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23:39:52

앨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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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colbgcolor=#002d72><colcolor=#ffffff> 제42대 뉴욕 주지사
앨프레드 이매뉴얼 스미스 주니어
Alfred Emanuel Smith Jr.
파일:Al Smith.jpg
출생 1873년 12월 30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사망 1944년 10월 4일 (향년 70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재임기간 제42대 뉴욕주지사
1919년 1월 1일 ~ 1921년 1월 1일 1기
1923년 1월 1일 ~ 1929년 1월 1일 2기
학력 세인트제임스 스쿨[1]
부모 아버지 앨프레드 E. 스미스 1세
어머니 캐서린 멀빌힐
가족 배우자 캐서린 던 스미스
슬하 자녀 5명
묘지 미국 뉴욕 주 퀸스 캘버리묘지
정당

종교 가톨릭
파일:앨스미스초상화.png
뉴욕 주지사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청년기2.2. 뉴욕 주지사2.3. 세번의 대선 출마2.4. 말년
3. 선거 이력4.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42대 뉴욕주지사이자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였다. 민권과 금주법 문제에 있어 진보적인 식견을 표방하였지만 태머니 홀[2] 유착 논란과 개신교 우위 국가에서의 가톨릭 신자 후보라는 약점 등으로 인해 허버트 후버에게 대참패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2. 생애

2.1. 청년기

1873년 뉴욕에서 이탈리아 1세대 이민자인 아버지와 아일랜드 1세대 이민자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 지역은 아일랜드인들이 몰려사는 일종의 게토 비슷한 곳이었고, 앨 스미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가지며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척 가난했고 트럭 운전사로 일하다가 앨 스미스가 13살에 사망했다. 앨 스미스는 너무 가난해서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갈 수 없었고 가톨릭 수도원에 거두어져 자랐다. 고등학생 때에는 극장에서 아마추어 배우로 일했는데, 이때 자신의 웅변술을 키웠다.

그는 자신과 같은 어렵게 살아가는 아일랜드인들이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권력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해 뉴욕시에서 악명을 떨치면 아일랜드계 계파조직 태머니 홀에 가입했다. 태머니 홀에서 앨 스미스는 바로 유명해졌는데, 아마추어 배우로 일하며 쌓은 웅변술은 청중을 흥분하게 만들었고 스미스는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태머니 홀 간부들에게도 차기 지도자감으로 떠올랐다. 가난한 가정환경과, 아일랜드인 어머니와 이탈리아인 아버지라는 성장 배경 때문에 빈민층,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에게 지지를 받기도 쉬웠다. 비록 그는 태머니 홀 간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들의 부정부패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는 청렴한 정치 생활을 했다.

1904년, 뉴욕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곳에서 앨 스미스는 후일 상원의원이 되어 노동조합법을 발의하게 되는 로버트 F. 와그너와 함께 노동법 전문 정치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1911년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 때 발빠르게 대처해 60개의 새로운 노동자 인권 보호법을 발의하며 인기를 얻었다. 그 해, 그는 뉴욕 민주당을 의회에서 이끌었고 뉴욕주의회의 세출위원장 직을 역임했다. 1915년에는 뉴욕시 맨해튼 카운티를 대표하는 보안관으로도 선출되었다.

2.2. 뉴욕 주지사

파일:앨 스미스 1920.jpg
1920년의 앨 스미스
1918년, 태머니 홀의 압도적인 지원을 얻고 뉴욕주지사로 출마했다. 당시 뉴욕시에서 떠오르던 선거 전문가인 제임스 팔리가 캠페인 매니저로 참여했다. 앨 스미스는 이탈리아계와 아일랜드계 주민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해준 덕분에 불과 14,000표라는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득표율로도 상대 공화당 후보인 에드워드 셔녹 뉴욕부지사와 47.4% 대 46.8%로 상당한 경합이었다. 1920년에는 재선에 실패했으나, 1922년 재출마해 당선되었고 1924년, 1926년에도 당선되어 도합 4선 주지사를 지냈다.

앨 스미스는 뉴욕주지사로 재임하면서 하딩, 쿨리지 대통령이 이끄는 보수적인 연방정부와는 다른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이었다. 그가 이끄는 뉴욕주정부는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금주법에 저항해 사실상 음주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월스트리트에 관대했고 기업과 정부가 상부상조해야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는 "기업진보주의"의 입장을 표방하였다.

특히 앨 스미스는 금주법과 관련해 진보적인 입장이었는데, 그는 금주법이 말이 안되는 악법이라고 생각한 초기의 반대자였다. 그는 금주법이 통과되자 반발해 몰래 자신의 공관에 술을 보관한 뒤 손님이 찾아올때마다 술을 제공했다고 한다. 물론 금주법은 술의 제조와 유통을 금지하는 것이었지,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합법이었기에 앨 스미스가 이 일로 체포되거나 벌금을 먹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앨 스미스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술을 보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고 이는 앨 스미스의 평판에 다소 타격을 주었다.

물론 앨 스미스가 이탈리아계, 아일랜드계 마피아와 유착 관계가 있었다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금주법이 마피아를 도울 뿐이라며 반대했고, 뉴욕주지사로 지낼 때도 공무원 임용법을 개혁하는 등 비교적 청렴한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자신의 후원자였던 태머니 홀이 부패를 저지르는것도 딱히 막지는 않았기에, 앨 스미스는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나 "(진보적이지만 뭔가 뒤가 구린) 전형적인 뉴욕주지사"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2.3. 세번의 대선 출마

파일:앨 스미스 1928.webp
대선 유세를 하고 있는 앨 스미스

2.3.1. 1924년 대선 출마

앨 스미스는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의 주지사 자격을 내세우면서 1924년 대선에 출마하고자 했다. 경쟁자는 우드로 윌슨의 사위이자, 그의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깁스 매커두. 매커두와 스미스는 같은 진보주의를 표방했지만 결이 달랐는데, 매커두는 경제적으로 좌파적이고 사회적으로 보수적이었다면 스미스는 경제는 보수적이고 사회는 진보적이었다. 예를 들어, 매커두는 연방준비제도를 설립하고 철도를 국유화한 자신의 업적을 강조했다면 스미스는 경제 발전에 있어 기업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 민권 문제에 관해서도, 매커두는 인종주의를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KKK단의 지지까지 받았는데, 스미스는 흑인 민권을 옹호한 최초의 민주당원 중 하나였기에 남부에서 거의 지지를 못받았다.

전당대회장을 휩쓴 주요 의제는 KKK단 비난 결의안과 금주법이었다. 매커두는 KKK단의 지지를 받았기에 당연히 비난 결의안에 반대했고, 금주법 역시 남부의 의사대로 찬성의 입장을 취했다.[3] 반대로 스미스는 KKK단 비난결의안에 찬성하는 한편 금주법의 개혁을 지지하였다. 지역구도로는 북부 대도시가 압도적으로 스미스를 지지했고, 매커두는 남부에서 지지받았다. 최종적으로 이 사안은 매커두 쪽이 약간 더 우세했는데, 여전히 민주당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KKK단 비난 결의안이 당을 무너트릴 것을 우려해 반대 의사를 표하며 매커두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선 후보로 누구를 뽑을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양 후보 모두 자격이 충분하고 훌륭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지지세가 굉장히 팽팽했다. 게다가, 당시 민주당에는 대의원 2/3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대선후보가 될 수 없는 괴상한 규칙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아무리 투표를 해도 대선 후보가 결정되지 않았다.[4] 무려 102번이나 투표를 했는데도 매커두와 스미스 사이에서 후보자가 결정되지 않았고, 두 후보가 합의를 거쳐 103차 투표에서 존 W. 데이비스 영국대사를 양측의 타협 후보로 내보냈다.

정작 존 W. 데이비스는 전국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다 야합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에게 외면받았고, 매커두와 스미스를 지지한 진보파 중 일부는 로버트 M. 라폴레트를 지지하기까지 하면서 데이비스의 지지율은 폭락했다. 현직 대통령 캘빈 쿨리지의 인기까지 겹치며 데이비스는 현재도 깨지지 않는 사상 최악의 득표율(겨우 28%)로 패배하고 만다. 앨 스미스 역시 쿨리지의 연임으로 인해 4년 뒤를 기약하게 되었다.

2.3.2. 1928년 대선 출마

Keep your wet dream come true
귀하의 젖은 꿈을 되살릴 수 있도록
1928년 대선 슬로건 중 하나[5]
1928년 다시 기회가 왔다. 문제는 현직 쿨리지 대통령의 인기가 너무 높았고 공화당의 후보로 나선 허버트 후버도 인기가 좋았다는 점이었다. 윌리엄 깁스 매커두는 여러가지 이유로 이미 출마를 포기했고, 결국 단독으로 대선 후보로 입후보한 앨 스미스는 거의 반대 없이 대선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는 부통령 후보로 남부의 상원의원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조지프 T. 로빈슨을 임명하였다.

결과는 그야말로 폭망. 남북전쟁 이후 앨 스미스만큼 크게 패배한 후보가 없었으며, 그 이후로도 월터 먼데일,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조지 맥거번 정도는 되어야 앨 스미스와 비빌 수 있을 정도로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파일:앨 스미스 만평 1928.jpg
앨 스미스의 가톨릭 신앙심을 공격하는 만평
우선 앨 스미스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주요 정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첫번째 가톨릭 신자였다. 이는 엄청나게 문제가 되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민주당의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인 남부 바이블벨트가 개신교 세가 너무 막강해 가톨릭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앨 스미스가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자 남부 전역에서 KKK단이 폭동을 일으키고 십자가 화형식을 벌였으며, 수천명의 목사들이 가톨릭 대통령 후보를 뽑지 말라는 설교를 했다. 북부의 민주당 지지자들조차 앨 스미스가 당선되면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을까 우려했다. 앨 스미스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지지율이 폭락했다.[6]

게다가 앨 스미스는 흑인 민권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입장이었다. 허버트 후버가 기본적으로 흑인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한 반면, 스미스는 적극적으로 흑인 민권 신장을 주장했고, 심지어 민주당 후보로서는 처음으로 할렘가에서 연설하기까지 했다. 이는 여러모로 나쁜 선택이었는데 비록 기록적인 수의 흑인들이 민주당에 투표하긴 했지만 그 영향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고[7] 남부 사람들은 스미스의 친-흑인 성향에 격노해 아예 투표장에 나오지도 않았다.

또한 스미스의 금주법에 대한 입장도 논란이 되었는데, 스미스는 금주법이 결코 알코올 남용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금주법을 점진적으로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후버는 이를 이용해 앨 스미스를 알코올 중독자인양 몰아갔고, 스미스는 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앨 스미스는 뉴욕 주지사이자 아일랜드계, 브루클린 토박이라는 점 때문에 너무 "도시민적으로" 보여졌다. 당시 민주당 지지자 대부분이 남부의 농민이나 노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뉴욕 토박이라는 성장 배경은 치명적이었고, 남부의 고위 민주당 지도자들은 앨 스미스의 아일랜드 억양이 섞인 뉴욕 사투리를 따라하며 놀렸다. 비록 부통령 후보인 조셉 로빈슨이 남부 순회유세를 돌면서 민심을 추스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앨 스미스는 득표율 40%, 선거인단 87명만을 얻으며 참패하였다. 반면 상대 후버인 허버트 후버는 58%, 444명을 얻었다. 특히 남부에서 앨 스미스는 수많은 주를 잃었다. 스미스가 이긴 남부 주는 사실상 지역 공화당 조직이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인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조지아, 루이지애나와 51.5% 대 48.5%라는 근소한 표차로 이긴 앨라배마, 그리고 부통령 조셉 로빈슨의 홈스테이트인 아칸소 뿐이었다. 즉 딥사우스 5개 주 + 부통령의 홈스테이트만 이긴건데 그마저도 앨라배마에서는 후버에게 밀릴뻔했고 심지어 미국 연방 편입 이후 민주당이 단 한번도 진적이 없는 텍사스를 공화당에게 내어준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스미스의 대참패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앨 스미스는 전국 수백개 도시에서 극적인 지지율 상승을 기록했는데, 특히 보스턴과 뉴욕에서는 50%가 넘는 득표를 했고, 매사추세츠로드아일랜드에서 의외의 승리를 거두었다. 아일랜드계와 이탈리아계 도시민들이 압도적으로 스미스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또한 할렘에서 스미스는 40%가 넘는 득표를 했는데, 이는 미국사에서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높은 흑인의 민주당 지지율이었다. 이 때문에 후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노동자와 농민, 소수 백인종과 흑인을 잇는 "뉴딜동맹"의 단초를 마련했다고도 평가한다. 자세한 것은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평가문단 참조.

2.3.3. 1932년 대선 출마와 좌절

앨 스미스는 대선 결과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예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사업가로 활동하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건설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뉴욕주지사와 사이가 틀어져서 1932년 대선에 대선 3수 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이렇게 된 배경은 여러가지가 있다. 원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앨 스미스의 정치적 후계자로 여겨졌고, 1924년 전당대회에서 FDR이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감동적인 연설을 해서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인 적도 있었다. 때문에 앨 스미스는 자신의 대선 출마로 공석이 된 뉴욕주지사 자리에 FDR이 출마하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앨 스미스는 대선에서 패배한 반면, FDR은 아주 근소한 차이(불과 0.2%p)로 뉴욕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앨 스미스가 1928년 대선 이후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은 반면 FDR은 대공황 와중에 성공적인 빈민 구호 정책을 펼쳐 뉴욕 주민들의 환호를 받았고[8] 차기 대권주자로 꼽힐만큼 명성이 올라갔다. 자존심 높은 앨 스미스는 이런 FDR의 성공에 질투심을 느꼈다.
파일:앨 스미스 루스벨트.png
1928년의 루스벨트와 스미스. 이때만 해도 사이가 좋았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도 있었는데, 앨 스미스는 FDR이 자신의 뒤를 이어 여전히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행정을 펼칠 것으로 기대했지만 FDR은 앨 스미스만큼 사회적 진보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대신 윌리엄 깁스 매커두 식의 경제적 진보주의 행정을 펼쳤고, 특히 앨 스미스의 친구들이었던 기업가와 금융가들을 강력히 규제하는 법을 지지했기 때문에 스미스의 분노를 샀다. 또 FDR은 앨 스미스가 속해있던 아일랜드계 정치 사조직 태머니 홀의 주요 인사들을 공직에 임명할거라고 약속했지만 정작 주지사 당선 이후에는 부패한 계파정치를 청산하겠다는 신념 하에 이들을 모두 공직에서 배제하였다. 더 나아가 태머니 홀의 실질적인 권한을 약화시키고 공무원의 청렴성을 높이는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앨 스미스의 눈에는 이것이 자신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루스벨트의 고의적인 행동처럼 비추어졌다.

앨 스미스는 사적인 복수심이 앞서 1932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연하지만, 지지율은 압도적으로 FDR이 앞섰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경선 대의원의 9할 가량이 FDR을 선호하고 있었으며, 44개 주 중 39개 주에서 FDR의 지지율이 선두였다. 그러나 앨 스미스가 자신의 막강한 아일랜드계 정치 사조직을 이용하고, 존 낸스 가너와 같이 남부 지역에서 지지를 받는 주자들을 이용한다면 루스벨트가 2/3 대의원을 얻는 것을 막는 것까지는 할 수 있었다. 앨 스미스는 이를 이용해 자신이 대선에 출마할 수는 없더라도 루스벨트가 대선에 출마하는 것도 할 수 없게 만들 속셈이었다. 그는 대신 뉴턴 베이커와 같은 다른 사람을 "타협 후보자"로 내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존 낸스 가너의 뒤에는 스미스를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윌리엄 깁스 매커두가 있었다. 가너를 지지한 또다른 사람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앨 스미스나 뉴턴 베이커가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죽어도 싫어했으므로, 차라리 FDR과 타협을 보고자 했다.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FDR은 매커두를 캘리포니아의 상원의원으로 임명하며 자신의 뉴딜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했고, 가너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호텔 방에서 쉬고 있던 앨 스미스는 가너가 FDR을 지지하겠다는 라디오 속보를 듣자마자 분노해 날뛰었으며 가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밥을 먹고 있던 가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윌리엄 매커두는 가너의 모든 대의원을 FDR 측으로 넘기겠다는 연설을 했고, FDR의 지명을 막겠다는 앨 스미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32년 민주당 전당대회와 앨 스미스, 그리고 각 후보자들의 동향을 자세하게 설명한 글이 있으니 1930년대 미국 정치사에 관심이 있으면 읽어보자.

2.4. 말년

앨 스미스는 끝까지 FDR을 지지하지 않는 뒤끝을 부렸고, 1936년과 1940년 대선에서는 공화당 후보인 알프 랜던웬델 윌키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32년의 실패 이후 정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사업가로 여생을 보내다가 1944년 10월 사망했다.

끝까지 FDR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1944년 5월 아내가 죽었을 때 FDR이 자필 편지를 보내 애도의 뜻을 표하자 감동을 받았으며 FDR에 대한 적개심을 누그러트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노쇠했기에 결국 FDR과 만나 화해하지는 못했고, 5개월 후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FDR 역시 얼마 안가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03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뉴욕 카운티 제2구

4,942 (75.49%) 당선 (1위) 초선
1904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4,484 (66.82%) 재선
1905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4,266 (64.60%) 3선
1906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6,397 (78.21%) 4선
1907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5,180 (71.58%) 5선
1908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4,703 (66.21%) 6선
1909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3,971 (64.93%) 7선
1910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4,180 (69.48%) 8선
1911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4,472 (71.22%) 9선
1912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3,251 (56.17%) 10선
1913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3,600 (57.75%) 11선
1914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3,720 (65.72%) 12선
1915 뉴욕 카운티 보안관 선거 뉴욕 카운티 불명 초선
1917 뉴욕 올더맨 위원회 선거 뉴욕시 309,676 (47.80%)
1918 미국 주지사 선거 뉴욕주 1,009,936 (47.37%)
1920 미국 주지사 선거 1,261,812 (44.00%) 낙선 (2위)
1922 미국 주지사 선거 1,397,670 (55.21%) 당선 (1위) 재선
1924 미국 주지사 선거 1,627,111 (49.96%) 3선
1926 미국 주지사 선거 1,523,813 (52.13%) 4선
1928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15,015,464 (40.80%, 87명) 낙선 (2위)

4. 여담

  • 중절모와 코트를 입는 특유의 패션으로 유명했다. 토머스 E. 듀이넬슨 록펠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중절모를 쓰고 환하게 웃는 앨 스미스의 모습은 전형적인 뉴욕 정치인의 이미지로 남았다.
  • 사업가로 수완이 있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짓고 경영한 회사가 그의 회사였다.
  • 1945년부터 매년 10월 17일 경에는 뉴욕의 천주교 연례 자선 기금 모금행사인 알프레드 E 스미스 기념 미사가 열리고 있다. 특히 미국 민주당 출신 후보인 만큼 민주당 출신 대선 후보는 대선이 열리는 해에 무조건 참석을 하는 편인데, 딱 두 명의 예외가 있었다. 월터 먼데일카멀라 해리스. 특히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이 행사에 참석하면서, 해리스가 먼데일 처럼 패할 것이라고 조롱했다.

[1] 중학교 수준의 학교이다.[2] Tammany Hall,뉴욕주,뉴욕시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이민자들이 주류였던 정치 기구로 부패와 계파정치로 악명높았다.[3] 정작 장인인 우드로 윌슨은 금주법에 반대했다.[4] 결국 이 규칙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의해 폐기된다.[5] 당대 시대상을 감안했을 때 상당히 파격적인 섹드립이다. "Wet"은 금주법 논쟁에서 금주법 반대파를 의미했다(반대로 금주법 찬성파는 dry라고 불렸다). 금주법의 점진적인 폐지를 드러내는 슬로건인데, Wet dream은 몽정,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섹스 판타지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즉 1920년대의 대선 후보가 "당신이 꿈꾸는 섹스를 현실화하겠다!"라는 수준의 구호를 내건 수준인데, 앨 스미스가 참패한 것과는 별개로 당대에 해당 슬로건은 꽤 유행어가 되었고 현대에도 참신한 선거 슬로건으로 언급되곤 한다.[6] 32년 후 존 F. 케네디도 비슷한 공격을 당했지만, 케네디는 그것이 부당한 비판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교황이 아닌 미국 헌법에 충성할 것임을 전국민에게 맹세하는 방송을 내보내 국민들의 우려를 일소시켰다.[7] 흑인은 약 70%의 비율로 후버를 선호했고, 스미스를 찍은 표는 30%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이정도도 1912년 민주당 흑인 득표율이 5%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선방이다.[8] 1930년 주지사 선거에서 앨 스미스가 단 한번도 기록한 적이 없는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