애덤스는 이 안건에 지시를 내릴 파워가 부족하였다.[10] 후일 휘그당은 공화당의 전신이 된다.[11] 1824년 선거의 투표자는 36만명이었는데, 1828년에 모든 주에서 재산권과 상관없는 투표권이 부여되면서 115만명이 투표에 참여하면서 애덤스를 반대하던 유권자가 늘었다.[12] 상당수 전임 대통령들도 노예제도는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적극적인 움직임은 없었던 것에 비해, 애덤스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다.[13] 이 사진의 컬러 복원본이다. [14] 당장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진을 찍은 것이 애덤스의 집권 초기인 1826년이었다. 이 당시에는 촬영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인물 사진을 찍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풍경 사진밖에 촬영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15] Horace Everett, 1779~1851, 1829년부터 1843년까지 버몬트 주 하원의원을 역임했다.[16] 즉 단순한 전직 대통령 2명의 장례식이 아니라 부친상을 같이 당한것이다.[17] 반대로 이 일을 운 좋게 면한 당시 현직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가 대표적이다(21세기 기준 최초). 그리고 리처드 닉슨 또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당시 남은 전직 대통령이었던 트루먼과 존슨이 각각 1달 간격(트루먼은 1972년 12월 28일, 존슨은 1973년 1월 22일)으로 사망한 터라 연속적으로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주관했다.[18] 이후 21세기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중 조 바이든이 전임 대통령의 장례식을 주관하지 않게 되었다(오바마 이후 2번째). 본인의 전임자인 오바마와 그 이전 전직 대통령인 아들 부시, 클린턴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면서도 건강을 유지한 데다 지미 카터가 100세를 달성하고도 최소 바이든의 퇴임일까지는 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트럼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전임자였지만, 2025년 기준 바이든의 후임자가 됐기에 제외).[19] 해당 조사에서 IQ가 낮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율리시스 S. 그랜트(120), 제임스 먼로(124.125), 워런 G. 하딩(124.3), 조지 W. 부시(124.875) 등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평균 IQ는 128로, 일반인 평균(100)이나 미국 대졸자 평균(118)보다 높았으며 고지능자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IQ 130 이상은 전체 42명(조지 워싱턴에서 조지 W. 부시까지) 중 28명으로 65%에 달했다. 주요 대통령들의 IQ를 보면 조지 워싱턴 132.5, 에이브러햄 링컨 140, 우드로 윌슨 145.1,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39.625, 빌 클린턴 148.8 등으로 추정되었다.[20]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 출신이다.[결] 결선투표 당선[22] 존 퀸시 애덤스 본인은 18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출마하진 않았지만 미시시피 주 선거인단 중 1명인 윌리엄 플러머가 멋대로 던진 표를 받아 선거인단 1명을 얻었다.[23] 18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4명의 후보 모두 선거인단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하원에서 당선자를 결정하였다. 하원에서 존 퀸시 애덤스는 87표를 얻어 당선되었다.[24] 1848.2.23.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