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 |||
兔 | 死 | 狗 | 烹 |
토끼 토 | 죽을 사 | 개 구 | 삶을 팽 |
1. 개요
'토끼가 죽으면 개는 삶긴다'[1]는 뜻으로, 어떤 일이 성취된 뒤에 그 일의 성취에 있는 힘을 다하여 애를 쓴 사람을 의리 없이 내치는 경우를 가리키는 고사성어이다.《사기》〈월왕구천세가〉에서 '교토사주구팽(狡兔死走狗烹: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긴다.)'이라고 나온다. 이 말이 '토사구팽'으로 축약된 것. 범려, 문종 등의 헌신으로 월왕 구천이 마침내 중원의 맹주가 되자, 범려가 갑자기 월나라를 떠나면서 문종에게 '토사구팽' 당하기 전에 당신도 월나라를 벗어나라고 충고한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같은 표현이《사기》〈회음후열전〉에서도 나오는데, 이때는 유방에게 지위를 강등당한 한신이 유방을 원망하면서 이 말을 한다.
토사구팽의 처지에 이른 것을 '팽 당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2]
2. 유래
范蠡遂去, 自斉遺大夫種書曰:「蜚鳥尽, 良弓蔵;狡免死, 走狗烹. 越王為人長頚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
범려가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길, “날아다니는 새가 다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이라네. 월왕 구천은 목은 길고 입은 뾰족하여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가?”라고 했다.
《사기》〈월왕구천세가〉
춘추시대 월나라의 군사 범려의 말에서 유래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나라의 왕 구천은 고생할 때는 함께 고락을 나누지만 자신이 부귀해질 때면 교만해져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범려는 구천이 천하의 맹주에 오른 후 자신을 포함한 공신들을 죽일 것이라 미리 예측해서 월나라를 떠났는데, 이때 문종에게 함께 물러나자고 권하면서 위의 말을 전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문종은 병을 핑계로 몸을 사리긴 했으나 끝내 월나라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범려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종은 구천에게 죽임을 당했다.[3]범려가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길, “날아다니는 새가 다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이라네. 월왕 구천은 목은 길고 입은 뾰족하여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가?”라고 했다.
《사기》〈월왕구천세가〉
이후 거의 똑같은 표현이 《사기》〈회음후열전〉에 나온다. 사실 이 쪽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중국을 통일한 유방은 일등공신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봉하였으나, 그의 세력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실제로 괴통이 한신에게 문종과 범려의 이야기[4]를 들려주며, '군주를 떨게 하는 지혜와 위세를 지녔고, 상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정도의 큰 공로를 가지고 있는 자는 위태롭다.'면서 유방을 배반할 것을 권하였으나, 한신은 유방과의 의리를 지킬 것이라며 괴통의 제안을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괴통의 말대로 유방은 너무나 큰 공로를 세운 한신을 계속해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결국 유방은 종리매를 핑계로 한신을 사로잡고는 풀어주면서 한신의 지위를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이에 한신이 유방을 원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信曰:「果若人言, 『狡免死, 良狗亨;高鳥盡, 良弓蔵;敵國破, 謀臣亡.』天下已定, 我固當亨!」
과연 사람들 말대로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개[5]는 삶아지고, 높이 있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지며, 적국을 깨뜨리면 지략을 쓰는 신하는 망한다.’라는 것과 같구나.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진정 삶음(亨)을 당하겠구나!
《사기》〈회음후열전〉
이후 한신은 유방이 자기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늘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아가지 않고 수행하지도 않았다. 또한, 명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한신은 회음후로 강등된 뒤 자신이 강후(絳侯)나 관영(灌嬰) 등과 같은 반열에 있다는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했고, 남몰래 유방에게 불만을 품고는 밤낮으로 원망하였다. 몇년 뒤 진회가 모반을 꾀할 때 한신은 내부에서 호응하려다가 유방의 아내 여후에게 그 계획이 들통나서 역으로 사로잡혔고 곧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다.[6]과연 사람들 말대로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개[5]는 삶아지고, 높이 있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지며, 적국을 깨뜨리면 지략을 쓰는 신하는 망한다.’라는 것과 같구나.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진정 삶음(亨)을 당하겠구나!
《사기》〈회음후열전〉
3.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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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원인
언급된 사례들을 보면 대충 감이 오겠지만, 역사상 존재했던 군주들의 토사구팽은 대다수가 전제군주제였던 당대 국가들의 특성상 왕권을 위협하고 나라를 뒤흔들 권신의 등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전제군주제라고 해서 언제나 왕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의 상당수를 명망 높은 신하들이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이들은 좋게 보면 나라를 위해 많은 업적과 공을 남긴 사람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군주의 권력에 잠재적인 위험 요소이기도 하며, 심하면 군주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아예 실세로 들어앉을 위험성까지 있다. 창업군주 본인이야 워낙 쌓아놓은 카리스마와 권력이 막강해서 본인 대에서 바지사장이 될 가능성은 낮지만, 후대에서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당장 한고제가 죽자 여후에 의해 왕조가 여씨로 바뀔 뻔했고, 조위는 카리스마와 정치력을 갖춘 선대 군주들이 요절하고 능력 없는 후세대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실권을 빼앗기고 왕조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그랬기 때문에 정치적 안목이 있는 군주들은 공이 있는 신하들을 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없이 경계했으며, 여러 방법을 통해 이들을 견제하고 조정에서의 권력 균형을 끊임없이 맞추려 시도하였다.특히 유명한 것은 새 왕조를 개창한 창업군주들의 공신 숙청 사례인데, 당연하지만 새 왕조를 개창하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다양한 동지들의 보조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니만큼, 새 왕조의 공신들은 여느 때의 권신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특히 한고제나 명태조 주원장처럼 출신이 비천하여 신하들에게 얕보이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라면 더더욱 위협적일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역사상 어느 군주와 비교해도 출신이 비천했던 주원장의 경우 토사구팽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반면 한국사에서는 중국과 달리 창업군주에 의해 공신 숙청이 이루어진 사례는 의외로 없다. 고려 태조 왕건도, 조선 태조 이성계도 스스로 공신 숙청을 감행한 사례는 없으며, 후대의 광종이나 태종 대에서야 공신 숙청이 이루어졌다. 신라 역시 제2건국자(통일 국가를 수립)인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이 아닌 신문왕에 의해 숙청이 이루어졌다.
5. 피하는 법
공훈을 많이 세운 사람이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토사구팽을 반드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행동하면 반란 전의 기초공사 차원에서 민심을 얻기 위해 미리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쓰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그건 그거대로 의심을 받는다. 왕전은 초나라 정벌 때 진시황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소인배스럽게 보이려고 저택과 땅을 요구했고, 소하 역시 일부러 백성들에게 진상짓을 하며 소인배 코스프레를 해서 자신에 대한 의심을 떨쳐냈다. 아니면 범려처럼 싹 정리하고 은둔하는 방법도 있지만, 군주가 극단적일 경우, 가령 주원장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선비들조차 불충이라는 이유로 색출해서 죽여버렸기 때문에 은둔이라는 최후의 방법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장 왕전은 초나라를 공격하면서 일부러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면 넓은 논밭과 화려한 저택을 달라고 계속 졸라댔는데, 의심이 많은 진시황의 성격을 간파하여 "그저 재물과 노후의 편안한 생활에만 욕심을 부리고 정치에 큰 뜻은 없는 늙은이"로 보이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당시 왕전의 작전은 장기전이었는데, 소모하는 시간도 길고 요구되는 병력도 많은 터라 위화도 회군 마냥 쿠데타가 일어날까봐 정작 자기 군주인 진시황이 견제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으로, 실제로 성공하여 작전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창립한 일등공신 소하도 직위가 승상에 이르러서도 사치를 부리지 않는 청렴결백한 생활을 했으나, 유방은 거대한 권한을 가졌던 소하를 수시로 의심하면서도 비위를 살살 맞춰주려 노력했다. 유방은 오히려 한신은 은근히 만만하게 본 반면 소하의 변절은 죽기 직전까지 두려워했다. 소하는 4년동안 소년병을 동원하고 노인에게까지 수레를 끌게 시키면서 후유증이 3대에 이를 정도로 자원을 뽑아냈는데, 아무리 항우의 만행이 있더라도 이쯤 되면 소하에게 불만이 향할만한데도 오히려 인망이 하늘을 찔렀다. 모르긴 몰라도 유방이 기겁할 만큼 선동술에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 소하가 의심받았던 것은 결국 소하가 한나라의 행정 총책임자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소하가 기침 한번만 해도 행정이 올스톱이 되고 반대로 소하가 맘만 먹으면 쥐어짜서라도 유방에게 필요한 것을 보급할 수 있었다. 괜히 유방이 고집을 부려서라도 공신 1순위로 소하를 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안해진 소하는 주위사람들의 충고로 가족 중 젊은 남자를 죄다 전쟁터에 보내는 등 온갖 노력 끝에 유방을 안심시킬 수 있었고, 통일 후에도 어느 정도는 사치를 부려야 유방의 의심을 안 산다고 하자 그 말에 따른다. 나중에 유방이 죽기 직전에 소하를 의심하여 감옥에 잠깐 가두는데, 주변 사람이 소하의 결백을 간언하자 유방은 소하를 가둔 걸 후회하고 풀어준다.
반대로 한신은 천하통일 후 찌질이 시절에 이런 저런 일이 있었던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모욕한 사람은 꾸짖은 뒤 풀어주고, 밥을 나누어준 노파에겐 보답을 내렸는데, 유방과 여후가 '저놈이 갑자기 멋진 짓으로 인기를 끌려 하는 게 수상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는 거 아냐?'하고 의심했다는 말이 있다. 보다시피 소하와 한신은 어그로도, 처신도 급수가 다르다. 소하는 유방이 전쟁터에서 항우와 맞서 싸우느라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유방이 필요한 것을 전부 보내줬고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어떤 처신도 잘 해낸 덕에 제국의 충신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한신은 그렇잖아도 온갖 어그로를 다 끈데다가 의심받을 짓만 골라서 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저서 '로마사 논고' 1권 제 29장과 30장에서 토사구팽의 구체적 사례와 원인, 대상자가 이를 피하는 방법을 다뤄 일종의 '토사구팽 가이드'를 썼다. 군주정의 경우 군주의 시기심과 역모에 대한 불안감, 공화정의 경우 쿠데타에 대한 우려가 토사구팽의 원인이라고 보았고 이런 토사구팽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정쩡하게 굴지 말고 공을 세우자마자 권력을 내려놓고 군주에게 엎드리거나, 아니면 아예 군주가 손대지 못하도록 권신이 되는 것이 좋다고 권하고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재물욕을 보이는 게 오히려 꼬투리 잡힐 수도 있다. 어설프게 왕전을 흉내내려 한 난릉왕이 좋은 예시. 다만 이는 단순히 재물욕만 보이려는 게 아니고, 계속된 전투에 병사들 사기도 떨어지고 비축된 물량도 떨어져 그걸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다. 다만 문제는 난릉왕의 혈통이 황족이라는 것까지 포함하다보니 당시 황제였던 고위가 위협을 느꼈던 것.
유능한 모습을 최대한 숨기고 공이 있어도 주군의 덕분이라며 위상을 살려주는 것도 토사구팽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라 하겠지만 군주가 강직한 성품이라면 그게 오히려 거슬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능한 신하, 아첨꾼, 간신 등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이렇게 처세한 신하들은 당대 군주들 생전에는 무사했지만 차기 군주들의 눈에 나서 뒷끝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후한의 등통과 청나라의 화신 등이 그 예시.
결론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주군의 성격에 따라 대처법은 그때 그때 다를 것이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아예 군주의 소원대로(?) 반란을 일으켜주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성공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 없고, 실패하더라도 반역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니 토사구팽은 아니다.
다만 섬기는 군주가 탈법적인 방식으로 집권한 경우 기반이 불안정해서 쉽사리 자기 밑의 사람들을 내치기 어렵기에 토사구팽을 당할 확률이 낮다. 이 경우에는 군주에게 심하게 거슬리거나 지나치게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단 이것도 군주가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어준 공신들을 대체할 수 있는 기반이 없을 때를 전제한다. 가령 세조를 예시로 들자면 한명회, 신숙주 등의 구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이, 구성군, 강순 등의 신공신을 키워 견제하려고 한 바 있다.
6. 긍정적 측면
토사구팽은 비정하고 권력욕에 찌든 군주가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의심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긍정적이고 바른 결과를 맞이하기도 한다. 한신을 예시로, 해당 문서에서도 적혀있듯이, 한신은 따지고 보면 한고제에게 어그로를 대놓고 여러 번이나 끌었던 적이 있는지라 한고제 입장에선 한신은 충신이 아닌, 언젠가 반란을 일으킬 위험분자일 뿐이었으며,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을 움켜쥔 개국공신이 나라를 도로 갈아엎은 경우도 많았다. 특히 세조는 공신들을 많이 봐줬는데, 수령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을 막는데 정말 신경썼던 세조지만 정작 공신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당연히 가장 큰 부패를 저지른 건 공신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전부 도로아미타불.하지만, 다르게 보면 세조 자신부터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인물이니, 그 밑에 모인 이들도 야망이 큰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자신의 장악력만 과신하여 후대를 살피지 않은 세조의 과오이며, 비슷한 과정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 세조의 능력 부족도 한몫했다. 위에도 잘 설명되어 있듯이 비슷한 과정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은 조선의 왕 그 누구보다도 토사구팽에 제일 열심이었던 사람이었다.[7] 그러니 당연히 자기 치세때도 세조같은 꼴 안보고 후대에도 아들인 세종, 손자 문종이 원로 공신들이나 외척의 영향없이 자기 뜻대로 정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한고제나 당태종, 명태조(주원장) 같은 경우 혼란기를 수습하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인물들을 그대로 두기는 힘들었다.
한신의 행적을 보면 야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후세의 시각에서나 그런 거다. 공적 하나만 믿고 내가 죄가 없는데 뭐 어쩌겠어? 하는 마인드로 몸 안사리고 지 꼴리는대로 하니 당사자들에게서 안 사도 될 의심을 사서 위험한 놈으로 찍히고 죽었던 것이다. 반대로 소하는 열심히 꼬리 흔들면서 '안 물어요 주인님' 하면서 어필해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한신은 미친 개마냥 동네방네 다 물어뜯고 다녔으니 팽 당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왕이 사자를 보낸 상황에서 뒤통수를 치거나 왕한테 딜을 거는 등, 사실상 왕의 명령을 씹고 권위를 무시해대면서 어그로를 잔뜩 끌었는데도 내가 뭐 반란 일으킬 것도 아니고 세운 공이 얼만데 이 정도는 괜찮지? 같은 생각이라도 있었는지 눈새짓만 골라서 했다. 그나마 유방이 봐줘서 제 명보다 오래 살았지[8] 어지간해서는 훨씬 일찍 죽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숙청은 자주 있었지만 실제 이들 모두가 토사구팽에 해당된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달리 보면 오히려 토사구팽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단 토사구팽이란 성어 자체를 보면 토사구팽은 이용가치 상실에 있다. 일단 토사구팽의 유래가 되는 일화를 봐도 문종은 병권도 없는 일개 책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용가치 상실이 맞다. 그런데 이를 다른 경우에 적용시키려면 의문점이 생긴다.
1. 대부분의 경우, 왕조들은 천하를 얻었음에도 당분간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북방 유목민족들과의 전쟁도 있고 내부의 반란 같은 것도 비일비재. 즉 무장들이 이용가치를 잃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숙청 작업은 나름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용가치 상실"이라는 전제가 객관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2. 군주들이 과연 "얘는 이용가치가 없으니 버리자"란 생각으로 진행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는 것. 크게 두 가지 경우인데, 공을 세운 부하들이 교만해져서 불법을 행사했거나, 또는 군주들이 부하들에게 위협을 느껴서이다. 즉 개가 집에서 기르는 닭을 물거나, 아니면 주인보고 으르렁거리며 심지어 덤비기까지 한 경우이다. 이건 사냥감이 없어서 개를 버린 것과는 분명 다른 경우다. 이를 제일 잘 설명하는 일례가 한신. 해당 문서 보면 이 놈이 무슨 짓으로 유방의 어그로를 끌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충성심도 별로 없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놈이 분봉왕으로 있으니. |
또한 토사구팽이 너무 강조되다보니 이것을 일종의 클리셰나 필연적인 결과 등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건 황제의 성정에 따라 다르다. 확실히 원조격인 구천, 그리고 끝판왕인 홍무제에는 해당될 수도 있지만, 모든 군주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한나라만 봐도, 한신에 맞먹는 군공을 세운 조참, 관영은 숙청당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조참은 아예 무관은 그만두고 소하 뒤를 이어 승상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고, 관영은 거의 죽을 때까지 대장군 자리를 꿰차고 병권의 일부도 계속 쥐고 있었을 정도로 한이 통일을 한 이후에도 군사적인 일은 고제가 친정한 경우를 제외하면 도맡아 했다. 한신, 팽월처럼 숙청 당한 공신들의 최후가 비극적인 것처럼 부각되어서 그렇지, 전한을 세운 대부분 공신들은 오히려 무난하게 보냈다. 사실 한신과 팽월은 원래 한고제가 거병했을 때부터 함께 했던 창업공신도 아닌 데다가 분봉왕 자리까지 차지했으니 숙청 1순위가 될 게 뻔했다. 그나마 한신은 미운 정이라도 있어서 회음후 자리는 보전했지만 고제와 별로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의심받을 구석은 많았던 팽월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반면 관영같은 이는 창업공신은 아니었지만 분봉왕도 아니었고 철저하게 고제의 신하로서 분수를 지켰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군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아무 탈이 없었다. 이는 명을 제외한 다른 왕조들에도 거의 해당되는 케이스로, 당사자의 처신은 생각 안하고 군주들을 '공을 많이 세운 신하들을 꺼리고(이른바 공고진주) 무조건 숙청하는 냉혈한'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인 것이다.
역사에서도 토사구팽을 안했다가 망한 나라도 있다. 가령 진나라의 경우 진문공 사후 그의 즉위를 도왔던 공신들을 제어하는데 실패해 결국 그 공신들이 나중에 나라를 셋으로 갈라먹었다. 다만 이쪽은 공위에 늦은 나이에 올라 오른지 몇 년 안돼서 죽은 경우라 어쩔 수 없었고 또, 원래 진나라가 다수의 주요 가문들의 연합정권적 성향도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7. 여담
- 영어권에서 토사구팽과 가장 비슷한 단어는 'Plutoed'. 행성 직위를 박탈당한 비운의 왜행성인 명왕성에서 따온 단어다. 미국 학계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억지로 행성 직위를 주었다가 결국 퇴출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이 쪽은 배신 뿐 아니라 명성을 갑작스레 잃은 경우까지 포함하는 좀 더 광범위한 단어다. 더 일반적인 관용어로는 'squeezed orange'가 있다. 시큼달콤한 즙을 다 짜내고 난 오렌지는 쓸모가 없으니 버리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 보신탕의 야만성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감자였던 90년도에 나온 어린이 교육용 서적중에는 개를 '삶는다'라는 표현을 넣는 게 껄끄러웠는지, 개를 팔아버린다는 표현으로 순화시킨 책도 있었다.
- 인터넷에서 흔히 주인공이 동료를, 또는 동료가 주인공을 버리거나 배신했을때 '팽 당했다' 라고한다. 여기서 '팽'은 '토사구팽'의 마지막 단어인 '팽'을 말하는 것. '팽 당했다'는 말이 은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옛부터 써왔던 관용어이다.
8. 관련 문서
[1]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고 오역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狗烹은 '주어+동사'이므로 주어 뒤에 '은,는,이,가'가 나와야 한다. 여기서 狗는 목적어가 아니다. 만약 제일 앞에 가주어가 있다손 치더라도 '토끼를 죽이면 개를 삶는다'가 되어서 문장 자체의 의미가 이상해지므로 틀린 번역이다.[2] '팽 당하다'는 말은, 현대에 와서 줄인 말이 아니라 의외로 한신이 직접 한 말에서 유래했다. 한신은 "天下已定, 我固當亨!(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진정 삶음(亨:팽)을 당하겠구나!)라고 했는데, 여기서 '팽(亨) 당하다'는 말이 나온 것. 亨과 烹은 같은 뜻이다.[3] 해당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여 요약함.[4] 대부(大夫) 종(種)과 범려(范蠡)는 망해가는 월(越)을 존속시키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패자(覇者)로 만들어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렸지만, 자기 몸은 죽게 되었습니다.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도 삶아지게 됩니다. 교분으로 말한다면 당신과 한왕은 장이와 성안군보다 더 친하지 못하며, 충성과 신의로 말한다면 대부 종과 범려가 구천에게 대한 것만 못합니다. 이 두 가지의 일은 거울로 삼을 만하니, 당신께서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5] 원래 범려는 '사냥개(走狗)'라고 말했는데, 한신은 이를 '훌륭한 개(良狗)'로 바꾸었다. 한신은 자기 자신을 '사냥개'라고 불릴 정도의 잔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범려의 말을 바꾸었던 것.[6] 해당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여 요약함.[7] 다만 의외로 죽인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삭탈관직 후 귀양 정도로 끝났다. 태종은 실제로 한국사의 군주를 통틀어도 정치적 살인을 적게 한 편이다. 다만 정치적 살인의 대상들이 대개 형제나 사돈이라 킬방원의 이미지가 세게 박혔을 뿐.[8] 사기적인 유방의 용인술을 생각해보면 야망이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니라 그냥 눈새라는 걸 알아봐서 봐줬을지도. 사실 그게 아니면 누가 봐도 반란분자인 한신의 눈새짓을 적당히 봐준 이유가 설명이 안 된다.