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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d72><colcolor=#ffffff> 제53대 뉴욕주지사 조지 엘머 퍼타키 George Elmer Pataki | |||
출생 | 1945년 6월 24일 ([age(1945-06-24)]세) | ||
미국 뉴욕주 픽스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재임기간 | 제57대 뉴욕주지사 | ||
1995년 1월 1일 ~ 2006년 12월 31일 | |||
서명 | |||
링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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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리비 롤랜드 퍼타키 | ||
자녀 | 4명 | ||
학력 | 예일 대학교 (정치학 / B.A.)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 / J.D.)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정당 | |||
약력 | 픽스킬 시장 (1981~1984) 뉴욕 주 하원의원 (제91 선거구 / 1985~1992) 뉴욕 주 상원의원 (제37 선거구 / 1993~1994) 제53대 뉴욕주지사 (1995~2006) 201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후보 (사퇴) | }}}}}}}}}}}} |
1. 개요
뉴욕주지사 공식 초상화 |
2. 생애
2.1. 초기 정치 생활
조지 퍼타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헝가리 이민 2세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체부였으며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우체국을 운영했다. 1963년, 조지 퍼타키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1970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뉴욕주 검사로 활동했다.어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현재와 달리 이때는 비교적 보수 성향이 있어서 록펠러 공화당에 반대하는 뉴욕 보수당 소속이었다. 예일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뉴욕 보수당 재학생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발을 들인 뒤로는 노선을 바꿔 넬슨 록펠러의 1970년 뉴욕 주지사 선거 캠프에 참여했으며 1974년에는 록펠러의 임기동안 부주지사였던 맬컴 윌슨의 주지사 선거를 도왔다.
1981년, 조지 퍼타키는 불과 36세의 나이로 자신의 고향인 픽스킬의 시장으로 출마했다. 그는 현직 시장인 프레드 비나초 주니어를 꺾고 무려 7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2년 후 비슷한 득표율로 재선되며 주 정계에 이름을 알렸다. 1985년, 픽스킬 시장 임기가 만료되자 퍼타키는 뉴욕주 제91번 선거구를 대표하는 주 하원의원에 출마해, 현직 의원 윌리엄 J. 라이언(William J. Ryan)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1992년까지 총 4선 하원의원을 기록했고, 1992년 선거에서 체급을 높여 주 상원의원으로 출마, 당선되었다. 조지 퍼타키는 뉴욕주 의원을 지내며 재정 보수주의, 사회 온건주의적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2.2. 뉴욕주지사로 당선되다
조지 퍼타키는 불과 초선 주 상원의원이었기 때문에 1994년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될 확률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상원의원 알 다마토(Al D'Amato)가 출마를 포기하고 조지 퍼타키를 지지하면서 퍼타키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알 다마토는 조지 퍼타키가 출마해야 재정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인 표를 흡수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지 퍼타키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조지 퍼타키의 유일한 경쟁자는 퍼타키와 달리 당내 보수파에 속했던 허버트 런던(Herbert London)이었다. 그러나 허버트 런던은 자금력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뉴욕 주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강경한 보수 정책을 내세워 경선에서 72% 대 22%로 퍼타키에게 격파당했다.퍼타키가 본선에서 상대한 민주당 후보는 4선에 도전하는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였다. 마리오 쿠오모는 압도적인 자금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여론조사에서 퍼타키에 대항해 10%p 우위를 보였다. 그러나 뉴욕 주민들은 이미 3선이나 임기를 채운 마리오 쿠오모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지 퍼타키는 리 애트워터의 전술을 이용해 마리오 쿠오모를 임기 12년 동안 범죄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주지사라고 공격했다. 특히 쿠오모 주정 시절 가석방되어 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된 연쇄살인마 아서 쇼크로스(Arthur Shawcross)는 공화당의 단골 광고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선거전의 결과, 놀랍게도 조지 퍼타키는 초기 여론조사의 열세를 뒤집고 3.34%p, 약 15만 표차이로 현직 주지사 마리오 쿠오모를 꺾고 당선되었다. 무명의 초선 주의원이 민주당의 유력 대권주자이자 3선 주지사를 꺾은 것은 전국적인 뉴스 거리가 되었다. 마리오 쿠오모의 패배는 텍사스 주지사 앤 리처즈의 패배와 더불어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거둔 압승인 "깅리치 혁명"의 상징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다.[2]
2.3. 뉴욕주지사 (1995~2006)
당선 될 때는 다소 보수적인 수사를 취했지만 조지 퍼타키는 뉴욕 주지사로 매우 온건한 보수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그는 경제와 범죄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고, 마리오 쿠오모 주정 시절 폐지된 사형제를 복원시키고 소득세를 크게 낮췄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민주당과 크게 다를바 없는 정책을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그는 뉴욕주지사로서 전국에서 가장 강경한 총기 규제법을 통과시켰으며,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 환경 기금을 조성했고, 낙태를 지지하는 친-선택 진영 주지사였으며, 성적 지향 비차별법(차별금지법)에 서명했다.[3] 공공 의료 서비스를 확충한 퍼타키 주지사의 정책은 미국 대표 진보 언론인 뉴욕 타임스에게서도 칭찬받았다. 이 때문에 주 하원이 압도적인 민주당 우세였음에도 퍼타키 주지사는 무난한 주정을 이끌어냈다.그가 뉴욕주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뉴욕주의 신용 등급은 3단계나 상승했으며, 치안 수준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조지 퍼타키와 뉴욕시장 루디 줄리아니는 크게 악화된 뉴욕의 치안 상황을 강력하게 개선했는데, 1995년 그의 임기 시작 당시 뉴욕주는 전국에서 6번째로 위험한 주였지만 2007년 퇴임할 때는 7번째로 안전한 주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조지 퍼타키는 1998년과 2002년 주지사 선거에서도 상대 민주당 후보를 꺾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98년, 02년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는 뉴욕시의 4개 자치구(브롱스, 퀸스, 맨해튼, 브루클린)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퍼타키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을 정도로 퍼타키 주지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그는 루디 줄리아니 시장과 함께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했다. 비록 "미국의 시장"이라 불린 루디 줄리아니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퍼타키는 현명한 대응으로 9.11을 잘 수습하여 인기가 높아졌고 1994년 주지사 선거에서 약속한 재선 제한을 어기고 3선에 도전했다. 비판 여론도 많았지만 퍼타키 주지사의 인기는 좋았기 때문에, 이 선거에서도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이론상으로 2006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4선을 할 수 있었지만, 4선은 무리라고 생각한 뉴욕 주민들은 그의 4선을 지지하지 않았고 2005년 여론조사에서 엘리엇 스피처 민주당 후보에게 근소하게 밀릴 것으로 예상되자 그는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조지 퍼타키가 은퇴하자마자 뉴욕주 공화당의 지지율은 급락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까지 겹쳐져 2006년 주지사 선거에서 66% 대 30%로 참패하고 만다.
2.4. 대권 도전과 포기
주지사 은퇴 후, 조지 퍼타키는 몇번이나 공화당의 유력 대권 주자로 여겨졌다. 밋 롬니, 크리스 크리스티와 더불어 비교적 최근에 민주당 우세주에서 승리를 거둔 유능한 주지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둘과 달리 퍼타키는 거의 민주당 지지 성향에 가까울 정도로 진보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유의미한 수치를 기록하지 못했다.2010년, 조지 퍼타키는 힐러리 클린턴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뉴욕 상원의원에 출마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공화당 지도부가 탐탁지 않아함에 따라 출마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6일, 2012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밋 롬니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201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조지 퍼타키는 존 케이식과 함께 당내 중도파를 대표하는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2012년, 2010년과 마찬가지로 지지율이 아주 저조했고 2~3% 선에서 그치자, 2016년 1월 마르코 루비오와 존 케이식을 지지하며 후보직을 사퇴하게 된다.
2020년 대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조 바이든도 지지하지 않았다.
2022년 미국 중간선거에서는 리 젤딘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젤딘은 퍼타키와 달리 민주당 현직 주지사를 상대로 격차를 크게 좁히기는 했지만 당선되지는 못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 미국 뉴욕주 픽스킬 시장 선거 | 픽스킬 | | 3,537 (70.22%) | 당선 (1위) | 초선 |
1983 | 미국 뉴욕주 픽스킬 시장 선거 | 3,622 (73.63%) | 재선 | |||
1984 | 미국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 뉴욕 91구 | 23,604 (52.88%) | 초선 | ||
1986 | 미국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 18,950 (62.34%) | 재선 | |||
1988 | 미국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 31,718 (74.45%) | 3선 | |||
1990 | 미국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 | 21,980 (92.42%) | 4선 | |||
1992 |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 | 뉴욕 37구 | 67,893 (54.57%) | 초선 | ||
1994 | 미국 주지사 선거 | 뉴욕 | 2,538,702 (48.79%) | 초선 | ||
1998 | 미국 주지사 선거 | 2,571,991 (54.32%) | 재선 | |||
2002 | 미국 주지사 선거 | 2,262,255 (49.40%) | 3선 |
4. 여담
- 토마스 E. 듀이 이후 처음으로 나온 비(非) 뉴요커 뉴욕 주지사이다. 뉴욕 주지사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업스테이트 뉴욕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후임자들도 모두 뉴요커였지만, 다시 업스테이트 뉴욕 출신인 캐시 호컬이 주지사가 되면서 듀이 이후의 유일한 비 뉴요커 주지사라는 기록은 깨지게 된다.
[1] 헝가리 이민 1세대이다. 헝가리식 이름은 퍼터키 야노스(Pataki János / 헝가리는 성이 이름 앞으로 감).[2] 마리오 쿠오모는 북부 민주당원들에게, 앤 리처즈는 남부 민주당원들에게 차기 대권주자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하루아침에 유력 대권주자를 두명이나 잃게 되었다. 거기다 40년동안 민주당이 지배하던 하원도 공화당에게 넘어갔다. 이 공로(?)로 뉴트 깅리치는 1995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다.[3] 다만 동성혼에는 반대했다. 애초에 이건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민주당 내에서도 찬반 양론이 격렬한 사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