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야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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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 ||
출생 | 1837년 3월 18일 | ||
미국 뉴저지 주 콜드웰 | |||
사망 | 1908년 6월 24일 (향년 71세) | ||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 |||
재임기간 | 제22대 대통령 | ||
1885년 3월 4일 ~ 1889년 3월 4일 | |||
제24대 대통령 | |||
1893년 3월 4일 ~ 1897년 3월 4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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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여동생 로즈 클리블랜드(1846 ~ 1918) | ||
배우자 | 프랜시스 클리블랜드 프레스턴(1864 ~ 1947, 1886년 결혼) | ||
자녀 | 루스 클리브랜드(1891 ~ 1904) 에스더 클리블랜드(1893 ~ 1980) 매리언 클리블랜드(1895 ~ 1977) 리처드 F. 클리블랜드(1897 ~ 1974) 프랜시스 그로버 클리블랜드(1903 ~ 1995) | ||
학력 | 페이엣빌 아카데미 클린턴 리버럴 아카데미 | ||
종교 | 개신교 (장로교회) | ||
신체 | 키 180cm / 체중 125kg[1] / O형(Rh-) | ||
정당 | (버번 민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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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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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2] |
1. 개요
미국의 제22대, 제24대 대통령.제2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4년간 재임한 뒤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벤저민 해리슨 공화당 후보에게 패하였으며, 세 번째 대선 도전 때 해리슨의 재선 도전을 꺾고 승리하여 제24대 대통령으로 다시 4년간 재임했다.
이에 따라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두 번의 임기를 나누어 수행한 소위 '징검다리 임기'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1950년대까지는 그냥 제22대 대통령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임기인 제24대 대통령 시절도 제22대 대통령인 것으로 쳤다는 소리.
이 때문에 후임인 윌리엄 매킨리는 제24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제25대로 계산되는 식으로 1950년대까지 대통령 대수를 올렸다고 한다.
본명은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이지만, 소년 시절부터 스티븐이란 이름은 잘 사용하지 않게 되고 죽을 때까지 미들네임인 '그로버'를 자신의 대표 이름으로 사용했다.
2. 약력
- 1871.1. 제17대 뉴욕 주 이리 카운티 보안관 (1871.1.1. ~ 1873.12.31.)
- 1882.1. 제35대 버펄로 시장 (1882.1.2. ~ 1882.11.20.)
- 1883.1. 제28대 뉴욕 주지사 (1883.1.1. ~ 1885.1.6.)
- 1885.3. 제22대 미국 대통령 (1885. 3.4. ~ 1889. 3.4)
- 1893.3. 제24대 미국 대통령 (1893. 3.4. ~ 1897. 3.4)
3. 생애
3.1. 초기 생애
1837년 3월 18일 뉴저지주 콜드웰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장로회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콜드웰 지역에서 목회자로 나름 명성 있는 가문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해 페이엣빌 아카데미(Fayetteville Academy)와 클린턴 리버럴 아카데미(Clinton Liberal Academy)에서 수학했지만, 1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집안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3]하고 숙부와 함께 살며 잡화점 점원으로 일했으며 한동안 뉴욕의 맹인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바쁘게 일하면서도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만은 포기하지 않았고, 숙부의 배려로 버팔로시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독학으로 법학 공부에 매진하여 1859년 변호사가 되었다.[4]변호사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사망 후 과부가 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기에 남북 전쟁 중에도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변호사 수임료만으로는 소득이 부족하여 법조계에서 일자리를 얻으러 다닌 끝에 부지방검사로 재직했고, 1870년 뉴욕주 이리 카운티 보안관에 당선되어 국장으로 재임했다. 보안관으로 일하던 이 시기 두 번의 사형 집행을 주관하기도 했다.[5] 남북 전쟁 당시 북부연방에 적용된 징병법에는 "본인이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대리인에게 보수를 지급하여 병역을 대신하게 하고 면제받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는데, 당시 친형 두 명이 먼저 입대해 복무 중이어서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이 법 조항에 따라 150달러를 지급하는 대가로 폴란드 출신의 한 이민자를 대리인으로 입대시키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불법은 아니었지만 조국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엄연히 병역 의무를 지지 않은 것이었고, 이 점은 훗날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네거티브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3.2. 정계 입문과 대선 도전
1881년 44세의 나이로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고, 그 해 "공공의 신뢰를 받는 공공기관"을 핵심 가치로 내걸고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버팔로시장에 당선되었다. 2년 뒤인 1883년에는 뉴욕주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한껏 강화했다. 주지사 재임 당시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주정부 개혁을 단행해 꽤 성과를 거두었으며, '정직'함과 '성실'함을 모토로 내세워 '소신 있는 원칙주의자' 이미지로 호평받았다.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가 크게 상승하면서 대권주자로 급부상, 뉴욕주지사로 임기를 시작한 지 1년여밖에 되지 않은 1884년 대통령 선거에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상대 진영인 집권 공화당에선 대선후보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이 아닌 제임스 G. 블레인 전 국무장관을 선출했고 블레인과 본선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 당시 공화-민주 양당의 정책과 공약, 당론은 관세법 찬반[6] 외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때문에 1884년 대선의 선거 유세는 정책 대결보다 상대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방전으로 점철되었고, 이는 서로를 향한 무차별적 의혹 제기로 하나라도 더 흠집 내고 트집 잡으려는 진흙탕 싸움으로 비화하였다. 이로 인해 선거 기간 내내 남북 전쟁 당시 대리인을 입대시키고 병역을 면제받은 전력에 대한 '병역 기피' 공격 등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공화당을 지지하는 일부 언론사들로부터 "버팔로시에 사는 한 과부와 부적절한 관계였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스캔들 기사가 터지기도 했다.
당시 폭로된 스캔들을 풍자한 만평. 이 스캔들이 보도되자 블레인 후보와 공화당은 만평 속 울고 있는 아기의 말을 비틀어 "엄마, 엄마,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Ma! Ma! Where’s my pa)"라는 선전 구호로 쓰면서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를 부인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백악관에 가셨단다, 하하하!(Gone to the White House, Ha! Ha! Ha!)"라는 구호로 맞받아쳤다(...).
염증이 날 정도의 혼탁한 선거전에 결국 그 과부와의 스캔들을 인정했는데, 당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상대 여성도 과부였기에 엄밀히 말하면 불륜은 아니었다. 다만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 분위기는 남녀 간 성 문제에 매우 보수적이어서 그 자체로 트집 잡힐 일이 되었던 것. 혼외정사와 혼전임신을 매우 금기시하던 것이 당시 사회 풍토였던 탓에 "정식으로 결혼하지도 않고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자체가 남녀 간 순리를 어긴 것으로 비쳐졌고, 이 역시 선거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다. 여하튼 스캔들을 사실이라고 인정한 뒤 책임을 지고 아기의 양육비를 지급하겠다고 선언[7]하면서 정면돌파를 택하자 그 의연함에 일부 유권자들은 '정직'함을 내세운 모습에 부합한다며 오히려 지지를 보냈다. 게다가 병역 면제 논란은 제임스 G. 블레인 후보도 똑같은 방식으로 남북 전쟁 때 병역을 면제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의혹 제기와 폭로로 얼룩진 1884년 대선 개표 결과 박빙 승부 끝에 간발의 차이[8]로 당선되어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민주당으로서도 남북 전쟁 이후 처음 집권하게 되는, 기념비적인 승리였다.
3.3. 대통령 시절
3.3.1. 1번째 임기: 1885 ~ 1889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 주된 문제는 관세 무역과 노동운동이었는데, 클리블랜드는 당론인 관세인하정책에 따라 관세를 낮추고 자유무역을 장려하여 시장을 확장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금본위제를 정착시키는 데 노력했다. 또한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조직하였고 그 강직함으로 공직사회의 부패를 일소한 점은 그의 업적 중 하나이다. 이 점으로 첫 번째 임기를 수행할 무렵에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86년 미국노동총연맹이 결성된 이래 노동운동은 조직화, 거대화되어갔으며, 특히 같은 해인 1886년 일어난 헤이마켓 사건은 그의 재임기에 일어난 최대의 노동운동 중 하나였다. 그러나 클리블랜드의 정강정책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여 정부의 개입을 막고 있었고, 클리블랜드 본인 역시 "국민이 정부를 돕더라도, 정부가 국민을 도와서는 안 된다."[9]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노동자에게 그닥 우호적이진 않은 인물이었다.
또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면서도 국민의 교육과 복지를 위한 조치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이 점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이 시기 민주당 자체가 보수화되어 초창기와 지금의 민주당하곤 결이 좀 다른 것도 있었고..[10] 클리블랜드 다음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낸 윌리엄 J. 브라이언 때부터 슬슬 기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3.3.2. 재선 실패 후, 와신상담: 1889 ~ 1893
1888년 재선을 노리고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과 격돌했는데, 이 때 클리블랜드는 득표수에서는 해리슨을 5만 표 차이(0.6%)로 눌렀지만 앨 고어나 힐러리 클린턴처럼 선거인단 수에서 뒤지는 바람에 백악관을 해리슨에게 내 줘야 했다. 이런 사태가 초래된 데는 당시 주미 영국 대사였던 라이놀 웨스트의 발언도 한몫 했는데, 뭔 소린가 하면 공화당 측 선거참모가 웨스트에게 선거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지만 웨스트는 "우리는 영국에 호의적이고 자유무역과 관세인하를 모토로 하는 클리블랜드를 선호하는데 굳이..?" 라는 식으로 조언을 거부한다.그러자 공화당 측에서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영국은 클리블랜드를 원한다!"는 식으로 대대적인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는데 이게 결국 클리블랜드에게 악재가 되었다. 특히 당시 인구가 많던 뉴욕 주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유권자들이 상당했는데, 알다시피 영국과 아일랜드는 (특히 당시에는 더) 숙적이었으니 클리블랜드에게 좋을건 없었다. 결국 이 선거도 뉴욕주에서 고작 7187표(0.54%)로 승부가 갈렸다.
그렇게 '자연인'이 된 클리블랜드는 이시기 뉴욕에 법률사무소를 열고 지냈는데, 사무소 일보다는 별장에서 낚시하는 걸 더 좋아했던 듯하다. 첫째 딸 루스를 얻은 것도 이때. 이 당시 정치활동은 1891년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에게 매킨리 관세와 셔먼 반독점법에 항의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의 소소한 정도였다. 그래도 대통령 재선을 포기한건 아니라 여전히 준비를 하곤 있었다.
3.3.3. 2번째 임기: 1893 ~ 1897
4년 동안 와신상담하며 백악관 탈환을 준비하던 클리블랜드는 18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결국 당선에 성공했고 기어코 두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임기는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해리슨 정부 당시부터 악화되던 경제상황이 결국 공황으로 확산되면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디플레이션이 와 농업이 피폐화된다. 그리고 이런 공황에 힘입어 압도적 다수당을 4년간 차지했던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다시 대패하여 전체 의석의 1/3 이하로 쪼그라들고 만다.6백개의 은행이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895년에는 국가보유금이 떨어져 급히 존 피어폰트 모건 등 거대 은행그룹에 돈을 빌려야 했다. 그 와중 광산,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다시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클리블랜드의 강경진압에 여당의 인기는 더욱 곤두박질친다. 여기에 구강암까지 발견되어 치과치료를 명목으로 비밀리에 암수술까지 받고 회복하는 등 건강도 좋지 않았다. 결국 이런 위기 속에서 허덕이다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치게 된다.
3.4. 이후
1908년의 모습. 사망하던 해에 촬영된 사진이라서인지 현역 시절에 비해 살이 많이 빠지고 해쓱해졌다.
퇴임 이후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살았으며, 1908년 만 71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평가
현재 대통령 시절 업적에 관한 평가 및 인기 순위는 엄청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수준이다. 높이 평가받는 점은 원칙과 소신, 강직함으로 부패를 근절했다는 것이지만 위에서 언급된 노동운동 탄압과 집권 2기에 경기침체를 초래한 점은 그에 대한 평가를 깎이게 하는 부분. 사실 경기침체는 그가 초래했다기보다는 쌓이고 쌓이던 것이 그의 재임 시기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전 경제정책을 딱히 수정한 것도 아니었다. 이래서 오즈의 마법사에서 클리블랜드의 경제적인 무능함이 풍자받았다는 추측도 있다.그래도 뒷날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링컨 사망 이래 1894년 사이의 대통령들 중 미국에서 가장 주도적이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미국의 몇몇 역사가들도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시어도어 루스벨트 사이의 대통령들 중에선 그나마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한다. 실제로 학자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그를 꽤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개혁을 앞세우며 행정부에서는 지도력을 발휘했지만, 입법부는 일정기간 여소야대를 맞이하기도 해 태클거는 의회와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지나치게 강직했던 나머지 다소 독선적인 면도 보여서 비전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기도 했고, 1기 행정부 때는 의회의 가결 법안을 414개나 거부하기도 해 한 임기(4년) 중에 가장 거부권을 많이 행사한 대통령이 되었다. 연설이나 글도 서투른 편이었고, 개혁 정책을 내세운다고는 했지만 그 정책도 장기적인 비전이나 융통성이 없었다는 점에선 평가가 깎이는 편이다.
요약하자면 정치적으로 다소 답답한 점은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정책 결정에서 도덕적 기초를 생각한 점과 정직성과 근면성, 또 권위나 공직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추구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는 편. 전임자인 체스터 A. 아서와 함께 행정부의 도덕성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시킨 인물로 꼽힌다.
5. 한국과의 관계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미공사인 박정양이 미국에 파견된 것이 바로 그의 재임기였다.[11] 1888년 1월 17일 박정양은 백악관에 가서 클리블랜드를 만나고 국서를 제출했다. 이 때 박정양은 사모, 관대를 착용하고 신하의 대례복인 흑단령을 입은 채로 백악관을 방문했다고 한다. 고종의 이름으로 된 당시의 국서는 이러했다.대조선국 대군주는 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의 음차)합중국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 President의 음차)에게 글월을 올린다. 짐은 본국과 귀국이 먼저 조약을 체결, 우의가 돈독하고 두터워 사절이 왕래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중략)... 이에 짐은 신애하는 종2품 협판내무부사 박정양을 뽑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귀국에 파견, 바라건대 성실히 서로 믿고 종우접대하기 바라며, 아울러 수시로 입관하여 짐의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대신 아뢸 것이다. - 개국 496년(서기 1887년) 8월 7일
이에 클리블랜드는 다음과 같은 답사를 했다."미합중국 정부는 양국이 조약에 규정된 바와 같이 상호외교교섭관계의 확립을 확인함으로써 양국이 바라던 우호적 교섭을 하게 되어 크게 만족하는 바입니다."
6. 가족
- 아내 프랜시스 폴섬 클리블랜드 (1864~1947)
- 장녀 루스 클리블랜드 (1891~1904)
- 차녀 에스터 클리블랜드 (1893~1980)
- 3녀 매리언 클리블랜드 (1895~1977) 출처 타계를 알리는 기사
- 장남 리처드 폴섬 클리블랜드 (1897~1974) -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지 7달 후에 태어났다. 즉 남동생과 마찬가지로 백악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12] 커서는 아버지처럼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한동안은 아버지의 당이었던 민주당을 응원했으나, 말년에는 반대로 공화당을 응원했다고 한다.
- 차남 프랜시스 그로버 클리블랜드 (1903~1995) - 이 쪽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5년 전에 태어났다.
6.1. 아내
프랜시스 폴섬 클리블랜드.[13]
클리블랜드의 행적에서 이색적인 것 중 하나는 아내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27세라는 점이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864년 프랜시스 폴섬이 처음 태어난 해. 클리블랜드와 프랜시스 폴섬의 아버지인 오스카 폴섬은 동료 변호사 사이로 친밀한 사이였다.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 폴섬이 태어나자 선물로 유모차를 선물했다고 한다. 그런데 1875년 프랜시스가 11세가 되던 해 오스카 폴섬이 마차 사고로 사망하자 클리블랜드는 직접 폴섬 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해줬다. 그는 프랜시스를 어린 시절부터 '프랭크'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귀여워했고 프랜시스의 교육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랜시스도 이 뚱뚱한 아저씨를 '클리브 아저씨(Uncle cleve)'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프랜시스가 대학에 들어가자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의 어머니인 에마 폴섬에게 "따님과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 라고 물었고, 그날 이후 프랜시스의 방에는 클리블랜드가 보낸 꽃다발로 넘쳐 흘렀다나...
1885년 대통령에 당선된 클리블랜드는 48세였다.[14] 그런데 그가 이 때까지도 총각이었기에 영부인 역할은 여동생인 로즈가 대신했다. 그러나 이 해에 프랜시스에게 청혼하여 곧 이듬해 6월에 백악관에서 결혼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으로 뉴욕의 웰스 칼리지를 졸업한 당시 나이는 만 21세. 당시 언론들은 대통령이 결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클리블랜드와 폴섬가의 친분을 알고 있어서인지 "분명 폴섬 가문의 미망인인 에마 폴섬이 상대겠지." 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대통령 결혼식날에 대통령의 딸뻘 되는 아가씨가 나타난 것을 보고 당황했다고 한다.
젊은 프랜시스는 영부인이 된 후에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계속해서 받았고 인기와 평판도 나쁘진 않은 편이었는데 한편으론 당돌한 면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1888년 벤저민 해리슨에게 백악관을 내어 주었을 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구와 장식들을 잘 관리해 주세요. 4년 뒤에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
또한 클리블랜드가 아내를 구타한다는 정적들의 모함에 대해 직접 언론에 나서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로써 프랜시스는 최연소 영부인이라는 것 외에 직접 언론에 나서 공식해명을 한 최초의 영부인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나이차가 많은 결혼이었지만 부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모양으로 2남 3녀의 자식을 두었다. 부부는 1897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친 후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살았으며, 1908년 클리블랜드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뒤 프랜시스는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토머스 J. 프레스턴 주니어와 재혼했으며[15] 1947년까지 살았다. 프랜시스는 클리블랜드 사후 여성은 아직 참정권을 획득할 만큼 현명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을 반대하기도 했다.[16]
7. 기타
- 1934년 1천달러 지폐 속 초상화
- 클리블랜드는 미국 대통령 관련해서 세운 기네스북 기록이 몇 있는데, 유일하게 임기를 두 번으로 나눠 수행한 인물이었다는 점 외에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두 번째로 뚱뚱했다는 점이 있다. 현역 시절 몸무게가 무려 125kg에 이르렀다. 참고로 1위는 175kg을 자랑하는 부동의 윌리엄 태프트. 물론 둘 다 말년때는 살이 많이 빠졌다. 한편, 클리블랜드는 가장 처음 취임한 역대 3번째 뚱보 대통령 아서에 이어 후임으로 취임한지라 당시 미국인들은 뚱보 대통령을 2연속으로 보게 됐다.[17]
- 미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자유의 여신상과도 악연이 있는데 클리블랜드가 뉴욕 주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해 독립 100주년 기념 선물로 미국에 보내자 "그딴 시답잖은 일에 돈을 낭비할 수 없다"고 동상 조립을 막았다. 그 때문에 여신상은 해체된 상태로 상자에 담겨 하염없이 항구 하역장에 방치되고 있다가 이 소식을 알게된 조지프 퓰리처가 주도한 성금 캠페인 덕분에 우여곡절 끝에 완공될 수 있었다. 그런데 동상이 완공되고 대통령까지 참석한 제막식이 열렸을 때 참 얄궂게도 제막식에 참석한 대통령이 바로 클리블랜드였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18]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와 함께 클리블랜드를 만난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FDR의 아버지는 클리블랜드에게 자신의 아들을 위해 덕담을 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때 클리블랜드는 농반진반 "얘야,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할 때 '하나님, 부디 절 대통령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하거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작 FDR은 미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 대통령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청년 시절 때에 한 친구와의 대한 일화의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한다. 문중호 저/꿈을 키우는 교실 밖 이야기12에도 나오는 일화의 내용은 청년시절 가난하던 시절에 나쁜 친구와 어울리다가 어느날 한 교회의 전단지를 우연히 보게 되고, 문득 마음이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는데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해 나쁜 친구와 인연을 끊고 독학하여 감옥에서 간수장으로, 일하게 되었고, 또한 이후 놀랍게도 버펄로시의 시장에 올랐고, 뉴저지주의 주지사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때 함께 어울리던 나쁜 친구는 훗날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되었는데, 클리블랜드가 당선된 기사가 나온 신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
-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인 피트 알렉산더의 본명인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 퇴임 및 사망 후 120여 년이나 지난 2020년대 중반에 갑자기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한 뒤 세 번째 대선인 2024년 선거에 다시 도전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문. 만약 트럼프가 20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백악관에 재입성한다면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징검다리 임기'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다. 클리블랜드의 첫 '징검다리 임기' 이후 재선에 실패한 모든 대통령들은 그대로 정계를 은퇴했기에 두 번째 사례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는데, 트럼프가 이 오랜 관행을 깨고 다시 대선에 도전하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의 공화당 후보 경선 승리와 대선 본선 승리가 가능성 높은 주요 시나리오 중 하나로 꼽히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상황.[19]
8.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81 | 미국 뉴욕주 버팔로 시장 선거 | 버팔로 | | 15,120 (56.74%) | 당선 (1위) | 초선 |
1882 | 미국 주지사 선거 | 뉴욕 | 535,318 (58.47%) | |||
1884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4,874,621 (48.49%, 219명) | |||
1888 | 미국 대통령 선거 | 5,534,488 (48.62%, 168명)[20] | 낙선 (2위) | |||
1892 | 미국 대통령 선거 | 5,551,883 (46.05%, 277명) | 당선 (1위) | 재선 |
[1] 고도비만이다.[2] 두 번째 임기에 도전하던 1892년 선거 캠페인 당시 연설.[3] 이로 인해 클리블랜드는 훗날 정계 진출 이후 무학으로 알려졌는데, 두 아카데미를 다닌 것을 감안하면 최소 고졸 정도는 되는 학력이다. 그럼에도 두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증명서가 없어 무학 취급을 받았다. 클리블랜드는 일생 동안 세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학력을 입증할 서류(졸업장 등)를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이 점이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는데, 19세기까지 미국 정치권에서는 유력 정치인의 무학 이력이 저학력이 아닌 자수성가의 증거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번의 대선 내내 상대 정당인 공화당 인사들은 이를 꼬투리 잡지 않았다.[4] 미국 역사상 '독학'으로 학업을 마친 대통령 중 한 명이다.[5] 이 사형 집행 이력으로 인해 훗날 공화당 정적들에게 '버팔로 시의 교수형 집행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6] 공화당은 높은 관세를 부과하여 미국의 산업을 지키는 보호무역을, 민주당은 관세를 인하하고 국가 간 교류를 촉진하는 자유무역을 주장했다.[7] 양육비를 지급받으며 자란 이 아이는 훗날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8] 클리블랜드 자신의 정치적 본거지인 뉴욕주에서조차 단 575표차(0.05%p차)로 승리했다.[9] "Though the people support the government; the government should not support the people."[10] 앤드루 잭슨의 창당 당시만 해도 농민 등 서민을 대변하는 급진적 면이 있는 정당이었으나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후 북부 출신 친자본가 인사들이 주류를 장악한다. 클리블랜드도 그 중 하나. 이 시기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기껏 보호무역과 자유무역 논쟁 정도였다.[11] 보빙사 일행이 처음 미국 대통령을 만난 건 전임이었던 체스터 A. 아서 시기.[12] 반대로 장녀 루스는 아버지가 낙선했지만, 재선을 준비하던 시절(23대 벤저민 해리슨 시절)에 태어났다. 그나마 차녀 에스터와 3녀 매리언이 아버지의 재선 시절에 태어났으며, 딸들 모두 백악관에서 살았던 건 같다.[13] 영문 성명은 Frances Folsom Cleveland. 생몰년도는 1864년 7월 21일 ~ 1947년 10월 29일.[14] 당시 기준 율리시스 그랜트 전 대통령 이후 간만에 당선된 40대 대통령인 셈이다. 물론 이전에 가필드가 있긴 했지만, 가필드는 임기 중 사망했다.[15] 미 대통령의 미망인이 재혼한 첫번째 사례기도 하다. 2번째는 재클린 케네디.[16] 참고로 미국에서의 여성 참정권은 소위 진보 시대라 불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각 주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되다, 1920년 미국 수정 헌법 제19조의 통과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17] 클리블랜드와 태프트의 중간에 재임한 대통령들 중 윌리엄 매킨리와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비만에 속하기 때문에(다만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운동을 좋아했다는 일화나 각종 기행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한 비만이 아닌 체지방과 근육량이 모두 평균 이상으로 많은 경우로 보인다.) 중간의 벤저민 해리슨을 제외하면 1881년부터 1913년까지 거의 뚱뚱보 대통령들만 재임한 셈이다.[18]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으나 이 당시만 해도 민주당은 보수 성향이 강했기에 클리블랜드가 노동운동에 비판적이었던 것과 달리, FDR은 뉴딜정책으로 지금의 리버럴 성향 민주당을 만드는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19] 대신 차이가 있다면 클리블랜드 시절엔 대통령의 3선 출마 금지가 명확하지 않아 간간히 3선에 도전한 대통령들이 있었지만(율리시스 그랜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이 중 3선 이상을 달성한 건 프랭클린 루스벨트 뿐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시점에선 이미 3선 출마 금지가 법으로 확정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트럼프가 2024년 대선에서 이겨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해도 해당 임기까지만 가능할 뿐, 2028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20] 득표율 1위, 선거인단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