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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 상원의원 (아칸소 주 클래스 2) | ||||
제62대 윌리엄 M. 캐버노 | ← | 제63~75대 조셉 T. 로빈슨 | → | 제75~77대 존 E. 밀러[1] |
제2대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조셉 테일러 로빈슨 Joseph Taylor Robinson | |
<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872년 8월 26일 |
미국 아칸소 주 로노크 | |
사망 | 1937년 7월 14일 (향년 64세) |
미국 워싱턴 D.C.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재임 기간 | 제23대 아칸소 주지사 |
1913년 1월 16일 ~ 1913년 3월 8일 | |
학력 | 아칸소 대학교 (B.A.) 버지니아 대학교 (법학 / LL.B.) |
정당 | |
의원 선수 | 5 (하원) 5 (상원) |
의원 대수 | 58, 59, 60, 61, 62 (하원)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2] (상원) |
지역구 | 아칸소 제6구 (하원) 아칸소 클래스 2 (상원) |
경력 | 연방 하원의원 (1905~1913 / 아칸소 6구) 아칸소 주지사 (1913) 연방 상원의원 (1913~1937 / 아칸소 클래스 2) 1928년 대선 민주당 부통령 후보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1923~1937) |
별명 | 조 로빈슨(Joe Robinson), 뉴딜의 원수(Marshal of New De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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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앨 스미스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했고,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를 맡으면서 뉴딜정책 법률안 통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생애
아칸소주 로노크 출생. 아칸소 대학교를 졸업한 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교 졸업 직후 정계에 입문해 아칸소 주의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02년에는 아칸소주 제6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1913년까지 5선 하원의원으로 활약했다.1912년, 아칸소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아칸소 주지사로 재직한지 얼마 안되어 제프 데이비스(Jeff Davis) 상원의원이 사망했고, 주의회는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이듬해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 조셉 로빈슨을 신임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로빈슨은 불과 55일만 주지사로 재직하고 바로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어 아칸소 주 역대 최단기간 주지사가 되었다.
2.1.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조셉 로빈슨은 남부민주당 소속이었으나 다른 남부민주당원에 비해 우드로 윌슨의 정책을 지지하여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키팅-오언 아동노동 금지법을 지지했으며, 철도 개혁안도 지지했다. 외교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의 맹렬한 옹호자였고 헨리 캐벗 로지 시니어가 이끄는 베르사유 조약 비준 반대 운동에 맞서 조약을 비준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 덕에 윌슨 대통령은 로빈슨을 지지했고, 1920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보수적인 남부 출신이면서도 윌슨 대통령의 진보 정책을 지지하는 중도적인 성향 때문에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인망이 높았고 1923년 오스카 언더우드 상원 원내대표가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민주당의 상원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민주당 원내대표로서도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상원의 시스템 개혁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위원회 배정 절차를 개혁해 특정 상원의원이 두개 이상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직위를 맡지 못하게 한 것이 대표적인 업적.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려 했으나 큰 표를 얻지는 못했다. 대신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직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1928년 대선에서 로빈슨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앨 스미스의 도시 진보주의 성향 + 가톨릭 신자라는 배경 때문에 스미스는 남부에서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로빈슨은 앨 스미스의 가톨릭 신앙심이 대통령으로서의 자격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스미스를 변호하고 스미스에 반발하는 남부 의원들을 정치적으로 압박하였다. 비록 스미스는 엄청난 표차로 후버에게 낙선하긴 했지만, 그나마 로빈슨의 도움으로 딥사우스 5개주와 로빈슨의 고향 아칸소만큼은 지켜낼 수 있었다. 만약 로빈슨이 없었다면 스미스는 앨라배마 등 남부 주를 추가로 더 패하는 등 더욱 참담한 패배를 당했을 것이라는게 정설.
2.2. 다수당 원내대표
비록 압도적으로 패배하긴 했지만, 참패가 뻔한 대선 후보를 도운 로빈슨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대공황이 터지면서 민주당이 상원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원내 다수당이 되면서 그의 입지는 말년에 최고점을 찍었다. 1932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12석을 추가로 획득, 59석의 의석을 확보했고, 로빈슨은 다수당 원내대표 직위를 얻는데 성공한다. 로빈슨은 남부 민주당원 중 가장 적극적으로 뉴딜 정책을 지지한 인물중 하나였으며, 샘 레이번 하원의원, 헨리 토머스 레이니 하원의장 등과 함께 루스벨트의 입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긴급은행법(Emergency Banking Act of 1933)을 7시간만에 날치기 통과한 것으로 공화당과 보수 민주당원들에게는 비난을, 동료 뉴딜 민주당원들에게는 찬양을 받았고, "뉴딜의 원수"(Marshal of New Deal)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937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법원의 보수적인 판결에 분개해 대법원을 무력화시키고자 대법관의 수를 15명으로 늘리는 "사법부 포장"(Judicial Procedures Reform Bill of 1937)을 통과시키려 하자, 로빈슨은 이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루스벨트는 로빈슨의 수고에 고마워하며 법이 통과되면 로빈슨을 대법관으로 앉히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삼권분립 훼손이라는 논란이 일었고, 민주당이 찬성파와 반대파로 쪼개지면서 로빈슨은 궁지에 처했다.
그와중에 지병이 악화된 로빈슨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고, 그의 급사로 루스벨트의 사법부 개편안은 좌초된다. 사망 후 고향에 묻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그가 죽은 날 "뉴딜 정책의 큰 기둥이 사라졌다"며 비통한 감정을 드러냈고, 그의 정치적 반대파였던 아서 반덴버그(Arthur Vandenberg) 상원의원 역시 "그의 정책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가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열렬했다는건 부인할 수 없다"라고 그를 추모했다.
3. 성향
샘 레이번 하원의장, 존 낸스 가너 부통령과 함께 뉴딜 정책의 숨은 공신 중 하나로, 보수연합에 맞서 뉴딜정책을 통과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남부민주당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중도-진보적인 성향을 보인 인물이었고 뉴딜연합의 핵심적인 의원이었다.민주당 원내대표로서의 의사 진행 방식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를 모든 수를 써서 압박하였으며, 토론회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고함을 지르며 상대방이 자신의 입장에 동의할때까지 끝장토론을 벌여 동료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독재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로버트 M. 라폴레트 상원의원과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문제로 주먹다짐을 벌일 뻔 한 적도 있다. 물론 이런 의사진행 방식이 대공황이라는 긴박한 시기에 뉴딜정책을 빠르게 통과시키는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그런 로빈슨을 매우 좋아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02 | 연방 하원의원 선거 | 아칸소 제6구 | | - (89.3%) | 당선 (1위) | 초선 |
1904 | 연방 하원의원 선거 | - (62.0%) | 재선 | |||
1906 | 연방 하원의원 선거 | - (84.4%) | 3선 | |||
1908 | 연방 하원의원 선거 | - (100.0%)[A] | 4선 | |||
1910 | 연방 하원의원 선거 | - (81.6%) | 5선[4] | |||
1912 | 아칸소 주지사 선거 | 아칸소 | 109,825 (64.74%) | 초선[5] | ||
1913 | 연방 상원의원 선거 | 71 (53.0%) | 초선[6] | |||
1918 | 연방 상원의원 선거 | 78,377 (100.00%)[A] | 재선 | |||
1924 |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00,408 (73.52%) | 3선 | |||
1928 | 미국 부통령 선거[8] | 미국 | 15,015,464 (40.80%, 87명) | 낙선 (2위) | ||
1930 | 연방 상원의원 선거 | 아칸소 | 141,906 (100.00%)[A] | 당선 (1위) | 4선 | |
1936 |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54,866 (84.08%) | 5선[10] |
5. 여담
- 주의회에 의해 선출된 최후의 상원의원 중 하나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조셉 T. 로빈슨이 아칸소 주의회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임명된 직후 상원의원 직선제 수정헌법이 발효되었기 때문이다. 1913년 이전까지 모든 상원의원은 주의회 의원이 뽑는 간선제를 통하여 선출되었고 상원 원내대표, 다수당 원내대표의 개념도 없었으며 현재의 실질적 상원의장 역할을 맡는 상원 임시의장도 말 그대로 "임시직"이라 며칠만에 휙휙 바뀌는 등 상원의 기능이 지금과 큰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