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주 뉴욕시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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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2008년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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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 존 매케인 | 당선 | |||||
공화당 | 밋 롬니 | ||||||
공화당 | 마이크 허커비 | ||||||
공화당 | 론 폴 | ||||||
공화당 | 프레드 톰슨 | ||||||
공화당 | 앨런 키스 | ||||||
공화당 | 던컨 헌터 | ||||||
공화당 | 루디 줄리아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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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 짐 길모어 | ||||||
공화당 | 톰 탄크레도 | ||||||
공화당 | 토미 톰슨 |
1972 · 1976 · 1980 · 1984 · 1988 · 1992 · 1996 · 2000 · 2004 · 2008 · 2012 · 2016 · 2020 · 2024 |
<colbgcolor=#003585><colcolor=#fff> 제107대 뉴욕주 뉴욕시장 루돌프 윌리엄 루이스 "루디" 줄리아니 Rudolph William Louis "Rudy" Giuliani | |||
출생 | 1944년 5월 28일 ([age(1944-05-28)]세) |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 |||
현직 | 줄리아니파트너스 회장 | ||
재임기간 | 107대 뉴욕주 뉴욕시장 | ||
1994년 1월 1일 ~ 2001년 12월 31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585><colcolor=#fff> 조부모 | 할아버지 로돌포 줄리아니 할머니 에반젤리나 줄리아니 | |
부모 | 아버지 해롤드 안젤로 줄리아니 (1908~1981) 어머니 헬렌 줄리아니 (1909~2002)[1] | ||
배우자 | 레지나 페루지 (1968년 결혼 1982년 이혼) 도나 하노버 (1984년 결혼 2002년 이혼) 주디스 네이선 (2003년 결혼) | ||
자녀 | 아들 앤드루 줄리아니[2] 딸 캐롤린 줄리아니[3] | ||
친척 | 외삼촌 레오 다반조 | ||
학력 | 맨해튼 칼리지 (정치학 / 학사)[4] 뉴욕 대학교 (법학 / J.D.) | ||
정당 | (1975년 이전) (1975~1980) (1980~현재)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178cm[5] | ||
별명 | 미국의 시장(America's Mayor), 9.11의 시장(Mayor of 9/11)[6], 시장의 9.11(9/11 of Mayor)[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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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검사 출신 정치인.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제 107대 뉴욕시장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공화당 내에서 대표적인 친트럼프 계열 정치인으로 꼽혔다.2. 생애
2.1. 초년기
1944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계이다. 그의 집안 사람 중에는 소방관이나 경찰관도 있었지만 범죄자도 있었는데 줄리아니의 아버지는 폭력 사태에 휘말려 그 유명한 싱싱 교도소에서도 수감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석방된 후 본인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취직하여 일을 했다고 한다. 줄리아니 본인은 맨해튼 대학과 뉴욕 대학교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2.2. 연방 검사 시절
로스쿨을 수료한 후 뉴욕 남부 연방 지방 법원에서 서기를 맡아 1970년에는 연방 검찰에 임관되었다. 그 후에는 사법 부차관, 사법 차관의 수석 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당시에 그는 민주당원으로 활동했고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법무 차관보로 발탁되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포드가 지미 카터에게 패배했을 때는 줄리아니도 법무부에서 퇴임하고 변호사가 되었다.1980년 공화당에 입당했고, 1981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출범하면서 법무부의 넘버 3에 해당하는 사법 차관에 임명된다. 1983년 뉴욕남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임명되어 마피아 소탕 작전을 진두지휘하며 뉴욕 5대 패밀리의 보스 등 11명을 기소했고 1985년~1987년에 진행된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앤서니 살레르노 같은 거물 마피아 인사들에게 100년형을 선사하고 조직을 소탕하면서 크게 유명해졌다.[8][9]
검사 시절에는 월 스트리트의 큰 손인 이반 부스키와 '정크 본드의 왕'이라고 불리는 투자 은행가 마이클 밀켄을 내부자거래로 고발하고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 밖에도 마크 리치 등의 거물 투자자를 내부자 거래로 기소했다. 암흑가에도 철퇴를 가해 레이건 행정부가 전개했던 이른바 박멸 작전에서는 줄리아니가 선두에 서서 "뉴욕 5대 패밀리"라고 불리는 마피아 대 검거 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감비노 패밀리의 보스였던 폴 카스텔라노 등 보스들을 차례로 기소하고 구속했다. 마피아 위원회 재판이라고 부른다.
줄리아니는 사건마다 언론에 등장하고 인지도가 상승했다. 1989년 에는 공화당 소속으로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민주당 후보인 데이비드 딩킨스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2.3. 뉴욕시장 시절
1993년 다시 시장 선거에 출마해 현직이었던 데이비드 딩킨스(1927 ~ 2020)를 누르고 당선되어 1994년 1월 1일 제 107대 뉴욕 시장에 취임했고, 1997년 선거에서 재선되어 2001년 12월 31일까지 재직했다. 줄리아니의 정치 경력 중 최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시장이 된 이후 줄리아니는 뉴욕 치안을 크게 안정시켰으며 마피아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했다. 이탈리아계 마피아뿐만 아니라 아시아계 범죄 조직들도 집중적으로 단속했으며 특히 마피아들의 주요 사업 수단인 성매매를 집중적으로 단속했다. 경찰 내부도 대대적으로 개혁해 많은 부패 경찰들을 경질, 처벌했고 뉴욕의 명물인 택시도 대대적으로 교체했다.
실제로 줄리아니가 시장으로 있던 시절 뉴욕의 범죄율은 대폭 감소하였다. 찬반론이 있지만, 깨진 유리창 이론의 실제 적용 사례로도 유명하다. 줄리아니는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크게 범죄율을 감소시킨 시장으로 등재되어 있다.
반면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경찰에게 권한을 크게 부여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99년 2월 4일, 흑인이자 기니 이민자 출신인 아마두 디알로를 수배자로 오인해 4명의 백인 경찰이 총 41발을 쏴 죽인 사건이다. 당시 줄리아니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비유하기도 했다.
치안 개선과 함께 줄리아니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이 바로 대대적인 재개발이었다. 지금은 뉴욕의 대표적 관광지인 타임스 스퀘어도 한때는 우범지역 취급을 받았지만 줄리아니 시절 치안이 크게 개선되며 관광객, 가족, 일반 소비자들이 심야까지도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로 인식이 바뀌었다. 타임스 스퀘어의 치안이 안정되면서 관광객이 증가하고 이는 뉴욕 시 세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재개발을 위해 1928년 생겨난 뉴욕의 임대료 상한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임대료 상한제 폐지 여론이 높았지만 민주당 시장이 쭉 뉴욕 정권을 잡다보니 시행되지 못하다가 줄리아니가 1995년 전격적으로 폐지한 것. 1995년 임대료 상한제 폐지와 더불어 대대적인 할렘가 대청소에 들어가 2017년 현재 할렘과 브루클린은 재개발이 상당히 진척되고 있다.[10]
이러한 업적으로 1997년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공화당 소속으로 뉴욕 시장 선거에서 2선을 기록한 것은 1941년 피오렐로 라과디아 이후 무려 56년만의 일이었다.
1999년 4월에는 2000년에 치러지는 뉴욕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 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상대 민주당에서 출마가 예상되던 사람은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줄리아니는 현직 퍼스트 레이디가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인데다가 힐러리가 뉴욕 출신도 아니면서 선거만을 위해 뉴욕으로 주소만 옮긴 뜨내기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11] 이후 1년 간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가 어떻게 흘러갈지 많은 관심이 모여졌는데 줄리아니는 2000년 4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두 번째 아내가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폭로를 하면서 이미지를 구겼고, 과거 병역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전립선암 진단을 받아 본인의 건강 문제까지 생겼다. 이를 견디지 못한 그는 2000년 5월 불출마 선언을 했다. 명목상으로는 전립선암으로 건강 문제가 있고 뉴욕 시정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힐러리 클린턴의 지지율이 훨씬 높아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데다가 불륜 스캔들 등으로 인해 이미지가 나빠졌기 때문인 것으로[12] 알려졌었다. 이후 9.11 테러로 훌륭한 시장이라는 이미지가 남게 되면서 불출마를 결정한 것은 그의 정치적 커리어를 오히려 연장시킬 수 있는 적절한 선택으로 평가되었다. 줄리아니가 불출마하면서 공화당에서는 릭 라지오 연방 하원의원이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릭 라지오는 2000년 11월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12%p 차로 패하고 말았다.
9.11 테러 시점의 루디 줄리아니[13] |
이후 줄리아니는 암치료와 시장 업무를 병행하며 지내고 있었고 뉴욕 시장 임기는 2기로 제한되기에 2001년 선거에는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시장 임기가 4개월도 채 남기 전인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라는 전무후무할 사건이 터져 뉴욕이 대혼란에 빠졌다.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사태를 잘 수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당시 그는 전립선암으로 투병중이었기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항암제 약을 먹어가며[14] 사태를 수습해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뉴욕 주지사였던 조지 퍼타키, 후임 뉴욕 시장으로 선출된 마이클 블룸버그와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해 아리엘 샤론 총리를 만나기도 했다.
같은 해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으며[15] 다음 해인 2002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2.4. 뉴욕시장 퇴임 이후
2001년 12월 31일자로 시장 임기가 종료되었으며, 그는 미국의 대표 시장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2004년 대선 당시 조지 W. 부시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중도 온건파 성향으로 공화당 후보로 선호도가 높아 가장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지목되었다.[16] 그런데 예비선거 초반부터 특이한 선거전략을 구사했다. 보통 초반부터 승기를 잡아 대세를 잡는데 그는 초반 예비선거와 코커스보다는 플로리다 예비선거에 집중하였다. 다른 후보들이 먼저 열리는 아이오와 코커스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 집중하는 대신 그는 플로리다에 주로 머물며 플로리다에서 승기를 잡을 계획을 세웠다. 초반 선거가 치러지는 주보다 인구가 많은 플로리다에서 많은 표를 얻어서 치고 올라가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맨 먼저 치러진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6위에 그치며 굴욕을 맛봤다. 아이오와 코커스에서는 마이크 허커비가 의외의 승리를 거두었다. 존 매케인이 1위를 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도 4위로 뒤쳐졌지만 계속 플로리다에 집중하는 플로리다 전략을 구사했다. # 그러나 타 후보들에게 계속 지지율이 밀렸으며, 결국 플로리다 예비선거에서도 3위에 그치며 사실상 회복 불능 상태가 되었다. 경선 직전까지 지지율 1위였던 그가 도박같은 선거전략으로 완전히 몰락한 것은 미국 선거사에 남을 연구사례라는 지적까지 나왔을 정도.# 선거전략의 실패도 문제였지만, 과도한 9.11 테러팔이가 독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를 두고 당시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던 조 바이든 상원의원은 줄리아니의 캠페인이 "A word, a verb, and 9/11"[17]이라는 촌철살인 비평을 남겼다.2016년 대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고 그가 당선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트럼프와 정치 성향이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상류층 뉴요커로서 과거부터 트럼프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인지 트럼프를 적극 지지했고 이후 트럼프의 최측근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법률 고문으로 일했는데, 2018년 6월 7일(현지시간 6월 6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비즈니스 회의에 참석해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 일정을 다시 잡아달라고 엎드려서 애원했다." 란 발언을 했다. 보통 다른 나라라면 이에 항의하고 회담을 취소할 수준의 막말인데, 북미회담을 앞두고 이런 발언, 특히 '수령 무오류 원칙'을 고수하는 북한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김정은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놓고 회담에 참석하겠다는 트럼프의 의중이 담긴 발언일 가능성도 있다. 높은 고위직이 수사적으로 좋게, 혹은 애매모호하게 좋은 뜻으로 말하고 밑에 수하가 돌출발언으로 고위직의 본심을 암시하는 것은 외교가에서는 흔한 일이다. 일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트럼프를 탄핵 위기에 빠뜨린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몸통으로 지목되어 논란이 되었다. 게다가 마두로와 통화했다는 것도 드러나 도널드 트럼프의 대베네수엘라 정책에 대한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스캔들' 줄리아니, 베네수엘라 마두로와도 통화
2020년 6월 20일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핵심 인물인 줄리아니 등 트럼프의 최측근 수사를 지휘해온 제프리 버먼 뉴욕 남부지검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2.5. 2020년 미국 대선 이후, 뉴욕의 영웅에서 몰락자 신세로
2020년 10월 11일, 헌터 바이든의 노트북에 담긴 마약 복용과 성관계 장면이 담긴 1,000장 이상의 사진, 우크라이나 스캔들 관련 이메일 등을 뉴욕 포스트에 넘겼다. 헌터 바이든이라고 자칭하는 사람[18]이 자신의 고장난 노트북 3대를 델라웨어주에 있는 컴퓨터 수리점에 맡겼는데, 수리비를 지불하지도 않았고 노트북을 찾으러 오지도 않았다. 컴퓨터 수리점 주인, 맥 아이잭은 노트북 안에 담긴 내용을 발견하고, 살해 위협이 두려워 FBI와 줄리아니에게 각각 전달한 것. 뉴욕 포스트의 기사를 네티즌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하자,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업로드를 삭제했고,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거대 IT 기업의 언론사찰이라며 잭 도시 트위터 CEO에게 소환장을 발부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2020년 10월 22일, 영화 보랏 속편 제작진들이 진행한 가짜 인터뷰에 속아넘어가 여성 기자(실제론 보랏2에 출연하는 배우) 앞에서 바지 속에 손을 넣는 모습이 공개되고 말았다.# 실제로 트럼프의 바이든 네거티브 전략 이후 엉뚱하게도 줄리아니 동영상이 급상승 검색어에 올랐다. 결국 이 건으로 골든 라즈베리 남우조연상까지 수상하는 위업을 달성하고 말았다.
2020년 대선 이후 트럼프를 따라 부정선거 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거액 수임료를 위해 대선 결과 불복 소송을 부추기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부정선거 음모론을 열심히 전파하였지만 결국 트럼프에게 해고되었다.# 트럼프의 변호인으로 일하는 동안에 수임료로 하루에 2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2월 18일 스티브 배넌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러시 림보와의 일화를 이야기하다가 골프 선수 미셸 위를 성희롱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미셸 위는 당연히 '불쾌하다'며 비판하였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통화 스캔들 관련해서 압수수색을 당하게 되었다. #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당일에도 부정선거 수사 촉구에 나섰다. 이 일로 뉴욕 변호사회에 의해 변호사 직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었다.# 그 뒤, 워싱턴 D.C.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캐럴 리어닉과 필립 러커가 곧 출간할 저서 '나 홀로 고칠 수 있어: 도널드 트럼프의 재앙적 마지막 해{I Alone Can Fix It: Donald Trump's Catastrophic Final Year}'에서 대선 당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아무런 근거 없이 승리 선언을 종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19]
루디 줄리아니의 머그샷 |
루디 줄리아니 본인은 트럼프에게 SOS를 치고 있지만 트럼프는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있으며, 유튜브 후원금으로 근근히 배상금을 내고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정체불명의 정력제를 판매하는 등의 행보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2024년 7월 3일, 뉴욕주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었다.#
2024년 10월 1일, 딸 캐롤라인 줄리아니가 '트럼프는 우리 아버지를 파괴했고 미국도 파괴할 것'이라며 카멀라 해리스 투표를 호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
3. 기타
- 현재는 미국 극우파의 상징 같은 인물이지만 의외로 뉴욕시장 시절에는 존 케이식보다도 중도적이었다. 1994년 뉴욕주지사 선거 때 자당 후보인 조지 퍼타키 대신 민주당 후보인 마리오 쿠오모를 지지했을 정도.
- 2022년 2월 복면가왕의 미국판인 예능 더 마스크드 싱어에 출연했는데, 그가 정체를 드러낼 때 심사위원 켄 정과 로빈 시크가 항의의 표시로 자리를 박차고 녹화 무대를 떠난 바 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당선 여부 | 비고 |
1989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 870,464 (47.84%) | 낙선 (2위) | |
1993 | 뉴욕시장 선거 | 930,236 (50.90%) | 당선 (1위) | 초선 | ||
1997 | 뉴욕시장 선거 | 783,815 (57.74%) | 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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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전성은 다반조.[2] 1986년 1월 30일 출생. 강경 공화당원으로 듀크 대학교를 졸업했고 캐시 호컬에 맞서 2022년 11월에 열린 뉴욕 주지사직에 출마했지만 경선에서 리 젤딘에게 밀려 떨어졌다.[3] 1989년생. 아버지, 오빠와 달리 강성 민주당 성향이고 아버지와 오빠를 혐오한다.[4] 부전공은 철학[5] 물론 현재 나이를 감안하면 많이 줄었다[6] 앞의 두 별명은 9.11 테러 당시의 헌신적인 행보로 붙은 긍정적인 의미의 별명이다. 이 별명을 붙여준 사람은 무려 오프라 윈프리.[7] 뉴욕시장 퇴임 이후 여러 범죄에 휘말리고 트럼프의 호위무사로 활약하며 이미지가 엄청나게 나빠지자 붙은 별명이다.[8] 이때 일을 말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공포도시>에서 루디 줄리아니는 어렸을적 이민자인 할아버지나 다른 가족분은 미용사,재단사였는데 장사가 좀 잘되자 마피아가 찾아와 갑자기 30%를 보호비로 달라고 했다고 한다. 거부하면 가게에 불을 지르고 너도 맞고 네 아들도 맞는다고 협박을 했다고 하며 이때 일화로 마피아를 반드시 소탕해야겠다는 개인적인 감정도 있었다고 한다.[9] 최근까지 마피아 전문 연방검사로 유명한 한국계 미국인 '조셉 한'이란 인물도 있다.[10] 한편 맨해튼에 새로운 야구장을 지으려던 계획은 철회되었다.[11] 힐러리 클린턴의 원래 연고지였던 아칸소에서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비꼬기도 하고 아칸소로 건너가 마이크 허커비 당시 주지사를 위한 후원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12] 결국 시장직 임기가 종료된 후 두 번째 이혼 절차를 완료하고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13] 좌측은 조지 퍼타키 주지사,우측은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14] 이후 완치되었다.[15] 9.11 테러에서 노고를 다한 뉴욕시 공무원, 소방관, 경찰관, 시 당국 등을 모두 대표하여 선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무엇보다 9.11 테러를 누구보다 잘 대표하는 인물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는 것은 타임지라고 하더라도 감당이 안 되었을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밀리는 줄리아니가 받았다는 평가가 있다. 히틀러는?[16] 민주당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목되었다. 그래서 2000년 이루어지지 못한 줄리아니 대 힐러리 매치가 성사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광탈하면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17] 단어 몇개와 9.11 테러를 조합한 것이 줄리아니의 전부라며, 줄리아니가 과도하게 9.11 테러 시절 일화를 활용하는걸 비판한 것이다. 의역하면 "기승전9/11" 정도로 보면 된다.[18] 민주당 측에서는 공화당에서 헌터의 개인 자료들을 해킹해 빼낸 후 가짜 헌터를 내세워 자료가 담긴 노트북을 맡긴 것이라고 주장한다.[19] 또한 이 저서는 트럼프가 성공적으로 재선된 후에 한미동맹 파기와 NATO 탈퇴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고 한다. 게다가 조지 플로이드 소요 사태 당시 군병력 차출 문제로 앙심을 품고 경질하려던 계획도 폭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